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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때 할리우드에서는… ②

희대의 연애에서 희대의 미스터리까지, 할리우드를 달군 별별 스캔들

[희대의 짝패] 우정과 애증 사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세르지오 레오네의 기묘한 동업관계

<석양의 갱들>의 세트장에서 아이들과 장난치고 있는 두 '싸나이'.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왼쪽)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오른쪽).

할리우드 영화사를 장식하는 위대한 짝패 혹은 우정 어린 동업관계는 많고도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세르지오 레오네의 관계는 결코 그런 인증 받은 우호적 관계가 아니다. <황야의 무법자>를 끝내고 두 번째 영화에 들어가기 직전 이스트우드가 레오네에게 부탁한건 이거였다. “이봐, 세르지오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 담배만 빼고 말이야.” 이스트우드는 죽도록 담배를 물고 사는 사나이라는 캐릭터로 일약 스타가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담배 피우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하지만 레오네가 어떤 감독이던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촬영하던 중 숙소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배우 알 무로치를 향해 “하루라도 더 있다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클로즈업을 한번 더 찍었어야 했는데!”라고 중얼거렸다는 사람이 아닌가. 영화를 위해서는 뵈는 게 없는 냉혈한에게 담배쯤이야. 이스트우드는 동료 배우들을 향해 저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므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해주기 바빴고, 연출을 하는 것은 곧 화를 내는 것과 같았던 레오네에게 이스트우드가 붙여준 별명은 워너브러더스의 만화 캐릭터 ‘요세미티 샘’(벅스 바니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수염 길고 키 작고 성질 급한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감대가 있었다. 이탈리아 배우들이 저자는 도대체 서 있기만 하고 하는 일이 뭔가 하는 눈빛으로 이스트우드를 볼 때 그의 연기의 진가를 알아본 건 레오네뿐이었다. 방귀를 뀌어서 성냥불을 붙이기식의 레오네의 괴상한 유머감각은 때때로 큰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스트우드는 언제나 레오네의 그런 유머감각을 높이 샀다. 그리고 둘은 상의 하에 원래는 대사가 장황했던 <황야의 무법자>를 지금과 같이 바꿔 놓았다. 이탈리아 언론이 이스트우드를 두고 “웨스턴 컨설턴트”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결론? 둘은 안 친하고 안 어울렸다. 그런데 통했다.

[희대의 미스터리] 누가 존 웨인을 죽였나

핵실험장에서의 촬영과 배우들의 죽음과의 연관성

<칭기즈칸>의 수잔 헤이워드(왼쪽)와 존 웨인(오른쪽). 당당해 보인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다가올 어두운 미래를 모르고 있다.

말년의 존 웨인은 근 15년간 위암, 폐암 등 각종 다발성 악질 질환을 앓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여배우 수잔 헤이워드는 유방암, 자궁암, 피부암, 뇌종양 등으로 15년간 합병증을 앓다가 사망했다. 두 사람의 질환이 같은 이유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반핵 운동가 히로세 다카시는 <누가 존 웨인을 죽였는가>라는 책에서 존 웨인과 수잔 헤이워드가 함께 출연했던 영화 <칭기즈칸>이 그 이유라고 말한다. <칭기즈칸>(1956)의 촬영지가 문제였다고. 1963년 핵실험 금지조약이 체결되기 이전까지 미국은 1951년부터 1958년까지 97회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했는데, 핵실험장으로 이용된 것으로 유명했던 곳이 바로 네바다 주 사막이었고, <칭기즈칸>은 1954년에 이곳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의 엑스트라로 출연한 인디언 시브위트족은 암과 백혈병으로 부족이 전멸했고 참여한 스탭 다수도 각종 질환을 앓다가 수년 내에 사망했다.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은 이른바 그들이 ‘원폭군인’(Atomic Solider)과 마찬가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원폭군인이란 핵실험 훈련에 참여하여 자신도 모르게 핵에 노출되어 감염된 군인이나 기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정부가 종종 실험차원에서 그들을 의도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되도록 방치했다는 설도 있다. 히로세 다카시는 <칭기즈칸>의 출연배우들뿐 아니라 게리 쿠퍼, 스티브 매퀸, 헨리 폰다, 율 브린너 등 아예 수십명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으며 그들의 공통점이 주로 서부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와 감독들임을 주목한다. 그들이 각종 질병으로 죽어간 것은 핵방사능 실험지에서의 촬영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존 웨인은 미국 정부에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하여 온갖 치료를 받으며 생명을 연장했고, 한편으론 재생을 약속받고 냉동인간이 되어 워싱턴 DC 국방성 지하벙커에 묻혔다, 는 설이 있다는데, 그럼 언젠가 존 웨인은 돌아오는걸까.

[희대의 부조리극] 배신자인가, 희생자인가

매카시즘의 광기에 저항하지 않았던 엘리아 카잔

<초원의 빛> 현장에서 워런 비티(오른쪽)와 엘리아 카잔(왼쪽). 엘리아 카잔, 어딘가 연민이 느껴지는 인상이기도 하고.

엘리아 카잔(1909~2003)은 배신자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때의 일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카잔은 매카시즘의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국 의회의 반미활동위원회에 출석해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된 동료 예술인들의 이름을 불었다. 대신 그는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을 보장받았다. 아서 밀러처럼 매카시즘의 광기에 저항한 사람들, 조셉 로지처럼 유럽으로 도피해야 했던 사람들, 또 직장을 잃은 수많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카잔은 파렴치한 배신자가 맞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부끄러운 배신의 낙인이 역설적으로 엘리아 카잔의 영화를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좀 에둘러 배경을 설명해보자. 먼저 엘리아 카잔은 1934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민주주의의 리더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공산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할리우드에서 쫓겨난다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지만 불행하게도 그때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냉전 시기였다. 그는 1932년 창단된 뉴욕의 ‘그룹 시어터’(Group Theater) 단원이었다. 이들은 공황시대를 맞아 빈부격차 같은 당대 사회의 첨예한 문제들을 무대에 올리며 주목받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러시아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Method) 연기가 전수됐다. 이들 단원들은 대개가 좌파였고, 나중에 미국 공산당에 대거 가입했다. 의회의 반미활동위원회는 이들을 주목했고, 이미 누가 공산당에 가입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의회의 소환과 증인들의 묵비권, 혹은 말 돌리기 같은 지루한 싸움이 이어졌다. 누군가 의회의 체면을 세워줄 증언을 해줘야 마녀사냥이 끝날 것 같았다. 이럴 때 엘리아 카잔이 불려갔다.

그를 좀 변호한다면 카잔은 배신했다기보다는 배신의 운명에 끌려 들어간 편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엘리아 카잔은 그리스계 터키인의 아들이다. 쉽게 말해 ‘컬러’(color), 곧 유색인이다.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그는 네살 때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주로 혼자 놀던 조용한 소년은 20대 때 ‘그룹 시어터’에서 자신의 숨어 있던 재능을 발견한다. 연출이었다. 그는 상명하복식의 엄격한 문화가 싫어 미국 공산당을 1936년 탈퇴했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만은 계속 지지했다. 의회는 유색인이자 이민자라는 카잔의 약한 고리를 이용한 게 아닐까? 누군가 희생자가 하나 필요했는데, ‘이지메’를 시켜도 뒤탈이 좀 덜할 것 같은 외국인 유색인이 걸린 것이다. 말하자면 인종주의의 편견이 카잔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두 번째 이유로는, 카잔은 할리우드 세대교체의 리더였다.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존 가필드 같은 새 시대의 메소드 연기자들이 카잔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메소드 연기를 전수한 그는 배우들의 우상이었다. 게다가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같은 작가들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친구들이었다. ‘엘리아 카잔 사단’이라고 불러도 좋을 새로운 영웅들이 내뿜는 기세는 곧 할리우드를 점령할 듯했다. 말하자면 엘리아 카잔은 할리우드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협하는 새 세대의 리더이자 미운털이 박힌 이방인이었다.

카잔은 순진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이미 신문을 통해 이름이 다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댔는데….” 그래서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가 그의 삶에 오점을 남겼다. 얼굴에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고 사는 ‘특별한 삶’이 시작됐다. 유색인에 이젠 배신자라는 주홍글씨까지 새겼으니, 그가 사회로부터 얼마나 경멸과 모멸의 시선을 받았을지 짐작이 되는 것이다. 아마 세상의 끝이 있다면 그곳은 엘리아 카잔이 서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았을 것 같다. 그 끝에 밀려난 특별한 경험, 나는 이것이 결국 엘리아 카잔 영화에 특별함을 선물했다고 본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워터프론트>(1954), <에덴의 동쪽>(1955), <초원의 빛>(1961) 같은 대표작들이 연속하여 발표됐다.

재밌는 점은 ‘배신자’였던 카잔은 1960년대 들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때부터 그는 사양길을 걸었다. 후배들인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들, 곧 존 카사베츠, 아서 펜, 시드니 루멧 등이 엘리아 카잔을 자신들의 영화적 스승으로 추앙했다. 낙인이 찍혔을 때는 창의력의 절정을, 추앙을 받을 때는 평범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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