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출신 캐릭터가 남자배우라면 한번쯤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되었음에도 북한 군복을 입고 북한어를 구사하는 정우성을 보니 낯설다. 정우성이 맡은 엄철우는 북한에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북한 1호’(김정은)를 데리고 남한으로 피신하는 북한군 최정예 요원이다. 양우석 감독은 정우성이 출연했던 “드라마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에서 보여준 외로운 가장의 모습을 보고 엄철우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출연을 요청했다”고 말해주었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발생한다는 설정이 충격적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정우성은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을 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엄철우는 어떻게 다가왔나.
=한 가정의 가장. 처자식을 잘 돌보고 싶은 욕구가 크지만 현실이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가장. 그래서 리태한 정찰총국장(김갑수)으로부터 쿠데타 공모 세력을 처단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 대의를 꿈꾸기보다 가족을 좀더 나은 생활로 이끌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북한 남성을 장르영화, 특히 액션영화에서 기능적으로 소모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강철비>는 북한을 우리의 상상 속 재료로서 이용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엄철우는 어떤 유형의 캐릭터를 극대화한 인물이 아닌 극의 화두를 전달하는 인물이라 인상적이었다.
-북한 사투리를 구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언어를 체화해야 했던 까닭에 사투리를 연습하는 데 신경을 제일 많이 썼다. 북한말은 특성이 명확했다. 단어의 대부분이 딱딱 붙어 있어 말 속도가 빠르게 느껴졌다. 100% 완벽하게 구사하진 못하더라도, 관객이 ‘정우성과 잘 어울리네’ 정도만 받아들여도 성공이다 싶었다. 촬영 초반에는 유튜브로 미국, 유럽 사람들이 찍은 다큐멘터리를 챙겨보고, 북한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녹음해준 대사를 들으면서 정신이 다소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미가 붙었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대화까지 사투리로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똥개>(감독 곽경택, 2003)의 경상도 사투리가 어려웠나, 북한 사투리가 어려웠나. (웃음)
=<똥개> 때가 훨씬 어려웠다. 사투리를 처음 배웠고, 그때만 해도 <비트>(감독 김성수, 1997)의 민이었잖나. 나에 대해 팬들의 고정관념이 있었던 까닭에 밀양 사람들이 ‘정우성, 사투리 잘한다’고 칭찬해도 팬들은 ‘정우성은 사투리를 못해, 안 어울려’라고 생각했으니까. <똥개> 때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조건 북한 사투리와 잘 어울려야 했다. <똥개> 이후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으니 엄철우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내심 하고 있다.
-남한의 곽철우(곽도원)와 티격태격하면서 서사를 끌고 가는 모습이 버디무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체제에서 사는 사람이건 내가 믿고 있는 체제의 정당성이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가 존재의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지 않나. 엄철우 또한 그런 사람일 것이다. 엄철우가 곽철우에게 떳떳하고 솔직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남한에 내려오게 된 이유,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진실한지, 스스로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외교적인 입장에 따라 리액션이 수시로 달라지는 곽철우에 비해 엄철우는 단순해 보이고, 곽철우가 그런 엄철우를 갑갑하게 받아들이면서 둘의 ‘케미’가 발생하는 것 같다.
-<강철비>를 포함해 <아수라>(감독 김성수, 2016), <더 킹>(감독 한재림, 2016) 등 최근 출연작들이 저마다 흥미롭다.
=젊었을 때는 안 해본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하고, 관객이나 팬들이 규정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 멋스러움을 찾아다닐 나이는 지났고, 멋스러움이 흥행 요인이라도 해도 그건 후배 배우들에게 넘기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은 영화가, 캐릭터가 하려고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어떤 화두를 던지는지를 더 많이 보려고 한다.
=통일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진 근미래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통일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의 암투,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각국의 다툼을 그린 이야기다. 얘기할 수 있는 건 원작과 많이 다르고, 세계관이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촬영은 내년 2월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