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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기타노 다케시의 야심찬 시도 <다케시즈>

<다케시즈>의 영어제목은 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제목이다. 한편으론, ‘다케시들의’, 라고 말해놓고 나머지는 열어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에 놓일 것은 공백 내지는 괄호다. 그냥 무수한 가능성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12번째 장편영화의 제목을 상상적 빈칸을 남겨두는 것으로 지었다. ‘다케시의’라고 지었다면 덜 이상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 되기’에 관한 영화로 추측되었을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가 자기의 뇌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얼굴들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케시 역시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불완전한 욕망들이 있는지 스스로 궁금하여 탐색하는 영화일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다케시즈>는 자기애는 고사하고 다케시 특유의 야심찬 내용과 형식의 자멸성으로 가득 차 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다케시즈>의 가제는 오랫동안 <프랙탈>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프랙탈(Fractal)은 만델브로트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형들의 측량법을 제시하기 위해 75년에 쓴 논문에서 사용한 기하학적 개념어이자 조어다. 프랙탈이라는 용어를 문화적으로 이해하자면 복잡성의 세계 구조를 생생하게 인정하되 동시에 설명 가능하도록 노력한다는 의미가 있다. 혹은 그 복잡성을 이루는 패턴으로서의 유사 반복적 단순성의 연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방점이다. 말하자면, 무디고 딱딱한 합리적 근대의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개념으로 각광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로 친다면 현존하는 감독 중 프랙탈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의 대가는 단연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다. 다케시의 이번 영화는 그들과 알게 모르게 사유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다케시는 단수가 아닌 끊임없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이-공간에서의 복수로 스스로를 생각하며, 혹은 정수가 아닌 소수적 인간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전체 구조는 당연히 일목요연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연상과 유사’를 통해 뻗어나가는 일종의 미로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전쟁터 같고 일본군 복장으로 죽은 척 누워 있는 다케시가 보인다. 그걸 보면서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에서 그가 처음 배우로서 출연했던 걸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군 병사 하나와 눈이 맞아 사살되기 직전 <다케시즈>라는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이번에는 다시 총격전을 벌이는 어떤 장소로 이동한다. 다케시는 쌍권총을 쥐고 쏘아대는 야쿠자다. 그리고 그건 다시 도박장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출연작이었음이 밝혀진다. 그걸 보면서 갱들은 멋있다는 둥 말들을 해댄다. 다케시는 지금 갱들과 마작을 하고 있다. 마작을 마치고 세트장으로 향한 다케시는 자신과 같은 ‘기타노’라는 성을 가진 피에로 분장의 무명배우 지망생을 만난다. 다케시가 여기서 1인2역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나티네>의 클라이맥스를 변조한 듯한 장면의 촬영이 세트장에서 끝나갈 때쯤, 기타노 다케시의 이야기는 그와 닮은 사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의미가 깊다. 이후로 영화는 편의점 직원이자 배우 지망생인 남자의 잠의 미로 혹은 꿈의 미로를 반복하면서 진행된다. 이를테면, <3-4X10월>의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전체 구조를 가져와 잘게 나누어 ‘그 안의 안으로’라는 방식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남자의 꿈이 절정에 달하는 곳은 <하나비>의 바닷가를 가져온 대목이다. 거기에는 사무라이들도 나타난다(<자토이치>). 그 남자의 꿈의 연속이 끝날 즈음 그는 자기에게 모욕적으로 사인을 해준 기타노 다케시의 태도를 갑자기 기억해내며 칼을 들고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간다. 그때 이야기는 다시 초반의 기타노 다케시로 넘어간다. 영화 속 기타노 다케시가 그 남자를 상상한 것인지, 그 남자의 꿈 안에 기타노 다케시가 있었던 것인지 모호해진다. 비트 다케시와 기타노 다케시, 유명 코미디언과 유명 감독, 두개의 정체성을 따라 이 영화가 그 둘 사이에 놓인 갈등에 관한 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어떤 형식의 극한을 추구해보고 싶었던 야심이 더 강하다. 때문에, <다케시즈>는 자기 반영성이 깃든 영화 만들기의 계보와도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와 그를 닮은 무명의 배우 지망생이라는 인물 구조를 세워놓고 세계도 그 두개로 나눈다. 나머지 인물들도 그렇게 대개 1인2역을 하는 식으로 두 세계에 각자 다른 인물들로 산다. 그러나 다시 그 두개의 구조는 기타노 다케시 자신을 통해 겹쳐지는 것이다. 어쩌면 <다케시즈>는 <하나비>에서 여러 명이 뒤엉켜 죽어가던 그 총격전의 편집 방식을 확장한 것이다. 몽환적인 편집과 리듬은 중반부까지 확연하게 돋보인다. 후반부가 난삽해지지만 않았다면 중반부까지의 장면은 다케시의 영화 중 가장 철학적인 리듬 중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케시는 확실히 편집이 중요한 영화를 만드는데, 이 영화에서 이중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과 상황들을 연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연상과 유사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다케시가 단순히 편집을 에디팅이 아니라 몽타주로 이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표식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미와 정서의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케시즈>의 그 몽타주는 너무 유희적이다. 다케시 영화 중 중요한 것은 몸의 정지와 운동을 이어주는 기이한 속력 그리고 시선의 타이밍이다. 그것이 주춤거리는 것 같지만 폭발하면서 이어져나가는 영화의 전체 편집 리듬과 섞일 때 하나의 느린 소우주적 생성을 한 인간의 몸에서 보는 듯한 영화적 경험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건 단순히 무대 위에서 배운 만담가의 팬터마임적 기술이라고 설명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정점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다케시는 하락 양상의 길을 걷는다. 근작들은 모두 기대 이하다. <하나비>에 이를 때까지 그토록 노력했던 영화감독으로서의 인정투쟁의 길을 뒤로하고, 그가 근자에 바라는 것은 자기를 홀로 진전시키는 것 혹은 그의 말처럼 “종잡을 수 없도록” 홀로 변화하는 것인 것 같다. 이번은 특히 형식의 야심이 내용의 존재 이유를 덮어버린 경우다. 그러나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어떤 가능성을 끝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리듬은 그냥 만들어질 만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어떤 희망의 단서를 걸고 싶다. 만약, 아는 사이라면 그 리듬을 다듬어 지금껏 완성되지 않은 다른 영화를 꼭 한 번 만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물론, 그 결단 역시 ‘다케시들의’ 무엇 중 하나에 포함되는 것이겠지만.

[이창] 즐거운 기다림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어언 20여년 전 이산가족 찾기는 끝났지만, 오늘도 ‘이산애인’ 찾기의 애절한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만남의 광장은 KBS 앞이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 단면 중의 하나, 어느 남성동성애자(게이) 사이트 ‘사람찾기’ 코너에 올라온 애끓는 사연들을 소개함다. “오늘 밤 9시 반쯤에 봉천역에서 5xx9번 타신 분?” 이어서 ‘그분’의 인상착의와 복장묘사가 나오고, “이쪽 분이신 것 같아서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정말로 대책없다고,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고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얼마나 간절했으면. 일상의 남남상열지사가 봉쇄돼 있으니 이렇게 스치는 한번의 눈길도 간절할 수밖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한순간의 눈빛에도 영겁의 세월이 스민다고 하지 않던가. 지하철, 사우나, 공항, 헬스클럽, 어디서든 눈빛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미련은 살아서 꿈틀거리고. 소도시의 사우나에서 생긴 일. “이른 아침 목욕하고 나오는데 금테 안경 쓰고 눈 마주친 친구. 잠시 스쳤지만 잊을 수가 없네요.” 이어서 터미널. 길을 물었던 청년에 대한 인상착의를 쓰고 “동포라고 하면서 씩~ 미소를 짓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왠지 이쪽 분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디 그들의 ‘게이다’(게이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레이더)가 정확했기를. 그래도 다음 사연은 만남의 가능성 짙음. “이태원 xxx 클럽에서 별 모양의 금색 목걸이를 했던 분.” 그분을 찾지만, 정작 대답은 ‘딴분’이 하시기 다반사. “내 애인인데.” 사실인지 의심되지만, 그래도 ‘야리는’ 댓글이 아니니 대답도 정중하게 “하하 네 아쉽네요!”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든 시선의 부익부 빈익빈. 어젯밤 클럽에서 내가 찍었던 그놈을 찾는 글을 네가 올리고. 세상은 넓지만, 노는 바닥은 좁다. 게이들이 노는 클럽, 가는 사이트가 ‘다행히’ 뻔하므로, 그나마 ‘사람찾기’의 가능성이 생긴다. 남들이 올린 글을 보면서 웃었던 그들이 올리는 글의 서두는 대개,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적나라하지만 간절하며, 우스꽝스럽지만 안쓰러우며, 유치하지만 애절하며, 어처구니없지만 서글프다. 애절한 욕망이 들끓는 정신의 풍경, 정말로 구슬픈 연가다. 당연한 물음. 클럽에서 말걸어 보지? 서울의 퀴어마을 청년들 혹은 종족으로서 퀴어(Queer As Folk), 그들의 너무나 한국적인 혹은 동아시아적인 수줍음이 원흉이다. 누군가를 응시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유교문화의 부작용. 그분을 찾는 크루징(Crusing)의 8할은 응시의 기술. 하지만 몸에 달라붙은 관습의 굴레. 친구들과 원형으로 모여서 강강수월래 춤추기, 영원히 테이블에 엉덩이 붙이고 아는 사람과만 얘기하기. 그리하여 만남의 광장은 폐쇄되고, 시선은 원형감옥에 갇히고. 다음날 후회하다 컴퓨터 앞에서 망설이기. 이번엔 자책하기. “그룹 xxx을 좋아했던 일본인을 찾습니다… 받은 건 많은데 해준 건 없어서 미안해요.” 친구로든, 애인으로든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10년도 모자라 15년을 거슬러 올라가 누군가를 불러보기. “6x사단 xx중대 91~92년.” “참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친구는 가끔 한번씩 생각이 납니다.” 혹시나 ‘이쪽’이 맞으면 연락을 달라는, 오래된 그리움. 그분과 교환한 ‘전번’을 잃어버렸다는 애절한 사연도 빠지지 않는다. 맞춤법이 틀리고, 외계어투성이지만, 당신의 진심이 뚝뚝 묻어나서 정말로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나조차 기도함.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장난스럽게 사람찾기. “XX병원 치과 선생님~ 너무 귀여워요! JJW 선생님~.” 찾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어지는 댓글놀이. “앗 나 조만간 XX병원 가는데 JJW 선생님 눈여겨봐야지 ㅋ.” 때때로 명품 매장의 야릇한 점원도 입질에 오르고. 이번엔 ‘나에게도 애인 아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9시30분에 XXX역에서 XXX역쪽으로 걸어간다… 과연 이반(동성애자)이 있을까… 눈인사라도 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다양한 외로움이 전시되고, 장난인지 정말인지 모를 답글이 달린다. “저요. 전 9시20분 정도 ㅋㅋ.” 선배들의 경험담도 이어지고. “예전에 그런 만남이 있었지 출퇴근시 서로 호감 느끼다 바에서 보고서 1년 정도 만남.” 어쩌다 “왜 이런 글을 올리는 걸까”라는 철학적인 자문자답까지. 어처구니없다가 처연해지는 인생의 ‘희비극’ 혹은 ‘러브 액추얼리’(영화 한편은 거뜬히 나와요). 그리고 텔레비전. <웃찾사> 방청석에서 어여쁜 아가씨가 웃는 모습이 비치고,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TV에서 단 몇초간 당신을 봤지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감대 ‘만빵’이었다는 다음 UCC 광고 ‘그 남자의 프러포즈’. 무엇이 다르랴. 광고로 포장된 사람찾기일 뿐. 그 남자의 프러포즈는 아름답고, 그 남자들의 사람찾기는 유치할 이유야 없는 법. 이렇게 ‘후회’하지 않겠다는 합리주의 명분과 ‘우연’을 기대하는 무속적인 기대에 기대서 인간들은 연명한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개똥철학 하나. 버스는 기다리면 오지만, 사람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나름의 방법, 즐겁게 놀면서, 딴짓을 하면서, 딴놈들과 놀아나면서 기다리기. 세상에는 어쩔 수 있는 것과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 그것을 할밖에. 사람찾기라도, 달리기라도 하거나. 혹시나 게으른 기다림에 망가진 모습 탓에 그분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이보다 큰 비극이 또 있으랴. (게시판의 사연은 혹시나 몰라서 조금씩 각색했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게리 쿠퍼의 세 마디

시오노 나나미의 책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는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한 대목이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같은 걸작 코미디를 만든 빌리 와일더가 왕년의 미남스타 게리 쿠퍼에 대해 한 말이 재미있는데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세상의 모든 여자에게 인기를 누린 것은 딱히 멋진 대화 솜씨를 가져서가 아니야. 다만 그는 들을 줄 알았어. 이건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여자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특별히 집중하지도 않았지. 다만, 계속 떠들어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때로 다음의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를 곁들이는 거야.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사이에 여자들은 자연히 그에게 몸을 던지게 되는 거야.” 포털사이트 뉴스에 오른다면 “게리 쿠퍼, 여자를 정복하는 데는 단 세 마디면 충분했다” 같은 제목이 붙을 내용이다. 게리 쿠퍼의 이런 일화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감상은 각자 다를 것이다. 남자라면 ‘그놈 참 대단한걸’ 싶어 배가 아플 테고, 여자라면 ‘여자를 바보로 아는군’ 싶어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녀의 반응이 그런 식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내게 인상적인 대목은 단 세 마디로 상대가 계속 말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빌리 와일더가 지나친 과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세 마디건 열 마디건 상대가 마음을 열고 말하게 하는 그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을 것 같다. 잘생긴 외모와 스크린에서 보여준 믿음직한 이미지가 절대적이었으라 짐작하지만 그것 말고도 뭔가 있지 않았을까 싶고, 있다면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로 하여금 술술 말하게 만드는 그 기술은 여자를 꼬이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건 무엇보다 기자들한테 필요한 능력이다(형사한테도 그렇겠지만 아무리 게리 쿠퍼라도 범죄사실을 이야기할 여자는 없으리라). 그래서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라는 말만으로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이 절절히 드러나는 인터뷰를 하는 상상 말이다. 기자 생활을 하다 생긴 병일 텐데 이런 망상이 우뇌를 비집고 싹튼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단지 게리 쿠퍼처럼 안 생겨서 아닌가 좌절하기도 하면서. 물론 대체로 많이 묻고 많이 말해야 좋은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기자는 정말 잘 듣는 게 중요하다. 워낙 언론매체가 많아져서 별별 인터뷰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기사를 보다보면 정말 잘 듣고 쓴 기사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들도 적지 않다. 박찬욱 감독이 예를 든 것처럼 기자가 질문을 해놓고 그걸 감독의 답변인 것처럼 옮겨놓는 것은 그나마 애교있는 경우이고 상대가 힘주어 얘기한 대목은 쏙 빼놓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 적는 왜곡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게리 쿠퍼처럼 마음을 열게 만들진 못하더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말아야 할 텐데 말이다. <씨네21> 너나 잘해. 이런 말을 들을 소리일 텐데 그래서 이 기회를 빌려 우리가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그나저나 진짜로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라는 말만으로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아님 ‘왜요?’, ‘그렇군요’, ‘그럴 리가요’가 나으려나? 어디선가 우린 게리 쿠퍼가 아니라고요, 라는 기자들의 항의가 들썩이는 듯하다. P.S. 드디어 새로운 기자를 뽑았다. 지난 1년간 <씨네21> 객원기자로 일했던 강병진과 내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김민경, 두 사람이 최종 합격자가 됐다. 두 기자의 활약을 기대하시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박찬욱 감독 인터뷰

“존재의 목적은 그냥 밥먹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다” 평론가를 그만둔 지금까지도 전업 글쟁이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쓴 글 중에 ‘인터뷰’라는 게 있다. 그 안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가 인터뷰를 당할 때 기자들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범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신 이유는?” 이렇게 묻지 않고 꼭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범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신 건 세계와의 단절, 나아가 어떤 근원적인 소통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죠?”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감독이 “뭐… 예”라고 하고 나면, 나중에 “기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범 역할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신 이유는? 감독: 세계와의 단절, 나아가 어떤 근원적인 소통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죠”라고 기사가 나온다는 거다. 창작자로서 “유권해석”을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함께, 말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받기를 요구하는 자들이 단락을 바꿔가며 곡해까지 저지르는 것을 꼬집은 문장이다. 물론 그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말의 악순환”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다소 단순화한 면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명쾌하고 재미있는 지적이다. 인터뷰란 관객과 창작자를 중계하는 소임이니 못난 질문이라도 안 할 수는 없고, 다만 그의 말을 새겨들어 ‘길고 상투적으로 질문한 것과 짧게 망설이며 대답한 것’의 문답까지 되도록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영화 촬영 초반 때 내 영화가 현실성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궁금한 건 현실성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도 있을 텐데, 동화적인 방법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계산이나 전략을 갖고 하는 건 아니다. 개구쟁이 같은 면모가 나한테 있는데, 그게 좀 발동되는 결과인 것 같다. 그래서 아이 같고 유치하고 좀 단순하지만 멋대로인 그런 걸 다루게 된 것 같다. 예를 들면, 영군이가 자기는 핵폭탄이고 그 존재의 목적은 세계의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 아이다운 발상이다. 할머니 때문에 분하고 화가 나서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고, 세상이 박살나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유치하게 화를 내는 거다. 같은 분노라고 해도 이전 영화들하고는 다른 아이 같은 면이다. 그런 것 때문에 영화가 동화적으로 보이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물어보고도 싶다. 동화적이기 시작한 <친절한 금자씨>부터 눈에 띄는 면면이 있는데, 다소 어지럽게 보일지라도 극의 전개를 펼쳐서 가겠다는 뉘앙스를 받게 된다는 거다. 그게 동화 같은 면과 같이 출발했다는 것이 의미 있어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런 것처럼 시작하지만, 영화 후반에 이르러서 교실에서의 학부모 회의로 모든 것이 응축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주 단정하게 좁은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의 앙상블로 끝까지 가지 않나. 앞부분이라면 해당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다. 맞다. 단단한 구성을 추구한 영화는 아니다. 많은 조연들이 제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동화하고 관계가 있느냐? 글쎄, 동화라고까지는 못하겠고, 역시 아이 같은 산만함? 이 얘기 했다가 저 얘기 하는, 그런 식이 반영된 것 같다. -영화는 다 자기 느낌대로 보기 나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뮤지컬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본 거다. 그러려고 했다. 음악도 뮤지컬처럼 해보려고 하다가 안 했는데, 자크 드미의 뮤지컬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어간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 사람 영화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영화들의 순진함, 행복감, 유치함 그런 것에서 때때로 내가 뭔가 끄집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HD 바이퍼카메라의 용도에 대해 완성 직후인 지금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나. 어떤 선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촬영감독은 아주 불평이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기계를 쓰려니 불안한 마음에. 단점 하나를 예로 들면 고속촬영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총 쏘는 장면 고속촬영할 때는 필름카메라를 썼다. 그러나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감독 입장에서는 너무도 유용한 도구다. 모니터가 선명하고, 최종 결과의 근사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현장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도, 촬영기법 지식이 없는 사람도 데이비드 핀처만큼이나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 수 있다. 피사계 심도, 렌즈 밀리 수 몰라도 눈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쪽은 더 어둡게 해주세요, 포커스는 저쪽도 맞게 해주세요, 모니터를 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최종 결과물과 비슷하니까. 그게 아주 획기적인 것 같다. 다음 영화를 또 바이퍼카메라로 할지 안 할지는 생각 중이다. -관객이 궁금해할 만한 팩트에 대해 질문해보겠다. 가령, 영군이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간 일로 상처를 크게 받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영군이가 그 기억을 회상하는 걸 보면 영군이도 그 상태가 이미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웃음) 가족력이 있는 것으로 설정한 건데, 그 배경이 궁금했다. =이런 환자들을 다루는 영화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외상에 무슨 미스터리가 있는 것처럼. 그런데 실제 분열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건 그렇지 않다는 거다. 정신병에 대한 상업영화 접근법에 전통이 있는데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한 거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리고 모계로 내려오는 분열증 증세라는 건 벗어나기 힘든 운명적인 비극의 성격을 갖고 있다. 지금 보여지는 이야기가 밝긴 해도 어차피 이 영화는 치료되지 않는 환자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다루는 감독의 태도는 치료를 포기한 태도다. 그런 면에서, 사실 셋 중 제일 아파 보이는 사람은 엄마인데, 아이는 병원에 들어가 있고 엄마는 버젓이 바깥에서 일하고 있다. (웃음) 영군 엄마 캐릭터는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만들어낸 캐릭터 중 제일 훌륭한 캐릭터인 것 같다. 연기도 그렇고.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동감한다. 이용녀씨가 갖고 있는 말투와 표정과 배역은 정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영군 엄마 역으로 캐스팅하게 된 건가. =<친절한 금자씨> 때 만났는데 문학소녀 같은 면이 있어서, 현장에서도 대기하는 시간에 언제나 독서하시고, 섬세하지만 감정 기복도 많고. 들떠 있을 때는 또 들떠 있고, 어떻게 보면 연약해 보인다고 할까…(웃음), 그렇다. -또 하나 덧붙이면 유독 본인 영화에서 오달수가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김지운 감독 영화에서도 재미있었다. 오달수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섬세하고 나약한 면이 나올 때 매력을 풍기고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다. 이번에 가만히 보니까 그의 코미디는 시선 처리에서 나온다는 걸 알겠더라. 간호사가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릴 때 눈을 찔끔 감는데, 관객은 그때 웃을지 모르지만, 정작 웃긴 건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오달수가 째려보는 순간이다. 또는 “너희들이 폐 끼치는 기분을 알아, 씨발년아”, 그렇게 욕해놓고 (갑자기 실수했다는 듯) 둘러싼 사람들을 슥 쳐다본다. 그런 시선 처리에서 코미디가 나오더라. 그런 것의 달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다리 건너인 할머니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쩍어하는 시대 아닌가. 그런데 영군과 할머니의 관계를 굉장히 가깝게 묶어놨다. =그건 영군과 엄마하고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군과 엄마의 관계가 나빠 보이지는 않던데. =엄마 상태가 안 좋은데다, 할머니를 이모들과 함께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어도 이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는 느낌을 주고 있고, 그래서 엄마 대신 외할머니와 유대를 갖는 것으로 설정 한 거다. 외할머니는 자기가 쥐라고 생각해서 그냥 조용히 무를 갉아먹을 뿐 남을 억압하진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고, 억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영군과 통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백 선생을 처단하기 위해 하는 일은 친구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진심을 준 것 같지 않아서, 그들의 마음을 훔친 모양새가 된다. 훔친다는 의미에서 일순의 캐릭터를 생각나게 한다. =그건 생각 안 해봤다. 일순은 엄마가 떠났다는 상실에 공허해졌고, 그 빈자리 때문에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축소되고 끝내는 점이 될 것 같은 공포를 가진 사람이다. 살기 위해서 훔치려는 사람이다. -라디오의 경우도 그런가. 라디오는 영군에게 공상을 허락하고 할머니와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크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라디오 동화극을 구연하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역시 관련성을 묻게 된다. =그건 라디오 성우를 다시 기용함으로써 닮아 보이는 면일 거다. 그런 얘기 듣겠다는 걱정은 했다. (웃음)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성우의 목소리가 제니의 미래 목소리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객관적인 줄 알았던 것에 반전이 일어난다. 그에 비하면 이번 라디오의 목소리는 기계의 신 같은 존재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냘프지만 권위적인 음성, 무섭지 않은 형태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서운 것, 이라는 점이 목소리의 요점이다. 라디오는 뭐 영군이 직접 만드는 기계장치라는 의미 정도인 거고. -영군이 밥을 먹고 나서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약간 긴 에필로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할머니가 말했다고 영군이 생각하는 “존재의 목적은…”이라는 것에서는 이 사람들을 그냥 이렇게 착각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감독의 전언을 듣는 것 같았다. 그건 아까 대답 중에 말한 치료를 포기한 감독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진짜 에필로그가 하나 있었다. 각본을 만들었다가 지웠는데, 뭐 한 30∼40년 흐른 뒤에 노인이 된 남녀가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비가 오니까 자동으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제야 그 집이 위치한 곳이 보이는데, 달동네 꼭대기, 제일 높은 곳이다. 그 옥상에는 언제나 준비된 텐트가 있고,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면 안테나를 붙들고 번개를 기다리면서 끝나는 거다. 안 찍은 건 그렇게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였다. 이 커플은 이렇게 해서 밥을 먹게 됐으니까 됐고, 평소에는 잘살다가 비 오면 행사처럼 나가고, 비 그치면 또 평소처럼 살고, 그러면 됐지 한 거다. -영군과 일순의 태도는 말 안 됨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 같다. =우리가 망상이라고 깔보면서 불러도 분열증 환자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생활의 기반이다. 어쨌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니까. 내가 핵폭탄이라고 믿어야 이 여자가 잘살 수 있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터지면 너희들은 다 끝장이야라는 마음으로 살더라도, 남들에게만 해끼치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다. -착각과 착란이 대체로 박찬욱 영화에서 이끄는 지점은 어떤 이성적 판단이 고장나버리는 지점이라는 거다. 늘 영화에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판단이 멈춰지는 것이 항상 중요하게 보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굉장히 원초적인 내용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방금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게 바로 그런 내용이다. 무지개가 떠오르고, 해도 뜨고, 둘이서 원초적인 나체로 끌어안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밖에는 생존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제스처도 들어 있다. 세상을 끝장내겠다는 목적을 자각하고 나서야 존재하겠다는 희망을 갖는 그런 패러독스가 보기에 따라서는 불행하거나 뭔가 보수적인 태도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뿌리를 뽑아버릴 정도의 완벽한 희망을 포기한, 그런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존재의 목적을 거창하게 외부에서 찾는 것은 어렵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존재의 목적은 존재 그 자체이고, 뭔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밥먹고 씩씩하게 그냥 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욕먹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뭐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런 거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그게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그게 논쟁이 된 건 복수 삼부작이었다. 그래서 아까 원초적이라고 말했던 건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에서 판단력이 멈추는 양상을 이 영화는 그냥 알몸으로 보여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맞다. 그것에 대해서는 뭐… 그렇다고 할밖에. -기자 간담회장에서 어떤 사람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한 질문에 모두가 웃었지만, 실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질문치고는 꽤 괜찮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음… 그거야 안 나오면 이상한 거지. -방금 그 장면을 말하면서 주인공들이 벌거벗었다고 은연중에 표현을 했는데, 확실히 엉켜 있는 건 분명하다. 비가 와서 옷이 젖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고, 그러다보니 한쪽에 뜬 무지개는 이 사람들의 자세를 조금은 예쁘게 혹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의상의 도안 자체가 마치 이 순간을 살덩어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실제로 벗고 있다. 하지만, 무지개는 거대한 충전 완료를 뜻한다. 시선을 돌리려는 뜻은 없었다. 그 장면의 이미지 자체는 무지개만 빼면 네덜란드 사진작가 에드 반 데르 엘스켄의 작품을 참조한 것이다. 인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영군 침대 머리맡에도 그 사람 사진을 걸어놨는데 어떤 흑인이 기계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장면이다. 기계가 꼭 표정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사람 사진 중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초원이 있고, 멀리서 남녀가 벌거벗고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거기서 직접 따온 이미지다. 영화 속에서 그게 성행위까지 가는지 아닌지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그 컷에서만큼은 성행위는 아니다. 부모들이 보면 기겁할 만한 소꿉놀이 장면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둘 다 20대 초반으로 나이가 설정되어 있고, 그 정도면 이성이 모자라도 본능적인 육감은 있을 때다. (웃음)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사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이 굉장히 성적인 어필을 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12세 관람가를 받은 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웃음) =(웃음) 심의위원들은 내 생각처럼 그 장면을 봐준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찍었고. 전체적으로 본다면 성적인 뉘앙스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암시하는 모습들은 많이 있다. 키스할 때 발바닥에서 분출되는 화염, 열락을 뜻하는 듯한 무지개, 와인 병에 물들어간다고 집어넣는 손가락 같은 것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렇게 생각하셔도 우리는 잘 몰라요, 하는 그들의 그런 느낌이다. (웃음) -마지막 장면을 뭔가 탈현실화되어 있는 장면으로 끝내는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다. =강해진다기보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그들이 몰랐던 사이에 찍힌 사진으로 끝나지 않나. 그걸 내가 좋아하나보다. 아옹다옹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졌던 복잡한 현실세계에서 벗어나서 탈출하는 것 말이다. -이번 영화는 소재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고 아까 말한 치료를 포기하는 감독의 태도가 크게 문제될 건 없다는 생각인데, 길게 봤을 때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판단력이 항상 제로 지대에 이르게 되는 매혹이 영화적으로 본인 영화에 얼마만큼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박찬욱 영화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거기서 발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볼 문제다. 하지만 당장 대답하기는 힘든 어려운 문제다. 듣고 보니 중요한 문제 같다. (웃음) 왜냐하면 그것들이 내가 중시하는 성향이고 취향이라서. 모든 비극 내지는 옳고 그름에 대한 번뇌들이 다 하찮아지는, 극복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도달했을 때 멍해지는 그런 상태가 종종 내 영화의 결말로 사용되는 것 같다. 왜 그런지 한번도 정리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바람이 있는데, 박찬욱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주 잔인한 장면일 때조차 너무 신사적이고 고풍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주 더럽고 저열한 면을 한번 끌어안아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것은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스코시즈 같은 사람의 분야다. 나는 그런 세계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묘사하더라도 그 태도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만약에 내가 그런 것을 한다면 억지로 하는 것이 될 거다. 그래 보이고 싶어서, 스코시즈처럼 되고 싶어서 하는 짓이겠지. 본분을 알아야지. (웃음) 내 본분은 숏을 구성하거나 대사를 구성하거나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아무리 저열한 인간이라도 어떤 인간적인 기품이 있기를 바란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가 아니라(웃음), 그런 바람이 있다는 거다. 그것을 팽개치고 스코시즈나 이마무라에서 보여지는 날것 같고 바닥을 보는 듯한 그런 건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이럇샤이! 행복해지는 주먹밥을 드립니다, <갈매기식당>

핀란드의 갈매기는 비대하다.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음식을 맛나게 먹는 통통한 갈매기가 나는 좋다…. 주인공 사치에의 내레이션과 함께 푸른 하늘을 유유히 나는 갈매기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항구도시, 헬싱키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어느 여름날, 헬싱키의 거리 한쪽에 작은 식당이 문을 연다. 식당의 주인은 작은 체구의 일본인 여성 사치에로 식당의 이름은 ‘갈매기식당’이다. 그녀는 우연히 거리를 지나다 아무런 부담없이 누구라도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식당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단어도 ‘레스토랑’이 아닌 소박한 느낌의 ‘식당’을 선택했다. 메뉴 역시 심플하면서 맛난 것을 고민했다. 그래서 결정한 갈매기식당의 메인 메뉴는 다름아닌 오니기리(주먹밥)다. 오니기리의 종류도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대중적인) 샤케(연어), 우메(매실), 오카카(가다랑어포)의 단 3종류. 하지만 작은 체구의 일본인 여성 혼자서 하는 식당이 낯선지 현지 주민들은 호기심에 주위를 맴돌지만 좀처럼 손님이 되지는 않는다. 며칠이 지나도록 식당을 찾는 손님이라곤 갈매기식당의 기념적인 첫 손님이란 명목으로 매일같이 공짜 커피를 마시러 오는 핀란드 청년 한명뿐이다. 일본 만화에 심취한 청년은 사치에에게 <갓챠맨>의 가사를 물어보는데 어렴풋이 맴돌기만 할 뿐 도무지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카데미야 서점 카페에서 심각한 얼굴로 <무민 계곡의 여름축제>(핀란드의 대표적인 동화작가 토베 얀손의 작품)라는 제목의 일본어 책을 읽고 있는 미도리에게 사치에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건다. <갓챠맨>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미도리는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찍었더니 그곳이 핀란드였다고 한다. 이를 인연으로 미도리는 사치에와 동거하면서 갈매기식당을 돕게 된다. 그리고 또 한명의 일본인 중년 여성 마사코. 헬싱키 VANTAA공항에서 짐을 기다리는데 그녀의 짐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어느 날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핀란드의 에어기타 경연대회, 휴대폰 멀리 던지기 대회 등을 보게 된다. 20년 동안 부모님의 병수발을 든 마사코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하찮은 일에 그토록 열중하는 핀란드인이 인상에 남아 핀란드행을 결정했다. 가방을 찾기 위해 당분간 헬싱키에 남아야 하는 마사코도 이렇게 갈매기식당의 일원이 된다. 뭔지 모르게 여유롭고 행복하게만 보이던 핀란드 사람들의 이미지, 하지만 하나둘 갈매기식당의 손님이 늘어가고 낯설기만 하던 사치에의 일본 음식이 천천히 그들의 입에도 익숙해져가면서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사치에도 미도리도 마사코도 알아간다. 최고의 커피에 대한 전설과 마술을 알려주고 간 마티, 남편이 이유없이 떠난 뒤 우울증에 시달리던 핀란드 여성도 그들의 친구가, 이웃이 된다. 이들과 함께 아직 어떤 계획도 목표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헬싱키의 일상에 젖어들면서 작은 행복을 느껴가는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 사치에의 멋들어진 ‘이랏샤이’(어서오세요)와 함께 갈매기식당은 어느덧 헬싱키 손님들로 만원을 이룬다. 영화의 원작은 담담한 필치로 여성들의 일상을 그려내 많은 여성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인기작가 무레 요코의 소설 <갈매기식당>. 각본과 감독은 이 작품이 세 번째인 오기가미 나오코가 맡았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시골에 사는 소년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담담하게 담아낸 데뷔작 <이발사 요시노>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어린이영화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도쿄에서 약 10시간,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에 자리한 나라 핀란드. 핀란드인들은 일본인들처럼 연어(salmon)를 좋아한다. 사치에가 갈매기식당의 장소로 핀란드를 선택한 이유이다. 어렴풋이 멀고도 가까운 이미지의 나라 핀란드에서 <갈매기식당>이라는 영화가 탄생했다. <갈매기식당>에 출연하는 일본인은 3명의 중년 여성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핀란드 배우이고,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헬싱키 출신 마르쿠 펠톨라가 커피의 마술을 전해주는 마티 역으로 출연한다. 주요 스탭으로는 일본인 스탭 외에 헬싱키의 따뜻한 풍광과 여유로운 헬싱키인들의 감성, 그리고 항구도시 헬싱키의 내음과 풍경 등을 스며들듯 화면에 담아낸 촬영, 조명, 녹음, 미술에 핀란드 스탭이 참가했다. <갈매기식당>은 <사가의 무서운 할머니>와 함께 2006년 일본 미니시어터(단관계) 최고의 흥행작이다. 헬싱키(핀란드) 올 로케로 진행된 이 영화는 일본 내에서 제작비 약 8천만엔, 마케팅비 약 5천만엔, 프린트 17벌(순회상영으로 현재까지 약 70개 스크린에서 상영)로 극장에서만 약 7억엔의 수익을 올렸고 이런 극장의 호성적에 힘입어 현재 DVD도 잘나가고 있다. 이 영화가 일본의 30~40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흥행에 성공한 배경에는 1988년에 시작된 <후지TV>의 심야 인기시리즈 <역시 고양이가 좋아>라는 시추에이션 코미디가 있다. 극의 반 이상이 애드리브로 진행된 이 프로는 배우들의 절묘한 연기궁합에 힘입어 세 자매의 다양한 일상을 자연스럽게 그려내 인기를 얻었다. 가타기리 하이리를 제외한 고바야시 사토미, 모타이 마사코가 역시 세 자매의 멤버이다. <역시 고양이가 좋아 2005>에는 이 영화의 감독인 오기가미 나오코가 각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인간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까…”라는 사치에의 신념처럼, 핀란드어를 배우고 어릴 적부터 해온 합기도로 심신을 단련하는 사치에 본인처럼, <갈매기식당>은 조용하면서도 강하고, 그러면서 왠지 기분 좋은, 그런 편안한 행복감이 은근하게 넘쳐나는 영화다.

죽음의 전조를 낭만적 판타지로 표현한 <수면의 과학>

달콤하고 광적이며 서글픔을 담고 있는 미셸 공드리의 새 영화 <수면의 과학>은 놀라운 조합물이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불행하고 채플린을 닮은 듯한 광인을 연기하는 이 장난기 가득한 낭만적 이야기에는, 공드리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 <이터널 선샤인>의 여운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모습을 볼라치면 공드리의 뮤직비디오들이 떠오른다. 이상한 옷들과 콜라주 경치, 얼기설기한 사물들의 애니메이션, 가짜 원근 착시 그리고 거친 상상의 지형도. 공상 속에 사는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자신이 <스테판 TV>라는 텔레비전 쇼의 진행자라고 상상하며 밤을 보낸다. 창고에 달걀판들을 붙여 만든 세트장. 카드보드로 만든 카메라를 보며 스테판은 음악도 연주하고 게스트들도 인터뷰하며 (주로 자기 엄마) 시청자에게 자신의 비전을 어떻게 “섞는지” 지켜보게 한다. 매일 밤마다 자신의 쇼에서 스테판은, 멕시코에서 아버지와 살다가 파리에 있는 가족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 훌륭한 복귀의 세팅은 꿈의 스튜디오의 또 다른 버전이어서 스테판은 그저 소년 시절 물건들과 루브 골드버그식 장치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침대에서 자고 있다. 언짢은 성격의 마술사와 사는 스테판의 엄마(미유 미유)는 아들을 인쇄소에서 일하게 해준다. 가게 주인은 스테판이 제안한, 각각의 달이 유명한 재난으로 구별되는 달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드리의 지나친 공상가 주인공이 어디에서든 그렇듯이, 그곳도 독특한 인물들과 상상거리 풍부한 물건들이 가득해 그의 쇼를 위한 환상에 사용된다. 스테판의 일상은 스테파니(샬롯 갱스부르)가 앞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더 복잡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테판이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가냘파서 세밀하고 앙상한데다 대단히 신경질적이다. 하지만 매력이 없다고 집착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스테판과 스테파니는 이름 말고도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서로 다른 면에서 유치하고, 만들고 모으는 조그만 물건들이 있다. 깊은 의미에서 그들은 천생연분인데 스테파니는 스테판이 그녀가 따온 장난감 말을 만져서 움직이게 하자 그걸 뒤늦게 깨닫는다. 스테판은 (공드리처럼) 집에서 사용되는 재료들을 사용하는 예술가다. 일단 둘이 공동작업을 시작해 만드는 광적 작품은 미쳐 날뛰게 된 유치원 미술 프로젝트 같다. 나머지는 알랭 레네 스타일의 이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와 중간쯤 되는 듯하다. 사물들도 그만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하루는 스테판이 발이 냉장고에 남겨진 채 깨어난다). 진정, <수면의 과학>은 기본적으로 잡동사니 더미 같아서 이리저리 흩어진 익살스러운 대사들과 장식적인 프로이트식 개념들이 두서없이 뒤죽박죽 쌓여 있다. 공드리의 제멋대로인 비주얼과 난해한 미장센은 주인공들의 외국인 악센트로 더 강조되어서 뱉어내는 각 단어들은 독특하게 들린다. 공드리는 얀 슈반크마이어보다 훨씬 더 밝은 초현실주의자이지만 <수면의 과학>은 체코의 거장이 만든 <광기>처럼 요즘 나온 사물을 이용하는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만들어진 세상이 주인공의 심란한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 스테판의 꿈과 현실을 오가며 재료들을 이리저리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수면의 과학>은 장난기 가득한 영화다. 분위기는 죽음의 전조에 가깝다. 그러나 주인공만큼이나 영화는 색다르기에는 너무 낯설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스테판은 성공을 꿈꾸고 보상받지 못한 사랑에 괴로워한다. 그의 고독은 어디에서나 분명하다. 그는 서글프게 말한다. “아빠와 얘기하고 싶어.” 스테판과 스테파니가 검비(<몬티 파이튼>의 점토 캐릭터)가 탈 듯한 말을 함께 타고 구겨진 셀로판의 바다를 건너는 마지막 환상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기보다 앓게 한다.

도도함에 쉼표를 찍다, <언니가 간다>의 고소영

영화용어 중에 ‘코미디 릴리프’(comedy relief)란 말이 있다. 영화 속에 코믹한 장면을 삽입해 극의 긴장을 늦추는 것이다. 팽팽했던 이야기는 웃음에 진동하고, 작은 쉼표가 파장의 뒤를 잇는다. 숨죽였던 장면들이 안도(relief)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영화는 가벼운 사유의 시간을 갖는다. 고소영이 코미디를 들고 나타났다. 도도하고 섹시하며 당당했던 그녀가 복고 냄새가 진동하는 핑크색 가죽재킷을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 있다. 거침없이 내뱉은 대사는 <언니가 간다>다. 우연한 기회에 12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30살 싱글녀의 이야기. 비현실적인 설정과 덤벙거리는 캐릭터가 왠지 고소영에겐 이물감처럼 낯설다고 생각했다. “어색했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저는 스쿠터도 탈 줄 알거든요. 또 편한 사람들을 만나면 춤도 추고, 코믹한 노래를 부르러 가기도 해요. 물론 깐깐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저의 다른 면도 이젠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하이톤의 차가운 어투 대신, (본인의 표현대로) “찡얼거리는” 베이비 톤으로 대답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집에서 뒹구는 것”을 즐기며, 텔레비전을 하도 많이 봐서 “테순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집에서는 종종 갈비찜,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만든다고 한다. 이쯤 되니 고소영이란 팽팽한 이미지도 진동하기 시작한다. <언니가 간다>는 과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이야기다. 고소영이 연기한 나정주는 ‘고삘 때’ 실패한 첫사랑을 수정하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는 여자. 하지만 결과는 실패,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후회는 해요. 하지만 정주는 후회하지 않거든요. 첫사랑의 상처는 아프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고 말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12년 전을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게 왜 없겠어요? 하지만 그건 지금 바꿀 수 없는 거잖아요. 저는 우스갯소리로 ‘나는 72년생이 아니야, 72년에 태어난 기억이 없어, 엄마가 72년이라고 하니까 그냥 그런 거야’라고 해요.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인 거죠. 세월은 흐르고, 누구나 나이는 먹고,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요.” 그렇게 고소영은 긴장을 놓았다. 자신의 12년 전과 마주하는 영화에서 그녀는 불편함을 덜어내고 추억을 즐긴다. 그녀의 표현대로 ‘생목소리’는 웃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감독님이 제 목소리가 다르대요. <아파트>에선 ‘천. 삼백. 이십. 사호(웃음),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근데 이번 영화에선 많이 편하게 한 것 같아요. 그냥 친구들 만나면서 수다 떠는 것처럼.” 4년에서 6개월. 올해 7월, 긴 공백기 끝에 <아파트>로 돌아왔던 그녀는 템포를 한껏 높여 보인다. “다작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젠 일년에 한편 정도는 하고 싶어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4년이란 시간이 아깝기도 하거든요. 더 좋은 작품, 더 많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근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쉼표 다음엔 다시 팽팽한 긴장일까. 모든 일을 사전에 계획하고, 철두철미하게 진행한다는 그녀는 “예전에 안병기 감독님이 농담처럼 말씀하신 <원초적 본능> 같은 영화, 혹은 박찬욱, 허진호 감독님과의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이번엔 귀여운 영화 했으니까, 다음엔 좀 멋있는 걸 하려고요”라고 가볍게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코미디는 진심을 실어 나른다고 하지 않던가. 확실히 ‘언니’의 출발은 다시 시작된 것 같다. 12년 전의 나 과거를 심각하게 돌아보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제가 성격이 급하거든요. 옷을 샀는데 후회가 되면, 바로 다음날 가서 바꾸든지 해요. 뭐든지 빨리 해결하는 게 좋아요. 12년 뒤의 나 12년 뒤요? 생각하기 싫다. (웃음) 아기도 하나 있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 같은데요. 아직은 연기를 평생직업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한데 맞는 역할이 주어진다면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장만옥이나 공리, 참 멋있잖아요.

이미지의 정치학을 사유한다

‘포토그래피’(fauxtographie)- 프랑스어의 ‘거짓’(faux)과 ‘사진’(photographie)을 합성한 조어로 <주말>에 등장한다- 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진실을 위한 거짓이 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고다르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물음에 대면하여 고다르는 ‘백지상태’(tabula rasa) 혹은 ‘영’(zero)으로 돌아가 영화의 기본적 구성요소인 이미지와 사운드를 그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고(<즐거운 지식>), 이미지의 생산과 배급에 있어 점점 지배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텔레비전을 경유하여 이미지의 제작과정을 분석하기도 했다(<넘버2> <잘 돼 갑니까?>). 고다르의 1980년대 이후 작품들에 이 모험적 시기의 성과들이 유감없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초에 제기된 물음의 답변 형태로서가 아니라 좀더 정묘해지고 복수화된 물음의 형태로서다. 이미지의 정치학이라고 할 만한 고다르의 이 같은 사유와 더불어 우리 또한 답변이 없는 물음들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깊은 숙고로 즐겁게 빠져들곤 하는데, 그 과정에서 종종 간과되곤 하는 것이 과학에 관한 고다르의 견해이다. 비평가이자 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다르가 ‘발견’과 ‘발명’의 수사학을 종종 끌어대는 것도 영화(와 스스로)를 예술사뿐 아니라 과학사의 한 부분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는 뤼미에르 스스로가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 진술했던 영화의 과학적 기원을 잊지 않는다. 또한 영화와 정치의 몽타주를 근심하는 동시에 영화와 과학, 과학과 정치의 몽타주에 대한 사유를 병행한다. 물론 여기서 고다르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은 언제나 영화이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정치와 과학은 ‘여기’(here)의 영화가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다른 곳’(elsewhere)으로서 기능한다. 즉 그는 “여기에 있는 것을 본다.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찾기 위해.”(<탐정>) 물론 고다르는 정치학자가 아닌 만큼이나 과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학과 과학의 방법론을 영화적으로 ‘번역’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고 또 그러한 번역의 가능성에 대단히 민감한 시네아스트이다. 예컨대 <즐거운 지식>은 화학에서의 물질의 정성적(定性的) 분석방법을 이미지의 분석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파트리샤란 인물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요소로 분해하고”, “환원시켜”, “치환기”를 만들고, “재배열한” 뒤에 사운드와 이미지의 올바른 모델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잘 돼 갑니까?>는 ‘비트’(bit) 개념과 정보이론의 창시자인 클로드 섀넌의 노이즈(noise) 이론의 영화적, 실천적 적용이다. 고다르는 한 인터뷰에서 “노이즈는 단순히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말하면서, 동시대 유럽인의 삶을 바꿔놓은 ‘사회적’ 노이즈의 실례로서 베트남전을 들었다. 또한 그는 <열정>의 인물들이 “자기장 속을 가로지르는 철심들”로 고려될 수 있으며 이 영화는 그것들의 교차에 관한 이야기이자 비전이라는 식의 괴이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과학적 방법론의 예술적 전유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괴테의 소설 <친화력>을 떠올리게도 하는 고다르의 모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를 둘러싼 숱한 비평적 상투구들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이 다면체의 영화작가의 발걸음은 여전히 우리를 숨가쁘게 만든다. 상영작 소개 즐거운 지식 Le Gai Savoir 출연 줄리엣 베르토, 장 피에르 레오 | 1968년 | 컬러 | 91분 고다르의 필모그래피에서 1968년 이전에 ‘촬영’된 마지막 작품으로 누벨바그 시기와의 완벽한 절연을 선언하는 듯한 전위적 에세이 필름. O.R.T.F.(프랑스라디오텔레비전기구)의 제의로 만들어진 텔레비전용 영화로 본디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의 영화판으로 의도되었으나 결과물은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고 결국 방송은 거절되었다. 에밀과 파트리샤란 이름의 두 남녀가 7일 동안 밤마다 만나 사운드와 이미지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전기적 잡음에 섞여 들려오는 고다르 자신의 목소리, 1968년 5월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녹음된 사운드, 각종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등의 조합은 영화에 복잡성과 혼란의 감각을 부여한다. 고다르의 후기작 <영화사(들)>에서 그 절정에 달하게 될 에세이적 스타일의 시작이자 “영(zero)으로의 귀환”으로 일컬어지는 작품. 넘버2 Numero deux 출연 상드린 바티스텔라, 피에르 우드리 | 1975년 | 88분 고다르의 새로운 시작이자 이른바 ‘제2의 데뷔작’(이 영화의 애초의 제목은 <넘버2 : 네 멋대로 해라>였다). 비디오로 촬영되어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 보여지는 화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한 뒤 35mm 필름으로 다시 촬영한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급진노선을 표방했던 지가 베르토프 집단 시기 작품들의 교조적 특징이 거의 사라진 대신 1970년대 중반 고다르의 비디오 시기 작업들을 특징짓는 내밀한 스타일과 주제(일상과 텔레비전)가 뚜렷이 드러난다. 일종의 ‘공장’으로 정의된 현대의 일터, 가정, 영화작업, 육체 모두에 대한 전방위적 분석으로서의 영화.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성행위 묘사와 노출로도 악명 높은 작품인데, 고다르는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넘버2>가 포르노이자 정치영화이며, 텔레비전이자 영화이며, 픽션이자 다큐멘터리라고 선언한다. 잘 돼 갑니까? Comment ca va? 출연 미셸 마로, 안 마리 미에빌 | 1976년 | 78분 누벨바그 시기의 <경멸>이나 후기의 <열정> <사랑의 찬가> 등처럼 고다르식 ‘영화에 관한 영화’, 즉 영화 만들기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로 이야기되는 작품이다. 특정한 이미지(사진)에 대해 집요한 논평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선 지가 베르토프 집단 시기의 <제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궤를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 가운데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불운한 영화이기도 하다. 좌파신문의 인쇄공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두 남녀가 토론을 벌이지만 끝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다. 1970년대 이후 고다르의 동반자가 된 안 마리 미에빌이 여주인공 오데트 역을 직접 맡았다. 노이즈를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일부로 간주하는 오데트/미에빌의 견해는 고다르 자신의 영화에서 각종 노이즈가 지니는 중요성에 대한 간접적 언급이기도 할 것이다. 열정 Passion 출연 이자벨 위페르, 한나 쉬굴라 | 1982년 | 87분 고다르는 한 인터뷰에서 <열정>의 이자벨(이자벨 위페르)이란 여인은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사제의 일기>의 주인공과 닮은 데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따라 <열정>을 한 노동계급 여성의 ‘수난’(passion)을 통해 기독교적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라고만 보기엔 이 작품의 결은 지나칠 정도로 풍성하다. 영화촬영장, 공장, 호텔 등 세 공간을 무대로 삼은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빛과 어둠, 낮과 밤, 진실과 허구, 사랑과 노동 등의 대립물들간의 ‘횡단’(trans)의 가능성을 다소간 모호한 방식으로 탐색한다. 렘브란트, 고야, 앵그르, 들라크루아, 엘 그레코의 걸작들을 영화적 활인화(tableau vivant)로 완벽하게 재현해낸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의 솜씨는 탄성을 내뱉게 만든다. 시몬느 베이유의 저서 <중력과 은총>에 대한 헌사이기도 한 이 영화를 두고 콜린 매케이브는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다르 작품”이라 평하기도 했다. 탐정 Detective 출연 나탈리 바이, 클로드 브라쇠르 | 1985년 | 95분 2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 중인 탐정과 그의 삼촌 프로스페로, 빚에 시달리고 있는 복싱 프로모터, 그에게 빚을 독촉하는 한 부부와 마피아 일당 등이 한 호텔에 기거하고 있다. 영화는 각각의 인물들의 방을 오가며 이들간의 느슨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데 종국엔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지고 2년 전의 살인사건은 싱겁게 해결된다. 이 작품은 프로스페로의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세리 느와르> 시리즈에 대한 고다르식 논평으로 볼 수도 있고, 복싱 프로모터의 이름이 ‘짐 폭스 워너’라는 데 착안하면 할리우드영화 및 영화산업에 대한 코믹한 비판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고다르는 이 작품을 세명의 미국영화작가- 존 카사베테스, 에드거 울머,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게 헌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