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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TTL face - TTL 기자단이 뽑은 표정

나 이만큼 부자에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천국이다. 부산에 처음 와본다는 김은진(20)씨는 극장 앞에서 영화 엽서를 챙기다 기자의 날카로운(?) 눈에 걸렸다. 김씨의 어깨에는 잡지 부록으로 받은 가방이, 그리고 가방 안에는 돌돌 말린 영화 포스터와 꼼꼼하게 모아놓은 파일마다 각종 팜플렛과 엽서, 잡지 등이 가득했다. “영화 팜플렛 모으기가 취미”라는 그는 “영화도 즐기고, 이것저것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다”며 방대한 분량의 ‘수집품’을 펼쳐보여주었다. 일석이조, 일거양득,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준비된 영화광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듯. 글/ 티티엘 유진아 사진/ 티티엘 김아영 날아라 피켓 보이∼ 2도 낮아진 기온탓에 잔뜩 움츠린 월요일 아침,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PIFF광장을 날아 다니는 한 피켓 보이가 카메라에 포착됐다. 그날의 야외무대(상영작 제작진 소개 행사)를 홍보하는 자원봉사자 임경우(23)씨다. 올해부터는 야외무대가 관객의 눈에 띄지 않는 PIFF광장 뒷길로 옮겨지고, 날씨까지 쌀쌀해지면서 관객들의 참여율이 저조할 것을 우려한 스페셜 기획팀이 새로운 홍보방법을 꺼내놓은 것. 자원봉사자들이 피켓을 들고 발로 뛰며 행사를 알리는 것이다. 행사 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사람들이 좀처럼 모여들지 않자 애가 탄 임경우씨와 친구들은 거리를 좌우로 가로지르며 뛰고 또 뛰었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러나 “헥헥”대며 달려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임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근엄한 표정으로 폼을 잡는다. 인터뷰를 당하는 일이 처음이라는 그는, 같이 뛰던 다른 친구들은 다들 인터뷰를 당했는데 유독 자기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섭섭했는데 드디어 자신도 찍혔다며 신이 났다. 뛰고 또 뛰어라, 그러면 찍힐 것이니. 글/ 티티엘 송시원 사진/ 티티엘 이승희

TTL 재잘재잘 - 자갈자갈, 자갈치 외

자갈자갈, 자갈치 남포동 PIFF광장 맞은편엔 그 이름도 유명한 자갈치 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자갈치’가 부산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설마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 나만 몰랐나? 부산에 와서 자갈치라는 고기를 찾으면 기자처럼 무안당한다. 사실 자갈치는 생선 이름이 아니라 그저 자갈치 시장 근처의 지명! 자잘한 자갈이 많은 곳이라 ‘자갈치’라 불렀다고. 지금은 많이 소실되었지만, 예전에는 파도에 휩쓸리는 자잘한 자갈 소리가 참 운치 있었다고 하던데. 글/티티엘 유진아 사진/티티엘 김아영 마법사의 지팡이는 닭꼬치? 없는 거 빼고 다 있어요∼. 남포동 PIFF광장에 먹거리 장터가 열렸다. 어디 보자… 호떡, 호박엿, 부산의 명물 부산어묵에다가 왕만두, 닭꼬치까지. 영화제 데일리지 부스와 모양도 크기도 비슷하게 천막을 친 이 먹거리 장터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춥고 배고프면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터, 티켓팅하랴, 잡지사 홍보물 받으랴 이리저리 다니느라 발품파는 관객들이 고픈 배를 달래느라 분주했다. 뿐이랴. <광복절 특사>로 막 풀려난 죄수복 아저씨(영화사 홍보맨)도 만두로 속을 채우고,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의 마법사도 지팡이 대신에 닭꼬치를 들고 흐뭇한 표정이다. 마법사 아저씨도 ‘머글’(마법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들의 먹거리에 감탄한 모양?! 글/ 티티엘 박민아 어느 불행한 공짜광 이야기 PIFF광장 뒷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스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공짜 경품이 있는 부스와 없는 부스. 경품행사부스만을 찾아다니며 공짜를 수집하는 것도 영화제의 소소한 재미. 그러나 백수에게도 직업정신이 있고, 공짜수집가들에게도 스케줄이 있는 법! 설문조사를 해주는 사람에게 매일 두 번 추첨을 통해 가방이나 점퍼 따위의 경품을 주는 어느 잡지 부스에는 때만 되면 어디선가 슬며시 나타나는 한 아저씨가 있다고 한다. 첫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시에 불쑥 나타나 설문지를 한 장 작성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공짜광’ 아저씨다. 그가 작성한 설문지만 해도 벌써 100여장에 달한다니 그의 성실성(?)을 짐작할 수 있겠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공짜광 아저씨, 아직까지 CD한 장 못 받았다니 어지간히 운이 없는 듯. ^^ 글/ 티티엘 송시원 영화제 조기 폐막하다? 주말, 발디딜틈 없이 인파가 들어찼던 PIFF광장은 다음날인 월요일이 되자 전날의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다. 잔인하게 옷깃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 탓에 부스도 늦게 문을 열고, 그나마 거리에 나온 홍보 요원들도 잔뜩 몸을 웅크렸다. 오전 11시 영화가 시작되자 영화를 기다리던 관객들마저 사라진 PIFF 거리에는 바람에 얻어맞은 낙엽만이 우수수 딩굴고 있었다. 떨어진 낙엽은 사람의 심사를 더욱 싱숭생숭케 하니, 아! 이제 가을도 이제 끝이런가. 아직 ‘개시’도 하지 않은 부스를 보던 한 아주머니, 가을 여인마냥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던 기자에게 한발한발 다가온다. “기자예요?” “넵! (우쭐∼)“ “한 며칠 바글바글하디만 인자는 영화하는 거 다 끝났는갑데이, 행사도 끝났는데 기자분은 여서 뭐 하능교?“ “넷? 아, 저….”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날씨는 썰렁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영화제는 와 이래 빨리 썰렁해지능교? -.-;; 글/ 티티엘 송시원 달마가 극장으로 간 까닭 앗! 시민회관 앞에 줄을 선 스님을 포착했다. 살짝*^^* 카메라를 의식하는 옆모습이 누구보다 천진하다. “그냥 영화 보러 왔어요. 찍지 마세요.”(스님: 미소+미소+미소) “몰래(?) 한 컷만 빌릴게요∼.”(기자: 미소+미소+미소) -.-;; PIFF라는 이름의 바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대상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 때문에 하루하루 마음이 설렌다. 내일은 또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글·사진/ 티티엘 김아영

<할레드> 감독 아쉬갈 마섬바기/<바람의 파이터> 주연 맡은 가수 비/오늘의 관객

“아웃사이더들에겐 믿음이 필요하다” - <할레드> 감독 아쉬갈 마섬바기 “아웃사이더들이 외부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란 출신으로 캐나다로 이민 와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쉬갈 마섬바기 감독은 <할레드>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극빈의 삶을 살아가며 주위로부터 따돌림 받는 소년 할레드가 엄마의 시신과 함께 아파트에서 겪는 며칠간을 그리는 이 영화는 마섬바기의 데뷔작. 영화촬영지인 토론토에 비해 훨씬 개방적인 분위기의 밴쿠버에서 살았음에도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경험이 녹아든 이 영화는 카를로비 바리 감독상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18세 때 이란을 떠난 탓에 “솔직히 키아로스타미 등 이란 감독보다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화에 영향받았다”는 그는 자살하려던 여인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는 <그레이스>를 준비 중이란다. 사진/ 임종환 “최영의는 나의 우상” - <바람의 파이터> 주연 맡은 가수 비 영화배우로 첫선을 보이던 날, 비는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었다. 가요 오락 프로그램에서 어렵잖게 감상할 수 있었던 미소는, 기자회견 현장에서 단 한번도 빛나지 않았다.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인 전설적인 무술인 최영의(최배달)의 삶을 그릴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주연 배우로 캐스팅된 비는 이미 캐릭터에 깊이 몰입된 듯, 기존의 미소년 이미지와는 또 다른, 성숙하고 강인한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 검도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색 빌로드 정장을 입고 나타난 비는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도전도 많이 하고 경험도 많이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늘 강한 남자를 꿈꿨는데,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을 연기하게 돼 매우 기쁘다”는 그는 조만간 일본을 오가며 UDT 생존 훈련과 극진 가라데 훈련을 수행한다는 ‘다부진’ 계획도 공개했다. 사진/이동민 오늘의 관객 - 오늘의 관객? 오늘의 감독! 주말의 열기가 가라앉은 월요일의 PIFF광장. 한산한 분위기 속에 유난히 눈에 띄는 관객을 발견했다.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서울에서 올라오신 최진영(26)씨는 켄 로치 감독의 <스위트 식스틴>을 예매한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단편 <투 해피 투 다이>의 감독이라고. 최감독이 내놓은 작품은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로, 2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란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시간도 가질 예정이라는 최감독은 긴장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물론 떨린다. 하지만 부산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은 감독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인지 질문도 곧잘 던져주고 많이 웃어준다”며 미소지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려달라는 질문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100점 만점에 87점 정도?”라고 답했다. 대학 졸업작품 준비 때문에 3년 동안 부산영화제에 올 수 없었다는 최감독은 “이번 영화제가 축제 느낌이 강해서 들뜬다. 그래서 들뜨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작품을 보려 노력했다”고 한다. 자신의 단편영화 여주인공인 배우 황은경씨와 동행한 이번 영화제의 여정은 아쉽게도 관객과의 대화를 가진 오늘(18일) 끝이 난다고. 다리를 다쳐 불편한 몸이면서도 관객으로, 감독으로 바쁜 일정을 보낸 최감독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글/ 티티엘 심은주 사진/ 티티엘 조병각

<보더라인> Border Line - 김인식 <로드무비> 감독

보더라인 Border Line 일본, 2002년, 118분 감독 이상일, 오후1시30분 대영3   느슨하고 섬뜩한 로드무비   밴쿠버 영화제에서 (전날의 숙취와 시차로 인해) 반수면 상태로 봤던 영화 <보더라인>. 그래서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뱃속에 소화 덜 된 음식처럼, 내 머리 속에 상당히 헷갈린 상태로 뱅뱅 맴돌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분에 초청되어 다시 날 찾아왔다. 완전히 소화시켜달라는 듯이. 하지만 뭐… 난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너무 바쁘니까, 부산에서 봐야 할 영화가 넘치니까, 게다가 술도 마시고 재미있게 놀기까지 해야 하니까. 그렇치만 굳이 <보더라인>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 한다면, 템포가 아주 느린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덜떨어진 한 고삐리의 성장여행? 아무튼, 정확하진 않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구로사키 다이고는 상습 음주 택시 운전사! 그는 오늘도 캔맥주를 택시 안에 구겨버리며 운전을 하다, 재수없게 자전거를 타고 비실거리는 고삐리 마츠다 슈지를 들이받는다. 마츠다는 황당하게도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 중이란다. 어설픈 자해공갈단 수준의 고삐리의 협박에 못 이겨 홋카이도를 향해 택시를 모는 구로사키 다이코. 홋카이도에는 어릴 때 마츠다를 버린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때부터 영화는 슬슬 로드무비 형식을 띤다. 어설픈 칼 한 자루를 쥐고 택시기사를 협박해가며 홋카이도로 향하는 두 사람의 여정이 귀엽고 재밌기까지 하다. 두번째 부분으로 접어들면서 영화에는 갑자기 조폭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중년의 골칫거리 깡패에 불과한 미야지 다이스케와 그의 부하 기타지마는 일당의 돈을 횡령한 회계사 이소무라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소무라가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횡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 미야지는 일당을 쏴가며 그를 놓아준다. 영화는 이제 조폭인 미야지와 고삐리 마츠다의 우정에 포커스를 맞춘다. 미야지는 조폭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마츠다는 미야지가 딸에게 주려했던 연(바람에 날리는)을 가지고 다시 여행을 하면서 영화는 세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집을 나가 원조교제를 하며 살아가는 미야지의 딸 하루카와 아버지 살해범 마츠다와의 만남. 마츠다는 연을 하루카에게 전해주고,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 하루카와 원조교제를 하는 유부남을 모텔방 앞에서 온몸으로 저지하는 마츠다. 무수히 유부남에게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문 앞을 꿋꿋히 지키는 마츠다. 이 장면이 보더라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씬이 아니었나 싶다. <보더라인>은 대단히 극단적인 상황의 인물들이 느슨하게 얽히면서 전개가 된다. 영화를 감상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측면도 있다. 느린 이야기 전개, 복잡하진 않지만 퍼즐처럼 얽히는 인물과 상황들. 하지만 그 더딘 흐름 속에서 의외로 사람의 감정을 터칭하는 힘이 있었다. 졸음과 악전고투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머리 속엔 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그런데 또하나의 걱정,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이 말 들으면 정말 화내겠다…. 후후. 김인식/ 영화감독·<로드무비>

20·30·40대의 삼각관계 탐구 <질투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은 20대 청년, 30대 여성, 40대 남성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에 관한 탐구다. 모든 게 아직 미정이고 불안한 20대 청년이, 모든 게 명쾌한 40대 장년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여성을 두 번이나 빼앗긴다는 게 줄거리의 큰 틀이다. 감독은 이 불안스런 삼각관계를 통해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 꿈 많던 젊은이가 사회의 한 조각으로 물려 들어가는 방식의 단면을 함께 보여준다. 이원상(박해일)은 졸업 논문만 남겨둔 대학원생이다. 유학을 다녀와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옥탑방에서 하숙하는 그는 외고 따위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어느 날 친구가 기자로 일하는 문학잡지에 객원기자로 취직한다. 공교롭게 원상은 이 잡지의 편집장 한윤식(문성근) 때문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악연을 가지고 있다. 여자관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한” 윤식은 “바람도 안 피고 마누라한테도 못하는 남편보단 바람도 잘 피고 마누라한테도 잘 하는 남편이 백 번 낫다”는 ‘명쾌한’ 신념을 지닌 닳고닳은 현실주의자다. 여기에 수의사 때려치우고 사진기자로 들어온 박성연(배종옥)이 끼여든다. 원상은 누나같은 성연에게 끌리지만, 편집장이 어느새 성연과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질투…>는 어떤 교훈이나 가치관을 강요하고 선동하는 대신,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일상의 ‘작은’ 사람들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등장인물들은 세상과 마찰하며 조약돌처럼 반질반질 닳아간다. 인간 내면의 거친 질감이 닳아지는 동안 내질렀을 비명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고 관객의 짐작에 맡긴다. 멋을 전혀 부리지 않은 화면 구도는 완고할 정도로 정돈돼 있다. 감독의 어눌한 말씨 뒤에 얼마만큼의 자신감이 숨어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임을 염두에 둔다면, ‘청출어람’을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제작사인 청년필름(대표 김광수) 쪽은 이 작품을 뜸들이고 아꼈다가 내년 늦봄쯤 국내 개봉할 생각이다. 이상수 기자

삶은,부드러운 풍경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 Story 이란의 외딴 마을 시어 다레(‘검은 계곡’이라는 뜻)에 자동차를 몰고 온 일군의 촬영팀이 도착한다. 베흐자드(베흐자드 도우라니)가 이끄는 이 촬영팀의 목적은 곧 임종을 앞두고 있는 한 고령의 할머니의 장례식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 가는 것이다. 베흐자드는 자신이 마을을 방문한 목적을 감추고 할머니의 임종을 기다리면서 꼬마 파흐자드(파흐자드 소흐라비)나 몇몇 마을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이 워낙 오지인지라 베흐자드는 휴대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통화를 하기 위해 정신없이 마을 외곽의 높은 언덕 위로 향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반복해야 한다. 곧 죽을 것 같았던 할머니는 오히려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고 베흐자드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 Review 순수함. 한때 키아로스타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모두들 어김없이 입에 올리곤 하던 이 단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올리브 나무 사이로>로 이어지는 이른바 ‘지그재그 삼부작’은 키아로스타미의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마치 ‘동화작가’처럼 간주되었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것은 <체리향기> 이후의 키아로스타미이다. 죽음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뒤따라가는 이 영화는 ‘순수한’ 키아로스타미가 이미지의 외설성에 대한 섬세하고 효과적인 저항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서를 마련해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이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올해 초 개봉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영화 <디 아더스>에서의 사자(死者)의 사진들을 기억하는지 그 사진들이 극명하게 보여주듯, 이미 지나간 ‘죽은’ 시간의 흔적인 사진적 이미지는 현실의 죽음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끔찍하게 외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정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이러한 외설성에의 저항을 수행하는 동시에, <올리브 나무 사이로>보다 한층 더 부드러운 정교함으로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어쩌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가 보여주는, 정말로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위와 같은 생각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 풍경 속에 온전히 파묻혀 있음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이자 축복이기도 한) 프레임 안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는 풍경들의 가장자리 또한 응시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바람에 실려 흔들거리는 잎사귀들을, 골목 구석구석을 배회하는 동물들을, 집의 벽에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문양들을, 즉 화면 곳곳에 충만한 삶의 징후들을 감지해 보라는 것이다. 주인공 베흐자드가 지혜로운 노의사의 오토바이에 함께 올라타고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진료를 위해 마을로 향하기 전, 이미 그 오토바이가 밀밭의 황금물결 사이로 지나쳐간 적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까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삶은 조용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곁을 스쳐간다. 우리가 비록 베흐자드를 바라보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풍경들까지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부주의하게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 ♣ 베흐자드가 찾아간 시어 다레 마을은 여느 시골처럼 한적하고 주민들은 느리며 낙천적이다. 인상적인 건 사람의 삶과 죽음,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느긋한 시선이다. 그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시간을 다스리려 하기보다 시간의 흐름을 타면서 살아간다 도시에서 걸려온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는 미로 같은- 하지만 이 미로는 오직 그에게만 미로이다- 마을길들을 바삐 가로지르고 마을 외곽의 길을 차를 몰고 황급히 지나쳐서는 언덕 꼭대기의 묘지에 올라 간신히 전화를 받곤 한다. 그의 반복적인 행위는 일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한 소년의 그것과도 닮아 있지만 여기선 정반대의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키아로스타미가 보여주는 자기반복 속에서의 차이들에 주목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기어이 죽음을, 좀더 정확하게는 죽음이 불러올 슬픔의 풍경들(장례식)을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베흐자드의 시도는 생각하기에 따라 죽음 그 자체를 포착하려는 것보다 더 외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은 거기 휩싸여 있지 않은 타인들의 감정을 착취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흐자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위장한다. 아마 이보다 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키아로스타미의 자의식을 잘 보여주는 설정도 달리 없을 것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후반부에 베흐자드는 우유를 얻으러 갔다가 잠시 어둠 속에 던져지는데 이는 그의 그릇된 의도에 대한 처벌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마침내 빛이 찾아온다. 흡사 <체리향기> 혹은 에서처럼, 그렇게 빛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이후 베흐자드의 행위를 지켜보며 또 한번 키아로스타미의 ‘마술’에 감탄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 한 할머니의 장례식을 취재하러 온 베흐자드는, 조만간 죽을 줄 알았던 그 할머니가 오히려 회복될 기미를 보이자 애가 타기 시작한다. 회사의 독촉이 잦아지지만,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느긋하다. 어느새 미소 띤 표정으로, 안달하는 베흐자드를 바라보는 마을과 자연의 시선이 느껴진다. 베흐자드와 우리는 끝내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볼 권리만은 갖지 못한다. 또한 슬픔을 탈취할 권리도 가질 수 없다. 다만 시어 다레 마을 사람들을 감싸안은 풍경을 보는 것만은 언제나 허락된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의 신비스러운 바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또 한번 그 황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의 풍경은 키아로스타미의 이전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풍경들과 닮아 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낯설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꿈꿀 권리’를 거의 무한정 허락하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키아로스타미에게 일말의 의심, 거부감을 품었던 사람들조차 끝내 굴복하게 만들 것 같은 영화다. 아마 그것은 이 영화가 단지 아름다운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 옳은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Reivew] 타운 앤 컨트리

■ Story 건축사와 디자이너인 포터(워런 비티)와 엘리(다이앤 키튼) 부부는 지난 25년간 남들 눈이나 스스로에게도 ‘완벽한’ 부부로 살아왔다. 모나(골디 혼)와 그리핀(개리 샌들링) 부부는 이들의 절친한 친구다. 어느 날 모나가 그리핀의 외도현장을 목격하며 이혼을 하게 되고, 이를 위로하고 수습해주려던 포터는 수십년 친구였던 모나와 섹스관계를 맺게 된다. 이즈음 남편의 또 다른 외도사실을 알게 된 앨리(앞에선 엘리로 나옴. 확인 바람)는 친구 모나에게 찾아와 하소연을 한다. 냉랭한 아내 앞에서 괴로워하던 포터는 그리핀과 도피여행을 떠난다. ■ Review 여기 벌거벗은 한 남성이 있다. 그의 아내는 지적이고 사려깊으며(다른 누구도 아닌 다이앤 키튼 아닌가!) 그 또한 25년간 한눈 한번 안 팔며 살아왔다. 그놈의 친구 그리핀이 “자넨 정말 한번도 외도를 안 했단 말야” 말만 하지 않았어도. 포터는 아름다운 첼리스트(나스타샤 킨스키)와, 또 한편으론 오래된 친구 모나와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고 그가 사악한 인물도 아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상황과 분위기에 휘말리며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타운 앤 컨트리>는 미국 중산층 부부의 사랑과 결혼의 위기에 관한 한판 소동이다. 흔하긴 하지만 나쁜 소재는 아니다. 여기에 인물들의 수다스러움과 뮤지컬 못지않게 쓰이는 음악까지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화는 1930년대 스크루볼코미디로도, 우디 앨런으로도 길을 잡지 못한 채 우스꽝스런 대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이 폭주기관차에 탄 손님들을 보자. 찰턴 헤스턴과 앤디 맥도웰은 ‘엽기’ 부녀로 나온다. 포터를 침대로 찾아간 뒤 인형을 들고 신음소리를 내는 놀이를 하는 딸에, ‘공주님’인 자기 딸을 모욕했다고 파티장에 총을 들고 나타나는 괴팍한 성격의 아버지다. 이들이 포터로 하여금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할진 몰라도, 이유없는 엽기행각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 물론 포터와 모나의 섹스 직후 두쌍의 부부가 모나의 집에 모여드는 장면이나 여성화장실에 포터와 관계를 가진 다섯명의 여성들이 차례로 들어서는 장면처럼 기억에 남는 부분도 있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자기 식으로 해석하며 떠들어대는 인물들은 인상적이고, 연극을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쟁쟁한 배우들이 평소의 낯익은 캐릭터로 나오는 것도 편해 보인다. 하지만 결국 ‘정직함’이 최고라며 이 헛소동을 급하게 봉합해버리고 나면(그나마 자신이 게이임을 털어놓는 그리핀의 이야기가 가장 그럴듯하다), 남는 건 기이한 캐릭터와 대사들뿐이다. 워런 비티가 급기야 북극곰 옷을 뒤집어쓰고 마을파티에 갈 때는 이 배우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다.김영희/ <한겨레> 문화부 기자 dora@hani.co.kr

[단편 Review] 사이코 드라마/내 사랑 십자드라이버

▣ 사이코 드라마 어느 날 오숙경이라는 스물여섯의 여자가 한 낡은 정신병원의 신참 간호사로 들어온다. 굉장히 새침해 보이는 간호사가 오숙경에게 밤 근무를 부탁하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과 대화하며 밤을 지새우게 된다. 그때 오숙경은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사람은 바로 이 병원의 환자로 있는 박동우라는 남자였다. 이후로 오숙경은 이 잘생긴 청년에게 연모의 감정을 갖게 된다. 정신병원 환자로 입원해 있는 남자 박동우에 대해 병원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라 일이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함.” 그러나 겉모습만 보면 그는 정신병원의 환자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잘생기고 건장한 모습을 한 청년이기에 간호사인 오숙경이 그에게 비밀스런 연정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게다가 오숙경이라는 이 신참 간호사는 새로 온 병원에서 모두가 자신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며 쭈뼛쭈뼛해하던 처지가 아니던가.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녀는 요즘 자신이 행복하다며 사이코 드라마의 무대에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오숙경은 박동우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 여하튼 보통 사람은 아님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뒤에 밝혀지듯이 박동우라는 이 인물은 자신이 위대한 박정희 ‘장군’의 화신임을 확신하고 있는 ‘위험한’ 과대망상증 환자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의 위험성은 코믹함(장난감 총을 쏴대며 고함을 치는 꼴이라니)과 불안함(그래도 여하튼 그는 병원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이니까)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클라이맥스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 환자가 사이코 드라마의 무대에서 “병원이 위험해. 무너지려고 그래”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래, 그 말을 믿었어야 했다. <사이코 드라마>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간호사와 어떤 ‘나쁜’ 아버지(비록 생부는 아니지만)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정신병원 환자 사이의 관계를 그리면서 사람들의 ‘망상’에 대해 들여다보는 ‘심리극’이다. 영상원에서 수학한 윤재연 감독이 차분한 연출력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 내 사랑 십자드라이버 주인공 남자는 기계 수리공으로 일한다. 그에게는 남몰래 연정을 품은 여자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그는 그 여자를 자신 곁에 두겠다는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그만 그녀를 자신의 방에 납치해온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갑자기 난폭한 반응을 보이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된 남자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내 사랑 십자드라이버>는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내 사랑에게>(To My Love)이듯이 주인공 남자가 자신이 홀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러브레터와도 같은 영화다. 영화는 시종 이 남자의 내레이션을 들려주는데, 이것을 들어보면 이 남자가 남들과는 좀 다른 세계관 혹은 인간관을 가진 문제적인 인물임을 알 수가 있게 된다. 가령 그는 이런 말들을 한다. “당시의 자동차는 날 이해했을 걸요. 기계는 사람보다 나으니까요.” “몸이란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게 마련이죠. 마치 기계처럼요.”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남자는 세상 모든 것을 기계에 유비시켜 생각하며 기계가 그 어떤 것보다도 심지어 사람보다도 낫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제목이 <내 사랑 십자드라이버>인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십자드라이버야말로 기계를 고치고 조작하는 그의 대리손 같은 것인데, 문제는 이 남자가 어떤 때는 그것을 사람에게도 ‘무리하게’ 들이대기조차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어릴 적 엄마가 어떤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만 자신의 십자드라이버를 ‘이용’해본 적이 있으며 마치 <콜렉터>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연모하는 여성을 납치해와서는 또 그만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해버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사랑 십자드라이버>가 피비린내 가득한 영화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영상원에서 수학한 하기호 감독은 레니 크레비츠의 음악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그에 걸맞은 제법 세련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소유와 집착, 콤플렉스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 한편을 만들어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러시아 방주> <야행> <할레드> <모번 켈러의 여행>

<러시아 방주> Russian Ark 월드 시네마/ 러시아/ 2002년/ 96분/ 알렉산더 소쿠로프 오후5시 부산극장2관 <러시아 방주>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사라져 간 것들을 향한 매혹을 드러내왔던 한 영화작가의 이상한 열정 그 자체이다. 죽은, 혹은 죽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안톤 체홉의 유령 등의 발자취를 따라 가던 소쿠로프의 궤적이, <몰로흐> 이후 결국 이렇게 굴절되고 마는 것은 이상하다. <러시아 방주>가 매혹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고통스러워진다. 소쿠로프의 신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꾸 불편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러시아 방주> 전체를 단단한 동시에 유려하게 감싸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유령(들) 때문이다. 일단 영화의 무대가 되는 에르미타쥐(Hermitage)는 1050개의 방, 2000여 개의 창문, 120개의 계단, 대략 250만 점의 전시물, 그리고 지붕 위에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고 하는 그야말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여러 인물들, 즉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그리고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등은 물론이고 수많은 귀족들이 러시아 300년의 역사 속에 유럽문화를 아우른 광대한 프레임 속으로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진다. 소쿠로프는 단 하나의 길게 이어진 시점샷으로만 구성된 영화를 기획하고 HD 디지털 카메라와 유려한 스테디 캠 촬영술에 기대어 전대미문의 기이한 박물관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디지털의 미학을 통해 역사에 관한 비스콘티적 모럴리티를 다시 불러온 에릭 로메의 <영국여인과 공작>과는 달리, 소쿠로프는 여기서 온전히 비스콘티의 한 등장인물이 되어버린다. <러시아 방주>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사라져 간 것들을 향한 매혹을 드러내왔던 한 영화작가의 이상한 열정 그 자체이다. 죽은, 혹은 죽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안톤 체홉의 유령 등의 발자취를 따라 가던 소쿠로프의 궤적이, <몰로흐> 이후 결국 이렇게 굴절되고 마는 것은 이상하다. <러시아 방주>가 매혹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고통스러워진다. 현재의 풍경을 어둠과 안개로 지워버리고 고집스레 항해에 나선 이 방주가 닻을 내릴 곳은 과연 어디일까. 글 / 유운성 <야행> Night Voyage 한국영화회고전/한국/1977년/75분/감독 김수용 오후2시 대영시네마 5관 <야행>은 한 여성의 일상과 내면 풍경을 따라잡으면서, 직장과 가정이 여성에게 강제하는 여러가지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영화로선, 남성 감독의 영화로선 드물게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 <야행>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야기의 인습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촬영과 편집과 음향 등으로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은행원인 현주는 직장 내 유일한 노처녀다. 직장 동료인 박대리와 비밀리에 동거 중이지만, 박대리는 그리 바람직한 파트너가 못된다. 수시로 현주의 몸을 탐하지만, 현주의 만족은 그에게 중요치 않다. 현주에 대한 배려의 맘이 없는 그는 결혼 약속도 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일주일의 휴가를 청한 현주는 고향으로 내려가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노골적인 유혹이 넘치는 밤거리를 헤매 다닌다. 현주의 변화를 눈치챈 박대리는 청혼을 하고,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현주의 고향으로 함께 내려간다. 잠든 박대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주는 혼자 조용히 기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직장에서 다시 만난 박대리에게 현주는 '휴가는 끝났다'는 쪽지를 내민다. 1973년에 제작됐으나, 검열 때문에 77년에 개봉한 <야행>은 당시로선 꽤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결혼한다는 전제도 없이 동거에 들어간 커플, 그리고 성적 욕구 불만에 몸부림치는 여주인공,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음적인 시선, 남자들이 득세하는 밤거리와 밤문화를 노골적으로 묘사할 만큼 대담한 한국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야행>은 한 여성의 일상과 내면 풍경을 따라잡으면서, 직장과 가정이 여성에게 강제하는 여러가지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영화로선, 남성 감독의 영화로선 드물게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 <야행>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야기의 인습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촬영과 편집과 음향 등으로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김수용 감독은 촬영이나 편집 등이 대사 못지 않은 ‘언어’ 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야행>은 “한국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는 김수용 감독의 별명이나, 한국영화의 형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글/박은영 <할레드> Khaled 캐나다, 2001년, 85분 감독 아쉬갈 마섬바기, 오후8시 메가박스5관 더 이상 엄마의 죽음을 숨길 수가 없게 된 상황을 맞은 할레드는 현관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집 안을 떠나지 않는 ‘농성’전에 돌입한다. 간략한 표현과 직설적인 화법을 갖춘 <할레드>는 현대 도시라는 곳이 꼬마 아이 혼자 살기에 얼마나 위협적인 요소로 가득찼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도시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소년의 씩씩한 삶을 그리는 영화. 주인공 할레드는 토론토의 빈민 지역에서 병약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10살 짜리 꼬마. 별 다른 일을 가지지 못한 엄마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어려운 살림을 꾸리지만, 할레드는 엄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또 할레드는 자신과 엄마를 모욕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대견한 아이다. 모로코 출신 아빠와 캐나다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탓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는 할레드는 학교에선 놀림감이 되기 일쑤지만,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한 백인 아이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켜낸다. 그는 엄마를 넘보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또한 눈총을 쏘아붙이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병에 시달리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 죽음의 세계가 낯설기만 한 할레드는 엄마의 시체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집을 나서 학교로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할레드는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게 되지만, 사회보호기관에 홀로 맡겨질 게 두려워 어머니의 죽음을 남들에게 숨기기로 결심한다. 평상시처럼 생활하며 엄마의 죽음을 덮으려는 할레드의 소망과 달리, 주위 사람들은 할레드 집 안에서 나는 괴이한 악취를 궁금해 하며 자꾸만 그의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 수상쩍은 기운을 느낀 사회복지사는 매일같이 그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악독한 집 주인은 집세가 밀렸다며 엄마를 보자고 한다. 결국 더 이상 엄마의 죽음을 숨길 수가 없게 된 상황을 맞은 할레드는 현관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집 안을 떠나지 않는 ‘농성’전에 돌입한다. 간략한 표현과 직설적인 화법을 갖춘 <할레드>는 현대 도시라는 곳이 꼬마 아이 혼자 살기에 얼마나 위협적인 요소로 가득찼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글/문석 <모번 켈러의 여행> Morven Callar 월드 시네마/영국/2002년/97분/감독 린 램지 오후2시 부산극장 2관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지리멸렬한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발판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모번 켈러의 여행>은 한 평범한 소녀의 깜찍하고 당돌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한) 심리적 여행기다. 대담하지만 부드럽고, 부드럽지만 감성적이지 않은 영상이 스토리와 잘 어우러져 있다. 크리스마스 아침, 모번 켈러의 남자친구가 싸늘히 식은 시체로 발견됐다. 남자친구의 시체 너머엔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그가 생전에 쓴 소설 원고가 보인다. 남자 친구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까, 축하해야 할까. 모번 켈러의 선택은? 그녀는 남자친구의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시작한다. 남자 친구의 시체는 토막 내서 매장하고, 사람들에겐 그가 떠났다고 말한다. ‘너를 위해 썼다’는 소설엔 자기 이름을 달아 출판사로 보내고, 그의 은행 잔고를 털어 여자친구와 남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낯선 남자들과의 음주 그리고 섹스. 친구와 다툰 뒤 홀로 남은 모번 켈러는 런던의 출판업자와 만나 차기작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혹 신문 사회면에서, 또는 9시 뉴스에서 모번 켈러의 이러한 행로를 묘사한다면, ‘천인공노할’ ‘파렴치한’ ‘엽기적인’ 등등의 수식어가 동원되지 않을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번 켈러에겐 큰 잘못이 없다. 남자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자기 창작물을 분명 모번 켈러에게 바친다고 했다.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지리멸렬한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발판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평범한 소녀가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비전형적으로 행동하는 것 뿐"이라는 감독 린 램지의 ‘변호’ 그대로, <모번 켈러의 여행>은 한 평범한 소녀의 깜찍하고 당돌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한) 심리적 여행기다. 대담하지만 부드럽고, 부드럽지만 감성적이지 않은 영상이 스토리와 잘 어우러져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촉망받는 시네아스트 린 램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신비로운 예지자로 출연했던 사만사 모튼이 모번 켈러로 분해 열연하고 있다. 글/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