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사내의 주름진 얼굴이 드러난다. 은퇴한 조직 보스 두헌(송강호)이 원하는 것은 수평선 너머 불어오는 한 움큼의 바람뿐이다. 그는 이제 소박한 새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가 다니는 요리학원에 세빈(신세경)이 나타나면서 그의 단조로운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두헌을 감시하고 종국에는 그를 죽여야만 한다. 각자 상처의 깊이만큼 서 있던 날이 서로를 향한 연민에 무뎌질 즈음, 두 사람은 결단을 내리게 된다.
<푸른 소금>의 구도는 익숙하다. 영화는 킬러와 표적간의 사랑과 갈등을 다루는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감정의 상투성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감정은 솔직할수록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세빈이 두헌과 가까워지고 연민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영화에서 설득력있게 그려지는 편이다. 두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조합도 흥미롭다. 직접 바이크를 배우고 총기조립법까지 전수받았다는 배우 신세경의 열의는 여러 신에서 두드러지며, 나직이 던지듯이 말하는 특유의 대사 톤도 까칠하지만 여린 킬러 역할에 잘 어울린다. 배우 송강호의 연기는 여전히 좋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이는 조연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연들 모두 제 몫을 해내지만, 캐릭터 자체가 상투적인 틀에 묶여 있고 갈등이 다소 도식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배우들은 딱 그만큼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머문다. 산만한 인물 구도로 인해 갈등의 축이 분산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같은 서운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체적으로 편안히 즐길 수 있다. 곳곳에 누아르적인 긴박감도 있고, 간간이 터져 나오는 유머들이 긴장을 이완시키기도 한다. 간혹 낯간지러운 대사가 등장하는데 이도 너그러이 넘길 만하다.
오히려 <푸른 소금>의 결정적인 문제는, 인물들의 애절한 감정과 감독이 추구하는 세련된 감각주의 사이에 발생하는 지속적인 균열에 있다. 이현승 감독의 전작 <시월애>(2000)는 인물들을 서로 다른 시공간에 떨어뜨려 정서적 거리 두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경우다. 그러나 <푸른 소금>의 정서는 이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예쁜 이미지들만으로 담아내기에, 세빈과 두헌이 당면한 문제는 긴박하고 절실하다. 그런데 <푸른 소금>의 거의 모든 신들은 공간과 빛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창고의 먼지조차 흩날리는 눈처럼 아름답게 포착된다. 두헌이 자동차 유리에 난 총알구멍에 슬쩍 꽃잎을 끼워 넣는 장면은, 감독이 추구하는 영상미학의 성격을 함축하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세심하게 배치된 시각적인 요소는 인물들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감정의 깊이를 차단하기도 한다. 따스한 가로등 불빛과 주변을 넘실대는 파도는 애수를 자아내지만, 그 때문에 두헌의 고독은 충분히 주저앉지 못하고 부유하고 만다.
‘푸른 소금’은 제목만이 아니라 영화의 중요한 장치로도 쓰인다. 푸른색은 두헌이 오가는 바닷가나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염전신에서는 물론, 실내 공간에서도 쓰이는 주요 색감 중 하나다. 매일같이 바람의 강도와 날씨를 체크하며 촬영에 공을 들였다는 제작진의 소개대로 <푸른 소금>의 염전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두헌의 대사처럼 감정이 꼭 정열적인 붉은색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파란색을 ‘푸르다’라고 하고 ‘블루’라고 칭할 때에, 색깔에는 감상적인 기운이 묘하게 덧붙는다. 세빈이 두헌에게 직접 총구를 겨누는 장소가 하필 푸르고 아름다운 염전이 되면서, 처절하고 긴박한 감정은 멜랑콜리한 감상으로 희석되어버린다. 영화에서 소금은 다양한 재료로 쓰인다. 음식의 양념이자 범죄를 은닉하는 수단이기도 하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중요한 것, 소금은 아마도 사랑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소금에는 때로 쓴맛이 섞인다. 압도적인 짭짤함 속에 미세하게 감지되는 씁쓸한 뒷맛. 원래 소금의 쓴맛은 정제의 대상이지만, 영화 <푸른 소금>의 푸르고 매끈한 영상에는 좀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