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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안아주고 싶은, 두 친구들아
2002-01-30

신경숙의 이창

‘바밤바’나 ‘아맛나’라는 아이스크림 이름을 기억하는가. 그들에게도 호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배스킨라빈스나 하겐다즈에 밀려 누구도 거들떠도 안 보는 아이스크림을 우리집 앞 슈퍼에서는 판다. 엊그제는 그 앞을 지나다가 ‘바밤바’나 한개 사갈까 하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돈을 계산하는 탁자 위에 웬 하얀상자 하나가 거꾸로 뒤집어진 채 놓여 있는데 상자가 살살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해서 저 상자가 왜 혼자 움직여요? 했더니 아저씨가 상자를 들어올리는데 내 주먹보다 더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실뭉치처럼 엎어져 있었다. 얼마나 작은지 그만 내 입에서 아이구,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나왔다. 지금껏 그보다 더 작은 고양이는 보질 못했다. 다리에 아직 근력도 안 붙어 잘 걷지를 못해 비칠비칠거렸다. 태어난 지 한달이 아직 안 되었단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가버리는데 너무 작으니까 찾기가 힘들어 어디에 있는지 얼른 알아보려고 상자를 덮어놓은 거라 했다. 세상의 어린 것들만큼 기성세대에게 거울 역할을 하는 게 있을까. 어찌 해볼 도리없이 순하고 부드러워서 연민을 넘어서 종내는 죄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가 자꾸 엇나가는데 그 어린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생각났다는 말을 하려는 참이다. 근래에 보았던 한국영화 중에서 명장면을 뽑으라면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이얼이 벌거벗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고양이를 부탁해>에서의 배두나가 소식이 끊긴 친구집에 갔다가 할머니가 건네주는 만두를 꾸역꾸역 받아먹는 장면을 꼽을 것이다. 벌거벗고 노래부르는 장면은 내겐 충격이었고 사랑스러운 배두나가 만두를 받아먹는 장면은 눈물겨웠다.

내가 쓴 어느 소설에는 행복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화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인생에서 둘 중 하나만 이루어져도 더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이얼을 보라.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은 것은 그의 꿈이었으나 그는 지금 생계 때문에 술에 취해 누드로 춤을 춰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상황에까지 와 있다. 게다가 무례한 그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려거든 저희들같이 옷을 벗고 연주를 하라고 요구한다. 만약 이얼이 더럽다고 소리치며 옷을 벗지 않고 기타를 내던지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면 나에게 그 장면은 그렇게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의 요구대로 옷을 벗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이얼의 모습에서 나는 그만 먹먹해져버렸다. 그래서 우리 친구들 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놈은 너뿐인데 너 지금 행복하니?라는 질문 앞에서 이얼처럼 고통을 느꼈으며 힘이 들고 종내는 할말을 잃었다.

이와는 반대로 만두를 참말로 실감나게 먹었던 <고양이를 부탁해>의 배두나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영화 속의 그애의 앞날이 매우 불투명한데도 그애에게선 인간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잘 생각해 보라. 꼭 그와 비슷한 이들을 우리는 하나쯤 친구로 곁에 두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뭘 부탁하면 거절을 못하고 자기하고 관련이 있든 없든 남에게 악담을 못하고 지하철 같은 데서 누가 뭐 사라고 하면 쭈뼛거리다가 칫솔 따위를 꼭 사고야 말며 이 친구와 저 친구가 티격태격하면 중간에서 더 애를 태우며 어떻게 좀 잘해보려고 야! 야! 말을 섞게 해보려는 친구. 별로 튀지 않지만 꿈과 개성이 있으며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토록 사랑스럽다는 것을 깜빡 잊기도 하지만 보면볼수록 오목조목 미운 곳이 없는 그런 사람. 배두나는 마치 현실의 자기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척척 잘도 해냈다.

그애는 어쩌면 만두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친구 할머니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목이 미어지는데도 받아먹고 있다. 할머니가 한개 더 먹으라고 하니까 입 안에 만두가 남아 있는데도 또 그걸 받아 밀어넣는다. 곁에 있으면 가슴에 깊이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런 배두나가 가족사진 속에서 자신만 싹 오려내고 일년 동안 자신만큼 집안 일을 열심히 도왔으면 받았을 만큼의 돈을 훔쳐내 가출을 시도했을 때 어찌 그리 속이 후련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는지.

나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지탱시켜줄 아이들은 어디로도 갈곳이 없는 친구와 함께하기로 하며 광부들이나 쓰는 빛이 쏟아져나오는 안전등을 쓰고 새벽 공기 속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 그런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