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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AT]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쇠줄에 묶여 있는 개를 보면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하다. 튼튼한 네 다리가 있어도 달릴 수 없는 개의 처지가 불쌍하다. 심지어 ‘자신들의 충직하고 영리한 벗’이라고 부르는 개를 쇠줄에 묶어두고도 양심의 가책이라는 걸 전혀 느끼지 않는 인간들의 이기심을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리게 싫어진다. 쇼펜하우어가 ‘그들의 짧은 생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인간들’을 욕하며 개를 쇠사슬에 매어두는 자는 개에게 물리는 봉변을 당해도 싸다 했는데 나 역시 같은 심정이 되곤 한다. 그렇다. 아무래도 난 전생에 개였던 것 같다. 고양이도, 고라니도, 소나 돼지도 좋아하지만 개만큼 감정이입이 잘되지는 않는다. 예전에 살던 집 근처 등산로에 묶여 있던 개(등산로에서 진입할 수 있는 집에서 키우던 개) 같은 경우 구름처럼 하얀 외모가 예쁘기도 했지만 등산객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위험한 인물인지 아닌지 감지할 만큼 똑똑하고 센스있는 녀석이어서 그 처지가 더 안타까웠다. 이사 가기 전에 녀석을 극적으로 구출해서 함께 시골에 내려가는 꿈도 자주 꿨는데 한번도 실행하지는 못한 죄책감이 간혹 내 마음을 짓누른다.

그제는 아주 희한한 일이 있었다. 좀 걷고 싶어서 마을 중간쯤에 차를 세워두고 백운상회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그 마당 앞에 웬 못 보던 잘생긴 황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내가 맥주 캔을 사가지고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 어귀로 오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따라오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함께 한참을 걸었다. 원래 잘 아는 사이라도 되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며 눈빛도 주고받고 짧은 대화도 나누고. “저 아저씨 알아?” “아니, 몰라.” “왠지 분위기가 무섭네.” “너 보기보다 겁 많은데. 위험 인물 아니니까 그냥 태연하게 걸어.” 뭐 이런 식의 필연적인 대화를 하며 어떤 유대감이 생겼달까? 그 때문인지 녀석은 결국 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우리 집까지 쫓아와 밥과 물을 얻어먹고 심지어 창고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 어쩌면 이대로 함께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떨리는 기대감에 그 다음날 시내에 가서 4만4천원짜리 개집을 사가지고 왔는데 그사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게 같이 살고 싶으면 얼마간 묶어두어야 한다고 했잖아.” 남편은 아쉬운 듯 말했다. 하긴 남편은 개라면 아무리 사이즈가 작아도 무조건 무섭다고 하는 종류의 인간인데 그 황구만큼은 무서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함께 있는 느낌이 이상하게 설레고 좋다고 했다. “안돼. 그래도 묶어두는 건 무조건 반대야. 묶어두면 좋은 머리도 아둔해지고 좋은 성격도 나빠져. 생각해봐. 동네에서 아무 때나 짖어서 우리의 휴식을 방해하던 머리 나쁘고 성격 이상하던 녀석들은 다 묶여 있던 개들이었어. 하지만 저렇게 애초부터 자유로운 상태의 개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고 신비롭고 다정해. 호기심도 많고.”

물론 나 역시 인사도 없이 사라진 개가 원망스러웠다. “뭐야, 그렇게 갈 거면 어젯밤에는 왜 그렇게 안 가고 버틴 거야. 묶여 있다가 해방되어 이제 내가 함께 살고 싶은 인간은 내가 선택한다고 선언하고 날 따라온 게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착각이나 하게 만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 마지막 장면에서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표표히 사라진 리처드 파커만큼이나 나의 개가 더욱더 신비스럽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