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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인터뷰] "치유, 이 영화를 만들며 바란 건 그거 딱 하나" - <어느날> 이윤기 감독

“왜 날 인터뷰 해요? 배우들 인터뷰 하면 되지. (웃음)” 이윤기 감독은 감독이 할 얘기가 뭐가 있냐며 영화 뒤에 자꾸만 숨으려 했다. 하지만 “비관적인 회의론자”라는 그가 <남과 여>(2015) 이후 내놓은 따뜻한 영화 <어느날>을 보고 나니 궁금증이 일었다. <어느날>은 아픈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의 영혼이 만나 각자의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이윤기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고 따뜻하고 귀여운 영화이면서, 인간의 영혼이 등장하는 판타지영화인 데다 전작을 통틀어 최초로 여성이 아닌 남성의 심리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어느날>을 본 다음날 이윤기 감독을 만나 리얼리즘과 판타지, 낙관과 부정, 성공과 실패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대화의 절반은 상업영화 안에서 소화되지 못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에 대한 논평으로 귀결됐다.

-<어느날>은 감독님의 영화 중 더없이 밝고 귀여운 영화다. 전작인 <남과 여> 이후 밝고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나.

=<남과 여>가 무거운 느낌의 영화여서 다음엔 가벼운 영화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번엔 뭘 해야지 작전을 짜고 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날>의 밝고 따뜻한 느낌이 이전에 없었던 게 아닌데 전작과 비교하니까 상대적으로 더 크게 변화가 느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남녀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에 기반한 내밀한 감정을 다뤄왔다. 이번엔 판타지라는 낯선 장르를 시도했는데.

=현실적이지 않은 장치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처음이라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게다가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제작사(인벤트스톤)로부터 받은 원안(송해성)을 각색한 거였기 때문에 이걸 내가 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사실 사람과 영혼의 만남이라는 이야기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판타지 장르 역시 이미 영화의 태동에서부터 나온 거고. 판타지적 설정이 관객에게 주는 새로움은 없다는 걸 전제로 작업을 시작했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했다.

-리얼리즘 소설처럼 묘사되는 감독님의 영화 세계에서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종종 우연과 일탈의 여정을 경험한다. 그 우연과 일탈을 과감히 밀어붙인 결과가 판타지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현실이지만 왠지 현실 같지 않은 상황과 분위기에 관심이 있다. 비현실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사람들에 대해, 공간과 상황과 인물의 괴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로선 재밌다. 한편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고난이었다. 우리나라 상업영화의 현실에선 다루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아니,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너무 시니컬한가. (웃음) 어떤 이들은 내 영화를 상업영화라 하고 어떤 이들은 상업영화가 아니라 한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내 작품들이 회색지대에 가 있더라. 그런데 불투명한 회색지대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느날> 역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만드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남과 여> 개봉 뒤 공백 없이 바로 <어느날> 작업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제작사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이었다. 나도 1년쯤 고민한 이야기였고. 상업영화로서의 그림을 갖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내 색깔이 더해지면 이 작품이 또 회색지대에 놓이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원안은 지금보다 더 밝았고, 코미디적 요소도 많았다. 나름의 장점이 있었지만 그 톤이 나랑은 맞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내가 그릴 수 있는 분위기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다. 완성본을 내놓는 마지막날까지도 이 작품의 포지셔닝에 대해 고민을 놓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상업적인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런가?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라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하는 이야기를 관객이 잘 들어주고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 마음은 어떤 영화를 만들든 항상 있었다.

-<어느날>의 주인공은 아픈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강수와 자동차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미소와 그 영혼이다. 미소는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으로 설정되었다.

=원안을 따른 건데, 처음엔 나도 그 부분이 부담스러웠다. 영화에 극단적인 아픔을 겪거나 극단적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게 이상하게 불편하더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사기도 쉽고.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파려고 그런 인물을 등장시켰어? 이런 반응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나의 편견이더라. 왜 영화나 드라마에 장애인이 등장하면 안 되지? 그게 이상한 일인가? 장애인은 왜 숨어 있는 존재여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내가 편견 덩어리였구나 싶었다. 그들이 우리 옆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사회여야 한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란 설정을 가능하면 덜 자극적으로, 객관적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소 캐릭터가 불편하진 않았다. 후반부 미소의 숨겨진 사연이 등장했을 때 오히려 이야기가 힘을 받기도 하고.

=신파가 등장하니까? (웃음)

-로맨스의 외피를 두른 듯하지만 결국 두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성찰로까지 뻗어가는 이야기라서 그렇게 느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너무 거창한 표현이다. (웃음) 분명 관심 있는 주제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걸 깊이 팔 생각은 없었다. 이 영화를 두고 판타지 감성 드라마라고도 하던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판타지를 위한 영화도 아니고 죽음을 얘기하려 한 영화도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해줬으면 좋겠다,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다. 치유, 너무 멋진 말인데 이 영화를 만들며 바란 건 그거 딱 하나였다. 영화 한편이 사람을 어떻게 치유하겠나. 하지만 보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어느날> 역시 따뜻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데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기분이 나쁘지 않은 그런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감독님의 영화에는 이별과 죽음이 상시적으로 등장한다. 상처받은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가 있을까.

=왜 그런 것에 집착하느냐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어쩌다 보니 그런 맥락의 영화들을 하게 됐다. 사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에 관심이 많다. 이를테면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 시리즈들. 저런 영화는 어떻게 만들지? 저 감성은 어디서 나올까? 늘 궁금해한다. 또 <다크 나이트>(2008)의 광팬이다. 마이클 만 영화도 정말 좋아하고. 나도 그런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기하면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한다. (웃음)

-감독님 영화 속 인물들의 사랑은 대체로 관계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다. <어느날>에서도 강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낸다. 감독님의 영화에서 왜 사랑은 완성되지 못하나.

=완성이 뭘까? 그리고 대체로 사랑은 완성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완성했다는 판타지를 갖고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늘 불안정한 관계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불안정한 인격체들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들. <멋진 하루>(2008)의 하정우 캐릭터는 결을 좀 달리하지만 대부분 내 영화 속 캐릭터는 불안정한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이 굉장히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느끼는데, 그런 내 모습의 일부 혹은 내가 느낀 감정을 대입해 캐릭터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불안정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충실하다보니 행복한 결말로 가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불행한 엔딩도 없었다. 인물들이 불행한 처지에 놓인 채로 끝난 적도 없었고. 관객에겐 불만스러운 엔딩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현실적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내 영화의 엔딩이 다 그렇다. ‘이들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끝나거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결말이다.

-지금까지는 여성의 심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해왔는데 <어느날>은 강수의 시점과 심리를 따라간다.

=맞다. 내 영화 중 처음으로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해 남자의 시점으로 끝나는 영화다. 강수가 현실에 발을 디딘 사람이기 때문에 강수를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캐릭터의 성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영화를 끌고 가는 인물이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 그게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다. 성별이 바뀌어도 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여성 캐릭터가 세고 남성 캐릭터가 유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매드맥스>를 좋아하나보다. (웃음) 사실 많이들 오해한다. 특히 여성의 심리를 잘 안다고. 그런데 나에겐 영화 속 인물들이 그냥 ‘사람’이다. 여자를 특별히 잘 알아서 <여자, 정혜>(2005) 같은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나는 편견도 많고 전형적이고 고리타분한 남자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나면 실망하게 될거다. (웃음)

-전작 <남과 여>의 흥행이 부진했다. 좋지 못한 성적표가 여러 생각과 고민거리를 안겨줬을 것 같다.

=(결과에 대해) 분석해보진 않았다. ‘진짜 쉽지 않구나, 내가 뭘 잘못했지, 이유가 뭐든 결과적으로 소통하지 못했구나’, 그 정도의 생각은 했지만 더 깊이 있게 생각하진 않았다. <남과 여> 이후 바로 <어느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실의에 빠지고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실패에 집착할 겨를이 없었던 게 오히려 나한테는 괜찮았던 것 같다. 나중에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겠지.

-<여자, 정혜>, <러브 토크>(2005), <아주 특별한 손님>(2006)과 같은 초창기 영화와 최근의 영화들은 꽤 다르다. <어느날>은 또 다른 지대에 놓인 영화처럼 보이고.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환경의 영향은 있다. 영화를 현실화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현실적인 타협 같은 것을 하게 된다. 10년 전엔 현실적 고민을 뒤로 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운이 좋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됐다. 내가 처한 환경에 조금씩 타협을 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영화의 색깔도 전과는 다르게 나오는 것 같다. 영화 만드는 게 쉽지 않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집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인가.

=전혀 고집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또 영화 시장이 커지면 제작 환경이 좋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라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관객의 손해다.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까.

-상황이 어렵다고는 해도 예전의 감성을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

=장담 못한다. 나는 액션영화가 하고 싶으니까. 희망사항이 그렇다는 얘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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