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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만화월간지 <웁스> 창간
2002-02-21

그 기획력에 희망을 건다

창간 준비단계부터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만화잡지 <웁스>가 지난 2월10일 창간호인 3월호를 발매했다. 만화잡지가 호황이던 때가 언제였는지 이제 그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기도 힘든 오늘, <웁스>는 ‘스무살 만화세대’를 향해 “만화문화의 중심으로 돌아”오라고 주문한다. 박성식 편집장은 <로보트 태권V>를 볼 때 느꼈던 뜨거운 열기, <철완 아톰>과 <비트> <슬램덩크>에서 보여준 고난에 굴하지 않는 도전과 감동적인 승리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새로운 만화 트렌드를 개발하는 데 게으르지 않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웁스>는 새로운 잡지다. 여기서 새롭다는 의미는 기존 잡지가 아닌 새로운 잡지라는 당연한 의미와 함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잡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후자에 주목한다. 만약 후자의 의미가 아니었다면 <웁스>의 창간에 대해 ‘희망’이라는 엄중한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거나 책을 만들고, CD를 만들 때, 동호회원들끼리 즐기는 작품이 아닌 시장에 나와 수용자들을 만나야 하는 작품이라면 누구를 위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유통시킬 것인가와 같은 다양한 문제를 사전 기획을 통해 정리한다. 기획단계에서 다양한 예측을 통해 프로젝트의 성사 여부를 결정한다. 비록 기획단계에서 많은 돈이 투자되었다고 해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더이상 가지 않는다.

흔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돈 놓고 돈 먹기’나 ‘제로섬 게임’이라 부르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다른 산업보다 더 치밀한 기획과 예측이 요구된다. 엔터테인먼트의 수요라는 것이 아니면 전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이야기되는 한국영화는 대기업 진입에 직면한 충무로가 꾸준한 기획을 통해 쌓인 노하우가 자산이 되어 시작된 것이다. 매체의 르네상스는 결코 우연히 오지 않는다. 르네상스에는 늘 필연적인 이유가 동반되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분석하고 반영하는 일이 바로 기획이다.

놀랍게도 한국만화에서 기획이란 두 글자는 낯선 글자였다. 일본만화의 인기에 기대 시작된 일본식 잡지 시스템의 도입은 청소년 독자들을 만화로 끌어당기며 한국만화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장을 분석하고 새로운 독자들의 기호에 맞춘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담을 잡지를 만들어본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거대한 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대본소 시장이나 아동잡지 시장에서 낯선 주간만화잡지 시장과 서점용 단행본 시장으로 이행했고 우리는 일본에서 하는 겉모습을 그대로 옮겨 회사를 만들어 잡지를 만들고 단행본을 찍었다. 그렇게 10여년을 지내왔다.

잡지는 출판만화 시장의 기본

시장이 불황에 빠지고 잡지의 부수가 하락하자 편집자들은 혜성처럼 나타나 시장을 평정할 새로운 작품을 기다렸다. 천계영처럼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도 있지만 수많은 신인작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채 피우기도 전에 잡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잡지는 작가를 육성하지 못했다. 육성은커녕 차분한 준비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잡지는 단행본을 팔기 위한 사전 준비단계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잡지들이 잡지 판매의 손실을 단행본 판매를 통해 메우고 있다. 기획은 작가의 몫이고 마케팅은 우연의 몫으로 주어진다. 콘텐츠의 확산은 요원하며 잡지의 기본인 신인작가의 재생산도 최근에는 찾기 힘들다. 신인작가에게 주어진 단편과 미니시리즈 몇회 연재만으로 떠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암담한 상황이 반전되기 위해서, 전체 출판만화 시장의 불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독자들의 트렌드를 읽어내고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며, 새로운 작품과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잡지가 필요하다. 더구나 이런 요소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차근차근 진행되고 데이터로 축적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새로운 만화 트렌드를 개발하겠다는 <웁스>의 생각을 지지한다. 대상 작품에 대해 1년 동안 잡지 지면을 제공하는 만화공모전이나 예비작가 육성과정과 같은 시도에도 박수를 보낸다.

만화잡지의 새로운 시도

이 모든 새로운 시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작품이다. <웁스>의 창간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며 희망을 보게 된 것은 작품들 때문이다. 중견과 신진, 그리고 신인들의 작품이 다양한 장르로 섞여들어 만들어내는 화음은 잡지를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미스터 블루>에서 중단된 뒤 수년 만에 새롭게 부활한 <발칙한 인생>은 구질구질한 인생들의 삶을 통해 유쾌함과 페이소스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야후>와 또다른 윤태호의 매력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꽉 짜여진 이야기와 연출의 승리의 짜릿한 쾌감을 전해준다.

<니나잘해>를 통해 독자들의 트렌드를 작품 속에 반영하는 감각을 보여준 조운학, 심경희 콤비는 <하리킥>에서 2002년의 트렌드로 소녀와 열혈이라는 코드를 골라냈다. 전통의 한국 거대 로봇만화 <철인 캉타우>를 사이킥, 사이버펑크와 같은 21세기풍 분위기로 새롭게 각색해 나갈 것으로 기대되는 유경원, 조민철의 <철인 캉타우 리턴>이나 도발적인 상상력의 소유자 신정원의 이야기 만화인 , 한 에피소드씩 연결되는 4칸짜리 코믹스트립스를 통해 만화의 오랜 관습을 해체하는 석동연의 도 모두 새로운 이야기에 스타일을 자랑하는 작품들이다.

작품의 힘이 잡지를 끌고, 잡지의 힘이 작품을 끄는 행복한 화음을 오랜 시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더불어 만화잡지의 새로운 시도가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이 길이 한국만화의 희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