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당신의 나무>란 소설을 읽은 다음부터 필자는 자주 어둡고 흐린 하늘 아래, 거대한 나무와 뒤엉킨 채 서서히 퇴락해가는 앙코르와트의 사원을 상상했다. 그 소설에서 “거대한 석조 불상의 틈새에 뿌리를 밀어넣어 수백년간 서서히 바수어온 나무”를 본 다음이었다. 이 나무는 사원을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지탱해왔다고 했다. 이 나무가 아니었다면 부서지기 쉬운 돌로 된 사원은 진작에 흙이 되었을 거라고, 나무와 사원은 이렇게 서로 얽혀 900년을 버티어왔다고도 했다. 그뒤 대체 어떤 극중인물이, 왜 그곳에 갔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나무만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비장한 이미지로 고정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 글은 이미지로 남았다.
이 나무의 주선으로 소설가 김영하(33)를 만났다. 흔히 얘기되듯 그는 확실히 우리 문학에 없는 이야기를 풀어냈고,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읽는 재미가 유별났다. 그리고 그는 올 초 <씨네21>에 ‘이창’이라는 이름의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칼럼은, 소설처럼 기존의 칼럼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감수성을 보여줬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잡다하고 사소한 일들을 끄집어냈다. 말 그대로 신변잡기(身邊雜記)다. 이건 절대 폄하가 아니다. 이걸 폄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대 담론이나 도덕적 엄숙주의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는 자일 거다. 그는 우리 사회를 순식간에 병리적 공황상태로 몰아가는 사건들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경쾌하게 일상을 가로지르며 미세한 균열들에 확대경을 들이댔다. 그런 그의 칼럼은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나만이 아니라 <씨네21>을 만드는 사람들, 독자들도 그러했을 터이다. 한데 그가 기고 종료를 선언했다. 마지막 칼럼에서 그는 ‘짤렸다’라고 눙쳤지만, 사실 가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어쨌든 그가 <씨네21>을 짜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불러내 그 이유를 따져보기로 했다. 아니, 실은 그라는 사람이 많이 궁금했다.
나는 뽀다구나는게 싫다
왜 이창을 그만 쓰나.
이창 쓴 지 1년 됐는데 이젠 호흡이 긴 글을 쓰고 싶다. 칼럼은 호홉이 짧은데다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건 소설가랑 잘 안 맞는다. 소설은 애미함을 승인한다. 하지만 칼럼은 분명한 태도에서 감동이 온다. 그래서 칼럼은 문학적이지 않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나 오래 쓸 글은 아니었다.
진짜 신변잡기를 썼다.
18세기에 이덕무나 박제가 같은 한학자들이 신변잡기를 썼다. 이덕무의 <첨언소품>을 보면 책 읽다 향(香)자만 갉아먹은 책벌레를 잡아서 정말 그 벌레에게 향기가 나는지 봐야겠다는 얘기가 있다. 이들의 신변잡기 당대로서는 혁명이었다. 공맹, 군신관계, 사대부의 도덕을 논하던 시기에 그들의 신변잡기는 반역과도 같았다. 이덕무는 존재를 걸고 그런 하찮은 글을 썼던 거다. 그게 우리의 9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난 사소한 것의 정치학을 말하고 싶었다. 난 큰 이야기가 싫다. 왜 작은 것에서 우주를 본다고 하지 않나. 그러고 싶다.
주변에 대한 관심은 타고난 기질인가.
그렇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뽀다구’나는 게 싫다.
그런 기질 때문에 갈등을 빚은 적은 없나.
많다. 난 여성적이다. 남자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정치, 축구, 도박을 싫어한다.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 처음 봤다.
축구가 굉장히 남성적인 서사다. 11명의 남자들 두팀을 이뤄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 이기고 한쪽은 지고. 난 여자들 옷 사는데 따라다니길 좋아한다. 아내가 옷 사러 갈 때 몇 시간씩 돌아다녀도 즐겁다. 아내는 그런 내가 여자친구 같단다. 여자친구들은 내가 남자라는 걸 깜박할 때가 있다고들 한다. 난 남자가 많은 곳에 가면 불편하다. 여자들이 관계지향적인 데 반해 남자들은 지배를 원한다. 서열을 정하지 않으면 30분도 그냥 앉아 있지 못한다. 만난 지 30분 만에 선배라고 ‘영하야, 말 놔도 되지’, 이러는 거 너무 싫다.
한국 남성들은 그런 심성을 억압하도록 교육받지 않나. 성장기에는 상처 많이 받았겠다.
그랬다. 운동권 안에서도. 남성적으로 산다는 건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산다는 거다. 그건 너무 피곤하다. 90년대 이후 최소한의 사람들과 최소한의 관계만 맺고 산다. 정치활동도 안 하고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문단에서도 신경숙, 은희경, 배수아 같은 여성작가들과 더 친하다.
“로맨스는 최고의 판타지”
김영하는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발표하면서 신세대 작가군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다. 이 소설에서 그는 역사, 시대, 민족을 밀어내고 판타지를 두껍게 껴입은 현실을 빌려 죽음, 섹스,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했다. ‘이미지 중심의 서사’ 또한 주목받았다. 기존의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감수성의 출현이었다. 그뒤 최근작 <아랑은 왜>까지 그의 소설의 큰 줄기는 꺾이거나 변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그를 두고 “김영하는 영상 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현대적 일상성의 세계를 묘파한 소설들로 주목받는 젊은 작가이며, 이미지로 포착되는 일상 문화의 양상을 김영하만큼 감각적이고 매끄러운 서술기법으로 풀어내는 작가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산문집 <굴비낚시>도 펴냈다. 영화평과 에세이, 일기에 ‘애미하게’ 걸쳐 있는 그의 글을 그는 “자조적으로” 생선도 가공식품도 아닌 굴비에, 자신의 글쓰기를 굴비낚시에 비유했다. 개중에는 영화의 안으로 깊이 들어간 글도 있지만, 영화를 사유의 장으로 들어가는 문이나 삶을 뒤돌아보는 거울로 삼는 경우가 더 많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무중력에 상태에 비견될 만한 무억압 상태에서” 그는 자유롭게 상상한다. 신창원 검거 사건에서 <쇼생크 탈출>를 떠올리고, <부기 나이트>를 보고선 “텔레토비와 포르노는 한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생아”라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행보 때문에 제작자들은 시나리오를 맡길 소설가로 제일 먼저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는 <컷 런스 딥>의 이재한 감독과 함께 <개와 늑대의 시간>의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돼가나.
거의 끝나간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다. 한-미관계를 배면에 깐 정치적 액션영화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좁혀 말하면 탐정 누아르에 가깝겠다. 인간의 죄의식, 무기력, 사랑의 파멸적 속성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라 외롭고 고독한데, 이번 시나리오 작업은 공동창작이라 즐거웠다.
평론가들은 ‘이미지 중심의 서사’를 당신 소설의 핵으로 꼽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설이 영상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 소설은 오히려 문학적이다. 96년에 <나는 나를…>의 판권을 동아수출공사에 팔았다. 그런데 결국 시나리오가 안 나왔다. 막상 그 소설엔 영화화할 요소가 많지 않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하고 사건이 많지 않아서 시나리오로 옮기면 재미가 없다. 사실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 소설은 쉽게 영화로 상상이 된다. 게다가 시나리오까지 써서 한국의 폴 오스터를 꿈꾸는 건 아닌가 했다. (웃음)
어휴, 내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건 재미없다. 장편 쓰느라 일년을 고생했는데 시나리오 쓴다고 그 고생을 또 해야 하나. 내 소설은 의외로 고전적이다. 죽음, 질투, 분노 등 그리스극에나 나올 법한 고전적 주제를 다룬다. 히치콕도 그런 주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난 히치콕이 좋다.
영화가 싫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영화를 꽤 많이 본 것 같다.
당연히 봤으리라고 생각하는 영화들을 안 봤다. 예를 들면 <포레스트 검프>. 아직까지는 소설이 훨씬 좋고 매력적이고 재미있다. <스크린>에 글 쓰기 전에는 일년에 두편 봤다. 비디오도 보기 싫다. 대신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를 잘 본다. 그것도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것이어서 영화 앞부분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면서 말도 많다. 그냥 영화려니 하고 봐줘야 하는데 ‘저건 말도 안 돼’ 하고 따진다. 그래서 영화광인 아내는 내가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에 들 거라고 핀잔준다. 영화는 2차원이고 소설은 3차원이다. 소설은 우리가 화면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영화에는 우리가 개입할 차원이 없다. 감정이입할 여지도 별로 없다. 정우성처럼 잘생긴 배우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겠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영화적인 소설이 나올 수 있나.
내 소설 보고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건 순전히 텍스트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지 떠올리기를 좋아했다. 영화학도들이 애기하듯 영상이 영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영상으로 영상을 사고할 수는 없다. 복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잘해봐야 타란티노다. 거장들이 거장인 이유는 묵직한 주제와 그걸 밀어붙이는 힘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란>을 만들었던 것도 셰익스피어를 열심히 읽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평론을 글로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나. 그건 영화로 영화를 평할 수는 없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영화엔 비판 기능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하는 사람들,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부인이 영화광이니까 아무래도 부인 따라서 극장에 가거나 비디오를 보게 될 텐데.
아내도 결혼 뒤에는 영화보다는 책을 많이 본다. 영화 보는 취향도 다르다. 아내는 공포영화나 엽기적인 영화를 좋아하는데 난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 멕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 너무너무 행복하게 본다. 반면 신체훼손형 영화는 맘 편히 못 본다.
당신은 판타지 성격이 강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영화에서 호러는 판타지의 대표 장르인데, 모순 같다.
로맨스야말로 판타지다. 해피엔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 행복 아닌가. 내가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건 어렸을 때 겪은 분리불안 때문인 것 같다. 엄마가 무서워서 그랬는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그런데 로맨틱코미디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끝내 행복하게 결합하는 남녀를 보면 분리불안이 해소된다.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남자들, 영화 보면서 심리치료를 하는 거다. 그런 남자를 유치하다고 공격하면 안 된다. 나 같은 사람은 김기덕 영화 보면 안 된다. ▶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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