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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역사를 거슬러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 <이국정원> 발굴에서 복원/상영까지 그 3년의 기록

<이국정원>(감독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키 미쓰오 출연 김진규, 윤일봉, 우민, 최무룡)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한국연예주식회사와 홍콩 쇼브러더스의 합작품인 <이국정원>은 1957년에 촬영해 1958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극영화 컬러필름이다. 영화는 홍콩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국인 작곡가(김진규)와 홍콩 여가수(우민)의 러브 스토리다. 서로의 과거를 모른 채 사랑에 빠지지만 알고 보니 이들이 어릴 적 헤어진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설정은 이후 한국의 드라마에서 무수히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이국정원>을 한국 멜로드라마의 전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 홍콩을 부지런히 오가며 <이국정원> 발굴에 힘쓴 한국영상자료원 전 해외수집 담당 최소원씨가 험난했던 3년간의 필름발굴 과정을 전해왔다. <이국정원>에 출연한 배우 윤일봉과 홍영순의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최초의 한/홍 합작”,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컬러 극영화필름”이라는 기념비적 수식어가 두개나 붙는 <이국정원>은 한국 영화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작품이지만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제작연도는 1957년. 반세기가 지난 영화필름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영상자료원에서 수집 업무를 하면서 가장 찾고 싶은 영화 중 하나였던 것은 당연했다.

<이국정원>의 소재에 대한 심증을 굳히다

<이국정원> 수집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홍콩과의 합작영화 혹은 홍콩으로 수출된 영화의 자취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흥미진진한지, 그 난맥상에 대한 이야기가 전제돼야 할 것 같다. 필자가 처음 해외 수집 업무를 맡았던 2009년은 홍콩필름아카이브에서 발굴된 한국영화 십수편을 몇년에 걸쳐 수집해오던 막바지 단계였다. 이때부터 홍콩과의 인연이 시작됐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홍콩필름아카이브와 서류 씨름을 시작했다. 동시에 <이국정원>을 시작으로 홍콩에서 상영되었거나 홍콩을 경유해 다른 나라로 수출됐거나 혹은 합작한 영화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거의 전무했다. 영화연감에 언제 어느 나라로 수출되었다는 정도의 간략한 정보는 있었지만, 수출된 뒤 원판을 회수하지 못한 영화가 수없이 많다는 증언 외에는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할 만한 손에 잡히는 공식적인 정보가 턱도 없이 부족했다. 반면 중국의 일부 불법 인터넷 영화공유 사이트에서는 놀랍게도 중국영화로 둔갑한 한국영화, 합작영화들이 심하게 훼손된 화질로 떠돌고 있었는데 한국의 ‘오타쿠’들이 이 사이트를 찾아 댓글로 한국 영화임을 밝히고, 해당영화에 대한 제보도 해주었다. 이렇게 동영상이 떠돈다는 것은 어딘가에 필름이, 아니 베타테이프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홍콩을 드나들면서 홍콩에서 오랫동안 필름현상소와 제작사를 운영했던 분의 미망인인 마담 테오를 알게 됐다. 이분은 남편의 뒤를 이어 현상소를 운영했는데 한/홍 합작영화도 몇편 제작했고, 한국에서 영화필름을 수입해서 프린트를 제작해 홍콩은 물론 전세계로 수출하는 일도 했다. 마담 테오는 현상소 문을 닫을 때 한국영화 원판필름들은 수입업자들에게 모두 돌려주었다고 했는데, 다른 현상소들도 그렇게 했을까 하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담 테오의 소개로 만난 또 한분, 미스터 첸은 한국영화 베타테이프 한 꾸러미를 노끈으로 묶어 가지고 나왔다. 미스터 첸은 1980년대에 홍콩영화 제작현장에서 일하면서, 제때 임금을 받지 못한 대신 한국영화 원판필름 몇편을 받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중에는 사미자 출연의 <맹수>(감독 임원식, 1969) 같은 영화도 있다. 그는 이 같은 한국영화들로 돈을 벌기 위해 더빙을 해서 프린트를 제작했다. 이후 필름의 창고료가 부담스러워지자 집 거실에 필름들을 쌓아놓았고, 그러다 거실이 비좁아지자 먼저 돈이 안될 것 같은 한국 영화 원판필름을 홍콩 바다에 몰래 내다버렸다고 한다. 몇년 뒤에는 결국 베타테이프만 남기고 더빙된 필름을 모두 바다에 버렸다고. 몇편의 한국영화 원판필름이 홍콩 앞바다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미스터 첸의 이야기 중에 필자를 가장 힘빠지게 했던 것은 한국에서 수입한 영화의 제명을 새롭게 짓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 이름도 아무렇게나 지어넣은 뒤 배급했다는 사실이다. 미스터 첸은 본인의 이름을 감독 명으로 썼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영화로 탈바꿈한 한국영화의 수집은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위에 서술한 이야기는 <이국정원>보다 시기가 훨씬 늦은 영화들의 경우다. 하지만 <이국정원>의 발굴 과정과 뗄 수 없는 ‘홍콩 대탐험’의 여정의 일부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국정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009년 홍콩필름아카이브에 갔을 때 아카이브의 연구팀을 잠깐 만났다. 자료원에도 영화사연구소가 있어 영화인 구술사 연구를 하고 있는데 홍콩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홍 합작과 관련한 구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신필름(1960년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 관련해서 공동으로 구술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발간한 합작 관련 책을 한권 주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책에 수록된 <이국정원>에 대한 홍콩 연구자의 글을 읽어가다 문득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연구자 키니아 야오 숙팅(Kinnia Yau Shuk-ting)의 ‘<이국정원>에 관하여’라는 글에 실린 “자신들의 옛날 필름을 풀지 않는 쇼(브러더스) 필름을 볼 수는 없었다”라는 문장이었다. 쇼브러더스에 <이국정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홍콩필름아카이브도 <이국정원>을 찾기 위해 오히려 자료원쪽에 문의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 한줄의 문구는 강력한 심증이 되어 주변 동료들과 연구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보를 종합해보면 쇼브러더스는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수백편의 고전영화 배급권을 홍콩의 미디어기업인 셀레셜픽처스라는 곳에 팔았고,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고전영화가 DVD로 출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달기>(최인현/강풍, 1964)처럼 한/홍 합작인 경우와 <철인>(정창화, 1972)처럼 한국 감독이 쇼브러더스에 고용되어 제작된 두 가지 경우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자료원에서 프린트를 빌려 상영하곤 한다. 이들 프린트 또한 수집할 가치가 충분히 있으므로 셀레셜픽처스와 접촉을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 합작영화를 연구 중인 미시간대학의 이상준 연구자로부터 쇼브러더스에서 1970년대부터 일하고 있는 원로 웡카히 선생의 연락처도 얻었다.

어렵사리 발견한 필름은 끈적하게 눌어붙었고…

2010년, 다시 홍콩으로 향했다. 셀레셜픽처스가 보유한 합작영화와 한국 감독의 쇼브러더스영화 필름에 대한 수집 논의가 공식 목적이었지만 <이국정원>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든 얻고 싶었다. 쇼브러더스가 우리의 문의에 대해 전혀 답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셀레셜픽처스의 중견간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국정원>의 필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간결한 답변이었다. 우리는 <이국정원>이 얼마나 중요한 영화인지를 다시 설명하고 혹 다른 기록은 남은 게 없는지 다시 한번 찾아봐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잠시 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메모가 하나 남아 있는데 <이국정원>도 구입했었으나 필름 상태가 좋지 않아 돌려보내고 다른 필름으로 교환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쇼브러더스가 <이국정원>의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줄은 미처 몰랐다.

셀레셜픽처스에 다녀온 뒤로 쇼브러더스에 애정공세를 시작했다. 이메일과 전화는 물론이고 자료원의 발간물, DVD도 박스로 챙겨 보냈고, 기관장 공식서한도 수차례 보냈다. 영어로도 보내보고 중국어로도 보내봤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간혹 어렵게 통화가 되면 “지금은 바쁘다. 조만간 확인해보겠다”는 회피성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그때, 홍콩필름아카이브가 자료원이 보유한 디지털 복원 기술과 노하우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으며 우리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났다. 쇼브러더스를 설득하려면 좀더 적극적인 제안이 필요할 것 같았다. 쇼브러더스는 자체적인 아카이브와 대규모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는 영화사인데 상태가 좋지 않은 고전필름을, 어쩌면 복원만으로도 엄청난 예산이 필요할지 모를 필름을 재원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이 보유 사실을 공개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내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필름의 보존 여부조차 확인을 안 해주는 것이 아닐까. 역시 홍콩다웠다. 스펠링 하나까지 꼼꼼하게 보는 철두철미함이 바로 ‘홍콩 스타일’이다. 그래서 자료원이 복원을 전제로 수집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 주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제안에 대해 쇼브러더스는 곧바로 회신을 해왔다. 자신들이 <이국정원> 필름을 가지고 있고, 복원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고 말이다.

곧바로 출장길에 올라 웡카히 선생을 대면했다. 웡카히 선생은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사무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국정원>과 관련된 대본, 스틸사진, 포스터를 보여주고 스캔한 이미지를 줄 수 있다며 부하 직원에게 스캔을 지시했다. 그러곤 우리에게 물었다. <이국정원> 때문에 자료원에서 3명의 직원이 온 것인지, 다른 용건이 또 있는지. 자료원에서 오직 <이국정원>수집을 위해 담당자, 수집부서장, 그리고 필름복원담당 베테랑 직원까지 함께 달려와 매우 진지하게 예우를 갖추는 것을 보고 그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집을 하면서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고전영화에 대한 경외감, 원로 영화인에 대한 존경심이 아닐까 싶다. 이 진심이 느껴지면 상대는 마술처럼 마음을 연다. 웡카히 선생의 사무적이던 태도가 돌변하면서 우리는 쇼브러더스의 전성기에 대한 웡카히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행복한 반나절을 보냈다. 우선 쇼브러더스가 복원한 고전영화에 대해 들었고, 선생의 차를 타고 전성기 시절의 스튜디오와 최근에 건립한 디지털 스튜디오를 구경했다. 쇼브러더스는 더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무협영화 전성기를 풍미했던 쇼브러더스가 아니었다. 무협의 거리였던 옛 스튜디오는 휑하니 빈 건물로 남았지만 그 규모와 위용은 역시 대단했다. 새롭게 건립한 디지털 스튜디오는 해외영화 제작팀이 대여하거나 TV제작 용도로 사용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쇼브러더스의 아카이브에 이르러서야 <이국정원> 필름을 처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홍콩 사람들답게 필름 복원과 관련한 협의는 까다로웠다. 우선 우리쪽 필름복원 담당자가 꼼꼼하게 필름 상태를 점검했다. 필름은 시큼한 냄새가 심하게 나는 초산화가 이미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9권 모두 각각의 릴이 끈적하게 한덩어리로 눌어붙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였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복원하겠다고 그들을 설득했고, 복원 사전작업에 필요한 샘플 2권을 어렵게 빌려올 수 있었다.

홍콩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필름들을 근심함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웡카히 선생은 이제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쇼브러더스는 스캔한 이미지를 가질 테니 <이국정원>의 대본, 포스터, 스틸사진의 원본을 가져가라고 내주었다. 불행히도 사운드필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운드필름이 유실된 상태라 대본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 고마웠다. 그날 저녁 우리는 홍콩의 한 어촌 식당에 초대받아 둥근 탁자에 홍콩 영화인들과 둘러앉았다. 마치 형님과 아우들이 “따거!”(형님)를 외치며 왁자지껄 의리를 논하는 홍콩영화가 데자부(!)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우리는 <이국정원> 원판필름 2권과 포스터, 대본 등의 비필름자료(원본!)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가지고 온 2권의 필름은 도착과 동시에 자료원의 보존기술센터에서 기본적인 검수를 했다. 필름은 시급하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고, 마스터 복제는 국내 기술로는 힘들겠다는 결론이 났다. 따라서 <이국정원> 필름은 일본의 이마지카현상소에서 마스터 복제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국정원> 발굴에 3년이 걸렸다. 아주 작은 실마리와 심증으로 시작한 <이국정원> 발굴은 홍콩필름아카이브, 마담 테오, 미스터 첸과 같은 홍콩 영화계 인맥, 국내외 영화 연구자, 국내 원로 영화인들의 조언과 구술자료 그리고 어딘가 필름이 있다는 끈질긴 믿음(!)과 선배 영화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 같은 가치들이 복잡하게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 3년 동안 ‘얼마의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라는 식의 단순한 계량적 행정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수집 업무다. 긴 안목을 가지고, 한국영화 수집을 위해 매우 중요한 기초조사에 예산과 인력을 배정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9년 이후 자료원 수집부의 예산은 꾸준히 삭감되어 현재는 반 토막이 난 실정이다.

<이국정원>을 비롯한 일련의 홍콩 소재 한국영화를 수집하면서 향후 조사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도 절감했다. 홍콩의 다른 현상소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영화 필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사실 대만은 조사에 착수도 못한 상태다. 또한 수집 조사는 한국 영화사 연구와 상호적으로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국정원> 발굴을 계기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고 그것이 다시 수집을 위한 신선한 영감 혹은 실마리가 되어 다음 조사로 이어지는 일을 기대해본다. 더불어 <이국정원> 필름의 열악한 상태를 확인했듯이, 영화필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확하고 성실하게 이미지와 사운드 정보를 잃어가고 있다. 해외 아카이브들은 자국의 필름이 아닌 영화필름에 대해 그 어떤 투자도 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현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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