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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즐거운 아저씨들의 변두리 로큰롤, <라디오 스타>

작가 스티븐 킹은 이야기는 플롯을 짜나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했고,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돌 안에 갇혀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작업이라고 했다. <라디오 스타>는 그런 의미에서 억지로 짜맞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독, 작가, 배우 안에 갇혀 있는 이야기를 발굴한 것이다. 변두리성을 무대 한복판으로 밀어 올려온 이준익 감독은 물론, 라디오 작가 출신인 최석환 작가, 그들 자신의 한때의 영락의 삶을 연기하는 듯한 박중훈, 안성기의 이야기이다. 골자가 되는 이야기 줄기는 1988년 가수왕 출신으로 이제는 미사리에서 지나간 영광의 추억과 자기 연민을 핥고 있는 최곤(박중훈)이 아직도 그 곁을 떠나지 않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와 함께 지방 방송국 DJ로 간다는 것이다. 주인공들 못지않게 조역들도 변두리적인 인물들이다.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PD를 맡은 강석영(최정윤)은 아이돌 스타를 씹은 뒷담화가 방송사고로 연결돼 원주에서 영월로 쫓겨왔고, 영월지국장(정규수)은 원주와의 통폐합만을 기다리는 사내다. 강원도하고도 영월이라는 변두리도 그렇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오래전 살해당한(영화에서 흐르는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 라디오라는 매체 자체도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낡은 건 소재지 이야기가 아니다. <라디오 스타>는 DMB 시대에도 라디오를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다매체 시대에 사라져가는 옛 매체의 향수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가깝다면 <라디오 스타>의 이야기 방식은 마당극의 구조일 것이다. 다방 종업원, 철물점 주인, 백수, 꽃집 총각, 농협 직원 등 변두리 이웃들이 주파수 안으로 들어오며 관객도 덩달아 함께 따라들어가 놀게 되는 열린 원형 무대의 구조. <황산벌>의 인간장기판이나 욕설 대결, <왕의 남자>에서 궁궐 안의 마당극처럼 영월 사람들과 주인공들은 마당을 펼치고 노는데 그 마당이 주파수라는 게 다를 뿐이다. 그조차도 주파수 안에 가둬두기보다 방송 100회 기념 공연, 인터넷으로 방송 다시 듣기, 청취자 홈페이지 등으로 무대를 확대한다. 그럼으로 영화는 라디오 방송의 일회성과 주파수가 퍼지는 범위의 국지성(영화 속 영월방송은 당연히 전국 방송이 아니다), 그리고 예쁜 엽서 전시회류의 향수를 벗어난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황산벌>의 일부, <왕의 남자>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던 여자없는 뒤틀어놓은 연애담이다. 물론 이 연애란 순수한 우정에 훨씬 더 가까운 점액질없는 형태다. <황산벌>에서 김유신과 계백,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의 방식과는 또 다른 두 남자의 이야기다. <황산벌>이 계백의 목을 치게 하는 장면, <왕의 남자>가 공길과 눈먼 장생이 줄 위에서 노는 장면에 이르는 비극적인 연애담이라고 본다면 <라디오 스타>는 18년간 이상한 의존관계에 있던 두 남자가 자신들의 관계를 갱신하게 된 사연을 말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18년 전 유성처럼 단 한번 번쩍거리고 사라진 최곤의 가수왕 수상장면을 보여주고 바로 현재로 도약한다. 그 뒤로 영화는 과거를 참조하지 않고 18년간 꾸준히 시간에 의해 침식당한 최곤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고 일방적인데 최곤은 학대하는 역을 맡고 박민수는 그 학대를 응석의 언어로 번역한다. 심지어 박민수는 최곤이 때린 미사리 카페 사장에게 자기를 때려달라고까지 말한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를 지탱시키는 사랑의 논리는 겉으로 봤을 때는 피학과 자학의 오묘한 공존이다. 그 공존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최곤이 ‘나는 박민수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의존성을 학대의 형식으로 연기하고, 민수가 ‘최곤은 내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지 않으면 담배도 못 피울 인간’임을 알면서도 그걸 복종의 형식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역할극을 서로 쉽게 깨뜨리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관방에서 낙망에 빠진 박민수가 ‘같이 빠져죽자’고 하자 최곤은 이렇게 얄밉게 대꾸한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 같이 빠져 죽으면 둘이 사귄 줄 알아.’ 이 역설 안에 충분히 애정과 기대가 담겨 있지만 그 역설이 어떻게 실제 사랑의 증명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가 궁금증을 낳는다. 아무튼 이들은 영월 동강 절벽 가까이까지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폐경기 증후군에 빠진 듯한 두 사내를 어루만지고 활력을 충전시키는 마당이 필요하다. 영월은 폐경기에 이른 두 사내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무대 노릇을 한다. 전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영월로 내려온 최곤은 작가가 써준 알맹이없는 수식어 멘트를 내버리고 자기 식대로 방송하면서 사고를 저지른다. 또는 자신의 잊혀진 끼를 발굴한다. 겨우 담배 심부름이나 하고 최곤이 때린 피해자 위로나 하던 박민수는 라디오 방송 벽보를 붙이고 홍보를 하면서 오랜만에 매니저 노릇을 한다. 외상값 독촉하는 다방 종업원, 취직 자리나 알아달라는 엉뚱한 백수, 심심파적거리인 화투 규칙을 확인하는 할머니, 집 나간 아빠 찾는 아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꽃집 총각 등 전화 연결된 영월 청취자들이 최곤의 무뎌진 감성을 흔든다. 순댓국집에 네명이 우르르 몰려들어가서 ‘순댓국 하나 소주 넷’을 시키는 괴짜 밴드 이스트리버(노브레인)가 자신의 우상 최곤을 접선하면서 마당엔 풍악까지 갖춰진다. 이제 영화는 관객의 소매를 끌거나, 관객은 스스로 소매를 잡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청취자들의 각양각색 사연에 최곤이 그 못지않은 엉뚱한 처방을 내리며, 카메라가 영월 청취자들의 다양한 표정을 잡아낼 때 이스트리버의 <넌 내게 반했어>가 이 낡아 보이는 마당극을 하나로 묶는다. 박중훈과 안성기의 차곡차곡 쌓여가는 연기가 마지막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들의 연기는 빛나던 90년대의 전성기 가운데 몇 대목을 상기시킨다. 그들을 마음껏 놀게 할 이야기들이 요즘 퍽 드물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연극판에서 큰 배우인 정규수는 비어 보일 수 있는 이야기의 품을 익살과 연민어린 표정으로 메운다. 변두리에서 저물어가는 아저씨에게도 귀여움과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추석 종합선물 [4] - TV영화 추천작

징검다리만 잘 건너뛰면 정말 긴 연휴다. 만약 이 긴 연휴가 사막 위의 오아시스처럼 반갑게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이 글은 무용하다. 이 글은 온갖 잡일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시들어버린 ‘추석 노동자’, 누구는 해외로 떠나는데 고향조차 내려갈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 그리고 가족도 애인도 없이 추석 기분 낸답시고 홀로 전 부치고 앉아 있는 고독한 인간, 오직 이들을 위한 것이다. 청명한 가을, 남들 놀러갈 때, 어둠침침한 방구석에서 텔레비전이나 껴안고 있다고 자학하지 말자. 텔레비전, 맥주, 그리고 이미 본 영화라도 처음 보듯 즐길 수 있는 자세만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아무리 <두사부일체>나 <몽정기>처럼 재탕, 삼탕, 백탕 된 영화들이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당신의 감수성을 무시하더라도, 텔레비전을 끄지 말고 차라리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온갖 꼬투리를 잡아 신나게 저주를 퍼붓자. 다행히 올해는 비교적 싱싱한 최근작들과 몇번을 봐도 나름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작품들이 꽤 많이 준비되어 있다. 육체의 향연을 즐겨라, <쿵푸허슬>과 <싸움의 기술> 긴 연휴, 무기력해진 몸을 다스리는 데 고상한 요가보다 좋은 것이 있다. 아무 생각없이 현란한 몸의 향연에 마음을 맡기는 것. 성룡은 조금 지겹고 할리우드 액션은 짜증날 때, 주성치는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우선 <쿵푸허슬>은 대단히 웃긴다. 주성치의 소심하지만 아름답고 노련한 액션은 물론이고 이름부터 황당한 돼지촌 곳곳의 에피소드들과 <희극지왕> <소림축구> 등 주성치 영화에 출연했던 일명 ‘성치 패밀리’들의 아우라가 당신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것이다. 주성치 혼자 각본, 연출, 제작, 주연까지 도맡은 작품으로 주성치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해볼 기회다. 만약 완벽한 고수들에게 기가 죽는다면, 고수가 되기 위해 이리저리 터지는 <싸움의 기술>의 어눌한 소년에게 연민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마음 여리고 육체 부실한 소년에게 세상은 가차없이 모질다. 그러나 독기와 증오심만으로 싸움의 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차피 액션은 주성치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게 뻔하니, 차라리 ‘고수는 싸움의 기술만 터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인생 고수, 백윤식 선생의 카리스마에 주목할 일이다. 닭살없는 연애의 밑바닥, <연애의 목적>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마음에 부채질하냐고? 걱정 마시라. 이 두 영화에는 눈물 짜는 신파나 낭만적인 시선이 없다. <연애의 목적>에서 연애 뒤에 남는 건 사랑의 추억이 아니라 뻔뻔함(박해일)과 상처(강혜정)뿐이다. 사랑을 할 때는 한없이 불안하고 이별을 할 때는 구질구질해지는 것이 인간의 연애라고 영화가 한수 가르친다. 낯간지러운 사랑의 약속 따위는 없다. 한재림은 이 냉혹한 진실을 신인답지 않은 대범함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밀어붙인다. 그래도 강혜정과 박해일의 이상한 해피앤딩에 못내 기분이 상한다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유지태와 김태우, 성현아에게로 고개를 돌려보자.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희생과 순수 대신 위선과 가식과 나르시시즘과 거짓말로 둘러싸인다. 그 사랑은 지겹게도 반복된다. 연애의 밑바닥이 날것 그대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 사랑을 조롱하지만, 그 조롱은 화살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홍상수식 연애는 낄낄거림을 동반한 고통이다. 하지만 그의 연애 방식이 아무리 괴롭게 다가오더라도, 황정민과 전도연의 애절한 사랑을 보고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처량하게 우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 아닌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을 버려! <슈렉2>와 <곰이 되고 싶어요> 고수들의 노련한 액션도, 아무리 괴로운 사랑 이야기도 반복해서 보다보면 심장의 반응은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냉소하거나 더 강한 자극을 찾는 대신, 따뜻한 세상의 유쾌한 이야기를 찾아보자. <슈렉2>의 ‘겁나먼 왕국’은 당신을 지루함의 덫에서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허니문에서 돌아온 못난이 초록 커플은 과연 왕국의 인정을 받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당나귀 덩키뿐만 아니라 새로 등장한 프린스 차밍, 역대 만화 캐릭터 사상 가장 귀엽게 느끼한 장화 신은 고양이까지 감초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스파이더 맨> <반지의 제왕> <귀여운 여인> 등의 화제작을 패러디하는 솜씨도 여전하고 톰 웨이츠, 닉 케이브, 안토니오 반데라스 등이 부른 맛있는 노래는 이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놀랄 만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슈렉2>의 재기발랄함보다 감동적인 동화의 깊이를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덴마크의 거장 야니크 하스트럽의 <곰이 되고 싶어요>가 어울린다. 이 애니메이션은 북극의 그린랜드를 배경으로 곰과 인간이 빚어내는 가슴 훈훈한 드라마다. 어린 시절 어미 곰에게서 자라 결국 인간 세상으로 보내어지나 다시 곰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의 모습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곰만 보아온 우리에게 곰의 세계를 열망하며 눈물 흘리는 인간은 심금을 울린다. 만화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거라는 쓸데없는 오만과 편견을 저 멀리 날려주는 작품이다. 블록버스터를 저렴하게 즐기는 법, <캐리비안의 해적>과 <스타워즈> 시리즈 말이 필요없다. 굳이 줄거리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연휴에 보는 블록버스터영화는 극장에서 먹는 팝콘 같은 존재다. 연휴 대박을 노리고 개봉한 얄미운 블록버스터들이 아니라 몇년 전에 이미 극장에서 한번 본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다시 한번 봐주는 것. 비디오로 빌려 다시 보기는 어색하고 시리즈인 탓에 DVD를 하나씩 사기가 어쩐지 망설여지는 블록버스터들을 이럴 때 부담없이 구경할 수 있는 건 텔레비전이 선사한 기회다. 더욱이 <반지의 제왕> 같은 단골메뉴에 지쳐갈 때쯤, 상대적으로 싱싱하게 느껴지는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스타워즈> 시리즈는 반갑다. 가난한 마음을, 돈을 마음껏 바른 화려한 세트로 달래주고 눈이라도 호강시켜주는 건 어떨까. <캐리비안의 해적>의 영원한 마스카라 맨, 조니 뎁의 매력에 푹 빠져 보물을 찾아 환상의 세계로 떠나거나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를 떠올리며, 4, 5, 6편인 <새로운 희망> <제국의 역습> <제다이의 귀환>을 한번에 복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검은 한복과 물방울 원피스의 미장센, <음란서생>과 <친절한 금자씨> 이 두 영화를 하나로 묶은 이유는 순전히 시각적인 측면에 근거한다. 어차피 한번쯤은 봤던 영화를 다시 볼 때, 그것도 연휴에 늘어지게 앉아 다시 관람할 때는 영화의 특정 부분에만 초점을 두며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카메라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쫓아가보든지 배우들의 연기력에 주목해보든지 영화의 음악이나 음향효과에 촉각을 세우든지 빛의 미세한 움직임을 찾아내보든지 선택은 보는 자의 몫이다. 탁월한 선택과 그 선택을 밀고 가는 끈기,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이 영화를 보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줄지 누가 알겠는가? <음란서생>과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주목할 요소들은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이 영화들의 세트와 주연 여배우의 의상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영시간 내내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한석규와 이범수가 즐겨 찾는 오달수의 유기전 내부나 저잣거리 풍경은 고증에 따라 재현했다고 하지만 근대적인 분위기가 스며들어 독특한 영화적 공간으로 완성된다. 이영애가 출옥 뒤 거주하게 되는 좁은 공간도 강렬한 색채 대비 속에서 키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특히 이 두 영화에서 시각적 쾌감이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아름다운 의상들이다. 김민정이 입은 그 유명한 검은 한복이나 이영애의 촌스러운 물방울 원피스는 미장센의 일부가 될 뿐만 아니라 캐릭터를 표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이러한 효과는 ‘그녀들’이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1]

약간의 사연. 나는 간절하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영화는 내게 연애를 하자고 조르고 있었다. 그래서 책상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 오래 책상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보는 사람을 안방의 정주민으로 만든다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거리를 쏘다니는 유목민으로 만든다. (들뢰즈가 아니라) 레지스 드브레가 한 말이다. 영화를 보러 달려가는 두근거리는 마음 혹은 보고 난 다음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는 오가는 길이라는 사유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 영화를 길에서 깨달았다. 나는 교실에서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또다시 하염없이 긴 글을 쓸까 지레 겁을 먹은 김혜리 기자는 일단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에 안심을 했음이 분명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까스로 허락받은 산책. 나는 인터넷을 종료하고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영화평은 영화 보는 경험의 연장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산책의 대가들의 명단. 보들레르의 산책. 지가 베르토프의 산책. 모네의 산책. 알베르틴의 산책. 다이스케의 산책. 벤야민의 산책. 로셀리니의 산책. 도미오카와 유키코의 산책. 솔레르의 산책. 차이밍량의 산책. 홍상수의 산책. (고작해야) 그들을 흉내내고 있는 나의 산책. 더 솔직히 말하면 영화에 대한 메모만으로 가득 찬 산책-글쓰기는 내 오랜 꿈이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세르주 다네의 (신문 <리베라시옹>에 1981년 7월18일 프리츠 랑으로 시작해서 1986년 1월24일 펠리니의 <진저와 프레드>로 연재를 마친) ‘영화-일지’(Cine-Journal)를 읽으면서 배웠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해봐야 다네만큼 높이 상공 비행한 다음 내려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다네가 보여준 더 많이 보려는 욕망. 그는 어떤 영화는 슬로모션처럼 보아야 하며, 어떤 영화는 디졸브하듯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화를 보는 내가 영화-되기. 지금 모두들 영화비평의 위기를 말한다. 지금 다시 떠올려볼 만한 다네의 유명한 제안, 영화에 관한 평이란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평 없이도 영화를 보고, 극장은 글 없이도 가득 채울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이란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경험의 연장이며, 보충이며, 대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평은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겹쳐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를 본 다음 정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핵심은 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만으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의 중재. 그냥 영화를 본 다음 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들. 수첩을 가득 채운 두서없는 메모. 이 글은 그렇게 쓰여졌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척하다가 정말 바람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바람난 아저씨가 카바레를 떠돌듯이 영화관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아아, 바람난 영화야, 여기 아저씨가 왔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그래서 급기야 마감일에 다시 한번 전화를 하고 말았다. 내 말도 안 되는 푸념을 들은 김혜리 기자는 한주 미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 다음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그런데 몇매를 쓰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우물거리면서 대답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누군가에게 분량을 의논하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진짜 그것만 쓴대?” 그 말이 들리는 수화기를 든 나는 저 멀리 끝나가고 있는 늦여름의 한강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지난여름에 골뱅이가 나타나서 현서를 잡아먹었던 그 한 많은 강. 또 누군가가 뛰어들 강. 2006년 여름, 정치적 계절의 도래 물론 <괴물>은 아직도 상영 중이다. 나는 ‘(하지만…)’으로 글을 맺었고(<씨네21> 제 565호,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그리고 허문영이 그 다음을 이어 썼다. 그 글은 내가 놓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서 다시 쓰고 있다(<씨네21> 제566호,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나의 ‘하지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좀더 정확하게 나는 서문을 쓴 것이고, <괴물>은 이제부터 더 이야기되어야 한다. <괴물>이 내게 가장 새로운 것은 이야기 구조에 있다. 봉준호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인물들을 흩어놓는다. 혹은 일부를 빼낸다. (박희봉) 말하자면 여기에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에 역행하는 배치의 분산화가 있다. 아니, 차라리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면서 편집은 점점 산만해지고 있는데, 그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다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걸 말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인물이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걸 말해야 하는 숏이 다음에 나와야 할 때 갑자기 영화는 다른 장소에 있는 다른 인물 신으로 달아나버리고 만다. 물론 술래는 괴물이다. 더 미룰 수 없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 말도 못하는 괴물의 차례가 돌아온다. 중심의 결여라고 할까, 주변의 점으로 이루어진 가운데가 빈 원형이라고 할까, 이 이상한 이야기의 진행 안에서 종종 이야기를 구경하는 것 같은 수평 트래킹 카메라는 분산되는 인물과 그걸 붙이려는 편집 사이의 무심한 매듭이다. 이를테면 괴물이 한강에서 뛰쳐 올라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데 그냥 무심하게 원효대교를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그걸 쳐다보는 승객의 수평운동의 시선. 나는 <괴물>에 대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점. <괴물>의 날씨는 박강두와 그의 가족이 병원에서 탈출한 다음부터 종잡을 수 없다. 심지어 한강 둔치로 들어가는 굴레방 다리를 지나기 전에 그렇게 내리던 비가 거길 지나가자마자 개어 있다. 그런데 여길 지나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걸어서도 1분이면 충분하다. 이 비현실성 혹은 초현실주의적인 날씨. 겨우 50m 이쪽과 저쪽이 마치 다른 도시처럼 보이는 거리. 나는 한강에 나타난 괴물보다 이쪽이 훨씬 신기해 보인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괴물>에는 무언가에 고착된 채 그걸 집행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요소를 끌어안고 거기서 눈에 보이는 광경만을 펼친다. 혹은 무언가 상상을 덧쓰려는 현실효과를 뿌리치려는 완강한 저항이 있다. 대중 안에 이데올로기의 폭탄을 던지는 것은 오늘날 그렇게 점점 상상이 환상을 덮어쓰는 방식으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괴물>이 좀더 많은 질문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을 온통 돈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영화담론의 빈곤함이다. 아무래도 <괴물>을 말하기 위해서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다세포 소녀> 하지만 여기 나는 한편을 더 추가하고 싶다. ‘B급 달궁’(이라는 예명을 쓰는 채정택 작가)의, 얼짱 김옥빈의, 혹은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는 건드리기도 전에 끝났다. 이 영화를 말할 때 성 정치학이나 장르의 혼합, 혹은 패러디를 말한다. 하지만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 대해서는 애써 질문을 피한다. 그 반대로 나는 이 소녀가 가장 궁금하다. ‘B급 달궁’의 원작에서는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는 이 소녀가 갑자기 이야기의 중심에 왔을 때, 그래서 계급모순이 중심에 올 때 성 정치학은 왜 창백해지는가? 왜 이 영화에는 도착은 있는데 전복이 없는가? 혹은 성에 대한 애착만큼 프롤레타리아를 사랑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걸 이재용이 질문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성애자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받는’ 타자이지만, 부자 앞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괴물>을 본 다음 <다세포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올 여름, 마침내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도래하였다. 혹은 <괴물>은, <다세포 소녀>는 2006년, (평화로운 국면인 척하는) 대한민국을 (계급모순과 반식민지 분단체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아래 놓인) 대한민국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한다고 한다. 다가올 미래 앞의 기기묘묘한 예고편. 내년 대통령 선거는 괴수와 싸우는 영화가 될까, 아니면 정치적 복장도착의 뮤지컬이 될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야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지난여름이 끝나기 전 몇편의 영화를 더 보았다. 먼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 두편을 모두 본 것은 <파이란> 때문이다. 나는 <파이란>이 지닌 통속성에의 향수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해에 <순애보>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 <소름>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나왔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나는 지금 멜로드라마만 열거한 것이다(그해에 가장 대중적인 영화는 <친구>였다). 이 명단은 예외없이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을 잃지 않는 행위를 선택한다. 그것을 우리 시대의 쿨한 사랑법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파이란>은 갑자기 낭만적 사랑의 제스처를 택한다. 거의 복고취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통속성. 나는 이 반시대적 연애영화의 행위가 너무도 용기있어 보여서 그걸 방어해야 한다는 어떤 만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어떤 망설임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파이란>을 본 다음 이 영화의 장점이 (김해곤의) 시나리오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송해성의) 연출 몫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해성이 <카라>로 데뷔한 것은 (적어도 내게) 악재로 작용하였다. 세 번째 영화 <역도산>은 송해성보다는 어딘가 (이 영화를 제작한) 차승재의 영화처럼 보였다. 그런 다음 <우리들의…>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연애…>을 먼저 보고 난 다음 보게 되었다. 결과는 좀 이상한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이 두편의 영화는 <파이란>을 둘로 나눈 것 같았다. 둘 다 거의 벼랑까지 밀고 간 다음 눈물을 요구했고, 둘 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바닥을 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둘 다 사랑에 빠진 커플에서 남자쪽에 기대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신파조 이야기 안에서조차 그래도 산다는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끈덕진 장점은 김해곤의 것이었고, 강재라는 남자에게 부여한 피와 살은 송해성의 것이었다. 먼저 <연애…>. 영운은 비루하지만 그만큼 흥미있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해변의 여인>의 김승우를 ‘직전에’ 먼저 본 것은 김해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홍상수는 일단 자기 영화 안에 배우가 들어오면 거의 일그러뜨리다시피 한 다음 자기 이야기 안에서 반쯤 자백을 하듯이 연기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배우에게 일종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그리고 그걸 점점 더 잘한다. 문제는 그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른 영화에 그 배우가 나올 때 그렇게 홍상수 마음대로 구겨지고 이리저리 잘라낸 이미지가 남아서 (혹은 복원되지 않아서) 남의 영화 안에서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의 이미지와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승우는 이상하게 이야기의 시선이 잘 투영되지 않는다. 홍상수는 그걸 안 다음, 이를테면 세 그루의 나무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려도 김승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같은 자리에 김태우는 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모델의 문제이다. 그런 다음 홍상수는 재빨리 고현정과 송선미에게 응시의 자리를 돌려서 문숙과 선희를 번갈아 그 곁에 앉혀놓고 그 앞에서 김승우에게 말하게 만든다. 그때 김승우는 항상 보는 대신 보인다. 그러나 <연애…>에는 그럴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술집 여자 연아(장진영)는 보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매우 힘든 등장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인물을 믿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영운이 동원되는 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혹은 연아라는 인물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은 영운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연아는 영운의 환상의 대상이다. 그런데 연아쪽에서 영운을 보게 되면 이 주관적인 감정선을 객관적으로 노출시킬 위험과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납득할 수 없는 연아쪽에서 영운을 볼 때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이비) 브레히트적 조건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물을 믿을 수 없을 때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연애…>는 그 상황이 가슴 아프게 우습지만, 그 안의 인물들이 그 상황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끝내 떨치지 못한다. 그러면 그걸 보는 나는 무엇을 구경해야 할까? 연민으로 끝나고 마는 눈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우리들의…>는 비슷하면서 다른 문제에 부딪힌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강동원은 ‘완전소중’이다. 얼마나 멋있는지 죄수복을 입어도 빛이 난다. 곁에 선 이나영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강동원이 그저 슬쩍 슬픈 표정을 짓는 게 더 안쓰럽다. 게다가 이 형무소는 차라리 기숙사처럼 보인다. 지난해 추석에는 하지원이 그 곁에서 울었고(<형사 Duelist>), 올 추석에는 이나영이 옆에서 울고 있다. 내년에는 누가 그 옆에서 또 울까? 그러나 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우는 것과 그걸 보는 내가 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영화를 볼 때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송해성은 잘 울리지 못한다. 그의 재능은 울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을 보는 데 있다. 그는 남자가 우는 걸 가장 잘 보는 감독이다. <파이란>은 그 순간과 만날 때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최민식도 강재에게 공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최민식은 전형적인 메소드 액터이다. 그는 지나치게 강재 안까지 들어갔다. 그런 다음 최민식은 강재에게서 나오기 위해서 거의 몸부림을 쳤다. 오대수라는 인물을 선택한 것은 배우로서 일종의 자살이다(<올드보이>). 그렇게 해서라도 강재를 죽이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반대로 강동원은 사형수 정윤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세상은 공평하다. 지나치게 멋있는 남자들은 모델은 잘할 수 있지만 배우는 힘들게 한다. 강동원은 좀더 부서져야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연기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근사해서 문제다. 그렇다고 모델로서 그 인물을 흉내내기에는 정윤수가 던져진 상황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마지막 선택. 그렇다면 강동원은 정윤수 그 자신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공지영은 소설을 쓰면서 정윤수를 그려낼 때 단 한번도 강동원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맹세를 해도 좋다. 강동원과 정윤수는 인생에서 거의 공집합이 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여기서 처음 마주쳤을 것이다. 브레송의 유명한 말. 영화에는 두 가지 인물이 있다. 하나는 인물을 배우가 흉내내는 것, 또 하나는 인물이 모델을 닮는 것. 잡으러 가기와 잡아당기기. 모델이 강동원일 때 정태성은 그를 잡으러 왔다(<늑대의 유혹>). 하지만 모델이 정윤수일 때 강동원은 그를 자기 안으로 잡아당겨야 한다. 송해성은 정윤수의 눈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거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정윤수가 아니라 강동원이다. 그때 눈물은 오로지 가련한 연민으로 끝난다. 하지만 <우리들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죽음의 두 가지 측면, 자살과 사형은 이나영과 강동원의 눈물을 경유하여 삶의 상실이라는 슬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사랑의 상실은 삶의 상실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물은 이미 주어진 현실을 얼룩진 왜상으로 만들어 진실을 보도록 도와주지도 않는다. 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 세상을 보는 대신 이야기에 내던져진 슬픈 눈물. ‘안습’ 내기. 눈물은 영혼을 비쳐 보이거나 그 반대로 감정을 증발시켜버린다.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 둘이 함께 만든 <파이란>이 그 두편의 영화 어느 쪽보다 좋다. 그러나 <우리들의…>에 대해 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내게 <연애…>를 쓰는 것도 그만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지만 너무 많은 영화가 어른거린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영과 이해준의 첫 번째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시나리오작가에서 시작한 사람들답게 보는 내내 이미 정해진 결론까지 가면서도 작은 반전의 대목들을 기습적으로 배치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많은 영화들이 어른거린다.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수오 마사유키의 <으랏차차 스모부>. 게다가 트랜스젠더 ‘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후’에 대해서 어떤 작은 대답조차 할 생각이 없는 이 영화의 태도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을 결국 구경거리로 만들고 말았다(그들은 그 후일담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윤리적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철희의 <예의없는 것들>은 왕가위의 <타락천사>의 두 이야기를 샘플 리믹스한 것 같다. 말을 못하는(금성무) ‘킬라’(여명). ‘그녀’(윤지혜)는 막문위를 흉내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다행히 ‘망기타’는 흐르지 않는다. 조범구의 <양아치어조>는 좋지는 않지만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날을 세운 감정의 칼과 그것에 찔린 다음에도 그걸 참아내는 포옹이 함께 있었다. 나는 그가 멀리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영화 <뚝방전설>은 좀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의 첫 번째 영화를 잘못 보았든지 아니면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새 도망친 여름. 스튜디오로 귀환한 타르코프스키의 세계 <리턴> 가을이라고 느꼈을 때 처음 본 영화는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의 <리턴>이다. 이 영화는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이 베니스영화제에 간 해에 황금사자상을 받은 데뷔작이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 영화는 ECM영화다. 집 떠나간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앞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레닌 ‘이후’ 러시아영화에서 줄기차게 반복해서 다루어온 억압에의 귀환이다. 말하자면 서방세계의 아버지와 달리 러시아영화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정신분석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무게가 더 크다. 이미 많은 영화들이 그러한 화법을 택했고, <리턴>은 그러한 전통에 기대어 진행된다. 그러나 즈비야긴체프가 새로운 것은 그 앰비언트 사운드의 디자인이다. 돌아온 아버지가 두 아들과 집을 떠난 다음 모든 장면은 야외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사운드는 거의 밀폐된 것처럼 완전하게 통제된 스튜디오 안에서 작은 소리들을 일일이 만들어서 장면 안에 배치하였다. 그때 이 사운드의 느낌은 ECM 음반을 들을 때의 그 차가운 명징함과 소곤거림, 어떤 노이즈도 없는 제로 상태, 허락되지 않는 잔향효과, 모자이크에 가깝게 편집된 선율의 카탈로그, 어떤 작은 팬 홈도 남겨두지 않은 채 매끈하게 다듬어진 방음효과 안의 공간에 초대받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즈비야긴체프는 그렇게 아버지의 대지를 스튜디오의 영토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음향 안에 있다. 그 안으로 돌아온 리듬적 인물과 그 속으로 떠나는 선율적 풍경. 그때 세상은 하나의 음향-기계처럼 느껴진다. <리턴>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귀환의 실패이다. 물론 미학적 실패가 아니라 그 목적론의 실패라는 의미에서이다. 여기에는 타르코프스키가 소망하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지나가는 시간(의 경험) 안에서 되찾을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희망이란 없다. 아버지가 돌아오지만 그는 상자를 되찾은 다음 미처 열지 못하고 예상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버리고 영화의 기호들에 우리의 감각을 열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때 타르코프스키와 즈비야긴체프는 둘 다 바람에 관심이 많다. 타르코프스키는 심지어 헬리콥터를 동원해서 바람을 만들어 들판의 나무를 뒤흔든다. 하지만 즈비야긴체프는 여기서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를 찍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바람 소리를 들려준다. 혹은 자연 속에서 찍은 이미지를 일일이 DI 작업을 해서 디지털 풍경으로 만든다. 그때 타르코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이 여행은 정반대로 기계적인 녹음으로 배열된 음향과 이미지로 자연을 인공의 영토로 코드화한다. 흐루시초프 혹은 브레즈네프 시대를 산 타르코프스키는 스탈린 시대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들이 이미 죽었거나, 유령이거나, 끝내 돌아오지 않거나, 바보이거나, 미쳐버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푸틴 시대의 즈비야긴체프는 고르바초프 시대의 아버지를 우스꽝스럽게 기다린다. <리턴>의 질문은 아버지가 왜 돌아왔느냐가 아니라 왜 떠나갔느냐, 에 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는다. <리턴>은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음울한 유머이다.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여인> 그 다음. 안 쓰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냥 몇 가지 메모.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는 장 르누아르가 미국에 가서 1946년에 찍은 첫 번째 영화와 제목이 같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해변가 빌라 이층에 빌린 중래의 방을 중심에 놓고 복잡한 동선을 그은 다음 그 사이를 넘나들거나 되돌아오거나 혹은 쳐다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때 불투명한 문과 커튼 사이로 (반)투명한 창문은 프레임의 숨바꼭질을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 갑자기 프레임의 일부가 안 보이거나(저 문 너머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혹은 프레임의 일부가 구멍이 난 것처럼 뚫려서(창문 너머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프레임 안에 프레임이 보인다. 말하자면 건축이라는 질료성을 영화적 투시도법의 미장센으로 다시 구성한 장 르누아르의 화면과 동선. 문과 창문. 사실 그 둘은 모두 구멍이다. 프레임의 막힌 구멍과 뚫린 구멍. 여기서 막힌 문은 분리에 실패한 소외이며 그 창문은 소외당한 욕망의 블랙홀이다. 그때 그 방문과 창문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미처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개미들이 기어나오는 구멍 뚫린 손이다. <안달루시아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가에 부서진 상자가 보이고 난 다음 모래에 파묻힌 두 남녀가 보이자 거기 “봄날에”(au printemps)라는 자막이 떠오르면서 끝났다는 사실을 떠올리시길. <해변의 여인>은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가까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다. 심지어 그게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비유에 기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이미 당신께서 읽었을) 두개의 글을 읽고 나는 홍상수를 배운다. 김소영은 두명의 중래를 놓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표면 위의 기호의 싸움을 본다(<씨네21> 제569호,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이를테면 “(중략)… 우연성을 필연으로 엮어내는 서사가 영화감독 중래의 강박관념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문숙과 선희가 닮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진술은 둘을 함께 목격한 식당주인, 그리고 선희에 의해 반복된다. 그러나 이 반복으로 가는 대한(??) 의미화로 가는 대신 영화의 서사적 추동성은 문숙이 이것을 잘라내는 중단, 정지로 간다. 그녀는 중래를 놀리듯 말한다. 나는 반복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읽었다. 기호의 반복과 서사(-운동의) 중단. 혹은 정지. 반복 안의 중단. 사유하도록 강요한 다음 다시 이야기 안으로 끌어(attractive)들이기. 홍상수의 내밀한 몽타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 나는 항상 남의 글을 읽고 배운다. 그때 배움은 여전히 나의 행복함이다. 그런 다음 허문영은 오랜 친구에게 보내는 듯한 더할 나위 없이 예를 갖춘 사랑이 그윽한 향처럼 번져나오는 글을 썼다(<씨네21> 제 560호, ‘남자와 여자와 개의 시간’). 허문영은 여기서 이상하게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해변의 개’를 끌어안고 개의 자리를 둘러싼 인간의 형상에 대해서 <해변의 여인>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나는 이 개가, 그러니까 ‘돌이’, 혹은 ‘똘이’, 또는 ‘바다’가 <해변의 여인>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라고 믿는다. 나는 두개의 글을 읽은 다음 그 ‘이후’에 또 쓰는 건 중언부언이야,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해변의 여인>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훔치면서 배운다. 이것이 8월 말, 9월 초의 나의 첫 번째 배움이다.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2]

동해로 향하는 서해안의 여인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 서해안에 가서 찍은 이 영화는 서울을 꼭짓점으로 한 다음 지정학적으로 남서쪽에 가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도 그 세 사람이 도착해서 바다를 바라볼 때 이상하게 자꾸만 동해안에 가서 진행되는 것처럼 90도 상상선을 그은 다음 그들을 바라보고 왼쪽 45도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런데 <강원도의 힘>에서는 강원도의 바닷가에 가서 반대로 진행하였다. 지숙은 그녀의 두 친구와 함께 강원도 해변가에 간다. 짧은 신이지만 여기서 <해변의 여인>과 거의 동일한 장면이 나온다. 그녀들은 해변에 도착해서 바다를 본 다음 돌아서 모텔을 보는데 그 앞에 웬 말이 서 있다. 주인은 이 말 이름을 ‘주필이’라고 가르쳐주는데 지숙의 친구는 그 이름을 듣고 “주피야, 주피야, 넌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라고 묻는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세 사람은 해변가에 앉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구태여 그녀들을 마치 서해안에 온 것처럼, 그러니까 이번에는 상상선의 오른쪽에 가서 보여준다. 바다는 건물이나 길과 달리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마스터 숏으로 방향을 정하면 그걸 반대로 틀어놓기 매우 힘들어진다. 나는 <강원도의 힘>을 보았을 때 이 신이 너무 이상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사실 난 이런 장면을 만나서 설명이 안 되면 거의 못 견디는 쪽이다. 이 장면에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홍상수는 아직 영화에 서투른 예술가이거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의 힘>은 에릭 로메르 ‘이후’에도 새로웠다) 아니면 그 스스로의 이미 완성된 세계 안에서 결론을 갖고 영화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시행착오란 없다. 이미 그는 영화에 대해 결론을 내렸고, 다만 그 안에서 반복의 역설 아래 차이로서의 반복과 반복 안의 차이 사이를 오갈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끈질기게 내기를 미루었다. 그런데 꼭 10년 만에 <해변의 여인>으로 서해안에 간 홍상수가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다 앞에서 반대로 진행할 때 어떤 쇼크를 받았다.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에서 해변가를 ‘서해안의 힘’처럼 보여준다. 그런데 <해변의 여인>은 내게 <동해안의 여인>으로 보인다. 나는 문숙의 차가 마지막 마지막 신에서 지정학적으로 서해안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면서 가다가 갑자기 수렁에 빠진 다음 두 남자의 도움을 받아 거기서 빠져나오자마자 갑자기 유턴을 할 때 아니, 여기서 유턴을 할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여기는 길도 아니고 모래사장 한복판이다. 나는 거기서 차를 수렁에서 건져주는 두 남자 대신 그녀 스스로 ‘똥차’라고 부른 하늘색(푸른 바다색?) 마티즈의 유턴을 보았다. 그때 서해안을 가던 차는 유턴을 해서 천연덕스럽게 동해안처럼 되돌아간다. 이때 나는 가까스로 되찾은 긍정된 세계로부터 재빨리 다시 물러나는 홍상수를 본다. 똥차 혹은 버림받은 개. 개의 예와 아니오와 문숙의 예와 아니오. 그것은 되돌아오는 것일까, 나아가는 것일까.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변덕스러운 봄날의 뿌연 공기. 김기덕에 대한 작은 연대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본 다음 막 개봉한 김기덕의 <시간>을 다시 보러 갔다. 그러는 동안 김기덕은 소란의 한복판에 외롭게 던져져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거의 개의치 않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의 영화이지 그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사회가 끝난 다음 이루어진 기자회견을 거의 소설로 각색한 기사에 항의하는 배급사의 회견 전문을 다운받았고, 심야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100분 토론>을 산만하게 보았고, 그 방송이 끝난 다음 김기덕이 연합통신에 보낸 메일 전문을 읽었다. 김기덕은 네이버 조회 인기검색어에도 올라왔다. 김기덕의 메일에 달린 글은 그의 영화에 대한 글보다 더 많았다. 심지어 그 메일에 수능시험 논술고사 채점하듯이 문장 단위로 일일이 토를 단 기사마저 있었다. 김기덕은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한 다음 “나는 언론을 실험용 쥐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 누가 누구를 조롱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보는 <시간>은 나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텅 빈 영화관에는 나를 포함해서 8명이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조롱의 게임은 누가 바보인지를 놓고 벌이는 내기였다. 대답은 둘 다이다. 그것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 수가 무심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의 개봉을 촉구하기 위한 격문의 형식을 빌려 단지 줄거리 소개만 했기 때문에(<씨네21> 제549호, ‘반복 안에서 찾은 새로움: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을 최초로 보고 쓰다’), 좀더 안을 들여다보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이 영화에 가장 따뜻한 글을 쓴 사람은 남다은이다(<씨네21> 제566호, ‘죽음만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반복’). 하지만 <시간>이 한국에서 개봉한 것이 김기덕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제는 솔직하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꼭 내가 쓴 글 때문에 개봉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 일정 정도 개입한 글을 쓴 나는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그저 쳐다보았다. <시간>에 대한 담론은 정작 빈곤하기 짝이 없었고 모두들 김기덕의 말에 대한 주석에 매달려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걸 보는 내 느낌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려가면서 물어뜯듯이 매달린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그 주석에 어떤 집요한 성찰이 있거나 혹은 그 말을 경유하여 영화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를 싫어할 수 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이 김기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걸 혼동하면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이 김기덕의 열네 번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칸이나 베니스 혹은 뉴욕, 어쩌면 도쿄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서울에서 다시 ‘개봉’할 때까지 나는 더이상 그의 ‘새로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것이 김기덕에 대한 나의 작은 연대이다. 오즈의 계절에 듣는 밥 딜런의 음악 그런 다음 잠시 망연자실하게 돌아보았다. 이제 막 여름이 끝나고 가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사이. 늦은 여름 혹은 이른 가을. 말하자면 오즈의 계절. 지금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노래다. 밥 딜런의 (‘공식 해적음반’ 연작을 제외하고, 그러나 5장의 라이브와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라이브와 한장의 사운드트랙을 포함해서) 39번째 앨범 <모던 타임스>는 그냥 한마디로 심금을 울린다. 이 앨범은 누구나 연상하듯이 채플린의 그 유명한 마지막 무성영화와 같은 제목이다. 하지만 밥 딜런이 여기서 채플린에게 오마주를 바치거나 패러디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떠올리자면 채플린이 토키시대에 끝까지 무성영화로 저항한 것처럼 밥 딜런은 여기서 ‘옛것이지만 근사한’ 재즈 블루스 백 밴드에 기대어 중얼거리면서 노래한다. 그는 이번에는 엘모어 제임스와 윌리 브라운, 머디 워터스, 로버트 팻웨이 혹은 토미 존슨 사이 그 어딘가에서, 말하자면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탁류에 몸을 내맡기고 세션 맨들과 어울려 흘러가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로니 존슨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도 세 번째 트랙에서 느닷없이 머디 워터스처럼 <롤링 앤 텀블링>을 노래할 때는 이상하게 걷잡을 수 없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밥 딜런의 모든 앨범이 훌륭하지는 않지만 거의 동시에 데뷔한 폴 매카트니의 행보와 비교하고 있으면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의 실패를 노래하는 고다르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 나는 똑같은 마음을 고다르에게서 느낀다. 광화문에서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을 막 보고 나오면서 고마워, 고다르, 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두 영화를 마치 동시상영처럼 보여주지만,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다. <사랑의 찬가>는 일상의 물건들이 이미지가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우주의 질서 안에 살고 있다는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고다르는 단지 숭고함의 물신주의에 매달리는 대신 이미지가 덧없이 영화라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다루면서 이미지를 다루는 영화의 운명과 임무에 대해서 계속 질문한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려면 무엇보다도 질문을 견뎌야 한다. 질문은 고다르에게 영화의 존재 이유이다. 아니, 차라리 고다르의 카메라가 사물의 이미지를 건드릴 때 세계가 질문을 던진다, 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반대로 <아워뮤직>은 이미지의 교육학이라고 부르게 만든다. 그건 반드시 ‘연옥’편에서 고다르가 하워드 혹스의 <그의 여자 프라이데이>를 텍스트 삼아 숏과 상대 숏의 관계에 관한 긴 강연을 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이 토픽은 1963년 장 피에르 우다르가 로베르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을 본 다음 (라캉의 ‘봉합’(suture) 개념을 빌려)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때 고다르는 이미 나나가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을 보다 말고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비브르 사비>를 찍은 다음이다. 핵심은 왜 그걸 지금 다시 끌어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역사적 관계, 그에 영화가 대응하는 판타지와 다큐멘터리, 그런 다음 숏과 상대 숏의 비대칭성이라는 삼항 관계로 놓고 진행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이 영화는 단테의 <신곡>을 빌려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삼부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고다르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진행 중인 역사가 변증법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실패한 것이 역사이지 변증법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진행이 중단된 모순으로서의 상대 숏, 좀더 정확하게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물어본다. 상대 숏으로서의 팔레스타인. 안티테제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변증법은 잘못된 종합명제로서의 천국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아워뮤직>의 ‘천국’은 불길하다. 말하자면 주한미군에게 ‘작통권’을 갖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우파들이 날뛰는 대한민국은 고다르에게 21세기의 천국이다. 제국의 천국. 역사 속의 이미지들은 지옥의 피에 젖어들고, 현재 진행 중인 연옥의 이미지들이 모순의 불평등에 시달릴 때, 미래의 천국은 미군의 이미지들이 점령할 것이다. 그것이 고다르가 부르는 ‘우리의 음악’(notre musique)이다. 음악은 아직 (혹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은 이미지를 부르는 호명이다. 그렇게 노래하는 고다르와 밥 딜런. 나는 이 두 사람을 같은 해에 ‘발견’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새로운 영화 혹은 노래를 기다리면서 살았다. 때로는 실망했고, 때로는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항상 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그걸 뒤쫓아가면서 나는 배우고 또 배웠다. 그 안에 있는 앎의 비밀. 아니 차라리 세계라는 비밀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기호. 지치지 않는 사랑. 앎과 사랑 사이를 연결하는 긍정. 그 사이(entre). 그 둘이 연결될 때 배움의 느낌이 불러일으키는 상위형식의 비밀에 대한 간절한 궁금증. 그 형식 안에서 활동하는 나의 능력의 한계가 안겨주는 슬픔. 그러므로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을 보면서, 혹은 밥 딜런의 <모던 타임스>를 들으면서 또 배운다. 이것이 이번 이른 가을의 두 번째 배움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놀라운 클로즈업 <퍼펙트 커플> 그리고 종로에서 짧은 축제가 있었다(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이미 끝났다. 멀어서 오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게을러서 보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일곱 번째를 맞는 서울영화제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올해가 가장 재미있었다. 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거나(실험영화들), 반대로 너무 겸손해할 때(미디어로서의 영화들) 흥미를 잃는다. 물론 그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취향을 말하는 중이다. 영화는 세상과의 긴장을 유지할 때, 그래서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내가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결국 영화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자세를 선택할 때 거기서 진실을 볼 수 있느냐는 선택의 내기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자세와 거리.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더 선>은 동시상영처럼 볼 필요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를 더하고 싶다. 본 것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스와와 소쿠로프는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든다. 스와 노부히로는 지금 막 이혼을 결심한 부부의 이틀간의 감정적인 위기를 다룬다. 소쿠로프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다음 유폐되어 살고 있는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다(그리고 마이클 만은 마이애미의 두 형사를 다룬다). 이 세개의 인물 다루기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셋 다 디지털카메라로 인물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필름 카메라로 다가갈 수 없는 거리까지 바짝 다가간다. 그 놀라운 클로즈업이 전혀 다른 내용, 전혀 다른 스타일, 전혀 다른 인물에게서 동시에 벌어진다. 이때 클로즈업은 카메라와 얼굴 사이에서 그 이전에 한번도 본 적 없는 거리를 창조한다. 나는 이미 마이클 만에 대해서는 말했다(<씨네21> 제568호, ‘눈물과 매직 아워’). 그러므로 그 뒤를 이어 스와 노부히로,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퍼펙트 커플>은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을 파리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스와 노부히로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인 것 같다. 세 번째 영화 에서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자기 방식으로 리메이크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알랭 레네에게 보내자 레네는 “편집이 되지 않은 영화를 왜 내게 보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일화는 스와 노부히로 스타일을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스와 노부히로는 영화에서 데드 타임을 그냥 내버려둔다. 그는 로셀리니보다는 존 카사베츠에 더 가깝다. 그래서 장면은 때로 배우에게 맡겨지고 종종 한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는 1시간44분 동안 고작 44숏이다(중간에 나오는 검은 자막은 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게 한신을 한숏으로 찍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 그렇게 찍기는 했지만 그러나 갑자기 장면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같은 방을 쓰다가 다른 방으로 옮긴 아내 마리를 찾아 남편 니콜라스가 찾아간 장면에서 갑자기 숏을 나누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스와 노부히로는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로 찍을 때는 소통의 단절을 보여주다가 그들의 대화가 소통될 때 갑자기 나누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비밀은 롱테이크나 멈춘 카메라에 있지 않다. <퍼펙트 커플>에서 이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은 카롤린 샹페티에의 카메라와 그 카메라와 거의 혼연일체가 된 동시녹음 기사 장 클로드 로뢰가 들려주는 미세한 소음들이다. 카메라는 멈춰 서 있는데 사운드의 붐마이크는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장면은 마치 후시녹음을 한 다음 폴리를 한 것처럼 제한적이고, 어떤 장면은 카메라는 이쪽에 와 있는데 붐마이크는 저쪽에 있어 카메라와 붐마이크가 숏과 상대 숏의 역할을 한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마리가 로댕의 조각이 있는 미술관에 들를 때다. 그때 장면은 모두 실내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실내를 두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때 카메라와 붐마이크는 공간이 오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임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야만 그 존재를 인정한다. 말하자면 장소가 지닌 물질성과 붐마이크가 갖는 질료성 사이에서 카메라가 그것을 중재한다. 그 안에서 스와 노부히로는 이혼을 앞둔 불안한 마리가 불멸의 예술품으로 남아 있는 로댕의 조각상이 주는 영원성과 우연히 어린 아들과 함께 거기를 찾아온 옛날 고등학교 동창이 자신의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삶의 소멸 사이에서 겪는 심리적 동요를 끌어낸다. 영화는 두번 아내 마리와 남편 니콜라스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간다. 그런데 카메라가 너무 가까이 가서 표정을 알 수가 없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 이 얼굴은 말 그대로 풍경처럼 보인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 <더 선> 세 번째.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매우 난처한 세명의 인물의 연작을 찍었다(아마도 이 연작은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 하나는 레닌을 다룬 <몰로크>이고, 그 다음은 히틀러를 다룬 <타우르스>이고, 그리고 <더 선>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의 결정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다루면서 소쿠로프는 그런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히로히토는 작은 도서관에 유폐된 채 지낸다. 마치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그의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습은 미군 점령관 맥아더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그는 중얼거린다. “내가 저런 인물을 또 어디서 보았을까?”), 여전히 히로히토를 모시는 가신들은 그를 ‘태양의 신’으로 생각한다. 전쟁에 진 것은 인간인 신하들의 책임이며, 여전히 신인 동시에 일본 그 자체인 히로히토에게 누가 될까 인의 장벽을 친다. 그래서 히로히토가 국민들에게 알리는 담화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전쟁에 책임을 진다”는 녹음을 한 젊은 남자는 그 녹음과 함께 할복자살한다. 그때 소쿠로프는 시종일관 이 영화를 거의 꺼져버릴 듯한 어둠 속에서 진행한다. 그래서 이미지들은 ‘일본의 태양’인 히로히토가 마치 금방이라도 꺼져서 어둠이 세상을 삼켜버릴 것처럼 희미한 빛과 거의 화면 전체를 지워가는 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사실 그 태양은 꺼져야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희미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는 유일한 빛이다. 이 영화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얼굴의 일부가 그림자들이 갉아먹은 것처럼 지워져 있지만 히로히토의 얼굴은 항상 온전하게 보인다.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인물을 소쿠로프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그때 소쿠로프는 ‘감히’ 히로히토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신이 가질 수 없는 삐죽대는 뻐드렁니와 주름 잡힌 피부를 거의 만질 것처럼 본다. 거기엔 어떤 신화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가서 인간의 얼굴을 드러낼 때, 그래서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조차, 그를 신으로 남겨놓기 위해 그 주변의 인물들이 기꺼이 복종하고 심지어 할복자살을 할 때 히로히토는 그가 염원하는 인간의 자리에 내려오지 못한다. 소쿠로프는 종종 히로히토의 얼굴을 바짝 다가가서 찍지만 <더 선>은 소쿠로프가 쓰고, 연출하고, 찍었다. 거의 폐소 공포증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이따금 히로히토의 상상을 따라 도쿄가 폭격당하는 장면이 꿈결처럼 펼쳐진다. 그때 불바다가 된 도쿄거리를 날아다니는 것은 마치 헤엄을 치는 듯한 물고기들이다. 그 기괴한 장면들은 이 태양의 신이 바다에서 온 것은 아닐까, 라는 환상에 빠질 만큼 소름 끼친다. 한 가지 더. 영화 중간에 나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 5번>은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이다. 내가 이 위대한 대가의 연주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나는 이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봐야 하는 10시간30분짜리 영화 <필리핀 가족의 진화> 올해 서울영화제에서 백지수표를 위임받고 거기에 다섯편의 추천작을 써넣었다. 그중 한편이 라브 디아즈의 <필리핀 가족의 진화>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려면 그날 하루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10시간30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건 그날 하루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로테르담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 다음날 아무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냥 하루 종일 이 영화를 다시 생각했다. 간단한 줄거리. 할머니와 그녀가 낳은 남매가 있다. 오빠는 세딸을 남겨두고 아내가 도망갔으며, 여동생은 돈 벌러 마닐라에 갔다가 강간을 당한 다음 미쳐서 쓰레기장에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믿는 아이를 주워서 고향에 돌아온다. 마르코스 대통령 독재치하의 필리핀은 이 작은 시골에서도 혁명군과 정부군의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오빠는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혁명군 편을 들면서도 빨치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이 문제가 되어서 매를 맞은 그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다. 오빠가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동네 남자들에게 납치되어서 강간을 당한 다음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주워온 소년은 총을 구한 다음 그들을 쏘아 죽이고 고향을 떠난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이제 오빠의 집과 소년이 떠돌다가 흘러들어간 집을 오가면서 진행된다. 오빠는 소년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 온 다음 소년을 찾아서 필리핀을 떠돌다가 도둑이 된다. 오빠는 그러면서 마닐라의 범죄조직에 연루된다. 그러는 동안 고향에서 오빠의 어린 딸을 노리는 시장은 계속 할머니를 찾아와 어린 그녀를 첩으로 달라고 조른다. 한편 소년이 머무는 집에서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는 금맥을 발견하겠다고 세 아들과 함께 정글을 헤매다가 그의 아들 중 한명이 금을 둘러싼 갈등 끝에 옛 친구의 부하들에게 맞아 죽고 실종된다. 아버지는 복수를 맹세한다. 그러는 동안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마닐라로 돌아온 민주인사 베그니노 아키노는 공항에서 총에 맞아죽고, 그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투쟁을 계속한다. 마르코스는 실각하지만 군부가 재집권을 하고, 민중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필리핀 가족들은 아직도 투쟁 중이다. 좀더 놀라운 이야기는 <필리핀 가족의 진화>가 5시간30분의 <남부, 바탕>, 그리고 9시간의 <예레미아>와 함께 3부작으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보아도 다 보지 못한다. 나는 두 번째 이야기만을 보았을 뿐이다. 라즈 디아브는 필리핀 근대사라고 할 이 거대한 서사를 8년에 걸쳐 찍었다. 문제는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정말 나이를 먹고, 한편으로 베타 캠으로 시작한 촬영은 DV로 바뀌면서 영화의 화질이 바뀐다! 게다가 필리핀 근대사의 사건들을 발췌한 텔레비전 화면들도 그냥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기술적인 완성도로 본다면 일부는 마치 아마추어가 찍은 것처럼 약점이 많고, 무엇보다도 사운드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너무 손실이 커서 일정 수준에 맞춰놓고 상영하면 중간에 안 들리다가 갑자기 큰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단지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거나 혹은 역사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여기에는 새로운 화법이 있다. 라즈 디아브는 역사와 가족사를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병렬시키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필리핀의 근대사는 숨 가쁘게 바뀌고 있는데도 거의 나라 끝에 위치한 것 같은 이 두 가족은 자본주의와 봉건적 관료제, 반근대적인 인습과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개인들의 욕심, 정치를 내세운 교활한 잇속, 민중투쟁을 하다가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순간 권력으로 변모하는 해방전선의 동지들, 그 속에서 부서져가는 여자들, 여자들 사이의 착취, 그 악순환의 고리들이 어떻게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때로 이것은 마치 현장에 취재나온 기자의 생방송 중계처럼 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의 시적인 실험영화처럼 DV를 이용한 무한정한 롱테이크로 진행되다가, 마닐라의 범죄 소굴에서는 장르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산만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사건 안에서 피와 살을 부여하는 것은 이것이 누가 보아도 전투적으로 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를 보지 말고 영화를 만든 과정을 보라고 충고했다. 만일 라즈 디아브의 <필리핀 가족의 진화>를 영화사의 계보에 놓아야 한다면 오페라풍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루키노 비스콘티의 <대지는 흔들린다>로부터 이어지는 긴 미학적-사회적-정치적-여정의 21세기 버전일 것이다. 사적인 고백. 그런데 이 영화를 추천한 다음 의기양양해하다가(*^^*) 갑자기 그날 아침 아, 어쩌면 그 상영시간에 질려서 아무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그리고 영화관에 도착했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자리에 28명의 관객이 각오라도 단단히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도 그 곁에 앉았다.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힘들었지만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사람이 중간에 가고, (중간에 세번의 휴식이 있었다) 신기한 건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몇 사람이 있었다. <필리핀 가족의 진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가 주는 관습과 싸우면서 투쟁적으로 획득하는 자유로운 리듬의 쟁취의 일부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는 2시간이라는 상영시간에 굴복해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하건 그 시간 안에 풀어내야 하는 시간의 물리적 경제성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모든 이야기가 2시간 안에 해결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는 순간 영화의 시간적 경제성이란 무효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28명의 투쟁적인 관객에게 동지들, 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단 한번의 상영. 우리는 2006년 9월11일 월요일,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나에게 영화 친구란 말하자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다. 지아장커에게 배우다 마지막 수다. 내가 가을이 막 시작되려는 9월의 첫 번째 주말에 들은 기쁜 소식은 지아장커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스틸 라이프>(三峽好人)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뉴스였다. 물론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걸 읽으면서 문득 구정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구정은 베이징전영학원에서 문학과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런 다음 지아장커 영화의 시나리오를 함께 쓰고 그의 조연출이 되었다. 그는 지아장커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고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1997년, 우리는 졸업할 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각자 앞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아장커는 여전히 영화를 찍고 싶어했으나, 아무런 대책없이 그와 함께할 친구는 없었으며, 모임은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조금도 슬프지 않았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이렇게 흘렀고, 우리는 생계의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바라볼 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졸업하기 4개월 전, 지아장커가 돈을 구해왔다. (중략) 지아장커가 나와 왕홍웨이(<소무>의 주연)를 찾아왔다. 우리 같이 영화를 찍자. 구정, 네가 조감독을 맡아주고, 왕홍웨이, 네가 주연을 맡아줘. 역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야. 우린 거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를 찍으러가니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는 거였으니까. 우리는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구정, ‘우리 같이 영화 찍자’, <지아장커, 중국영화의 미래>) 그 영화가 <소무>이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다음 1980년대 중국을 통과하는 가무단 이야기 <플랫폼>을 찍었고, 다퉁에 사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임소요>를 그렸고, 베이징 테마파크에서 일하는 청춘을 그린 <세계>를 찍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아장커는 여전히 중국 사회주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다. 그는 아주 멀리 왔지만, 그러나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그것을 지아장커에게 배운다. 이것이 막 시작하는 가을에 세 번째 배움이다. 오늘 밤에는 그에게 축하 메일을 쓸 생각이다. 그렇게 이 수다스러운 일개 영화평론가의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 당신은 오늘 밤 누구에게 메일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추석 종합선물 [6] - 유형별로 골라보는 DVD

오랜만에 긴~ 연휴를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길게는 9일을 쉴 수 있는 이번 연휴에 방바닥과 친구삼아 시체놀이를 할 여러분들을 위해 잠자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질 강추 DVD를 알려 드립니다. 자신에게 딱 맞는 영화를 골라보세요~ 하루종일 방콕, 폐인파 -TV 드라마 DVD 완전 정복 <24> 국내에서도 공중파 방영과 DVD 등을 통해 마니아층을 양산하고 있는 <24>는 테러진압 요원 잭 바우어(키퍼 서덜랜드 분)의 활약상을 그린 스릴러물. 24시간이라는 뜻의 제목처럼 하루 동안 벌어지는 긴박감 넘치는 사건을 24회로 나눠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프렌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프렌즈 전 시즌 패키지가 재발매 되었다. 카페인과 농담, 어리석은 연애에 구제불능 뉴욕의 여섯 친구들과 함께라면 추석이 짧아진다. <지구에서 달까지> 1998년 4월5일부터 12주 동안 를 통해 방영된 <지구에서 달까지>는 총 12부작으로 구성된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텔레비전영화로, 무한한 감동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톰 행크스는 평소 우주에 대한 관심을 제작자로, 또 에피소드 1편의 감독으로 그리고 배우로 참여하며 흔치 않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놀랄 만한 완성도로 이끌어간다. <연애시대> DVD 타이틀에 수록된 부가영상은 다른 드라마에 비해서 비교적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TV드라마의 한계를 뛰어넘는 뭔가를 기대할 순 없지만, 드라마에 매료되었다면 가볍게 즐기기엔 좋은 것들이 다수 있다. 드라마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주요 배우들과의 인터뷰 영상은 작품에 관한 개인적 느낌과 생각을 담고 있어 우선적으로 추천할 만한 부록이며, 노영심이 얘기하는 음악에 대한 설명, 번역작가 신유희로부터 들어보는 소설과 드라마의 차이가 다른 드라마 DVD와는 차별되는 성격을 지녔다. <부활> 수많은 ‘드라마 폐인’들을 배출한 <다모> <네 멋대로 해라> <발리에서 생긴 일>을 이어간, 또 한편의 ‘마니아 드라마’. 경쟁 드라마였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대중적 인기에 가려지긴 했지만, <부활>은 잘 만든 드라마로 손색이 없었다. <부활>은 엇갈린 운명을 살아가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로, 시종일관 탄탄한 구성으로 살인사건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을 밀도있게 그려낸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특히 첫 주연 작품임에도 1인2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엄태웅의 눈부신 연기가 발군이다. 인기작만 골라보는 실속파 -9월 마지막 주 판매 DVD 인기 순위 <왕의 남자> <왕의 남자>는 한정판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극장판과 일부 추가된 장면이 수록된 확장판을 함께 제공하며, 맛보기가 아닌 상당한 분량에 잘 구성된 부가영상으로 짜여져 있다. 부록은 극장판 디스크에 이준익 감독과 프로듀서, 조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진행하는 2개의 음성해설을 수록했고, 세 번째 디스크가 나머지 부록 모두를 담고 있다. 많은 부가영상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영화에 사용된 여러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현과 타>를 통해 이병우 음악감독의 자세한 해설을 들어볼 수 있고, <왕의 남자> 원작인 연극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爾(이), 왕의 남자 그 넘어>에서는 연출자로부터 들어보는 연극이 담고자 했던 의미, 실제 공연 모습의 일부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중요한 인물인 연산군에 대한 내용도 빠뜨릴 수 없다. <태풍> 곽경택 감독의 야심작 <태풍>은 결과적으로 어정쩡한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한국영화 사상 최대라는 제작 규모는 분명 그 과정을 궁금하게 만든다. 부록의 핵심은 다른 한국영화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제작다큐멘터리. 비록 영화상으로는 그 규모를 피부로 느끼기에 스펙터클이 떨어지긴 했지만, 제작다큐멘터리를 통해 보는 촬영현장의 느낌은 대작다운 모습이다. 최초의 영화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로케이션, 비주얼 효과, 미술과 세트 제작 등의 과정을 꼼꼼하게 수록해서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특수효과와 관련한 부분은 할리우드영화를 보는 듯한 색다른 기분도 든다. <빨간 모자의 진실> 잘 알려진 고전 동화의 이야기를 살짝 뒤집으면서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빨간 모자의 진실>. DVD는 영어 더빙과 함께 김수미, 강혜정 등이 참여한 우리말 더빙까지 수록해 메리트가 있다. 다만 우리말 더빙이야 예외이지만, 한글자막의 경우 지나칠 정도의 우리식 표현들이 많아서 아쉽다. 화질과 음향은 대단히 우수하며, 부가영상으로 제작진의 인터뷰 중심으로 진행이 되는 12분 분량의 메이킹 필름과 5개의 삭제장면, 흥겨운 뮤직비디오 영상을 제공한다. <식스틴 블럭> 법정까지 죄수를 호송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찰 내부의 음모와 그에 맞서는 노쇠한 경관 잭 모슬리의 활약을 그린 리얼타임 액션무비! 브루스 윌리스는 은퇴를 앞둔 맥빠진 경관을 연기하지만, 16블록을 향하는 과정에서 왕년의 존 맥클레인의 일부를 만날 수 있다.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DVD 타이틀은 극장에서와는 또 다른 엔딩 시퀀스, 리처드 도너와 브루스 윌리스의 인터뷰, 메이킹 필름을 수록했다. <킹콩> 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규모를 생각하면 이번 DVD 타이틀은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맛보기조차 결코 평범하지 않다. 2장의 디스크를 통해 제공되는 부록은 제작과정과 영화배경에 대한 안내의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 제작 관련 영상과 영화배경인 1933년 뉴욕에 관한 부록도 뛰어나지만, 역시 이번 타이틀의 핵심은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해골섬에 있다. ‘해골섬의 역사’는 DVD에 수록된 부록 중에서 단연 최고다. 분량은 20분이 채 되지 않지만, 영화 팬들이 보기에는 이 이상의 부록이 없다. 영화의 중요한 무대인 해골섬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소개하고 있고, 매우 짜임새있는 구성으로 흥미를 더한다. 심오한 영화의 세계에 빠지고픈 학구파 -명불허전, 안보면 손해 <기타노 다케시 컬렉션> 이번에 출시된 <기타노 다케시 컬렉션>은 한 제작사가 그 DVD들을 공들여 모아놓은 결과물이다. <돌스>는 기출시된 DVD의 화질이 안 좋았던 점을 감안해 새로 제작됐으며, <자토이치>와 <돌스>의 경우 부록이 보강됐다. 전체적으로 영상과 소리, 부록이 평균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기타노의 작품 세계를 경험하기에 당분간 더 좋은 선택은 없지 싶다. <3-4×10월> <그 여름 조용한 바다> <소나티네> <모두 하고 있습니까?> <키즈 리턴> <하나비> <기쿠지로의 여름> <브라더> <돌스> <자토이치>를 11장의 디스크에 수록한 두툼한 박스를 열면 영화평론가 모은영의 해설책자가 손에 잡힌다. <장 뤽 고다르 컬렉션> <장 뤽 고다르 컬렉션>에 들어 있는 네 작품의 스펙트럼은 넓다.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즐겁고 낭만적인 소품 <국외자들>, 68혁명 직전에 만들어진 부르주아 부부의 끝나지 않는 악몽 <주말>, ‘지가 베르토프 집단’ 시절에 장 피에르 고랭과 만든 <만사형통>, <영화사>를 만들던 1990년대를 마감하는 극영화 <포에버 모차르트>-30년을 관통하는 네 작품은 고다르의 역사이자 분명 영화의 한 역사다. DVD에 포함된 영화평론가 김성욱의 음성해설과 책자는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컬렉션> 각 영화의 마지막- 노트 사이 꽃잎을 볼 때(<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언덕 너머로 두 아이가 넘어갈 때(<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남자가 희열에 차 뛰어올 때(<올리브 나무 사이로>), 죽음을 결심한 자가 석양을 볼 때(<체리향기>)- 에서 관객은 문득 영화 속 한 자리를 차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창조자의 손길이 인간과 그가 사는 터전을 스쳐간 이들 작품을 보며 그 손길 아래에 경계가 있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 아닌가 싶다. 키아로스타미 작품의 유일한 경계는 삶과 죽음 사이에만 존재한다. <짐 자무시 컬렉션> 자무시의 데뷔작 <영원한 휴가>부터 <천국보다 낯선> <다운 바이 로> <미스테리 트레인> <지상의 밤> <데드맨>까지를 수록한 <짐 자무시 컬렉션>이 출시됐다. 세편의 흑백영화와 세편의 컬러영화 중 흑백 편을 들어주고 싶은 건 필자의 취향이겠고, 어쨌거나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다이아몬드나 황금이 아닌 유리로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을 세공해낸 자무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팝콘&콜라] ‘KBS 독립영화관’ 폐지론 이의 있소

매주 토요일 오전 1시10분, 켜진 텔레비전보다 꺼진 그것이 많은 늦은 밤 한국방송 제1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있다. ‘KBS 독립영화관’,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영화 프로그램이다. 지난 2001년 5월 방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450여편의 국내외 독립영화들을 방송해왔다. 하지만 시청률 조사기관인 티엔에스 미디어 코리아의 최근 조사결과를 보면, ‘독립영화관’의 평균 시청률은 1%를 넘지 않는다. 초라한 시청률은 이 프로그램의 발목을 잡았다. 최근 한국방송의 가을 프로그램 개편에서 ‘독립영화관’ 폐지 논의가 오갔다. 한국독립영화협회는 물론, 각 지역 독립영화 단체, 문화연대, 한국영화감독조합 등 영화 관련 단체들은 즉각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때마침 한국방송 쪽은 사장 선임 문제 등 복잡한 내부사정 때문에 개편 자체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영화관’의 폐지도 일단 보류됐다. 하지만 ‘독립영화관’의 폐지 논란은 언제든, 아마도 조만간 또다시 불붙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바닥을 헤매고 있는 시청률이 갑자기 뛰어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방송국 쪽이 프로그램 폐지의 유혹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 관계자들과 관련 단체들은 저조한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관’ 폐지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독립영화관’은 거의 유일하게 일반인들에게 독립영화를, 다시 말해 다양한 영상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저예산인데다 대중적이지도 않은 독립영화들의 경우, 상업영화들처럼 스크린을 많이 확보할 수도, 마케팅비를 지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공공의 자산인 지상파 방송의 역할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대중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청률이 낮아 광고가 붙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립영화 관련 프로그램의 편성을 게을리 해왔다. 상업영화 방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을 선투자하기도 하고, 똑같은 상업영화를 여러번 재방송하면서도, 참신한 독립영화들한테는 단 한 번의 방송 기회조차 주지 않아 왔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의 방송들이 자국 영화산업 발전과 다양한 영화문화를 추구하기 위해 독립영화 및 단편영화들을 정규 프로그램화하고 있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영화관’의 역할은 단순한 영화소개 프로그램 이상이었다. ‘독립영화관’은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했거나 제한적으로 상영된 독립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상영’했다. 한국방송은 공영방송이고, ‘독립영화관’이 방영되는 제1 텔레비전의 경우 광고도 없다. 따라서 문화다양성 차원에서라도 ‘독립영화관’ 혹은 그런 유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편성할 ‘의무’와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낮은 시청률? 방송사 처지에서야 어쨌든 간과할 수 없는 문제겠지만,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시간대로 편성시간을 바꾸는 등 ‘일단’ 의미있는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부터 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추석 맞이 어메이징 한국영화 레이스 [3]

Mission 4. 연리지 나무를 찾아라 도전경로: <…홍반장> → <각설탕> → <연리지> 도전과제: 미션 4에 접어들고 과제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도전자들도 지쳐갑니다. 장생과 공길 커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연애참> 커플은 조금만 수틀리면 육두문자를 남발해 점점 레이스의 왕따가 되어가는군요. 그래도 소정의 상금을 건 레이스는 계속됩니다. 첫 번째 과제는 제주도로 내려가 신비의 인물, 홍반장을 찾는 겁니다. 이 남자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지만, 워낙 직업도 많고 여기저기 두문불출하는지라 의외로 찾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홍반장을 찾는다 해도, 그는 쉽게 다음 과제를 알려주지 않을 겁니다. 자장면 배달이나 도배, 마을 청소 등 뭔가 노동을 해야만 간신히 입을 열 사람이니, 도전자들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홍반장의 지시대로 요상스럽게 생긴 나무, 연리지를 찾아가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딱 붙어버린 걸 뜻하는데, 여기에는 닭살 커플 혜원(최지우)과 민수(조한선)의 안구에 습기 찰 만한 러브스토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이 연인들을 상징하는 나무라나요? 문제는 거기까지 어떻게 이동하느냐는 것인데, 반드시 말을 타고 가야 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가장 먼저 과제를 수행하는 팀은 <각설탕>의 명마, 천둥이를 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물론 도착한 순서에 따라 경험 많은 준마들이 주어지겠죠? 제일 마지막으로 과제를 수행한 팀은 걸어서 찾아다녀야 할 테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 장애물: 과제를 수행하기에 앞서 권투 글러브와 헤드기어, 마우스피스를 착용하세요. 각팀 중 한 사람은 <주먹이 운다>의 강태식(최민식)처럼 4시간 동안 인간 샌드백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 샌드백을 하며 번 돈으로 제주도행 교통비에 보태세요. 배를 타고 가느냐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는 전적으로 도전자들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도전결과: 아무리 백만불짜리 다리를 가진 기봉이라 해도, 노모와 함께 거친 레이스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체력전에서 밀린 기봉이 모자 탈락! 1위는 예상대로 말타기와 각종 재주에 능한 장생-공길 팀이 차지했습니다. Mission 5. 용두리의 인구를 조사하라 도전경로: <엽기적인 그녀> → <마파도> → <잘살아보세> 도전과제: 자, 미션의 난이도는 점점 높아집니다. 죽도록 고생하는 것에 비해 과연 얼마나 보람있는 짓인가 의심되는 시점입니다. 어쨌든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어메~ 이 징한 레이스>. 미션 5의 첫 과제는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전지현)와 견우(차태현)가 묻어놓은 타임캡슐을 찾는 겁니다.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들고 산등성이로 올라가세요. 중요한 것은 타임캡슐이 묻힌 나무를 제대로 찾는 것인데, 엉뚱한 구덩이를 팠다가는 레이스 대열에서 이탈당하기 십상입니다. 타임캡슐을 찾아 다음 미션을 확인했다면, 양팔을 쫙 벌려 호기롭게 “난 바람이 될 거야!”라고 한번 외쳐주세요. 그리고는 다음 미션 장소인 마파도로 향합니다. 마파도로 가는 교통수단은 가뭄에 콩 나듯 드나드는 선박뿐인데, 배멀미에 약한 도전자들은 고생 좀 하겠네요. 마파도에서의 과제는 대마밭을 샅샅이 뒤져 다음 도전과제가 적힌 쪽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넓은 대마밭을 뒤지는 것도 일이지만, 마파도 거주민인 다섯 할머니들이 도전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무임금 노동으로도 모자라 성희롱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요. 마파도에서의 과제가 끝나면, 최종 목적지인 <잘살아보세>의 용두리로 향하게 됩니다. 전국에서 출산율 1위를 자랑하는 이곳은, 마을 이장 변석구(이범수)와 가족계획요원 박현주(김정은)의 주도하에 피임 열풍이 한창입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용두리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이 마지막 과제입니다. 단, 뱃속에 있는 태아도 포함해야 하니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빠른전진: 길(道)이 없는(無) 마을(里), 무도리. 한번 들어가면 함흥차사라는 이 자살명당으로 향하세요. 낮밤 가리지 않고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골을 거쳐, 엉큼한 세 노인네를 모두 극복하면 마을 절벽으로 가는 겁니다. 그곳에서 번지점프에 성공하면 마지막 과제로 바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도전결과: <짝패>의 두 친구가 ‘빠른전진’을 택했으나, 무도리에서 지나치게 헤매는 바람에 1위는 태극기 형제에게 돌아갔습니다. 난폭한 <연애참> 커플은 다른 팀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결국 최종 레이스 대열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Mission 6. 원효대교에서 활을 쏘아라 도전경로: <친절한 금자씨>(선택도전) → <지구를 지켜라!> → <괴물> 도전과제: 드디어 황당하고 난데없고 어이없는 <어메~ 이 징한 레이스>의 마지막 미션에 접어들었습니다. 남은 팀은 태극기 형제와 광대 커플, 그리고 충청도 주먹계의 전설적인 짝패입니다.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친절한 금자씨>에 관련된 선택도전입니다. 이번 과제에서 도전자들은 직접 일정량의 수입을 올려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금자씨 케이크를 만들어서 팔거나, 지정된 동네의 집집마다 빨랫줄을 검사해, 널려 있는 금자씨의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파는 겁니다. 케이크 만들기는 빠른 학습능력과 세심한 미각이 요구되며, 원피스 발견하기는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니 둘 다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친절한 금자씨> 과제가 완수되었다면, 다음은 <지구를 지켜라!>로 넘어갑니다. 첫 과제에서 번 돈으로 병구(신하균)가 강 사장(백윤식)에게 가했던 고문도구를 구입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때밀이 수건이나 물파스야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텔레파시 차단모자와 고문의자 등은 웬만해선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까지도 해결했다면(대단한 도전자들입니다!), 이제 결정적인 과제가 남았습니다. 한국영화 흥행신화를 다시 쓴 문제의 그 영화! <괴물> 관련 미션입니다. 도전자들은 괴생물체가 은거지로 삼았던 한강 원효대교를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썩는 냄새 진동하는 하수구는 물론, 아슬아슬한 철각까지도 모조리 말입니다. 그곳에는 <어메~ 이 징한 레이스> 제작팀이 숨겨놓은 남주(배두나)의 양궁 도구가 있을 겁니다. 그걸 가지고 원효대교 위에 서서 한강에 그로테스크하게 떠다니는 오리배를 맞추세요.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오리배를 맞춘 팀이 이번 레이스의 최후 승자가 되겠습니다. 도전결과: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두둥~ 네! 왕의 남자들, 장생과 공길 커플이 차지했습니다. 한끝 차이로 엎치락뒤치락 하던 경쟁자들을 젖히고 마지막 활쏘기 과제에서 특유의 재주를 발휘했군요. 태극기 형제와 충청도 짝패는 체력이나 몸싸움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았지만, 광대들의 다양한 경험과 잔재주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최후 승자 <어메~ 이 징한 레이스>의 어메이징 상품 이제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기쁨을 나누는 장생과 공길. 최후 승자인 광대 커플에게는 상금으로 한가위 유흥비 19만9900원과 함께 최종 미션에서 사용된 오리배와 양궁 도구를 상품으로 드립니다. (뭐, 상품이 너무 알량하다고? 그래서 애초에 말했잖아. 100만달러 주는 <어메이징 레이스>가 아니라고. 그리고 니들, 대박 터져서 돈 많이 벌었잖아?!)

<팔월의 일요일들> 양은용씨 “독립영화계 ★ 떴대요”

배우, 특히 여배우와 인터뷰 할 때는 보통 이렇다.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메이크업 아티스트, 영화 제작사나 홍보사 관계자 등이 각각 1~2명씩, 그러니까 네댓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배우를 수행하고 등장해 인터뷰 현장을 가득 메운다. 그런데 〈팔월의 일요일들〉(이진우 감독)의 양은용(사진)은 달랐다. 그는 일정을 직접 챙겨 택시를 잡아타고 인터뷰 장소에 나왔고, 사진을 찍기 전 파우더 퍼프를 손수 들고 메이크업을 보정했다. 챙겨 온 의상을 가방에서 꺼내들고 모퉁이 쪽에 살짝 숨어 갈아입기도 했다. 독립영화에 출연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다가 매니지먼트사를 뛰쳐나온 이 배우의 낯설지만 신선한 작업방식이었다. “자유롭고 싶었어요. 비주류여도 상관없고, 톱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고 살면 돼요. 혼자서 연기, 매니지먼트, 때로는 운전까지 다 하니 불편하긴 하지만 그런 게 또 재미있기도 해요.” 에스비에스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텔레비전 드라마 〈비단향꽃무〉, 영화 〈인터뷰〉 〈공공의 적〉 등에 출연했던 양은용은 조범구 감독의 〈양아치어조〉를 만나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양아치어조 출연 제의를 거절하려고 감독님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읽어보고는 덥썩 하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군 홍보영화 출연도 하라고 했던 회사에서 돈이 안 된다며 〈양아치어조〉는 못하게 했어요. 다른 때는 싸우기 싫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좋은 작품을 접하고 나니 싸우게 되더라고요.” 〈양아치어조〉를 통해 독립영화에 첫발을 내디딘 뒤 양은용은 〈내 청춘에게 고함〉, 〈팔월의 일요일들〉 등 근래에 크게 주목받은 독립영화들에 잇따라 출연했다. ‘고 이은주를 닮은 공채 탤런트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도 순식간에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바뀌었다. “겨우 4편 출연했을 뿐인걸요. 하지만 독립영화가 매력적인 건 사실이에요. 제작 환경은 열악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잖아요. 감독과 스태프들의 열정도 대단하구요. 좀 더 많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좋은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저한텐 기회죠.” 그런 의미에서 29일 개봉한 〈팔월의 일요일들〉은 양은용에게 더 많은 기회와 과제를 던져준 작품이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동료 의사, 환자의 보호자 등과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팔월의 일요일들〉이라는 절판된 책을 수소문하는 외로운 의사 ‘시내’ 역을 맡았다. “이진우 감독님은 ‘나한테 묻지도 말고, 분석도 말라, 너무 많이 보여주지도 말라, 책을 읽듯 연기하라’고 하셨어요. 여백이 많은 영화에서 그에 걸맞은 연기를 하려다 보니 감이 잘 안 와서 헤매기도 했는데, 그게 다 드러나 보이는 것 같아서 잠이 안 올 정도로 괴로웠어요.” 그는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계속 연기할 거고, 기회가 되면 희곡을 쓰거나 연극 연출을 하거나 단편영화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직 차기작이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팬 카페에 남긴 이메일 주소나 지인들을 통해 건너건너 연락처를 물어오는 감독들이 있다”며 곧 차기작이 결정될 거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현지보고] <가디언> LA 시사회 및 주연배우 인터뷰

해안경비대, 할리우드의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하다 미국은 영웅을 좋아한다. 미국만큼 영웅이 흔한 곳도 없다. 서부영화의 고독한 총잡이부터 슈퍼맨, 스파이더 맨 그리고 뉴욕 소방관에 이르기까지 ‘영웅적’ 존재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평범한 개인도 고결하고 뛰어난 ‘신화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미국적 의미의 영웅이다.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사회적 시스템의 영향력은 종종 무시된다. ‘영웅 만들기’의 내러티브는 미디어뿐 아니라 일상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 한때 영웅들은 공권력이나 초능력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 9·11 이후 영웅들은 일상에서 ‘발견’된다. 공공서비스를 담당하는 소방관이나 의료진의 활약상은 이미 스크린과 텔레비전을 점령했다. 더이상 남아 있는 영웅이 있을까 싶지만 할리우드는 기어이 새로운 영웅을 찾아냈다. 소박하지만 철저하게 미국적인 영웅 신화 이번에는 ‘해안경비대’(Coast Guard)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인명구조대(Rescue Swimmer)가 소방관의 뒤를 이어 미국의 ‘보호자’(The Guardian)로 선을 보인다. 케빈 코스트너와 애시튼 커처 두 배우를 내세운 <가디언>은 그런 의미에서 시의적절하다. 해안경비대를 일반인들의 시야에 등장시킨 것은 2005년의 카트리나 재앙이었다. 총칼을 든 군인과 경찰이 무력하게 물에 잠긴 뉴올리언스를 배회하고 있을 때, 해안경비대는 3만명에 이르는 수재민들을 구하고 대피시켰다. 세계의 경찰, 미국이 자기네 땅에서 일어난 대재앙에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일사불란한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구조한 해안경비대의 활약은 예견치 못한 것이었다. <가디언>은 칭송받지 못했던 숨은 영웅, 해안경비대 구조팀 이야기를 스크린에 불러낸 첫 번째 시도다. 첫 시도가 흔히 그렇듯, <가디언>은 폭풍 몰아치는 심해에서 조난당한 선원들을 맨몸으로 구해내는 이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어떻게 훈련받을까, 이들의 일은 그리고 생활은 어떨까라는 많은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물론 디즈니가 제작한 할리우드영화답게 영웅되기의 고뇌와 어려움, 극적인 활약상 등의 전형적인 드라마로 얼개를 짰다. <도망자> <언더 씨즈> <홀> 등에서 드라마틱한 상황에 처한 강인한 인물들의 활약상을 주로 다뤄온 앤드루 데이비스 감독을 매혹시킨 것도 바로 누구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웅의 세계였다. “60m가 넘는 얼음장 같은 베링해에 뛰어들어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의 모습은 지금껏 누구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기 위해 세명의 베테랑 해안경비대 구조팀이 영화에 기술고문으로 참여했다. <가디언>은 이례적으로 장시간 공을 들여 해안경비대 훈련학교의 훈련과정을 그려낸다. 물탱크 속 폭풍의 스펙터클 전설적인 베테랑 구조대원 벤 랜들 역을 맡은 케빈 코스트너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게 임무인, 그러나 해병대나 해군처럼 화려하고 섹시하지 않은” 이 특수한 부대에 마음이 이끌려서 <가디언>에 참여했다. <늑대와 춤을> 이후 <포스트맨> <오픈 레인지>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전작에서 비슷비슷한 ‘미국적 영웅’을 연기해온 케빈 코스트너가 다시 ‘보호자’라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오십을 넘긴 이 노익장은 예전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듯한’ 영웅이 아니라, 어느덧 담담하게 나이 먹은 어른의 풍모를 보여준다. “배우가 자신의 나이에 맞는 역을 연기할 때 영화가 성공적일 수 있다”고 믿는 스크린 밖의 케빈 코스트너는 그의 스크린 속 페르소나들보다 한결 매력적이다. <70’s 쇼>의 코미디 배우로 스타의 후광을 손에 넣은 애시튼 커처에 대한 선입견을 우려해서일까. 기자회견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애시튼 커처의 어른스러움을 친절히 강조하는 걸 잊지 않는다. 촬영 첫날, 물탱크 속에서 10시간을 보내고 나서 자신의 트레일러로 일부러 와서는 힘든 점과 불편한 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건 입지 말고, 저건 하지 말고 끝도 없이 당부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단다. 영화에서 랜들이 구현하는 ‘소박한 영웅’의 전설을 계승하게 될 애시튼 커처(제이크 피셔 역)는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케빈이 내 볼기를 후려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농담으로 선배 배우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다. 두 배우가 극진히 서로를 배려해야 했을 만큼 <가디언>의 실제 촬영은 배우들에게 육체적으로 도전이었다. 평소에도 물속에 들어가길 꺼리는 애시튼 커처의 입장에선 8개월 전부터 시작된 트레이닝이나 수영장에서 보낸 많은 시간들이 쉽지 않았을 터이다. <타이타닉>의 특수효과 담당이었던 스콧 피셔와 앤드루 피어스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마히르 아메다 프로덕션디자이너가 만들어낸 거대한 물탱크 속의 베링해도 녹록지 않은 적수였다. 테마파크의 인공 파도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물탱크 속의 폭풍은 스크린 속 영웅들에게 할리우드가 제공할 수 있는 스펙터클로는 손색이 없다. <가디언>의 애초 촬영 예정지였던 뉴올리언스 해변을 쓸어버린 카트리나의 위력에 버금갈까마는. 새로운 영웅 탄생에 박수를 보내는 <가디언>은 그래서 철저히 미국적이다. 아마도 영화 개봉 이후 해안경비대 지원자가 늘지 않을까. “패배 속에서 진정한 영웅이 탄생한다” 주연배우 케빈 코스트너, 애시튼 커처 인터뷰 -영웅에 대해, ‘언더독’의 경험에 대해. =케빈 코스트너: 누구나 인생에서 재점검을 하는 순간이 있다. 애시튼은 지금 막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애시튼 커처가 과연 심각한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하고 지켜보는 때니까. 그런데 나는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는 게 바로 실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멋진 미국 영웅의 정신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비난하지 말 것, 해명하지 말 것” 아닌가. 인생이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습일진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만든 영화가 돈을 많이 벌면 그 영화는 성공한 걸까. 성공이 모든 걸 정당화할까. 영웅에 관한 진실이 하나 있다면 그들도 때때로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영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자이언트>에 미국 영화사상 가장 영웅적인 순간이 등장한다. 록 허드슨이 바에서 힘에 부치는 싸움을 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지금까지는 한번도 당신보다 큰 사람들과는 상대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패배 속에 진정한 영웅이 탄생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다. 물론 우리도 상처는 받는다. =애시튼 커처: 성취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극복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어야 더 의미가 있다. 내 목표는 항상 다음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전보다 더 나은 다음 단계에. -영화에 대해서, 영화배우로서의 다음 선택에 대해. =케빈 코스트너: 아직도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다닌다. 사람들이 왜 영화를 볼까 종종 생각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팔에 소름이 돋고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그런 느낌 때문이 아닐까. 영화의 마력은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도 ‘바보처럼’ 그런 경험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영화의 마력을 믿는다. 산타클로스라든가 바다 밑에 사는 요정이라든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들도 일단 스크린에서 소리쳐 외치고 나면, 그 순간만큼은 믿게 된다. 지금까지 장르영화를 많이 했는데, 사람들이 내가 계속 자기 복제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걸 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버전으로 계속 만든다는 거지. 그런데 난 만족한다. 분명 영리한 사업 전략은 아니지만. 난 계속 이 장르를 ‘방문’할 것이다. 또 다른 나이대의 내 모습으로. =애시튼 커처: 영화 보면서 운 적은 한번도 없다. 어릴 적 어드벤처영화를 보러 간 일이 기억난다.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넉넉지 않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극장에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많이 봤다. <구니스>는 지금도 기억난다. 나도 그 모험에 같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게 아니라 이미 같이 가고 있었다. <꿈의 구장>을 봤을 때는, 우리집 뒤에 있는 옥수수밭에서 야구 선수가 걸어나올 것만 같았다. 난 정말 믿었다. 내가 그 속에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직접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준다. 나에게는 이것이 영화의 매력이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용감했던 순간에 대해. =케빈 코스트너: 아마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내 심장의 울림’에 따른 것이다. 어릴 적에 비즈니스도 학문에도 소질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가야 했겠지만, 연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나는 매우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기자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 연을 끊는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연기를 한다고 해서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한다고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어떤 확신도 없었다. 그래도 내 인생에 한번, 관습을 깨뜨리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인 게 가장 용감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 일이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라고 말이다. =애시튼 커처: 영웅적인 일을 기대할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아니다. 제일 용기가 필요한 일은 나의 감정과 약점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이다. 나의 상처를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