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은 극장용 국산 로봇애니메이션의 전성기였다. 80년대 초반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여름방학 특선’이라는 광고문구가 들어간 로봇애니메이션은 한편도 빠짐없이 극장에서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깜빡하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선착순 100명에게만 주는 <스페이스 간담 V> 프라모델을 손에 넣지 못해 심통이 났던 기억도 있다. 언젠가는 국산 로봇애니메이션의 계보를 한번 정리해보겠다고 시도한 적도 있는데, 어렴풋한 이미지와 제목만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찾을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로보트 태권브이>라는 전설적인 하나만 곱씹으며 한국 로봇애니메이션의 역사(그리고 흑역사)를 잊어가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다행히 우리도 국산 로봇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되짚는 근사한 역사책을 하나 갖게 됐다. 페니웨이의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는 1968년작 <황금철인>부터 1990년작 <로보트 태권브이 90>까지, 한국 로봇애니메이션을 완벽하게 총정리한 책이다. 페니웨이는 블로그 http://pennyway.net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마도 많은 대중문화 글쟁이들이 그의 블로그를 몰래 참고해왔을 것이다. 그는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가 “단순히 추억팔이에 의존하는 얄팍한 책은 아닙니다”라고 블로그에 썼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자신감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제작하고 개봉한 모든 로봇애니메이션에 대한 기본 정보가 수록된 건 물론이고,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에 대한 고찰과 여전히 이쪽 세계의 화두 중 하나인 표절에 대한 흥미진진한 뒷이야기들도 가득하다. 발로 뛰며 쓴 귀중한 책이라는 소리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훌륭한 두편의 로봇애니메이션은 <미래소년 쿤타 버뮤다 5000년>과 <해저탐험대 마린엑스>였다. 페니웨이에 따르면 전자는 독창성이 뛰어난 수준급의 작품이지만 후자는 허술하기 짝이 없게 만들어진 반공애니메이션이란다. 이러니 기억이란 건 믿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