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이 돌아왔다. 다행히 이번엔 비교적 빠른 복귀다. 언제나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 1순위인 그도 어느덧 장편 데뷔 14년차에 접어든 만큼 크고 작은 변화들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상상에 더해 원숙미가 물씬 느껴지는 안정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1987년의 이야기를 이제야 영화화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토록 기본에 충실한 연출을 장준환 감독이 선보였다는 것도 놀랍다. 그간의 변화에 대해 묻자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단단한 답이 돌아왔다. 믿음직하다.
-먼저 축하드린다. 언론시사 후 반응이 좋다.
=<씨네21>에서 그렇게 말씀해주니 믿음이 간다. 기자시사에서 보는 반응과 일반시사에서 관객이 보는 반응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기자들은 싸늘하지 않나. (웃음) 긴장이 많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일단 같이 일한 스탭이나 배우들, 무엇보다 그 당시 실존 인물들과 유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민주화 투쟁을 한 분들과 유가족들을 모셔서 시사를 따로 했는데 마치고 그분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맺혀 있던 불안이 그나마 조금 해소되었다. 그때 처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영화와 두 번째 사이엔 거의 10년의 간격이 있었다. 이번엔 고작(?) 4년밖에 안 된다.
=맞다. 고작 4년. (웃음) 젊었을 때는 성격상 완벽한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진 않는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가 그런 말씀을 하더라. 젊었을 때에는 음표 하나 틀린 것 가지고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고 자책하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까 음표 다섯개, 여섯개 틀려도 자기가 이 음악의 본질과 핵심에 얼마나 에너제틱하게 접근했는가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나도 이제는 핵심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디테일이나 다른 부수적인 부분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좋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거겠지. 그래도 안 바뀌는 건 안 바뀌지만. (웃음)
-1980년 광주에 대한 영화는 꽤 있지만 1987년 민주항쟁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작업하면서도 굉장히 의아했다. 왜 이 이야기를 아직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을까. 이처럼 드라마틱하고 긴장감 있는 소재도 드문데. 다행이다. 내가 하게 돼서? (웃음) 한편으로는 당연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세력과 정권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을 거다. 광주 이야기만 해도 나오기까지 한참이 걸리지 않았나. 막상 만들고 나서도 어려움을 겪었고. 흉흉한 소문들을 들으면 누가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싶은 시절도 있었다. 사실 <1987>은 좌우를 떠나서,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온 국민이 나와서 독재세력으로부터 뭔가를 성취해낸 이야기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은 게 지지난해 이맘때가 아니었나 싶다. 김경찬 작가가 쓴 시나리오 초고를 보고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안타고니스트인 박 처장(김윤석)을 등뼈처럼 쫙 세워놓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결국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발전해가는 구조다. 예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았다. 나중에 관객이,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신비롭고 재미있는 체험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았을 텐데. 심지어 유해진이 맡은 한병용이나 연희(김태리)를 제외하곤 모두 실존 인물이다.
=현실적으로 고증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지만 무엇보다도 실존 인물들이 많이 있고 직접 겪은 분들이 있다. 불과 30여년 전 이야기이고 민감할 수 있는 심적인 양태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라 균형을 맞추면서 이 이야기를 꾸려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사실 박종철 치사사건도 정확히 규명된 게 아직도 없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달라는 의미로 실명을 쓴 부분도 있고, 그 당시 피땀 흘리셨던 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실명을 쓴 부분도 있다. 어쨌든 팩트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드라마적으로 윤택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한병용 같은 경우 실제로 편지를 빼내오고 전달한 교도관은 두분이었는데 두 인물을 하나로 합쳤다.
-여러 장르가 뒤섞인 느낌이다.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처음에는 누아르, 중간의 연희 등장부터는 풋풋한 드라마, 그리고 마지막은 대서사시처럼 마무리된다.
=시나리오상에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전이었다. 한 영화에서 결을 바꿔가며 하나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박종철 열사로 시작해서 이한열 열사로 끝내겠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구성을 짜나갔다. 사실 이한열 열사는 박종철 치사사건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두 사건을 함께 다루는 건 도리어 긴장감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이한열 열사로 마무리하는 게 더 중요하고 하나의 큰 이야기로 묶는 게 의미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흠결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완벽한 게 아니라 힘과 에너지라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시도했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감독님은 1987년을 체험한 세대인데. 영화를 구상할 때 구체적으로 상정한 관객층이 있나.
=특정하진 않았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결국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시대나 지역을 떠나서 같이 소통하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이 이야기도 그런 맥락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았다. 1987년을 겪은 분들이나 그 시대를 통과한 분들에게는 아픈 추억이자 자랑스러운 역사일 것이다. 젊은 층들에게는 신기하게도 2017년에 또 다른 광장이 있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 부분을 통해서도 세대가 묘하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실제로 여러 가지 장면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자에게 “받아쓰기나 잘해”라고 하는 장면이나 대공처장이 사람을 죽이고 태연히 테니스를 치는 장면 같은 건 일종의 풍자처럼 보일 지경이다.
=테니스장 장면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가보면 알겠지만 그 앞에 테니스장이 있다. 대공 형사들이 유일하게 오락과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테니스장을 관리하려면 소금이 필요한가 보더라. 소금을 계속 조달청에서 공급받고 있다가 윗선에서 “쟤네들 소금을 뭐한다고 저렇게 많이 써?” 그러면서 차단하니까 박 처장이 상관에게 가서 따지고 폭력을 쓰고 그랬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박종철 열사가 죽은 바로 다음날 테니스를 치면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이게 인간의 한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우리 안의 괴물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감독님에게 1987년은 어떻게 기억되나.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최루탄 냄새가 많이 났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은 친구가 성당에 가면 무슨 비디오를 보여준다더라 그래서 “성당에서 왜 그런 걸 보여주지?” 싶었다. 딴생각을 하고. (웃음) 신기한 걸 보여준다고 하기에 연희처럼 나도 친구를 따라갔다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비디오를 봤다. 진짜 무서웠다. 그냥 공포영화를 보는 차원의 무서움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났던, 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무서웠다. 함께 성당에 갔던 굉장히 발랄한 성격의 친구는 광주 비디오를 같이 보고 나오면서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또 하나는 그 당시 학교에서 도덕선생님이 주도했던 토론 수업이 생각난다. 주입식이라서 토론 수업은 거의 없었는데 대학생들의 데모에 대해서 스스로 비판을 하도록 유도하는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숫기도 없고 조용한 학생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다. “대학생 형, 누나들이 저렇게까지 데모를 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랬더니 도덕선생님이 째려보시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웃음) 아무래도 80년대 후반에 청춘을 보낸 세대니까 내 체험 역시 영화에 알게 모르게 많이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제일 울컥했던 장면 중 하나가 박종철군의 유골을 뿌리는 장면이었다.
=박종철의 아버지가 강물에 들어가서 재를 물속에 넣는 장면을 찍을 당시에 예상치 못하게 눈이 왔었다. 원래는 재를 날리기로 했는데 물속에 넣게 되었다. 촬영하고 있는데 스탭 중 누군가가 “이 장면은 클로즈업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감히 얼굴을 따고 들어가서 ‘더 슬프지?’ 이렇게 연출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지구를 지켜라!>는 95% 콘티랑 같았다. 지금은 나의 직관을 믿고 가자고 생각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도 많아졌다.
-<1987>은 감독님의 전작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의 클래식한 연출을 보는 느낌이다.
=최대한 연출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팩트를 직접 목도하는 것처럼 시작해서 점점 더 인물의 감성이나 캐릭터 안으로 다가가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작품마다 원하는 외양이나 적절한 형태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충실하자는 게 이번 영화의 목표였다. <1987>은 모든 게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몇몇 순간, 예를 들면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의 차가운 물에서 고문당하는 장면과 명동성당의 선언을 교차편집하는 장면은 최대한 영화적인 연출에 힘을 쏟았다. 나머지는 힘을 빼고 진짜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가급적 거리를 둔 편이다.
-<지구를 지켜라!>가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동안 언급이 많이 되었는데 <1987>이 개봉된 이후는 확실히 달라질 것 같다. 추구하는 방향이 있다면.
=여전히 <지구를 지켜라!> 같은 또라이 미친 영화에 빠져 있다. (웃음) <지구를 지켜라!> 이후 단편영화 <털>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캐릭터와 영화적 문법을 구사하고 즐긴다. 하지만 동시에 <정복자 펠레>처럼 진중한 사람의 이야기를 무게감 있게 따라가는 영화도 좋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는 나도 궁금하다. 방귀 뀌는 슈퍼히어로에 대한 영화는 필생의 프로젝트인데. 지상으로 올라온 인어 이야기도 그렇고.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은 감성은 마이너한데 돈이 많이 드는 게 치명적이다. 치명적인 매력? (웃음)
-이번 영화도 세트나 고증을 생각하면 규모가 큰 영화다. 배우들도 화려하고.
=화려함을 추구하려고 멀티 캐스팅을 한 것은 아니다. <1987>은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이 배우는 이 역할이다’라는 것을 빨리 알려주고 가야 관객이 이야기를 순조롭게 따라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배우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이미지까지 고려해서 캐스팅하게 되었다. 그러나 캐스팅을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웃음) 너무나 운이 좋게 이 이야기가 가진 힘과 의미에 같이 동참해줘서 영화가 완성되었다. 감독으로서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특히 강동원 배우는 서슬 퍼럴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걸 감수하면서 최초로 우리 영화에 힘을 실어준 배우라서 더 감사하다.
-6월 시위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선창을 하는 목소리는 배우 문소리씨다. 어떤 역할이든 캐스팅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배역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목소리만 썼다. <1987>은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 조금 더 조화롭게 여성 캐릭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김정남의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볼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우리는 실화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남성들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시기적으로 6월 민주항쟁까지 다루지만, 실은 이후 노태우 정권이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이 됐다.
=<1987>은 기본적으로 착한 영화다. 디즈니식의 필터를 끼웠다고 할 수도 있다. 동심을 파괴하기 싫어서 너무 지저분하거나 끔찍한 장면은 많이 뺐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1987년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왜 이렇게 쓸쓸하고 답답할까. 집값은 왜 이렇게 높아졌으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왜 이럴까 하는 질문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87년을 겪은 분들에게는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한다. 그 당시의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뜨거웠는지, 지금 우리의 자리를 확인해보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촛불광장을 겪은 젊은 세대에는 또 다른 용기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딸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딸이 살아갈 세상이 어떻게 하면 좀더 어우러져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부분도 있다. 조금만 더 나이 들면 손잡고 같이 본 후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영화 한편으로 세상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