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란 윤리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영화가 모두 훌륭한 영화인 것은 아니지만, 비윤리적인 훌륭한 영화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이 도덕적 영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윤리란 단단하게 굳어진 현재의 도덕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도덕을 정초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랫동안 영화가 수행해온 일이었고, 영화가 가지는 진보성이었다. 예컨대 프리츠 랑은 <M>(1931)에서 아동연쇄살인범에게도 법의 보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아서 펜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에서 살인자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훼손되는 신체를 통해 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조커>가 좋은 영화일 수 있다면 오직 윤리의 기반 위에서만 그렇다.
<조커>는 폭력을 미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조커>는 폭력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폭력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기괴하거나 혹은 피로할 뿐이다. 폭력을 행하는 아서(호아킨 피닉스)를 미화하지도 않는다. 아서는 <싸이코>(1960)의 노먼 베이츠처럼 기괴하고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폭력을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는 아서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머레이(로버트 드니로)를 통해 아서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조커>가 아서의 폭력에 정당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면죄부가 될 수 있는 어떤 변명거리를 주는가? 다시 말해 만약 관객이 아서의 상황이라면 살인이 불가피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가?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서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을 느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범죄자의 마음에 공감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공감이 관객에게 폭력을 체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 정당한 의심이 문제된다.
아서와 관객의 거리
<조커>는 아서와 관객이 거리를 두게 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쓴다. 일부의 관객이 느끼는 ‘예술영화’ 같다는 느낌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첫 번째는 서사의 측면에서다. 영화의 마지막에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농담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아서의 대사는 영화의 모든 사건이 아서의 망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즉, 아서의 불우한 어린 시절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사건이 아서의 망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서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관객은 아서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모든 사건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된다. 믿을 수 없는 서술자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다.
두 번째는 이 영화가 뮤지컬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서는 화장실에서 화면 밖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인 정신병원에서 아서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때 음악은 더이상 영화를 설명하지 않으며, 영화의 내부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렇게 음악이 자신을 드러낼 때 영화도 스크린의 바깥으로 나온다. 영화가 스크린 바깥으로 나옴과 동시에, 영화에 이입했던 관객은 스크린 바깥에 있는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뮤지컬은 언제나 리얼리즘과 불화를 일으켰고, 그래서 뮤지컬은 고다르와 같은 감독들에게 거리두기를 위한 주요한 장치로 쓰였다. <조커>가 관객과 거리를 만드는 세번째 방법은 바로 태생이다. 관객은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커>는 코믹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는 조커의 탄생에 대한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거리두기의 방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서에게 연민하거나 공감하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어떤 관객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아서가 폭력을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폭력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의 폭력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이 있지만, 아서의 폭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백인 남자(존 윅)가 3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때 관객은 그걸 즐기고 응원까지 한다. 왜 <조커>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는지 모르겠다”는 토드 필립스의 말에 관객은 존 윅의 살인은 아서의 살인과 다르다고 답할 것이다. 존 윅의 살인은 정당방위이거나 혹은 복수니까. 즉 관객은 복수하는 자들 혹은 복수를 대행하는 자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조커>의 윤리가 있다. 아서의 정당화되지 못하는 폭력을 접할 때, 동시에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과 폭력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히어로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서에게 연민을 느낄수록 배트맨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조커>가 아니라 <배트맨>에 어울리는 명제다. 그리고 DC와 마블을 가리지 않고, 많은 히어로영화의 영웅들은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결해야만 하는 사건들의 존재가 그들의 고민을 가로막고, 그들은 사건을 해결하고, 또다시 공동체의 환호를 받는다. 공동체의 환호는 그들이 모든 일을 끝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 즉각적인 신호 앞에 더이상 고뇌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대중의 욕망에 따라서 움직이듯, 그 안에 있는 히어로들도 대중의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 이들은 사회와 멀리 떨어진 고독한 개인처럼 보이지만, 대중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의 본질은 폭력을 향한 욕망이며, 악당의 존재는 욕망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조커>의 아서는 대중의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가 던지는 농담이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다. 아서는 코미디의 문법을 모르며 대중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아서의 웃음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아서의 말 또한 관객에게 와닿지 않는다. 아서의 말과 행동은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문법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다. 이해를 바라지 않지만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서의 신체가 중요하다. 아서의 신체는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낯선 신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낯선 신체가 춤을 출 때 관객은 정당화를 거부하는 신체를 목도한다. 다시 말해 그저 하나의 신체만이 존재할 뿐, 여기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커는 춤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며 의지와 표상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는다. 현실의 육체는 그의 환상과 뒤섞이고 마침내 그의 육체는 추상화처럼 그의 의지대로 그려진다. 그의 육체가 환상과 뒤섞일 때, 그는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조커는 예술가다. 그는 춤을 추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조커의 농담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세계의 운동에까지 다다른다. 세계에서 소외되었던 한 인간이 자신의 농담으로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조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이며, 이 점에서 창작자이자 예술가다. 그리고 그의 예술은 결국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조커의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예컨대 조커는 시위대의 아이콘이지만, 그는 그저 시위대의 어릿광대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시위대 가장 앞에 있는 <모던 타임즈>(1936)의 떠돌이이기도 하다. 조커는 타인과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그 이야기 속 조커는 또다시 타인과 세계에 의해 구성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조커는 스스로 볼거리가 되기를 선택한다. 마침내 자유로운 어릿광대가 된 것이다. <조커>의 모든 사건이 정신병원에서 상담 중 지어낸 조커의 농담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한 바 있다. 그런데 정신병원에 있는 조커는 현실의 조커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코미디 장르가 되어버린 영화의 마지막은 이것조차 또 다른 농담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조커가 이야기를 지어낼 때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조커>는 단순히 <모던 타임즈>에서 한 장면만을 차용한 것은 아니다. 거리에는 분노로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으며, 노동자는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 정신병을 얻고, 실업자가 된 노동자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모던 타임즈>가 보여주는 시대와 <조커>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조커>는 아서가 거리에서 일을 하다가 폭행당한 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소지하게 된 것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모던 타임즈>처럼 그의 노동과 실업은 그를 병들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던 타임즈>에서 노동자가 정신병에 이를 정도로 단순 반복 업무를 하게 되는 이유는 전면에 드러나는 기계 때문이다. 난폭한 식사기계로 대표되는, 인간을 짓누르는 기계가 문제된다. 그러나 <조커>에서 문제는 난폭함이 아니라 차가운 합리성이다. 말하자면 열리지 않는 자동문이 문제된다. 기계는 이미 배경이 되어버렸고, 배경 속 인간들은 분노의 대상을 잃어버리고 배경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한다. 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 분노는 자라나지만 분노가 향할 정당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조커>에서 병든 소시민 아서와 도취된 악당 조커가 구분된다면, 혹은 현실과 망상이, 진실과 거짓이 뚜렷이 구분된다면 이 영화가 이토록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커라는 역병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것은 세계의 병증에서 기인한 것이다. 병든 조커와 세계의 병은 순환하는 회로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는 아서를 병들게 했고, 조커는 다시 세계를 병들게 한다. 세계는 이미 병들어 있고 사람들은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영화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화약고 같은 이 사회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타인의 이야기
<조커>를 옹호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폭력을 반추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히 히어로영화로 대표되는, 선으로 포장된 일상적인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를 통해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한다. 다시 말해 불가침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의 역량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언어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자신의 언어를 찾는 과정과 세계를 재구성하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조커>에는 아서의 현실이 조커의 이야기가 되고, 조커의 이야기가 다시 아서를 구성하는 순환 과정이 있다. 나는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는 다시 나를 구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타자와 내가 연결되고, 소외된 자들이 세계와 연결된다. 이것이 거짓의 역량이며 영화의 힘이다.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우리의 현실처럼 보여준다. 만약 자신의 현실을 세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의 중압감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 영화가 이 시대의 징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조커의 광기가 아니라 터지는 웃음을 참아야만 하거나 억지로 웃어야만 하는 이 시대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심각하지만,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짓고 있는 아서와 다르지 않다. <조커>는 모든 이들이 분열증을 앓고 있는 시대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