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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얼굴, 조재현 [2]
사진 오계옥최수임 2002-01-03

음지 인생, 연극 따라 양지로

열심히 연극을 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조재현은 “올바른 생활을 하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스물넷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대학 방송반 아나운서였던 지금의 아내와. 그해 1989년, 그는 KBS 13기 공채 탤런트가 됐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 출연하며 대외적인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야망의 세월>에서 그의 역은 유인촌의 막내 동생이었다. 연극은 계속 그의 주무대였다. 친구들과 극단 ‘종각’을 만들고 <세발 자전거>(1989),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90), <우묵배미의 사랑>(1990) 등을 무대에 올렸다. 방송에서는 웨이터 등 단역을 전전하던 그를 인정한 건, 연극판이 먼저였다. <에쿠우스>로 1991년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을 받은 것이다. <에쿠우스>를 공연할 때 조재현은 세살 난 아들의 아빠였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노는 아이를 보며, 그는 잔혹하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던 알란을, 순수한 인물로 재창조했다. 너무나 순수하기에 반항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에쿠우스>는 매년 한편씩은 연극을 하는 요즘도, 그가 다시 연기하고 싶어하는 첫사랑 같은 연극이기도 하다.

영화는 <젊은 날의 초상>(1989)과 <영원한 제국>(1995) 사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 한 작품만 하며 주로 연극계에 머물던 그 이십대 후반, 조재현의 사실상 주업은 레스토랑 경영이었다. 결혼 직후 아이가 생기면서, 그는 생업으로 종로의 레스토랑 하나를 아버지로부터 받아 운영했다. “몸은 살아오면서 가장 편했지만, 마음은 가장 불편했던 시기였어요. 레스토랑 운영이 본업인 양 행세했죠. 연기를 하긴 했지만, 그걸로 버는 돈이 레스토랑에서 버는 돈보다 훨씬 적었으니, 연기가 부업이라는 자괴감에 빠졌어요. 그때 난 40대 중반의, 무슨 대기업 중간간부 같았으니까. 허리 사이즈가 불고, 고민이 없어지면서 얼굴이 평평해지고… 편했지만, 너무나 편하게 안정을 취하고 있는 그런 내 모습이 한편 너무나 싫었어요.”

결국 가게는 세를 주었고, 연기를 ‘주업’으로 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독립영화를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돈이 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대로, ‘부업’인 레스토랑이 가져다주는 수입은 이후 내내 조재현에게 중요한 후원자 노릇을 해주기도 했다.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둔 그는 지금 평창동에 살고 있고 차는 벤츠다. 그렇게 살아왔고, 놀랄 일만은 아니다.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가 첫 주연작이긴 하지만, 조재현의 첫 영화는 이문열의 동명소설을 1989년 곽지균 감독이 영화화한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정보석, 옥소리 주연의 이 영화에서 조재현은, 가난과 이념에 대한 고민을 문학에 의지하던 주인공 정보석의 동료 운동권학생을 연기했다. 하얗고 뽀얀 <젊은 날의 초상>에서의 스물넷 앳된 그의 모습은, 지금 보면 낯설기 그지없다. 3년 뒤 <파업전야>의 홍기선 감독이 만든 <가슴에…>에서 절름발이 선원 역을 맡으며 첫 주연. 이 작품으로 조재현은 의도하지 않게 운동권배우라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이인몽을 연기했던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이 다음 영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 영화 뒤 서른 즈음, 조재현은 오랜 인연이 된 김기덕 감독과의 첫 영화 <악어>를 만났다. 1995년이었다. (그때는, 그가 MBC 카메라맨이던 형의 사고사 이후 연기자생활에 심한 곤란을 겪던 때이기도 했다. 친지의 죽음을 경험한 그는, 지금도 비슷한 일을 겪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쓴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한 아이의 전화에 더할 나위 없이 다감한 태도로 응했는데, 전화를 끊은 뒤 아버지가 없는 아역탤런트라며 조용히 일렀다. 자신의 강점을 뭐라 생각하냐는 질문에 “연기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도, 딴 사람한테는 충격이 될 수도 있는 큰일도 나한텐 그렇지 않아요. 의연하게 대처해요. 낙천적인 것과는 다른 건데. 나를 믿는 거죠”라고 답했다.)

‘김기덕의 페르소나’로 굳어져도, 상관 없다

“처음, 출연제안을 받고 감독도 모르는 사람이고 돈도 없는 영환데, 영화진흥공사에서 <무단횡단>이라는 시나리오로 대상을 받았다기에 시나리오는 잘 쓰는 분이구나, 했죠. 근데 처음 만나는 날 누가 ‘김기덕입니다’ 하고 오는데 너무 순진하게 생겨서 감독 아닌 줄 알았어요. (웃음) 그때로서는 그런 거친 역할이 안 해본 거라 연기하면서 쑥스러웠죠. 그래서 김기덕 감독하고 술도 많이 마시면서 친해지려고 했어요. 김 감독, 술 못했는데 나 때문에 술을 배웠죠. 이후 유흥문화가 모두 내 탓인가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들어요.(웃음)”

자신의 수식어처럼 돼버린 말 ‘김기덕의 페르소나’라는 칭호를 그는 예감했을까. 조재현은, 6년 전 김기덕 감독과의 첫 대면을 이렇게 기억한다. 이후 조재현은 잘 알려진 대로 <파란 대문>과 <실제상황>을 제외한 김기덕 감독의 모든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했다. <나쁜 남자>가 그와의 다섯 번째 영화이니 서른살 이후 조재현은 김기덕의 배우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잘 맞는 감독과의 연속작업은 그저 축복이기만 했을까. 어떤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세간의 고정관념은, 한 배우에게 어느 시기까지는 득이 돼도 어느 시기 이후로는 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나 조금은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레 물어보니 조재현은 딱 잘라서 아니라고 답했다. “김기덕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나, 라는 말 자체가 날 구속하는 말이에요. 스스로 내가 그것에 구속돼 있지 않으니까. 또 그렇게 굳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재현에게 김기덕 감독은 “대화를 하며 일할 수 있는 감독”이자 “내가 뭔가 요구할 수 있는 감독”이다. 예를 들어 <수취인불명>은 조재현이 TV드라마와 촬영이 겹쳐 힘들게 찍었던 영화. 첫 촬영을 끝내고 지프에 발을 올리며 매니저에게 “내가 여자라면 원치 않은 남자랑 섹스한 기분이다. 충분히 서로 애무를 한 다음 섹스를 해야 하는데”라고 말했을 만큼 스스로 불만족스러웠기에, 그는 김기덕 감독에게 ‘시간을 다오’ 했고, 다음 작품인 <나쁜 남자>를 할 때, 그는 <악어> 때처럼 김 감독과 붙어다니며 장소 헌팅부터 같이 하며 충분한 준비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다. 김기덕 감독과의 작업에서 조재현은 배우인 동시에 현장의 모니터요원 역할을 톡톡히 한다.

김기덕의 페르소나라고는 하지만, 조재현이 김 감독의 영화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경성대 선배 전수일 감독의 40분짜리 중편으로 나중에 <말에게 물어보렴> <길 위에서의 휴식> 등과 묶여 극장개봉되기도 한 <내 안에 우는 바람>(1997), 늘 남자들 중심의 영화만 하던 그가 유일하게 3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주연인 작품에서 남자 캐릭터를 맡아 스스로도 신선했다는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주인공 은석(이정재)이 만드는 영화의 프로듀서 송병권 역을 맡아 자주 반복되던 회의실 장면에서 모습을 보였던 변혁 감독의 <인터뷰> 등이 필모그래피에 자리하고 있다. “보고 얼굴이 빨개졌고 그러고나서 얼마 있다 간판이 내려온” 영화라고 소개하는 <얼굴>, 여러 가지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던 <교도소월드컵> 등 몇몇 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고. “지난일에 대해서는 반성은 해도 후회는 않는다”는 말대로다.

조재현은 요즘 많은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있다. <나쁜 남자>에서 악한 인물을 연기했으니 다음엔 착한 역을 맡고 싶다고 할 만도 한데, “더 나쁜 역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더 나쁜 역이란 그나마 한기에게 깔려 있는 운명적 애정마저 없는, “백지장처럼 차갑고 짐승 같은 사람”. 시나리오 중 마음이 끌리는 작품들은 스펙터클한 것과 캐릭터가 있으면서 가볍고 전체적으로 코믹한 것 두 종류다. 김기덕 감독의 바로 다음 작품(<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작품인데 조재현에게 맞는 캐릭터가 없다)에는 출연하지 않을 예정이고, “김기덕식 처절한 멜로”를 감독에게 요구할 생각이다. 아직 제작일정은 잡혀 있지 않지만, 캐스팅이 이미 되어 있는 작품으로는 10년 전 함께 작업했던 홍기선 감독이 장기수 김선명의 일생을 그리는 영화 <선택>이 있다. 2002년, 조재현의 계획 중엔 ‘단편영화만들기’도 들어있다. 그는 지금 중앙대 예술대학원 영상학과를 3학기까지 마친 대학원생.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 한 편을 꼭 만들 생각”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톱배우가 되더라도, 저예산영화한다”

이런저런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저예산영화 시나리오가 한편도 없다며 조재현이 걱정을 전한다. “그런 영화들은 아예 기획이 안 되니까, 시나리오도 안 들어오는 것 아니겠느냐”는 게 그의 근심. “톱배우가 되면 저예산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톱잡지가 되면 저예산배우를 주목하지 않는” 영화판을 비판하며, 그는 독립영화와 함께 12여년을 산 배우로서의 고집을 드러냈다. “배우는 자유로운 직업이다. 나만 해도, 창녀촌에서 살 수도 있고 순경도 돼보고 왕도 돼봤다. 그런데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 너무 부자유스럽게 갇혀 있는 걸 보면, 인기가 떨어지면 어떡하나 오로지 그 생각에 좌지우지되는 걸 보면 안타깝다. 톱배우가 되더라도 작품만 좋으면 저예산영화를 택할 거다.”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부터 저녁까지, 간만에 <피아노> 촬영일정이 비면서 대신 몰린 인터뷰며 TV프로 출연으로 바쁜 그를 한 차를 타고 동행하면서, 덕분에 <씨네21> 스튜디오에서, 차 속에서, 방송사 분장실에서, 또 스낵코너의 샌드위치 접시 앞에서, 기자는 조재현과 오후 나절을 함께 지냈다. 그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해도 결국은 질문의 요지를 찾아가는, 세심하게 구상된 듯한 답변을 말했고, 그렇게 친절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독특한 인터뷰 상대였다. 거칠게 살아왔고, 그만큼 독한 고집과 주관의 소유자인 그는, 인터뷰에서도 프로였다. 참고로 팬들을 위해 밝히면, 그의 단골술집은 평창동의 ‘절벽’. 그곳에 가면, 김갑수, 김규철씨를 비롯, 에도 나온 이한위씨, 방송계의 권혁호씨 등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그의 사이좋은 술친구들과 더불어, 나이 서른여덟, 갈수록 멋있어지는 이 사람 조재현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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