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부터 5일까지 인천다큐멘터리포트 2017이 열렸다. 아시아 그리고 한국 다큐멘터리의 최전선을 확인하고 싶다면 인천다큐멘터리포트를 놓쳐선 안 된다. 아시아의 중요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마켓으로 자리매김한 지 4년째. 올해도 아시아 다큐멘터리 피칭(A-피칭), 한국 다큐멘터리 피칭(K-피칭), 러프컷 세일 프레젠테이션이 차례로 진행됐다. 이중 가장 많은 상금과 지원이 걸려 있는 한국 다큐멘터리 피칭작 10편을 집중 소개한다. 감독 및 프로듀서의 프로젝트 소개와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진 피칭 현장으로 안내한다.
피칭 중인 <분노-우리는 침묵하지 않는다>의 황혜림 프로듀서와 안해룡 감독(왼쪽부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해외로 뻗어나갈 10편의 한국 다큐멘터리들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조지훈 인천다큐멘터리포트 프로듀서의 인사말로 한국 다큐멘터리 피칭이 시작됐다. 11월 4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 모인 각국 다큐멘터리 산업 관계자들이 한국의 다큐멘터리들을 만날 채비를 했다. 올해 K-피칭에는 세월호, 동물복지, 페미니즘, 도시개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진지한 화두를 던지는 다큐멘터리와 휴먼다큐멘터리가 고르게 포진해 있었다.
첫 피칭은 황윤 감독의 <36.5>로 시작됐다. 전작 <잡식가족의 딜레마>(2014)로 돼지와 인간의 아름다운 공존을 이야기한 황윤 감독이 인간과 체온이 같은 돌고래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5년째 만들고 있었다. “수족관에서 쇼하던 돌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낸 일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이 일을 해낸 사람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돌고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디시전 메이커(잠재적 투자자)들은 “때론 다큐멘터리가 여론을 바꾸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면서 “중국에선 거의 매주 수족관이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는데 중국에서 이런 작품이 상영되면 논쟁이 촉발될 것”이라고 응원을 보냈다. 윤가현 감독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는 민머리와 겨드랑이털을 드러낸 대한민국 20대 페미니스트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불꽃페미액션>을 선보였다.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이들의 삶을 기록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여성 혐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포착하려고 한다”는 게 감독의 연출 의도. 인물들은 발칙하고 도발적이지만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고민을 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 같다”거나 “저항의 대상이 누구인지, 저항적 행위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가 잘 드러나야 할 것 같다”는 조언도 이어졌다.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김동빈 감독은 세월호 참사 이후 카메라를 들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세월호 다큐멘터리 <업사이드 다운>(2015)을 만들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다시 오늘> 역시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다. “어머니는 홀로 정체된 슬픔 속에 살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딸을 잃은 엄마의 상실의 고통을 더 가까이서 보려고 한다.” 김동빈 감독의 차분하지만 힘 있는 피칭이 끝나고 처음 마이크를 든 건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배급한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였다. 김일권 대표는 “카메라가 계속 인물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지막에 우리는 주인공의 정면을 볼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인물이 세상을 응시하고 대면하길 희망한다는 의미였다. 미국과 호주에서 온 디시전 메이커들도 “상실감을 극복하는 심리적 여정이란 점에서 보편성이 있다”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연왕모 감독의 <엄마와 나>는 입양으로 헤어졌던 엄마와 아들이 엄마의 죽음을 앞두고 40년 만에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아들과 영어를 하지 못하는 엄마 사이에는 거대한 언어장벽이 있는데, 감독은 “이들 사이의 언어가 어떻게 변하는지 또 이들은 어떻게 다시 관계를 맺고 성장하는지 관찰하려 한다”고 했다. 강석필 인천영상위원회 사무국장 겸 인천다큐멘터리포트 프로듀서는 “인천영상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영화제도 연다. 잘 완성해서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도 상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영업 아닌 영업을 했다.
라다크의 노승과 어린 린포체의 감동적 관계를 그린 <다시 태어나도 우리>(2016)의 문창용 감독은 이번에 인도네시아 최대 쓰레기 매립장 반타르게방으로 향했다. <벗어날 수 없는 산>은 하루 17시간 이상 쓰레기를 주워야 먹고살 수 있는 12살 소녀 나디아의 꿈과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쓰레기 산에서 신기하고 특별한 걸 발견했다.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쓰레기 더미 위로 나비가 날아오고 꽃이 피어났다. 이 다큐의 차별성은 쓰레기 마을의 이야기를 시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철저히 아이들의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휴먼다큐멘터리로 풀어가는 것이다.” 공개된 짧은 트레일러에는 나디아의 씩씩한 모습과 그럼에도 아이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현실이 담겼다. 해외 디시전 메이커들도 매력적인 캐릭터와 완성도 있는 촬영에 큰 지지를 표했다. 공감과 지지의 박수 소리가 피칭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를 만들었던 안해룡 감독은 <분노-우리는 침묵하지 않는다>를 들고 인천에 왔다.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의 공동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일본인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의 기록이 영화의 한축을 이루는데, 안해룡 감독은 “이러한 역사를 스스로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과거 일본의 만행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사회자는 일본쪽 디시전 메이커의 반응을 물었고, <NHK>의 요시히코 이치야 프로듀서는 “일본 내 배급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선호빈 감독의 <부르도자는 고독하다>는 14대 서울시장 김현옥과 그의 도시개발 과정에 집중한다. “김현옥의 서울 도시개발 방식은 개발독재 시대의 야만성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서울은 야망과 명예를 위한 도화지에 불과했다.” 국민체조 음악에 우스꽝스런 재연 영상으로 꾸며진 트레일러는 여기저기서 웃음을 유발했는데, 트레일러의 마지막 장면에선 모두가 조용해졌다. “우리는 김현옥 시장이 세운 고가도로를 철거했지만 아직 그 정신은 극복하지 못했다. 그 증거가 바로 트레일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용산참사다.” 루디 버티뇰 캐나다 날리지 네트워크 대표는 “이 프로젝트의 힘은 로컬리티에 있으며, 로컬의 특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 보인다”는 조언을 건넸다.
다큐 스피릿 어워드를 수상한 <땅 밑에 우는 미래>의 주얼 마라난 프로듀서와 항 팜 뚜 감독(왼쪽부터).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통해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단지 내 고양이들에게 말을 건다. “이 작품은 고양이들의 이야기면서 삶의 공간의 지속적 파괴를 겪으며 살아온 우리 자신에 대한 은유된 이야기다.” 김원중 SJM문화재단 사무국장은 “도시와 건축에 관한 최근의 다큐멘터리와 감독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2001)가 이 작품에서 만나는 것 같아 기대된다”며 같은 “집사”로서 응원을 보냈다. 역시나 “고양이 네 마리를 키운다”는 캐롤리나 리딘 셰필드독 마켓플레이스 책임 프로듀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터넷 콘텐츠가 고양이 관련 콘텐츠”라며 작품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한편 카트린 르 클레프 캣 앤드 독스 대표는 “10분이면 모르겠지만, 고양이만으로 러닝타임 100분을 끌고 갈 수 있겠냐”고 의문을 표했다. 이정준 감독은 청각장애를 가진 무형문화재 임선빈씨와 그의 아들이 함께 대북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울림의 탄생>을 선보였다. 제목만 보면 일생의 마스터피스를 만들려는 장인의 이야기 같지만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 너무 다른 두 세대의 소통 단절과 갈등”을 다룬다. 상반된 성격과 사고방식을 가진 세대간의 갈등이 흥미롭다는 평이 많았고, “장인의 초상이 아니라 기술을 전수받는 조수-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매력적일 것 같다”는 현실적 조언도 뒤따랐다. K-피칭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은 세월호 침몰 당시 구조에 나섰던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로그북>이었다. 복진오 감독은 “잠수사들은 아직도 그때 그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는 “영화라는 매체는 공격성과 치유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야기함으로써 치유되는 것도 있지만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에서 영화가 가지는 공격성도 있기 때문에 영화인으로서의 태도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고 조심스러운 말을 건넸다.
다음날 진행된 러프컷 세일 프레젠테이션에선 11편의 작품이 소개됐다. 지난해의 5편에 비해 작품 수가 두배 이상 늘었다. 완성 단계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러프컷 세일 프레젠테이션은 후반작업 투자와 극장 개봉 및 방송 편성을 위한 비즈니스를 목표로 한다. 박경근 감독의 <군대: 60만의 초상>, 이주호 감독의 <더 디스코 스타>, 장난 감독의 <선>, 김상규 감독의 <앨리스 죽이기>, 김기민 감독의 <우리는 홍리안>, 정다운 감독의 <이타미 준의 바다>, 이일하 감독의 <카운터스>, 김보람 감독의 <피의 연대기>, 이고운 감독의 <호스트 네이션>, 임흥순 감독의 <환생>, 장지남 감독의 <회색무덤> 이상 11편이 소개됐다. 이들 중 다수의 작품이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해 피칭 과정에서 눈에 띈 건 감독들이 방송용 50분 버전, 극장용 100분 버전처럼 방송과 영화의 포맷에 맞게 유연하게 작품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조지훈 프로듀서는 “극장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고 설명했다. “독립영화, 특히 다큐멘터리는 극장 개봉을 통해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가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해외 방송 세일즈뿐 아니라 국내 방송사를 통해 작품을 알리고 사회적 이슈를 던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에 인천다큐멘터리포트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요즘은 ‘방송용’ 다큐멘터리라고 천편일률적인 포맷을 고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방송용 버전에 대한 창작자들의 인식도 바뀌는 추세다.” 더불어 올해는 제작지원 및 현물지원이 늘었다. 그리하여 시상식만 무려 1시간30분이나 진행됐다. 인천다큐멘터리포트쪽에서 준비한 꽃다발만 수십여개였다. 대명문화공장, 디자인 색, 필앤플랜, 스튜디오 페임,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영화공간 주안, 추억극장 미림이 올해 새롭게 참여해 제작비 및 현물을 지원했다. 총 20편의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안은 덕분에 시상식은 모두가 웃으며 축배를 드는 자리였다. 역대 최대인 366건의 비즈니스 미팅, 국내외 영화, 방송, 다큐멘터리 관계자 900여명 참석이라는 수치가 아니라, 어쩌면 이런 훈훈한 시상식 풍경이 인천다큐멘터리포트의 4년간의 성과일지 모른다. 조지훈 프로듀서는 말했다. “단순히 제작 지원금을 나눠주는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모여서 대화하는 장이 됐으면 한다. 그렇게 인천다큐멘터리포트가 친구를 만나는 장이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