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감독의 차기작을 보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다. 전작 <남쪽으로 튀어> 때 연출권침해 논란이 있었고 적잖이 홍역을 치렀던 터라 얼마간 쉬고 싶을 거라고 짐작했다. 복귀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이내 차기작을 발표했고 순항했으며 좋은 결과물로 돌아왔다. 2005년 있었던 황우석 스캔들을 극화한 <제보자>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동시에 영화적으로도 흥미로운 임순례 영화의 방향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PD 윤민철(박해일)이 제보자 심민호(유연석)의 도움으로 이장환(이경영)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취재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진실을 수호하는 분들에 대한 헌사”라고 그녀는 <제보자>에 관하여 일찌감치 선언한 바 있다.
-<남쪽으로 튀어> 직후 <씨네21>과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가 끝났던 지점에서 시작해보자. “<남쪽으로 튀어>에 대해서는 복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남쪽으로 튀어> 편집 작업을 하던 중에 <제보자>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사실 거의 공백이 없었다. 쉬는 기간이 있어야 복기라도 할 텐데…. <남쪽으로 튀어>는 내 필모그래피에서 실패작인 것 같다. 흥행도 안 좋았고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고 나 스스로도 그 영화를 작업하며 입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다른 영화와는 같지 않다. 시민단체나 공동체에서 <남쪽으로 튀어> 상영하니 와서 관객과의 대화를 해달라고 하면 다 거절한다. 물론 배우가 됐건 제작자가 됐건 내가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한 거니까 나의 인간관계의 실패였다. 접해보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을 대하는 면모가 내게 부족했던 거다.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제보자>의 경우는 어땠나. =상대적으로 보면 팀워크가 정말 좋았다. 제작자, 배우, 스탭 할 것 없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다. 전에 나빴으니 이번에는 특별히 더 잘하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렇게 됐다.
-제작사로부터 <제보자>의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초반에는 거절했다고 들었다. =소재가 황우석 스캔들이라고 하기에 뭔가 선정적인 걸 만들려나 보다 해서 싫다고 했다. 재차 연락이 와서 얘기나 들어보려고 나갔다가 <제보자>의 제작자인 신범수 대표에게서 책 한권과 시나리오 하나를 받았다. 한학수 프로듀서(2005년 당시 시사교양프로그램 <PD수첩>에서 황우석 사건을 취재한 담당 프로듀서)가 쓴 책과 그걸 바탕으로 한 초고 시나리오 하나를 받았다. 시나리오는 그다지 매력이 없었던 반면 책은 상당히 좋았다. 그 책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여전히 껄끄러움은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들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지도 모르는데,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또 논란의 중심에 선다는 것이…. (웃음) 주변에서도 말리더라.
-결과적으로는 맡게 됐는데. =실존했던 사건 자체보다는 언론인의 집요한 취재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는 제작자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다. 새 정권이 탄생하고 언론 탄압과 보수 정권화가 가속화되면서 학문적으로 이미 정리된 이런 문제들이 어느 순간 화려하게 재활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고. 면죄부를 받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회 안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목격하고 있지 않나.
-각본은 맡지 않았다. “내가 각본을 쓰면 흥행이 잘 안 되어서 안 쓰려고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웃음) =그렇다. (웃음) 중간에 수정본을 한번 써봤는데 역시 제작자가 보기에는 상업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각본에 대한 집착은 버렸다. 그 부분은 일찍 정리가 됐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처럼 내가 제작할 때는 내 색깔을 많이 넣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상업영화를 할 때는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때에도 실화를 극화한 경험이 있는데, <제보자>의 경우에는 실화에서 극화로 옮길 때 어떤 인물화나 구조화 등을 염두에 두었나. =이경영이 연기한 이장환 박사의 묘사에 관해서 말하자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들을 현실에서 갖고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분하고 담담하게 풀어가고 싶었다. 예를 들어 많은 분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는 장면인데, 이장환 박사가 복제 개 몰리에게 이제는 너무 멀리 와서 멈출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장환에게 자기변명의 여지를 주는 그런 장면을 왜 넣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장면은 개인적으로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반문을 접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 음… 실은 거기 관련해서 다른 엔딩이 있었다.
-달랐다는 건 시나리오상으로? =아니, 다 찍었다가 편집에서 바꾼 엔딩. 이장환 박사의 재판장 버전이 있었다. 복제 개 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판장에서도 똑같이 자기변명을 하는 거다. 윤민철과 심민호도 그 재판장에 있고. 윤민철이 이장환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으면 이장환은 달리는 말이나 사자에서 내릴 수는 없는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재판장을 나온 윤민철의 눈에는 여전히 이장환의 지지자들이 있는 거다. 윤민철은 중증 환자들의 절박한 소망을 막은 것 같아 미안해하면서도 나는 내 길을 가련다 하는 표정으로 간다. 그렇게 끝나는 엔딩.
-지금과는 다르다. =지금은 관객을 더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이경영이 그 재판 장면에서 너무 잘했다. 심민호 역할을 맡은 유연석도 그러더라. 이경영 연기때문에 그 순간 이장환에게 설득당할 뻔했다고. 우리 스탭들도 농담으로 이거 이장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고. (웃음) 고민을 했지만 다시 찍기로 했고 지금과 같은 엔딩으로 결정했다.
-사회적 의의를 중시하는 영화이지만 영화적 속도감도 못지않게 세심하게 챙기고 있다. 흐름이 신속하게 느껴진다. =기본적으로 <제보자>가 편안한 소재는 아니다. 그래서 앵글이나 호흡에 있어 전보다 속도감 있게 가려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스탭들도 보고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고 많이 놀라더라. 특히 김선민 편집기사의 공이 컸다. 나는 여지를 많이 주는 타입이지만 그 양반은 틈을 안 준다. (웃음) 속도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김선민 기사의 공이 크다.
-영화를 하며 접한 실제 일화도 많았을 텐데. =실화가 워낙 현실보다 영화적이었으니까…. 당시에 제보자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딸이 있는데 아예 집에도 못 들어갔다고 하더라. 사람들에게 하도 쫓겨다니니까. 방송을 내보냈던 한 PD도 실제로 방송 관련해서 압력을 많이 받았고. 영화에서 보면 이장환이 윤민철 집으로 소고기 보내는 장면 있지 않나. 그런데 한 PD 집이나 사무실에는 쓰레기가 가득 담긴 쓰레기봉투가 왔다고 하더라. 너는 그 안에 든 쓰레기 같은 자다, 그런 뜻이었을 거다. 실제로 <PD수첩> 게시판에 한 PD의 가족사진을 띄우고, 우리가 죽일 가족, 이라는 식으로 써놓은 무시무시한 글들도 있었다고 한다.
-<제보자>가 모델로 삼은 당사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제보자의 모델이었던 유영준 박사와 한학수 PD는 영화를 봤다. 황우석 박사는 못 보셨다. 황 박사님은 우리가 시사회에 초청해서 영화를 보여드린다 해도, 웃으며 잘 봤다고 악수를 청하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한편, 한 PD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었을 때 그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들이 눈에 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자신이 접한 실화가 더 극적인 것이어서 그랬을 테고 다큐 PD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보여드리고 나서 반응이 어땠냐 하면, 굉장히 좋아했다! (웃음) 시나리오로만 보았을 때는 윤민철이 이장환과 마주 앉아서 인터뷰하는 장면 등이 전문 용어도 많이 등장하고 잘 구현될 수 있겠느냐고 반신반의했는데 박해일 같은 배우가 연기하니까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다르게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나왔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유영준 박사는 어땠나. =영화에서 심민호는 다소 유약한 인물이다. 하지만 유영준 박사는 실제로 굉장히 강인한 분이다. 초기에는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나중에는 잘되어서 마침내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지금은 교수로 재직하며 외부 활동도 많이 하고 있다. 대부분 공익 제보자들의 끝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 분의 경우는 영화와 다르게 부인과의 불화도 없었고 완전히 재기했다. 본인도 말하기를 공익 제보자가 정상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박해일이 윤민철 역을 맡아서 이 역할이 특별해진 면모가 있는 것 같다. 박해일의 윤민철은 어떤 기이한 쾌감을 준다. =개인적으로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이 맡았던 역할은 정말 최고였다.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윤민철의 경우에는 웬만한 배짱과 집요함이 없다면 이런 사건을 해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했고, 그런 집요함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라고 했을 때 박해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원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PD 역할을 하다 보니 온갖 사회문제에 다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열심이었다. 감독님, 이거 보셨어요, 이거 보셨어요, 하면서 말이다. 관련 자료도 성실하게 모두 보고. 본인이 훌륭하게 그림을 그려낸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 박해일이라는 사람은 신중하고 원칙적이고 진지한 타입이지만, 윤민철 PD가 너무 그러면 재미가 없을 듯싶어 다소 다혈질이고 유쾌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장환 역의 이경영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 그가 맡았던 역할 중 가장 돋보였다. 이장환 역을 그에게 맡긴 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장환 박사를 딱 떨어지는 악당으로 묘사하기를 원치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친절하고 유연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대단히 위선적인 그런 다중적인 면모가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경영씨에게 부탁했다. 경영씨도 내게 말하기를, 다른 영화에서는 내가 준비를 좀 많이 해가는 편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놀러 나오는 것처럼 해볼게, 하더라. 거기 더해서 내가 주문한 건 살 좀 빼라고 한 것 정도? 과학자처럼 보여야 하는데 사장님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웃음)
-이 영화에서 사회적 진실과 사회적 거짓이라는 대당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 감정과 사회적 합리’라는 대당이 더 중요해 보인다. =합리적으로 다 밝혀졌음에도 그걸 근거로 삼지 않고 희망이나 우호감이나 존경 등으로 그 합리성을 막아버리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 그게 우리 사회의 합리적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증거다. 사회 자체가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 그런 합리적 시스템이 더 극단적으로 부재하다.
-한편 이 영화는 지금 한국의 언론 현실에서 상실되어버린 것을 담고 있는 소망형의 판타지처럼 보일 정도다. =<제보자>에 출연한 배우 중 한명이 어떤 매체의 젊은 기자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고 한다. 굉장히 젊은 기자 두명이었다고 하더라. <제보자>에 나오는 것처럼 일선의 PD가 아이디어를 자체적으로 선정하고 진행하는 것에 관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는 거다. 현실에서는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그 젊은 기자들은 아마도 성역 없는 언론 보도라는 걸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불과 십여년 사이에 이렇게 된 거다. 영화에서 방송에 대한 외압이 강해지자 윤민철이 선배에게 따지지 않나. 이런 거(외압) 막아주는 게 사장이 하는 일 아니야? 각자가 맡은 공정한 역할이 따로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 아니겠나. 그래서 우리 현장에서 유행하는 농담이 하나 있었다. 이런 거 막아주는 게 감독이 하는 일 아니야? 이런 거 막아주는 게 PD가 하는 일 아니야? (웃음)
<제보자>는 비교적 잘 세공된 상업영화이면서도 현실을 자극하는 따끔한 부분이 없지 않다. 문득 감독이 인터뷰 말미에 전한 농담은 그러니까 이렇게도 가능하다. 그런 거 막아주는 게 언론이 하는 일 아니야? 인터뷰가 있었던 상수동 인근에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KARA) 사무실이 있어 거기에 간다며 씨익 웃고 돌아서는 임순례 감독을 보다가 문득 그런 우습지도 않고 우울하기까지 한 농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