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육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해 종종 깨닫고는 한다. 여러분도 그럴 거다. 내 경우는 공포영화, 특정하자면 오컬트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오컬트 영화는 공포영화 중에서도 이단이나 사탄 숭배, 구마 의식, 기독교 신비주의 현상을 다루는 장르다. <오멘> <엑소시스트> <로즈메리의 아기> <쳐다보지 마라> <위커맨>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면 맞다. 넓은 범주에선 <곡성>도 포함된다.
오컬트 영화와 가정교육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려면 잠시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난 무신론자다. 사안에 따라 불가지론과 유물론 사이를 어지럽게 왔다 갔다 하는, 다소 일관성 없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는 달랐다. 내 유년 시절은 종교를 제외하고 나면 별 할 이야기가 없다. 성서 읽는 걸 정말 좋아해서 숨겨두고 읽을 정도였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이야기를 특히 사랑했고 시편 암송 대회에선 언제나 1등을 했다. 주일 미사를 가면 영성체와 고해성사를 빼먹지 않았다. 한번은 미사 중에 손등을 긁다가 피가 난 일이 있는데 평소 나를 기특하게 보던 수녀님이 성흔이 나타난 줄 알고 끌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다니는 소동도 있었다. 휴지 좀 주세요, 라는 부탁에 도둑처럼 찾아온 새벽의 속도로 흔들리던 눈빛과 큰 숨을 몰아쉬며 성호를 긋던 프란체스카 수녀님의 표정이 아직도, 프란체스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떠오른다.
얼마 전 40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아들을 낳으면 신부가 되게 하겠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가정교육 이야기를 꺼낸 건 그 때문이다. 종교에 완전히 무심해져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오컬트 영화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과 그에 반하는 복잡한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믿지 않으니까 영화 속 이야기의 동기를 쉽게 부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결코 보거나 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범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혹적이다.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반드시 손가락을 벌려 벌어지는 광경을 빼놓지 않고 봐야만 한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피할 만한 <오멘>의 네 번째 속편이나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마저 나는 몇번을 되풀이해 보았다. 켄 러셀의 <악령들>과 <백사의 전설>은 지금도 1년에 한번씩 꼭 다시 본다. 그리고 볼 때마다 신성이 모욕당하는 장면들에서 불쾌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특히 <로즈메리의 아기>는 각별하다. 앞서 설명한 종류의 감정을 처음 느꼈던 게 바로 로만 폴란스키의 1968년 작품 <로즈메리의 아기>였기 때문이다. 비디오 제목은 <악마의 씨>였다. 원작 소설도 재미있지만 <로즈메리의 아기>는 영화가 정말 끝내준다. 사실상 오컬트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출발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로즈메리는 남편과 함께 오래된 아파트에 입주한다. 남편은 영 앞날이 보이지 않는 배우다. 아파트 주민 중에는 유독 로즈메리 부부를 좋아하는 노부부가 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밤을 보내고 나서 로즈메리는 임신을 한다. 덩달아 남편의 커리어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노부부는 날마다 로즈메리에게 건강식이라며 녹색의 주스를 마시게 한다. 결국 로즈메리는 이 아파트가 사탄을 숭배하는 신비주의 공동체의 소굴이라는 사실과, 남편이 이들과 공모해 자신에게 적그리스도를 임신하게 만들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 영화를 연출한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가 임신 중에 맨슨 패밀리에게 살해당한 것이 <로즈메리의 아기>와 관련 있다는 도시 괴담은 사실과 다르니 흘려 듣기를 바란다.
한때 재능 있는 감독이라면 공포영화를 통해 기량을 뽐내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공포영화의 황금기는 오래전에 끝났다. 하물며 오컬트 영화라고 하면 스래시 메탈이나 그런지 록이라는 말과 거의 비슷하게 들린다. 살면서 <로즈메리의 아기>나 <쳐다보지 마라>만큼 훌륭한 오컬트 영화를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유전>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 <유전>은 이 방면의 레퍼런스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놀랍도록 빼어난 오컬트 영화다. 오컬트 영화의 황금기라고 할 만한 70, 80년대에도 이만한 작품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이 영화는 <로즈메리의 아기>와 같은 오컬트 장르의 고전적 황금률을 계승하면서도 <위커맨> <쳐다보지 마라> <행잉록에서의 소풍>과 같은 유럽향 오컬트 걸작의 육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토니 콜레트의 연기는 굉장하다. 귀신에 씌지 않고도 저런 연기가 가능하다는 게 영화 자체보다 더 소름끼친다.
주인공은 두 자녀와 남편과 함께 교외에서 살고 있다.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는 오래도록 사이가 좋지 않았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에도 별다른 감정의 기복을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는 평생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왔고 가족에게는 죽음이라는 불운이 언제나 가까이 있어왔다. 평소 유독 할머니를 따랐던 막내딸은 평소보다 더 우울해 보인다. 어느 날 막내딸이 모종의 사고를 당하면서 주인공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직면한다. 슬픔을 이겨보려 애쓰던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어머니의 비밀에 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악몽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자신과 남은 가족을 위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전>은 고전적인 밀도를 가진 영화다. 다만 이 ‘고전적’이라는 단서가 관객이 바라는 매력일지는 미지수다. 요즘의 유행과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방면의 유행이라고 하면 단연 제임스 완을 필두로 한 <컨저링>, <인시디어스>류의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들은 얼마나 기발하고 참신하게 관객을 깜짝 놀라게 만드느냐에 골몰하는 경향을 갖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임스 완의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가 오로지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소도구의 의미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들은 과거 할리우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귀신 들린 집 이야기(<폴터가이스트> <아미티빌의 저주> 등)를 교묘하고 영리하게 변주해 계승하는 방식으로 독특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유전>은 관객을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게 만들고 킥킥대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새로운 종류의 <컨저링>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유전>에 실망할 공산이 크다. 만약 <유전>의 고전적인, 그러나 요즘에는 거의 누구도 하지 않는 방식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당신은 살면서 이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될 것이다. <유전>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전적인 오컬트 영화의 가장 훌륭한 장점들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으며, <위커맨>이나 <쳐다보지 마라>처럼 즉각적인 이해보다 몇번을 곱씹고 해석해보면서 새삼 전율하게 되는 상징들로 시종일관 뒤덮여 있다. 이 상징들을 찾아보고 탐구하며 결말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보는 건 흡사 <곡성>을 보는 일처럼 즐거운 작업이 될 것이다.
<유전>과 같이 훌륭한 영화가 단지 유행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당한다면 거의 장르사적인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뛰어난 공포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이를 계기로 붐이 살아나기를 꿈꾸고, 다시 포기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소년>의 “볼링붐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온다”처럼, 공포영화 붐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