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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SBS <뿌리깊은 나무>가 현실과 공명하는 순간들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비단보료를 움켜쥐고 씹어뱉듯 혼잣말을 하는 왕의 얼굴을 본다. 자괴감, 열패감, 수치심 등이 뒤얽혀 온몸을 휩싸는, 그런 순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그 얼굴. 보아서는 안될 인간의 내밀한 부분을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마주하고 있는 게 어쩐지 죄스럽게 느껴졌다. SBS <뿌리깊은 나무> 8회 이야기다.

청년 이도(송중기)에서 세월을 훌쩍 건너뛴 중년 이도(한석규)의 첫 등장은 소탈하고 솔선수범하며 백성을 생각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익숙한 성군 세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런 성군이 돌연 역정을 내거나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순간들을 파고든다. 앞서 비단보료 장면은 자기 사람이 비밀결사에 의해 궁 안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을 목도하고도 주위를 물리며 “자야겠다”고 신하들을 뜨악하게 한 다음 장면이다. 극도의 스트레스 앞에서 자러 들어간 왕이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도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비밀결사 ‘밀본’의 색출 대신 뜬금없이 집현전 학사들을 지방으로 파견해 세제를 정비하겠다고 나선다. 일타쌍피. 13년 전 수집했던 방언들의 변화를 수집해 비밀리에 진행하던 한글 창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의 일을 그들 때문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위기를 두고 발생하는 이상한 추진력. 기득권의 정점에 선 남자가 같은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 창제를 비롯한 여러 업적을 남겼다면, 그 엄청난 추진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친족을 가리지 않는 피의 숙청으로 왕권을 세운 아버지의 그늘에서 숨죽여 부복하고 마방진에 골몰하던 소년 시절을 지나, 이도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상왕으로 군권을 쥐고 군림하는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까지 공포 속에 살던 이도는 아버지의 방법을 받아들이거나 아버지를 이겨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공포와 혐오 속에서 이도가 간신히 이도일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겠다. 오직 문으로 치세를 하겠다. 권력의 독을 안으로 숨기고 참고 인내할 것’이라는 결심뿐이었다.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는 꿈꾸는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해맑은 왕이 아니다. 아비의 세계와 다른 방법으로 이도라는 이름을 증명하고 싶었던 그는 힘과 공포가 아닌 종류의 것으로 백성의 왕이 되는 방법을 갈구했을 것이다. 방법은 백성의 편리를 도모하는 것뿐. 그들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들을 계속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도는 재상들의 가치관과 갈등을 빚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칼로 쓸어버리거나 없는 죄를 물어 궁지에 모는 것은 모두 아버지의 방식이다. 아비와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스스로의 맹세를 증명하는 길목 곳곳에서 그 실행에 있어 방법론의 회의와 마주친다. 아비의 길을 부정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남자가 ‘권력의 독을 밖으로 내뿜지 못하고 안으로 썩어들어’간다. 그리고 청년 이도의 환영을 향해 침을 뱉는다.

아마도 정권이 바뀌고 현 정부의 가치관과 통치방법을 거부하고 반대하지만 아직 무언가 이룬 게 없는 참신한 얼굴이 대통령에 오른다면, 그 역시 비단보료를 쥐어뜯던 이도의 순간과 마주하리라. 그는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분노했고 그만큼 의로운 결심’이었기에 ‘몸은 지치고 마음은 참혹한’ 세상으로 스스로를 던진 똘복(장혁)을 만난 이도처럼 결심을 긍정할 수 있을까? “넌 너의 길을 가거라.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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