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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 김기덕 反 II 심영섭이 말하는 김기덕 (2)
2002-01-25

억압적인 정체성의 융합

<나쁜 남자>에서 이전의 물의 이미지는 점차 굳어져서 유리의 이미지로 인간들은 세상을 떠돈다. 선화와 한기의 관계는 파열이라는 상징적 장치를 따라 여대생-깡패, 팔린 자-팔아먹은 자의 경계간의 파열을 거듭하면서 결국 둘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한기가 선화를 데리고 사창가를 떠나 길 위를 떠돌 때, 둘간의 정체성의 합일은 결국 선화에 대한 한기의 일방적인 시선과 폭력 모두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로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악어>부터 구사해온 여성의 육체에 관한 가학적 폭력에 대한 김기덕의 오랜 전략이기도 하다. 많은 감독들이 더 강도높은 폭력 묘사를 완충하고자 물타기용으로 웃음을 섞듯이, 김기덕은 고통과 폭력을 섞어놓는다.

그러나 고통과 폭력을 섞어 자해적인 제스처로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것 같은 두 주인공의 정체성의 융합이 과연 양방향적인 포옹이던가? 실제적으로 선화와 한기가 사창가를 떠나 선화가 매춘을 하고 한기가 토사물을 치우는 삶을 영위할 때, 선화는 비로소 자신의 몸을 포기하고 (그녀가 썼던 신체포기 각서처럼) 한기가 속해 있는 세계의 규칙을 완전히 체화하게 된다. 그것은 주류세계에 대한 체념이자 자신의 육체를 자본으로 이용하는 데 익숙해진 한기의 세계로의 선화의 편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화의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감독은 교묘히 설파한다.

일단 내레티브의 전개 과정에서 선화는 한기에게 인신매매를 당해도 싼 중죄를 지었다. 그녀가 한기에게 가한 모욕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선화는 시종일관 한기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지만 그것은 모욕이 아니라 점차 증오에서 연민의 농밀한 제스처로 바뀌어갈 뿐이다. 그녀가 한기에게 가한 가장 큰 죄는 그의 강제적인 키스에 대해 ‘사과를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과를 하라. 김기덕의 영화에 등장하는 야생의 주인공들에게 ‘언어를 토해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인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기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공간에서 사회적인 공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고 이 사회가 부과한 아버지의 법에 따라 행동하라는 일종의 강요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사과를 강요하는 선화는 언어 이전의 세계에 속한 한기에게 위협적인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에 맞서 한기는 아예 선화를 자신의 사창가인 다이달로스의 미궁 혹은 자궁 속으로 유폐해버린다. 그리고 많은 좌절한 아들들이 그러하듯 선화를 애정과 증오가 미분화된 유아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한다. 마침내 주인의 곁을 떠나기를 거부한 새 같은 선화를 떠도는 부초들을 향한 애정과 연민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리면서까지 한기는 선화와의 융합된 정체성에 대한 욕망을 저버릴 수 없다.

그러나 <나쁜 남자>가 보여주는 절절한 고통, 구원을 거부한 늪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이 마지막 합일이 얼마나 이중적인 것인가는 <나쁜 남자> 자신이 스스로 폭로를 한다. 명수 대신 감옥에 간 한기는 명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된다. 남자들간의 충성과 우정으로 한기의 경우 거대한 사회질서인 감옥 자체를 넘나들 수 있지만, 선화에게는 이러한 것과 동질의 우정이나 탈출에 대한 기회는 부여되지도 부여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나쁜 남자>의 탈출 불가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창녀와 여대생이 매춘이라는 행위로 완벽히 동질적이 되면서 어떤 탈출도 불가능해졌던 <파란 대문>의 그것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과 폭력을 경험하고 누군가와의 궁극적인 합일을 꿈꾼다. 그러나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이나 실제로 자아 경계가 흔들리는 나르시스틱 혹은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는 환자들이 꿈꾸는 정체성의 합일은 강제적이고 어떤 자율성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지독한 폭력적인 융합을 향해 치닫는 경계 없음이기도 하다.

김기덕은 쉬지 않고 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김기덕의 모든 영화의 종착점에는 똑같은 모양새의 남과 여가 기다리고 있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가라앉는 <악어>의 두 주인공이나, 창녀와 여대생이 하나가 되어 손님에게 몸을 파는 <파란 대문>, 또한 오토바이에 매달려 가라앉는 여인과 배터리에 묶여 수장되는 남자가 나왔던 <섬>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으스러져 경계가 없어진 이 지독한 정체성의 융합은 바로 증오와 폭력이 판치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런 세상에서 주인공들이 도망가고자 하는 어떤 심리적인 원형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세상에 대한 고통만이 아니라, 이러한 식의 사도마조히즘적인 자아경계의 파괴란 지배와 피지배라는 방식 외에는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유일하게 타인과의 관계맺기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통 대신 자학을 택한 자의 증오

이제 에곤 실레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의 여자 누드들은 에로틱하거나 풍만하지 않다. 그러나 성적이다. 바싹 마른 몸매, 커다란 눈, 순진한 입술, 자위하고 있는 소녀의 자세와 풍경은 실제의 성 관계를 갈망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실레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 속에서 타인과 교류하고픈 자신의 절박한 욕망을 심어놓았지만 그 그림 속에서 그녀의 육체에서 자신이 보기 바랐던 그 욕망 이상을 뛰어넘지 못했다(실레는 실제 삶에서 자신의 아내를 선택해야 했을 때, 클림트에게서 넘겨받았으며 오랫동안 동거했던 여성 모델 발리 대신 수수한 중산층 여인 에디트를 선택했다).

그러한 면에서 김기덕 감독은 에곤 실레의 회화의 지향점과 묘하게 일치하는 여성 신체에 대한 나르시스틱한 고착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녀들의 육체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의 씨앗들을 뿌리고 그 씨앗속에서 싹튼 연민의 나무를 다시 자신의 시선으로 거두어들인다는 측면에서 그렇하다. (<나쁜 남자>를 계기로 나는 더 이상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세계를 여성 성기에 대한 퇴행이라고 명명하지 않기로 했다. 퇴행은 심리적으로 성숙을 담보로 하여 뒷걸음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김기덕의 경우 그것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고착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이 대사 안에 녹아있는 한기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소통 대신 자학을 택한 자의 증오이다. 그러나 그 자학뒤에는 선화에 대한 무자비한 키스로 대표되는 여성 신체에 대한 욕망, 무자비한 흡착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나쁜 남자>는 ‘한 여성의 김기덕 세계로의 강제 편입기’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조차도 흉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김기덕의 관객들에 향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제 편입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 징하고, 김기덕 그가 자신의 삶을 용서하지 않는 한, 그는 늘 또 그렇게 자신의 강제 편입의 욕망을 연민과 고통의 언덕에 기댈 것이다.

나는 차라리 김기덕의 여자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미끈한 육신이 그의 남자 주인공들처럼 추해지기를 바란다. 또 하나의 야생 동물의 식성을 지닌 여성 작가 천운영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들처럼 곱추의 문신 뜨는 여자거나 소골을 먹는 늙은 할미이거나 월경이 정지된 반편이여야 할 것 같다. 아마도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 <나쁜 남자>와 달리 그토록 여성 학대적이면서도 긴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줄리에타 마시나의 반편스러운 저능과 추함에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주변부 여성’이란 허위진술이다. 나의 이 진술에 의문을 품는 독자들이 있다면 일찍이 존 버거가 추천했던 다음과 실험을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 포스터에 등장하는 여 주인공 서원의 잘 빠진 누드를 남자의 미끈한 누드로, 조재현이 분한 남자를 짐승 같은 눈빛의 삭발한 여자로 교체시켜 보자. 머릿 속에서 상상하거나 복제 상태 위에서 그려 넣어도 좋다. 그리고 그 변형이 가하는 불쾌함과 낯설음을 맞아 들여 보자. 그것이 바로 김기덕의 영화 속의 여성들의 육체에 가하는 가상의 폭력, 뿐만 아니라 김기덕의 영화가 현실의 여성관객에게 가하는 실제적 폭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net▶ 讚 김기덕 反 II 심영섭이 말하는 김기덕 (1) ▶ 讚 김기덕 反 II 정성일이 말하는 김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