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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회 부산 국제영화제/멜로영화(1)

혼수상태에 빠진 식물인간과도, 언어가 안 통하는 타인과도, 친구의 부인과도, 심지어 곰과도. 생명체와 생명체가 만나는 곳에 사랑이 있고 그곳에는 아련한 이야기가 피어나기 마련이다. 어느 해보다 추워진 계절에 찾아온 영화제, 부산의 초겨울 바람을 따뜻하게 덥혀줄 멜로드라마 몇편을 미리 호주머니 속에 챙겨보자. <그녀에게> Talk to Her ▶ 오픈시네마/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2002년/ 112분 ▶ 11월15일 오후 8시 시민회관, 11월22일 오후 8시 시민회관 그녀와 함께 살 수 없다면, 그녀와 함께 잠들 수밖에. 기자인 마르코는 정열적인 투우사 리디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리디아는 투우경기 중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남자간호사 베니그노는 아름다운 무용수 알리시아를 흠모하지만 알리시아 역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이 두 남자가 병원에서 만난다. 그러나 리디아가 죽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마르코와는 달리, 베니그노는 시체처럼 누워 있는 알리시아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으며 지난 4년 동안 그녀를 정성껏 씻고 문지르고 이야기를 건네고 사랑한다. 그러나 두 남자 사이에 우정이 싹틀 무렵, 베니그노는 알리사아를 강간한 죄로 투옥된다. <라이브 플래쉬>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전작들의 격한 호흡을 차분하게 고른 채 연출한 <그녀에게>는, 오픈 엔디드로 끝은 맺은 마지막 챕터를 포함해, 3개의 챕터 속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 네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오늘 영화를 보러 갔었어….” 베니그노가 잠든 알리시아의 몸을 닦아주며 소곤소곤 전달하는 영화 속 영화, 화학약품을 잘못 마신 뒤 몸이 줄어든 남자가 연인의 질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살았다는 흑백무성영화 <줄어든 연인>(Shrinking Lover)은 알리시아를 향한 베니그노의 숭배와 갈망을 투영시킨다. 또한 리디아가 투우복을 갈아입는 과정과 알리시아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히는 과정은 마치 종교의식 치르듯 표현되면서 이 영화가 ‘그녀’들에게 향하는 성스러운 시선을 느끼게 해준다. <뻐꾸기> The Cuckoo ▶ 월드시네마/ 러시아/ 알렉산드르 로고슈킨/ 2002년/ 100분 ▶ 11월21일 오후 5시 부산극장1관, 11월22일 오후 2시 대영시네마1관 4년 동안 생과부 신세, 남자 둘도 모자란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버려진 핀란드 저격수 베이코는 천신만고 끝에 사슬을 끊고 근처 인가로 찾아든다. 그러나 그 천막엔 이미 자동차 폭발 속에 살아남은 러시아군인 이반이 사미족의 여인 아니의 간호를 받으며 누워있다. 4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가던 아니에겐 그들이 어느나라 군인이건 간에, 그저 사내로 보일 뿐이다. 하여 젊고 몸집 좋은 핀란드산 베이코가 늙고 부실한 러시아산 이반보다 상종가인 것은 분명한 사실. 각각 러시아어, 핀란드어, 사미족 부족언어 외에는 할 수 없는 완전히 꽉 막힌 커뮤니케이션 상황 속에서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고, 두 남자 사이엔 생활력 강하고 활기찬 아니를 둘러싼 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나에게 있어 전쟁은 끝났어.” 1999년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체크포인트>로 베를린영화제를 비롯 유수의 영화제에서 인정받고 흥행성적까지 올렸던 러시아 감독 알렉산드르 로고슈킨의 최근작인 <뻐꾸기>는 전작이 그러했듯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되 이데올로기기가 아닌 포연 속에 가려진 인간들의 모습과 사랑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다. 특히 이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언어로 완전히 딴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몇몇 장면들은 웃음을 자아낸다. 시종일관 능청스럽고 건강한 유머를 선사하지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주술적인 영상과 꽤나 극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올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가족영화 ●지옥을 보고 싶어 우리집으로 와 행복한 가정은 없다. 덜 불행한 가정은 있겠지만. <지옥 같은 우리집>이 그리는 그림은 말 그대로 ‘지옥도’다. 모든 일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다혈질의 가장, 재봉틀 정비사와 바람이 난 엄마, 포르노 잡지에서 담배까지,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사춘기 막내아들, 어떻게 하면 아버지 눈을 피해 남자친구와 섹스를 할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작은딸, 이처럼 하나같이 ‘따로국밥’인 가족들의 갈등은 미국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던 큰딸의 귀국으로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작은딸의 결혼식을 엉망으로 망쳐버린 큰딸의 스트립쇼 이후 가족은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반대로 <작은 불행>은 가족이란 서로 차갑게 증오하다가도 서로 어깨를 맞잡고 눈물을 흘리곤 하는 묘한 관계란 사실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덴마크의 한 가정은 슬픔에 빠진다.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남편과 두 딸, 아들, 남편의 동생의 삶은 각각 바뀌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지만, 이는 결국 이들을 매어놓은 인연의 끈이 질기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도그마의 영향권 아래 있음이 분명한 아네트 올슨 감독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이들 가족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이들 사이에 치솟는 불길과 한없는 평화, 음험한 비밀과 신성한 소통을 담아냈다. 아쉬갈 바섬바기 감독의 <할레드>는 죽은 아빠의 시체에 이불을 덮고 세상에 알리지 않던 정재은 감독의 단편 <도형일기>의 소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토론토의 빈민 지역에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10살 꼬마 할레드는 병에 시달리던 엄마가 죽자 사회기관에 맡겨질 것이 두려운 나머지 이를 숨긴 채 평상시처럼 생활한다. 엄마의 시체가 썩어들어가는 와중에 먹을 것은 떨어지고, 집주인은 집세를 닦달하며, 사회복지사는 자꾸만 찾아온다. 황량한 도시를 홀로 살아가려는 씩씩한 소년 할레드는 현관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일전에 돌입한다. <의리없는 전쟁> 등 굵직굵직한 남자영화를 선보였던 사카모토 준지의 최신작 <내가 사는곳>은 의외로, 향수 가득한 따뜻한 영화다. 어린 이타와 니타 형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다른 장성한 누나만을 남겨놓은 채 또 어딘가로 홀연히 떠나가고 만다. 하지만 아이들은 외롭지 않다. 가히 대체가족의 판타지라 할 만한, 저마다 문제투성이지만 마음만은 착한 동네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욘드 사일런스>의 카롤리네 링크가 연출한 <노웨어 인 아프리카>는 또 다른 삶의 터전에서 가족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영화다. 2차대전 발발 직전 독일계 유대인 레드리히 가족은 나치를 피해 아프리카로 간다. 처음엔 미개한 환경과 고립감이 업습해오는 아프리카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은 점점 그곳의 사람들과 자연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한다.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의 다채로운 풍경과 메뚜기떼의 습격 등 압도하는 듯한 영상미는 이 영화의 백미. 시간표 지옥 같은 우리집 All Hell Let Loose / 월드 시네마/ 스웨덴/ 수전 타슬리미/ 88분 / 11월16일 오후 8시 대영1, 11월20일 오후 2시 메가박스8 작은 불행 Minor Mishaps / 월드시네마/ 덴마크/ 아네트 올슨/ 105분 / 11월18일 오후 8시 부산 2, 11월21일 오후 8시 메가박스5 할레드 Khaled / 월드시네마/ 캐나다/ 아쉬갈 마섬바기/ 85분 / 11월17일 오후 2시 대영1, 11월20일 오후 8시 메가박스5 보쿤치- 내가 사는곳 Bokunchi - My House / 아시아영화의 창/ 일본/ 사카모토 준지/ 116분 / 11월15일 오후 5시 부산2, 11월18일 오후 5시 메가박스6 노웨어 인 아프리카 Nowhere in Africa / 오픈시네마/ 독일/ 카롤리네 링크/ 141분 / 11월15일 오후 1시 30분 시민회관, 11월17일 오전 11시 시민회관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니르 버그만의 <브로큰 윙스>, 도쿄영화제 그랑프리

61편 상영 11월4일 폐막, <쓰리> <밀애> 등 한국영화도 좋은 반응10월26일부터 도쿄 시부야에서 열렸던 도쿄국제영화제가 11월4일 막을 내렸다. 지난해는 9·11테러의 영향으로 행사 방문을 취소한 게스트가 많았지만, 올해는 개막작인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주연 배우 톰 크루즈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함께 개막식에 참석해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며 출발했다.올해 도쿄영화제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61편의 장단편이 상영됐다. 3편 이내의 작품을 연출한 신인감독들의 작품을 심사하는 경쟁부문에는 본래 총 15편이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브라질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신의 도시>, 대만 치옌 감독의 <블루 게이트 크로싱>, 이란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고향의 노래> 등 3편이 다른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중복 초청돼 있음이 밝혀져, 개막 직전 비경쟁으로 부문을 바꾸어 상영됐다. 이들 세 작품은 작품성이 높을 뿐 아니라, 관객의 지지도 많았기 때문에 경쟁부문 누락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뤽 베송을 심사위원장으로 내세운 심사위원단은 결국 다른 12편 중에서 이스라엘 출신 니르 버그만 감독의 <브로큰 윙스>에 최고상인 도쿄 그랑프리를 안기며 상금 1천만엔을 건넸다. 심사위원 특별상은 일본 나카타 유우지 감독의 <호텔 하이비스카스>에 돌아갔다.경쟁부문 이외의 프로그램으로는 예년처럼 ‘특별 초대’와 ‘일본 시네마 클래식’ 등이 있었고, 지난해까지 ‘시네마 프리즘’으로 이름붙었던 부문이 올해는 ‘아시아의 바람’으로 바뀌었다. 아시아영화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 부문의 프로그래머로 아시아영화 전문평론가인 터르오카 소조가 취임해 지명도나 수상 내역과 관계없이 매력있는 작품 17편을 골라 상영했다. 이중에는 <쓰리>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밀애> <복수는 나의 것> 등의 한국영화들도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올해는 특히 이 부문 상영작들이 일반관객과 영화관계자들의 관심을 많이 모았다. 이 부문 상영작 중 12편과 일본영화 3편 중에서 선정하는 아시아영화상은 스리랑카의 아소카 한다가마 감독이 연출한 <날개 하나로 날기>가 수상했다. 올 도쿄영화제는 극장 앞이나 시부야역 앞에 인포메이션 부스를 설치해 홍보에 열을 올리는 등 이전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경쟁부문 작품들은 상영 뒤에 마련된 Q&A 이외에도 선착순 50명의 관객에게 감독 및 배우와 가깝게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교류회에 참석하는 혜택을 주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그러나 관객 대부분은 상영작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거나, 몇 개월 뒤 일반 상영하는 작품을 조금 일찍 보고 싶은 열망에 영화제를 찾은 이들이었다. 영화제쪽은 일반 관객의 이목을 끌어 폭넓은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도쿄=사토 유 통신원 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브로큰 윙스>의 니르 버그만 감독. 그 왼쪽이 프로듀서와 출연 여배우들. 그 왼쪽이 나카타 유우지 감독.

건강하게 통합된 정체성을 가진 독특한 캐릭터 영화,<걸파이트>

■ Story 여고생 다이아나는 학교에서 친구들의 말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주먹질을 하는 바람에 네 번째 정학을 당한다. 남동생이 운동하는 체육관에 찾아갔다가 또 주먹을 날린 다이아나는 권투야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큰둥하던 체육관장이 다이아나의 잠재력을 인정함에 따라 이 여성 복서의 기량은 일취월장하고, 급기야 남자친구 아드리안과 링에서 맞붙게 된다. ■ Review <걸파이트>는 강렬한 눈빛을 던지는 한 소녀의 얼굴로 시작된다. 단순하고 과장된 이미지이지만 단 하나의 숏이 이 영화에 관해 많은 것을 전달해준다. 여기에다 주인공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 그러니까 18살, 여자, 라틴계, 불의를 참지 못하며 고집 셈, 힘도 셈, 브루클린의 노동자 지역 거주, 엄마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세상 사는 데 정신 덜 차린 사람, 이 정도를 알려주는 첫 번째 시퀀스가 지나면 이 영화가 문제 많은 소녀의 성장기를 페미니즘 터치로 다루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고 <걸파이트>가 페미니즘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바탕에 깔려 있는 생각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성장영화이자 스포츠영화이고 무엇보다 독특한 캐릭터영화다. 혹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나오는 권투영화 <록키>(1976, 존 아빌드슨)를 소녀용 버전으로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무리는 없겠다. 록키의 아내 이름과 다이아나의 남자친구 이름이 똑같은 아드리안이라는 사실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근육질 남성영웅의 이야기를 여성의 손길로 슬쩍 비틀어놓는 것만으로도 권투영화 혹은 스포츠영화의 진부한 관습에 쇄신을 가져왔다(작가 겸 감독인 카린 쿠사마를 포함해서 사라, 말타, 매기 등의 이름을 가진 여러 프로듀서들도 모두 여성인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마초사회에서 도전적으로 살아남으려는 한 여자아이의 고집스런 성장기다. 라틴계 사람들은 한국사회만큼이나 남녀의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이아나의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권투 도장에 꼬박꼬박 보낸다. 자신 또한 비록 술 마시고 카드 놀이로 소일할망정 근육만은 우람하다. 그러니 아들보다 더한 성깔과 주먹을 가진 딸은 아버지의 눈, 즉 주류적인 시선으로 보기에 꿀꿀한 부적응자요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르는 오발탄쯤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신념을 물려받는다. 본인은 권투에 별 흥미도 없으면서 누나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체육관에 드나들자 “왜”(Why)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다이아나의 답변은 “왜 안 돼”(Why not)이다. 두 단어일망정 그래도 질문보다는 길다는 점에서, 도전을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조금 더 머리를 써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지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걸파이트>가 독창적인 영화로 뻗어나가는 갈림길은 바로 다이아나의 도전 방식에 있다. 기존의 문제작들은 마초사회에 갇혀있는 여성 주인공들에게 대체로 두 가지 길을 터주었던 것 같다. 단순무식한() 남성성과 대조되는 여성성의 장점들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아예 여성만의 공동체, 예컨대 레즈비언 관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이아나는 지극히 마초적인 것과 여성성을 동시에 끌어온다.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이상적인 여성성 혹은 남성성에 고스란히 들어맞지 않으며, 실제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금씩 나눠 가진 중간적인 존재라고 한다. 다이아나는 이런 생각을 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왼쪽부터 차례로)♣ 다이아나는 권투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는 남자선수들보다도, 어머니를 자살로 내몬 아버지보다도 강해지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다이아나의 특기는 빠른 잽니다. 끊임없는 훈련으로 근육을 단련한 다이아나는 여자와 남자를 번갈아 상대선수로 맞이하면서 결승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시합, 다이아나는 권투에 미래를 건 연인 아드리안과 마주친다. 그는 육체를 훈련하고 투지를 개발하는 데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여기저기 낙서처럼 붙어 있는 문구들, “승자는 그만두는 법이 없고, 그만두는 자는 승리하는 법이 없다”는 경구에 눈길을 꽂은 뒤부터, 가장 마초적인 스포츠인 권투를 자기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 반면 “사적인 업무 금지”라는 체육관 규칙 제1호를 어기고 도장 안에서 남자친구를 사귈 뿐만 아니라 데이트 하러 갈 때에는 긴 머리를 풀어내린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만 여전히 캐주얼한 옷차림에 낮게 구르는 목소리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아가씨가 권투선수 다이아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다이아나는 평균적인 여성들보다 남성성이 조금 더 강하지만, 그렇다고 성전환 수술이나 남장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식으로 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통합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젠더(gender)란 생물학적 차이를 끌어들여 사람 사이를 구별하고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문화적 고안물이라는 사실을 힘있게 형상화하기, 젠더체계의 어느 한쪽 끝에 서기를 거부하고 그 중간쯤에 자리잡음으로써 젠더의 경계선을 유연하게 만들기, 바로 이런 점들이 칸과 선댄스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이 영화 <걸파이트>, 특히 다이아나 역의 배우 미셸 로드리게즈를 요란하게 환영한 이유일 것으로 추측된다. 피튀기는 권투장면을 기대하는 스포츠광이나 화끈한 로맨스를 원하는 멜로 관객에게는 영화가 미적지근해 보일 수도 있겠다. 다이아나는 정말로 운동을 잘하지만 그는 록키가 아니다. 더구나 감독은 다이아나와 남자친구에게 한 침대에 누워서 꼬마 남매들처럼 껴안은 채 아침까지 잠만 자도록 시켰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Review] 이너프

■ Story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슬림(제니퍼 로페즈)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미치(빌리 켐벨)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다. 슬림은 모든 걸 손에 넣은 듯하다. 경제적 능력도 뛰어나고 다정다감한 미치와 귀여운 딸 그레이시, 그리고 우아한 저택까지. 그러던 어느 날 미치의 휴대폰에 있는 저장번호 33번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공포스런 나날이 시작된다. 슬림은 어린 딸과 함께 폭력과 모욕, 외도를 일삼는 미치로부터 탈출하지만 그의 추적은 집요하고 위험하다. ■ Review 3쌍 가운데 1쌍이 이혼하는 시대다. 여성(의 욕구)은 변했는데, 남성(의 가부장주의)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고수하려는 게 문제라는 ‘배경설명’이 따라온다. 이런 현실을 영화와 드라마가 부지런히 좇아간다. 두 차례 이혼하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사는 젊은 아줌마는 절대로 기죽지 않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며(MBC 주말극 <맹가네 전성시대>), “불륜은 없다”고 외치는 여성감독의 신념은 ‘불륜’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홀로 서서 미소짓는 여인을 그려낸다(변영주 감독의 <밀애>). 따지고보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외침은 결혼을 ‘적과의 동침’으로 묘사한 할리우드에 비하면 소박해 보인다. <이너프>에 이르면 아예 전쟁 수준이다. 생존 아니면 죽음이다. 슬림(제니퍼 로페즈)의 단단한 몸은 이스라엘 격투술이라는 ‘크라브 마가’를 통해 더욱 탄력을 받는다.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던 그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전술을 택하면서 상황은 급전된다. <적과의 동침>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남편의 학대를 피해 도망가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최종 해결사로 나선 건 새 연인과 우연이었다. 그러나 여기선 자기 자신의 몸과 치밀한 계획으로 상황을 종료시킨다. 설정만 보면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적과의 동침’이다. 아전인수격 시각이긴 할 테지만, 제니퍼 로페즈가 갖고 있는 라틴풍의 이국적 외모는 남부러울 게 없는 백인 중산층의 풍모를 보여주는 남편 미치와 대비된다. 묘하게도, 미치가 증오하게 된 아내의 양부는 아랍인이다. 또 미치는 다급할 정도로 슬림에게 아기 낳기를 바라고 제 핏줄에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는데, 슬림의 바람둥이 생부는 다급히 도움을 청하러온 딸에게 “너처럼 돈이나 챙겨가려고 갑자기 나타난 자식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아주 매몰차게 대한다. 그러나 멋진 아버지로 돌변하는 건 미치가 아니라 슬림의 생부다. <다크 엔젤>을 썼던 니콜라스 카잔의 시나리오가 를 만들었던 마이클 앱티드 감독과 만났다. 문제는 리얼리티다. 남편과 아내의 혈투가 평범한 액션스릴러로 다가온다면, 그 이유를 달리 설명할 도리는 없어 보인다. 이성욱/ <한겨레21> 기자 lewook@hani.co.kr

˝원로 배우가 되겠습니다!˝ <밀애> <하얀방> 배우 계성용

처음 본 얼굴인데,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계성용도 그렇다. 일주일 간격으로 극장에 걸리는 두편의 영화 <밀애>와 <하얀방>에서 만나는 그의 얼굴, 목소리, 연기는 낯설지가 않다. 단순히 튀지 않는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적어도 극이 진행되는 동안은 캐릭터로 살아내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신의를 저버린 ‘실수’를 만회하고,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보려 안간힘을 쓰는 <밀애>의 젊은 가장, 자신의 출세가도에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은 눈 뜨고 못 보는 <하얀방>의 비뚤어진 야심가는 모두 계성용을 통해 생명을,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얻었다. “잘한다는 칭찬까지는 안 바라고요. 저 배우 누구지, 누굴까, 궁금해 하신다면, 그걸로 족해요.” 그것이 그의 바람이라면, 그는 ‘소원 성취’한 셈이다. 그것도 너/끈/하/게! 계성용은 늦깎이 배우다. 스물이 훌쩍 넘어서도, 연기를 하고 싶다거나 연기를 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이 그에게 없었다. 대학 때 그는 건축을 전공했고, 나름대로 그 공부를 즐겼다. 어느 날 밤 TV에서 본 현대무용 공연이 새삼스런 충격으로 다가오기 전까지. “몸으로 표현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사람의 몸이 표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재밌겠다, 나도 해보고 싶다, 그런 충동이 강하게 들었어요.” 뒤늦게 연기로 선회한 계성용의 전략은 ‘정공법’이었다. 드라마와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하고, 연기 기법에 관한 책을 탐독하면서 연기의 ABC를 깨우쳤고, 서울예대 영화과에 진학해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받았다. “제가 잘생긴 외모는 아니잖아요. 그랬으면 프로필 사진을 찍어 돌렸겠죠. 대신에 전 졸업작품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돌렸어요. 그 효과가 1년 넘게 나타나더라구요” 그 졸업작품 <구타 유발자…잠들다>가 독립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주목을 받으면서, 충무로의 호출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하얀방> <밀애>. 아직 필모그래피가 짧은 계성용의 꿈은 특이하게도 “원로 배우가 되는 것”이다. 젊어서 잠깐, 바짝 활동하다 단명하는 배우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욕심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뜨문뜨문 좋은 작품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오랫동안 그럴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연기의 목표는 배역의 목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목표가 확실하고 변화가 있는 역할을 만나고 싶어요. 예를 들면 독립 운동가나 혁명가나 데모 주동자, 그런 캐릭터들.” 남들보다 늦게, 혼자 힘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기 때문일까. 계성용은 자신의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신인답지 않은, 여유와 강단을 보인다. “인터뷰에선 미팅이나 소개팅처럼 나를 포장하고 검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 싶은데… 기분이 이상해요.” 너무 솔직해서 귀엽기까지 한, 이 인터뷰 후기만 제외하고 말이다.

걸파이트/하얀방/오스틴파워 골드멤버/위험한 유혹/이너프

■ 걸파이트 여고생 다이아나는 학교에서 친구들의 말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주먹질을 하는 바람에 네 번째 정학을 당한다. 남동생이 운동하는 체육관에 찾아갔다가 또 주먹을 날린 다이아나는 권투야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큰둥하던 체육관장이 다이아나의 잠재력을 인정함에 따라 이 여성 복서의 기량은 일취월장하고, 급기야 남자친구 아드리안과 링에서 맞붙게 된다. 카린 쿠사마 감독, 미셸 로드리게즈, 산티아고 더글러스, 제이미 티렐리, 폴 켈드론, 레이 산티아고 출연, 미로비전 수입·배급, 상영시간 110분 유지나 <분노의 주먹>을 능가하는 여성 파워가 터진다 ★★★★ ■ 하얀방 방송사 PD 한수진은 사이버수사대 최진석을 취재하던 중 그가 다루는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마리 산부인과’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며 그 희생자들처럼 한수진 역시 그 사이트에 접속한 뒤 하얀방으로 인도되어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사건을 조사하던 한수진과 최진석은 유실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녀의 친구로부터 듣게 되고, 이 사건이 그녀와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한수진은 유실이 살던 1308호에 들어가게 되고, 최진석은 유실이 남긴 그림에서 범인을 찾아낸다. 임창재 감독, 이은주, 정준호, 계성용 출연, CJ엔터테인먼트 배급, 상영시간 95분 김봉석 <링>과 <가위>의 열성조합 ★★★ 박평식 머리 속에 희끗희끗한 거미줄이 뒤엉킨 기분 ★★☆ ■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 여전히 지구 정복에 여념이 없는 닥터 이블은 골드멤버라는 인물을 끌어들이려 한다.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다가 마침내 자신의 성기까지도 금으로 만들었다는 남자. 하지만 골드멤버 영입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스틴 파워에게 붙잡힌다. 여왕에게 훈장을 받던 오스틴 파워는 자신의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직 스파이였던 아버지 나이젤 파워가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이다. 오스틴 파워는 감옥에 갇힌 닥터 이블을 찾아간다. 70년대의 골드멤버와 연관있다는 정보를 얻은 오스틴 파워는 70년대로 향한다. 제이 로치 감독, 마이크 마이어스, 비욘세 놀즈, 마이클 케인, 베르니 트로이어 출연, 나래필름 수입, 뉴라인코리아 배급, 상영시간 94분 김봉석 오프닝은 사상 최고의 명패러디 ★★★ 박평식 구정물도 무지개빛을 낼 때가 있구나 ★★★ ■ 위험한 유혹 벤 크로닌은 고등학교 수영선수다. 수영실력이 뛰어나 졸업을 앞두고 스탠퍼드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동기생이자 애인인 에이미는 벤과 동거하기 위해 스탠퍼드대학과 가까운 대학으로 진학하려고 한다. 벤에겐 모든 여건이 장밋빛이다. 그러나 매디슨이 전학오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매디슨은 묘한 매력을 풍기며 벤에게 접근해오고, 벤은 자신이 애인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세게 내치지 못한 채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이후로 매디슨은 벤에게 더 무섭게 다가선다. 존 폴슨 감독, 제시 브래드퍼드, 에리카 크리스텐슨, 셔리 애플비 출연, 이십세기 폭스코리아 수입·배급, 상영시간 86분 김봉석 별로 치명적이지 않은 유혹 ★★☆ 박평식 성난 표정만으로 악녀가 될 수는 없지 ★★ ■ 이너프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슬림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미치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다. 슬림은 모든 걸 손에 넣은 듯하다. 경제적 능력도 뛰어나고 다정다감한 미치와 귀여운 딸 그레이시, 그리고 우아한 저택까지. 그러던 어느 날 미치의 휴대폰에 있는 저장번호 33번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공포스런 나날이 시작된다. 슬림은 어린 딸과 함께 폭력과 모욕, 외도를 일삼는 미치로부터 탈출하지만 그의 추적은 집요하고 위험하다. 마이클 앱티드 감독, 제니퍼 로페즈, 빌리 캠벨, 줄리엣 루이스, 노아 와일 출연, 콜럼비아트라이스타영화(주) 수입·배급, 상영시간 114분 김봉석 자존을 지키기 위한 여성의 폭력은 언제든 환영 ★★★

내 인생의 여자, <올리브 나무 사이로>

지난 7년, 나는 아내와 함께 제법 많은 시간을 영화관과 극장에서 보냈다. 아내는 현대무용가인데 영화를 전공한 나와는 작품을 같이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궁합이 맞는다. 나는 전형적으로 논리적이고 지도 그리기를 좋아하는 남성 호르몬형이고, 아내는 더듬이가 발달한 여성 호르몬형이다. 게다가 움직임의 전문가인 아내는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면들을 늘 일깨워 주었다. 소리에 맞춰 몸짓을 구성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직관적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았던 곳은 뉴욕 링컨센터의 월터 리드 영화관이었다. 그때, 우리 앞에서 상영되고 있던 영화가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였다. 나는 날짜를 잘 기억하지 않지만 그날이 7년 전 늦은 4월이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선선한 초가을에 시골길로 나들이 가는 것 같은 영화였다. 오래 전이라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느낌은 잊을 수 없다. 찬송에 가깝게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 고단한 현실 속의 맑은 눈동자들, 바람 소리가 와 닿을 것 같은 풍경…. 그토록 쉽게, 자분자분 현실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나는 그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뉴욕으로 영화를 공부하러 간 지 몇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화라는 거대한 대상을 파악하고 이해해야 된다고 두손을 불끈 쥐고 있을 때였다. 그런 촌뜨기의 마음을 이 영화가 성큼 다가와서는 확 열어버린 것이다. 그건 당시의 나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물론 더한 충격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는 거였다. 나는 여자의 손을 덥석 잡을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변화가 동시다발로 일어난 순간이었다. 아내의 손과 내 손 사이에 흐르는 땀을 느끼면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계속 이어졌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전체 내용이었던 이 영화는 한쌍의 남녀를 배우로 등장시킨다. 그런데 현실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가 여자 집으로부터 거절을 당한 사이다. 지진으로 피폐해진 마을과 궁핍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다시 여자에게 매달리는 남자와 자신의 집에서 바보같이 거절 당한 남자를 피하는 여자가 옥신각신한다. 문제는 연기를 해야 되는 여자가 남자를 쳐다보지 않으려는 데에서 시작된다. 여자는 이런 경우의 관습에 따라 남자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이것이 영화를 위한 연기라고 설득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여자는 자신만의 질박한 진정성으로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무시해버린다. 맞은편의 영화 스탭들은 망연자실해진다. 이 코미디에 가까운 상황은 급기야 그녀가 촬영장을 떠나버리면서 투명한 울림으로 변해 간다. 자신이 전혀 거절당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남자가 허둥지둥 여자를 뒤따른다. 여자는 이미 저 멀리 올리브 나무 숲을 지나가고 있다. 서로 손을 맞잡은 나와 아내는 카메라 앵글 덕분에 신의 위치에서 그 두 남녀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산책 같은 추격신은 그 자체로 신의 세계로 올라가는 길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우리만의 세계로 전혀 들어오지 않는 여자, 이해할 수 없는 의지로 자신을 앞질러 가버린 여자를 한없이 뒤쫓아가는 남자, 이 둘이 끝없이 올리브 나무 아래를 걸어갈 때, 고단한 삶을 관통해버리는 어떤 힘, 즉 신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그때 영화의 초월적 힘을 처음 제대로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과 삶이 이렇듯 뒤엉켜 다가온 날이었다. 아내가 내 손을 거절하지 않았기에 나는 7년째 아내의 손을 잡고 올리브 나무 아래를 걷고 있다. 우리 삶의 중요한 한 지점에, 이 영화가 우리 앞에 펼쳐졌던 유일한 세계였다는 것이 나는 지금도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