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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일본 젊은 영화의 힘! [4]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가 매달 한편씩 차례로 개봉했다. 그 선두는 역시 최근 일본영화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원을 제공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누도 잇신이 만든 <메종 드 히미코>였다. <조제…>에 환호했던 관객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차 이누도 잇신의 영화를 반겼고, 그 관심의 폭은 이미 다른 영화들에도 미쳐 있었다. 네편의 영화는 적게는 2만에서 많게는 10만 사이를 오가는 관객을 모았다. 입소문은 늘어갔고, 마니아들은 더 분명하게 수면 위에서 형성됐다. 급기야 7월에 열린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은 매진을 기록하며 보기 드문 성공 사례를 남기고 있다. 물론 이 성공을 뒷받침한 외부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니아들을 상대로 한 영화사의 소규모 장기 상영 전략과 일본영화 전용관 개관에 따른 여파,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의 일반화로 인해 일본 대중영화의 소재와 캐릭터와 이야기 방식에 더욱더 친숙해진 관객, 그중에서도 다운로드족의 일본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도와 그에 이어진 극장으로의 발걸음, 그리고 아사노 다다노부와 그에게서 이제 막 왕관을 이어받은 오다기리 조, 쓰마부키 사토시에 대한 소녀들의 열광이 맞물린 결과다. 하지만 간단한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만약 영화 자체에 이유가 없었다면 이 호응은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때문에 어떤 호소와 호응이 작동한 것인지 영화를 빌려 말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면 이 외부 요인에 대한 분석은 현상에 대한 수치적 환산이거나 전략에 대한 결과론이거나 해석을 위한 치장이거나 산업적 보고서에 불과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다시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로 돌아가자.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일본영화는 모두 합쳐도 이 네편의 영화와 서너편의 공포영화와 한편의 멜로드라마(<언러브드>) 정도다. 그러나 올해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달궈놓은 것은 함량 미달 수준으로 개봉된 서너편의 공포영화가 아니라 위에 열거한 바로 이 영화들이다. 이 작품들 사이에는 묘하게도 어떤 내용적 연쇄의 지점이 있다. 그게 주목의 연쇄 또한 만들어냈을 것이다. 궤도의 이탈, 밀려쓰는 답안지의 재미 지금 이 목록에 5월 개봉작 <언러브드>가 빠져 있는 이유가 네편의 영화를 묶는 첫 번째 고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러브드>는 네편의 영화에 비해 결코 질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종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영화다. 비교하자면, <언러브드>를 사랑한 관객의 이유와 <메종 드 히미코>를 사랑한 관객의 이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건 자기를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러브드>의 여주인공 미치코와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는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여자다. 한명은 자기애의 실현을 꿈꾸고 있고, 또 한명은 타자에 대한 박애를 꿈꾼다. 두 인물은 모두 누군가의 방문을 받지만, <언러브드>의 미치코가 가쓰노와 시모카와라는 남자의 방문을 차례로 받는 것과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가 게이 아버지 히미코의 애인인 하루히코의 방문을 받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 차이란 나의 영역에서 남을 받아들일 것인지, 나의 궤도를 이탈해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를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다. <언러브드>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주인공 미치코가 하는 것은 자기 세계에 대한 고민이자 확립이다. 누구도 그녀의 세계를 흔들 수 없고, 끝내 그녀는 자기의 의지를 저버리지 않는다. 미치코는 나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같은 자리에서 고민하고, 그 대답을 통해 얻은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사오리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없다. 애욕의 흔적은 더 없다. 새로 접한 게이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더 있고 그걸 유지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자아의 목표치다. <언러브드>에는 정박의 고수가 있지만, <메종 드 히미코>에는 이탈의 유혹이 있다. 이탈의 스토리는 일찌감치 <조제…>에서 볼 수 있다. 유모차에 뭔가를 싣고 다닌다는(사람들은 그걸 황금일 거라고 한다) 괴이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쓰네오가 새벽녘에 그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고, 떠밀려 내려오는 유모차 안의 조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건은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는 주인공의 이탈의 시작이다. 이제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이미 정해놓은 규율을 바탕으로 한 삶 안에서 펼쳐진다. 사랑도 그 타자의 일상을 끝까지 인준함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다면 쓰네오가 그랬듯이 떠나야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러브스토리는 그런 이유에서 안타깝긴 해도 담담할 수밖에 없는 진리다. 그 점이 바로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해, 결별에 대해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이유였을 것이다. <스윙걸즈>의 소녀들이라면 그 상황을 코믹하게 맞을 것이다. 낙오생 소녀들이 스윙재즈의 멋을 알아버린 건 수업을 벗어나 밴드부의 도시락을 갖다주려다 어영부영 잘못된 시골로 들어서고, 도시락은 다 상해버리고, 그걸 먹은 밴드부원들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고, 그녀들이 그 자리를 강제로 대신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린다린다린다>의 송은 부주의한 성격 탓에 그만 말을 잘못 알아듣고 밴드에 들겠다고 허락한 것이고, <박치기!>의 고우스케는 일본 여고생을 괴롭힌 적이 없지만 어쨌든 같이 휩쓸려 봉변을 당한 덕에 절실한 사랑에 빠지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이야기가 한칸씩 밀려쓰는 답안지다. 그런데 그렇게 밀려쓰다보니 그들에게는 목표가 보인다. 러브스토리이건 코미디이건, 이것이 일단의 재미를 이룬다. 마을이라는 공간, 청춘이라는 시간 그런데 이탈은 이동의 문제고, 경계를 넘어서서 진입하는 것의 문제다. 그게 어디고, 언제쯤 벌어지는지는 그 때문에 중요한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네편의 영화에서 그것을 공간적으로 나누면 마을이 되고, 시간적으로 나누면 청춘이 된다. 가령 이렇게 나누면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한편의 ‘마을영화’(<메종 드 히미코>)와 또 한편의 ‘마을·청춘영화’(<스윙걸즈>)와 두편의 ‘청춘영화’(<박치기!> <린다린다린다>)를 본 것이다. ‘마을영화’란 실은 어디에도 없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만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마을에 사는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이하는 이야기가 일본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가족영화와는 또 다른 것이어서 항상 내부의 갈등보다는, 어찌됐든지 완성되는 화해와 합심의 드라마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마을에는 항상 피로 맺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애환과 정이 넘친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라면 그것은 게이 공동체로서 히미코의 집이다. 그곳으로 진입한 사오리는 결국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 남기로 한다. 반면, 마을영화와 청춘영화의 양면을 모두 지닌 <스윙걸즈>는 마을영화가 추구하는 합심과 화해의 드라마를 청춘이라는 유한적 시간 속에서 한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행위로 대신함으로써 충족시킨다. 만약 이 두편의 영화에 호응한 관객이라면 마을영화와 마을·청춘영화의 이 낭만적 화해 무드에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경우에, 즉 주인공들이 온전히 청춘영화의 틀 안에 있을 경우에, 그 이탈의 시간이 잠정적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나, 청춘이란 잠정과 유한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반영이다.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시간을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피할 수 없다. 마을영화에 절반을 걸치고 있는 <스윙걸즈>는 그 요구를 간단하게 저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 화합의 집단적 기념비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더 청춘영화의 범위 안에서 운위하는 <박치기!>와 <린다린다린다>는 좀 다르다. 게다가 이 두편의 영화는 정치적 함의의 개입을 허용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유한적 시간이란 좀더 절박한 무엇이다. <박치기!>는 이미 일본 안에 들어와 있는 조선인들의 이야기고, <린다린다린다>는 일본 여고생과 한국 여고생의 교집합이다. 적어도 이 두편에는 <스윙걸즈>와 달리 소속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박치기!>에서 일본인 친구가 죽자 마치 그 일원처럼 여겨지던 교우스케는 갑자기 한국인 어른에 의해 돌아가라며 내쳐진다)과, 무료한 속도를 따라 이어지는 장애 내지는 그걸 넘어서려는 시도(<린다린다린다>에서 그녀들의 침묵과 대화)가 있다. 그 때문에 <린다린다린다>와 함께 이야기될 만한 영화는 <스윙걸즈>뿐만 아니라 <박치기!>일 수도 있다. <린다린다린다>는 <박치기!>의 인물들이 나눈 약속에 대한 미래의 실현과도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박치기!>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간의 싸움 끝에 급기야 조선인 학생이 죽는다. 그런데 그와 일본인 학생 교우스케가 했던 미완의 약속을 기억하자. 그들은 언젠가는 함께 밴드를 결성해 노래 부르자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역사에 떠밀려 사멸해버린 그 약속은 40여년이 지난 뒤 <린다린다린다>에서 송과 그 친구들의 노래로 드디어 지켜진다. <박치기!>를 혹은 <린다린다린다>를 선호한 관객이라면 이 과거와 미래가 나눈 미완과 실현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충분히 흥미로울 것이다. 이탈의 유한적 시간을 만끽하기 위한 콘서트 혹은 축제 자, 다시 마을과 청춘을 합쳐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다. 이왕 밀려쓴 이 답안지의 이야기는 끝까지 밀려나가 무언가 다시 맞춰지는 기적을 이뤄야만 한다. 그럼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다시 말해 네편의 영화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보기의 쾌감을 혹은 감동을 선사해준 장면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이 영화들은 모두 그 자리에 ‘축제’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잘못 시작된 출발이었거나 아니거나 이제 이 축제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달려간다. 그게 유한적 시간 속에서, 그 너머의 영역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방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축제가 스포츠가 될 경우에는 실패의 확률이 높다. 그건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 하는 축제이기 때문이고, 가령 <박치기>의 경우처럼 앙금을 제거하기 위한 자리라면, 그런데 쉽게 해소될 수 없는 자리라면, 몸과 몸이 부딪치면서 소통의 언어는 날아가고 몸의 본능적인 열기만 남기 때문이다. <박치기!>의 진보적인 일본 선생이 (나쁜) 전쟁은 (착한) 전쟁으로 풀어야 한다며, 조선인 고등학교와 일본인 고등학교 사이의 친선 축구 시합을 성사시키지만 결국 학생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합은 발길질과 주먹질의 난투극으로 끝난다. 때문에 그것은 곧잘 공연으로, 특히 음악회나 연주회가 되어야만 한다. 음악이 매개가 되는 것이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 사오리와 게이 노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연주와 춤이 흐르는 나이트클럽에서다. <스윙걸즈>와 <린다린다린다>의 소녀들은 음악제와 학교 문화제의 무대에 오르는 순간 뜨거운 공감의 열정을 느낀다. <박치기!>의 배경인 1968년은 비유적으로 봐도 혁명적 페스티벌로 점철된 시간이었고, 교우스케가 라디오에서 <임진강>을 부르는 오디션은 그걸 듣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보이지는 않지만 뜨거운 감동의 콘서트다. 인물들은 이 축제를 완성하기 위해, 즉 잠정적으로 주어진 이탈의 유한적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재즈를, 펑크를, 포크를 연주하고 노래한다. 그들은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어하고, 우리도 이 순간 즐거워하거나 감동한다. 차이와 다름에 관한 일본영화식 사지선다 하지만 일본영화에 관한 이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만약 이와이 순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올해 개봉된 목록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음악회 장면이 있었다. 아름다운 화음의 아카펠라가 울려퍼지고 그 정도면 외양적으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은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한 여학생 구노가 일부러 자신의 자리를 빼고 만든 작곡에 힘입은 화음이다. 선생도 나머지 학생들도 소품처럼 무대 한편에 서 있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체한다. 그건 아름다운 합창이지만, 이지메가 만들어낸 화음이다. 영화 속에는 인물들이 신봉하는 가수 릴리 슈슈의 콘서트도 있었지만, 그걸 보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자신이 생각하는 릴리 슈슈에 대한 의미에 반하는 남의 어떤 의견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축제는 갈등을 해소 못할 뿐 아니라, 더 드러내는 사건이다. 여기까지 미쳤기 때문일까. 이쯤에서 이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말하자면, 혹시 우리가 올해 본 네편의 마을·청춘영화들은 이탈을 기회 삼아 차이와 다름의 인준에 관해 말한, 이른바 일본영화식 ‘톨레랑스’에 관한 네 가지 쌍곡선은 아니었을까. 무작정 흥겨움으로 달려나가며 다름에 대한 인식을 제외한 의아한 화합(<스윙걸즈>), 또는 다름을 인정하되 그 안으로 들어가 일원이 되는 것의 낭만(<메종 드 히미코>), 또는 공존하지만 인정하기까지의 어려움(<박치기!>), 그러나 다시 그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면서 같이하는 것의 아름다움(<린다린다린다>)에 관한 네 가지 묶음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의 제각각 선택과 호응은 아니었을까. 처음 이 봇물을 쏟아놓은 <조제…>의 러브스토리가 톨레랑스에 기반한 러브스토리였음을 기억하자. <유레루> <빅 리버> <전차남>이 온다고 한다. <유레루>와 <빅 리버>는 스타 오다기리 조의 출연작이고, <전차남>은 드라마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이 영화들이 도래하면 또 다른 일본영화의 면모가 얘기돼야 하겠지만, 그래도 마을영화와 청춘영화는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 영화들의 성격상 톨레랑스에 대한 담화는 그때마다 다시 이야기돼야 할지 모른다. 그때 과연 우리는 어떤 영화를 선택하여 울고 웃을 것인가. 그건 단순히 재미로 말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그건 우리의 톨레랑스에 대한 인식을 시험받는 우회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올해 우리는 그 경험을 한번 한 것이다.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 [2]

사회적 인과응보의 집행자로서의 괴물 물론 박희봉의 연대기를 내가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매점 안에 걸려 있는 멧돼지의 박제머리와 ‘엽우회’(獵友會)라는 모임에 박희봉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기념사진은 그의 삶의 이력 가운데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박희봉이 그들 가족 중에서 괴물과 마주쳤을 때 유일하게 총을 잘 쏜다는 사실 이외에는 더이상 이 박제와 기념사진은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는다. 혹은 멧돼지를 잡은 그가 그 반대로 괴물에게 붙잡혀 죽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뜻일까? 물론 괴물은 박희봉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괴물은 그 무언가를 집행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괴물의 등장은 어떤 패턴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자. 괴물이 처음 한강 둔치에 나타나 닥치는 대로 잡아먹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난다. 그때 사람들은 철제 이동식 화장실 안으로 도망친 다음 미처 마지막 여자가 들어오기 전에 무정하게도 문을 잠가버린다. 그때 괴물은 이 여자에게 아무 관심도 없이 그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그 창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그 여자뿐이다. 여기서 왜 창고 바깥에 남겨진 희생의 잉여가 필요해진 것일까? 이 살아남은 잉여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가? 혹은 괴물이 두 번째 나타났을 때. 비내리는 한강에 방역 가스를 뿜으며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춰 서서 방역 요원 중 한명이 내려 떨어진 돈을 주우면서 좋아한다. 그때 괴물은 갑자기 나타나 그 돈을 주웠다고 좋아하는 사내를 바로 잡아먹는다. 여기서 왜 괴물이 나타나 그냥 잡아먹는 대신 돈이라는 미끼가 필요해진 것일까? 돈이라는 근본적인 유혹. 남의 것을 주인을 찾아주는 대신 자기가 갖는 행위. 그런데 돈에 주인이 존재하는가? 돈에 주인이 있다는 생각에는 무슨 믿음이 있는가? 화폐라는 물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모순의 치환. 세 번째 장면. 세진과 세주는 한강에서 사람들이 철수한 틈을 타서 매점을 턴다. 하지만 세진에게는 원칙이 있다. 매점 물건을 털긴 하지만 돈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주에게 말한다. “이건 도둑질이 아냐, 우린 지금 매점 서리를 하는 거야, 매점 서리, 알어? 수박서리, 참외서리, 할 때 서리 (중략) 서리는 배고픈 자들의 특권이 되겠다, 이 말이야, 알겠어?”라는 말이 끝나자 세진과 세주 앞에 기다리는 건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나타난 괴물이다. 그리고 그 말은 세진이 한 마지막 말이다. 두 번째 희생의 논리에 대한 반대의 논리의 집행. 이번에는 상품의 유통이라는 과정에서 시장의 존재를 부정하고(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생산과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에 대한 부정), 배고픈 자들에게는 가진 자들의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했을 때 괴물은 그것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현듯 나타난다. 사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괴물이 출현하여 벌이는 행위는 신기하게도 생물적인 본능을 따른다기보다는 사회적인 인과응보의 그 어떤 집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은 영화적으로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지만, 동시에 괴물의 행위는 ‘제때에 나타나’ 현실 속의 불편한 행위를 중단시킨다. 여기에는 두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괴물이 그의 본능에 따라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괴물 자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 그가 법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벌은 법이 내리는 벌보다 훨씬 잔인하고 피비린내 난다. 봉준호는 법이 내리는 벌이 너무 가볍다고 보여준다. 혹은 어쩌면 두개의 벌이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인과응보. 그런데 인과응보는 이 영화에서 거의 영화 전체에 집행되고 있는 잉여지식이다. 무자비하고 어떤 타협도 알지 못하는 지식. 말하자면 세상의 질서?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이어서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노골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법질서 혹은 도덕. 좀더 인상적인 장면. 현서의 합동분향 영결식장에는 많은 화환이 놓여 있다. 그런데 웃지 못할 화환 중의 하나. ‘대구 지하철 유가족 일동.’ 그게 왜 거기에 놓여 있을까? 한강에 나타난 괴물과 대구 지하철에서 불이 난 것은 무슨 동병상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봉준호의 인터뷰(위의 <한겨레>). “(중략) 이 사람들은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되고, 도움은커녕 방해만 받지만 아무도 시스템 탓 안 하고 자기들끼리 보듬으며 재앙을 개인화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 예를 들자면 대구 지하철 참사도 구조적 모순을 탓하기보다 내가 돈 잘 벌었으면, 대학입학했을 때 차 사줬으면, 안 당했을 변을 당했다, 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이런 게 한국적이고 사실적이다. 재앙은 훨씬 더 구조적인 것에서 온 건데, <괴물>의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훨씬 더 구조적인 결과로서의 재앙. 하지만 재앙의 개인화. 봉준호의 이 말의 방점. “이런 게 한국적이고 사실적이다.” 괴물은 거기 훨씬 구조적인 결과로 나타나 현서를 납치하지만, 박강두 가족은 그 재앙을 개인화한다. 그런데 그게 박강두 가족만일까? 혹시 영화를 보는 당신도 그 재앙을 개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해일이 연기한 박남일은 ‘추억’의 타임머신 그런 다음 현서의 삼촌이자, 박강두의 남동생인 박남일. 그때 박남일을 박해일이 연기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괴물> ‘이후’에 <살인의 추억>에 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할 엔딩이 뻔한 <살인의 추억>을 봉준호가 왜 만들어야 했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 모든 노력에 대한 허망한 결론. 그런데 사실 <살인의 추억>은 그 이야기만으로 본다면 결국 <괴물>과 같은 이야기이다. 혹은 <플란다스의 개>까지도 봉준호는 이미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중이다. 그는 세번 모두 같은 이야기를 찍었다. 봉준호의 주인공들은 열심히 찾아다니고(seek and…) 그런 다음 찾는다(…find). 그런데 그들이 찾은 건 이미 죽었거나,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그때 봉준호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범인이 아닌 용의자. 이미 죽어버린 현서.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봉준호 영화의 두개의 그림. 거기서 봉준호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저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의 과정에서 반복되어 ‘보여지는’ 고문. 우리가 <살인의 추억>에서 보는 것은 고문장면이었다는 것을 환기해보자. 만일 이 영화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대신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빌려 1980년대 고문에 관한 ‘정치적인 영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허문영은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이) 흥미로운 건 이 인물에게서 대학생의 이미지가 나온다는 점이다. 대학생인데 뭔가 쫓겨서 운동하러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80년대 억압을 영화가 말하는데도 억압을 빚어낸 장본인인 살인범이 그 시대에 억압과 맹렬히 싸운 대학생 이미지를 가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중략)”(<한겨레> 2003년 12월19일자, ‘소통 넓어진 호러-사극, 금기와의 대면 기념적, 그런데 ‘현재’는 어딨지; 2003년 한국영화 결산좌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봉준호의 다음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괴물>에서 봉준호는 그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다. <괴물>에서 박해일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하다가 졸업한 다음 백수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남일로 옮겨온다. 그런데 그는 말하자면 1980년대의 후일담, 아니 차라리 그림자처럼 보인다. 혹은 80년대에서 그냥 걸어나온 듯한 인물. 박남일은 그 선배의 말을 빌리면 “도바리의 천재”이고(그런데 이런 말을 2006년에 누가 쓸까? 혹은 10대 관객은 이 말뜻을 알 수 있을까?), 그가 ‘꽃병’ 만드는 걸 보면서 노숙자는 말한다. “아주 도사구만, 손이 안 보이는구만, 손이, 딸딸이 저리가라다”(그런데 21세기 대학교 시위에서 당신은 ‘꽃병’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박남일은 <살인의 추억>의 시간을 고스란히 들고 <괴물> 안으로 옮겨온 일종의 ‘추억’의 타임머신이다. 혹은 이 말이 과장되었다면 박남일은 2006년에도 1980년대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더이상 연대는 없다.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그의 선배는 졸업한 다음 대기업 이동통신 회사에 취직했고, 그런 다음 현상금을 타(서 빚을 갚)기 위해 그의 후배를 신고한다. 그때 선배는 단 한 숏에서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현상금에서 얼마나 세금을 떼는가뿐이며, 다만 그 자리에 남일이 그의 누이마저 데리고 나타나지 않아 두배로 현상금을 받지 못한 것에 아쉬워할 뿐이다. 그때 이 장면이 <괴물>에서 유일하게 한강 강변 바깥의 도시를 다룬 신이라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강변 저편의 휘황찬란한 도시. 이제 어떤 정치적 연대도 기대할 수 없는 배신과 신고로 이루어진 저편. 납치당한 손녀, 딸, 조카를 찾기 위해 가장 보잘것없는 가족이 그렇게 애를 쓰는데 누구도 관심없는 시대. 카드와 빚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디지털 시대의 스산한 사리사욕의 이해관계만 남아 있는 저 거대한 빌딩. 거기에 남일의 자리가 있을 리 없다. 그는 ‘꽃병’을 들고 한강에 가야 한다. 거기만이 그가 서 있을 장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괴물이 무엇의 결과이며, 결국 그 결과를 없을 때 그가 없애는 것이 그 결과가 제공하는 원인의 이유를 말소시킴으로써 그것을 제공한 미국에 무죄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직 남일에게는 눈앞의 투쟁만이 그의 목표이다. 봉준호의 냉소적인 웃음이 여기서 울려퍼진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지 봉준호는 남일이 던진 꽃병을 보면서 한껏 웃는다. 그는 단 한번도 괴물을 ‘꽃병’으로 맞추지 못한다. 심지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그는 그만 어처구니없게도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고 만다. 남일은 현서의 영결식장에서 묻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남일에게 봉준호는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다음 힘든 질문이 남아 있다. 13살 중학교 1학년 현서는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괴물에게 잡혀가야 하며, 그녀는 무엇을 대가로 결국 죽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이미 대답했다. 그러나 두 번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그냥 영화에서 보여준 대로의 대답. 괴물은 현서를 잡아다놓았고, 현서는 하수구 틈새에 숨어 있었으며, 괴물은 그 다음 세주를 잡아왔고, 현서와 세주를 잡아먹은 다음, 강두가 괴물의 입에서 꺼냈을 때 현서는 이미 죽었고, 세주만 살아남았다. 괴물은 아무 생각이 없었고, 현서는 그냥 운이 없었다. 하수구에 있는 현서가 강두의 꿈이라면? 그러나 여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숏이 있다. 그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괴물>은 시작하면 바로 현서를 가족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서진 가족이고(합동분향소에서 박희봉의 대사, “행여,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간 게 벌써 13년짼데…”), 그런 다음 괴물이 나타나서 현서를 그들과 떼어놓는다. 그들은 영화에서 단 한번도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아마 영화 시작 이전에도 모인 적이 없을 것이다(같은 자리에서 박희봉의 대사, “우리가 현서 덕에 다 모였다”). 박강두의 눈앞에서 괴물은 현서를 잡아먹는다. 그런데 그게 아주 멀리 떨어진 밤섬 저편에서 삼키는 게 희미하게 롱 숏으로 보인다. 그걸 보는 사람은 박강두이다. 그런 다음 현서는 가족과 떨어진 채 괴물이 살고 있는 원효대교 북단 하수도에서 네번 보여진다. 그런데 42번째 신, 현서의 두 번째 하수도 장면 보여주기 직전의 신. 그러니까 매점 내부의 장면. 병원에서 강두 가족 일행은 도망쳐 나와서 다시 매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여 앉아 맛있게 라면을 먹는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붙잡혀간) 현서가 부스스 일어나서 라면을 함께 먹는다. 더 이상한 것은 가족들 중 아무도 놀라지 않고 현서의 라면에 이런저런 반찬을 올려놓아준 다음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라면을 먹는다. <괴물>이 초현실주의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초현실주의적인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신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신을 앞장면, 그러니까 세진과 세주 앞에 괴물이 나타난 다음 도망치기 위해 매점 문을 열었는데 그걸 할아버지 박희봉의 손으로 연결한 트릭 숏으로 연결하지 않고, 그 신의 다음 신, 그러니까 하수구 아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현서의 얼굴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수구에서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현서가 잠시 생각한 숏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순서를 뒤바꿔 붙인 이 숏은 ‘서프라이징’ 이외의 어떤 기능도 없다(상식적인 편집은 정신을 잃어가는 현서를 보여주고 그런 다음 이 매점 숏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놓으면 두개의 신은 설명이 되지만 갑자기 편집이 뒤죽박죽이 된다. 한번은 앞으로 가고 다음번은 뒤로 가보자. 먼저 매점의 숏을 놓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그 앞은 할아버지 박희봉이 매점 문을 여는 인서트 숏이다. 그런데 이 인서트는 마치 그 앞의 신에서 세진과 세주가 괴물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쳐서 매점 문을 여는 것처럼 매치-트릭-숏으로 연결하였다. 그 앞의 신은 매점을 ‘서리하는’ 세진과 세주이다. 그런데 세진과 세주는 한강 다리 지하도 하수구에서 총을 쏘는 강두 가족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등장한 인물이다. 영화는 여기서 세진과 세주가 나타난 다음 옆으로 빠져서 세진과 세주를 따라서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숏에서 강두 가족으로 넘어왔다. 그 다음 매점 숏에서 뒤로 가보자. 라면을 먹는 숏이 나온 다음 하수구의 현서의 얼굴로 이어붙였다. 그때 괴물이 나타나서 세진과 세주를 버리고 간다. 현서는 세진의 코에 손가락을 대본 다음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이 숏은 박강두가 매점에서 그들의 가족 곁에 누워 잠을 자는 쇼트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강두는 계속 자고 있는 데 박희봉은 남주와 남일을 앉혀놓고 그 자신과 강두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 미묘한 문제가 생겨난다. 매점을 현서의 꿈으로 보지 않고, 하수구에 있는 현서가 강두의 꿈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매점의 숏은 꿈속의 꿈이 된다. 반대로 현서가 꿈을 꾼 것이라면 강두가 자는 장면은 시간적 동시성의 숏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매점 안에 들어와 라면을 먹은 장면은 꿈인지 실재인지 모호하게 된다. 나는 이 숏을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좀더 앞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맨 처음으로. <괴물>은 제목이 보이고 나면 박강두가 매점에서 잠자는 숏으로 시작한다. 그는 항상 잠을 잔다. 매점에서 잠든 강두를 보면서 하는 박남일의 대사, “진짜 신비롭지 않냐?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 박희봉의 대답, “그냥 냅둬라, 얜 짬짬이 눈을 붙여줘야 돼”. 제목이 나온 다음 잠든 박강두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등장인물은 ‘매점 서리하러’ 온 세진과 세주이다(그런데 그때 자막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놓치기 쉽다). 박강두는 그들을 보지 못했지만 세진과 세주는 그를 보았다. 그런데 세진이 본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세진은 두번 다시 강두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다시 강두를 보는 건 세주뿐이다. 현서는 세진과 세주가 매점 앞을 떠난 다음에 등장한다. 그 둘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 차지한다. 하나가 등장하면 하나가 퇴장한다. 처음에는 이게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서가 납치되고 난 다음 이 자리는 일종의 포르-다 게임처럼 진행된다. 현서는 괴물에게 유괴된 다음 강두의 가족에게 휴대폰으로 그녀의 생존을 알린다. 우리가 현서의 생존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를 본 다음 그녀가 휴대폰을 거는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병원에서 골뱅이를 먹다가 강두에게 걸려온 현서의 잡음 심하게 섞인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 전화를 무참하게 그냥 끊어버린다. 단지 전화만 끊은 것이 아니라 실제의 숏도 그렇게 한다. 현서는 이 신에 뒤이어 붙어 있지 않고 그 사이에 방독 가스를 뿌리고 다니는 자동차의 남자들이 돈을 줍기 위해 나온 다음 괴물에게 붙잡히는 신이 있다. 그들을 잡아먹은 괴물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고 우아하게 그 서식지에 까지 쫓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서 현서를 보여준다. 그런 다음 다시 영화는 병원으로 돌아온다. 사실 방독가스 차에 탄 남자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한번이라도 더 괴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봉준호는 이 신의 진행을 일단 중단시키고 그 사이에 괴물을 개입시킨 다음 현서를 보여주고,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병원에서 다시 병원으로. 좀더 정확하게 병원 신 안의 하수구 신. 이 말의 핵심. 그리고(and)가 아니라 그 안(into)에. 현서가 하수구에 붙잡혀 있는 두 번째 장면과 매점장면 사이의 편집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세 번째 현서의 신. 다시 붙잡힌 박강두는 한강에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더글라스 부소장과 김씨를 만난다. 물론 박강두는 눈앞의 더글라스가 현서를 납치해간 골뱅이-괴물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박강두는 지금 마취제를 맞아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그 박강두를 침대에 묶어놓고 카메라가 하이 앵글로 내려다볼 때 한참을 난동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문득 하수구의 현서로 옮겨간다. 현서는 세주에게 “뭐가 제일 먹고 싶어?”라고 물은 다음 자신은 “시원한 맥주”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대답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괴물이 나타나서 트림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뼈가 쏟아져 나오고,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캔 맥주를 토해낸다. 캔 맥주에 대한 두개의 대답. 그 하나. 그 캔 맥주는 잡혀가기 전 현서가 발로 찬 것을 먹은 다음 소화가 되지 않자 이제야 토해낸 것이다. 두 번째 질문. 그런데 이 신이 박강두가 마취제를 맞으면서 진행되는 신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현서가 희생자들의 옷을 묶어서 탈출하기 위한 동아줄을 만들지만 실패한 다음 이어지는 신은 (다시 앞으로 돌아와?) 병원에서의 박강두의 장면의 연속이다. 나는 이 신이 처음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그 까닭은 병원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일단 중단하고 왜 그 안으로 편집을 나눈 다음 그 ‘사이’에 현서의 에피소드를 끼워넣었느냐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의 진행을 구태여 번잡하게 만들고 있다. 나의 두 번째 대답. 만일 현서의 이 신이 마취제를 맞으면서 의식이 흐려져가는 박강두의 비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왜 괴물은 그 순간에 나타나 트림을 한 다음 많은 토사물 중에 캔 맥주를 토해냈을까? 그때 그 맥주는 매점에서 아버지와 딸이 사이좋게 앉아서 남주의 양궁 중계를 보면서 박강두가 건네주던 그 캔 맥주라는 기억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캔 맥주라는 기억의 매듭. 그러니까 이 현서의 신 전체는 병원장면의 일부이며, 이 신은 박강두가 마취제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문득 떠올린 현서의 비전이라는 편이 이 편집을 이해할 수 있는 순서가 아닐까? 네 번째 현서의 신. 박강두는 병원에서 탈출하고 난 다음 원효대교를 향하여 달린다. 그리고 현서의 이름을 외친다. 그때 현서가 있는 하수구의 신이 텔레파시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나는 현서가 아니라 현서가 ‘있는 하수구의 신’이라고 썼다. 현서는 세주를 깨운다. 그런 다음 잠들어 있는 괴물을 보면서 세주에게 말한다. “누나가 금방 나갔다 올게, 빨리 나가서 의사랑 119랑, 군인 아저씨, 경찰 아저씨, 죄다 데리고 올게.” 하지만 우리는 설혹 현서가 나갔다 할지라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강두 가족의 ‘사투’를 보면서 잘 알고 있다. 현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서 괴물을 밟고 동아줄을 잡지만 그러나 괴물은 깨어나고 만다. 도망치는 현서를 향해 괴물이 달려들면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그런 다음 이 장면은 박강두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박강두는 괴물의 은신처에 도착했고, 괴물은 입 속에 현서와 세주를 물고 원효대교 북단을 향해 가는 중이다. 현서가 나오는 네 번째 하수구 장면도 세 번째 장면과 같은 편집을 하고 있다. 박강두의 행동을 일직선으로 따라가지 않고 그 사이에 현서의 에피소드 신을 넣어서 그 행동을 나누고 있다. 여기에는 편집에서 신 안의 인서트의 주관성이라는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나는 이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편집에 의지해서 두 번째 매점에서 현서가 나타나는 장면은 박강두가 꿈속에서 현서를 만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설명된다면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모두 박강두의 신 안에서 생각하는 현서의 신이다. 현서의 죽음에 우리 모두는 정치적으로 유죄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텔레파시가 있다. 구태여 <괴물>을 본 다음 어떤 영화를 떠올려야 한다면 봉준호의 <괴물>이 왜 피터 잭슨의 <킹콩>이 아니냐고 묻는 대신 이 영화가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의 ‘사우스 코리아’ 버전으로서의 대답이라는 편이 어떨까? 네티즌들 사이에서 봉준호를 부르는 표현, ‘봉필버그’. *^^*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그 무엇. 그런 다음 무지비한 공격. 납치당한 자식, 그 아이를 구하려는 아버지의 악전고투. 여기에는 있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텔레파시와 구원을 향한 드라마.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까지이다. 나는 신42의 매점장면에서 현서가 나타나는 장면이 현서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갑자기 현서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마지막 장면에는 현서를 죽여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더 비장하게 만들기 위해서? 보는 사람을 울리기 위해서? 아니, 그 반대이다. 만일 현서를 죽이게 되면 봉준호는 괴물 영화의 컨벤션과 정면으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봉준호는 괴물영화라는 장르와 싸우는 데 관심이 없다. <괴물>은 비장한 척할수록 웃겨지는 영화이다. 박강두는 심각해질수록 보는 사람을 웃긴다. 혹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웃는다. 이를테면 박남일이 ‘꽃병’ 투척에 실패하는 대목. 한강에 괴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봉준호는 지금 2000년 2월9일에 벌어진 실제 사건을 끌어안고 끔찍한 질문을 하는 중이다. 내 생각에 <괴물>의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할리우드 괴수영화가 한강 강변에서 매점을 하는 가족 앞에 나타났을 때 벌어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소동 속에서 보여지는 스펙터클에 대한 휴머니즘의 무관심과 영화 속과 같은 날 벌어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서 그 둘을 할 수 있는 한 거의 맞닿을 만큼 서로 가깝게 다가갔을 때 그 사이에서 선택이란 있는가? 그 대답. 외양이 실재와 가까이 다가갈 때 그 사이에서 선택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여기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의 고리를 끊으려 할 때 정치적 무관심을 포기하고 휴머니즘의 무관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이미 그 역은 구하기에 틀렸다. 맥팔랜드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미군 기지가 이전하고 있는 지금 같은 사태가 심지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을 끊을 때 사실상 둘 다를 잃는 것이다. 그때 현서는 그 매듭이다. 그러므로 봉준호는 현서의 죽음을 놓고 내기를 한다. 무슨 내기? 피할 수 없는 질문(의 내기). 현서의 죽음 앞에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걸 괴물에게 떠넘길 것인가? 만일 괴물이 마지막 순간에 현서를 잡아먹어서 죽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무죄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현서는 그 순간 왜 그 매점에 나타나서 함께 라면을 먹은 것일까? 차라리 현서는 그보다 훨씬 앞, 그러니까 괴물이 현서를 꼬리로 붙잡은 다음 그의 서식지로 데려갔을 때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런 다음 그 모든 현서의 신은 박강두가 현서를 되찾기 위해 그 자신에 동기를 부여하는 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나에게 현서의 죽음은 사실상 현서가 매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야만 하는, 봉준호의 말을 빌리면 “훨씬 더 구조적인 데서 온 재앙”, 즉 그녀의 계급적 운명의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 옳다. 현서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죄를 지었다. 이것이 정치적 정의의 죄의식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남주의 마지막 화살을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 판본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결국 남주의 화살에 괴물을 쓰러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남주가 아니라 그 화살에 주목한다. 사실 남주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녀가 대전에서 어떻게 자라나서 양궁선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아무 설명이 없다. 왜 강두가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는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건만” 4년 제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왜 남일이 한강 강변에서 술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 그리고 왜 현서에게 엄마가 없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주가 왜 매번 제시간을 놓쳐서 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거북이”인지(남일은 그렇게 부른다)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도 남주의 심리적인 망설임을 더이상 읽을 수 없다. 그 불투명성. 이 네명의 설명의 영화적 판본의 공통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봉준호는 이 가족의 내면적 심리(의 과정)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화살은 이 영화의 마지막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걸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남주의 화살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 그 설명의 판본에서 내가 택한 것은 이 신 전체가 사실상 이 영화에 처음 괴물이 나타난 신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때 이 반복 안의 차이 혹은 차이처럼 보이는 반복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괴물이 나타나는 첫 번째 신(이하 첫 번째 신). 여의도 둔치에서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한가롭게 즐기는 가운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 그 다음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신(이하 마지막 신). 원효대교 남단, 그러니까 여의도 둔치에서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에이전트 엘로우’ 살포를 반대하면서 시위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 갑자기 나타나는 괴물. 첫 번째 신. 이 괴물이 나타나자 박강두는 철제 주차표지판을 들고 달려든다. 마지막 신. 박강두는 ‘1급 오염구역’ 철제 표지판을 들고 괴물에게 달려든다. 철제 표지판. 첫 번째 신. 모두가 도망가는데 미군 도날드 하사관이 보도블록을 깬 다음 이걸 들고 괴물에게 달려가 싸운다. 이걸 맞자 괴물이 잠시 멈칫거린다. 마지막 신. 모두가 도망가는데 거기 설치된 ‘에이전트 옐로우’ 풍선을 터뜨려 괴물에게 황색분말을 쏟아붓는다. 이걸 뒤집어쓴 다음 괴물은 비틀거린다. 미군. 첫 번째 신.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신,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에 휘발유를 넣은 ‘꽃병’을 들고 괴물에게 던지지만 단 한개도 맞지 않는다. 박남일의 소주병. 첫 번째 신. 박남주는 괴물이 한강변에 나타났을 때 전국체전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그때 박남주는 시간을 놓쳐 활시위를 당기지 못한다. 그걸 본 현서는 실망하고 매점에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마지막 신. 박남주는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남일이 마지막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자 화살 솜방망이에 불을 붙인 다음 괴물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질문. 그래서 오직 남주만이 그의 행위를 성공시켰는가? 내 대답은 반대이다. 남주의 행위도 사실상 남일의 행위의 반복이다. <괴물>은 대부분의 장면이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숏이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신 안에서 두개의 신이 진행된다. 영화의 앞부분. 괴물이 나타났을 때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보여지는) 남주는 화살을 쏘고 있다. 그런데 그 화살은 결국 시간을 놓쳐서 쏘지 못한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 화살은 결국 과녁을 제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남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실망한 현서는 매점 바깥으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괴물이 나타난다. 그 괴물을 향해 남주는 활시위를 당긴다. 그런데 이게 남주가 괴물을 향해서 활 시위를 당긴 네 번째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처음은 비오는 새벽, 할아버지 박희봉이 괴물에게 죽을 때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제지당한다. 두 번째는 달려오는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그만 괴물에게 하수구에 처박힌다. 세 번째는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현서를 입에 물고 있기 때문에 강두에게 제지를 당한다. 그리고 지금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긴다. 그러나 이미 현서는 죽은 다음이다. 그것이 복수의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남일이 ‘꽃병’을 던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 화살은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 맞기는 했지만, 그 화살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상과 목표의 분리. 그때 목표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괴물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정말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는가? 그 활시위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일종의 공허한 몸짓의 반복이다. 남주의 화살보다 더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알레고리가 있을까?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봉준호의 차가운 냉소주의이다. 그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향해 깔깔대고 웃으면서 공허한 제스처처럼 다룬다. 그는 여전히 항의한다. 그러나 한참 항의한 다음 그 항의라는 행위가 지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서 환멸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나는 봉준호가 이 외설적일 만큼 노골적인 ‘정치적인 영화’에서 무엇을 은폐하려는지가 궁금하다. 나는 현서의 시체 앞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괴물>에서 끝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였다. 그 하나는 가족이다. 그러나 영화 <괴물>은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부서졌고, 그런 다음 더 부서져가는 과정을 밟을 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괴물이라는 것이다. 괴물이 죽었을 때 사실상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순환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이 영화가 끝난 다음 (다시 시작하는 현실 속의 속편의) 첫 장면은 당연히 다시 주한 미8군 부대에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선택이 남는다. 괴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정치적 어젠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 속의 모호함 속에서 반식민지 상태로 ‘그냥’ 살 것인가? (더글라스 부소장의 말을 빌리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 양자택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선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것’의 상태와 탈정치적인 일상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각성을 일깨워 실재를 보라고 외치다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그런 다음 음산한 에필로그가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무대는 눈 내리는 한 겨울 밤 한강 강변으로 옮겨간다. 거기 강두의 매점이 있다. 남일과 남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헤어져서 아마도 이전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현서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다(박희봉의 대사 “현서 덕에 우리가 다 모였다”). 그 매점에 박강두와 세주가 살고 있다. 현서의 자리를 대신한 세주. 일종의 유사 가족. 여전히 어머니의 자리의 부재. 나는 이 장면에서 현서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애도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 에필로그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 괴물은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일까? 또 새로운 골뱅이가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있는 것일까? 강두는 여전히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마도 현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방송일 텐데 그는 발가락으로 채널을 꺼버린다. 눈이 내리고, 강변에는 강두의 매점만이 홀로 쓸쓸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낮과 밤의 차이가 아니다. 혹은 현서에서 세주에로의 대체가 아니다. 여기에는 좀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박강두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그런 게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낮에도 밤처럼 잠을 잔다. 그런데 괴물과 싸우고 난 다음에는 한강에 언제든지 괴물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총을 잡는다. 그래서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바깥을 살피면서 두리번거린다. 사실상 박강두의 입장에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걸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서 그 차이가 지금 정치적인 것의 위기감과 탈정치적인 것의 나른함 사이의 차이와 불길할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이 마지막 장면이 만족스럽거나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그 만족과 불만은 정확하게 위기감과 나른함 사이의 차이의 반복이다. 만족스러운 위기와 나른한 불만족. 이 비대칭의 공존.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어두운 하수구. 화성에서는 연쇄살인이 벌어져 시체들이 발견되었던 그 하수구, 한강에서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그 하수구. 현실 속의 실재가 있는 그 블랙홀.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의 어두운 구멍. 나는 정확하게 <괴물>의 거기까지만 지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MBC 수목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한희 피디

일주일에 한번 귀가 ‘강행군’ 마약 같은 무대의 불꽃 청춘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누구나 공감할줄 알았는데…” 가요계에 뛰어든 젊은이 4명의 이야기인 문화방송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수·목 밤 9시50분, 연출 한희, 극본 홍진아·홍자람)는 춤과 노래, 이야기가 서로 떠받치고 있다. 10·20대 취향의 드라마이지만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선과 악의 이분법도 없다. 인물들은 저마다 욕망과 이유를 지닌 채 새파란 청춘을 무기로 연예계의 복마전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의 직업은 멜로를 위한 추상적인 배경이 아니다. 희수(김옥빈), 렉스(환희), 혁주(지현우), 상미(서지혜)가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성장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이 드라마를 연출하는 한희 피디는 이전에 춤과 노래를 주인공 삼은 적이 있다. 단막극 〈고무신 거꾸로 신은 이유에 대한 상상〉, 미니시리즈 〈내 인생의 콩깍지〉에서 뮤지컬드라마라는 생소한 영역을 보여줬다. 〈회전목마〉 〈신입사원〉 등 정통 드라마를 거쳐 화려한 무대를 다시 찾은 그를 지난 3일 문화방송에서 만났다. 1·2편은 현란한 춤과 힙합 음악이 버무려져 화려했다. 영상은 세련되고 깔끔했다. 하지만 한희 피디는 100년 동안 인파 100만명이 몰린 휴양지에서 부대낀 사람처럼 초췌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일주일에 하루 집에 들어가요. 춤은 연기도, 찍기도 힘들어요. 대역도 불가능하고. 육체적 정서적 표현이 다 되어야 하니까요. 보통 춤 장면을 카메라 5대가 3번 정도 찍어요. 일일이 확인해서 동작별로 제일 나은 걸 고르고 이어붙여야 하니 미칠 노릇이죠. 그냥 드라마 1분짜리 만드는 데 1시간 걸린다면 이건 10시간이 드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춤·노래 장면 많지 않을 거예요. 음악드라마라기보다 갓 20살이 된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솔직히 춤을 많이 찍을래야 찍을 시간도 없어요.” 왜 굳이 음악과 춤을 택했을까? “15년 전 예능국에서 조연출을 했어요. 그때 뮤직비디오도 찍었는데 춤과 노래가 볼거리의 원형질이라고 느꼈죠. 가장 치열한 복마전이 벌어지는 곳이죠. 10대 후반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해요. 하늘같이 떠받들다가 어느 순간 전화 한통 안 하는 곳이 가요계죠. 그래도 아이들은 무대가 마약 같다고 해요. 몇걸음만 더 올라가면 무대에 닿을 수 있을 듯한 아쉬움, 회한 이런 게 느껴지죠. 쇼비즈니스와 가수의 예술적 포부, 팬들의 욕망이 부닥치는 곳이 가요계이고 이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죠.” 〈오버 더 레인보우〉에는 캐릭터가 지닌 욕망을 긍정하는 시선이 있다. 희수는 댄서 혁주의 애인이지만 인기가수 렉스의 관심도 놓치고 싶지 않다. 혁주의 팔짱을 끼면서도 렉스에게 고양이 같은 눈빛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악당이 아니다. “나쁜 편, 착한 편이 확실히 나뉘면 훨씬 쉽죠. 하지만 치열하게 살다보니 경쟁자도 되는 거잖아요. 하다못해 렉스를 상품 다루듯 하는 프라이드 기획사 사장도 ‘걔(렉스)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 나만큼 걔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할 때는 이해가 되잖아요. 20살 평범한 사랑과 무대의 주인공, 모두를 갖고 싶은 욕망이 희수 안에서 부닥칠 수 있죠. 아버지까지 잃으면서 선택한 무대니까요.” 춤·노래 다 해야 하니 배우들에게 부담이 클 법하다. 하지만 김옥빈은 극 중 뉴질랜드 동포라는 설정을 감안해도 가끔 발음이 샌다. 지현우는 춤의 고수라고 하기엔 때때로 엉거주춤하다. 듀엣 ‘플라이 투더 스카이’의 환희에겐 첫 연기 도전이다. “김옥빈은 눈빛에 야망 같은 게 어리고 춤의 리듬을 타요. 환희는 일관성 있게 캐릭터를 끌고가는 힘이 있죠. 지현우도 옥빈이랑 나이키(한쪽 팔로 땅을 짚고 공중에서 다리로 나이키 상표 모양을 만드는 춤)를 성공했어요. 쉬운 일이 아니죠.” 캐릭터와 직업 세계에 대한 묘사가 꼼꼼하고 전개에 속도가 붙는데도 시청률은 7~8%를 맴돈다. “텔레비전이 나이 든 매체가 돼 가고 있죠. 30·40대 취향의 드라마가 잘 돼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선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나이 들면 고작 택할 수 있는 게 이사를 분당으로 갈까 일산으로 갈까 그 정도잖아요. 누구나 겪었을 시기니까 공감할 줄 알았어요. 저만의 착각이었나봐요. (하하)”

<신데렐라>의 봉만대 감독

“신음 소리만 낸다고 에로 영화가 아니듯 비명 소리만 지른다고 공포 영화는 아니다.” 성인 비디오 영화계를 주름잡다 극장용 성인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과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용 에이치디(HD) 영화 〈동상이몽〉을 선보인 뒤 농담 반 진담 반 ‘에로 영화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봉만대(36·사진) 감독이, 이번에는 공포 영화 〈신데렐라〉를 들고 관객들을 찾았다. 〈신데렐라〉는 성형수술과 극단적인 모성애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들였음에도 애써 자극적인 비주얼과 효과음을 피해간 흔적이 역력하다. 에로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뿅점’(결정적으로 야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던 그의 취향과 신념이 그대로 반영된 듯도 하다. 봉 감독은 〈신데렐라〉를 ‘봉만대 식 공포 영화’라고 정의했다. “나는 에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에로보다 멜로를 중시했는데, 공포 영화에서도 공포보다 멜로 쪽에 무게를 뒀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공포 대신 슬픔을 느끼고 극장문을 나선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봉 감독이 ‘슬픔’을 유난히 강조하는 탓에, 〈신데렐라〉의 주요 축을 이루는 것도 ‘성형이 불러온 참사’보다 ‘성형외과 의사인 엄마(도지원)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깊은 슬픔’이다. 공포 영화를 만들어 놓고 공포보다 슬픔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생뚱맞기도 하지만, 이는 봉 감독 나름의 공포에 대한 정의가 반영된 결과다. 봉 감독은 “귀신이 무서운 건 머리카락이 길어서도, 피를 흘려서도 아니다. 슬픔을 간직하고 죽어서 한을 품은 게 무서운 거고, 그 한을 풀 때 공포스러운 거다. 슬픔을 뺀 공포는 ‘처키’이고, 〈신데렐라〉는 처키 식 공포 영화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시사회 뒤엔 ‘덜 공포스러움’을 아쉬워하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봉 감독은 “내가 그 정도 (비판에) 상처받을 사람이 아니다(웃음)”라며 단호했다. “사실 난 ‘에로 영화의 거장’보다 ‘에로 영화의 꼬장’이라는 별명으로 훨씬 더 유명했다. 공포 영화를 만들면서도 남들이 다 하는 뻔한 방식으로 무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잔혹한 비주얼을 되도록 피해 가고, 세지 않은 효과음으로도 공포감을 줬다는 점 등 새롭다고 평가해 줄 부분도 많지 않은가.” 〈신데렐라〉는 17일 전국 200여개 스크린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에로 비디오에서 에로 영화로, 다시 공포 영화로 보폭을 넓혀온 봉 감독이기에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하지만 그는 “나는 비디오 찍을 때도 한 작품 끝낸 뒤 바로 다음 작품을 찍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생길 때 다시 영화를 찍을 예정이고, 에로가 될지 공포가 될지, 다른 어떤 장르가 될지 나도 모른다”며 끝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캐스팅 소식] ‘미칠이’ 최정원, 이장님 마음을 사로잡다 外

최정원/ ‘미칠이’ 최정원이 이장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장규성 감독(<선생 김봉두>)의 신작 <이장과 군수>에 캐스팅된 것. 이장과 군수로 만난 두 남자(차승원, 유해진)가 벌이는 소동을 다루는 영화에서 최정원은 이장 조춘삼(차승원)이 반한 면사무소 여직원 남옥으로 변신할 예정이다. 김명민, 김태우, 유준상/ 불멸의 이순신, 미궁에 빠지다. 김명민이 ‘수술 중 각성(覺醒)’을 소재로 한 의학스릴러 <천개의 혀>에 캐스팅됐다. 냉철한 외과의 류재우 역을 맡은 그는 최면술을 연구하는 의사 오치훈(김태우), 미국에서 그를 찾아온 사나이(유준상)와 함께 의문의 사건을 추적할 예정이다. <인형사>의 김유미가 홍일점으로 호흡을 맞춘다. 정준호, 존 조/ 정준호가 한국계 미국 배우 존 조와 호흡을 맞춘다. 뉴욕의 한인타운을 배경으로 한 누아르영화 <웨스트 32번가>(가제)에 캐스팅된 것. 존 조는 변호사 존 킴 역을, 정준호는 갱단의 중간보스 전진호 역을 맡았다. 한국계 미국 감독 마이클 강이 메가폰을 잡는다. 황정민, 임수정/ 시골 노총각과 여자 기수가 사랑에 빠진다. 황정민과 임수정이 허진호 감독의 신작 <행복>(가제)에 연인으로 캐스팅됐다. 투병생활 중 사랑에 빠지는 남녀를 그리는 <행복>에서 황정민은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도시 남자 영수로, 임수정은 상대방의 결점조차 끌어안는 씩씩한 여자 은희로 등장한다. <행복>은 9월 촬영을 시작해 내년 봄 개봉한다. 고소영, 이범수/ 고소영은 어긋난 인연을 되돌릴 수 있을까? 고소영이 로맨틱코미디 <언니가 간다>에서 첫 연애의 실패를 가슴에 담아둔 서른살 여자 나정주로 출연, 12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12년 만에 만난 성공한 동창생 오태훈 역은 이범수가 맡았고, 나정주, 오태훈의 고교 시절은 조안과 유건이 각각 연기한다. 헤이든 크리스텐슨/ 다스베이더가 텔레포터가 된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2편과 3편을 통해 악에 물들어가는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연기한 헤이든 크리스텐슨이 <점퍼>에서 텔레포트 능력을 지닌 청년으로 낙점됐다. <점퍼>는 스티븐 굴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더그 라이먼 감독의 스릴러물. 제이미 벨과 새뮤얼 잭슨이 함께 출연한다.

연애는 남녀의 미래다! 연애학자 홍상수 따라잡기 [1]

정녕 연애는 남녀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이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이래 10년째 해온 영화 작업에 따르면 그렇다. 신작 <해변의 여인>까지 홍 감독은 줄기차게 연애를 이야기했다. 물론 홍상수만의 영화 구조와 리듬을 제치고 연애만을 이야기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렇다고 홍상수가 영화 언어를 발명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사실 그의 영화는 연애의 영화라기보다는 연애의 생성과 소멸의 영화이다. 그의 연애영화에는 생활이 없다. ‘생활의 발견’은 끝내 없고 애써 그 발견 이전과 이후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그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생활을 발견하게 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해변의 여인>까지 연애박사 홍상수의 자취를 따라가보았다. 연애라는 당신의 미래를 앞당기려면 밑줄 쫙. 지금 그 미래를 벌써 끝내버렸다고 해도 밑줄 쫙. 연애는 시작해도 끝나도 늘 현재진행형이기에. 1. 우연이 불륜에 빠진 날 모든 사랑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홍상수 영화에서도 그렇다. 방송국 아나운서가 대기업으로 시집가는 따위의 필연은 홍상수 영화에도 우리 현실에도 없다. 홍상수는 연애를 극한의 조건에 밀어넣음으로써 연애가 무엇인지 스스로 드러나게 한다. 위기와 갈등에 빠졌을 때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듯, 연애도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누설한다. <생활>에서 경수는 두 여자를 차례로 우연히 만난다. 동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거니다 우연히 영화의 여주인공을 만난다. <해변>에서 중래는 창욱 차에 탔다가 우연히 창욱의 애인(이라는) 문숙을 만난다. 리스트는 끝이 없다. 우연히 멋진 여자(남자)를 만나서 커피 한잔 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남자(여자)가 수락했다, 그래서 사귀게 되었다 따위의 황당한 일이 현실에 없듯, 이 우연에 엔진을 달아줘야 필연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엔진은 뭐가 되어야 할 것인가. 홍상수 감독 영화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우연이 꼭 불륜과 접속된다. 불륜이라는 불가능한 사랑의 조건이 사랑의 불꽃을 당긴다. 그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극단의 사례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좋아하는데 장애가 있다면 그 마음은 더 갈망하게 되게 마련 아니던가. 우리는 그저 그 갈망이 어떻게 현실 속에 드러나는지 구경하면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 속마음을 어떻게 털어놓을지, 또는 어떻게 불륜이란 장애물을 뛰어넘을지. 홍상수 영화는 그래서 연애의 속성을 되새기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참고사항: 홍상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은 많이 닮았다. 같은 영화에서 비슷한 언행을 하거나, 다음 영화에서 비슷한 언행을 한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각각 수정에게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라고 말한다. <생활>의 경수와 <극장>의 동수는 “죽어버릴까요?”라고 여자에게 말한다. 연애박사 홍상수는 연애의 심리와 행동이 모방 속에서 탄생한다고 보고한다. 2. 안 봐도 비디오傳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영화에서 또는 연극에서 봤는데, 전에 만났던 것 같은데… 따위가 좋은 구실이 된다. 이런 기시감과 착시감이 연애로 이어지는 핑계가 된다고 홍상수는 말한다. 사실 안 봐도 비디오다. 이런 수작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연애는 이런 뻔한 곳에서 시작해 뻔한 곳에서 끝난다. 이 뻔한 그래서 오히려 즐길 만한 기시감. 행복의 추구는 행복한 기억을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생활>에서 경수 기차 옆좌석에 앉게 된 선영은 경수를 연극에서 봤다며 반가워한다. <강원도>에서 상권은 비룡폭포 가는 길을 자신에게 물었던 여자가 술집 앞마당으로 지나가자 후배를 시켜 말을 걸게 한다. <수정>에서 재훈은 수정이가 어떻게 자기 장갑을 들고 있느냐며 놀라워한다. <극장>에서 영실은 관객인 동수가 따라붙어 한번 만나달라고 졸라대자 “영화네요, 영화”라고 말하며 조건부 승낙을 한다. 왜 유독 홍상수 영화에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유독 기시감을 자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제 만나봤음직한 친근한 사람. 그들은 말 걸기 좋은 구실을 준다. 방송국이나 영화관에서 배우들을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인사를 하게 되지 않는가.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커피나 한잔 하자고 홍상수 영화 주인공들은 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커피는 다음 단계다. 일단 말을 걸어야 하고, 대화를 연장시켜나가야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타인에게 어떻게 3분 이상 말을 걸 것인가. 연애라면 귀를 쫑긋거리는 관객의 숙제이기도 하다. 홍상수는 정답 중 하나로 ‘어디서 봤는데’를 제시한다. 또 하나는 어디 가요? 라는 질문이다. <강원도>에서 유부남 경찰관이 여대생들을 처음 부를 때, <극장>에서 동수가 영실의 뒤를 따라가며 “영실씨, 어딜 그렇게 가는 거예요”라고 물을 때 등등. 괜한 질문을 괜히 계속 던져보는 것. 그게 구애다. 3. 해변의 집요맨-성관계는 없다만 남자의 집요함이, 또는 남자로 하여금 집요하게 따라오게 하는 잔머리가 결국 연애를 끌고 간다. 여자는 낚싯바늘을 집요하게 던지고, 남자는 바늘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물론 꼭 이렇게 남녀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남자 중심으로 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권력의 비대칭으로 간다. <생활>에서 명숙은 집요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그 고백을 듣지 못하면서 상처받는다. 권력-매력이 더 적은 사람이 먼저 고백을 하고, 먼저 마음을 다친다. 남자들은 권력의 비대칭을 집요함으로 밀어붙여 평형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집요하기로는 <생활>의 경수와 <극장>의 동수, <수정>의 재훈이 대표선수일 것이다. 경수는 선영의 집을 세 차례나 찾아가고, 동수는 영실을 안경점 앞과 동창 술집 그리고 병원까지 세번이나 쫓아다닌다. 줄기차게 수정을 벗기려 애쓰는 재훈은 그때마다 실패하면서도 또다시 의욕에 불탄다. 월경이라서, 첫 경험이라서, 자기 이름을 잘못 불러서 등등 수정은 온갖 이유를 대며 거절하지만 재훈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집요맨의 가장 강렬한 퍼포먼스는 <강원도>에서 이루어졌는데, 오직 여대생과 잘 목적으로 술을 깨기 위해 난간에 매달린 경찰관에게 우린 훈장을 수여해야 할 것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그게 필연이라고 우겨대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 그게 연애다. 촛불이 타오르고 재즈가 흐르는 로맨틱한 상상과, 거리를 쏘다니며 누추하고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게 구걸하는 현실은 정반대편에 있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각각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라며 수정을 골목길로 끌고 가서는 뽀뽀를 하거나 여관으로 데려가려는 시도를 한다. 넉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파렴치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순간 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점에서 아무도 그들의 뻔뻔스러움을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집요맨들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하다못해 <수정>에서 영수처럼 “너 빤쓰까지 벗긴 거다”라고 우기며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는 뻔뻔한 사례가 목격된다.

이윤기 감독 <아주 특별한 손님> 첫 촬영현장 엿보기

와 CJ엔터테인먼트가 함께 만든 HD 영화 <어느날 갑자기> 등 한 가지 콘텐츠를 영화와 텔레비전 두 매체에 소개해 관객·시청자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케이블채널 가 창립 5주년 기념으로 기획·투자하고 ‘에드리브나이트프로덕션’이 만드는 HD 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영화 <여자, 정혜> <러브토크> 등 스산한 삶의 단면을 영상으로 제공해온 이윤기 감독의 작품으로 관심을 끈다. 일본 작가 다이라 아즈코가 쓴 <애드리브 나이트>가 원작이며 이윤기 감독이 각색했다. 제작사는 이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한 뒤 영화관에서 먼저 틀고 케이블 채널에서 내보낼 계획이다. 의 최현미 피디는 “이번 기획을 시작으로 독특하고 수준 높은 자체 제작 콘텐츠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0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첫 촬영 현장을 찾아가 어떤 작품이 될지 엿봤다. 편의점부터 버스정류장까지는 채 500m도 안됐다. 그 길을 <봄의 왈츠>에 출연했던 한효주,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에 나왔던 김영민 등 배우들은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걷고 또 걸었다. 스텝 30여명은 사람들 통제하랴, 조명 설치하랴 얼굴에 피곤이 맺혔다. <아주 특별한 손님>은 20대 평범한 여성 보경이 우연히 겪게 되는 하룻동안의 따뜻한 ‘일탈’을 다룬다. 한 시골마을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는 집나간 딸(명은)을 기다린다. 마을 청년 기용(김영민) 등은 번잡한 거리에서 우연히 명은을 닮은 보경(한효주)를 만나고 그에게 임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마을 사람들도 죽어가는 이를 위한 이 즉흥연극에 참여한다. 이날 촬영은 호기심과 서로에 대한 경계가 얽힌 그들의 첫 만남을 담았다. “고명은이 아니라구?” “예 아니에요” “정말 아냐?” “아니라니까요.” 한효주가 두 청년을 뒤로 하고 걸어간다. “컷. 두번 돌아보면 이상해. 한번만 돌아봐.” 이윤기 감독의 조언이 이어진다. “여긴 대사가 이상한데….”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만남을, 감독은 자연스럽게 절제하며 표현하라고 주문한다. 한효주는 “20대 보경은 평범한 아이라서 연기하기 더 어렵다”고 말한다. “자기 틀을 깨고 싶지만 두렵기도 하고, 호기심이 많지만 실현할 용기가 충분한 것도 아니며, 착한 것도 아니면서 우유부단한 아이거든요. 또 나름대로 상처가 있지만 그걸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역할이에요.” 9월 2일까지 보충촬영까지 마칠 계획이니 빠듯하다. 촬영이 끝나고 곤죽이 돼 있을법한 감독은 의외로 팔팔했다. 이윤기 감독은 “다른 영화 같으면 4~5일 걸릴 촬영분을 마쳤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방송 <에이치디 티브이문학관>에서 나간 <내가 살았던 집>을 찍은 적이 있어 에이치디 작업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필름이랑 큰 차이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있고 절차가 간단해 짧은 기간에 많은 걸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첫 장면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유발해야 했어요. <여자, 정혜>나 <러브토크>도 표현이 차가웠을지 모르지만 따뜻한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이번 것은 좀더 명랑한 느낌으로 나올 것 같아요. 하지만 쓸쓸함이 묻어나지 않는 명랑함은 별로예요. 일상적이며 소박한 걸 간결하게 전달하는 이야기가 좋은데 이번 작품의 원작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죠.” 이날 촬영분은 90분에서 15분 정도를 차지할 예정이다.

짝퉁 영화 주인공이 강의하는 킬러되기 여덟 고개

킬러. 늘 시커먼 옷을 입고 다니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그들. 킬러 세계에 입문하려 열공 중인 수험생을 위해 영화 속의 대표 킬러(들과 친분이 있는 짝퉁 킬러)들이 입을 열었다. 레몽, 박큐, 도미, 킬라, 대니 보일 등 개성 강한 다섯명의 킬러들과 소비자 피해사례를 급제보해온 젤리 런더가드씨의 강의를 들을 기회! 거친 세계다보니 강의가 부드럽지만은 않다는 소문. 주의사항: 민간인은 함부로 따라하지 마세요. 제 1강. 살인자의 건강법 여러분 하이루~! 방가방가~. 킬러 경력 18년차, 레몽이에요. 근데 무슨 클래스가 이래? 수업할 자세가 안 돼 있잖으아! 나 레몽, 이런 기분으로 도저히 수업 못해. 맨 뒤에 노랑머리 학생, 가서 우유 하나 사와. 1.5리터 댓병으로. 자, 여기. 거스름돈은 가져. 우유는 우리 킬러들에게 꼭 필요한 건강식품이에요. 언니 좀 꼬셔보겠다고 커피, 위스키 이딴 거 먹고 다니지 마. 그런 건 마귀들이나 먹는 거야. 우리 킬러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철저한 자기관리라는 걸 잊지 마요.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잘 때 자면서 어떻게 킬러가 되겠어어? 모쪼록 킬러라는 것은 수도사와 같아. 혼자 외롭게 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체력, 집중력 강화에 매진해야 하는 거죠. 나 레몽은 18년 동안 침대에 누워본 적이 없어요. 잘 때도 앉아서. 그래야 긴장이 녹슬지 않지. 총 관리는 반드시 매일 할 것! 연장은 소중하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업무를 주는 윗선 외엔 어떤 인간관계도 만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일단 신분이 노출되면 그때부터 밥줄 끊기는 거야. 특히, 킬러에게 총보다 위험한 게 여자라는 거, 설마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연애질하다 인생 종친 킬러, 어디 한두번 봐? 감정이 개입되면 그 즉시 게임 오버야. 정 외로우면 화분을 길러요. 그래도 증상이 가시지 않을 땐 100일 새벽 푸시업에 의지하구. 그리고 거기 중간 줄 학생! 그래, 언니 말야. 그런 맨 머리, 오우~ 노! 선글라스만 끼면 뭐하니? 모자 꼭꼭 챙겨 써. 우린 감기 걸리면 약 사다줄 인간도 음써. (문득 북받친 듯) 레옹이 형…, 그곳에서 잘살고 있는 건지…. 틸다가 심은 화초는 벌써 뿌리를 내렸어. 아주 튼튼하게 말이야. 제 2강. 스타일 있는 킬러 되기 안녕하쎄효. 네털란트에서 온 박큐 임미다. 크런데, 촘 천에 나칸, 시커먼 놈, 누쿠인커쵸? 보풀 천지인 털모차, 요츰은 아무도 안 쓰는 통그랑탱 선클라쑤…. 청말 카콴임미다. 나름 프렌치 스타일, 이라는컨카? 니미럴! 오오~, 청말 청말 쏘리함미타. 여러푸운 아페서 이런 알훔답치 모탄 말울 쓰타니요. 하치만, 처런 폭장, 청말 안 촛타코 생칵함미타. 넘흐 촌스럽숨미타. 오늘 캉이 추체는 ‘청슌한 킬러가 퇴차’임미다. 터푸러(더불어) 비툴기(비둘기) 응용펍도 배워 보케쑴미타. 킬러카 손만 데면 뚝 푸러지눈 살암이라고 생칵하는 거쑨, 청말 찰못된 생칵임미다. 우리 킬러들토 얼마둔지 부드럽코 청쓘할 쑤 있숨미타. 체카 네털란트에 잇술 때 아는 킬러 형, 있엇숨미타. 그 형, 알훔다훈 한국 여차, 살앙했숨미타. 머리 킨 여잔데, 테이지 콫, 초아한다코 해서, 매일 매일 테이지 콫 사다노앗숨미타. 크 여차가, 밋술 콩부해서, 그 형토 고흐, 마네, 모네, 초아하게 퇴얏숨미타. 그 형이 참, 미소가 착살(작살)이었는테, 눈은 하나도 안 캄코, 한쪽 입끄츨 비축 올리면써 우섯숨미타. 그 모숩 포코이쑤면 퍽 칼수파케 업쑴니타. 그 형이 나충에 크 아카시한테 “여기 모네도 있어요. 저 모네를 좋아하거등요? 모네는 화폭이 넓고 몽롱한게 보는 사람이 뭔가 상상할 수 있게 하거등요” 하는데, 너무 멋싯어서 축는 출 알았숨미타. 헐마나 푸트럽숨미카. 헐마나 알훔답숨미카. 킬러도 청슌해야 함미타. 아 크리고, 홍콩에 사는 형은 총 솔 척에, 콕 총 투 캐를 한 커번에 쑴미타. 비툴기를 테리고 다니는 컨치, 비툴기 있는 테서 총 소는 커신지는 찰 모르지만, 총 솔 테, 콕 비툴기가 날음미타. (망연한 표정으로) 청말… 청말… 넘흐 머싯슴미타아아…! 제 3강. 위기상황 대처는 이렇게 뭘 봐! 이자식아. 내 이름? 그런 건 알아서 뭐해? 어디다 찔러 넣으려고. 이 개떡같은 놈들. 그래서 내가 뭘 가르쳐야 된다고? 위기상황에서의 대처법? 그럼 하나 말해주지. 옛날에 말이야. 대갈통 여덟개를 운반하게 됐어. 보스한테 엉기다 머리통 신세가 됐지. 그걸 비행기로 옮기는데…, 어이, 주번! 그 머리통을 어떻게 공항 검색대에 통과시켜야 되는지 말해봐. 뭘 퀵서비스로 보내! 이 빈대같은 놈아! 자, 이렇게 내 앞에 선 놈 주머니에 총을 딱 넣어. 그럼 당연히 경보가 울릴 거 아냐. 경찰이 수색을 하면 총이 딱 나오겠지. 앞에서 난리치고 있을 때, 검색대 밑으로 가방을 실실 밀어. 자연스럽게 해야 돼. 뭐 어쨌든, 그렇게 비행기에 탔는데 개떡같은 스튜어디스가 가방이 너무 크다고 짐칸에 실으라잖아. 할 수 없이 실었더니, 짐 찾다가 웬 멍청이랑 가방이 바뀌었어. 가방 열어보니까 이름하고 다니는 대학만 딱 적혀 있더라고. 일단 대학으로 찾아가서 룸메이트 놈들을 족쳤지. 의대 다니는 놈들이더라고. 청진기 고문, 거꾸로 매달아 그네태우기 등등 왠갖 지랄을 했는데 말을 못하는 게 어딨는지 정말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때 마침 대갈통 가져간 놈이 멕시코에 있다며 전화가 온 거야. 근데 옘병, 머리통을 두개나 잃어버렸대. 보스한테 확인시켜줘야 되는 건데 없어지다니!!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해볼 놈? 뭐? 뭘 솔직히 말하고 싹싹 빌어 이 시키야! 죽을라고 환장했어? 그럴 때는… (띠리리리리~!) 여보세요? 어, 왜. 뭐얏? 대갈박을 또 잃어버렸어? 이 띨빵한 시키! 도대체 몇번째야? 일 한두번 해? 죽고 싶어? 몰랏! 끊어!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그래, 네놈이 괜찮겠다. 좀 젊긴 하지만 코 부러뜨리고 이빨 몇개 뽑으면 휴고랑 비슷하겠어. 그쪽에 넌 영락없는 조이군. 야, 주번! 톱 가져와. 저놈들 머리 자르게! 그의 과격한 수업 방식에 학생들 항의 속출. 설상가상으로 그가 전문 킬러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파문, 일파만파. 제 4강. 킬러시대의 철학 안녕. 내 말 들려? 놀라지 마. 텔레파시로 말하는 거야. 난 그냥 킬라라고 불러줘. 내가 말을 안 하니까 사람들은 내가 벙어린 줄 아는데 사실 벙어리는 아냐. 어렸을 때부터 혀가 짧았어. 그래서 아예 말을 안 하기로 결심했지. 난 폼 안 나는 건 뭐든 딱 질색이거든. 다른 사람도 그랬겠지만, 나 처음부터 킬러는 아니었어. 어렸을 땐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지. 여자친구한테서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선물 받은 뒤부터. 말을 못하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개나리꽃> 같은 거라도 써보라고 하더군. 하지만 살다보니 어른이 시를 쓴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세상은 시를 쓸 수 있을 만큼 아름답지 않더라. 그래서 시인이 되는 건 포기했어. 하지만 남아 있는 다른 꿈이 있었지. 혀 수술을 해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어릴 적 그녀를 찾아가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다고. 돈 모으려고 킬러가 됐어. 근데 사람을 죽인다는 게 참 쉽지 않더군. 가책을 안 느끼려면 룰이라도 있어야겠더라. 그래서 ‘예의없는 것들만 죽이겠다’고 나름의 규칙을 정했지. 망둥이 같은 눈을 하고 있는 놈들은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 인상 드러운 놈, 못됐게 생긴 놈만 죽이는 거야. <콜래트럴>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 나오는 킬러도 괴상한 이론이 있었어. “사람을 죽였어!” 하면 “내가 죽인 거 아냐. 총알이 그랬지” 하고, “(원한도 없는데) 어떻게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하면 “그럼 아는 사람은 죽여도 되나?” 뭐 이딴 식이야. LA 지하철에서 누군가 죽는다고 누가 신경쓸 것 같냐며, 먼지 같은 인간 하나 죽는다고 세상 달라질 것 없다는 이론을 펴지. 어쨌든 너도 말야. 처음 킬러가 됐다면 나름의 철학을 정해봐. 기준이 서 있으면 일할 때도 명쾌하고, 왜, 폼도 나잖아. 제 5강. 굳이 사직서를 내야겠다면 어어…. 제 말이 좀 어눌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전 대니 보일이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 납치당해 나쁜 자식 밑에서 개처럼 키워졌어요. 인간병기였던 거죠. 주인이 제 목에 채운 고리를 풀고 “해치워”, “죽여”, “쓸어버려” 따위의 명령을 내리면 아무나 해치웠어요. 전 개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피아노 조율하는 아저씨를 만났죠. 그 친절함이, 따뜻함이 두렵고도 좋았어요. 그 뒤부터 제 인생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운 좋게도 자동차 사고가 났거든요. 전 혼자 빠져나와서 피아노 아저씨를 찾아갔어요. 새로운 삶이 시작됐죠. 하지만 알다시피 킬러들의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잖아요? 아무리 내가 나오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으니까요. 역시 놈이 다시 나타나더군요. 자동차 속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았는데 살아 있다니 그놈도 목숨 참 질기죠. 새로 생긴 내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면서 협박했어요. 처음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람을 해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도망쳐나온 거예요. 이번엔 모든 걸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죠. 킬러세계의 탈퇴. 목숨을 내주겠다고 각오하는 수밖에 없어요. 살아남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윤발이 형도, 레옹이 형도 다 그러다 갔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놈을 제압할 수 있었어요. 그놈을 죽이게 돼, 인간성을 상실할까봐 오히려 걱정이었죠. 모쪼록 킬러세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 탈퇴 이후를 미리 염두에 두는 게 좋아요. 노후 관리 차, 나와 죽이 맞는 검찰이나 경찰을 하나쯤 친구로 두는 것도 좋구요. 남자들이 왜 의리에 살고 죽잖아요. 윤발이 형이랑 수현이 형이랑 서로 “미키!” “덤보!”하며 뭉클한 장면 연출하는 거, 못 보셨어요? 제 6강. 소비자 피해 예방법-급해도 싸구려들에게 의뢰하지 말 것 음음. 내 목소리가 좀 기분 나쁘죠. 하하. 그래요. 모두가 그러더군요. 모두… (갑자기 책상을 내리치며) 나으으!! 인생에엣 잘된 일이란 없엇! 아둔한 마누라에! 장인은 날 엿 같이 취급하고! 내가 차를 팔 때 단 한명도 군소리없이 사간 적이 없지!! (부르르…) 으흠, 으흠…. 그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때 난 돈이 필요했어요. 땅 사서 주차장 사업을 하려는데, 장인이 돈을 꿔주지 않는 거예요. (다시 얼굴색이 변하면서) 늙은 버러지 같으니라굿! 돈이 그렇게 남아 돌면서 왜 나한테 한푼도 주지 않는 거야! 구두쇠! 변태! 쥐며느리! 사기꾼! 자기가 중간에서 가로챌 생각만 하지!! (부르르…) 으흠, 으흠…. 그래서 마누라를 잠시 납치할 계획을 세웠어요. 아주 잠깐만. 장인한테 돈만 뜯어낼 생각이었죠. 동네 카센터에 가서 셉이란 친구한테 의뢰를 했어요. 소개로 두 친구가 나왔더군요. 그런데 처음부터 거친 게 아주 이상하더라구요. 지들이 잘못 알고 한 시간 빨리 나왔으면서 기다렸다고 지랄을 떨지 않나. 돈을 처음에 다 받겠다고 수작을 부리질 않나. 어쨌든 급한 마음에 싼값에 일을 맡겼는데, 이놈들이 어쩐 줄 알앗? 마누라를 납치해간 중간에 사람을 셋이나 죽인 거다!! 난 장인이 돈을 대주겠다기에 외려 납치를 취소할랬는데 제때 전화 연락도 안 되고! 도무지 무슨 일이 다 그 따윈 거얏! 그래 놓고 자기들이 살인까지 했으니 돈을 더 달라굿? 이래도 되는 거얏? 당신들은 직업 의식도 없엇?! 그 중 내 마누라를 패 죽인 놈은 다른 한놈까지 죽였다굿! 어떻게 죽인 줄 알앗? 분쇄기에다 갈아죽였엇!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굿! 당신들이 인간이얏?! 인간이냐구우우우웃!! 공고 소비자 강사의 난동으로 이후 수업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취소된 수업은 다음 주 같은 시각에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 수업 예고 제 7강. 블루 오션을 찾아라 킬러 바트 씨와 츄엔 감독을 특별 초빙하여, 청부살인 과정을 스너프 동영상으로 제작하는 신개념 VOD 사업에 대해 들어봅니다. 제 8강. 웰빙 킬러 되기 살인 안 하고도 돈 버는 비법. 평범한 사진 위에 빨간 칠을 하여, 피칠갑 살인 현장처럼 둔갑시키는 페인팅 기술을 배웁니다.

[외신기자클럽] 영화 수집, 그 참을 수 없는 즐거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매체로의 변환은 우리 대부분의 생애 동안 일어났다. 레코드판을 경험한 적이 없더라도 VHS 비디오 테이프를 성급하게 되감기해본 신선한 기억은 있을 것이다. 마치 개인 영화제라도 되듯, VHS는 세계영화로 가는 출입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필자는 런던의 서로 다른 골목 구석에 있던 홍콩, 일본, 한국 비디오 가게에 회원가입을 했다. 그곳 모두 불법이었고 결국 지방정부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다. 1984년 비디오녹화법은 값비싼 비용을 들여 등급 내지 검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영화들의 대여와 판매를 금했다. 한국 비디오 가게는 런던 교외에 있는 슈퍼마켓의 뒷방에 숨겨져 가장 오랫동안 법망을 피할 수 있었다. 필자는 두개 대륙에 거쳐 캐비닛과 상자들에 담긴 수백장의 VHS 테이프를 갖고 있다. 친구 중엔 수천장에 달하는 컬렉션들 때문에 그들 아파트와 집에 매여 있는 이들도 있다. 그 컬렉션들의 내용은(그리고 그 존재 자체도) 영화와 텔레비전 유통의 역사적인 비효율성을 반영한다. 영화애호가로서, 영어자막이 있건 없건 전세계 어디에도 VHS로는 나오지 않는 유럽영화가 새벽 3시에 소규모 텔레비전 채널에서 방영될 때면 녹화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었다(많은 독자들이 같은 경험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참가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케이블 방송에서 예기치 못했던 영화를 만나는 즐거움이었다. 한번은 동료가 동대문 시장에서도 중고 테이프로 구할 수 없어서 20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안성기 출연의 블랙코미디가 방영된 새벽 4시에 자기를 깨우지 않았다고 호되게 비난한 적도 있었다). 레코드판과 VHS는 각각 CD와 DVD로 대체됐다. 그런데 만일 아날로그 매체가 디지털 매체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단계였다 치면, 디지털 매체도 그저 보편적인 정보고로부터 다운로드로 가기 위한 또 다른 발판이다. 음악과 비디오 소유권의 개념도 기술(과 인간 본성)이 따라잡기 위해서 몇년 정도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생긴 역사적인 부수요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스튜디오들은 파일 공유 네트워크를 열심히 사용하는 이들을 고소하는 대신, 그들을 컨설턴트로 고용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이유들로 아시아는 트렌드에서 앞서가고 있는 것 같다. 대만에서 판매용 DVD는 결코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고, 유니버설과 파라마운트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에나비스타는 대만 가정용 비디오 배급을 그만두고 있다. 저작권 도용이 비난받고 있지만 소비자들 또한 영화를 수집하는 일이 바보 같은 일임을 깨닫게 된 걸 수도 있다. 방금 말한 바보 같은 일을 한 자로서 말을 하지만, 본인은 다양한 포맷과 화면비율과 화질 때문에 같은 영화를 사고 또 샀다. 그것도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수집하기 위해서다. 선반에 1천장의 DVD가 있다면 그것들을 모두 볼 필요는 없다(시간도 물론 없다). 아직까지는 분배되지 않은 두뇌엽과도 같은 것으로 충분하다. <매트릭스> 후기적인 것과도 같을지도 모른다. 즉 “내가 쿵후를 할 줄 아네”라고 했던 바로 그 혁명적 순간의 확장으로 말이다. 강건한 가정용 비디오 시장의 부재가 종종 한국영화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로 언급되곤 한다. 어떤 이들은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은 비디오 대여시장의 동시적 붕괴를 간과한 점 때문에 환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저작권 도용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은 여전히 영화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