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인터뷰
<마녀> 배우 조민수, "전작이 만든 선입견으로 배우를 규정 짓지 않기를"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8-07-12

어린아이들의 뇌를 아무렇지도 않게 갈라 유전자 조작에 이용하는 뇌과학 박사. 잔인함을 형상화한 <마녀>의 빌런 닥터 백의 연기는, 적어도 보기 전까지는 감정의 바닥까지 내려가 리얼한 연기를 선보이는 조민수와는 선뜻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럴법한 캐스팅에서 벗어난 의외의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닥터 백은 연기 30년차, 조민수의 내공으로 똘똘 뭉친 독특한 캐릭터다. 자주 기회가 오지 않는 역할 앞에서 조민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민을 더해 닥터 백을 하나하나 만들어갔고, 그래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닥터 백은 원래 시나리오에서 남성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가 지금의 여성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마녀> 제작·투자사인 변승민 워너브러더스코리아 한국영화 팀장이 <피에타>(2012) 때 참여했었다. 그때 인연으로 영화 할 때 전화해서 이것저것 상의를 한다. 그분이 “선배님 영화 출연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애정을 주곤 했다. 그러다 박훈정 감독이 이런 영화를 한다기에 “그럼 감독님께 내 이야기 좀 해줘” 했다. (웃음) 그때가 <브이아이피>(2017) 촬영 중간 즈음이었다. 대본을 받고서 처음에 “나 이거 하는 거 맞죠?” 재차 확인했다. 그때까지도 대본에는 닥터 백 캐릭터가 남자로 되어 있었다. 캐스팅보드에 내가 올라가 있는 걸 보고 그제야 하는구나 싶더라.

-뇌 분야 최고 권위자인 닥터 백은 유전자조작을 통해 살인병기 아이들을 기르는, 히어로물의 빌런 캐릭터다. 리얼한 감정에 치중했던 그간의 출연작과 상당히 다른 캐릭터다.

=재밌더라. 원래 내가 히어로물, 중국 무협물을 좋아한다. 주인공들이 땅 안 밟는 영화들. (웃음) 새로운 기획도 점점 줄고, 상대적으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도 이런 장르의 영화들이 있었으면 했다. 대본 받고도 감독님에게 원래 쓴 대본의 남성적인 어미를 바꾸지 말자고 했다. 남자배우가 하는 대사를 소리내면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더라.

-첫 장면, 차에서 내리고 걷는 순간부터 닥터 백이 가진 사악함을 보여줘야 했다. 힐을 신고 찬찬히 스텝을 밟으며 “머리를 날리라고 병신 새끼들아!” 하는데, 감정은 누르고, 동작은 작은데, 존재감은 커야 했다.

=게리 올드먼! 난 딱 그런 느낌을 생각했다. 닥터 백은 감정 폭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 외적으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 역할은 모든 걸 크게 못한다. 공간도 좁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것저것 다 해봤다. 사람들이 되게 낯설어하는 캐릭터가 될까봐 좀 두렵기도 했다. 감독님은 능력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사람이길 원했다. 현실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SF 느낌을 배제하려고 했고 스타일도 할리우드 히어로물에서 외형적인 걸 드러내는 것보다 내추럴하게 가길 원하더라. 내가 생각하는 걸 보여주면 감독님 생각도 좀 달라지겠다 싶어 피부톤도 거칠게 가고, 주근깨 보이게 하고, 컬러 렌즈도 끼고 그렇게 해봤다.

-피부톤의 설정이 독특하더라. 오히려 메이크업을 과하게 해서 강한 인상을 주는 쪽을 생각할 법한데 최대한 민낯을 드러내면서 강한 인상을 만들어갔다.

=할리우드영화를 보면 여성 캐릭터들이 분장을 많이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시도가 별로 없었다. 분장팀에 바로 “나 얼굴에 칼집나도 괜찮으니까 확 바꿔줘” 했다. 내가 내 얼굴 봐도 지겨운데 관객은 매일 비슷한 얼굴 보면 오죽하겠나. 새롭게 할 수 있는 건 시도해보고 싶다. 계속 이야기 나누고 수정하면서 만들어갔다.

-첫 등장만큼 인상적인 건 자윤(김다미)한테 총 맞을 때다. 쇳소리를 내며 과도하게 아파하지 않나. 원래 닥터 백의 차가운 이미지를 극 안에서 단번에 깨뜨린다.

=관객이 많이 웃은 장면인데, 난 진심이었다. 자윤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능력자들이라 총을 맞아도 고통이 없지만 닥터 백은 사람이니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 몸에 피 한 방울도 흘리기 싫은 사람이 총알이 들어왔다고 하면 얼마나 참지 못하겠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허리를 구부려 머리를 거꾸로 하고 있었다. 극한의 고통으로 피가 몰린 느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총 맞는 연기로는 거의 손꼽힐 베스트 연기다.

=찍을 때 긴장을 많이 했다. 처음 맞아보는 거라. (박)희순씨나 (최)우식이가 왜 그렇게 긴장하느냐는데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연기였다. 남자배우들과 달리 여배우들은 총 맞는 연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다. 합이 안 맞으면 장비랑 다시 세팅하는 데까지 30분이 걸린다. 맞을 때 표정 연기도 잘해야 하고. 앞의 배우들이 특수분장팀에 혼나고 있는 걸 보면서, 나도 그렇게 욕먹을 텐데 죽겠다 싶더라. 다행히 총 맞는 장면 세번이 다 한번 만에 오케이가 났다. 찍으면서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솔직히 힘들지는 않았다. 3년이나 하면 모를까, 3개월 촬영인데 참고 잘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무엇보다 힘든 역할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웃음)

-영어 제목이 ‘The Witch: part1. The Subversion’이다. 마지막 반전의 키를 쥔 역할이자 다음 시리즈에서 자윤의 출생을 알려줄 역할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설정을 알고 갔나.

=마지막 장면은 원래 대본에 없었다. 미리 알았다면 그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좀더 구상을 했을텐데 아쉽다. 감독님이 서울 촬영 다 끝난 다음에, “시간 괜찮으세요?” 하시더라. 보충촬영하려는 줄 알고 언제든 괜찮다 했다. 또 다른 인물은 무조건 닥터 백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가야 한다고 하시기에 최대한 여성스러운 면모를 살렸다.

-<청 블루 스케치>(1986), <신의 아들>(1986), <난 깜짝 놀랄 짓을 할 거야>(1990) 등 데뷔 초 스크린서 활동하다가 드라마에 매진해왔다. <피에타>로 주목 받고 연달아 <관능의 법칙>(2013)에 출연한 추이에 비하자면 너무 오래 쉰 거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잘 안 믿는데 그동안 잘 놀았다. 어렸을 때는 이쪽 직업이라는 게 누가 잘되면 나는 사라지지 않을까 비교되고 걱정이 많았다. 그런 생각에 내가 얼마나 못되게 나를 긁었겠나. 내가 뭐가 부족하냐 싶은, 그런 못된 생각 안에 나를 넣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니 흉해지더라. 욕심내고 심술내면 그렇게 내 얼굴이 변해 있고, 그 얼굴로 카메라를 받았을 때 그 얼굴이 부담스럽고 싫더라.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중이 안 찾으면 못하는 거다. 벗어나도 불안하고, 힘들지 않게 완충작용을 끊임없이 해나갔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면 하겠지 하고 기다린다.

-80년대 톱배우의 위치를 상징하는 드봉CF 등 모델로 각광받았다. 까만 피부톤에 서구적인 외모로 당시 청순하고 단아한 또래 배우들과 차별화됐다.

=어릴 때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줘도 다 거짓말이지 싶었다. 좀 늦게 나 자신을 돌아본 것 같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좀 다르고자 하는 건 있었던 것 같다. 옷 사서 일부러 대패로 밀고, 슬리퍼 끌고 그러고 다녔다. 한번은 KBS 국장님이 날 부르시더니 “그래도 멜로영화 주인공인데 그렇게 입지 말라”고 하시더라. (웃음) 그땐 주연 맡는 배우들은 칼라 있는 블라우스에 투피스 차림으로 단정하게 다닐 때였는데, 난 그런거 요구하면 싫다고 하고 그러면서 좀 멋대로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었다.

-지금도 함께 일한 사람들은 ‘형님’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인데, 여성적인 이미지로 비치는 걸 부러 깨고자 한 시도로도 보인다.

=그 시대는 여자로 보이는 게 불편하고 힘들었던 시절이다. 방송국은 좀 편하게 터치하고 이야기하는 문화였는데, 소심한 성격에 너무 힘들더라. 매일 화장실 가서 울고 그랬다. 그런데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거칠어졌다. 남성화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지금 보니 너무 멀리 온 거지. 성격이 점점 터프해지더라. 이제는 다시 반대로는 못 갈 거 같다.

-고음과 허스키한 중저음이 오가는 목소리가 주는 깊이감이 연기의 톤을 독특하게 해준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지리산>(1989)의 빨치산이나, <모래시계>(1995), <해피투게더>(1999), <피아노>(2011) 등에서 그 깊이가 주는 슬픔이 항상 깔려 있었다.

=내가 내 목소리를 좀 긁었다. 초창기에 연기할 때 목소리를 들으면 정말 하이톤에 초등학생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해’ 하는데 안 붙더라. 느낌이 안나오니 미치겠고 내가 나를 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산에 가서 꽥꽥 소리를 질러 목을 거칠게 만들었다. 하이톤의 허스키한 느낌이 되니 소리가 깊어 보이더라. 나이 먹고 세월이 가니 지금은 너무 탁해져서 이젠 좀 맑아지게 목에 좋은 약 먹고 매끄럽게 해야 하나 싶어진 거지. (웃음)

-최근의 ‘목소리’는 든든해졌다. <공동정범>(2016) 대관 시사를 지원하는 등 조민수의 목소리가 독립영화계를 든든하게 지지해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난 내가 마음에서 움직이면 그냥 움직인다. 정치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나를 화나게 한 건 ‘세월호’였다. 그때 세월호를 모티브로 한 <빛>이라는 뮤직비디오가 들어왔다. 회사에 이런 작품은 무조건 한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단편 <미행>도 세월호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라 출연했다. 그 인연으로 인디스페이스를 가게 됐고, 독립영화도 잘 몰랐는데 그때 알게 됐다. 수익도 많지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활동을 하나 하다가, 배우 유지태씨가 관객과 함께 지지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걸 보니 멋지다 싶더라. ‘나도 1년에 한번은 하겠다. 수익이 많아지면 더 하겠다’ 그렇게 하게 된 거다. 정말 심플하게, 멋있어서 시작한 거다. 그렇게 들꽃영화상도 가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도 가고, 내가 마음에 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가게 됐다.

-얼마 전엔 디아스포라영화제 개막식 사회도 봤다.

=<공동정범> 공동연출한 이혁상 감독이 거기 프로그래머다. 왜 나를 불렀냐고 물으니, ‘선배님 힘내시라고요’ 하더라. 눈물이 나더라. 김기덕 감독 건이 불거지면서 한동안은 너무 힘들었다. 내 현장은 아니었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다른 배우들도 생각나고. 고민이 많았다. 그 생각이 들더라. 굶주린 아이에게 다가가는 독수리를 보면서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생각났다. 나는 어땠을까. 그 장면을 봤으면 달려가서 배우를 먼저 구했을까. 숙제처럼 다가왔다. 현장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이젠 앞장서서 소리를 내자. 이혁상 감독한테 너무 고맙더라. 내내 제자리걸음하는데, 선배님 이렇게 길을 가세요 하고 길을 열어준 거 같았다.

-차기작이 더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없다. 고르는 중이라고 멋있게 말하고 싶지만 들어온 게 없다. 없을 때, 이런 질문 받으면 에너지 충전한다고 하는데 좋은 작품 있으면 충전할 시간이 어딨겠나 그냥 하는 거지. (웃음) 지금은 <마녀>의 닥터 백이 원래 남자 역할이었는데 여자로 바뀌었다는 게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 시나리오 쓰는 감독들이 남자 역할을 여자로 좀 바꾸지 않을까. 그거부터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여배우들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많아졌으면 한다. 영화가 이미지화라면, 관객이 이런 시각에 익숙해지면 여배우들도 다양한 장르의 역할로 들어가는 게 힘들지 않을 거고, 보는 사람도 불편해하지 않을 거다. 몇번만 하면 그 불편함이 없어질 텐데 시도가 별로 없어서 아쉽다. 그래서 잘나가는 감독들 만나면 왜 이렇게 남자 이야기만 쓰냐고, 왜 여자 연기자는 안 쓰냐고 협박한다. (웃음)

-여성배우들이 수동적인 배역에 머무르다보니 정작 그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도 어떤 캐릭터를 찾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다 뒤늦게 실력을 보여주면 놀라는 경우가 많다.

=<피에타> 출연하고 그때 제일 좋았던 게 후배들이, “선배님 덕분에 희망이 생겼어요” 하는 말들이었다. <위플래쉬>의 J. K. 시먼스를 보면 그 배우가 그전에는 한번도 그런 강한 인상의 연기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걸 맡겨줬으니 배우가 얼마나 신나서 했을지 느껴지더라. 맨날 똑같은 이미지로만 역할을 하게 되면 배우들도 에너지를 많이 안 쓴다. 감독들이 배우들에게서 다른 걸 찾고 요구할 때 그 배우가 신나서 표출하는 에너지를 감당 못할 거다. 항상 한 배우에게 같은 이미지만 요구하고, 그렇게 똑같은 연기로만 쓰다가 결국 그 배우를 없애버리는 걸 너무 많이 봐왔다. 감독들도 배우들을 선입견으로 규정 짓지 말고 그전 작품만 보고 편하게 쓰지 말아줬으면 한다. 신나게, 행복하게 오래 연기하고 싶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