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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어른 애니,어린이 애니 <첫눈을 노래하는 장미>

외국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페스티벌 취재를 하다보면 “이런 건 참 괜찮다”고 느끼는 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영화제 기간 중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모아 따로 상영하는 점이다. 지난해 프랑스 안시페스티벌의 경우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프로그램’ 코너가 있었다. 1998년 일본 히로시마페스티벌은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어린이에 의한 애니메이션’(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작품)으로까지 세분화해 놓았다. 이런 ‘영양가 높은’ 작품이 상영되는 극장은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들로 가득 차게 마련이다. 지난 10월2일부터 6일까지 열린 캐나다 오타와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위는 아예 경쟁부문 공모전 중 네 번째 섹션을 어린이용 작품만으로 구성했다. 여기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지 않나 싶다. 첫째 애니메이션이란 어른들을 위한 예술이라는 점, 둘째 그만큼 어린이들을 배려한다는 점이다. “만화영화는 원래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 아래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발상인 것이다. 몬트리올의 국립영화원(NFBC: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제작본부에서도 이런 경향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미셀린 사보이 홍보팀장은 NFBC의 특징을 말해달라는 주문에 “어린이와 여성,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많은 감독들이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소개한 그녀는 “방금 출시된 따끈따끈한 작품”이라며 8개의 테이프가 든 예쁜 상자를 선물로 건넸다. <이야기물레>(Talespinners)라는 제목의 비디오 컬렉션. 테이프당 7분 내외의 단편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최근 NFBC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20∼30대 작가들이 5∼9살 어린이를 위해 만든 작품들이지요.” 다양한 국가의 어린이들이 겪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원작소설이나 구전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시리즈라는 설명이다. <첫눈을 노래하는 장미>(Roses Sing on New Snow)는 가장 먼저 눈길이 간 작품이다. 흰색 에이프런을 단정하게 두른 중국인 소녀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담채풍의 스틸사진이 ‘피리부는 목동’을 연상시켜 신선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묵애니메이션이 어떤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폴 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일하는 소녀 메일린의 이야기다.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방에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지만 아버지는 그 명성에 대한 공을 게으른 두 오빠에게로 돌린다. 어느 날 고관 대작이 이 식당을 찾아 최고의 요리인 ‘첫눈을 노래하는 장미’를 먹어보고는 감탄해 요리사가 누구인지 묻는다. 아버지의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 불려나온 메일린에게 고관 대작은 요리법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녀는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음식의 맛은 재료나 요리법이 아닌 요리사의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랍니다.” 가부장적 인습체제를 깔끔한 이야기와 그림으로 경쾌하게 그려낸 감독의 연출력이 놀라웠다. 감독인 장유안(29)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1991년 캐나다로 이민, 대학에서 페인팅과 드로잉을 공부했다. 실크 스크린, TV세트 코디네이터로도 활동 중이라는데 주목할 만했다. 다른 작품에 대해 더 자세한 자료가 필요한 분들은 http://www.nfb.ca/talespinners를 찾아가면 된다. 인터넷으로 주문도 가능한데, NTSC방식인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미디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린이용 작품집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추세다. 미국이나 일본의 상업적이고 말초적인 작품에 아이들을 방치해온 우리로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작품을 본 어린이들이라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대로 고를 줄은 알 테니.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

`좋은` 영화 <아이 엠 샘>이 오싹한 이유

<아이 엠 샘>은 못났지만 사랑스러운 애인 같다. 7살짜리 지능을 가졌다는 샘(숀 펜)이 이끄는 대로 132분 동안 따라다니다보면, 샘의 등 뒤에서 팔을 내밀어 그를 안고 넥타이를 매듭지어주던 리타(미셸 파이퍼)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마음 깊은 곳을 만지는 따뜻함. 우린 그것을 얼마나 바랐던가. 이처럼 따뜻하고 저항하기 어려운 정서적 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잘 짜여진 영화적 힘으로부터 온다. 우선 소재가 특이하고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7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정신지체 아버지가 어머니의 도움없이 어린 딸을 키운다는 설정 자체가 공감과 연민을 끌어들일 여지가 많다. 이러한 플롯을 선명하고 풍부한 스토리라인으로 증폭시켜가면서 관객의 감정과 여유있게 승부를 벌이고 있다는 점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재능 혹은 할리우드의 노련미라고 해야 할까.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1- 입체적이고 윤기 흐르는 캐릭터 플롯 지향적인 영화가 대체로 캐릭터를 정형화하기 쉬운 데 반해서, 이 영화는 상당수의 인물들에 다면적인 입체감과 윤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샘이 있다. 무언가 심하게 부족해 보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한 영화가 모두 그렇듯이, ‘정상’적인 관객은 샘이 가진 결핍을 은근한 경멸이나 연민 혹은 재미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점차 그의 내면적 가치에 동화되고 급기야는 정상인 자신의 비정상성을 성찰하게 된다. 그저 무관심하게 스쳐지나왔을 어떤 존재들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정상과 비정상에 관한 편견 가득한 시선을 역전시키는 것,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아이 엠 샘>으로부터 감동받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샘의 캐릭터는 첫 번째 장면부터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습득된 규칙대로 익숙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 규칙 안에서라면 샘은 유능하고(!) 평화롭다. 스타벅스의 커피잔과 설탕을 느리지만 정성껏 제자리에 둔다든지, 누가 어떤 주문을 해도 항상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탁월한 선택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일을 8년 동안 싫증내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아마도 샘이 1등일 것이다. 감탄스러운 일은 또 발견된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비관하지 않고 놀랍게도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언제나 노력한다. 우리가 샘과 더불어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한다면, 오직 그가 계산대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덧셈과 뺄셈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줄 몇초간의 인내심 정도만이 필요할 뿐이다. 결정적으로 샘은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조건없는, 아니 조건을 알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조건없는 사랑은 인간의 영혼 혹은 신성의 본질이라고 한다. 지능이 낮은 모자란 샘이라고 제시 넬슨 감독은 비틀스의 목소리를 빌려 대답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야(All you need is love). 숀 펜은 샘이라는 시나리오상의 인물을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데에 각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정신지체 성인의 보디 랭귀지를 완벽하게(우리가 보기에는) 구사할 뿐만 아니라, 제한된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고결한 영혼의 느낌까지도 전달한다. 그는 <데드 맨 워킹> 이후 신뢰할 만한 배우로서, 9·11 테러를 성찰하는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 계획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양식있는 인사로서 세월이 갈수록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샘의 세계를 떠받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재미있다. 광장공포증을 가진 피아니스트 애니(다이앤 위스트)를 비롯해서 실제 장애를 가진 두 연기자를 포함한 다섯명의 친구들이 지원 그룹을 이룸으로써, 샘을 이색적이고 어쩌면 완벽한 양육자로 만들어준다. 슬픔을 이해하고 있는 총명한 아이 특유의 얼굴을 지어 보이는 루시(다코타 패닝), 잘난 상사에게 기가 눌려 있지만 속으로는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어린 비서 등 상당수의 캐릭터가 각각의 자리에서 어떤 뉘앙스를 발한다. 체면 때문에 샘을 돕게 되는 여성 변호사 리타 해리스는 샘의 세계를 가장 극적으로 대조되어 보이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 통해 <아이 엠 샘>은 가정은 소중하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모든’ 가정은 소중하다는 진일보한 생각을 전달한다. 특히 리타가 법정에서 반대편 증인을 심문할 때 “당신은 자식을 키울 때 혼란스럽고 무기력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느냐”라고 던진 질문은 우리의 도도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일격이다. 감독과 작가가 폭넓은 사례 조사를 통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장애를 가진 부모들을 거듭 만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지성이란 의미에서의 능력은 부족하지만 성격이 개방적이고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녀 양육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고결성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2- 오! 비틀스 촬영과 편집 역시 멜로적인 호소력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극영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샘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려는 듯 여백과 단절이 많은 장면 설정과 촬영, 배우와 촬영감독 사이에 카메라 이외의 모든 기계장치를 배제하기, 콘티뉴이티 커팅(continuity cutting)이라는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편집방식을 파괴하고 캐릭터의 감정적 기복을 따라가는 구상적이며 실존적인 편집 등이 한데 모여 밀도 높은 에너지를 구축하고 있다. <아이 엠 샘>은 또한 주인공 샘이 비틀스 강박이라는 설정을 빌려 영화 전편에 걸쳐 비틀스의 노래들을 멋지게 깔아놓는다. 하늘과 땅에 있는 다섯명의 비틀 역시 아마도 자신들의 음악이 소외된 인간의 실존과 사랑을 이토록 일관되게 옹호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을까. 특히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 이어 두번이나 최고의 비틀로 칭송된 조지 해리슨의 기쁨은 더 클 것이다. 그외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성공적인 대중영화에 대한 계속된 인용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레인맨>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제8요일> 등은 단순한 인용이나 추억의 차원을 넘어서 이 영화에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싹한 이유- 왜 여성의 무능에 대해서는 그렇게 잔인한가 <아이 엠 샘>에 대한 경탄은 여기까지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 그 훈훈한 이야기의 한켠으로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듯한 찬 기운도 아울러 흐르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익숙한 이야기부터. 리타 해리라는 여성 변호사가 맡고 있는 진부한 역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리타는 미셸 파이퍼의 이미지에 기댄 전형적인 스타 캐스팅인데, 조지오 알마니 옷을 떨쳐 입은 일중독자로서 한번도 좌절해본 적이 없는 출세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아들의 사랑도 제대로 받을 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하고 성질이 급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체면을 중시 여기며 권력 지향적이다. 그는 샘 앞에 눈물로 참회하고 아들과 함께 운동회에 나타남으로써 드디어 구원받는다. 지능이 부족한 샘이 스타벅스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딸을 키우려 노력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왜 육아의 어려움 속에서 일하는 여성의 ‘무능’에 대해서는 이토록 잔인할까. 교외에 사는 백인 중산층 가정에 대한 미국인들의 향수는 아직도 끈질기다. 여성이 하얀 레이스가 달린 에이프런을 두르고 남편과 아이를 시중드는 소시민 가정의 중요성을 옹호하기 위해, 일하는 여성을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가정한 채 공격하는 것은 미국의 대중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안에서도 쉼없이 저질러지는 상투적인 편견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감행하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공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 엠 샘>이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샘과 그의 친구들, 마지막에는 유능한 리타 해리스 변호사까지 가세하여 공격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바로 사회보장제도다. 아동보호소나 법원이 정하는 양부모 제도 같은 것들은 정상적인 가족 구성이 불가능한 수많은 무너진 가정들을 사회적으로 보완하려는 오랜 노력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좌파의 입지가 극히 적은 미국사회에서 이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정책가들과 소수의 인권운동가들이 험난한 정치적 역정을 통해서 달성한 것이고, 이는 미국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는 인권 국가로서의 지표다. 그런데 <아이 엠 샘>에서 샘의 가족을 고난에 빠뜨리는 어리석고 냉혹한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면, 이러한 제도에 대해 신념을 가진 백인 활동가이거나 경찰서와 아동양육시설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이다. 미국 내에서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가장 강력하게 요청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그룹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샘이 가족을 유지하는 것과 사회가 제도로서 지원하는 것은 왜 공존할 수 없는가. 문제가 있다면 제도의 융통성을 촉구해야지 왜 그런 신념 자체를 공격하는가. 영화는 심지어 그 활동가를 대머리라고 인신공격하고, 관객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샘과 루시를 강제로 떼어놓는 실루엣 속에 그들을 배치함으로써 적대감마저 부추긴다. 미국은 지금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와 보수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인 측면을 예로 들자면, 소수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철폐를 적극적인 형태로 입법화한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백인 중산층이 역차별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고 이같은 공세를 법률로 합리화하는 조치(California 209)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럴 때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가 가하는 문화적 교육은 다른 무엇보다 위력적인 정치 공세이자 이데올로기 공세가 된다. 이것이 바로 디즈니 비판자들이 줄기차게 지적하며 염려하는 지점이다(<아이 엠 샘>은 브에나비스타라는 디즈니 계열사가 배급하는 영화다).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흘러가고 보니 가슴 한구석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 우리의 샘과 루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자책 섞인 질문이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본격 동성애영화가 아닌 <로드무비>

근자의 한국영화들이 남성공동체 사회의 분열 조짐에 대한 어떤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로드무비>는 매우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영화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로드무비> 이전의 한국영화들,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은 남성공동체의 우정과 의리 그 속에 존재하는 내부의 균열을 그려내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친구>에서 해체된 남성공동체의 윤리는 비장미 어린 희생과 무모한 용기의 형태로 보상받고, 이것이 불가능해진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라이방>의 주인공들은 소박한 도망을 모색한다. 그들은 여수로 베트남으로 ‘여기가 아닌 어떤 곳’으로 떠나는데 결국 이러한 도망은 그들에게 자신의 직업적 수행과 여자를 얻는 자그마한 성취를 남겨준다. 미래의 고전도, 걸작도 아닌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는 한국사회에서 현재 진행형 중인 남성공동체의 해체에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관점을 보탠다. <공동경비구역JSA>가 조금만 더 오버했더라면 충분히 다루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동성애 코드는 <로드무비>에 이르러서 길 영화라는 장르에 견인되어 의리와 우정의 이데올로기 대신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데올로기로 슬며시 자리바꿈한다. 영화의 첫 장면 추락하는 주가 장세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석원은 자신의 ‘멤버’들이 회사를 차리면, 즉 자신이 몸담은 남성공동체가 복원되면 자신은 대식과는 다른 처지에 놓이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실제로 <로드무비>에서는 그러한 일이 영화 후반부에 일어나지만, 그는 대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성공동체로의 복귀를 포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드무비>는 ‘남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위대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면화시키는데, 그렇다면 의리대신 사랑을 택한 <로드무비>는 친구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급진적인 영화일까 토니 레인즈가 주장한 대로 오해받은 걸작이며, 미래의 고전에다 위대한 동성애영화인가 결론적으로 보자면 나는 <로드무비>가 ‘오해받지도’, ‘미래의 고전도’, ‘걸작도’, ‘위대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동성애를 소재로 했을 뿐이지 본격적인 동성애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성애=불륜 <로드무비>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대식이지만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인물은 증권 펀드 매니저인 석원일 것이다. 토니 레인즈는 <로드무비> 옹호론에서 대식이 한국적인 마초이며, 그가 한국사회에서 남성적 역할과 이미지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토니 레인즈처럼 <로드무비>를 세번 본 뒤 내가 깨닫는 것은 영화에서 전형적인 한국의 남성적 역할을 습득하고 있는 이는 대식이 아니라 석원쪽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담배를 피우자 여자가 무슨 담배냐며 화를 내고, 대식에게 거지 취급 말라며 자신에게는 많은 돌파구가 있다고 허장성세를 부린다. <로드무비>에서는 이렇듯 보수적인 이성애자 석원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동성애자인 대식과 정서적인 동일시를 일으키고 서로의 성적 성체성을 용납하게 되는 최후가 영화가 전해주려는 가장 극적인 핵심 포인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로드무비>의 내러티브를 분석해 보면, 석원은 단지 대식을 남자가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그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많은 장치들을 예비하고서야 가능하게 된다. 우선 석원은 아내에게서 버림받아야 하고, 세상에서 소외되어야 하며 그들의 사랑과 소통은 대식이 죽어갈 때 딱 한번으로 결정지어져 있다. 대체 이들이 보여주는 동성애는 왜 자신의 아내를 타자로 만들어 놓고 또 다른 여성 일주를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대상으로 확정짓는 남성 중심적인 장치를 반복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일까 석원과 대식의 육체적 소통은 또한 왜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가서 한점의 죄의식도 없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일까 어찌보면 <로드무비>에서의 동성애는 한국영화에서 불륜을 취급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한 듯 보인다. 내 생애 단 하루 특별한 날, 그것도 상대방이 바람을 피워야 비로소 면죄부가 가능해지는 위반의 행동. 결국 대식은 석원과 애인 사이로 변화하는 지점에서 죽어버리고 마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로드무비>는 동성애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금기의 행동인지 얼마나 하면 안 되는 행동인지 얼마나 많은 면죄부를 받아야 가능한 위반인지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내 생애 단 하루 특별한 불륜이 일부일처제에 대해 질문하기보다 이미 일부일처제의 경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식은 이성애자투성이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포위 혹은 격리된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손길이 없는 자연의 품으로 가야만 비로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벗어날 수 있다. 감독은 대식에게 도시장면에서는 닫힌 미장센으로 바다와 산에 이르러서는 열린 미장센을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면 대식은 포장마차신이나 감옥신에서 격자형의 프레임에 겹겹이 둘러싸여져 있으며, 낯선 남자와의 화장실 정사신에서도 그러한 폐쇄감은 비슷하게 드러난다. 전형적인 길 영화에서 그러하듯 인위적인 도시와 자연의 대비를 통해 대식의 인간성은 담보되며 그의 이동은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색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동성애자이기 앞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고민하고 아파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바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석원이 자신을 떠났다고 절망하는 순간, 화장실에 가서 낯선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일까 이 장면은 대식이라는 캐릭터의 비일관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점이다. 물론 좀더 호의적인 시각으로 대식의 행동의 동기를 추정할 수는 있다. 대식이 사랑의 아픔으로 자신을 자해하는 것이거나 석원에 대한 애증이 좀더 안전한 낯선 이에게 투사된 것이라는 등등…. 그러나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는 장면과 대식의 정사를 교차편집한 이 장면의 분위기는 대식의 성적인 긴장감이 대식의 내면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의 동기 누락은 그것이 고의가 아니더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로드무비> 속의 동성애를 섹슈얼리티 관점보다는 섹스의 관점에서 사고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이 장면은 석원으로 하여금 대식이 동성애자임을 알아차리는 장치로 배려된 것이기도 하다. 대식의 동성애는 그와 동거하는 사람조차도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그의 성 행동을 목격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생물학적인 것이다. <로드무비>가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전형성은 창녀는 창녀 같은 행동을 하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데올로기와 감정의 심한 균열 이러한 점에서 <씨네21>의 감독과의 대담에서 <로드무비> 안에 내부의 시선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대식과 석원을 둘러싼 시멘트 공장이나 수산시장 등의 남성적인 공간이 무성적이라는 서동진의 주장은 매우 정확하고 예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로드무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들여 찍은 투숏과 타이트한 클로즈 업을 통해 두 피사체를 내부가 아닌 외부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심정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잡아내려 든다. 더 나아가 이 영화의 많은 화면은 다양한 탈것들의 속도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석원이 손목을 그었을 때 석원을 둘러싼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난폭한 속도 감각, 대식과 석원이 탄 기차나 이들이 얻어 탔던 각종 차들의 속도 감각, 차 배달을 나선 일주가 질주하던 오토바이의 속도 감각 등등. 카메라가 동일시하는 이들 현란한 이동수단들의 속도 감각은 스크린에 두드러진 생동감과 유목의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아무런 이동수단도 갖지 못한 떠돌이 대식과 석원의 맨 발걸음은 대체 어떠한 느낌이었을까 대식과 석원의 맨 발걸음, 그것은 <로드무비>가 길 영화로서 가지는 핵심적인 장르적 공식임에도 불구하고, 바닷가 개펄에서는 석원이 대식을 들쳐업고 뛰는, 주인공의 맨발의 걸음걸이와 똑같은 느낌이 나는 핸드헬드 숏은 너무나 짧게 그친다. 그래서 <로드무비>가 표방하는 장르인 길 영화가 매우 자기 통찰적이고 내면 지향적인 장르인 데 비해 영화 <로드무비>는 외부 시선과 시각적 연출이 두드러지고 주인공 세부적인 동기가 상당히 누락되어 있는, 오히려 멜로 장르의 속성을 강하게 풍기는 영화로 비친다. <로드무비>는 이성애자를 불편하게 하기보다 이성애자를 감동시키려는 영화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드무비>가 동성애라는 소재를 한국영화 속에 끌어들인 파격성, 또한 스타일리시한 화면, 그리고 이 가운데 드러나는 감독의 진정성과 자신의 인물에 대한 애정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중에 떠도는 평론의 상당 부분처럼 이 영화를 ‘동성애=이성애와 똑같은 사랑’ 혹은 ‘한국사회에서 좌절된 동성애’ 등의 코드에서 읽어낸다면 그것은 영화를 의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로드무비>는 영화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와 영화가 전해주는 감정적인 속내가 따로 국밥인 매우 균열이 심한 영화다. 아마도 <로드무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균열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 남성들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의 균열과 정확히 일치하는 어떤 점을 잉태하고 있는 것 같다. <친구>에서 <로드무비>까지 남성공동체의 와해를 다루는 대한민국의 영화들 속에는 이 무한경쟁의 자본주의하에서 그 위치가 어떠하든 우리간에 차별은 없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그 소망이 비켜갔을 때의 도망심리, 그렇게 함으로써 경계 자체를 누가 만들었는가 질문하고 전복하기보다 ‘너와 나는 같다, 아니다’라는 질문 속에서 끊임없이 빙빙 도는, 어떤 폐쇄회로의 순환을 거듭하려는 욕망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드무비>는 하나의 징후이다. 이것이 바로 토니 레인즈와는 영화평론가라는 공통점 외에는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나눌 수 없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동양인이고 황인종이며, 간신히 이성애자가 된 어떤 여자평론가 (혹은 여성평론가)의 <로드무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기도 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정승화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연재 중이던 인터뷰 원고 말미에 다소 뜬금없이, ‘추신’으로 이렇게 썼다. 군 복무 시절 1군사령관일 때 잠깐씩 마주친 그는 표정이 매우 온화했다. 박정희가 사망하고 계엄사령관에 오른 그는 민주화운동 세력에 ‘군부의 희망’으로 비치다가 전두환의 하극상 신군부에 피체, 보충역 2등병으로 강등되고 실형을 살다가 88년 대장 계급을 회복하고 97년 무죄가 확정된 뒤 민주당 상임고문 등을 맡았으나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군부의 희망’이 필요하던 시기는 아주 짧았다. 그때 희망이 실현되었다면 5·16에 의해 ‘군사적’으로 왜곡된 한국 현대사가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었을까, 라고 묻는 것은 부질없지만, 어쩔 수도 없다…. 세계사에 유례없이 가혹했던 6·25 전쟁을 치르고도 ‘대한민국 군인’이 마음속에서 우러난 존경을 받기 힘들게 된 매우 희한한 남한 상황은 6·25 전쟁의 ‘형식’이 유감스럽게도 민족상잔이었고, 무엇보다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한국 현대사 대부분을 ‘부조리 연극화’했기 때문이지만 지켜야 할 나라가 엄연히 있는 한 평생 군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상무정신이 스포츠 정신으로, 스포츠 정신이 연예인 정신으로 변해가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육체는 정신을 유지할 뿐 아니라 ‘존엄을 구체화’하는 매개인 까닭이다. 이 책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훌륭한 답이다. 어린 시절은 그렇다 치고 1947년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육군학교 전신) 5기로 입교한 뒤 50년 6·25와 60년 4·19와 61년 5·16, 79년 10·26과 12·12 등 현대사의 ‘정치적’ 사건을 성실한 ‘군인’으로 치르고 당한 그가 들려주는 생애 회고는 ‘올바른 일상’의 군인상을 복원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왜곡된 자서전 개념 또한 이 책을 통해 크게 교정된다. 정리-대필자 이경식은 영화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시나리오 작가답게 담담하고 찬찬한 문체로, 매우 절묘하게 육체 일상의 존엄을 형상화, 딱딱하고 공식적인 ‘자서전 틀’을 감동적인 생애 문학의, 파란만장한 결로 승화시킨다. 저런저런 병신, 육참총장이…. 직업군인으로 전두환과 악연이 있었던 아버지는 12·12사태에 대해 그렇게 논평하셨다. 하지만 정승화가 ‘정치적’이지 않았던 것은 매우 다행이다. 그랬다면 정말 ‘정치군인’밖에 알지 못했을 것 아닌가. 한심할 정도로 정치에 무지한, 그러므로, 훌륭한 군인, 대중에 알려져야 마땅한 보통군인( 5성장군) 상이 이 책에 완성되어 있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

연속기획 10부작 - 미국

일요일 밤 11시30분 수잔 서랜던과 팀 로빈스, 마틴 신 등 굵직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부시 미 대통령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배우들이 자신의 이해득실과 상관없는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두께’가 만만치 않음을 절감한다. 한편 할리우드 반대쪽에서는, 발리 폭탄테러 사건으로 입지가 한결 나아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조지 부시에게는 세계 경제의 동반 추락을 염려하는 셈 빠른 증권가 사람들의 우려조차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은 제쳐두고라도. 대체 어느 쪽이 ‘진짜’ 미국일까. 패권주의 국가의 면모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부시의 행보와 대중스타들의 성숙한 모습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다. 그 어떤 나라보다 가깝고, 그래서 손쉽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언제나 이처럼 극단적인 두개의 얼굴로 다가오곤 했다. 9·11 테러 1주년이 되던 날, 미국을 좀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조명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의 ‘연속기획 10부작 - 미국’이 그것이다. 이 시리즈는 시작부터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는데, 첫편인 ‘9·11 그후’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소재를 과감히 다뤘기 때문이다. ‘9·11 그후’는 아프가니스탄에 한바탕 보복을 한 뒤에도 여전히 전쟁 중인 미국사회 구석구석을 보여줬다.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치소에 갇힌 중년 남성을 비롯해, 미국의 무슬렘들은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변변히 항의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미국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인권은 ‘애국주의’라는 미친 바람의 횡포 앞에 간단히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테러 1주년 관련 방송들은 끊임없는 추모 행렬과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인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쳤지만, 은 9·11 테러가 낳은 더 무섭고 일상적인 폭력의 실상을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이어진 2편 ‘자유의 여신상’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수많은 이들이 어떤 경로로 신대륙에 흘러들어 살아왔는지 짚어본 ‘미국 이민사’였다. 현재 미국 내에 존재하는 ‘갈등의 뿌리’가 어디인지 더듬어본 것이다. 3편 ‘전쟁과 평화, 그리고 진실’에서는 제3세계를 향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간섭과 제재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가 제시됐다. 미국 안팎의 ‘갈등’에 주목한 시리즈 전반부에 이어, 4편부터는 몇개의 키워드를 통해 미국사회를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제작팀은 미국인들의 생활과 정서에까지 영향을 끼친 총기 사용문제(4편- 총의 나라)나 교육 또한 자본주의의 논리로 풀어내는 미국인들의 공교육 해법(6편-공립학교의 개혁열풍) 등을 밀도있게 담아냈다.오는 일요일에 방송되는 8편 ‘은막 위의 전쟁 - 할리우드와 펜타곤’에서는 2차대전 이래 전세계에 ‘미국의 이념’을 꾸준히 전파해온 할리우드영화들과 막후에서 이루어진 펜타곤의 할리우드 지원정책을 다룰 예정이라 한다. 미국 시리즈의 미덕은 기존 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상을 풍부한 자료와 생생한 현지취재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9·11 그후’나 ‘공립학교 개혁의 열풍’이 현재 미국의 이슈를 파헤치는 고발성 다큐멘터리라면, ‘자유의 여신상’이나 ‘총의 나라’는 미국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 다큐멘터리다. 시리즈 한편한편이 한 가지 주제로 완결된, 살아 있는 미국학 교과서인 셈이다. 대체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미국을 ‘상종 못할 나라’로 폄하만 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도 기쁜 일이다. 제작팀은 현재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나 이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처럼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의 미국을 만든 주역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미국에 무언가 기대하거나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 일군 자신의 재산을 남몰래 기부하는 이들과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때문일 것이다(5편- 시민의 힘). 전쟁의 기운이 세계를 위협하는 오늘,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조지 부시의 미국이 아니라 수잔 서랜든의 미국이다.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

표민수 PD-노희경 작가가 말하는 <고독>(1)

“감독님, 요즘 사람 얼굴이 아니야.” 연이은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표민수 감독은 평소보다 족히 4, 5kg은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하는 노희경 작가 역시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닌 듯했다. “영혼이 아니라 몸으로 일해서 살이 빠지는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하는 이들은 정말로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아프게” 새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바보같은 사랑> 이후 공식적으로는 3년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지만 끊임없는 대화와 고민을 나누었던 이들이기에, 두 사람과의 인터뷰는 기자의 질문에 PD와 작가가 답하는, 흔한 인터뷰 형식에서 이내 벗어나고 말았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나” 기자보다는 서로를 향해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 끼어 잠시 엿들을 수밖에. <바보같은 사랑> 끝나고 햇수로 2년 만입니다. <고독>은 언제부터 고민된 이야기였나요. 표민수: 그 사이 저는 이금림 작가와 <푸른 안개>를 했고 노희경 작가는 이종한PD와 50부작 <화려한 시절>을 끝냈어요. 작품을 안 해도 늘 서로 작품 모니터해주고 만나고 전화하고 그러니까 고민의 시작점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말하기 어렵네요. 4월에 기획회의에 들어갔고 노 작가는 <화려한 시절> 끝나자마자 쉴틈없이 대본쓰기를 했어요. 보통은 대본을 거의 마친 상태에서 촬영이 들어가는 편인데 이번엔 좀 늦은 편이에요. 다른 팀들에 비하면 빠른 편이지만 8회 대본 나올 때 4회 촬영 나가는 정도죠. 바깥나들이 뒤 서로에게 변화가 있나요. 표민수: 있어요. 옛날보다 덜 싸워요. (웃음) 신변상의 변화라면 제가 KBS를 나와서 프로덕션에서 제작을 하게 된 것이고. 글쎄… 많이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고독’이란 단어가 의외로 생소하고 낯설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노희경: 고독이란 말, 어느새 문학적으로 쓰이는 걸 제외하면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이잖아요. 그러나 사랑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고독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온갖 편견덩어리의 세상에 맞서서 싸울지라도 내 사랑을 고독하지 않게 만드는 것. 워낙 마니아층이 두텁게 형성된 PD와 작가라 오랫동안 지켜보던 시청자들에 대한 부담이 클 것 같은데요. 표민수: 강장수 촬영감독이 하루는 농담으로 “어! 이렇게 찍으면 <거짓말> 3회 24신에 나온 컷과 같지 않나요” 뭐 이렇게 물을 것 같다고 하던데요. (웃음) 워낙 전작들을 우리보다 열심히 보고 생각하고 느낀 마니아들이 많아서인지 더 잘 만들어야 하고 반복되지 않으려고 하는 부담은 있어요. “말은 중요하지 않아요” 경민(이미숙)과 영우(류승범)와 진영(서원)의 관계가 <거짓말>의 성우(배종옥), 준희(이성재), 은수(유호정)와 닮았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노희경: 좀 달라요. 아무리 유부남이라는 제약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성우와 준희가 팔짱끼고 다닌다고 이상하게 보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영우와 경민은 15살이나 차이나는, 그것도 여자가 연상인 관계예요. 보기에 따라 엄마 같을수도, 이모와 조카 같을 수도 있는 거죠. 준희와 성우가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였다면 영우는 경민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어요. 주고받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렇지 못하는 건 또 얼마나 비극이에요. <거짓말>은 사랑만 고민하면 되었지만 <고독>은 고민할 게 너무 많아요. 영우에게는 그 사랑을 반대하는 가족들이 있고 경민에겐 자식도 있지 미혼모라는 입장도 있지…. 표민수: 그렇죠. 덥석 받아들이자니 뻔뻔하고 가만히 지켜보자니 미안한. 경민은 텅 빈 고목 같아요. 겉에서 보면 멀쩡한데 속을 베어보면 텅 빈. 노희경: 그리고 은수는 준희가 아니라면 성우와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었지만 진영은 영우가 알기 전부터 경민을 알아왔고 자신의 삶의 우상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를 뺏긴 거라는 이중의 아픔이 있어요. 경민 역시 아끼는 후배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있구요. <거짓말>보다 인물들의 감정은 좀더 복잡한 편이죠. <고독>은 어떤 드라마인가죽음 앞에서 싸우며, 사랑하며 독일 뮌헨에서 이미지컨설팅을 공부하고 돌아온 영우(류승범)는 제주도로 떠난 자전거여행에서 우연히 경민(이미숙)을 만나게 된다. 어딘가 낯이 익은 이 여자. 바로 몇년 전 제주에서 갑작스런 폭우를 피하기 위해 신세를 졌던 별장의 주인이었던 여자다. 쉽사리 빈틈을 보이지 않지만 따뜻하게 미소지을 줄 아는 경민을 보며 영우는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고 “앞으로 만나고 싶다”는 당돌한 프로포즈를 건넨다. 그러나 경민은 영우의 프로포즈를 어린 친구의 치기어린 장난 정도로 치부하고 그가 건넨 전화번호 적힌 쪽지를 휴지통에 버린다. 영우는 회사중역으로 일하다가 퇴직하고 그 회사의 경비가 된 아버지 민 선생(주현)과 매일 여자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바람둥이 형 영철(최성민), 그리고 아버지 친구의 딸이자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자란 진영(서원)과 함께 살고 있다. 진영의 오빠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아버지가 퇴직금을 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낙향하게 되고 진영은 평소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던 민 선생 집에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민 선생은 구김살 없이 밝고 착한 진영이 영우의 짝이 되길 바란다. 이런 생각은 진영도 마찬가지. 친구처럼 생각했던 영우가 서서히 좋아지는 것이다. 유학을 마친 영우는 진영이 일하는 CI회사에 입사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사로 있는 경민과 다시 한번 조우한다. 경민은 앞으로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지만 영우는 “당신이 40이 되든 50이 되든, 내가 사랑하는 한 당신은 여자”라며 자신의 사랑에 한치도 흔들림 없는 태도를 취한다.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생긴 딸 정아를 홀로 낳아 키우며 어느새 “사랑도 귀찮아질 나이”가 되어버린 경민. 무미건조한 휴대폰 벨소리만큼이나 변화없던 그녀의 삶이 영우로 인해 파문이 일 무렵, “잊어주는 게 가장 큰 복수”라고 생각해왔던 정아의 생부, 은석(홍요섭)이 귀국하게 된다. 경민에게 자신과의 사이에서 생긴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석은 법적으로 정아의 양육권을 주장하게 되고 이런 가운데 경민은 병원으로부터 전이성난소암이라는 통고를 받게 된다.이제 경민은 쉽게 인정받지 못할 사랑과 죽음을 향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우는 그런 그녀를 ‘고독’하지 않게 할 젊음과 사랑이 있다. <고독>의 캐스팅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울려 전혀 새로운 맛을 내는 퓨전요리 같다.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이미지의 류승범이 이미숙과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등장한다고 했을 때 쉽게 그림을 그려내지 못했던 시청자들이라도 방송을 통해 묘한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그들과 이미 만났을 터이다. 또한 <나쁜 남자>를 통해 다소 어두운 분위기로 기억되었던 서원 역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로 밝고 명랑한 진영 역을 소화해내고 있다. 강장수 촬영감독, 이용호 조명감독, 최완희 음악감독 등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에서 작업을 해왔던 오랜 스탭들이 다시 뭉친 <고독>은 1회 시청률이 4%대였던 <거짓말>과 <허준>과 맞붙어 “화면조정시간”보다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바보같은 사랑>의 악몽을 깨고 첫회 시청률 8.4%를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10월21일 첫 방송되었고 매주 월·화요일 밤 9시50분부터 70분 동안 20부작으로 방영된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송지나 작가가 말하는 순수한 `이야기`로서의 <대망>

<러브스토리> <카이스트> 이후 꽤 시간이 흘렀다. 그간 어떻게,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나. - 꽤 시간이 흘렀다고 정말 그럴 리가. 바로 얼마 전까지 <카이스트>를 쓴 거 같은데…. 그동안 뉴질랜드로 이사를 했고 정착을 하느라고 분주했던 기간이 있었지만 언제나 글을 써야 한다는 독촉에 시달리며 지냈다. <대망>을 끝내면 정말로 다음 일에 대한 독촉을 받는 일 없이 지내고 싶다. 다만 몇달 만이라도. ‘대망’이란 제목으로 기획이 들어간 게 3년쯤 되었던가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나. → 원래 김종학프로덕션에서 방송사와 계약을 해놓았던 작품이다. 내가 합류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고. 솔직히 원래 방송사와 계약이 되었다는 당시의 시놉시스는 읽어보지 않았다. 현대물이고 <장발장>과 같은 유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러나 결국 현대물이 사극으로 바뀌게 되었다. 근현대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를 통해서 거의 다 해버렸기 때문에 시대극으로는 더 쓸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오래 전을 배경으로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더 미래를 배경으로 SF를 쓰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도 호응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웃음) <카이스트>는 후배작가들과의 작업으로 관심을 끌었다. <대망>은 어떻게 작업하고 있나. →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쓰고 있다. 임정희라는 후배가 합류해서 자료 부분을 도와주고 있다. 김종학 감독과 오랜만의 작업이다. 옛 친구를 만난 편안함도 있을 테고, 그 시간 동안 서로 변한 점에 서먹하고 삐거덕거리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 서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김종학 감독뿐 아니라 촬영, 편집, 녹음,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년 가까이 함께 작업했던 분들이라 친정집에 돌아와 물 만난 물고기 같다. 그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장인들이다. 장인들 앞에 어느 한곳 허술한 대본을 내놓을 수가 없어서 사실 작업이 몇배 힘들다. 그러나 나의 대본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해주는 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기쁨은 해보지 못한 이들은 모를 것이다. 물론 특정한 시대상황을 규정짓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18세기 조선 경제에 대한 조사도 했겠고, 마키아벨리 등 정치·경제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고 들었다. → 처음에는 일년 가까이 온갖 자료들을 섭렵했다. 전공 교수님께 자문도 구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느라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 던져버렸다.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와는 달리 이번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있었던 소재들을 이것저것 이용하기는 하지만, 고증 따위는 할 생각도 없다.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를 쓸 때에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서 마음껏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만든 인물들을 충실히 따라가고 싶다. 사극적 대사쓰기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 → 처음에는 사극적 대사라는 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드라마를 통해 알려져 있는 사극투는 단지 드라마에서 일상화시킨 것뿐이지 아무도 그 당시에 어떤 투로 이야기했는지 알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민을 다 떨쳐버렸다. <대망>에는 사극투와 현대투가 마구 섞여 있다. 그 인물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현재와 과거의 말투를 아무거나 다 사용할 수 있어서 오히려 재미있다. <모래시계>의 인물들이 조금은 어둡고 무언가에 눌려 있는 느낌이었다면 재영이나 동희 등의 캐릭터는 밝고 좀더 요즘 젊은이들에 가깝다. 또한 위엄있는 여진마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구식의 그것이 아니다. → 이번 작품의 주인공들이 전 작품의 주인공들보다 더욱 밝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 나 스스로 그동안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작가는 작품 하나를 마치면 그만큼 변화된다. 일년 넘게 <카이스트>를 쓰면서 젊음의 실체에 더욱 가까워진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이번 작품에 투영됐을 수도 있다. 결국 철없이 착하기만 하던 재영을 바꾸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다. <모래시계>도 그렇고 여전히 앞선 세대에 대한 분노를 풀지 못한 것인가 → 전 세대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은 없다. (웃음) 나에게 전 세대는 주어진 상황일 뿐이다. 내 작품의 인물들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반응해가며 성장한다. 장애가 없는 인생은 배우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내 주인공들도 언제나 수없는 장애에 부딪힌다. 이번에는 시영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봤다. 선과 악의 기준 같은 것에는 무감한…. 어쩌면 가장 현대적인 특성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 대해 허무하고 냉소적이어서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기보다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쪽이다. 현재 집필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중점적으로 펼쳐지게 되는가. → 2주분의 방송이 나가는 동안 드라마가 어렵고 생략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에 대해 변명하자면… 요즘 들어 드라마들이 점점 더 너무나 친절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도대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복선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중요한 것은 몇번씩이나 반복하여 설명하며 스토리는 간단명료하다. 물론 그처럼 아무 생각없이 즐기며 보는 드라마도 필요하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런 드라마는 쓰는 것 자체가 재미없다. 사실 실제의 인생이란 것은 언제나 돌발사태처럼 아무런 설명없이 부분부분 파편들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그런 파편들을 모으고 해석하고 판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쉬운 드라마처럼 모든 사건들을 일일이 말로 자막으로 혹은 회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난 그런 파편들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재미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며 시청자들이 어떻게 숨은그림찾기를 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느껴줄 것인지를 상상하고 기대하는 일이 즐겁다. 그런데 제작팀 내부에서조차 너무 어렵다는 압박이 심해져서 앞으로의 이야기는 좀더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가야 할 것 같다. 궁극적으로 <대망>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 이번 드라마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사는 것인가 하는 거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잘살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다. 휘찬이처럼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하고, 시영이처럼 너무나 세상이 재미없어서 조금이라도 자극이 되는 것을 찾아 헤매기도 하며, 사람이 좋아 사람에게 발목이 잡혀 재영이처럼 내 주변 사람이 행복해야 비로소 내가 행복해지기도 한다. 의술을 베풀면서 비로소 나도 이 세상에 살아도 되는 인물이구나 생각되었다는 여진이도 있고, 소유하는 것보다는 나눠주는 것이 마냥 즐거운 동희도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보면서 어느 것이 정말 잘사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더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 나의 몫을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지금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항해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 밤마다 들어가 확인하는 인터넷의 시청자 의견이 지금으로서는 이 배의 돛에 불어주는 유일한 바람이다. 백은하 lucie@hani.co.kr <대망>의 인물들운명의 여인은 형과 결혼하고… 보통 사극이 그러하듯, 회당 30명 이상이 등장하는 <대망> 역시 흘깃 봐선 좀체 캐릭터들간의 관계와 사건들을 파악하기 어려운 드라마다. 극을 중심적으로 이끌어가는 재영(장혁)은 노비였던 분이와 주인인 박휘찬 사이에서 난 서자. 다소 어리버리하고 실수투성이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착하고 오지랖 넓은 성품의 소유자다. 아버지의 계략으로 본의 아니게 친구들을 죽음으로 내몬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개성 상인 최선재 패에 합류하게 되고 최선재의 지도 아래 대상인으로 성장한다. 재영의 형인 시영(한재석)은 유 부인(견미리)과 박휘찬 사이에 난 아들로 중국인 사부 단가천으로부터 전수받은 화려한 무술을 선보인다. 살인을 하고도 아무 느낌이 없을 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지만 동생의 여자인 여진을 보는 순간 더운 피가 돈다. 재영의 운명의 여인인 여진(이요원)은 한성판윤 윤 대감의 딸로 어린 시절부터 의술에 눈을 떠 집안 몰래 아픈 이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 재영의 탈골된 팔을 치료해주었던 인연으로 만나 신분을 뛰어넘는 정을 나누지만 결국엔 재영의 형인 시영과 혼인하게 된다. 여자로서의 답답한 삶이 싫어서 남장을 한 채 살아가는 씩씩한 여자 동희(손예진)는 최선재의 딸로 재영에 대한 우정을 점점 사랑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시영과 재영의 아버지인 박휘찬(박상원)은 타고난 사업가이자 야심가로 아들에게도 차용증서를 쓸 만큼 이재에 철두철미한 인물. 출신성분이 평범한 중인이지만 사재기, 매점매석 등의 갖은 술수와 어리석은 양반들을 등에 업고 거부가 된다. 재영의 생모인 분이는 아들을 아버지 휘찬의 집에 맡긴 뒤 노비의 이름을 버리고 조선 최고의 기생 단애(조민수)가 되어 사우곡이라는 기방을 운영한다.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선재를 통해 위기에 처한 아들을 도와가며 재영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 개성 상인 최선재(박영규)는 재영에게 진정한 상인으로서의 길을 알려주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 박휘찬과 여러모로 대비를 보인다. 남다른 무술실력을 가진 중국인 부녀 단가천(정석용)과 단지연(유선)은 시영으로 인해 고초를 겪지만 자신의 딸이 시영을 사모함을 느낀 단가천은 시영의 손에 죽음을 맞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묵가촌의 7대 제자로 받아들인다. 산 속에서 우연히 만난 분이의 산파가 되어 재영을 받아낸 인연으로 분이와 아릿한 정을 나누었던 무사 이수(박정학)는 이후 떠돌이 검객이 되어 시영과 재영 그리고 단애 주변을 맴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대만 뉴웨이브 총결산. 부산영화제 상영작 13편 미리보기(2)

청소년 나타 靑少年 na咤 1992년 ┃ 106분 ┃ 감독 차이밍량 비가 내리는 타이베이의 밤거리, 십대 소년 아체는 공중전화 동전을 털어 오락실로 향한다. 같은 밤 무기력한 소년 강은 방에서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맨손으로 유리창을 깨뜨린다. 차이밍량의 장편데뷔작 <청소년 나타>는 우연히 거리에서 조우한 이 두 아이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혼잡한 횡단보도 앞. 아체는 택시기사인 강의 아버지가 잔소리하는 데 화가 나 사이드미러를 박살내고, 옆자리에 있던 강은 오토바이를 탄 아체의 돌발적인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리고 강의 은밀한 동경과 복수가 시작된다. 차이밍량은 <하류> <구멍> 등을 함께한 배우 이강생이 강처럼 재수생이었던 시절, 거리에서 만난 이강생과 이 영화를 찍었다. 그만큼 <청소년 나타>는 배우와 감독이 느끼고 체험한 그대로의 타이베이를 반영하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속했다는 든든한 의지도 없고, 몇년 뒤를 기다리게 하는 희망도 없어서, 아이들은 부엌바닥에 고인 물처럼 서서히 부패해갈지도 모른다. ‘나타’는 부모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중국신화 속 젊은 신의 이름. 차이밍량은 그 신의 방황에 기대 정체된 한 도시에서 이야기 하나를 추출해냈다. 보도 寶島大夢 1993 ┃ 80분 ┃ 감독 황밍추안 외딴섬 군부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장교 아키는 상관을 살해하고 달아난 일병 이산의 흔적을 뒤쫓다가 이상한 인물들과 마주친다. 이산이 자기 아들이라며 헤매다니는 중년 남자, 이상한 매력으로 군인들을 끌어들이는 여자, 누군지 모를 총잡이 보도. 여기에 죽은 대위가 남긴 기묘한 그림들은 아키의 꿈속에까지 파고들어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서로 떨어져 있는 다섯 사람은 환상 속에서 혹은 현실 속에서 얽히기 시작한다. <보도>는 <보도대몽>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현실과 꿈이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조그만 섬에 갇혀 있는 군인들의 심리를 파헤치는 영화다. 이 영화를 연출한 황밍추안은 미국에서 광고로 경력을 쌓았으며 <보도>에서 독특한 영상의 흐름을 선보였다. 고독클럽 寂寞芳心俱樂部 1995년 ┃ 114분 ┃ 감독 이치엔 말로 내뱉지 못한 절망은 그만큼 더 밀도가 높아진다. 바람난 남편과 치매걸린 시어머니를 둔 중년 여성 첸. 그녀의 절망이 바로 그런 경우다. 욕정마저 식어버린 결혼과 단조로운 직장생활에 지친 그녀는 단정한 외모의 신입사원 론을 보며 활력을 얻지만, 론은 사실 게이다. 결국 첸의 작은 기쁨은 희극과 비극이 섞인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고독클럽>은 많은 캐릭터에게 비교적 공정한 비중을 배분하는 영화다. 그들은 모두 삶을 지루해하며, 영화 속에서 제각기 혼자 감상에 빠지는 시간을 맞는다. 그 순간을 끌어모아 눈물섞인 유머로 마감하는 <고독클럽>은 사소한 절망을 비웃지 않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춘화몽로 春花夢露 1996년 ┃ 123분 ┃ 감독 린청셩 쿤쳉은 부모와 아내, 어린 딸과 함께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아내가 둘째아이를 낳다가 죽자 쿤쳉은 도시로 나가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모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아이들도 제법 자라난 어느 날,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쿤쳉의 도시생활은 잠시 위기에 빠진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데, 쿤쳉은 다시 흙을 뒤집어써야 하는 밭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다가 극영화로 접어든 린청셩 감독은 그 자신이 농촌 출신이었다. 그 때문인지 가족을 버려뒀다는 죄책감과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이 충돌하는 고민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어둠속의 빛 黑暗之光 1999년 ┃ 102분 ┃ 감독 장초치 캉이는 방학을 맞아 타이베이에서 고향 킬룽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교통사고로 맹인이 된 아버지와 정신지체아 남동생, 새어머니가 주민 대부분이 맹인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본토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같은 건물에 이사온 아핑은 곧 캉이와 사랑에 빠지지만, 갱조직 보스의 아들 아림은 그들을 질투해 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 영화의 감독 장초치는 허우샤오시엔의 조감독을 거쳤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갱조직 사이의 칼부림이 있다고는 해도, <어둠속의 빛>은 장애가 있는 아마추어 배우들을 진실하게 포착하는 빈틈이 더욱 빛나는 영화다. 몽환부락 夢幻部落 2002년 ┃ 93분 ┃ 감독 청원탕 날개달린 우체부가 전해준 엽서. 와탄은 공사 현장에서 추락해 다리를 절게 되던 날 잃어버린 지갑이 10년 만에 시멘트덩이 속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그 지갑 속에서 오래 전 떠나버린 아내의 사진을 발견하고선 그녀의 흔적을 찾지만 홀로 돌아온다. 일식집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몸을 파는 청년 샤오모는 밤마다 자기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녀의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왠지 와탄의 기억과 겹치는 면이 있다. <몽환부락>은 청량한 녹색으로 처음 반을, 그늘진 녹색으로 나머지 반을 색칠하는 영화다. 잃어버린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 영화는 드라마를 알기 전에 먼저 색으로 마음을 두드린다.문석 ssony@hani.co.kr / 김현정 parady@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