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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수의 `서른세살의 쿠데타` [2]
사진 이혜정최수임 2002-03-22

아쉬움 남는 조연 시절, “나도… 했다면…”

어쨌건 힘들게 출연한 영화 <태양은 없다>로 이범수는 처음 뜰 수 있었다. 홍기(이정재)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단발머리 깡패 고리대금업자 병국이 그의 역. 병국은 멋지구리한 정우성, 이정재와 또 다른 맛으로 시선을 끌었다. <태양은 없다>의 병국이 된 이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때 처음 들어온 인터뷰 요청이 제법 늘어났다. 하지만, “기분이 방방 뜨기보다는 그동안 도와준 선후배들께 감사한 마음이었다”라고 이범수는 그때를 떠올린다. 인기 하나 없던 자신을 캐스팅해준 김성수 감독은 지금까지 은인이나 다름없고.

조연으로의 입성 이후, 달라진 것은 언론의 관심이 늘어난 것만이 아니었다. 촬영현장에서, 그는 그동안 자제하던 것들을 맘껏 펼칠 수 있었다. “촬영현장이 대부분 배우 위주로 굴러가잖아요. 무명 시절에는, 만약 내가 인정을 받는다면 현장에서 더 열심히 하고 연기도 열연을 할 수 있을 텐데, 했었어요. 막상 그렇게 되니까 그때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었죠.” 이런저런 연기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다거나, 애드리브를 첨가한다거나, 영화에 참여하는 수준에서 이범수는 훨씬 넓어진 입지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범수의 조연 시절은 <신장개업>(1999), <러브>(1999), <아나키스트>(2000), 그리고 <하면 된다>(2000)와 <번지점프를 하다>(2001)에까지 이어진다. 오래된 중국음식점 중화루의 철가방 팔봉이 역을 맡았던 <신장개업>에서, 그는 주방장 역의 박상면, 사장 역의 김승우와 함께 인육을 얻으러 좌충우돌하는 코믹한 연기를 보였다. 팔봉이는 <하면 된다> ‘광태’의 예고편쯤 될까. <하면 된다>에서 그는 보험사기극을 벌이는 엽기가족의 그물에 걸린 촌뜨기 광태로 열연을 했다. 독극물을 먹고도 살아남아 “밤새 피똥 쌌어유” 하는 그는, 이범수식 희극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에 비하면 마라토너 역을 맡아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찍은 <러브>, 과격한 행동파 돌석으로, 영화에 웃음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은 <아나키스트>는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면 된다>는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작품이다. <하면 된다>가 개봉했던 2000년 늦가을은, 9월에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가 한창 관객을 모으고 있던 때였다. 흥행을 기대했지만, <신장개업>에 못 미치는 18만명에 그쳤고, 이범수는 비슷한 또래인 데다가 비슷한 시기에 영화일을 시작한 이병헌이 송강호와 함께 흥행대작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이병헌이 송강호랑 한 작품을 했듯이…”, “설경구가 <박하사탕>으로, 유오성이 <친구>로 스타가 됐듯이 나도 작품운이 따랐다면…” 하는 가정법은, 이범수로 하여금 현실을 음화로 인식하게 했다. 말하자면, 그의 ‘본 모습’은 좀처럼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정글쥬스> 이전의 최근작인 <번지점프를 하다>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범수로서는 탐탁지 않은 영화였다. “저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내 작품으로 치지도 않아요.” <번지점프를 하다>에 출연한 건, 학교 선배인 김대승 감독의 부탁 때문이었다.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해서 찍었는데, 영 아니라면서. 시나리오를 보내달라고 했죠. 보니까 알겠어요. 왜 내가 필요하다고 한 건지. 깐죽거려주는 역이 필요했던 거예요. 내키지 않았지만, 선배가 부탁하는데, 그냥 했죠.”

끼를 누르고, 다소 진지하게

‘깐죽거리는 역’, 이 부류의 역은 이범수가 가장 많이 했으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역이다. “남들 좋은 일 시켜줬다”는 가시돋친 말 속에 숨은 건 섭섭함. 어쩔 수 없이 꺼냈던 ‘첫번째 카드’였을 뿐인데, 모두들 그게 그의 전부라고 믿는 눈치였다. 자신이 선택했다기보다는 “당시 시류가 원했던” 작고 소소한 역들. 혼자서 선후배들에게 수소문하여 시나리오를 입수하고 출연하고 싶은 작품들에 대시를 하던 시절, 그는 그의 취향이나 희망대로가 아니라, 대부분 주어지는 배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기가 문제였어요. 배우가 뭐, 가수처럼 직접 박수소리를 듣는 것도 아닌데, 막연한 인기라는 게 늘 중요하더라고요.” 비스타 배우가 크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매니지먼트의 후광도 그에게는 없었다. <아나키스트> 직후 잠깐을 제외하곤, <하면 된다> 때까지 그는 매니저가 없었다. ‘동거동락’이라는 TV오락프로의 한 코너에 고정출연하면서 지금의 싸이더스 매니저가 생길 때까지는.

“<태양은 없다>가 내 연기인생의 첫번째 획이라면, 지금은 그 첫번째 카드를 지나쳐 나오면서 두번째 카드를 준비하는 단계라 하겠죠.” <태양은 없다> 이전과 이후에 한번, 그리고 <신장개업> <아나키스트> <하면 된다>를 지나 <정글쥬스> 직전에서 또 한번, 이범수의 필모그래피는 새로운 챕터로 구분될 수 있다. 그건, 단역에서 조연으로, 또 조연에서 주연으로의 이동이기도 하고, 코미디, 엽기, 양념, 감초에서 남자다움, 터프함, 중심으로의 이미지 변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범수가 말하는 그의 두번째 카드는 ‘남자다움’이다. 지금 그는 그 카드를 꺼내기 위해 애쓰는 중.

양아치 중의 양아치 철수를 거친 입자로 연기한 신작 <정글쥬스>가 그 노력의 일환으로 가벼움을 덜어내는 첫시도다. <정글쥬스>에서 그는 그간의 직설적인 코믹연기를 많이 걸러낸, 다소 무거워진 연기를 하려 했다. “코믹연기, 하자고 맘먹었으면 펄펄 날았을 거예요. 하지만 코믹연기를 하지 않는 게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였죠. 코믹연기를 안 하면서 영화는 재밌게 하는, 그런 연기를 하기 위해서 전 한편으로는 끼를 억누르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움을 살려야 했어요. 무게감이요? 맞아요, 조금 무거워졌어요.”

오랫동안 가벼웠던 이에게는 그 가벼움이 되레 무게가 될 수 있다. 이범수가 그렇다. 감초배우라는 말, 엽기배우라는 말, 조연배우라는 말, 사람들이 가볍게 쓰는 이런 말들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이범수에게는 짐이 됐다. 가벼운 캐릭터들이야 말할 것 없이.

나, 다시 출발선에 섰다

<정글쥬스> 이후, 5월에는 그의 또 다른 신작 <일단 뛰어!>가 개봉한다. 거기서 그는 세 사고뭉치 고등학생들을 쫓는 형사로 분한다. 영화포스터 촬영장. 사진가는 그에게 웃으라고, 웃긴 표정을 지어보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정글쥬스>가 그랬듯, <일단 뛰어!>도 이범수에게는 새로워지려는 실험이었다. 이미 알려진, 익숙해진 표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됐다. 관성을 거스르는 데는 무시 못할 만큼의 완력이 들 텐데, 요즘 이범수는 그것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익숙한 표정이야말로 그동안 그를 단역에서 조연으로, 그리고 주연으로 키워온 것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다소 구김과 주름살이 있을지라도, 이제 이범수는 그동안 내보이지 못하고 꼬깃꼬깃 꼬불쳐두기만 한 것들을 굽이굽이 펴내려 한다. 작은 키와 너무 튀는 유니크한 마스크도, 나이도, ‘감초배우’라는 세간의 기억도 그에게는 “콤플렉스거리가 안 된다”. 이범수의 자신감은 지금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 지연되는 시간은 자신감을 키우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자신감 없게 하는 법. 그런데 이범수는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용케 처음의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설렘과 비장함이 뒤섞인 어조로, 이범수는 “지금 다시 출발선에 서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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