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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 김기덕 反 II 심영섭이 말하는 김기덕 (1)
2002-01-25

여성을 재예속화하는 4중의 시선

“실레가 사람을 알 수 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뒤틀리고 고립된 존재로 보았다면 그것은 그가 대상 인물에 잠재한 정신적인 갈등을 느꼈기 때문만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자기 인식이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모든 초상화는 화가의 내면의 풍경과 흡사하며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키는 거울이다. 초상화는 실레가 비틀린 바깥세상과 인연을 맺는 자신만의 방식인 것이다.”(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에곤 실레> 중에서)

1910년 에곤 실레가 그린 가장 흥미로운 자화상은 <거울 앞에 선 누드를 그리는 자화상>이었다. 이 그림을 제외한 많은 실레의 자화상은 흔히 두 가지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퀭한 눈으로 스스로 성기를 드러내어 자위를 하는 그림이나 고통으로 울부짖으면서도 그것을 영광스러워하는 자신을 순교자로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자화상만은 예외적이었는데, 실레는 자화상을 제작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인 거울,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누드모델과 함께 등장한다.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실레가 그렇하듯 모델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가는 몸매와 작지만 단단한 가슴을 가진 여자는 흘러내린 스타킹과 엉덩이에 걸치고 있는 손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녀의 음모에 시선이 가도록 배치된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실레의 시선이다. 그는 자신의 모델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모델을 그린다기보다 이 그림을 볼 관객을 쏘아보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의 최후의 작품 중 하나인 <가족>을 제외한 실레의 초상화들은 비록 그가 옆모습의 포즈를 취할 때라도 관객을 쳐다보는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덕 감독 스스로가 공인하고 있고, 또한 <파란 대문>과 <나쁜 남자>에 연달아 등장하며 은근히 오마주를 바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중 하나는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놀랄 정도로 <나쁜 남자>의 포스터와 닮아 있다. <나쁜 남자>의 포스터는 마치 실레의 <거울 앞에 선 누드의 자화상>과 정반대의 각도로 그려진 김기덕 영화세계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신체포기 각서를 쓰고 사창가의 작부가 된 여자는 전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자신의 얼굴 대신 그의 얼굴이 비추어진 거울을 보며 어쩌면 그녀, 창녀가 된 백설공주는 자신의 포주와 자신이 하나되었음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남자의 시선은 여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나신에 시선이 가도록 전시해놓은 뒤, 정작 그는 짐승의 눈빛으로 관객이라는 먹잇감을 포획하고 있는 것이다.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

에곤 실레의 이야기는 뒤에 더 하기로 하고 이 <나쁜 남자>에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김기덕 감독은 왜 <나쁜 남자>의 장소로 사창가를 택했는가? 김기덕의 많은 여자들이 몸을 팔고 강간당했지만, 김기덕의 영화세상에서 사창가는 늘 은유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악어>의 한강도 <파란 대문>의 세상 안쪽인 새장 여인숙이나 물 속의 님프 희진이 사는 섬도 거대한 하나의 정글로 물이 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수취인불명>의 경우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단선적인 인간시장의 비유를 넘어서 개를 사고 파는 이 땅은 자본주의적인 착취와 미군이라는 혼혈의 정체성이 스며든 지정학적으로 사회적인 통찰마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쁜 남자>의 사창가는 여러모로 직설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곳이다. 그곳은 한기와 선화의 사랑이 꽃피는 동네(?)인 동시에 여자들은 몸을 팔고 남자들은 몸을 사는 장소이다. 그곳은 사창가이다.

일단은 유리문으로 여체를 전시할 수 있는 사창가의 특성을 이용하여 김기덕 감독은 이 장소를 여러 가지 각도의 관음이 가능한 핍쇼의 장소로 용도 변경시킨다. 그곳에서 한기는 선화의 매춘을 일방향의 거울을 통해서 지켜본다. 그때 한기의 모습을 ‘아주 섬뜩한 성화(聖畵)’라고 표현한 한 평자의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김기덕을 향한 순진한 선의가 놀라울 뿐이다. 그 평자가 이미지 분석에 몰두하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나쁜 남자>의 이 섬뜩한 성화(性畵)에 나오는 선화라는 여자의 육체는 <나쁜 남자>라는 텍스트 내에서만도 자그마치 삼중의 시선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사창가 장면을 묘사하면서 김기덕은 사창가를 지배하는 세 남자, 한기, 명수, 정태의 컨테이너를 사창가의 위쪽에 위치시킨다. 그들의 눈높이로 내려다보는 사창가는 연옥의 공간처럼 몸을 파는 여자와 사는 남자들로 북적거리는 저잣거리의 장소이다. 그 컨테이너에서 세 남자는 한 여대생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신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우정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저당잡혀서라도 한기를 구출해내려는 정의로운 ‘사내’들이 되어간다.

그리고 한기가 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선화를 위해 추락하듯 다시 사창가의 거리로 내려왔을 때, 그때도 한기와 사내들은 여전히 유리 너머 뒤의 여자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간의 시선을 담지하는 사내들의 시선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창가의 가장 내밀한 장소조차도 일방향의 거울을 장치함으로써 가장 사적인 공간을 확보했다고 믿는 창녀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다시 은밀한 관음자의 위치에서 자본과 육체의 거래장소로 매춘의 현장을 관음한다. 그리하여 <나쁜 남자>의 시선 구조는 다다미 미장센에 버금가는 침대 미장센으로 전시된 여성들의 육체를 ‘내려다보는’ 남성들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시선이 권력이라면 <나쁜 남자>의 사창가야말로 김기덕 감독의 권력의지가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곳이리라. 이로써 여성의 육체에 대한 전시와 이를 관음하는 남성의 시선이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장소로서의 사창가는 스크린 안에서 인간 구원과 추악함의 현현이라는 방패막이하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사창가가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나쁜 남자>에서 재현되는 사창가의 모습이다. 이 재현이 더욱더 위험해지는 것은 김기덕 영화에서 그 사창가의 재현이 실제 사창가와 혼동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관객이라는 네 번째 시선을 몰아간다는 것이다(반대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해상화>는 사창가에 얽힌 낭만주의나 야생의 판타지를 걷어내고 사창가를 곧 없어질 퇴폐적 시대의 장소 또 전복적인 성적 해방구로 독해 가능하게 한다. 그는 이를 위해 철처히 15도 내외의 팬숏만을 사용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기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명수와 정태를 구타하는 장면은 <나쁜 남자>의 부조리한 이데올로기를 다시 한번 반추하게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매춘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한기의 시선은 아버지의 약값을 위해 창녀들에게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이를 지켜보는 명수와 정태의 시선보다 더 순결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 <나쁜 남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카메라의 내려다보는 시선은 영화 안에서도 하나의 계급간의 특권을 형성하며 거의 생래적으로 남성 판타지를 구현하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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