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한테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주세요.”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만큼이나 임팩트를 남긴 건 해준이 수사하는 살인사건의 용의자 홍산오의 사연이다. 사랑의 한 속성을 관통하는 듯한 이 문어체의 러브레터는 배우 박정민의 핏발 선 눈빛과 충돌하며 형용하기 어려운 애절의 골짜기를 판다. 가수 화사와 특별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제 시상식 이후 ‘박정민의 멜로’에 대한 수요가 치솟았는데, 개인적으론 그 고점을 <헤어질 결심>을 통해 이미 봤다고 생각했다. <휴민트>를 보고 나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에 멜로의 저점이 매우 높은 배우였을지도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이 발굴하고, 화사가 붐업시킨 ‘박정민 멜로’의 수요를, 류승완 감독은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살뜰하게 활용한다. 역시 ‘대중영화’ 감독다운 영민한 감각이다.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2> 개봉 당시에도 스스로 상업영화가 아닌 대중영화 감독임을 강조했다. 얼핏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무엇을 위해 영화를 만드느냐’의 목적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입장이 선명하게 구분된다. ‘상업’의 목표지점에는 돈이 있다. 모든 영화가 흥행을 바라고, 많은 관객을 만나길 희망하지만 그게 첫 번째 ‘목표’가 되는 건 다른 문제다. 류승완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재밌게 즐기고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창작자였다. 다만 그 방식이 평균값을 맞추는 게 아니라 돌출된 몇 가지 특이점을 높은 완성도로 끝까지 몰아붙인다는 점에서, 그는 희귀하고 비범하다.
‘대중영화 감독’ 류승완은 불특정 다수의 입맛을 맞춘다는 손쉬운 핑계로, 모난 구석 없이 두루뭉술하게 깎고 다듬지 않는다. 대신 뾰족한 매력 포인트를 최대한 많이 만들고 그걸 지렛대 삼아 전체적인 완성도를 함께 끌어올린다. 덕분에 류승완의 영화는 부분적으로 헐겁거나 유치하거나 모자란 구석이 있을지언정 치고 내달리며 돌파하는 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휴민트> 역시 특유의 ‘아픈’ 액션을 (약간 과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자랑하는, 여지없는 류승완의 영화다. 문자 그대로 한폭의 그림처럼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조인성의 낮은 발자국 위로 (전 남친 전문배우) 박정민의 애절한 무드가 겹칠 때 그야말로 (약간 유치할 정도의) ‘멋짐’이 폭발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절제된 사운드로 쌓이는 눈보라가 아직 귓가를 맴돈다. 적당히 촌스러워서 더 마음이 가는 트렌디한 클래식이라고 해야 할까.
트렌드를 좇는 사람과 트렌드가 되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개인이 흐름을 ‘만드는 건’ 난망한 일이다. 그저 가끔, 자신의 길을 가는 이들의 경로 위에 시대의 필요와 쓸모가 교차할 따름이다.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방향을 가늠하려는 노력은 귀하고 소중하다. 그 개별의 의지가 쌓여 결국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도 선명한 족적을 남기는 법이다. 2026년에도 어김없이 엔터테인먼트 리더들에게 올해 향방을 물었다. 매번 쓸모와 피로감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건, 서로에게 메아리치는 질문 속에서 한국영화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매번 위기와 어려움을 말하지만 극장가로 눈을 돌리니 역시나 볼만한 작품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린다. <씨네21>도 어김없이 설 연휴 하나하나 풀어볼 선물 같은 작품들을 위한 지도를 준비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영화로운 설 연휴 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