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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10명의 음악평론가들이 뽑은 2006년 베스트 음반 [2]

한국 기타 역사를 새로 쓴 ‘사건’의 주인공 강인오 올해 대한민국을 대표했거나 들뜨게 했던 화제의 용어이자 화두 중 하나는 단연 ‘UCC’가 아닐까 싶다. 그런 수많았던 영상이나 홍보물 중에서 음악적으로 크게 화제를 모은 것은 유명한 클래식 곡인 파헬벨의 <캐논>을 멋진 일렉트릭 기타 실력으로 소화해낸 아마추어 뮤지션 임정현이었다. 갑작스러운 텔레비전 깜짝 출연과 이어진 광고음악 삽입 등 매스컴의 힘을 업고 거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은 아쉬웠지만. 그렇다면 다음의 기사 타이틀은 기억이 나시는지?! “기타리스트 강인오, 미 연주음반 사이트서 2위 기염”, “기타 하나로 이뤄낸 작은 한류 강인오씨 미 차트서 2위 기록”. 각각 지난 3월 말쯤 <마이데일리>와 <동아일보>에서 다룬 기사 제목이다. 강인오의 앨범은 2005년 11월부터 발매되어 국내에선 굉장히 더딘 홍보가 시작되었었다. 워낙 현 트렌드를 역행하는 음악인데다가 기타 연주곡으로만 채워진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앨범이었고, 가뜩이나 정통 록 음악이 설 자리가 별로 없는 우리네 시장에서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골수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으로 퍼지던 이 앨범은 놀랍게도 ‘Guitar 9’이라는 해외 기타 전문 사이트의 ‘Top Seller 차트’에서 3월25일자로 2위에 기록되는 사건을 일으켰는데, ‘Guitar 9’은 기타연주 앨범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세계적인 미국 사이트이자 레이블로 불리고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초절정의 기타리스트들 앨범에서부터 장르를 불문한 세계 곳곳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들의 연주 음반들이 고루 모여 있으면서 새로운 아티스트들의 연주 앨범들이 꾸준히 소개되고 유통되는 곳으로, 세계 도처의 기타음악 마니아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곳에서 1위를 차지한 드림 시어터의 기타리스트 존 페트루치 앨범의 바로 밑에 강인오의 앨범이 2위에, 그 아래 4위엔 기타 영웅 조 새트리아니의 앨범이 순위를 차지했으니 기타 연주계에선 놀라운 사건이었다. 자신의 밴드 앨범이 예전에 발매 취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강인오는 이번에 ‘록’이라기보다는 ‘퓨전’적인 연주를 능숙하게 보여주는데, 테크닉을 위한 테크닉이 아닌 음악과 멜로디가 살아나면서도 사운드 메이킹과 리듬, 그루브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을 이루어내 굳이 자세한 소개가 없다면 외국 기타리스트라 착각할 만한 ‘우직하고 완성도 높은’ 음악적 결과를 이뤄냈다. 거기에 유명 기타리스트 블루스 사라세노의 참여나 재킷 디자인에 다크 트랜퀼리티 멤버 니클라스의 도움은 한결 예술성을 배가했다. 성우진/ 대중음악평론가·방송작가 성우진 최고의 음반 리스트 (무순. 국내음반에 한정) 강인오 (드림온레코드) 고찬용 (도레미미디어) 머스탱스 (비트볼뮤직) 메쏘드 (서울음반) 몽라 <꿈꾸는 아이>(IO뮤직) 소히 <앵두>(CJ뮤직) 송홍섭(The Phoenix) (서울음반)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파스텔뮤직) 캐비넷 싱얼롱즈 (도레미미디어) 푸딩 (스톰프뮤직) 블루스와 아프리카 전통음악을 넘나드는 두 거장의 손놀림 알리 파르카 투레 & 투마니 디아바테 개인적으로 올해 세계 음악계의 가장 큰 손실은 말리의 거장 알리 파르카 투레(1939∼2006)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러 면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음악이 처음 미국에 소개됐을 때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 알리 파르카 투레가 연주하는 서부 아프리카 말리의 전통음악이 존 리 후커, 머디 워터스 같은 블루스 거장들의 음악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블루스와 너무나도 비슷한 그의 음악을 조명하면서 자연스럽게 블루스의 뿌리가 어디인지도 규명됐다. ‘블루노트 음계가 많이 쓰여서 블루스다’, ‘슬퍼서 블루스란 이름이 됐다’는 그간의 논란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라이 쿠더가 그를 모시고 발표했던 앨범은 빌보드 월드뮤직 앨범차트에서 무려 32주 동안 1위를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은 코라(Kora: 서부 아프리카 전통 현악기, 보통 21현에서 25현으로 구성되며 투명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지녔다)의 명인 투마니 디아바테와의 조인트 앨범이다. 이 음반은 지난 가을 극찬 속에 발표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앨범과 함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무리한 작품으로, 알리 파르카 투레의 어쿠스틱 기타와 투마니 디아바테의 코라가 중심이 된 연주를 들려준다. 어쿠스틱 기타와 코라의 조화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잡지 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앨범”이란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수록곡에서 영롱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어쿠스틱 악기 특유의 투명함을 맛볼 수 있다. 블루스와 서부 아프리카 전통음악을 편안하게 넘나드는 두 거장의 손놀림은 마치 소리를 뜨개질하듯이 섬세하고 부드럽다.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 구슬프게 노래하는 (아이 가 바니: 당신을 사랑해요)는 앨범의 백미다. 이 음반으로 다시 한번 그래미상을 탔다는 것이 대수롭지 않을 만큼 알리 파르카 투레는 모든 것을 초월한 도인의 풍모를 뿜어낸다. “세계는 위대한 목소리와 관대한 영혼을 잃었다.”() 송기철/ 대중음악평론가 송기철 최고의 음반 리스트 (무순. 수입음반 포함) 알리 파르카 투레 & 투마니 디아바테 (수입) 비아 (소니BMG) 조앤 셰넌도어 (알레스뮤직) 마누 차오 (EMI) 세자리아 에보라 (소니BMG) 아누아르 브라헴 (수입) 수아드 마시 (수입) 장 홍 얀 (수입) 바우 (수입) 카에타노 벨로조 (수입) 복고는 퇴행이 아니다, 복고는 쇼크다! 날스 바클리 거개의 복고 방법론은 과거의 소재 자체를 끌어들이는 리메이크 아니면 멜로디와 리듬의 응용에 중점을 둔다. 데인저 마우스와 시-로(Cee-Lo)의 듀오 날스 바클리는 그런 구태를 거부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멤피스나 모타운 솔이 활강하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흔해빠진 복고를 가져오는 주범이라 할 느낌의 모사가 아닌 녹음 방식과 스타일의 완전 재현과 재활이라는 방식을 취했다. 첫곡 부터 ‘백 투 더 패스트(past)’의 기(氣)가 펄펄 흐른다. 올해 영미 음악시장과 차트를 초토화한, 그것도 다운로딩만으로 차트 정상을 쾌척한 스매시 는 그 정점이다. 드럼을 비롯한 반주와 보컬 녹음을 그 시절 방식에 맞춰 거행하면서, 완벽한 복고의 산물을 일궈냈다. 복고의 상업성과 정체성을 구분하는 영미 음악 고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의 마력에 미쳐 들어갔고, 우리도 CF에 삽입되었으니 거의 미쳤다. 데인저 마우스의 사운드 뒤집기도 빼어나지만 멜로디에 빈티지 로망을 부여하는 시-로의 보컬은 정말 훌륭하다. 이 곡 외에 나 결정적으로 는 이들이 과거를 ‘현재 시제’로 얼마나 창의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잘 바꿀 줄 아는지를 웅변한다. 앨범 전체의 수록곡이 열넷이나 되는데도 러닝타임이 37분반(??)에 그치는 것도 그 시절의 미니멀리즘을, 간결함을 선호하는 이 시대의 감각과 연결시키는 것 또한 영리함의 증거다. 복고는 잘해봤자 퇴행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이 시대에 쇼크를 가할 수 있는 잠재적 방법론, 더 나아가 미래지향성도 소지하고 있음을 말해준 것이다. 복고라는 방식으로 지긋지긋한 복고의 상업성을 퇴치한 쾌보. ‘크레이지’ 날스 바클리를 빼고 올해 음악계는 정리가 안 될 것 같다. 백 투 더 퓨처!!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최고의 음반 리스트 (국내 음반 및 라이선스 음반에 한정) 1. 날스 바클리 (워너뮤직) 2. 배치기 <馬耳東風>(포니캐년) 3. 제이슨 므라즈 (워너뮤직) 4. 전제덕 (서울음반) 5. 러브홀릭 (서울음반) 6. 밥 딜런 (소니BMG) 7. 도널드 페이건 (워너뮤직) 8. 뮤즈 (워너뮤직) 9. 장혜진 <4 Season Story>(서울음반) 10. 크라잉넛 (도레미미디어) 그리스의 ‘상처뿐인 영광’에 대한 슬픔의 대서사시 엘레니 카라인드루 영화음악가 엘레니 카라인드루가 아테네에서 공연한 주옥같은 실황 앨범. 엘레니 카라인드루는 그리스가 자랑하는 영상시인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음악을 담당해왔다. 이번 공연 실황에는 카메라타 오케스트라와 ERT합창단, 그리스의 국민가수 마리아 파란투리까지 우정출연해서 앨범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수록곡은 영화 <안개 속의 풍경>(1988)의 삽입곡 를 비롯해 <울부짖는 초원>(2004)의 , <영원과 하루>(1998)의 그리고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1984), <비키퍼>(1986) <율리시즈의 시선>(1995) 등 카라인드루가 맡았던 앙겔로풀로스 영화의 음악들이다. 카라인드루의 음악은 듣는 이를 압도하는 슬픔의 서사시이다. 앙겔로풀로스의 근작 <울부짖는 초원>에서도 보여지는 것처럼 그리스가 살아온 역사의 흥망성쇠는 우리나라와 너무 비슷하다. 그녀의 음악이 우리 마음에 더욱 깊이 저며온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연상시키지만 <태극기…>가 지나친 총격전으로 일관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표현하려고 했던 반면 <울부짖는 초원>은 전투신이 거의 없이 여주인공의 흐느끼는 절규장면 하나만으로도 총격전 이상의 감동을 보는 이에게 준다. 이에 덧붙여 영화의 슬픔과 감정의 깊이를 더하는 건 그의 파트너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엘레지 음악들이다. ‘뿌리뽑힘의 절망에 대한 엘레지’라는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듯, 이번 공연 실황 앨범은 그 같은 그리스의 ‘상처뿐인 영광’의 역사를 두장의 CD에 담아낸 것이다. 우리 민족의 그것과 같아서, 동병상련의 정마저 느끼게 하는 음악이다. 전영혁/ <전영혁의 음악세계> DJ 전영혁 최고의 음반 리스트 (수입음반 포함) 1. 엘레니 카라인드루 (수입) 2. 키스 자렛 (C&L뮤직) 3. 트리오 비욘드(잭 디조넷, 존 스코필드, 래리 골딩스) (C&L뮤직) 4. 디노 살루찌 그룹 (수입) 5. 아누아르 브라헴 (수입) 6. 드림시어터 (워너뮤직) 7. 시르크 드 솔레이유(태양의 서커스) (수입) 8. 에릭 클랩튼 & J.J.케일 (워너뮤직) 9. 블랙모어스 나이트 (수입) 10. 데이비드 길모어 (소니BMG) 사색적 울림의 뽕짝, 장난스럽거나 우아하거나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입술이 달빛> 올해 최고의 음반과 올해의 가장 흥미로운 음반은 다르다. 음반을 고르고 소개하는 입장에서, 올해 최고의 음반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좋다는 것을 따라 말하면 된다. 그러나 올해의 가장 흥미로운 음반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음반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혼자서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으며, 승패가 어떻게 되건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두 번째 음반에 대해 얘기할 때면 왼손이 오른손을 이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두 번째 음반에는 ‘뽕짝’ 리듬이 차분히 넘실거리는 기묘한 분위기의 포크송들이 들어 있다. 쿵 짝 쿵 짝 쿵 짜라 쿵 짝. 사람들은 포크를 ‘사람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진실한 음악’이라 말하곤 한다. 그러나 뽕짝 역시 (좀 다른 방향이긴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둘을 섞어서 안 될 건 없지 않은가? 캠프파이어에서 장난처럼 통기타를 두드리며 송대관의 <네박자>를 부르는 것 이상의 섬세한 음악적 시도가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또한 그것이 엽기적(이기를 바라는) 복고와 키치로 범벅된 떠들썩한 울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사색적 울림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노래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이상적인 답변을 들려준다. 음반의 타이틀 곡인 <입술이 달빛>, 구슬프게 뚱땅거리는 <고양이 소야곡>, ‘뽕짝의 재구성’을 감행하는 <또 돌아보고>와 같은 곡들에는 ‘전통’을 굳이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전통의 일부가 된 음악이 얻어낸 여유와 부드러움이 있다. 때로는 장난스럽고 때로는 통속적이며 때로는 우아하다. 뽕짝이 존재하는 한국이 아니면, 뽕짝이 존재하는 21세기의 한국이 아니면, 뽕짝과 인디 신이 존재하는 21세기의 한국이 아니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음반이다. 이 음반을 올해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하듯이. 최민우/ 대중음악평론가·음악웹진 [weiv](http://weiv.co.kr) 편집장 최민우 최고의 음반 리스트 (무순. 국내 음반 및 라이선스 음반에 한정) 날스 버클리 (워너뮤직) 디셈버리스츠 (EMI) 마이 케미컬 로맨스 (워너뮤직) 머스탱스 (비트볼뮤직) 벨 & 세바스찬 (알레스뮤직) 불싸조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파스텔뮤직)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입술이 달빛>(파스텔뮤직) 저스틴 팀버레이크 (소니BMG) 펑카프릭 부스터 (타일뮤직) 피들밤비 (비트볼뮤직)

<거룩한 계보> 장진 감독의 신작 <아들>

장진 감독이 <거룩한 계보>를 촬영하기 전부터 트리트먼트를 써놓았던 <아들>은 매우 단순한 이야기다. 무기수 강식은 15년 전 세살난 아들을 바깥에 두고 살인강도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왔다. 교도관 박 경사와 동행하여 하루 동안 귀휴를 나가게 된 강식은 할머니와 살고 있는 고등학생 아들 준석을 만나러 간다. 상영시간이 85분 남짓 될 <아들>은 이처럼 15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정이 쌓이는 것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와 아들의 하루를 담을 뿐이지만, 밋밋한 드라마 위에는 애틋하고 당혹스럽고 코믹한 감정이 스쳐가곤 한다. 장진 감독은 <아들>이 단 하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무기수가 귀휴를 나왔는데 그 시간이 이틀이든 일주일이든, 그것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는 다르다. 강식은 아들이 홀로 집에 돌아오면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아들을 교문 앞까지 마중나가지 않는가. 관객도 하루라는 시간 때문에 드라마에 더욱 깊숙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아들>은 관객 스스로 긴장을 만들어나가는 영화다. 해가 기울고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아 여명이 밝기까지, 관객은 다시는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못할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치매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또다시 혼자 남을 아들이 애처로워 한숨을 내쉬게 될 것이다. 한정된 시간 외에 드라마 외부에서 <아들>을 조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는 강식이 무기수라는 사실이다. 그는 독백한다. 사형수는 사형을 기다리는 고통이 있겠지만, 무기수는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어 고통스럽다고. 그 때문에 강식은 시간에 의해 조금씩 존재가 지워져가는 듯했던 15년보다 귀휴를 기다리는 6일을 보내기를 더욱 힘들어한다. 그가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인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다면 수십년이 될지도 모르는 남은 세월, 기다릴 무언가를 가질 수 있을까. <아들>은 이런 소망을 강요하지 않고, 은근하게 권유하며, 온기와 눈물이 어리는 결말로 다가간다. 장진 감독은 무기수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군대에서 너무 즐거웠다. 나는 제대만을 기다렸는데, 한번도 무언가를 그토록 절실하게 기다려본 적이 없는데,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기다리는 제대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나더러 군대 체질이라며 말뚝 박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내 즐거움은 사라질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강식이 만나고자 하는 대상은 굳이 아들이 아니어도 좋을지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아들에게 무슨 정이 있겠나. 하지만 무기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마도 바깥에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거고, 그걸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정을 강조하는 가족영화라기보다 누군가의 아들일 수 있고 누군가를 아들로 가질 수 있는, 그 상황 자체의 소중함을 눈여겨보는 영화가 될 듯하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에서 독백에 가까운 대사와 내레이션을 유용하게 쓰곤 했던 장진 감독은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가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들>은 내레이션의 영화다. 강식이 무서운 눈을 가졌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상처받아 거울을 들여다볼 때, 준석이 조그만 침대 옆 바닥에 자리깔고 누운 아버지를 바보 같다며 타박할 때, 서먹함에서 친밀감으로 다가가는 부자(父子)의 감정은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들리는 내레이션을 타고 흐른다. “내레이션은 <아들>의 인물들이 속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단이다. 날아가는 철새 가족도 내레이션을 하는 까닭은 하늘이나 땅이나 이런 감정은 모두 통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D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하게 되는 철새 가족은 진중한 상황을 비집고 간간이 코미디가 등장하는 <아들>에서 가장 웃기는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기러기인가, 청둥오리인가 갈등하던 애니메이션팀은 좀더 진지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청둥오리를 택해 이미 4개월이 소요되는 작업에 들어갔다. 스물넷인데도 세살짜리 아들이 있었던 강식은 비슷한 나이에 아들 노아를 낳았던 배우 차승원에게 돌아갔다. “처지가 똑같잖아. (웃음) 맞아, 그때는 네가 짐스러웠어, 라면서 얼마나 공감을 하는지 모른다. 노아가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 아버지와 살갑게 정이 붙지 않는데, 그러니 모든 것을 다해주고 싶어하더라”는 장진 감독의 설명은 언뜻 ‘아버지’라는 단어와 매끈하게 붙지 않는 차승원의 캐스팅에 고개를 끄덕이도록 만들어준다. <묻지마 패밀리> <웰컴 투 동막골>로 제작자로서 장진 감독과 두번 인연을 맺었던 류덕환은 독한 말을 내뱉고 무뚝뚝하게 외면하다가 나란히 욕탕에 몸을 담그기에 이르는 아들 준석으로 캐스팅됐다. 앳된 인민군 소년병이 너무 자라버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장진 감독은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선 류덕환이 아직은 성장영화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사가 두 마디 이상 되는 인물이 거의 없고 75신으로 규모도 아담한 <아들>은 “탄력을 잃으면 안 되는 영화의 성격 때문에 마음 가는 대로 툭툭 찍고 개봉도 늦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성미가 급하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서먹하게 만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소줏잔을 기울이고 밤길을 달리고 텔레비전 안테나를 고쳐 다는 모든 순간들은, 끝내는 따뜻한 정으로 뭉쳐져야 하므로 어느 하나 허술하게 흘려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착하거나 다정하거나 무게있는 영화라는 의미만도 아니다. 강식이 귀휴를 나가기 전에 공부하는 자료는 요즘 아이들이 쓰는 채팅어들이다. 강식은 아들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한다. “하이, 방가방가.” 장진 감독, 저예산영화를 만나다 슈퍼16mm 같은 매체를 활용해 <아들>을 15억원 남짓한 예산으로 찍으려고 했던 장진 감독은 상업영화 투자사가 합류하면서 “굳이 힘들게 할 거 뭐 있나” 싶어 제작비를 20억원까지 높여 잡았다. 스탭과 배우들이 평소보다 개런티를 낮게 받았고, 등장인물과 촬영분량이 적고, 거창한 세트나 특수효과가 필요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진 감독은 이러한 저예산 전략이 앞으로도 많은 경우에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획영화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저예산 개념은 단지 예산이 적은 것이 아니고, 기획의 힘으로 제작비 누수를 막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형 저예산이라고 믿는다.” 장진 감독이 <아들> 이후 신작으로 계획하고 있는 SF사극 <애일리 안첨지>가 그러한 개념을 적용한 영화가 될 것이다. 장진 감독은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벼를 키우고 있는 논에 우주선이 내려앉아 미스터리 서클을 만들면서 시작되는 <애일리 안첨지>의 제작비를 30억원 안팎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건 누가 봐도 50억원짜리 영화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우주선이 얼마나 거창하겠는가. 사극이어서 제작비가 일정 수준 아래로는 내려가기 힘들겠지만 30억원이면 할 수 있겠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상상하며 좋아하던 종류의 이야기여서 기대가 된다.”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 <바람의 검심>의 켄신 목소리 구자형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 <몬스터>의 덴마, <바람의 검심>의 켄신, <하얀 마음 백구>의 성견 백구까지. 성우 구자형의 팬카페에 올라온 ‘쾌남전문성우’라는 말은 그동안 그가 맡아온 캐릭터들의 공통점을 단박에 짚어낸다. 구자형의 목소리는 언제나 정의를 지키고 진실을 밝혀왔다. 냉정하면서도 차분한 그의 음색과 높낮이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안 그래도 잘생긴 미남 캐릭터들의 외모마저 돋보이게 했다. 하다못해 백구마저 잘생긴 토종 진돗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구자형 자신은 주변의 이런 평가에 대해 조금은 냉정한 태도를 견지한다. “매력으로 느껴준 것은 고맙지만, 어떻게 보면 그만큼 비슷한 캐릭터만 맡아온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는 것은 아니다. “모두 어둠과 밝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죠. 스파이크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고, 덴마는 처음에는 어수룩하지만 점점 인간의 깊이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해요. 모두 제가 먼저 맡고 싶어했던 캐릭터들이었어요. (웃음)” 지금은 애니메이션 팬들의 가상캐스팅 보드에 항상 이름이 오르는 인기성우지만, 그는 원래 믹싱엔지니어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캐나다에 가서 일도 하면서 공부하려 했는데, 당시 걸프전 때문인지 비자가 늦게 나왔어요. 한참을 백수로 지냈는데, 한 친구가 사진관에 데려가서 사진을 찍게 하더니 원서는 이미 냈다고 성우 시험을 보라고 하더라고요.” 소리와의 질긴 인연 때문이었을까? 목소리 연기의 경험은 전무했지만 그는 당당히 시험에 합격했다. “아마 때묻지 않은 백지상태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점수가 좋았던 것 같아요. (웃음)” 현재 방송가에서 구자형의 목소리는 고급스러움과 신뢰감으로 통한다.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내레이션은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다른 한쪽 눈으로 현재를 보며 살아가는 스파이크처럼 균형있는 느낌으로 신뢰를 부여한다. “내레이션의 고급스러움은 목소리보다도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해도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미리 준비하려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 제작시스템에서는 조금 힘든 부분이죠.” 철저한 준비는 구자형이란 이름 석자를 애니메이션 팬들의 기억에 남게 한 가장 큰 비결이기도 하다.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 역을 준비하는 과정도 다를 바 없었다. 캐스팅 당시 PD에게 ‘선물’이란 명목으로 스무개가 넘는 비디오테이프와 A4용지 300여장 분량의 대본을 받았던 구자형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상적인 제작환경의 모델을 찾은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다른 애니메이션을 더빙하면서 꼭 원작 만화를 먼저 챙겨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외화드라마가 방송 외의 창구로 넘나드는 요즘, 더이상 ‘완전한 내 것’의 의미는 무색해졌어요. 이제는 한국판으로서의 의미를 찾을 뿐이에요. 그걸 조절하는 것은 역시 텍스트에 대한 접근인데, 다양한 상상을 하기에는 만화책만한 것이 없죠.” 데뷔 이후 지금까지 주로 강직한 멋을 간직한 남자들에게 목소리를 입혔지만, 의외로 구자형은 “영화 <올랜도>의 주인공처럼” 양면성을 지닌 캐릭터에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유아 프로그램 <꼬꼬마 텔레토비>에서 주제가를 부르고 해설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의 시도였다고. “ 버전에서는 성우가 마치 카우보이처럼 해설을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정이었기 때문에 동화구연처럼 친숙한 분위기에 정직한 느낌을 더하려 했죠.” <프라이멀 피어>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이중인격자 애런 역을 욕심낸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캐릭터에 대한 바람 외에 성우로서 가진 더 큰 꿈이 있다면 배우들의 본래 음색을 좀더 살리는 더빙을 완성하는 것이다. “를 보면서 호레이쇼 반장이 양지운 선배의 말투와 정말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또한 <매트릭스>의 미스터 스미스는 돌아가신 장정진 선배와 정말 비슷했어요. 언어차이 때문에 힘든 건 있지만 앞으로도 더 노력해보고 싶어요.” 성우들의 세계에서 말하는 “싱크로율 120%의 더빙”이 그의 바람일 듯. 성우 구자형에게 그것은 곧 우리나라의 정서와 120%로 부합하는 한국판 버전의 탄생을 기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 신작 <숨> 현장 공개 및 기자 간담회

김기덕 감독에게서 날아온 반가운 현장 초대다. 1월 17일 서대문 형무소 건물 안. 세 주인공 하정우, 장첸, 박지아가 함께 나오는, 어쩌면 <숨>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지아가 감방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장첸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둘은 끌어안는다. 미니 크레인에 달려 천천히 후진하며 떠오르는 카메라. 하정우가 프레임으로 들어와 박지아의 손을 잡아 반대방향으로 끌고 가면, 박지아는 자꾸만 장첸 쪽을 뒤돌아보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과 반대쪽으로 조용히 프레임 아웃 하는 장첸. 서대문 형무소 좁은 복도에서 피어나는 상상적이면서도 애틋한 이 장면. 과연 <숨>은 어떤 이야기인가? 연(박지아)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장첸)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본다. 연은 자기도 모르게 끌리듯이 사형수가 있는 형무소를 찾아가 면회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에게 1년간의 시간을 선사한다는 마음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맞춰 한 번씩 그를 방문하여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 편으론 계절에 맞는 노래를 불러주고, 또 계절에 맞게 면회실을 꾸며준다.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형수는 언제나 그녀의 방문을 기꺼이 받는다. 한편, 외도에 빠져 연을 외롭게 만들었던 남편 정(하정우)은 아내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 채고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숨>은 연과 사형수와의 클라이맥스를 향해가고, 이 영화의 제목 <숨>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다. 김기덕 감독의 열 네 번째 영화 <숨>에서는 순환의 시간에 놓인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기이한 공존과 구원의 이야기가 그려질 듯 하다. 올 여름 국내 개봉 예정이다. (현장 공개가 끝난 직후에는 서대문 형무소 야외 풀밭에서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이하 김기덕 감독 및 배우들 문답) -이 번 영화에 대해 각자 소개한다면 =(김기덕)우선 이렇게 추운 날 찾아와주어 고맙다. 지난 번 <시간>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시간>은 국내 판매 형식으로 8개관에서 개봉한 뒤 3만 명 정도 관객이 들었다. 애초 내가 말한 20만명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다시 영화사 스폰지에 이 번 작품을 수출하여 국내 개봉하기로 했다. 또, <시간>때의 발언 이후로 몇몇 매체들이 내 생각을 지지해 주었고, 그 지지자들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될 듯 싶었다. 나한테는 997만명의 관객보다 3만명의 관객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영화를 위해 발품을 팔고 봐준 관객들에게 이 번 영화도 보여드리고 싶다. 그게 내가 했던 말을 책임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라 생각했다. =(장첸)처음으로 한국 감독과 영화를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즐거웠다. 대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만의 캐릭터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특이한 경험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관객이 아닌 배우로서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박지아)연이라는 이름의,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사형수에게 얻는 여자 역할이다. =(하정우) <시간>은 보람 있었다.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과 다시 할 수 있게 된 건 큰 영광이다. 이 번 촬영 역시 즐거웠다. 내가 맡은 남편 역은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지 모르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서 그걸 깨닫게 되는 역할이다.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숨>의 시나리오는 <빈집>과 <나쁜남자>때 감옥 장면을 찍으면서 떠올랐다. 서대문 교도소를 배경으로 찍어보고 싶었다. <숨>은 80퍼센트가 교도소 장면이다. 제목이 <숨>인데, 숨을 내쉬는 것과 들이쉬는 것이 음양의 이치와 같아 보였고, 그 숨쉬기가 인생의 어떤 한 모습이지 않은가 싶었다. 여주인공 연이에게 남편인 정이 해주지 못하는 걸 사형수가 대신하는 것이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이미지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 -(장첸에게) 김기덕 감독과 일해 보니 어떤가 =한국 오기 전에 시나리오를 열심히 보고 연구했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시나리오 이외의 요소가 영화를 이루는 게 많기 때문에 그것만 보고 짐작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김기덕 감독은 예상을 할 수 없는 스타일이다. 처음에 예상한 것을 뒤엎는다.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웃음). 감독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새로운 캐릭터여서 더 흥미로웠다. 극장에서 보면 다시 또 느낌이 달라질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을 보면서) 맞나요 감독님? -(하정우에게) 김기덕 감독과 두 번째인데 다른 감독들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나 =감독님은 시나리오를 축소하고, 콘티도 없고, 설명적이지도 않다. 헤드라인만 갖고 만나는 거다.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스포츠 경기를 하는 흥분감이 있다. -지금까지 촬영한 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나 =이번에는 외국에서 투자를 받지 않았다. 최소로 봤을 때 2억 5천으로 제작하는 영화다. 그동안의 해외수익금을 모아 제작하는 작품이고, 그걸 스폰지에 수출한 것이다. 촬영횟수가 10회차 밖에 안 되고, 그걸로 90분 런닝 타임을 맞춰야 하니 전쟁처럼 찍은 영화다. 마음에 드는지는 편집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국내 개봉인데 왜 수출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나 =내 영화는 만들면 적어도 20개국 이상 판매되고 있다. 내 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만 따지면 2-3만이지만, 전 세계 가까이 따지면 천만 정도가 된다. 그 중에 한국은 2-3프로 되기 때문에 넓게 봐서 수출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숨>의 국내배급을 맡은 스폰지 조성규 대표) 부가설명을 하자면, <시간>도 그렇지만 이 번 영화 <숨> 역시 외국영화를 수입할 때와 동일한 조건과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수출이라는 말은 그런 뜻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저예산영화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다고 보는가 =내가 제일 중요하게 문제 삼는 건 제작비 상승이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용이 55억이라는 게 문제다. 25억 미만, 더 나아가서는 10억 미만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 다음은 국가 지원책에 관한 거다. 나는 꾸준히 10억 이하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국가지원책이 있어서 가능했다. 만약 그런 맥이 끊겼다면 못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극장 네트워크가 구성되는 것에도 국가 지원책이 더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본다. 국가가 어느 정도 지원을 하는 것이 거대 영화들과의 밸런스를 맞추는 길이라고 본다. 그리고 영화를 하는 후배들에게 바란다면, 자기가 가진 아이디어와 능력을 오락영화에 함몰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변덕을 자주 부린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 고민 많이 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3만 명의 애정을 중요하게 생각한거다. 약속을 어긴 거라고 보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이랬다 저랬다 한 것도 여러 번이 아니라 이 번 한 번 아닌가(좌중 웃음). 그건 인간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농담으로 말하자면) 앞으로 한 세 번 정도 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웃음)

찌질이들과 함께하는 미국 횡단여행 패키지

미국 횡단여행을 해보지 않고 미국을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지만 한번쯤 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여행길이다. 또 자동차로, 오토바이로, 때로는 잔디깎이까지 동원해 미대륙을 가로지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런 매력을 부추긴다. 돈은 없어도 마음만은 가득한 독자들을 위해 취향 따라 골라서 즐길 수 있는 미국 횡단여행 패키지를 소개한다. 하지만 성급하게 짐은 싸지 마시라. 영화가 끝나면 여행도 끝나니까.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 궁극의 화장실 유머를 실천하는 이색 문화 탐방 준비물: 특수제작 V자 수영복, 파멜라 앤더슨 브로마이드, 일행 중 한명이 식탁에 똥 봉투를 들고 와도 웃는 여유, 언제 어디서나 튈 수 있는 순발력과 주력. 여행 테마: 미국식 유머감각과 식사예절, 음주문화, 애국심, 신앙심 등등을 배워서 익히며 상호 호혜 정신에 입각해 ‘창녀 여동생과 저능아 남동생이 섹스를 한다’는 카자흐스탄식 유머감각을 널리 전파. 일행: 공개할 수 없는 이유로 (말하자면 <베이 와치>를 보고 한눈에 반한 파멜라 앤더슨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문화 탐방이라는 국가적 임무를 저버리고 LA로 가는 카자흐스탄 TV리포터, 카자흐스탄 유일의 프로듀서, 불곰 한 마리, 닭 한 마리.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뉴욕을 출발해 워싱턴DC, 미시시피, 텍사스 등을 거쳐 LA까지 대략 일주일. 비행기, 폐차 직전의 아이스크림 트럭,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타는 캠퍼 등등. 체험 하이라이트: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키스로 인사하며 정신병자로 인정받기, 생방송 중인 기상캐스터에게 다가가 화장실 위치 묻기, 게이 퍼레이드에 참가해 서로의 ‘그곳’을 만지며 친밀감 표시하기, 샌드위치에 독을 탄 (게 틀림없다는 것이 보랏의 주장) 테러리스트(가 확실하다는 게 보랏의 주장) 유대인 노부부 집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기, 극우적 분위기의 로데오 경기장에서 미국 국가를 ‘카자흐스탄 넘버원’이라는 가사로 바꿔 부르기(직후 몽둥이 찜질). 광신도들의 집회에서 방언을 따라하며 함께 어울리기, 나체로 숙소 안팎을 뛰어다니기 등등. 교훈: 파멜라 앤더슨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파멜라 앤더슨을 보쌈해가서 결혼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선진 미국의 문물도 뚜껑 열고 보면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후유증: 웬만한 화장실 유머와 슬랩스틱 코미디에 대한 불감증 유발.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분노와 출연배우들, 촬영장소 주민들의 줄소송. 러시아 상영금지 조치, 파멜라 앤더슨과 키드록의 두 번째 파경. <비비스와 버트헤드> 텔레비전과 국가 비밀무기를 찾아 떠나는 액션 어드벤처 준비물: TV를 훔쳐서 운반할 수 있는 트럭(TV가 사라져야 출발이 가능). 언제라도 ‘할(do)’ 수 있도록 벗기 쉬운 간편한 복장. 자기 이름도 못 읽는 동반자들을 위한 영어 읽기 능력. 여행 테마: 잃어버린 TV를 찾아 떠나는 시작은 미미했으나 사라진 비밀무기를 찾기 위해 총동원령이 내려진 FBI에게 쫓기다가 결국은 미국 대통령까지 만나게 되는 그 끝은 창대한 모험. 일행: 죽기 전에 한번 ‘해(do)’보는 게 소원인 10대 소년 두명. 많이 ‘따먹는’(score) 게 꿈인 소년들과 자신의 꿈(score: 카지노에서 점수 올리기)이 같다고 생각하는 귀 어두운 할머니와 이따금 합류.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라스베이거스스, 후버댐, 옐로스톤 공원 등 미대륙 횡단여행 패키지의 주요 관광사이트를 거쳐 워싱턴DC 백악관까지 대략 3, 4일. 비행기, 대륙 횡단 관광버스, 수녀원 버스, 자동차 트렁크 등. 체험 하이라이트: TV를 보기 위해 들어간 모텔방에서 교장 선생님의 마조히즘적 성적 취향 발견하기,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고대 이집트 여성 동상의 가슴을 두 시간 동안 쳐다보기. 그 가슴을 만지기 위해 동상에 올라가다 미끄러지기, 후버댐 관리실에서 똑같은 화면만 나오는 TV(댐 경비 모니터)의 채널을 돌리기 위해 이것저것 누르다가 미국 전역에 걸쳐 정전 사태 불러오기,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다가 490중 추돌사고 일으키기, 대통령에게 표창받으며 그가 누군지 못 알아보기 등등. 교훈: 말은 새겨서 듣자. ‘처치하라’(do)는 말을 ‘섹스하라’(do)는 말로 오해하지 말 것. 어른들의 말은 더욱 새겨서 듣자. 한번 ‘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가는 지명수배범이 되기 십상이다. 후유증: 90분 동안 감상한 대륙횡단의 주요 코스들이 모두 엉성하게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에 문득 밀려오는 허탈감. 걷다 보면 어느새 티셔츠 목을 머리까지 올리고 ‘똥구멍’(bung hole)이라는 낱말을 반복해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 <노브레인 레이스> 200만달러의 상금에 목숨걸고 달리는 무한도전 준비물: 라스베이거스에서 뉴멕시코까지 모든 경로가 표시돼 있는 지도, 개인 비행기나 헬리콥터, 공돈이라면 부모와 인연도 끊고 형제도 기꺼이 내다팔 수 있는 헝그리 정신. 여행 테마: 라스베이거스스 카지노 재벌과 전세계 도박광들이 판돈으로 내놓은 200만달러를 숨겨놓은 뉴멕시코 시골 간이역 보관함에 가장 먼저 도착해 여는 사람이 다 먹는 게임. 일행: 20년 만에 처음 만난 모녀, 부정판결로 쫓겨난 농구심판, ‘덤 앤 더머’ 형제, 젊은 변호사, 휴가차 라스베이거스에 온 4인 가족, 말하다가 갑자기 잠에 빠지는 체질의 이탈리아인 등 6개 경쟁팀 가운데 한팀을 자유 선택. 돈보다 모험을 원한다면 ‘덤 앤 더머’ 형제와 4인 가족 강추.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라스베이거스에서 뉴멕시코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함. 팀에 따라 헬기에서 승용차, 기차, 관광버스, 속도 실험용 로켓 등 다양한 이동수단 중 택일. 체험 하이라이트: 노점상에게 다람쥐를 안 샀다가 낭떠러지에 추락하기, 소와 함께 열기구에 매달려 하늘 날기, 바람난 애인 때문에 눈 뒤집힌 헬리 조종사 옆에서 목숨 건 비행묘기 즐기기, 피어싱한 혀가 곪은 사람의 언어 배우기(‘안녕하세요?’->‘아바바바’ ‘미인이시군요’->‘어버버버’), 바비인형 박물관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네오나치 소굴인 ‘바비 박물관’에서 나치들의 음침한 연설로 시간 지체하다 소장품인 히틀러의 차로 도망치기, 그 차로 2차대전 참전용사집회에 쳐들어가기 등등. 단 체험이 많아질수록 200만달러는 점점 멀어진다. 교훈: 남의 돈 날로 먹는 건 땅 파서 돈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너만 열심히 일하면(달리면) 성공할(돈 딸) 수 있다’는 신념은 부자들의 즐거움과 배를 채워주는 데 일조하는 환상일 뿐이라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냉혹한 진실. 후유증: 습관적으로 로또복권 가게 앞에서 줄을 선다. 밥 먹고 전화를 받는 따위의 사소한 일상적 행동들에 내기를 걸게 된다(출근한 뒤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화가 올까, 밥 빨리 먹기 시합 등등).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밴드와 함께 떠나는 아메리카 횡단 공연 투어 준비물: 앞으로 20cm 가량 수직 돌출시킨 헤어스타일, 여행하는 동안 그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한 헤어스프레이 100통, 헤어스타일과 유사하게 앞코가 뾰족한 검은 가죽구두, 약간의 악기 연주 실력. 여행 테마: 음악과 함께 떠나는 미국 횡단여행.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목표로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멕시코 시골 결혼식 피로연 연주로 마무리하는 끝은 미미한 투어공연. 일행: 9명의 핀란드 폴카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그 중 베이스 주자는 연습 도중 얼어 관에 실어 이동. 카우보이들의 악덕 매니저, 카우보이가 되기를 꿈꾸지만 머리카락이 없어 비루하게 쫓아다니는 얼뜨기.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과 양키 스타디움 공연 직전 취소, 멤피스, 뉴올리언스, 텍사스 등의 클럽을 거쳐 멕시코의 결혼식에서 투어 마지막 공연까지 약 한달. 천장에는 관을 매달고 트렁크에까지 좌석을 설치한 낡은 세단 이용. 체험 하이라이트: 핀란드와 미국 공연 프로모터한테 ‘완전 무시’당하기, 클럽 공연 중 관객한테 ‘완전 무시’당하기, 공연 뒤 클럽 문 닫게 하기, 혼자 맥주를 계속 마시는 매니저가 밴드 멤버들에게 밥 먹으라고 던져준 양파 자루에서 생양파 꺼내 씹어 먹기, 쭈그리고 앉아 걸으면서 난쟁이 흉내내며 구걸하기, 여행 기간 내내 일행끼리 거의 대화하지 않는 일종의 침묵 수련 여행, 중고차 판매상으로 출연하는 짐 자무시 감독 만나서 악수하고 사인받기, 폴카에서 컨트리, 하드록까지 멋지게 연주하는 카우보이들의 ‘판타스틱’한 음악세계 즐기기. 교훈: 꿈이 허황될수록 결과는 쓸쓸하다. 가수는 역시 매니저를 잘 만나야 성공한다. 폴카 스타일로 듣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도 듣고 보면 꽤나 그럴싸하다. 후유증: 조용필에서 동방신기까지 모든 노래가 폴카 리듬으로 리메이크돼서 들린다. 코미디언 김무스에게 존경심이 생긴다. 이 영화를 기준 삼아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영화를 찾아보다가 상처입는다(안 웃기거든). <트랜스아메리카> 아빠 찾아 삼만리, 찾고 보니 엄마인가 준비물: 트랜스젠더를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는 쿨한 태도, 마약 팔고 몸 파는 10대에게 설교를 늘어놓지 않을 수는 있는 관용의 자세, 가족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수 있는 무거운 입. 여행 테마: 가족을 버리고 떠나 트랜스젠더가 된 아버지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10대 아들이 떠나는 가족여행. 하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가 아버지인지 전혀 모른다는 거~. 일행: 여성이 되기 위한 수술을 일주일 앞둔 상태에서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을 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된 아버지, 근사한 아빠를 만나 부자 상봉을 꿈꾸는 10대 아들. 사기꾼 히피의 잠깐 합류.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뉴욕 구치소에서 출발, 아들의 새아빠가 사는 켄터키가 본래 목표지였으나 방향을 선회, 피닉스 등을 거쳐 LA 도착. 아들의 사기꾼 친구가 판 구닥다리 소형차와 도보, 택시 등 이용. 체험 하이라이트: ‘아메리칸 청춘’의 냄새(고랑내~)와 물이 내려가지 않는 공동화장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뉴욕 슬럼가의 하드코어 아파트 구경, 치마를 들추고 앉아서 ‘누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일어서서 ‘누는’ 일을 끝내는 아빠의 독특한 배변습관 훔쳐보기, 수시로 터지는 부자간의 말다툼 무시하기, 길에서 만난 히피와 물 맑은 호수에서 즐기는 물놀이, 물놀이 도중 차를 훔쳐 달아난 히피에게 가운뎃손가락 내밀기, 생전 처음 가본 부유한 할아버지 집에서 즐기는 달콤한 휴식과 어색한 가족의 대화에 동참하기, LA 미소년 포르노 촬영현장 탐방 등등. 교훈: 나를 낳아준 부모는 부자에다 멋진 사람들일 것이라는 어릴 적 환상에서 빨리 깰수록 좋다. 가슴 달린 아빠면 어떠랴, 가족은 좋은 것! 포르노 배우로 사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후유증: 진짜 부모는 별볼일없더라도 진짜 할아버지는 부자에 좋은 사람일 거라는 새로운 환상이 생긴다. 권위적인 우리 아빠도 성전환 수술을 받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이지 라이더> 60년대 아메리카의 문화와 젊음을 오토바이로 달린다 준비물: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아니면 스쿠터라도, 70년대 미국 남부 사회의 편견과 증오심을 버텨낼 수 있는 강심장,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기는 유서, 출발 전 재산 정리. 여행 테마: 시대의 주류적 공기에서 일탈한 히피 스타일 젊은이들이 찾아 떠나는 ‘궁극의’ 자유. 또는 자유를 가둬놓는 새장 흔들기. 일행: 마약 판매로 여행 경비를 준비한 두 남자. 금발의 섬세한 꽃미남형인 캡틴 아메리카와 껄떡남에 호색한이며 무모한 성격의 빌리. 답답한 현실에 염증을 느끼는 알코올중독자 변호사가 잠시 합류.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서부에서 출발, 히피 공동체 마을 거쳐 뉴올리언스 경유, 궁극의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카니발이 펼쳐진다는 이상향인 마디그라까지 대략 한달. 폼나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로 완주. 체험 하이라이트: 불량한 행색으로 모텔에서 거부당한 뒤 매일밤 숲속 야영. 히피 마을에서 히피들의 공연 보기, 막간 휴식 즐기고 모래밭에 씨 뿌리고 풍년 기원 기도. 뉴올리언스의 마을 축제 퍼레이드에 자발적 참가와 이로 말미암은 구치소 구금, 남부 토착민들의 악의 어린 저주와 농담 세례와 살의 넘치는 매타작, 마디그라에 도착한 뒤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경험하는 무아지경. 마리화나 흡입(옵션이 아니라 기본 프로그램임). 남부 사람들의 거칠 것 없는 총격. 알코올중독 변호사로 분한 젊은 잭 니콜슨과 함께 술 마시기. 교훈: 히피건 마디그라건 꿈속의 이상향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만이 인간의 선악을 판단한다’(마디그라 아가씨 집에 붙어 있는 문구). 불량한 행색으로 60년대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는 건 분쟁지역 한복판을 산책하는 것보다 안전하지 않다. 후유증: 미국여행이 문득 두려워진다. 미국여행을 할 때면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조차 두려워진다. 삶이 문득 허무해진다. 이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삶을 마감한다. <천국보다 낯선>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길게, 초저가 패키지 준비물: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사 먹고 사 입을 수 있도록 꾹꾹 눌러싼 여행가방. 심심할 때 읽을 잡지와 책들, 동거인한테 구박받지 않을 만큼 구사할 수 있는 영어 실력. 특히 속어에 강하면 편함. 여행 테마: 이름도 정체성도 미국인으로 바꿔서 미국인 친구마저 속일 수 있는 정도의 미국화 교육.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는 도박 실력의 신장. 일행: 친지들이 헝가리어로 말하면 짜증을 낼 만큼 미국식 삶에 철두철미한 헝가리인 벨로(미안~ 윌리), 윌리와 함께 빈둥거리는 미국인 친구 에디, 갓 미국에 도착한 윌리의 사촌 에바. 주요 일정과 이동수단: 뉴욕 도착, 빈민가에 위치한 윌리의 손바닥만한 방에서 약 1년간 체류한 뒤 윌리, 에디와 클리블랜드 고모집에 얹혀사는 에바 방문, 함께 플로리다를 여행한 뒤 뿔뿔이 흩어짐. 체험 하이라이트: 윌리의 방에서 TV 보기, 낮잠 자기, 텔레비전 보기, 냉동식품 먹기, TV 보기. 가끔씩 윌리의 허락없이 집 주변 게토지역을 목숨걸고 산책하기, 윌리와 에디의 아슬아슬 사기도박 관람, 윌리한테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 위한 미국 속어 강의 듣기. 그러나 진짜 미국인에게 먹힐지는 미지수. 클리블랜드 도착 뒤 상당기간 고모와 함께 TV 시청. 에바와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호숫가 놀러가기, 플로리다에 도착해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 산책. 함께 있으면서 저마다 따로 놀기. 교훈: 어딜 가도 다 똑같다(에디의 명언). 아름다운 클리블랜드 호숫가도 꿈속의 마이애미 해변도 천국보다 낯설기는 매한가지. 길 엇갈린 사람을 만나려면 괜히 싸돌아다니지 말고 처음 있던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는 게 상책. 후유증: 만사 귀찮아진다. ‘인생 뭐 있어’라는 인생관이 점점 더 확고해진다. 짐 싸기 귀찮아서 몇년동안 계획했던 여행마저 포기하기에 이른다.

김기덕 감독의 신작 <숨> 촬영현장 및 기자간담회

김기덕 감독에게서 날아온 반가운 현장 초대다. 1월17일 서대문형무소 건물 안. 영화의 세 주인공 하정우, 장첸, 박지아가 함께 나오는, 어쩌면 <숨>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지아가 감방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장첸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둘은 끌어안는다. 미니 크레인에 달려 천천히 후진하며 떠오르는 카메라. 하정우가 프레임으로 들어와 박지아의 손을 잡아 반대방향으로 끌고 가면, 박지아는 자꾸만 장첸쪽을 뒤돌아보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과 반대쪽으로 조용히 프레임 아웃하는 장첸. 서대문형무소 좁은 복도에서 피어나는 상상적이면서도 애틋한 이 장면. 과연 <숨>은 어떤 이야기인가? 연(박지아)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장첸)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본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이 사형수가 있는 형무소를 찾아가 면회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에게 1년간의 시간을 선사한다는 마음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맞춰 한번씩 그를 방문하여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편으론 계절에 맞는 노래를 불러주고, 또 계절에 맞게 면회실을 꾸며준다.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형수는 언제나 그녀의 방문을 기꺼이 받는다. 한편, 외도에 빠져 연을 외롭게 만들었던 남편 정(하정우)은 아내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채고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숨>은 연과 사형수와의 클라이맥스를 향해가고, 이 영화의 제목 <숨>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다. 김기덕 감독의 열네 번째 영화 <숨>에서는 순환의 시간에 놓인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기이한 공존과 구원의 이야기가 그려질 듯하다. 올 여름 국내 개봉예정이다. “내겐 3만의 관객이 중요하다” (현장 공개가 끝난 직후에는 서대문형무소 야외 풀밭에서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이하 김기덕 감독 문답) -이번 영화에 대해 소개한다면. =우선 이렇게 추운 날 찾아와주어 고맙다. 지난번 <시간>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시간>은 국내 판매 형식으로 8개관에서 개봉한 뒤 3만명 정도 관객이 들었다. 애초 내가 말한 20만명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다시 영화사 스폰지에 이번 작품을 수출하여 국내 개봉하기로 했다. 또, <시간> 때의 발언 이후 몇몇 매체에서 내 생각을 지지해주었고, 그 지지자들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될 듯싶었다. 나에게는 997만명의 관객보다 3만명의 관객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영화를 위해 발품을 팔고 봐준 관객에게 이번 영화도 보여드리고 싶다. 그게 내가 했던 말을 책임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라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숨>의 시나리오는 <빈 집>과 <나쁜 남자> 때 감옥장면을 찍으면서 떠올렸다. 서대문형무소를 배경으로 찍어보고 싶었다. <숨>은 80%가 교도소 장면이다. 제목이 <숨>인데, 숨을 내쉬는 것과 들이쉬는 것이 음양의 이치와 같아 보였고, 그 숨쉬기가 인생의 어떤 한 모습이지 않은가 싶었다. 여주인공 연이에게 남편인 정이 해주지 못하는 걸 사형수가 대신하는 것이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이미지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 -지금까지 촬영한 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나. =이번에는 외국에서 투자를 받지 않았다. 최소로 봤을 때 2억5천만원으로 제작하는 영화다. 그동안의 해외수익금을 모아 제작하는 작품이고, 그걸 스폰지에 수출한 것이다. 촬영횟수가 10회차밖에 안 되고, 그걸로 90분 러닝타임을 맞춰야 하니 전쟁처럼 찍은 영화다. 마음에 드는지는 편집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국내 개봉인데 왜 수출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나. =내 영화는 만들면 적어도 20개국 이상 판매되고 있다. 내 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만 따지면 2만∼3만명이지만, 전세계 가까이 따지면 1천만명 정도가 된다. 그중 한국은 2∼3% 되기 때문에 넓게 봐서 수출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내 배급을 맡은 스폰지 조성규 대표) 부가설명을 하자면, <시간>도 그렇지만 이번 영화 <숨> 역시 외국영화를 수입할 때와 동일한 조건과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김기덕 감독의) 수출이라는 말은 그런 뜻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저예산영화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내가 제일 중요하게 문제 삼는 건 제작비 상승이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용이 55억원이라는 게 문제다. 25억원 미만, 더 나아가서는 10억원 미만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 다음은 국가 지원책에 관한 거다. 나는 꾸준히 10억원 이하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국가지원책이 있어서 가능했다. 만약 그런 맥이 끊겼다면 못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극장 네트워크가 구성되는 것에도 국가 지원책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국가가 어느 정도 지원을 하는 것이 거대 영화들과의 밸런스를 맞추는 길이라고 본다. 그리고 영화를 하는 후배들에게 바란다면, 자기가 가진 아이디어와 능력을 오락영화에 함몰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변덕을 자주 부린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 고민 많이 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3만명의 애정을 중요하게 생각한 거다. 약속을 어긴 거라고 보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이랬다 저랬다 한 것도 여러 번이 아니라 이번 한번 아닌가. (좌중 웃음) 그건 인간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농담으로 말하자면) 앞으로 한 세번 정도 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웃음)

<그놈 목소리>와 감독 박진표 Part 1

‘현상 수배극’이라는 슬로건을 건 박진표 감독의 신작 <그놈 목소리>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16년 전 있었던 실화 이형호 유괴살해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이며,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박진표 감독은 세편 모두 실화 소재의 영화를 만들었다. 소재가 된 사건의 전모, 급박했던 제작 상황, 영화 속 실제와 허구의 묘한 동거, 박진표 영화의 특징 등에 초점을 맞춰 <그놈 목소리>를 살펴본다. 그리고 현상 수배극이라는 영화를 만든 이 감독, 박진표는 누구인지를 덧붙인다. <그놈 목소리>를 통해 보는 ‘영화와 사람’, 박진표와 <그놈 목소리>에 관한 1인2색. 영화사에 기록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76년 미국 댈러스에서 로버트 우드라는 경찰관이 총에 맞아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고, 랜덜 데일 애덤스라는 청년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훗날 80년대에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다른 작품을 준비하다가 수감 중인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다른 모든 죄수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정황을 들은 감독은 정말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겼고, 랜달 데일 애덤스가 아니라 사건 당시 또 한명의 용의자였던 데이비드 해리스가 진범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흥미로운 건, 데이비드 해리스와 랜덜 데일 애덤스를 포함하여 관련 인물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재연이라는 방식으로 다분히 저널리즘적 형식을 동원하여 조합된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한때 비판을 받기도 했던 그 형식에 관해 거론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누가 진짜 범인인지는 적어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범죄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결국 사형당한 데이비드 해리스는 죽기 전에 로버트 우드 살인사건의 진범이 자신임을 자백했고, 랜덜 데일 애덤스는 이 영화의 증언에 힘입어 세간의 관심을 얻어 십여년이 넘는 옥살이를 마감하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감독 에롤 모리스가 1988년에 만든 <가늘고 푸른 선>의 일화이며, 이 영화는 무고하게 감옥살이를 했던 한 인간의 삶을 구해내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소재로 삼은 사건의 양상도 다르지만, 결국 <그놈 목소리>가 갖고 싶어하는 어떤 후일담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결말일 것이다. 존재 목적을 가진 상업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강두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스크린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시선은 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잡히지 않은 네가 지금 거기 앉아 있겠구나, 그리고 이걸 보겠구나,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라고. 지금도 대한민국 어느 곳에 살고 있을 그놈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그놈 목소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다소 과장되어 들리기는 하지만 “현상 수배극”이라는 용어로 영화를 설명하고 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실제 범인의 전화 협박 목소리를 들려주고 몽타주를 보여준다. “1991년 이형호 유괴살해사건, 현재까지 15년간 경찰병력 3만명 투입, 420명 용의자 검거 및 수사, 87건의 음성 및 필적 감정, 2006년 1월 공소시효 만료” 등을 자막으로 요약한다. “그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찍은 거고, 그 장면이 이 영화의 존재 가치다. 끝까지 간 거고, 끝까지 가자는 말을 스스로 내게 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고 감독은 말한다. 상업영화가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형호는 1991년 1월에 실종되었다가 44일 만에 한강 둔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언론은 이를 두고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이라고 불렀다. 범인은 총 87차례의 협박전화를 했고, 부모는 44일간 피를 말리다가 결국 죽어도 못 잊을 슬픔을 맞았다. 1992년 당시 SBS의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조연출이었던 박진표는 형호가 죽은 지 1년 뒤 첫 회를 만들 때 그 부모의 증언과 울음을 곁에서 생생하게 듣는 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에 범인이 워낙 소름끼치고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문에 찧어 손이 시커멓게 돼도 아프지 않다는, 정말 많이 울던 그 부모”를 보며 “내가 나중에 영화를 하게 되면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5년간 매일 그 생각만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15년간 마음속에 담아왔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는 <너는 내 운명>이 끝나고 나서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던 이 프로젝트에 대한 시나리오를 썼다. 실화와 극화 사이, 전달과 주장 사이 강남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상우는 조금 통통하긴 해도 귀여움이 넘치는 소년이다. 그 소년의 아버지(설경구)는 유명한 9시 뉴스 앵커이고, 아들의 비만을 걱정하여 다정하게 운동을 독려할 줄 아는 어머니(김남주)는 현명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없어졌고, 협박전화가 걸려온다. 부모는 번갈아가며 꼼짝없이 범인이 시키는 대로 돈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온갖 서울 시내를 뛰어다니지만, 범인은 아들의 음성조차 쉽게 들려주지 않는다. 상우 엄마의 신고로 경찰이 비공개 수사를 펼치지만 번번이 범인을 잡는 데 실패한다. 전담 잠복을 맡은 김 형사(김영철)는 심지어 눈앞에서 범인을 놓칠 뿐만 아니라 농락당하는 꼴이 되고 만다. 범인은 지독하고 경찰은 무능하고 부모는 애간장이 탄다. 44일이 지나 아들은 죽어서 시체로 발견되고 아버지는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감독은 무엇보다 이 실화를 틀림없이 그 실제 장소에 가서 촬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꼭 그래야 하는 장소가 있다고 여겼다. “처음부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장소에 갔을 때 체감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촬영하기에 용이한 곳 보다 어려운 곳이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실제 형호네 가족이 살던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형호가 실종되었던 그 아파트 내의 놀이터에서 촬영을 허가받는 건 거의 사투였다. 감독은 머리끝까지 예민해졌고, 제작자부터 프로듀서, 제작부원들까지 모두가 발벗고 나서서 아파트 주민들에게 설득하고 빌었고, 천운처럼 그 실제의 계단과 아파트 외관과 놀이터 등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배우나 스탭이나 연출자인 나까지 더 절박한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감독의 생각이다. 대부분 실제의 장소에서 찍었지만, 때때로 대한극장이나 갤러리아백화점처럼 당시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한 곳은 다른 극화된 장소를 마련했다. 대한극장은 극동극장 골목으로, 갤러리아백화점은 남산 케이블카를 타는 곳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허구로 추가된 장소 중 중요한 곳은 롯데월드일 것인데, 의미상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족 단위로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놀러오는 그곳에서 돌려받기로 한 아이를 결국 찾지 못하고 돈만 빼앗기는 아버지의 모습은 다른 가족들의 축제 분위기에 둘러싸여 허망하기만 하다. 영화 속 상우의 부모가 실제와 허구의 장소를 따라 허겁지겁 끌려다니는 동안 그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데 그 이야기 역시 실제의 이야기와 허구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진행된다. “나도 이제 잘 모르겠다. 뭘 바꾸고 안 바꾼 건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여겨지는, 가령 쓰레기통 속의 쪽지를 따라 범인의 지시를 이행하는 장면 등은 실제로도 같았다. 범인이 몰고 가는 차 트렁크에 숨어 있다가 범인을 잡기는커녕 벌거벗겨진 채로 어딘가 교외에 덜렁 버려진 경찰의 행색은 사실 그대로가 아닐지라도 그걸 상상하게 할 만한 일들은 있었다. 혹은 지친 아버지가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있을 때 범인이 찾아와 “생각보다 긍정적이시네요. 침도 흘리시고”라는 문구를 써놓고 가는 장면은 그 문구가 실제가 아닐 것임에도 그 범인이 했던 행동 그대로다. 감독으로서는 “실화와 극화의 경계를 지켜나가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실화를 영화로 만들 때 조심하고 스스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게 바로 그런 범위를 조율하는 일인 것 같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그놈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건 감독도 잘 안다. “공소시효 지난 15년 뒤의 피폐해진 부모를 주인공으로 지난 일을 회상하는 방법도 있고, 그 사건이 있은 지 1년이나 2년 뒤 그들의 모습 또는 공소시효 직전에 일어나는 이야기 등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44일간의 그들의 피말리는 흔적을 그리기 위해 나름대로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걸 버렸던 건 나름 자랑이라면 자랑”이라는 것이다. 이건 “부모의 절박한 심정을 위배하고 배신해서는 안 되고 부모가 주체가 되는 영화”다. “경찰이나 범인의 영화로 만들면 자칫 게임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의 큰 원칙이 범인을 잡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려면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스타 강동원이 범인인 그놈 목소리를 연기한 것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는 아니었다. 여기에 영화적인 장치들이 뒷받침되고 있는데,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사용되고 있고, 그걸 2.35:1의 화면비로 담았고, 카메라의 사용에 있어서는 두대의 카메라로 다른 느낌을 담으려고 했다. “한대는 들고 가되 범인이 협박하는 느낌으로 또 하나는 고정으로 가되 범인에 의해 협박받는 부모의 느낌으로였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형호의 그림자도 조심스럽게 넣었다. “첫 장면에 아이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때 자세히 보면 형호의 사진이 끼워진 액자가 화면 왼쪽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꽃길을 따라 형호의 영정이 나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내내 형호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혹은 상우의 사체가 발견되고 난 뒤 부모가 우리 다시 애를 낳자며 가슴 아파하는 장면까지는 <내 주를 가까이>라는 찬송가를 기타 연주로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자는 기독교인 박진표의 기도다. 무엇보다, 박진표는 전작 <너는 내 운명>에서 대단히 힘있는 클라이맥스를 선보였는데, 이번에도 그 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건 상우 아버지의 직업이 뉴스 앵커(그것도 9시 뉴스)라는 설정과 연관되는 것인데, 범인은 “대한민국에서 한경배 앵커 얼굴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변호사도, 검사도, 의사도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오지만 쇼 프로의 사회자도, 노래하는 가수도 아니다. 박진표는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일인칭 화법’으로 클라이맥스의 정점을 친다. “상업적인가 아닌가의 논란, 얼마든지. 작위적인가 아닌가, 얼마든지. 연출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것도 얼마든지. 그렇지만 가족들 몇명, 형사들 몇명이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로 바꾸고 싶었다는 우리의 의도를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얼마든지가 아니다. 이 영화는 나의 실험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실험이기도 하다.” 그게 박진표가 <그놈 목소리>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진의다. 당신이 그 만분의 일의 불운을 안게 된다면 박진표의 영화는 요즘 보기 드물게 어떤 ‘주장과 주의(ism)’를 갖춘 영화적 퍼스낼리티를 표방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회파인 것 같은데 들여다보면 순정주의다. 박진표의 영화에 관해 말할 때, 그 어떤 순정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화 속 인간의 순애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순정’을 믿는 긍정성 자체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 사회의 순정에 대한 믿음은 일반의 젊은 남녀가 아니라 노인들의 드문 육체적 열망까지, 에이즈 환자와 농촌 총각의 드문 사랑까지 아름답고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또는 슬픔에 대해 말할 때는 우리가 직접 겪은 바가 없더라도, 아이를 유괴당하고 울부짖는 이 부모의 찢어진 마음을 느끼고 같이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박진표는 호소하되 순정을 통해 호소한다. 사회의 문제를 다루더라도 투명하고 본래적인 순정에 대한 공유를 항상 염두에 둔다. 그것이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남다른 무의식이거나 소신이다. 이를테면, 사회의 순정을 말하기 위해 박진표는 ‘만분의 일에 관한 영화’를 선택한다. 노쇠한 노인들이 서로의 육체를 그렇게나 아름답게 사랑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혹은 그걸 당당하게 드러낼 만한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에이즈 환자와 그를 죽도록 사랑하는 순박한 남자가 끝까지 맺어질 그 관계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 아이가 유괴되어 세상을 잃어버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너는 내 운명>이 희귀하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결말이라면, <그놈 목소리>는 그 확률의 수치에 거꾸로 내가 당첨되었을 때 떠안을 수 있는 안존의 섬멸을 섬뜩하게 떠올리게 한다. 내가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을 유도할 때 힘을 발휘하게 된다. 영화는 완성된 영화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므로 <그놈 목소리>에 대한 평가는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데 빚지지 않은 채로도 꾸준히 말해져야 할 것이다. 우선은 의도에 비해 형식의 밀도는 낮은 편으로 보이지만, 영화가 믿는 사회적 순정, 그 순정을 통한 교감의 시도 혹은 직설적인 언급은 미덕이 될 만하다. 거기에 덧붙여져 영화 바깥의 기적까지 일어나면 더 좋을 일이다.

닥터 몽고메리, 이번엔 당신이 주인공이야

디즈니 소유의 미국 방송사 의 인기 TV시리즈 <그레이 아나토미>가 변화를 꾀한다. 닥터 애디슨 몽고메리(몽고메리-셰퍼드 였으나 이혼하면서 몽고메리로 성을 수정했다)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드라마를 준비한다는 것. 확정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레이 아나토미>의 외전격인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뉴스를 <로이터> 등의 외신은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보도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사화했다. 케이트 월시가 연기하는 닥터 애디슨 몽고메리는 닥터 데릭 셰퍼드(패트릭 뎀시)의 전부인으로 1시즌 마지막 회에 등장해 메레디스 그레이와 삼각관계를 이뤘으나, 극이 진행됨에 따라 안정적인 고정 출연자로 자리 잡았다. 현재 미국에서 방송중인 3시즌에서 몽고메리는 차기 외과 과장 자리를 염두해 두는 한편, 인턴 중 한사람과 애정라인을 보여주는 등 안정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그레이 아나토미>의 각본가 숀다 라임스는 5월 중 방송되는 에피소드 중 2시간 분량을 애디슨 몽고메리의 이야기로 구성할 계획이며 이는 스핀오프를 뒷받침하는 파일럿 구실을 하게된다. 사실 이 스핀오프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확정된 바가 없다. 텔레비젼 스튜디오의 대변인은 케이트 월시와의 계약이 확실해졌다고 한 반면, 각본가의 라임즈와의 계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타이틀도 미정이며 이야기의 배경이 시애틀이 될지, 뉴욕이 될지 조차 정해지지 않았다고. TV 시리즈 역사에서 스핀오프 프로그램이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특히 최근들어 이전 프로그램에서 존재하는 캐릭터를 추출해 새로운 시리즈를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 급변하는 TV 비지니스 업계에서는 꺼리는 편인데, 시트콤 <프렌즈>의 인기 캐릭터 조이를 주인공으로 한 새 시리즈 <조이>의 실패가 그 예이다. 성공한 스핀오프로 대표되는 역시 전혀 새로운 캐릭터와 세팅으로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TV 프로그램 시청률 경쟁에서 바닥을 기던 가 비행기 조난 스릴러 <로스트>를 시작으로 시청률 1위 채널로 뛰어 오른지 불과 2년이 지났기 때문에 방송사 입장에서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3시즌을 시작하며 <로스트>의 주요 연령대(18세~49세) 시청률이 지난 시즌에 비해 23% 하락하는 실정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쉽게 시청률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에 스핀오프는 매력적이다. 현재 <그레이 아나토미>는 TV 드라마 시리즈 중에서는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그레이 아나토미>보다 주요 연령대 시청률이 우수한 프로그램은 <아메리칸 아이돌> 뿐이다. 현재 각본가 숀다 라임스는 여성 저널리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파일럿을 준비중이므로 <그레이 아나토미>의 스핀오프가 탄생할 가능성은 5월 이후로 점쳐봐야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