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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서 고생했다면 누가 믿겠어?
2001-03-08

아줌마가 <캐스트 어웨이>를 재미없게 본 이유

<버티칼 리미트> 보다가 졸았다는 지난번 글 때문에 욕깨나 먹었다. 다 재미있게 봤는데 넌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잘난 척하느냐가, 비난의 주된 요지였다. 근데 이번에도 욕먹게 생겼다. 안팎에서 흥행돌풍을 일으킨다는 <캐스트 어웨이>조차 뒤틀리도록 재미가 없었던 거다. 폭설 내리던 바로 그날 아침, 모처럼 딸네서 하룻밤 묵은 모친과 함께 조조할인으로 보았는데, 왜 이리 쓸데없이 길담 하면서 2시간20분을 버틴 딸과는 달리, 모친 또한 남들처럼 꽤나 재미있게 보신 모양이었다. 낭패다. 일없이 놀던 시절 재미삼아 논픽션 서바이벌 스토리들을 어지간히 읽어두었던 터여서 그런지, 이번엔 <버티칼 리미트> 때보다도 재미없는 정도가 훨씬 심했는데. 왜냐라는 물음으로 넘어가는데, 척이 하는 짓이 영 요령부득이었기 때문이다.

모래사장에 통나무로만 ‘HELP’라는 글자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4년 동안이나 캠프 파이어를 꺼트리지 않을 만큼 나무가 풍부한 섬에서, 왜 척은 진작 뗏목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 까짓 양철판이 없어서? 4년 동안 원없이 불때고도 뗏목 너끈히 만들 만큼 나무가 많은 섬에서, 왜 척은 진작 아담한 통나무집 하나 지으려고 들지 않았을까? 동굴이 넘 편해서?(한국 사람들 같으면 전망 좋은 곳에다 통나무집부터 지었을 텐데. 집에 한맺히고 환장한 사람들이니까.)

마실 게 천연 설사약인 코코넛 야자수와 빗물밖에 없는 무인도에서 뭘 그리 잘 마셨기에 바다에 대고 웬 오줌을 저리 오래 누나? 목매달아 죽을 결심을 한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옆에 나무도 많은데 30m 밧줄을 꼬아서까지 절벽 꼭대기로 올라갔을까? 번지 점프가 하고 싶었나? 무엇보다도, 왜 배가 지나가는지를 감시하기에 딱 좋은 바위봉우리 꼭대기를 망루로 삼지 않았을까? 왜 거기다 구조신호를 위한 봉화대 만들 생각을 안 했을까? 그 암봉 벽면에 왜 SOS를 써넣을 궁리를 안 했던 거지? 근데 남태평양에는 바닷새 한 마리도 날지 않나? 야자숲 울창한 무인도에 살아움직이는 거라곤, 게딱지밖에 없네. 게다가 1500일 동안에, 첫날 떠내려온 소포들과 4년 만에 떠내려온 양철판 말고는 떠내려온 표류물들이 아무것도 없었다구? 뿐인가. 아줌마 같으면 밧줄에 척 대신 매달린 나무 인형을 친구로 삼고, 배구공은 다른 용도로 썼을 거 같다. 공 거죽에 생존 사실과 SOS, 섬의 특징 등등을 새겨서 불에 그슬려 글자를 만든 다음, ‘병 속에 든 편지’ 대용으로 바다에 띄워 보낸다든지. 기타등등 기타등등, 왜왜왜의 행진은 끝이 없었다. 즉, 못 속여도 유분수지, 이런 기분이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얘기는 배구공하고나 나눠야 옳다. 아줌마 꼬장꼬장한 시비를 들어줄 상대가, 배구공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아니, 한 사람 있네. 짐 호버먼. 평상시에 “얘는 도대체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기나 한 거야” 하면서 그가 틀림없이 변태일 거라고 단정지었던 아줌마지만, ‘섬 생활을 곤혹스럽고 복잡하게 만드는 건 코코넛과 충치 정도’였다며 어이없어하는 짐 호버먼의 이번 칼럼만큼은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인도 장면은 클럽 메드 홍보영상물 수준의 눈요기라도 되었지만, 생환 이후의 장면에서는 한국의 신파 멜로를 보나 싶었다. 그렇게 긴 사족은 첨봤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에 모친한테 소감을 물었더니, “모든 걸 혼자 해내는구먼” 하고 대견해하셨다. 그게 재미있다는 말이냐고 추가질의를 했더니 반응은 ‘오브코스 와이낫’이었다. 톰 행크스의 무인도보다 암초 많은 ‘사회’에 내팽개쳐진 뒤로부터 모친도 나도 톰 행크스만큼은 혼자해온 셈인데 싶었지만, 현명하게도 아줌마는 입을 다물었다.

극장을 나오니 오전까지 내리고 그치리라던 눈은 30년 만의 폭설로 바뀌어 있었고, 효도하느라고 눈발에도 불구하고 끌고 나온 자동차는, 눈의 섬으로 변한 도심에서 무인도의 스케이트만큼도 쓸모없는 애물단지 표류물이 되었다. 눈의 망망대해를 헤치고 언덕배기 우리집으로 탈출하는 것, 그거야말로 진짜 실감나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단지 살아남는 게 문제라면, 오로지 그 한 문제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톰 행크스가 로케 장소로 발견한 ‘맞춤 클럽메드’보다 천배 만배 더한 환경에서라도 어찌 살아내지 못하랴. 못쓰는 글 잘 써보려고 날밤 패고, 돈없이 낳은 자식 잘 키워보려고 이 궁리 저 궁리하다 해를 보내고, 여자 깔보는 세상에서 깔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면. 하느님, 문제를 주더라도 톰 행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번에 한 가지씩만 주세요, 네?

최보은/ 아줌마 cho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