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나무>로 인물의 흔들리는 내면에 세심하게 접촉해온 조현서 감독이 이번에는 사춘기 소년 다빈(성유빈)의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겨울의 빛>은 빠듯한 현실에 부딪치면서도 교류 연수차 ‘싱가포르’에 가고 싶은 고등학생 다빈을 쫓아간다. 조 감독은 이미 <겨울의 빛>으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대상을 받았지만 여전히 영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중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귀를 기울이는 신중하고도 솔직한 창작자의 면모가 돋보인다. 조용한 달변가, 조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처음 장편 작업을 한 소감은 어떤가.
영화를 찍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혹시 피로감에 속아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닌지 고심했다. ‘더이상의 최선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촬영 마지막 날 엔딩을 찍으며 충격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감정을 느꼈다. 그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발전의 방향을 본 것 같다.
- 엔딩을 찍으며 어떤 충격을 받았나.
그날은 고집을 좀 부렸다. 그동안 영화 촬영에 지장이 안 가는 고집만 부렸다면, 이날은 좀 비이성적인 감독이라고 할까? (웃음) 눈이 올 가능성이 0.1%라도 큰 곳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강원도에 갔다. 3~4일 만에 준비해서 급하게. 그 결과 눈을 담을 수 있었다. 사고라고 여겨질 정도로 눈이 많이 왔는데, 그럼에도 만족할 만한 숏을 얻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인가.
다빈과 재은(강민주)이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 그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눈이 녹기 전에 다빈이 걸어 내려오는 장면을 찍었다.
- <겨울의 빛>을 작업하며 떠올린 작품이 있나.
린 램지의 <쥐잡이>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도시에 대해 느꼈던 느낌이 떠올라 공감한 부분이 있다. 그런 감정을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을 때 어떤 분이 <길버트 그레이프>랑 이야기 구조가 비슷한 것 같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유사성을 어떻게 피해갈지를 고민했고 공부도 되었다.
- 어릴 때 살던 도시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마치 벽이 조여오듯, 내가 살던 동네가 나를 옥죄는 느낌이었다.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벽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 어떤 얘기를 하려 해도, 이미 그들도 힘든 상태였다. 불행한 사람끼리 아귀다툼하는 느낌을 받았다.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 임대아파트 주민과 부촌 주민의 싸움, 그것이 다시 아이들에게 번지는 모습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 영화에서 다빈의 주변 어른들이 조금 냉담하게 느껴진다. 앞서 말한 감성과 관련이 있나.
다들 따듯한 면도 있을 것이다. 다빈의 형도 도망갔지만 함께 책임지는 부분이 있으니까. 하나의 면으로 규정되는 인물은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악인이 등장하는 게 싫었다. 극적인 사건이나 긴장감을 위한 장치는 피했다. 그래서 친구 정원(임재혁)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조금 죄책감을 갖고 있다. 이건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인물들이 입체적이면서 자기만의 논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다빈이 동생의 하굣길을 마중 나가는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다빈은 좀 애매한 사람이다. 평범한 주인공 같지 않다. 징징거리면서도 동생을 위해 할 일을 한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동생에 대한 부채감도 있고 학교생활에 부담감도 느낀다. 이런 고민을 어떻게 감내했는지는 은서(차준희)에 대한 행동을 통해 표출된다. <겨울의 빛>은 다빈이 은서에게 “오빠는 이렇게 살았어”라고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구성을 택했다. 처음 구상했을 때는 은서로 시작해 은서로 끝나는 영화였다. 차후에 극화하며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 더해졌다.
- 영화를 어떻게 끝낼지 고민이 많았나 보다.
그렇다. 다빈이 때문에 정원에게 사고가 나는 버전의 시나리오도 있었다. 보다 암담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를 쓰던) 당시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뉴스를 보며 이미 슬픈 사건이 많은데 내가 세상에 이런 종류의 흔적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좀더 다빈을 위하는 버전을 고민하며 1년 정도 보냈다.
- 결국 다빈은 이사를 간다.
어느 날 촬영감독님이 “지금까지 (다빈이) 피했던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떻냐”라는 얘기를 했고, 그게 도움이 되었다. 계속 이사 가기 싫어했지만 막상 가보니 꽤 깔끔하고 좋은 집이 있고,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 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 다빈은 힘든 와중에도 계속 동생을 챙긴다.
다빈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행인 것 같다. 다빈의 선한 면은 은서를 챙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악한 면이 있다면 은서를 돌보는 행위가 자기에게 엄청난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모두 자기만의 임계점이 있다. 은서가 아프기 시작하고 다빈이 싱가포르에 가고 싶어지며 하나의 잣대 위에 둘을 올렸을 때 비로소 시소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목도한 것이고.
- <터>에 이어 <겨울의 빛>에서도 가족에서 시작해 경제적 곤궁을 다뤘다.
<터>는 빈부격차의 테마를 담은 작품이다. 그런데 <겨울의 빛>은 좀 다르다. 다빈과 재은 사이에서 느껴지는 격차도 있고 싱가포르 연수 사건도 같은 맥락이지만, 또 다빈과 정원을 비교하면 달리 보이는 지점이 있다. 누구나 가족의 존재가 짐이 된다고 느끼는 시기가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여러 기준점이 영화 안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다음에 쓰고 싶은 이야기는.
여태 가족관계, 거기서 파생되는 마음처럼 내면에서 찾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다음에는 바깥에서 이야기를 찾고 싶다. 지금 복싱선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스포츠영화는 아니고, 한 선수가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고 그를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친구의 시선에서 사건을 쫓아가는 추리극이 될 것 같다. 그 안에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지점이 담길 것 같다. 지금은 마치 개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듯 일단 써보고 그것을 다시 보고 지우는 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오랜만에 설레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