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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이라는 102편의 영화, 혹은 공존할 수 없는 영화들이 이루는 임권택이라는 하나의 별자리

정성일 임권택 감독 전작 회고전을 따라 프랑스 낭트영화제에서 파리 시네마테크로 이어지는 열흘에 걸친 모험극을 기록하다

르네 마그리트처럼 시작하고 싶다. 이 글은 여행기가 아니다. 아마 그래야 할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 회고전을 따라 프랑스 낭트영화제에서 시작해서 파리 시네마테크(La Cinematheque Francaise, 이하 ‘파리(에 있는) 시네마테크’로 표기)로 이어지는 열흘에 걸친 모험극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일정은 살인적이었고 나는 거의 매일 숨 돌릴 틈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영화를 소개하고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물론 수없이 많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보았고 그보다 더 많은 영화를 관객 앞에서 소개했으며 종종 기이한 라운드 테이블에도 앉아보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프랑스 관객을 상대로 영화를 소개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라마다 다른 영화 ‘관객’ 문화가 있으며, 시네 클럽을 이끌던 앙드레 바쟁과 앙리 랑글루아의 전통 아래 진행되어온 스타일의 디테일이 무언지 누구도 내게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원칙을 알고 있는 것과 그걸 실제로 하는 건 서로 전혀 다른 일이다. 말하자면 이건 누가 누구에게 전수할 수 없는 매번의 아슬아슬한 테크닉에 관한 이야기다. 내 앞에 들이닥친 임무는 몹시 실전적인 상황이며 게다가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만일 그렇다면 아무 말이나 해도 그들은 경청할 것이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영화평론가로 이 자리에 서야 한다. 심지어 앙드레 바쟁조차 그가 이끌던 시네 클럽 토크에 관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매번 콘서트 무대에 서서 오늘 공연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피아니스트의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맙소사!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동하면서 차창 너머로 본 풍경, 혹은 아주 잠깐 틈을 내 도둑고양이처럼 파리를 거닐어본 시간 말고는 내가 프랑스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의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 전작 회고전에 이르는 어려운 길

처음 시작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벌써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전작 회고전(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영화사가 분실한 29편을 제외한) 72편을 상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에 파리 시네마테크는 큰 흥미를 보였고 여기서 상영된 영화 모두를 다시 한번 파리에서 상영한다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산에서의 전작 회고전은 두 번째였다. 일년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미 같은 프로그램을 상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자료원 바깥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단 박물관인 이 장소를 벗어나면 어떤 명분을 가져와도 판권 소유자로부터 상영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긴 협상이 기다린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는 수없이 많은 제작자들에게 그 권리가 흩어져 있으며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상영료를 요구한다. 아쉽지만 상영료의 공식적인 액수는 정해져 있지 않고 (혹은 그럴 수 없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쪽은 이미 정해진 예산 내에서 설득을 해야 한다. 문제는 더 복잡한 데 숨어 있다. 종종 감독들은 제작자와 헤어지면서 서로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임권택 감독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누군가는 호의를 지니고 있지만 누군가는 질투심에 가득 차 있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렇다. 그리고 이건 우리나라만의 경우가 아니다. 유명한 이야기. 허우샤오시엔은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기 전의 영화 제작자들과 등을 돌렸고 그런 다음 매번 서로 다른 나라에서 허우샤오시엔의 전작전을 할 때마다 제작자들의 조건은 “돈은 상관없으니 허우샤오시엔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하면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허우샤오시엔은 그걸 할 바엔 하지 않아도 좋다고 거절했다. 결국 대만영화진흥국이 중재에 나서야만 했다. 나는 더 많은 예를 들 수도 있다. 정확하게 동일하진 않지만 비슷한 상황이 부산에서도 반복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국제영화제는 거의 영웅적으로 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행사를 마친 부산국제영화제에 파리 시네마테크가 프로그램 교류를 제안했을 때 갑자기 모두들 패닉에 빠진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하자면 힘겨운 액션 장면이 가까스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총격전이 시작되는 것만 같은 기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개벽, 거장 임권택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책임 진행했던 허문영씨가 내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흔두장이나 되는 수학 시험문제를 풀고 났는데 그걸 가져간 다음 백지를 내주면서 처음부터 다시 풀어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처음 내가 받은 제안은 (지금 진행 중인)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감독님의 영화들과 함께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세! 나로서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계산은 빗나갔다. 왕빙에 관한 다큐멘터리 에세이 <천당의 밤과 안개>는 후반작업에서 계속 문제를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 감독님 다큐는 여기서 촬영을 끝내면 안 된다는 그 어떤 힘이 나를 계속 거기 머물게 만들고 있었다. 무한정 계속될 것만 같은 촬영. 내가 책에서만 읽었던 일이 그만 내게 벌어지고 말았다. 주어에서 목적어로의 전도. 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파리 시네마테크쪽에 미안하지만 일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그런 다음 몹시 슬퍼졌다. 파리 시네마테크에 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임권택 감독님 전작 회고전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상황은 예기치 않게 풀려나갔다. 이 행사는 한•불 수교 130주년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었고 여기에 낭트영화제가 공동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영화제의 공식 이름은 다소 긴 ‘낭트 3대륙 축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영화’(Festival des 3 Continents Nantes; Cinema d’Afrique, d’Amerique Latine, et d’Asie)여서 모두들 그냥 ‘낭트영화제’라고 부른다. 이미 올해로 37회를 맞고 있는 이 영화제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가 첸카이거의 <황토지>를 발견할 때 허우샤오시엔의 <펑쿠이에서 온 소년>을 발견했고, 그런 다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은) 지아장커의 <소무>에 작품상을 안겨주면서 공식적인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때 심사위원장은 허우샤오시엔이었다.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을 발견했고,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와 <그들도 우리처럼>을 발견했다. 김홍준의 <장밋빛 인생>을 발견했고 최명길에게 여우주연상을 주었다. 낭트영화제는 특히 일찍부터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만다라>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대되고 <안개마을>이 런던국제영화제에 초대된 직후인 1983년에 다소 ‘간단한’ 규모의 회고전을 가졌고, 그런 다음 1989년 10편의 영화를 모아 다시 한번 회고전을 가졌다. 나는 두 번째 회고전을 할 때 감독님과 함께 이 영화제를 처음 방문했다. 첫인상. 조용한 도시.

<짝코>를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어쩌면 이 행사에 낭트영화제가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파리 시네마테크는 낭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낭트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 25편을 직접 골랐다. 그 선정을 위해 낭트영화제의 젊은 예술감독 제롬 바론이 서울에 와서 (현재 남아 있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을 보았고 그런 다음 그 과정에서 내가 쓴 책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러니 영화제 기간 중에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낭트에서 이 영화들을 소개하기 위해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두 번째 우연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지막 밤 전날에 이루어졌다. 나는 별로 파티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래서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빠져나왔을 때 바로 옆에 자리한 작은 술집에서 허문영의 문자가 제시간에 도착했다. 재빨리 옆집으로 옮겼고 거기서 허문영은 홍상수와 맛있는 사케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이런 자리가 훨씬 좋다. 그때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나가던 한 프랑스 남자(와 한국인 코디네이터)가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장 프랑수아 로제. 현재 파리 시네마테크의 수석 프로그래머. 수없이 많은 영화 제목들이 오가면서 (홍상수를 눈앞에 두고) 각자의 “가장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 뽑기”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이야기는 불이 붙었고 홍상수는 마치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앞에 놓인 냅킨에 그림을 그려가며 리얼리티와 환상에 관한 사람들의 오류 추론에 대해서 거의 30분 넘는 강의를 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내게 당신이 쓴 임권택 책은 선정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러니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허락을 했다. 이 자리는 새벽 5시가 되어서 끝났다.

그렇다고 금방 떠난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두 가지를 결정해야 했다. 하나는 파리 시네마테크 전작 회고전에서 개막작으로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지 결정해달라는 요구가 날아왔다. 다른 하나는 파리 시네마테크와 낭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간단한 마스터클래스를 했으면 좋겠고 그걸 위해서 감독님이 고른 장면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첫 번째 결정. 이런 경우 대부분 둘 중 하나를 고른다. 가장 최근의 영화거나 아니면 가장 유명한 작품. 나는 둘 다 피하고 싶었다. 그곳은 파리 시네마테크이고 여기서 이미 알려진 임권택을 반복하는 대신 다시 시작하는 ‘재발견’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한 가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지금은 <만다라>를 임권택의 대표작으로 가장 먼저 손꼽지만 다음 세대의 비평가들은 <짝코>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만다라>는 걸작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아름다움이 바깥 언저리를 떠돌고 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불가에서의 배움이 역사라는 시간 속의 인간을 소진시켜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임권택에서 역사란 그저 시간의 두께가 아니다. 그의 삶은 그 안에서 거의 부서지다시피 했고 그러면서 견뎌온 육신의 생명이 사회의 성질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에 위한 서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진정한 임권택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짝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영화에는 역사라는 운명 안에서 가냘픈 의지로 가까스로 살아가는 플래시백의 더없이 아름다운 리듬의 종합이 있다. 힘들의 위계질서.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하찮은 삶이란 어디에도 없다. 전쟁 중에 빨치산이었던 한 남자가 북한에 올라가지 못한 채 남한에 남아 신분을 숨기고 그저 떠돌며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 남자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다른 또 한명의 남자가 그를 평생에 걸쳐서 쫓아다닌다. 망친 두개의 삶. 임권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운명에 대해서 비애로 가득 찬 분노를 삼키고 또 삼켜가며 한 장면씩 만들어나간다. <짝코>를 보는 것은 한국 근대사라는 생선가시 뼈를 삼키는 일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느껴보는 내장이 망가지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나는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망가진 한국영화의 창자를 꺼내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망설인 다음 내 제안을 받아들여주었다.

다른 하나는 마스터클래스를 위한 장면을 고르는 일이 남았다. 임권택이라는 102편의 영화, 혹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시작해서 2015년 <화장>에 이르는 마치 기나긴 병풍화처럼 끝도 없이 기나긴 목록에서 그 어떤 하나의 장면은 오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두개의 장면을 고르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하나는 <장군의 아들>에서 먼저 발췌했다. 신마적 엄동욱이 혼마치깡(충무로)의 술집에 갔다가 일본 야쿠자들이 보낸 하야시와 그의 일당들이 음식점을 점령하고 술을 마시고 있다는 말에 싸움이 붙고 칼에 찔린다. 그 말을 듣고 김두한이 달려가 음식점 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마침내 하야시의 앞잡이 주먹이 된 (김두한의 유일한 맞상대인) 김동회와 대결을 하는 클라이맥스까지이다. 상영시간은 7분52초. 이 시퀀스에는 임권택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건 엄동욱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김두한의 숏들이 보여주는 그 율동감이다. 지리적으로 종로에서 충무로까지 뛰어가는 설정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세트 안에서 그렇게 긴 거리를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우 짧게 나눈 숏들은 한쪽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이 벡터에 가속도를 더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달려가는 김두한의 머리에서 날아가버리는 모자다. 김두한은 모자가 자기 몸을 떠나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그때 세트 안의 많은 엑스트라들이 자기 역할을 하면서 움직이지만 아무도 김두한의 벡터를 방해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치되어서 활동한다. 모두가 이 순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순간을 틀림없이 볼 것이다. 관객에 대한 믿음. 그것은 내가 왕빙에게서 배운 것이다. 누군가, 단 한명이라도, 그걸 보면 그러면 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장면은 <서편제>에서 그 유명한 신 41, 전라남도 청산도 언덕배기에서 1992년 11월18일 오전에 찍은 장면, 아버지 유봉과 딸 송화, 아들 동호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면서 걸어오는 5분40초에 걸친 고요한(fixed) 롱테이크 숏이다. 두 장면은 어제의 임권택과 내일의 임권택을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 두 영화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2년에 불과하다. 임권택의 전작을 펼쳐놓고 보면 사실상 두 영화 사이의 경계는 겹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임권택이 만들어온 장르영화의 시대가 잡아끌어당기고 있었다. 반대로 <서편제>는 임권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열고 있었다. 감독님 댁에서 두개의 클립을 확인하면서 청산도를 걸어오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감독님이 중얼거리듯 한마디 하셨다. “여기서부터 내 영화가 제 길을 간 거예요.”

낭트영화제 예술감독 제롬 바론이 임권택 전작을 모두 본 다음 고른 25편의 목록

모든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었지만 예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잘 알려진 대로 11월13일 파리에서 연쇄테러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모든 진행을 차례대로 한 박선영 프로그램 코디네이터가 감독님을 영상자료원에서 뵙고 여쭤보았다. “감독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임권택 감독님은 그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가야죠, 안 가면 지는 거잖아요.” 이것이 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11월27일 금요일. 샤를 드골 공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텅 비었고 항공사에 미안하긴 하지만 사람들은 좌석에 누워서 잠을 청하며 긴 여행길에 올랐다. 함께 길에 오른 사람은 임권택 감독님 내외와 (둘째아들인) 권현상군,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인)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님의 ‘결정적’ 영화(중 한편)인 <씨받이>와 다른 두편의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달빛 길어올리기>를 소개하기 위해 나섰다. 홍효숙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도 함께 동행했다. 우리는 드골 공항에서 약간 대기한 다음 낭트까지 이어지는 비행기에 환승했다. 겨울의 프랑스는 해가 일찍 지고 어둠이 서둘러 찾아왔다. 날씨는 나빴고 공항 바깥에서는 비가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깊은 어둠에 잠긴 낭트에 도착해서 숙소로 향할 때 거리에는 곳곳에 낭트영화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미 홈페이지를 보고 알고 있었지만 올해 낭트영화제 포스터는 임권택 감독님이 1987년에 연출한 여든일곱 번째 영화 <아다다>의 한 장면이다. 거의 검은색으로 타들어가는 녹색의 밭에서 하얀색 머릿수건을 면사포처럼 쓴 신혜수가 한손으로는 곡물을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낫자루를 금방이라도 벨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장면. 영화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로 나오는 그녀는 여기서 무언가를 바라보듯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그걸 어둠에 잠긴 낭트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반갑다기보다는 약간 시간 감각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호텔 앞에는 예술감독인 제롬 바론과 낭트영화제를 처음 시작한 다음 거의 이끌다시피했지만 지금은 은퇴한 알랭 잘라도가 임권택 감독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낭트영화제는 몇년 전에 사실상 파산했고 그런 다음 개최 여부가 불확실했었다. 제롬 바론. 올해 45살의 매우 지적이고 조용한 남자. 파리 8대학과 3대학에서 다큐멘터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낭트영화제에서 오레리 고데와 함께 영화를 선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롬 바론이 임권택 전작을 모두 본 다음 고른 25편의 목록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아마 이 목록은 프랑스가 임권택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한 표본이 될 것이다. 우선 60년대 영화로 1962년 2월에 개봉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시작으로 <법창을 울린 옥이>(1966), <황야의 독수리>(1969), <월하의 검>(1970), <둘째어머니>(1971), <삼국대협>(1972)을 선택했다. 약간 의아하게도 제롬은 이 시기에 만든 ‘다찌마와리’ 액션활극과 사극영화를 한편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임권택 스스로 자신에게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선언한 <잡초> ‘이후’의 영화로)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상록수>(1978), <족보>(1978), <신궁>(1979), <짝코>(1980)를 골랐다. 이 목록은 무언가 노골적으로 ‘새마을’ 영화들을 피했다. <만다라>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의 영화로는 <안개마을>(1972), <길소뜸>(1985), <티켓>(1986), <씨받이>(1986), <아다다>(1987), <연산일기>(1987),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8)로 이 시기의 영화들에 가장 많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다음 임권택의 마지막 ‘후기’ 영화로 <장군의 아들>(1990), <개벽>(1991),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하류인생>(1999)을 추가했다. 물론 선택은 영화제의 권리이며 무엇을 선택했는가, 라는 질문은 무엇을 배제했는가, 라는 결단과 맞물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약간 놀랍게 보인 것은 이 선택이 내 목록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약간 상투적인 질문으로 왜 <춘향뎐>과 <취화선>을 제외했냐고 묻자 그 영화들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롬 바론에게 언제부터 임권택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냐고 물어보자, 놀랍게도 17살 때 <안개마을>을 처음 본 다음부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간단한 산수. 그러니까 1987년. <씨받이>를 찍고 난 다음, 혹은 <아다다>를 찍고 있을 때 제롬은 임권택의 영화를 발견했고 그런 다음 그 선을 따라온 셈이다.

영화제 공식 책자에는 제롬 바론이 짧지만 긴 시간 공들여 쓴 것이 분명한 소개의 글이 있었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은 ‘임권택, 역사의 몸, 민중의 육신’ (Im Kwon-taek, Le Corps de l’ Histoire et d’un peuple)인데 글의 후반부에서 “(…) 그가 이루어낸 다양성, 창조를 위한 독창적인 지렛대. 존 포드와 그의 미국을 구태여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임권택은 아시아영화에서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시야를 우리에게 명확하고 폭넓게 보여주었음에 틀림없다”라고 단언한다. 제롬 바론은 망설이지 않고 임권택을 설명하면서 김기영과 이만희를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국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의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의 벽 앞에서 멈추어 섰다고 덧붙인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제롬 바론의 설명을 더 들어보고 싶다. 그는 임권택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의 몸이 힘겹게 1970년대를 지나면서 영화 안에 국가와 민중 사이의 긴장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하나의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영화들이 앙상해 보일 때조차 장르 속의 일상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풍부한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고 설명한다. 제롬 바론이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몸이 부서지거나 일부를 훼손당하는 대목이다.

“(…) 임권택 영화는 초기부터 거의 마지막 시기까지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가야 하는 몸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초기 영화를 볼 때 대수롭지 않게 팔이 잘리거나 아니면 장님을 만들어버릴 때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이런 순간들은 반복해서 나타났습니다. <만다라>에서는 깨달음을 위해서 자기 손가락을 태우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서편제>에서는 딸을 장님으로 만들지요. <아다다>는 벙어리에 관한 이야기이고, <안개마을>에는 몸이 불편한 이상한 사내가 나오는데 그들은 자신의 육신이 지닌 약점 때문에 신비롭게 보입니다. 심지어 한 화가는 자신의 작품과 하나가 되기 위해 자기의 몸을 불구덩이 속에 밀어넣습니다(<취화선>).”

매번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은 가득 차고

다음날 임권택 감독님의 오랜 친구인 피에르 리시앙이 한쪽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파리에서 찾아왔다. 함께 온 사람은 왕무훙(王穆宏)이라는 젊은 중국인이었다. 그는 상하이 근처 도시에서 태어났고 지금 파리에서 6년째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아시아 영화에 관심이 많으며 한국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는 중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피에르 리시앙은 내게 자신이 젊은 비평가들의 견해를 거의 참고하지 않지만 이 사람은 영화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갖고 있으며 좋은 영화를 발견하는 감각이 특별하게 훌륭하다고 소개했다. 이제까지 당신이 본 임권택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왕무훙은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건 중국 사람이 가진 기질인 것 같다. <만다라>와 <서편제>. 오후에는 장 미셸 프로동이 도착했다. 장 미셸 프로동은 <르몽드> 영화기자로 시작해서 21세기에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편집장 시절에 한국영화에 관한 특집호를 만들었으며, 이때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임권택에 관한 비평과 긴 인터뷰를 실었다. 지금은 온라인 매체 슬래이트 프랑스(slate.fr)에 정기 기고를 하면서 대학에서 영화를 강의하고 있다.

나는 거의 매회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갔다. 사흘 동안 아침 첫회부터 밤 늦은 마지막회까지 여덟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내가 감격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매번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객석이 꽉 찼다는 것이다. 관객은 연령과 성별, 인종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했지만 단 한 가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호기심 어린 눈길로 모두들 내 말을 기다려주었다. 다른 한 가지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내가 소개를 하러 무대에 오른 극장은 낭트 시내 중심에 있는 카토르자(Katorza)극장이었는데 여기서 16년 전인 1989년 12월 둘쨋주 화요일 오후 4시에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처음 보았다. 나는 그날의 감흥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허우샤오시엔의 ‘앞서가던’ 창작의 시간과 나의 ‘뒤늦은 발견으로 뒤쫓던’ 감상의 시간이 비로소 시간의 평행선을 긋기 시작한 첫날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이 극장에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멀티플렉스인 이 극장에서 지금 상영 중인 다른 영화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러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날 그때처럼 영화를 볼 시간은 없었다. 극장 입구에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쌓여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교수. 하지만 그는 매일 밤 다시 아우슈비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 결국 그는 이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1987년 4월11일 자살했다. 이미 이 두권의 한글 판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왠지 그걸 사는 것이 내 의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영화를 보는 대신 그 두권의 책을 샀다.

그날 밤 제롬 바론은 호텔로 <카이에 뒤 시네마> 12월호를 잔뜩 들고 찾아와 나눠주었다. 이번호에는 6페이지에 걸쳐서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첫페이지는 <화장>을 연출할 때 태안반도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 사진으로 시작했다. 글의 제목은 ‘시네마 판소리’(Cinema Pansori). 내 시선을 끈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표지. 마치 애도를 하기 위한 듯한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그림은 (편집실에 침입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총을 난사당한) 저널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가인 필명 ‘뤼즈’로 알려진 레날 뤼지에가 그린 것이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가 무릎을 꿇고 비통함에 젖어 절규하는 장면.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난장판처럼 보이는 풍경은 아마도 11월13일 그날의 참상일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영화와 세상 사이에 개입하는 방식. 두 번째는 올해의 톱10 목록이다. 1위는 난니 모레티의 <나의 어머니>. 2위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찬란함의 무덤>. 3위는 필립 가렐의 <여자들의 그림자>. 4위는 래리 클라크의 <우리들의 냄새>. 5위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6위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 7위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8위는 미구엘 고메스의 <아리비안나이트>. 9위는 알란테 카바이테의 <상가일레의 여름>. 10위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변가로의 여행>.

11월13일 이후의 파리에서

우리 일행은 다소 하드코어한 일정을 마치고 파리로 향했다. 가장 걱정한 것은 11월13일 이후의 스산한 분위기였다. 잠시 동안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 파리는 조용했고 거의 동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서울 거리를 걷는 관광객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혹시 당신이 이번 겨울 파리에 가서 시네마테크를 방문할 예정인데 아무도 가는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면 가장 쉬운 방법을 일러주겠다. (당신이 도심에 있다는 가정하에) 올림피아드로 향하는 14호선 전철이나 나시옹으로 가는 6호선 전철을 타고 베르시(Bercy)역에서 내린 다음 일단 바깥으로 나와 그 앞에서 아무에게나 물어보(거나 거기서부터 구글 맵을 이용하)면 걸어서 2분 정도 걸린다. 나는 예전 시네마테크는 가본 적이 있지만 새로 지은 시네마테크는 처음이었다. 약간 자크 타티의 세트장처럼 지어진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에는 잘 정리된 북숍이 있고, 입구 바로 옆에는 ‘400번의 구타’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그리고 의외로 맛이 괜찮다). 물론 프랑수아 트뤼포를 기념하는 이름인데 안에는 일본어판 <어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400번의 구타>)와 <밤안개 속의 연인들>(<도둑맞은 키스>)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앞에는 넓은 공원이 있고 하얀색에 창문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경건한 마음이 든다. 앙리 랑글루아. 앙드레 바쟁과 그의 아이들. 1968년 5월. 여기서 오즈 야스지로를 발견한 빔 벤더스. 수없이 많은 일화. 말하자면 지구상의 모든 시네필의 성지. 그렇다. 나는 지금 임권택 감독님을 모시고 성지 순례를 온 것이다. 그게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파리 시네마테크에서는 몇 가지 행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마틴 스코시즈의 ‘작업 노트’ 전시회였다. 시네마테크 앞에는 커다란 포스터 광고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위아래로 <택시 드라이버>의 모히칸족 인디언 헤어스타일을 한 그 유명한 로버트 드니로의 얼굴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웃는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약간 무언가 묻은 것 같아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디카프리오의 코밑에 수염을 그려넣은 낙서를 해놓았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거리의 낙서가들이라니! 파리 시네마테크의 다음 전시는 ‘구스 반 산트: 젊은이들의 컬트 시네아스트’이며 내년 4월13일에 시작해서 7월31일까지 이어진다는 소개가 한쪽 모퉁이에 함께 있었다.

임권택 전작 회고전은 12월1일에 개막작 <짝코>로 시작해서 내년 2월29일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오후 4시15분에 상영되는 것으로 끝난다. 상영작은 부산국제영화제 전작 회고전보다 두편이 더 많은 74편이다. 그 이유는 그사이에 <화장>이 만들어졌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1966년에 만든 <전장과 여교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파리 시네마테크는 3개월 단위로 ‘작은’ 프로그램 북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장 프랑수아 로제가 임권택에 관해 쓴 소개의 글 ‘한국, 몸과 영혼’(La Core′ e, Corps et Ame)이 실려 있었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장 프랑수아 로제의 글은 제롬 바론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으면서도 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먼저 근대 한국사에 대해 설명을 한 다음 그 안에서 만들어진 102편에 이르는 임권택 영화의 심장부에는 구체적인 한국의 역사와 그가 이루어낸 상상적인 재현, 무엇보다 국가적인 몸과 민족적인 영혼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가 놀라는 것은 그 안에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영화들이 임권택이라는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다는 사실이었다.

파리 시네마테크 라운드 테이블에서의 긴장

지금 파리 시네마테크 관장은 <Z> 혹은 <뮤직박스>로 잘 알려진 그리스 감독 콘스탄틴 코스타 가브라스이고, 프로그램 감독은 세르주 투비아나이다. 잠시 동안 멈춰 서게 하는 이름. 1974년 <카이에 뒤 시네마> 6월호. 통권 250호. 세르주 다네와 함께 편집장이 된 다음 이른바 ‘붉은 표지’의 시대를 끝내고 다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정치의 계절로부터 영화의 목록에로 되돌린 두명 중 한명. 두명의 세르주. 다네가 전투적이었다면 투비아나는 전술적이었다. 다네가 다가오는 영화의 변화에 민감했다면 투비아나는 구체적인 변화의 기록을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런 대차 대조표를 떠나서 그저 나는 다네와 함께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8년 동안 했던 그가 궁금했다. 첫인상은 차가웠고 그는 할 말만 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공식적인 파티도 잠깐 머문 다음 떠났고 점심 식탁에서 마주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저녁 만찬의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랄까, 그는 마치 프리츠 랑 영화에서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마부제처럼 분명히 거기 존재하지만 다만 목소리 저 너머에 있는 사람. 그에 비하면 장 프랑수아 로제는 열정적인 웅변가에 가까웠다. 개막식 무대에서 임권택 감독님을 소개할 때 분명히 손에 정리된 문장이 쓰인 메모 카드가 있었음에도 그걸 무시하고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면서 시네마테크의 관객을 향해 “당신들은 한국에서 온 이 거장의 영화를 보고 나면 아시아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무대에 오른 임권택 감독님을 향해 파리 시네마테크의 관객은 일제히 기립 박수로 환영했다. 스산한 파리의 풍경과 요즘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모이지를 않는다는 걱정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가득 차 있었다.

낭트영화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한번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파리 시네마테크에서의 라운드 테이블이 훨씬 긴장됐다. 그건 전적으로 관객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으며 지금은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수석 프로그래머이자 임권택 감독님의 지지자이기도 한 샤를 테송도 왔다. 먼저 준비한 두편의 클립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을 보여주었을 때 반응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 장면을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 활극처럼 받아들였다.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왔고 일부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제껏 방문한 나라들은 각자의 관객 영화문화를 갖고 있었고 거기에는 다소 복잡한 문화적인 차이와 영화적 경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에 우열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이 차이의 문화정치학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형태가 불러일으키는 반응의 차이. 그 차이 속에 자리잡은 예술적 번역과 사회적 거리. 1920년대 모스크바의 관객과 뉴욕의 관객은 스펙터클을 향해서 얼마나 멀리 있으면서 또 가까운가. <킹콩>은 <알렉산더 네브스키>로부터 얼마나 가까우면서 멀리 있는가. 이때 그 반응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런 다음 <서편제>의 롱테이크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숏의 첫 장면이 시작하는 순간, 그러니까 셋이 고개 너머 멀리서 거의 보이지 않게 걸어오면서 <진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객석에 서 있던 나는 바로 내 옆에 앉은 어린 소녀가 함께 온 남자친구에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플랑 세캉스(롱테이크)인 거야?”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조잘거리며 영화를 보는 이 소녀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객석은 좀전과 완전히 달랐고 누군가는 갑자기 객석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끌어당겨가며 보기도 했다. 이 장면은 전광석화처럼 관객을 사로잡았다. 두개의 클립이 상영을 마쳤을 때 파리 시네마테크의 관객은 박수로 호응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낭트에서의 제롬 바론과 달리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 어쩌면 이것이 파리 시네마테크의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유명한 예. 60년 전 여기서 알랭 드코앵이 관객과의 대화를 했을 때 열일곱살의 프랑수아 트뤼포는 손을 들고 발언 기회를 얻은 다음 “나는 당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참고 있지만 영화만 생각하면 달려나가 당신의 턱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다”고 분노에 차서 외쳤다. 첫 번째 질문은 이제까지 당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73년 ‘이전’의 영화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해왔는데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초청을 한 상대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나는 방어를 해야만 했다. 약간 장황하게 1960년대 한국영화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누벨바그 파리와 그 지구 반대편의 도쿄의 쇼치쿠 누벨바그의 동시대성으로부터 서로 다른 시간의 영화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임권택이 데뷔한 1962년이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고작해야 9년이 지난 다음이라는 말에 객석은 약간 얼어붙은 분위기가 되었다. 군사 쿠데타가 있었고 이중의 검열 속에서 영화산업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가지 상황을 떠올렸다. 1960년 4월19일 이후 잠시 동안 서울의 봄이 온 다음 이듬해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말할 때 그들은 1968년 8월20일 ‘프라하의 봄’에 침공한 소련의 탱크를 떠올렸으며, 1970년대 독재정권과 검열에 대해서 설명할 때 동시대의 맞은편 라틴아메리카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영화사에는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경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가장 예상치 못한 질문은 마지막에 나왔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당신의 영화에서 시종일관 나타나는 힘은 섹슈얼 에너지이며, 이 강도는 장르영화 시절에서 작가영화 시대를 가로지르는 힘의 역량이며 동시에 둘 사이를 연결시켜놓으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룰 뿐만 아니라 당신 영화 전체의 하부를 이루고 있다, 이 섹슈얼한 힘을 설명해 달라, 는 요구였다. 임권택 감독님은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라고 운을 떼면서 난감하게 생각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비평가의 입장에서 거기서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다. 무엇을 보았냐는 질문, 이 전통적인 프랑스식 질문. 나는 거기서 유교를 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파리 시네마테크 관객에게 부디 섹슈얼한 힘을 오리엔탈리즘의 신비함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선시대에 시작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잠재의식 안에 반복해서 학습되고 있는 이 유교는 거의 항상 여성의 몸을 경유하여 재생산되는 지식인데 그 과정에서 섹슈얼한 힘은 신체를 부수거나 반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집행되고 있고 그 과정의 미학적 진술 안에 담겨 있는 두 가지 상반된 힘을 보아달라고 했다.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의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하는 힘으로서의 생명이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내게 그렇다면 임권택의 자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적으로 이건 개인적인 견해라는 전제 아래 아시아영화에는 전기(傳記)라는 방식으로 전체를 내려다보는 투시도법으로서의 관점의 계보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선을 연결하는 세개의 선은 미조구치 겐지와 임권택, 그리고 허우샤오시엔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것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화권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선이라고 덧붙였다.

질문이 모두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을 때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내게 웃으면서 당신은 오늘 오늘밤 승리했다, 는 표현을 썼다. 그 순간 내가 느낀 무대에서의 결투의 느낌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세르주 투비아나는 파리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내게 웃으면서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내가 올해 받은 악수 중에서 가장 따뜻한 터치였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 1시까지 즐거운 담소를 이어갔고 혼자 숙소로 돌아오던 나는 시네마테크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감명 깊게 들었다는 한 청년과 길거리에서 마주쳐 다시 한 시간을 더 이야기해야만 했다. 완전히 지친 나는 호텔로 돌아왔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프리츠 랑의 <M>을 방영하고 있었다. 페터로레가 도시의 사람들 앞에서 재판받는 장면에서 그만 잠들었다. 텔레비전은 아침까지 혼자 외롭게 중얼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승리한 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다음날 점심은 임권택 감독님이 사는 자리였고 맛있는 포르투갈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모두 모였다. 가벼운 담소. 한국영화의 현재의 작가주의에 대한 그들의 평가. 그런 다음 내년 칸국제영화제에 올지도 모를 세계 영화의 목록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일제히 오후 1시 반이 되자 일어나서 모두들 시사를 보러 간다고 말했다. 무슨 영화를 보러 가냐고 묻자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를 보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은 부러웠다. 영화를 보러 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영화가 이어주는 우리의 공동체를 잠시 생각했다. 어디서나 영화. 우리는 오던 길을 역순으로 공항으로 간 다음 다시 긴 비행시간을 견디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임권택 감독님께 문자를 보냈다. “왠지 모르겠지만 승리한 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에 답장이 왔다. 언제나처럼 짧은 문자.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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