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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영화계 내 성폭력 다섯 번째 대담: 여성학자와 활동가 - 조혜영·송란희·권김현영·김홍미리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6-12-07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토론은 계속된다. <씨네21>은 지난 1079호부터 영화계 내 성폭력에 대한 여성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고 감독, 배우, 제작자, 수입·배급·홍보·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의 영화인들로부터 많은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 다섯 번째 대담에서는 범위를 좀더 확장해 영화현장 너머에서 성폭력, 성차별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문제를 제기해온 여성학자와 활동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영화 이론 수업을 병행하고 있는 조혜영 프로그래머와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여성인권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송란희 감독, 최근 페미니즘 이슈의 최전선에서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성학자이자 활동가 권김현영김홍미리가 그들이다. 지난 대담에서는 영화현장에서 여성 영화인이 경험하게 되는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를 전했다면, 이번 대담에서는 차별과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과 구조에 대한 문제가 더욱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권김현영

여성학자. 대학 시절 반성폭력학칙제정운동을 하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생존자말하기대회를 같이 준비했다. 현재는 여러 대학과 기관 등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있다. 성폭력과 말하기와 관련된 저술로는 <성폭력에 맞서다>를 공저했고, <악어프로젝트>와 <거리에 선 페미니즘>의 해제를 썼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이자 여성인권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다큐멘터리 <앞치마>(2006), <쉼터를 만나다>(2008)를 연출했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면서 대학에서 영화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여성 영화: 경계를 가로지르는 스크린>(공역),<다큐멘터리: 리얼리티의 가장자리>, <일탈>(공역), 공저로 <한국 다큐멘터리의 오늘> <아이다 루피노: 느와르 퀸 금기를 찍다> <프랑스 여성영화 120년> 등이 있다. 다큐멘터리 <3xFTM>(2008)의 프로듀서로도 일한 바 있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로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근무했다. 20대에는 반‘성폭력’ 운동을, 30대에는 반‘가정폭력’ 운동을 하면서 ‘어쩌다 이들이 서로 다른 것같이 이야기되는 걸까’를 질문하면서 산다. 젠더폭력 연구자이고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가정폭력: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의 공저자이고,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곧 발간될 예정이다.

-SNS 내 해시태그 운동으로 촉발됐던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문단, 미술계,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됐고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늘 있어왔지만 이 문제가 대중적인 관심사로 부상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온 여성학자, 여성 활동가로서 어떤 변화를 느끼나.

=김홍미리_ 성폭력 문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이게 성폭력인지 아닌지, 이걸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1, 2년 사이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이것이 성폭력이 맞고, 말해도 된다는 사회적 승인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화를 내도 된다는 것, 이 문제에 대해 말해도 거부당하지 않을 거라는 걸 감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요즘 아무리 박근혜 정부에 대한 논란이 거센데, 그 세에 밀려서 사그라들 것 같았던 성폭력 말하기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성폭력 문제에 대한 담론의 장이 축소되거나 닫힐 것 같지는 않다. <씨네21>이 지속적으로 영화계 내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담론의 장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조직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한다는 얘기는 20년 전에도 있어왔다. 그걸 넘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개선해나갈 것인지 중지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학생은 여자가 과반수, 현장은…

=조혜영_ 나는 최근 성폭력 문제에 대한 담론의 흐름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본다. 특히 성폭력 문제에 대한 해시태그 운동이 문화예술계쪽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예술계에서 성폭력과 여성 혐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 문제를 묵살하려는 이들이 꺼내는 대표적인 논리가 ‘표현의 자유’다. 과거 장선우,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에도 검열이다 억압이다 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들이 많았다. 과거의 담론 투쟁이 전문가들끼리의 어떤 싸움이었다고 한다면, 최근에는 젊은 현장 스탭들과 리뷰어들, 대중들 사이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논의의 수준도 세밀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최근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여성 혐오’라는 용어가 일정 부분 순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는 성폭력이나 강간, 성희롱. 이런 용어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분류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면 지금은 ‘여성 혐오’라는 뭉뚱그려진, 엄밀하지 않은 단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굉장히 다층적인 이야기를 한꺼번에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 게 아닌가, 연대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장을 확장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권김현영_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여성 혐오라고 하는 굉장히 모호한 말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 이야기가 결국 성폭력이라는 문제로만 수렴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는 해시태그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문제제기에는 두 가지 차원의 큰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SNS라는 환경의 변화다. 이전에는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들이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컸다. 하지만 SNS라는 물적 토대가 생겨나며 집단적 말하기를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마련됐다. 두 번째 변화는, 문화예술계의 젊은 여성들이 이 문제에 대해 주도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하다. 문화예술계에 처음 들어온 젊은 여성들은 성적으로, 혹은 노동으로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음에도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무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언어라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SNS를 보면, 굉장히 재미있고 기발하며 말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한다. 그런 말들이 널리 퍼질 수 있는 SNS라는 물적 환경과 만나면서 지금처럼 폭발적인 반응이 생겨난 게 아닌가 싶다.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이들은 기존 언어에 포획되지 않고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나가더라. 이런 변화를 토대로 해시태그 운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응답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송란희_ 비단 문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성 문제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고 본인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그 계기를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강남역 사건’을 언급하더라. 이 사건이 보통의 여성들에게 지금의 한국 사회가 성평등 사회라거나 여성 폭력이 없는 사회라는 건 다 ‘뻥’이라는 걸 굉장히 직접적으로 알려줬던 것 같다. 강남역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주변을 보고 스스로를 성찰하다보니 ‘세상에 세상에’ 소리가 나오는 거고. 예전 같았으면 가만히 있었을 텐데 지금은 목소리를 낸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그게 문제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대담까지는 영화현장에 몸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조금 더 영역을 확장해 영화현장 너머에서 여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분들을 모셨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영화인들의 대담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권김현영_ 내가 특히 인상적으로 본 건 의상분장팀이 성적인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다는 얘기였다. 직무상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고 가깝게 다가가야 하다보니 훨씬 더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영화 일을 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팀별 위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 연출부, 제작부, 촬영조명팀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이들 팀에는 남자의 비율이 높고, 의상분장팀의 경우 상대적으로 여자 스탭들이 많다. 팀별 위계와 남초, 여초 현상이 맞물려 구조적 성폭력, 성차별 문제를 만들 수 있겠더라. 향후 영화계에서 성폭력 대응 및 방지 매뉴얼을 만들 때 중요하게 참고해서 봐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현장에서의 술문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상주하며 자주 술을 마신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사건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김홍미리_ 나는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5개월 단위로 계약을 하기 때문에, 생계를 지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눈여겨봤다. 또 하나는, 영화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대담을 읽으며 영화계에서 여성의 위치가 너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의 몸은 섹시한 몸, 만질 수 있는 몸이라는 생각이 영화판에 전형적으로 박혀 있는 것 같더라. 일상생활에서 남성들이 단결하는 문화에 ‘술과 여성’이 따라오듯,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영화현장에서도 여성이라는 성을 일종의 보상처럼 취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조혜영_ 영화계 내 성폭력 얘기가 나오면 당연히 현장에서의 경험담이 가장 먼저 나올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가장 걱정이 되는 건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현장에 대한 무서운 소문을 너무 많이 듣는다는 거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서도 여학생들이 과반이 넘는데, 현장에 대한 소문, 현장에서 통용되는 논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일찍 규정해버리는 학생들을 굉장히 많이 보게 된다. 미쟝센단편영화제나 부산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단편영화의 경우에도 여학생들이 수상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다음 장편영화를 찍을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현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지레 포기하거나, 현장에 연출팀이나 촬영팀으로 갔다가 스스로 여기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는 걸 느끼고 나온 뒤, 장편으로 데뷔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구조가 생기는 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국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는 영화현장이 운영되는 구조적 방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조혜영_ 스웨덴에 도리스필름이라는 단체가 있다. 한국으로 치면 여성영화인모임과 비슷한 단체인데, 이들은 영화현장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지닌 다섯명의 사람들이 여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감독, 주연배우, 촬영감독, 제작자, 음악감독이 그들이다. 리더로서의 경험을 더 많이 해보고 책임도 져보고 실수를 경험하고, 이런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성폭력 문제를 미리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후의 처리도 잘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고를 달리해서 투자 체계라든가 다른 구조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작업환경에서는 노동의 특수성도 있고 현장이 상당히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아무리 말로만 변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많을 거다. 정책적인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김현영_ 흥미로운 이야기다.

조혜영_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스웨덴 여성영화 특별전을 했다. 당시 스웨덴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인 안나 세르네르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3, 4년 안에 영화계 내 성평등을 이루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결국 그걸 이뤄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제작지원을 할 때 쿼터제를 둬서 남성감독과 여성감독의 지원 비율을 50 대 50으로 설정한 거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여성감독들이 능력이 없다, 여성감독들은 욕망이 없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스웨덴 영진위에서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일종의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서 배포했다. 한국도 보면 이경미, 이언희 감독처럼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여성감독들이 많은데 스웨덴에서는 여성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제작지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영화계 내 양성평등이 이뤄지고 있는지 굉장히 꼼꼼하고 세밀하게 모니터링을 했다고 하더라. 모든 영화사의 작품을 두고 일일이 통계를 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영진위에서 올해 여성감독들에 대한 통계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 찾아봤다. 기대도 안 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성인지적 관점의 데이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여성감독의 연출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마저도 이름이나 얼굴을 보고 일일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평등 문화가 먼저 현장에 정착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김홍미리_ 스웨덴에는 50 대 50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여성 영화인들이 많다는 얘기네.

조혜영_ 우리도 가능할 만큼 충분히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있다.

권김현영_ 얼마 전에 사람사는영화제에 관객으로 갔는데 폐막날이라 시상식을 하더라. 거기서 여덟명이 상을 받는데 그중 일곱명이 여자더라. 그 자리에 참석한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아니, 남자들은 다 어디 갔냐”고 할 정도로 여성 영화인들이 재능을 인정받고 상을 받는 것 같은데, 메인스트림에는 왜 그렇게 여성감독이 없는지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영화제를 통해 여성 영화인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 증명된 상태인 것 같은데 한국에서 스웨덴과 같은 영진위 시스템을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조혜영_ 스웨덴 영진위에서 양성평등 지원정책을 실시한 다음 실제로 영진위의 지원을 받은 여성감독들이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세계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정책적인 변화가 수반되어야

권김현영_ 독립영화계는 어떤 상황인지 궁금하다.

송란희_ 독립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여성 영화인들이 많다. 물론 독립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상업영화 투자를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독립영화를 선택한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솔직히 말하면 상업영화 투자를 받으려면 인맥과 술맥이 중요하다. 이걸 쌓지 않고 독립적으로 작업하다보면 제작과 배급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 오기도 하는데, 상대적으로 남성 영화인들보다 여성 영화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맺는 데 취약하지 않나 싶다.

조혜영_ 그래서 쿼터제가 필요하다는 거다. 기회가 없으면 실력을 쌓기도 어렵지 않나. 지금의 상황으로는 영화현장에서 이미 형성된 어떤 문화에 여성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현장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양적으로라도 늘려서 경험을 쌓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감독이 흥행을 하지 못했을 때 그건 개별 영화의 특정 사례일 수 있는데 ‘여성감독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과잉대표되는 경향이 있다.

권김현영_ 어떤 여성감독의 영화는 정말 좋았는데도 관객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더라. 최근 극장가를 찾는 관객이 익숙하게 느끼는 문법이 상당히 단일화되어 있어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진입하고 공감을 받기가 어려운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한공주>(감독 이수진)와 <소원>(감독 이준익)은 남성감독들이 만든 영화다. 남성감독들이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여성감독들이 같은 주제로 만든 좋은 영화, <도희야>(감독 정주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여성감독들의 언어는 복잡하다. 단순히 선악 구도로 분명하게 나눌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도희야> 같은 영화에는 존재한다. 그런데 결국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건 보다 단순한 구조와 플롯으로 승부하는 남성감독의 영화다. 한편으로는 성폭력에 대한 복잡한 감정, 복잡한 질문을 감당할 능력이 이 사회에는 없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성감독들이 단순히 잘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의 질문을 떠나서, 그들의 영화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조혜영_ 성별에 따른 거리감의 문제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특히 여성이 겪는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남성들은 여성보다 훨씬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당사자였다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들에 대해 남성들은 쉽게 동일시하거나 뉘앙스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다시 표현의 자유 문제로 돌아가보면, 본래 표현의 자유란 표현의 다양성이나 상상력의 확장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이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타인에게 성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등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표현의 다양성이나 상상력,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데이비드 핀처에 의해 영화화된 길리언 플린의 소설 <나를 찾아줘>를 보면 ‘쿨걸’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 남자들은 늘 ‘쿨걸’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얘기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쿨걸은 굉장히 털털하고, 축구도 보고, 더러운 농담도 하는 동시에 핫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요즘 걸그룹 아이돌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미덕, 문화예술계 현장에 있는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미덕이 쿨걸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털털한데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권김현영_ 몇주 전에 권은선 영화평론가와 ‘그루프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앞머리에 그루프를 말고 있는 여성 아이돌의 모습으로부터 비롯된 말인데 이게 예외적 경험이 아니라 일종의 유행이더라. 나는 그루프를 말 정도로 외모나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걸 거리낌 없이 보여줄 정도로 털털해. 이 코드인 거다. 문화예술계, 그중에서도 영화계의 여성 스탭들에게 기대하는 역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일 잘하고 털털하지만 동시에 여성으로도 보였으면 하는.

김홍미리_ 방을 같이 써도 될 정도로 털털했으면 하는 거지.

권김현영_ 그런 여성을 상상하는 거다. 남성 중심적인 현장의 시스템에 익숙해지길 바라고, 익숙해지지 않는 이들은 까칠한 거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 같다.

페미니즘 비평이 다시 살아났으면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가 화제가 된 뒤, 감독조합이 단체 내 특별기구를 만들고, 성폭력 예방교육 및 성평등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일련의 대책 마련을 위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계에서 성폭력 문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이 자리에는 독립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분도 있고, 영화제 업무를 맡고 있는 분도 있는데 평소 감지했던 문제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권김현영_ 나는 현장 이전에 대학교 영화과에서부터 형성되는 선후배 관계, 도제 시스템 속에 놓인 이들 또한 성폭력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모 대학 연기과에서 섹슈얼리티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연기과 남학생들이 호스트바에서 있었던 경험을 얘기했다. 그 학생들은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식의 경험을 해봤다는 것이 배우로서 하나의 자산이 되었다는 식으로 발표를 했는데, 그걸 들은 연기과 여학생들이 강하게 항의했다. 그런 식의 경험을 자원하거나 얘기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게 배우로서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배우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요구할 거라는 말이었다. 진정한 배우의 자세를 연연하며 예술가라면 이 정도까지는 해봐야 한다는 식의 성적인 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학교에서부터 현장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송란희_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있다보니 출품작을 보게 되는데, 그중에서는 헉 소리나는 작품들도 꽤 있다. 성매매, 성폭력 문제를 너무도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조명해놓고, 이 문제를 다뤘으니 인권영화제에 출품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 자체가 폭력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일부 연출자들에게 있어서 성매매는 인간적 고뇌를 표현하는 도구이고, 성폭력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비극적으로 다루는 일종의 소재로 쓰더라.

조혜영_ 예술가로서의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는 어떤 작가적 모험의 과정인 거지.

송란희_ 어떤 작품들은 왜 그렇게 찍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폭력적이었다. 성폭력을 고발하려고 촬영한 것인지, 아니면 포르노그래피인 건지. 이런 영상을 찍었을 정도면 그 작업환경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 눈에 선한 영화들도 있더라.

김홍미리_ 중요한 포인트는 그런 영화를 ‘여성인권영화제’에 출품했다는 것이다. (웃음) 시나리오 수업을 하는 감독님 말씀이, 시나리오 습작을 써오라고 하면 여성의 목을 자르거나 몸을 훼손하는 엽기적인 내용을 예술이라는 명목 아래 써오는 남학생들을 굉장히 많이 봤다는 거다. 어쩌면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쓴 시나리오에 빠짐없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폭력이나 훼손의 설정들이 있다는 거. 이걸 그들만의 언어로 예술이라 계속 설명을 하는데, 예술과 윤리 사이의 연결통로가 없는 것 같았다.

조혜영_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심성이 생겨나고 있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다. 페미니즘 붐이 일어난 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선생님, 제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 부분이 여성 혐오적으로 보이나요?’라고 물어오는 영화과 학생들이 늘어났다. 내가 이렇게 썼다가 비판을 받지 않을까, 여성 관객에게 나의 영화가 외면받지 않을까,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이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경계를 학생들이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송란희_ 그런 변화도 있다. 예전에는 여성 문제, 성평등 문제에 문제의식이 있는 감독들이 주로 이 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연출자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감각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상업적인 소재로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출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올해 영화과 졸업작품들, 올겨울과 내년을 관통하며 여성 문제를 다룬 영화들의 수준이 더 높아질 거라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이미 그런 변화들이 어느 정도 감지되고 있기도 하고.

조혜영_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 비평이 이 시점에서 다시금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영화를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에 대한 글이 아니라 여성 연출자, 여성 캐릭터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린 비평이 필요한 것 같다. <씨네21>에서도 한때 여성주의 비평을 많이 게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면에서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사라지고 최근에는 이 역할을 SNS에 맡기고 있는 형국이 됐다. SNS의 경우 플랫폼의 특성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논의가 너무 단순해지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형식과 캐릭터를 복합적으로 탐구하는 페미니즘 비평이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김현영_ 본 적 없는 세계를 만나게 하는 게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성평등에 대한 한국영화계의 전반적인 인식을 고양하는 일종의 문제제기로서의 이야기들이 앞으로도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남성 영화인들도 함께 이 문제를 얘기해야 하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홍보 기간 동안 스칼렛 요한슨이 영화나 캐릭터에 관한 질문을 받는 동료 남자배우들과 달리 ‘몸매 관리를 위한 식단’ 같은 성차별적 질문을 받을 때, 그것이 부당한 질문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마크 러팔로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은 동료 배우들이 있었지 않나. 여성 영화인들이 늘 경험하는 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지지해줄 남성 동료들의 목소리가 절실하다.

김홍미리_ 나는 아까 들었던 스웨덴 영진위 모델이 탐난다.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이 있다 해도 결국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감독조합에서 성폭력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건 지금 시점에서 ‘그저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뿐이지 앞으로 잘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문제는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인데, 영진위의 역할이 중요하다. 성평등, 성폭력, 성차별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기획을 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역시 선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권김현영_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먼저 성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성차별이 없어야 성폭력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폭력 문제도 중요하지만 성차별적 환경을 구체적으로 없애겠다는 발언이 영진위에서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조를 바꾸겠다는 말이 선행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련의 방법으로 성폭력 예방기구의 설립을 얘기하는, 좀더 나아간 방식의 해결책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감독조합으로부터 그런 차원의 성명서를 기대하고 싶다.

김홍미리_ 누가 만지고 안았다, 어디에 들어갔더니 누가 팬티만 입고 있더라, 이런 문제 하나하나도 중요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요건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 폭력에 대해 좀더 광범위하게 정의를 해보면, 폭력이란 누군가의 삶의 반경을 점점 좁히는 것이다. 아까 우리가 얘기했던 성차별이라는 조건의 지형 때문에 영화계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반경이 얼마나 좁아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뒤에서 안지 맙시다, 성희롱적 발언을 하지 맙시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나. 성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가해는 성폭력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분위기 전체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것,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 나를 눈치보게 하고, 왜 신고했냐고 얘기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독립적인 가해라는 말이다. 이 삶의 반경을 좁히는 전반적인 폭력과 차별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별 사례에 대한 지침서만 만든다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권력의 문제, 위계질서의 문제

송란희_ 우선 영화계 시스템 자체가 너무 위계적이다. 큰 형님 아래 작은 동생들, 이렇게 크루가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차별의 문제는 위계의 문제와 늘 맞물려 있는데, 이걸 싹 다 해체해야 하는 거잖나. 그런 면에서 나는 기존의 단체와는 별개로 새로운 영상제작집단들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지금 차별과 폭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여성 영화인들이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혜영_ 위계적인 것도 문제지만, 사실 자본이 가장 문제다. 영화를 만들려면 자본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상업영화 감독들은 다양한 압박을 경험하게 된다. 자본의 특성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시민단체나 영진위의 꼼꼼한 모니터링, 실태조사와 통계. 이런 전략들이 필요할 것 같다.

권김현영_ 여성 사회사업가의 등장도 필요하겠다. (웃음)

조혜영_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투자자들이 있어야겠지. 중요한 건 다양한 방면에서의 변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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