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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AT] 영화와 진짜 솔로대첩

이유야 어찌됐든 요즘 같은 때 나만 한 열성 영화 관객도 드물 것 같다. 극장에 가서 일주일에 한편 이상 꼬박꼬박 영화를 본다. 게다가 문화 환경이 심란하게 척박한 강원도 도민으로 사는 바람에 영화 한편 보려면 버스로 왕복 4시간 거리를 이동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지나간 고전영화들을 일주일이면 적어도 대여섯편씩은 본다. 그게 다 일 때문이지만(지방용 케이블TV의 한 영화 채널에 출연하고 있다) 여하튼 덕분에 개봉영화는 물론이고 고전영화를 내 생활의 중심에 놓고 나름대로 재미나게 살고 있다.

생각해보니 가장 최근에 본 화제의 개봉영화 <반창꼬> <레미제라블> <타워>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사랑한다는 건 결국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구조+구원) 일이라는 것. 특히 “사람 구하기 좋은 날씨다”라고 출동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외치던 <반창꼬>의 소방대장이 나중에는 “연애하기 좋은 날씨다”라고 변주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화제의 검색어 ‘솔로대첩’ 현상을 보니 유대인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200일 동안 산속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인 실화를 다룬 영화 <디파이언스>도 생각났다. 언제 총알이 날아와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혹한과 배고픔이라는 무형의 적까지 무섭게 달려들고 있다. 그 와중에도 인간들이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사랑 고백을 하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한다. 심지어 그 살벌한 상황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혼식마저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사랑을 구하는 인간들의 욕구가 참 신성하고 위대하구나 싶었다. 내 스스로 ‘빠’임을 시인하게 만드는 유일한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가 말한다. “당신이 날 구했다”고. 여자가 답한다. “당신이 먼저 날 구했으니까요.”

전세계가 점차 대공황에 휩싸여가고 있다. 성장 시대는 이제 끝이 나고 모두들 고질적인 구조적 불안과 빈곤과 싸워야 하는 시대가 됐다. 수백명의 대졸자나 석사들이 정규직 미화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웃지 못하는 현실이다. 은행권에서는 감원이 심한데다가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정규직이라도 창구 영업 이외의 업무가 늘어 8시 반 이후의 퇴근이 일상화됐다. 대학 졸업생의 절반이 일자리 없이 지내는 와중에 설사 직장이 있다 해도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세계 최고의 직장 스트레스 속에서 죽을 만큼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지금 인류는 만성화된 식량 위기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겨우 30% 안팎이다. 전쟁이 따로 없는 거다. 그 속에서 다 함께 살아남으려면 싸워야 할 게 많다. 경쟁자는 먹을 것을 놓고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동지다. 다 함께 힘을 합쳐 재벌이나 기득권의 이윤 추구가 아닌 민중의 요구에 맞추어진 복지국가형 자본주의 체제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싸워야 할 무형의 적들이 너무 많다. 사력을 다해 국가의 복지국가화를 저지하는 체제와 싸워야 하고, 대선 패배로 만연된 냉소와 싸워야 하고, 약자를 찍어누르는 권위에 대들어야 하고, 무관심이라는 강적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 ‘디파이언스’(defiance)는 저항을 의미한다. 그 전쟁 같은 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먼저 구하고 싶은 대상을 찾는 것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