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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베를린 영화제
2002-02-21

아시아 영화 부진 속 <나쁜 남자> 등 호평“아, 잠깐만요. 내 동료가 방금 와서 얘기해주는데 주디 덴치 당신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는군요. 축하합니다.(짝짝짝짝)”2월12일 열렸던 경쟁작 <아이리스>의 기자회견장의 작은 에피소드는 2월17일 12일간의 일정을 마감한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풍경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6일 개막작 <헤븐> 상영을 시작으로 그 52번째 막을 열었던 베를린영화제는 역대 최고 수준의 관중 수 동원과 예년에 크게 떨어지지 않은 스타, 유명 감독들의 왕림 등 나름의 성과를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마개를 따놓은 독일 맥주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일부 기자들은 금곰상의 새 주인보다는 이번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중 아카데미상 후보로 뽑힌 감독과 스타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였고, 대다수의 관객 역시 금곰상보다는 동계올림픽의 금메달을 신경쓰는 눈치였다.흥행은 청신호, 완성도는 적신호?어찌됐건 이번 베를린영화제가 흥행에 성공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42만여명의 관객이 극장을 들락거릴 거라는 조직위원회의 전망처럼, 베를린영화제의 중심부인 포츠다머 플라츠 주변은 시도 때도 없이 붐볐다. 메인 극장인 시네막스와 시네스타 매표소는 낮부터 저녁까지 관객으로 북적거렸고, 메인 행사장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의 붉은 카펫 부근에는 혹시 스타가 얼굴을 비추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행인들이 붙박이처럼 멈춰서 있었다. 또 개막작 <헤븐>을 시작으로 프랑스에서 개봉일 흥행 신기록을 세웠던 ,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신작 <고스포드 파크>, 러셀 크로가 출연하는 <뷰티풀 마인드> 같은 작품의 표는 일찌감치 동나 일부 작품의 경우 추가 상영이 긴급 편성되기도 했다. 이같은 흥행 성적에 대해 많은 이들은 “베를린영화제는 칸이나 베니스와 달리 상영작의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하기 때문”이라는 영화제쪽의 설명보다는 “이번 영화제에는 워낙 대중적인 작품이 많기 때문”이라는 영화제 공식 데일리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다.80개국에서 출품된 389편이 상영되는 이번 영화제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경쟁부문 작품들 역시 이같은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미 금곰상의 영광을 안은 바 있는 콘스탄티노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아멘>과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통행증>을 비롯,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숨겨진 거장 오타르 요셀리아니 감독의 <월요일 아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KT>,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쉬핑 뉴스>처럼 이미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은 베테랑 감독의 신작 등 23편의 작품이 경합을 벌인 경쟁부문은 예상보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 각국의 평론가와 영화제 관계자, 기자들은 “화제작은 있어도 문제작은 거의 없다”, 또는 “좋은 영화는 여럿 보이지만 아주 좋은 영화는 찾기 어렵다”고 논평했다. 물론 이들이 경쟁작의 대중성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이들 경쟁작 중 상영 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사람들의 입을 오르락내리락했던 작품은 <나쁜 남자> <월요일 아침> 정도였다. 또 <로얄 테넌바움> <몬스터즈 볼> 같은 미국 독립영화와 <구름 아래서> <사소한 사고> <계단 한가운데> 등은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베를린의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은 매일 각 신문과 잡지의 평론가 6명을 동원해 경쟁작의 별점을 매겨 선보였는데, 영화제 초반부에 상영됐던 이 중반이 지나도록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었다.작품의 수준과 관계없이 이번 영화제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면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영화제의 표어다. 디이터 코슬릭 신임 집행위원장에 따르면, 이 슬로건은 `9·11 테러사건` 이후 변화한 세계 정세와 지성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베를린영화제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 선정된 작품들은 영화제작자와 예술가들의 눈에 비친, 알려지지 않은 풍습이나 미신 등 다른 삶의 방식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 철학을 묘사한다. 때문에 이들 영화는 관용과 다른 사람들간의 이해를 촉진시키는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가장 쉽게 느껴지는 곳은 바로 영화제의 꽃인 경쟁부문이다. 폴란드의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남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독일의 톰 티크베어 감독이 연출했고, 미국의 앤서니 밍겔라가 프로듀서를, 호주 출신의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을 맡아 이탈리아에서 촬영된 글로벌 프로젝트이기도 한 <천국>을 개막작으로 내세운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진다. 남편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마약업자를 향해 테러를 저지르려다 운명의 장난으로 4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필리파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경찰 필리포의 이야기인 <천국>은 도심의 빌딩에 폭탄이 설치되고 폭발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작품. 물론 이같은 `관용`은 영화 바깥까지 나가진 못했다. 특히 슈뢰더 총리가 참석한 개막식장은 삼엄한 검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었던 탓에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냈다.북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대항해 오랜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던 1972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영국·아일랜드 합작품 <블러디 선데이>, `애보리진`이라 불리는 호주 원주민 출신 소년과 소녀가 백인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살며시 보여주는 <구름 아래서>,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독일이 떠들썩하게 테러활동을 벌였던 적군파(RAF)의 우두머리 안드레아스 바아더를 그리는 <바아더>,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 집시 소녀와 중산층 청년의 기묘한 관계를 그리는 <유혹들>, 김대중 납치사건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는 통치자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기관원 등의 초상을 그려내는 <KT> 등은 코슬릭이 내세운 구호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작품들이었다.한국영화, 호평 속 판매실적도 호전올 베를린 경쟁작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아시아영화의 숫자가 적었다는 점이다. 90년대 말 이후 세계 영화제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아시아영화지만, 이번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받은 작품은 <나쁜 남자> 등 3편에 불과하다. 전임 위원장 모리츠 드 하델른의 주요 노선이었던 `할리드 영화 우선권`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할리우드가 남긴 미국영화의 발자국은 미라맥스 같은 준메이저사의 `독립영화` 3편이 메우고 있다.반면 나머지 할당분을 모두 차지한 유럽영화의 비중은 가이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호사가들은 이에 대해 올해 초 유로화가 본격 도입되면서 유럽 대륙이 오랜 이상이라 할 수 있는 통합을 향한 큰발을 내디뎠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또 갈수록 경쟁이 심화되는 영화제간 경쟁을 고려할 때 칸과 베니스에 아시아영화를 빼앗긴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 유럽영화 중 독일영화가 4편을 차지한다는 점도 놀랄 만하다. 아닌게아니라 “할리우드를 옹호하는 대신 독일영화를 푸대접한다”는 자국 언론의 비난을 들었던 드 하델른과 달리, 신임 집행위원장인 디이터 코슬릭은 “나의 목적은 베를린영화제를 독일영화산업이 일체감을 갖는 영화제로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힐 정도로 독일영화를 옹호하고 있다. 그는 “독일영화에 좀더 넓은 기반과 좀더 많은 마케팅 기회”를 주기 위해 `독일영화의 조망`이라는 섹션을 신설했으며, 개막식장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로 하여금 독일영화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 확대를 약속하게끔 했다.부쩍 강해진 `텃세`를 실감하면서도 한국영화는 전반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경쟁작 <나쁜 남자>와 <KT>뿐 아니라, 포럼부문 출품작인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 등이 모두 매진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했고, 언론들의 조명을 받았다. 특히 첫 상영을 이틀 앞두고 베를린을 찾은 김기덕 감독에 대한 관심은 세계적 거장에 대한 그것과 비슷했다. 파노라마부문에 <파란 대문>이 초청된 이후 4년 만에 베를린을 찾은 그는 “수상보다는 경쟁부문에 출품된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간다는 데 초점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주연 조재현도 “세계적인 영화제를 경험한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영화제와 함께 열린 유러피안필름마켓(EFM)에서도 한국영화는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독일의 라피드 아이 무브(REM)에 독일 배급권을 판매한 것을 비롯해 <나쁜 남자>가 스칸디나비아, 구소련지역, 홍콩 등에 <고양이를 부탁해>와 가 각각 스칸디나비아에 판권을 팔았다. 특히 <나쁜 남자>의 경우 2월11일의 마켓 시사 직후 각국 영화 관계자들의 문의가 폭주해, 곧이어 열리는 미국필름마켓(AFM)에서 좋은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한편 포럼부문의 주행사인 중국 신인감독 특별전과 60년대 유럽영화를 다시 소개하는 회고전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로만 폴란스키의 <물 속의 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 등 당대 유럽 지성을 이끌었던 작품을 소개하는 회고전은 중년 이상의 관객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웹카메라로 찍힌 화면을 큰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온_라인>, 테리 길리엄 감독이 만드는 초특급 대작 <돈키호테>의 프리프로덕션에서부터 제작 중단까지 과정을 담은 <로스트 인 라 만차> 등이 포함된 파노라마부문과 수많은 어린이들의 환호 속에서 열린 어린이영화제도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빼놓을 수 없는 메뉴였다.베를린=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jungjh@hani.co.kr

<사진 설명>1. 베를린 영화제 공식 행사장 소니센터 2. 숨겨진 거장 오타르 요셀리아니 감독의 <월요일 아침>. 이 영화는 함께 경쟁부문에 참가한 <나쁜 남자><로얄 테넌바움> 등의 영화들과 함께 호평을 받았다.3.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은 프랑스에서 개봉일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제한된 공간에서 범인을 찾는 이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의 <고스포드 파크>와 자주 비교된다.4. 라세 할스토롬 감독의 <쉬핑 뉴스>. 이 작품은 주디 덴치 등 주연 배우들의 호연으로 이미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았다.5. 개막작으로 선정된 <헤븐>의 배우 지오바니 리비시, 감독 톰 티크베어, 배우 게이트 블란쳇(왼쪽부터)6. <뷰티풀 마인드>의 러셀 크로와 제니퍼 코넬리는 많은 인파를 몰고다녔다.7. <나쁜 남자>를 들고 베를린을 찾은 김기덕 감독, 서원, 조재현(왼쪽부터)8. 신임 집행위원장 디이터 코슬릭은 독일영화에 좀더 넓은 기반과 마케팅 기회를 주기 위해 `독일영화의 조망` 이라는 섹션을 신설했다.9. 사람들이 영화표를 구하기 위해 매표구앞에 모여 있다.▶ 사카모토 준지의 <KT> 첫 공개

▶ 베를린이 사랑한 거장 3인- 로버트 알트만, 빔 벤더스, 코스타 가브라스

▶ 빔 벤더스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 콘스탄틴 코스타 가브라스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