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so what
[SO WHAT] 장님이 눈먼 말을 탄다면?

간만에 버스 안에서 <나는 꼼수다>를 들었다. ‘봉알단, 정우택 음모, 터널 디도스’라는 부제를 단 ‘봉주 22회’였다. 듣다보니 뭐랄까? 수업 중에 멍때리고 있다가 담임한테 분필로 마빡을 맞은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돋는다. 터널 디도스라니? 난 처음엔 또 무슨 새로 나온 악성코드 같은 건가 싶었다. 알고 보니 지난해 4.27 국회의원 재/보선 때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쪽이 유시민에게 날린 1억원짜리 하이킥이었던 거다. 나 참, 이걸 이제야 주워듣다니.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생각해보니, 가만 이거 참 절묘한 말이다. 디도스, 분산공격과 좀비 PC, 그리고 비정상적인 트래픽의 폭주로 인한 마비.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천재다 천재. 낮에는 카니발로 고령의 유권자들을 실어나르고, 저녁에는 창원터널의 교통 체증을 유발해 젊은 유권자들이 제 시간에 투표장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공작. 그래서 ‘터널 디도스’. 이 희한하고 뻔뻔한 사건에 대부분의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진다. 이런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서 파나? 돈 있으면 나도 좀 사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인데, 세상 참 속 편하게 살았다. 얼른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발로 차버려야지. 이놈은 다름 아닌 내 눈을 가린 헝겊이고, 이거야말로 병신이 따로 없는 세상을 위한 혓바닥 아닌가?

<남영동1985>에 이런 장면이 있다. 고 김근태 의원을 모델로 한 주인공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형사들이 태연하게 야구 중계를 듣는 장면. 움찔했다. 화사한 태양 아래 환호하는 관중은 바로 나의 모습. 모르긴 몰라도 그 시절 수많은 국민이 나만큼이나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보냈을 것이라 위안도 해보지만, 영문도 모른 채 야만을 향해 달려갔던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민주화를 열망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남영동1985>나 <26년>을 극장에서 보는 나는 참 다행일까 수치일까? 아무튼 무언가 아찔하다. 표현의 자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직 쌩쌩하게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 암살 계획을 실행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버젓이 극장에 걸리다니 말이다.

그래서 안심했냐고? 미디어를 장악한 정권이 국민 알기를 뭣같이 알고는 자기들 멋대로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 마당에 무슨. 새삼 70, 80년대가 오버랩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는다고? 틀렸다. 요샌 기술이 좋아서 얼마든지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생양아치들이 기사를 만들고 뉴스를 편집하고, 아첨에 가까운 논평을 무한 반복한다 해도 이젠 그 꼴을 애잔함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뭐랄까? 솔직히 자기 혼자 거울 보며 가위바위보하는 꼴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아, 쟤가 좀 맛이 갔구나 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봐도 너무 거시기 하니까.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들고일어나 파업하고 시위하고 저항했지만, 기소되고, 해직당하고, 좌천되고….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참고로 내 주변 사람 중엔 한명도 없었다. 암울하다. 대선이 다가오고 말도 안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볼수록 눈먼 말에 올라탄 장님이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리는 기분.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