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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씨, 부산영화제에서 현실과 환상을 헛갈려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화’라 부른다 김영하/ 소설가 만화가 이 모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전화의 용건은 간단했다. 그와 내가 부산영화제에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편집장이 어수룩한, 그리고 그와 내가 한때 원고료를 벌었던 모 영화잡지에 말을 잘 하면 ID 패스인가 하는 것을 받을 수 있으며 말을 조금만 더 잘하면 잠자리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숙소의 질은 기대할 수 없지만 비와 눈은 확실히 피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침낭을 가져가야하는 건 아닐까?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자세한 건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평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영화도 실컷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개막일인 14일에 우리는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다는 부산의 숙소 앞에서 만났다. 생각보단 괜찮은 곳이었다. 서로 다른 교통기관을 타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부산역에서 걸어왔다고 한다. 역시 이상한 자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대망의 PIFF광장으로 향했다. 아, 드디어 영화의 바다에 발을 들여놓는구나. 역시나 개막일의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십니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가 오자마자 스타가 뜨는구나. 개막작의 주인공, 장동건이로구나. 우리는 까치발을 하고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자, 거의 다 오셨습니다! 우리는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 봉고차 한 대가 도착했다. 자, 오셨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정몽준! 정몽준! 정몽준! 연호가 터졌다. 내린 사람은 장동건이 아니라 정몽준이었다. 쩝. 남자의 미모를 따지는 우리는 곧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드레스코드인가 뭔가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턱없이 미달한 우리는 범일동 시민회관은 포기하고 남포동을 누볐다. 내일부터는 멋진 날들이 펼쳐질 거야. 한껏 기대에 부푼 우리는 광복동 일대의 술집에 들어갔다. 바텐더들이 이상하게 많았는데 표정이 모두 심상치 않았다. 뭔가를 은밀하게 준비하던 그들은 갑자기 손님을 향해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비유도 판타지도 아니었다. 알콜을 가득 머금은 그들의 입에선 쉴새없이 불길이 뿜어져나왔다. 서너 명의 바텐더가 돌아가며 병을 던지고 받고 마술을 부리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열 번 던지면 두 번은 땅에 떨어졌다. 공포의 쇼였다. 쇼가 끝난 후, 바텐더는 우리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물었다. 서울 바텐더들은 병 안 떨어뜨린다면서요? 나는, 서울에선 이런 쇼를 본 적이 없다고. 아마 내가 가보지 않은 어느 바에선가 하고 있겠지만 거기서도 분명히 병을 심심찮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안 떨어뜨린다던데..... 다음 날, 어수룩한 잡지사의 담당기자를 만났다. 그는 피닉스 호텔 예매소에 일착으로 줄을 섰으나 시스템 문제로 표를 끊지 못했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데리고 서라벌 호텔로 갔다. 그에게서 받은 ID 카드로 표를 예매했다. 나는, 자기 아내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을 훔치는 바람에 인생이 꼬인 스리랑카 소매치기 이야기로 영화제의 스타트를 끊었고 만화가 이 모군은 LSD 어쩌구 하는, 러닝타임 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갔다. 두번째 영화는 두 사람 모두 츠카모토 신야의 . 어느 범생이 여성이 이상한 남자로부터 이상한 사진을 받더니 점점 더 이상해지더라는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누가 함부로 자위를 하는가!) 이어지는 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안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이었다. 안개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는 기체로 가득한 영화였다. 잦은 플래쉬백이 신선한 기법인 때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모군은 <안개>가 보다 더 끈적끈적 뇌리에 들러붙는다며 괴이해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번만”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무책임 선언’도 마음에 들어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을 보았다. 질투하는 인간이 나오겠지. 질투 때문에 열 받다가, 진짜루 열 받다가 이윽고 질투의 화신이 되어 질투를 불러일으킨 자들을 죽여버리겠지? 그리고 외치겠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갔다. 질투는 일종의 맥거핀이었다. 영화는 오히려 전혀 딴 얘기, 남자가 어떻게 남자,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종족이 되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감독과 배우들에 대한 사랑이 솟구쳤다. 마구 외치고 싶었다. 아, 기형도가 좋아, 박찬옥이 좋아, 박해일이 좋아, 배종옥이 좋아. 밤새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우리는 이미 네 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다. 피곤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술은 마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부산의 처가에 다니러 와 있던 아내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올해 여든넷인 그녀의 할머니는 마치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가 오자마자 눈을 감으셨다. 한 편만 더 보고 갈게. 나는 총을 잃어버려 정신없이 총 찾다가 결국 자기 총에 맞아죽는 중국 공안 얘기를 보고 나서 서면의 롯데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개막식의 드레스코드를 비웃은 죄였다. 그때 정장을 준비해왔더라면 이런 불상사가 없었을 것이다. 빨간 바지를 입고서는 도저히 장례식장에 갈 수 없었다. 주말 백화점은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그 난리통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새 정장을 구해입은 나는 바지춤을 움켜쥐고 영안실로 달려갔다(미처 벨트를 사지 못하여 하체가 불안하였다). 호상이어서 그런지 영안실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단지, 망자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기독교에 귀의하시는 바람에 유족들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목사와 신도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황당한 상황을 맞았다. 절은 헌화로, 곡은 찬송으로 대체되었다. 망자의 개종을 사전에 알지 못한 자식들은 땡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목사는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천국에 가면 다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인에 대한 마지막 효도는 바로 개종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육개장 냄새 풍기는 영안실에서도 부산영화제가 화제였다. 서울에서 내려와야할 유족들이 부산영화제 때문에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른다는 이야기였다. 살아생전 한 번도 찾아뵌 적 없는 나는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신속하게 상가를 찾아온 훌륭한 손녀 사위로 유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민망했다. 다음날, 나는 다시 남포동으로 돌아왔다. 하필 그날 봐야할 두 편의 영화는 <죽어도 좋아>와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두 편이었다. 영안실에서 돌아와 보기에 적당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끊어놓은 표가 아까워 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래서였는지 스크린 속 할아버지의 절륜한 정력과 할머니의 때늦은 애교가 부담스러웠다. 화면을 가득 메운 두 노인의 슬픈 맨살! 용서하시라. 나는 영안실에서 축제로 직행한 자가 아닌가. 니들이 노인의 섹스를 알아? 나는 그 직접적인 담화 방식에 주눅 들었다. 산 넘어 산, 다음 영화는 전국의 무당과 영매들이 총 출동하는 버라이어티 다큐멘터리,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였다. 거인이 한 손으로 내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 탈탈탈 털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그냥, 캑, 하고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죽은 자와는 말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과는 대화가 필요하다. 굿은 우리를 그 죽음과 대면시킨다. 우리는 놀라고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그것은 좋은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과 같다. 다음날 새벽, 나는 발인에서 하관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관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과 함께 차가운 11월의 땅속으로 내려갔다. 씻김도, 상여 소리도 없는, 그야말로 쿨한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나는 내내 남포동의 영화관들을 그리워했다. 어쩌면 현실의 굿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영화가 우리의 굿이며 우리 모두 제 스스로 영매이며 무당인지 모른다. 우리는 꿈을 통해 꿈꾸고 말을 빌려 말하며 환상으로 환상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화라 부른다. 이번 부산행에서도 무수한 영화들을 만났다. 유독 이번 영화제에서 나는 현실과 환상, 스크린과 거리, 축제와 일상을 분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이 귓가에 쟁쟁하고 입에서 불을 뿜어대던 광복동의 바텐더가 어른거린다. 내 눈 앞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골목으로 사라져가던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모습과 배종옥의 술주정 중에서 어떤 것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밤만 되면 모호해진다. 모호했든 몽롱했든 축제는 끝나가고 있다. 예기치 못한 수확도 있었다. 어수룩한 잡지사가 결코 어수룩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다음 주에 나올 주간 <씨네21>을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시게 되리라. 이모 군아 힘내자).

SBS <대망>과 MBC <삼총사>를 보는 엉뚱한 시각

SBS 드라마 <대망>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 박휘찬(박상원)은 한 가지 꾀로 세 가지 잇속을 차리는 신묘한 재주를 부린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벼슬아치 일가를 몰살하고, 다른 벼슬아치와 결탁해 쌀 무역 독점권을 틀어쥐며, 이 과정에서 아들 박재영(장혁)의 저잣거리 친구들을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써 아들에게 냉혹한 세상 이치를 깨우치려 한다. 아버지가 말한다. “그들을 버려라. 그래야 강해진다. 강해지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아들이 대답한다. “아버지…, 그래야 강해지는 거라면, 저는 안 할래요.” 힘이 있으면 원치 않아도 주위에 사람이 모이고, 사돈의 팔촌의 옆집 친구까지 너나없이 친분을 과시하려 든다. 아버지는 부나방처럼 모여들던 사람들이 언제든 나약해진 자신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생은 투쟁이며, 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 게임인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꿈을 꾼다. 돈도 안 되고 변하기도 쉬운 의리나 인정 따위에 망설임 없이 목숨을 건다. 우정이나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고, 생에서 중요한 것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라 믿는다. 결국 철부지 아들은 자신과 세계관이 다른 아비의 품을 떠나 고된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의 농간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던 날, 이렇게 중얼거린다. “참견하지 말자, 참견하지 말자, 참견하지 말자…. 아, 그런데 왜 자꾸 참견하고 싶어지냐!”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반면, 아들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에 자꾸만 ‘참견하고 싶어서’ 돈 벌 궁리를 한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와 아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남보다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으로 살겠지만, 그 방법과 목적이 사뭇 다를 것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탓인지, 날마다 보는 드라마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정치권력을 이미 가졌거나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체로 이들과 뜨거운 연대감을 보이는 자본가들에 대해, 드라마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새삼 눈여겨보게 된다. MBC에서 얼마 전 선보인 <삼총사>를 보면서도 그랬다. 정치인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재벌 회장이 “세계의 뒷골목을 떠돌다” 귀국하는 첫 장면. 양심선언을 하려는 재벌 회장의 귀국을 수많은 정치인들이 극구 반대하는 가운데 의문의 암살사건이 벌어진다. 비명횡사한 재벌 회장에게는 벤처사업가인 아들 박준기(류진)가 있고, 아들의 절친한 친구는 시민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장범수(손지창)다. 이들은 과거에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대립했고 사회적인 신분차로 인해 갈등도 겪었지만, 암살의 배후를 밝히고 정경유착의 실체를 파헤치는 일에 의기투합할 예정이다. 그들의 뿌리깊은 애증의 시원이 어디인지, 차근차근 되짚어본 뒤에 시작될 일이긴 하지만. 공천이니 정경유착이니 하는 ‘정치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삼총사>는 그렇다치더라도, 시공이 분명하지 않은 무협드라마 <대망>을 보면서도 오는 12월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떠올리는 건 못 말릴 오지랖일 것이다. 그래도 드라마를 보면서 끊임없이 ‘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기껏 뽑아줬더니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방정맞게 날아다니는 철새 정치인 대신, <삼총사>의 장범수처럼 돈없고 배경도 없지만 할말은 하는 국회의원은 어디 없을까? 선거철만 되면 ‘차기 유망주’에게 무조건 몇십억씩 갖다 바치는 기업가들의 관행은 언제쯤 끝이 나려나 돈 안 드는 선거 하겠다던 이들이 선거법 개정에는 신경도 안쓰는 현실을 단숨에 뒤엎을 묘안은 없을까? 물론 이들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이러한 ‘딴 생각’ 내심 고대하며, ‘대선 바람’에 조금쯤 편승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제작진의 의도는 적중한 셈인데, 그래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딴 생각은 계속된다. <대망>의 박재영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진지하게 참견하고 싶어하는 대통령, 어디 없을까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

수녀님들의 경제학

수녀님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게 됐다. 친한 후배교수의 부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옛날 나와 잠깐 사귀었던, 내 아내의 친구가 훗날 수녀가 됐다는 사실도 하겠노라는 약속을 덥석 하게 된 데 얼마간은 작용했을지 모른다(실제로 지금은 머나먼 차드에 가 있는 그 수녀님의 주소를 손에 넣었다). 양성자라고 해서, 초보 수녀님들을 가르치는 수녀님들이 내 학생이다. 그러니까 나이도 지긋한 수녀님들인데 내 선입견 때문인지 눈동자가 하나같이 해맑다. 갑자기 멍해지면서 후회가 밀려온다. 물적욕구는 물론 성적욕구까지 철두철미 제어하고 있을 이들에게 경제학 강의라니, 이게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당장 호모 에코노미쿠스부터 문제다. 인간은 오로지 물질적 욕구를 추구하며 아주 조그마한 차이도 순식간에 계산할 수 있는 존재라며 슬쩍 넘겨다보니 무심한 눈길뿐이다. 다음은 더 큰 문제다. 이렇게 자기 이익만 추구할 때 사회 전체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얘기는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건 혁명이다. 중세시대에 가톨릭이 독점하고 있던 진리, 내 말을 따라야 당신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 오만을 뒤엎은 혁명이라고 내지르고 또다시 눈치. 한 노수녀님은 애쓰는 내가 안쓰러운지 빙긋 웃는다. 수요공급곡선을 설명할 때는 버릇대로 포도주 시장의 예를 들다가, 아차 싶어 “아 술시장은 수녀님들과 안 어울리나요” “괜찮아요. 우리도 술 마실 수 있어요.” 영 봐주는 분위기다. “왜 부식을 담당한 수녀님은 가장 값싸고 좋은 걸 사야 되잖아요 안 그러면 무서운 원장수녀님한테 혼나지 않나요” “까르르.”(불경스럽게도 나한텐 이렇게 들렸다) 수녀들도 이 풍진 세상과 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약점(?)이 공략포인트였다. 한번 요령을 깨달으니 턱없는 주식시장도 설명할 수 있다. 바티칸뿐 아니라 우리나라 주교쯤만 돼도 돈을 관리해야 하니까 틀림없이 주식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그분은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도 마찬가지다. “왜 같이 일하는데 뺀질거리는 수녀님 있죠” 또 한번 까르르, “맞아요!” 힘찬 동의도 나온다. 이리저리 난관을 건너서 이제는 시장의 한계를 설명할 때가 됐다. 공공재가 어쩌고 외부성이 어쩌고 독점이 어쩌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돈없는 필요(need)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demand)가 아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배고픔은 수요곡선에서 제외되고 시장의 원리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대목. 수녀님들의 세계와 경제학의 세계가 접점을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 일격. “피의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이기적 행위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걸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나쁜 균형’에서 ‘좋은 균형’으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며 그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이든 사회주의 경제학이든 이 땅 위의 유토피아를 설파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유토피아일 뿐이며 우리는 지상의 고통을 줄이는 여러 제도를 끝없이 실험할 수 있을 뿐이다. “세 시간 가까이 ‘예수님과 데이트’를 즐긴 두세명의 수녀님들이야말로 경제학을 실천한 것이다. 최대의 만족을 얻는 방법을 찾았으니까”로 첫 시간을 맺는다(그런데 다음주 거시경제학은 또 어쩔 것인가). 정태인/ 경제평론가

옛 추억은 슬픈 누아르처럼, <천장지구>

1980년대 후반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홍콩누아르영화들이 한국의 젊은 관객에게 크게 어필하면서, 홍콩영화는 한국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한창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때가 그 시기다. 사실 처음 홍콩영화 바람을 일으킨 <영웅본색>은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다. 검은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의 윤발이 형님(?)이 쏘아대던 무한한 쌍권총의 총알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홍콩영화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었다. <영웅본색>이 한참 한국을 강타하고 지나갈 때쯤 재개봉관에서 홍콩영화 한편을 봤다. 한국 에로물 한편과 함께 튼 그 영화가 <천장지구>였다. 당시 이 영화는 유덕화의 찢어진 청바지와 오토바이로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했고 유덕화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 친구가 있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조금은 험상궂어 별명이 마이크 타이슨이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전혀 딴판이다. 여자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수줍어하며 마음은 또 얼마나 착한지…. 이 친구의 버릇이 있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항상 자기가 마치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이 담배를 피운다든가 뭐 그런…. 친구의 우격다짐으로 보게 된 이 영화는 예상 외로 나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 친구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흥분하고 유덕화와 오천련과의 안타까운 사랑에 마음아파하는 것 같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여전히 영화 속 장면처럼 담배 한 개비를 길게 빨아들인 뒤 허공을 향해 연기를 뿜어내며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화 내용이랑 내 처지가 너무 비슷한 거 같다.” 얼마 전부터 학원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됐는데 대단한 집 여자인 것 같다고 했다. 학원에서 몇번 마주쳤고 “하도 예뻐” 진짜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더니 예상 외로 친절하고 상냥해서 그날 이후로 조금 친해졌다는 거다. 다행인지 그 여자에게도 특별히 같이 다니는 친구가 없었지만 여자애가 집에 갈 때나 학원에 도착할 때면 여지없이 검정색 승용차가 3대 정도 따라다닌다고 했다. 마치 영화 속 보스의 딸처럼…. 그리고 항상 차를 타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 친구가 영화를 많이 보더니 상상 속의 인물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보자며 친구가 다니는 학원으로 갔다 . 그러나 며칠 동안이나 그녀를 보지 못했다. 사실 이 친구는 그녀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바보같이 그냥 만나서 잠깐씩 얘기한 게 다였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날 아침 그녀가 이 친구에게 준 노래 테이프에 <천장지구>의 주제곡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 난 왜 이 친구가 이 영화를 그렇게 보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는 그녀의 전화번호, 주소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겨우 7일 정도였다고 했다. 그뒤로도 생각보다 심각하게 그녀를 찾아다닌 것 같았지만 찾지 못했다. 아직도 그 친구는 가끔 그 여자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자기도 한번 시나리오를 써보겠다고 했다. 나보고 영화로 만들어줄 것을 약속해 달라며…. 친구가 하도 심각해서 내가 만약 상업영화를 하게 되면 언젠가 꼭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천장지구>가 작품성이 뛰어나거나 영화적으로 충격을 줄 만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젊은 세대들과 연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역시 신분을 초월한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해피엔딩보다는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울수록 사람들에게 더 가슴아프게 남는 것 같다. 내게도 이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친구의 사랑 이야기와 영화 속 장면들이 교차되면서, 마치 친구의 이야기처럼 상상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찍었던 단편영화들 대부분이 <천장지구>에 나오는 그런 사랑 이야기였던 것도 그때 이 영화를 본 기억 때문인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기억에서 잠자고 있는 슬픈 누아르 한편을 찍고 싶다.

바람이 우리를../도니다코/광복절특사/스틸/고스트쉽/제이슨X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이란의 외딴 마을에 자동차를 몰고 온 일군의 촬영팀이 도착한다. 베흐자드가 이끄는 이 촬영팀의 목적은 곧 임종을 앞두고 있는 한 고령 할머니의 장례식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 가는 것이다. 베흐자드는 자신이 마을을 방문한 목적을 감추고 할머니의 임종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회사에서는 독촉이 잦아진다. 그러나 할머니는 회복세를 보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베흐자드 도우라니, 파흐자드 소흐라비 출연, (주)영화사 백두대간 수입·배급, 상영시간 118분 박평식 바람부는 세상을 이겨낼 지혜와 경륜의 말씀 ★★★★심영섭 죽음의 벼랑에서 피워올린 삶의 송가 ★★★☆ ■ 도니 다코 정신분열과 몽유병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도니 다코는 어느 날 꿈에서 토끼 가면을 쓴 친구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프랭크는 28일 6시간42분12초 뒤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아침이 되자 도니 다코는 골프장에서 깨어난다. 팔뚝에 ‘28064212’라는 숫자가 쓰여진 채. 집으로 가니 도니의 방에는 거대한 비행기 엔진이 떨어져 있다. 그냥 방에서 자고 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뒤 도니 다코의 주변에는 하나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리처드 켈리 감독, 제이크 길렌할, 드루 배리모어 출연, 미디어필름인터내셔널 수입·배급 상영시간 112분 김봉석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영화 ★★★★박평식 사이비 교주들도 주눅들 만큼 기괴한 이야기 ★★★ ■ 광복절특사 배고픔을 못 이겨 빵을 훔쳐먹었을 뿐인데 신원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들어온 무석은 너무나 억울해 탈옥을 준비한다. 사기범 재필은 면회 온 애인 경순으로부터 며칠 뒤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통보를 듣고 격분해 무석의 탈출에 동행한다. 탈옥한 그들은 조간 신문을 보고 자신들이 ‘광복절특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떳떳한 출감을 위해 이제 그들은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김상진 감독, 설경구, 차승원, 송윤아 출연, 감독의 집 제작, 상영시간 120분 박평식 허둥대는 각본과 과장된 연기, 맴도는 연출 ★★☆심영섭 김상진표 아나키스트 코미디, 이번엔 감방 습격 ★★☆ ■ 스틸 4인조가 은행을 습격한다. 이들은 거액의 돈을 챙긴 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경찰의 추적을 유유히 피해간다. 스포츠에 능해 범죄를 저지른 뒤 스포츠 실력을 발휘해 현장에서 탈출하는 슬림 일행을 잡고자 한다. 경찰은 특별수사반을 설치해 대책마련에 부심한다. 제라드 피레 감독, 스티븐 도프, 나타샤 헨스트리지 출연, (주)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 수입, CJ엔터테인먼트 배급, 상영시간 83분 박평식 페레 감독, 속도만 내지 말고 마음 좀 훔쳐봐 ★★ ■ 고스트 쉽 숀 머피 선장과 모린 엡스가 이끄는 예인선 ‘북극의 전사들’호의 대원들은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 최고의 스페셜리스트다. 고된 임무를 마치고 술집에서 피로를 풀던 북극의 전사들에게 페리맨이란 남자가 다가온다. 베링해 근방 알래스카 해안에서 배 하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공해상이기 때문에 난파선은 발견한 자의 소유가 된다. 북극의 전사들은 페리맨과 함께 난파선을 찾아 나선다. 발견한 배는 40년 전 홀연히 사라진 이탈리아 국적의 안토니아 그라자호다. 그러나 배에선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스티브 벡 감독, 줄리아나 마골리스, 가브리엘 번 출연,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수입·배급, 상영시간 91분 김봉석 낭만적으로 그려낸 유령선 이야기 ★★★ ■ 제이슨X 불사신 같은 살인마 제이슨의 무한한 생명력을 훔쳐내려던 계획은 제이슨이 난동을 부리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제이슨은 겨우 냉동상태가 된다. 시간이 흘러 25세기, 실습나온 학생들의 우주선이 크리스털 호수 주변에 착륙하여 제이슨을 발견한다. 해동된 제이슨은 여전히 위력적인 살인마. 겨우 제이슨을 죽이지만, 이번엔 첨단 나노머신을 이용한 재생기술이 제이슨을 되살려낸다. 제임스 아이작 감독, 케인 호더, 렉사 두이그 출연, 태원엔터테인먼트 수입, 시네마서비스 배급, 상영시간 93분 김봉석 볼 건 사이버펑크 제이슨뿐 별 ★★☆

고유성 <로보트 킹> 복간

<로보트 킹>의 복간본을 받아보았다. 검은색 하드보드 표지로 튼튼하게 묶여 나온 이 만화는 원고 한장없이 낡고 조악한 옛 만화책을 다시 찍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복간되었다. 이 놀라운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시작한 곳은 코스닥에 상장했다는 출판사도, 종합미디어회사를 꿈꾸는 출판사도, 여러 개의 잡지와 커다란 매장까지 갖고 있는 출판사도 아닌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몇명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는 작은 신생 출판사 ‘길찾기’다. 조금은 촌스러운 출판사명임에도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의 울림이 큰 것은 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만화를 찍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처럼 장정된 <로보트 킹>을 받아보고 먼저 이 작업을 성공리에 마친 도서출판 길찾기 여러분들에게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70년대 3대 로봇들의 부활 <로보트 킹>의 복간으로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거대 로봇 3기가 2001년에서 2002년, 기간으로는 약 1년에 걸쳐 모두 부활했다. <철인 캉타우>(1976)에서 <로보트 태권V>(1976), <로보트 킹>(1977)까지 차례대로 순서를 지켜가며 복원되었다. 태권 V가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제작된 출판만화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캉타우와 킹은 열악한 한국 SF만화의 토양이 피워낸 소중한 꽃이다. 거대한 로봇의 기원은 일본만화에서 시작된다. 일본만화에서 거대한 로봇은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철인 28호>에서 구일본군의 병기였던 로봇은 <마징가 Z>로 와서는 “악마도 신도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로봇은 더욱 거대해졌고, 육중해지며 신의 권위를 얻었다. 인류의 문명을 모두 파괴해버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들처럼 일본의 로봇은 종말에 대한 일본인들의 상처와 공포에 중공업에 대한 기대감,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는 일본 특유의 종교관이 뒤섞인 것이었다. 반면, 고유성의 <로보트 킹>은 거대한 신, 공포의 괴수로 존재하는 로봇의 아우라가 미약하다. 부릅뜬 눈에 반달형 머리장식(이 머리장식이 ‘자이언트로보 2호’의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치명적인 실수였지만, 이 때문에 작품 전체의 오리지널리티를 무시하면 안 된다)을 지닌 근육질 로봇은 이야기 속에서 웃기도 한다. 일본의 거대 로봇에서 볼 수 없었던 웃음의 여유, 장르간의 크로스오버가 등장한 것이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코코스 일당이 모든 로봇을 한국으로 보내 로보트 킹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 킹이 코코스의 로봇을 누르자 다른 로봇이 카운트를 세고, “킹 폴승!”이라며 손을 든다. 그 순간 킹은 웃는다. 웃는 모습의 킹을 만나는 순간, 킹의 얼굴 표정이 근엄한 ‘신’의 것이 아닌 눈꺼풀이 처진 친근한 ‘친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다. 가장 냉혹하고 잔인하게 등장해야 하는(그래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악당들도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이다. 지구를 정복하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별들을 한 군데에 모아 새로운 성운을 만들어 그것의 지배자가 되려는 원대한 ‘대혹성 집합계획’의 입안자인 소모사도, 지구의 과학자들에게 배신당해 지구를 정복하려는 꿈을 키우는 코코스도 곧잘 경박스러운 캐릭터로 변신한다. “악당도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고유성의 전략은 적중했다. 반중력장치, 파멸기계와 같은 SF설정과 우주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악당에 마신 크라누스에 의해 지구가 파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SF만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웃음을 담아낸다는 사실이 놀랍다. 첫 걸음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이번 3권은 첫 번째 에피소드인 탄생편이다. 11부 13권이나 되는 장편으로 구성된 <로보트 킹> 전체의 짜임새나 완성도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다. <로보트 킹>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 앞에 놓여진 3권의 만화책은 자칫 낡고 지루한 만화일 수 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로보트 킹>의 그래픽은 권수를 더할수록 더욱 정교해지고, 이야기는 풍부해지며, 개그 센스도 내공을 더한다.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25년 만에 천재적인 ‘고박사’와 멋진 주인공의 표상 ‘유탄군’과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멋진 활약을 보이는 사이보그 ‘호연양’이 우리 앞에 시공간을 넘어 도달했다. 무엇보다 소년에게 멋진 로망이었고 동시에 웃음의 향연이었던 ‘로보트 킹’이 돌아왔다.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근대만화가 시작된 기점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대한민보> 창간호인 1909년으로 잡으면 7년 뒤 이 땅에 근대만화가 시작된 지 100년이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만화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본 만화를 우리 아이가 보고, 다시 그 아이의 아이가 보는, 만화를 통한 문화적 공감대의 형성은 한 나라의 문화지수를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보트 킹>도 소중한 한 걸음을 내디뎠으니 이제 복원이라는 말이 필요없게 쇄를 거듭하고, 판을 거듭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 힘든 첫 걸음에 함께 동참한 800여명의 선주문자들에게도 박수를. 그리고 다시 한번 길찾기에도 분발의 박수를.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물의 여인> 감독 스기모리 히데노리(E)

“하나의 영화에, 하나의 우주를” - <물의 여인> 감독 스기모리 히데노리 그가 부산에 늦게 도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전 폐막한 그리스 테살로니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바로 부산으로 날아온 참이었다. <그레이> 등의 단편작업을 거쳐 NHK에서 “생계를 위해” 7년간 일했지만 영화에 대한 애정을 누를수 없어 “빈곤, 매우 빈곤”한 영화감독의 길로 뛰어들었다는 이 붉은 옷의 감독은 언제라도 타오를 준비가 된 ‘불의 남자’ , 그대로 였다. 기본적으로 러브스토리지만 그 속에는 상당히 신화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보다는 사람과 자연 또는 우주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우주는 물, 불, 공기, 대지, 이렇게 4가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4명의 원소를 4명의 인물들에게 맞추어 보려 한 것이다. UA가 연기한 마찰없이 흐르는 여인은 물을, 아사노 타다노부는 파격적이고 열정적인 불을, 모터사이클을 타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다니는 여자는 공기를,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홈리스 여인은 대지의 역할이다. 하나의 영화에 하나의 우주를 담고 싶었달까? 아까 신화적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현대의 신화, 도시의 신화를 그리고 싶었다. 어떻게 ‘물의 여인’이란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나. = 일본에는 원래 비의 여인, 비의 남자라는 말을 많이 쓰는 편이다. 친구나 동료중에도 늘 그런 사람이 있다. 언젠가 자신을 “물의 여인”라고 칭하는 UA의 인터뷰를 보면서 비의 여인과 딱 맞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사랑에는 늘 정보가 우선이다. 나이, 혈액형, 직업, 연봉 등 정보와 정보가 연애를 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인력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순도 높은 신화적 사랑속으로 그들을 끌어냈다. 두 사람이 이름이나 과거를 묻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목욕탕을 사랑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설정한 점이 참 독특했다. =목욕탕이 일상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관점에서 그곳은 더 없이 로맨틱한 공간이었다. 욕탕의 물을 데우는 데는 불이 필요하고 불은 공기에 의해 생겨난다. 모든 것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은 채 융합하고 어우러지는 최고의 장소인 것이다. 물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두 사람의 정사씬은 오랜 잔영을 남긴다. =물 빠진 욕탕에 두마리의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듯한, 그 생동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아사노 타다노부가 자신을 태워버리는 결말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 같다. =서양인들이 보았을 땐 주인공이 죽었으니 비극이라고 하겠지만 불의 남자는 물의 여자를 만나 잠시나마 인생의 의미를 찾았고 짧지만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를 믿기 때문에 나 역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있나? =기본적으로는 불교지만 요즘엔 인도에 푹 빠져 힌두교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준비중인 작품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최근, 카프카의 <변신>을 뒤집어 어느날 까마귀가 여자가 된다는 단편을 완성했다. 두번째 장편은 펠리니가 로마에 대해, 우디알렌이 뉴욕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나 역시 동경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 예정이다. 글/백은하 사진/임종환 “One Universe in One Film” Interview with Sugimori Hidenori, Director of Sugimori Hidenori flew straight to Pusan after receiving Golden Alexander at International Thessaloniki Film Festival for his film . He's worked on several short films, including his 1981 short film . Then, to ‘make a living,’ he took the job as a director at NHK broadcasting center for 7 years. However, not being able to suppress his passion for filmmaking, he jumped into the ‘poor, very poor’ living of a filmmaker. - It's basically a love story but it contains a strong presence of mythological elements. = Instead of a story about humans, I wanted to make a film about a human and nature, or universe. I believe the universe is made up of 4 elements, water, fire, air and soil, and I tried to fit those elements into 4 different characters. I guess I wanted to put one universe into one film. Your comment about 'presence of mythological elements' is very accurate. I wanted to portray a modern mythology, an urban mythology. - How did you come up with the idea of ‘woman of water’? = In modern day ‘love’, such informations as a person's age, blood type, job and salary, seem to play the priority role in a relationship. It's like relationship is created within those informations. However, in my definition of ‘love’, it is the effect of mysterious power that draws two people closer to each other. That's why I've extracted them out into the extremely pure realm of mythological love. And that is also the reason why they don't ask each other for their name, nor their past. - Despite its ending of Asano Tadanobu killing himself by putting himself on fire, it seems to be a happy ending. = Westerners might say it's a tragic ending because the main character dies at the end. However, the 'man of fire' found the true meaning of his existence when he met the ‘woman of water’. And, even though, it was only for a short moment, his life was like a pure blaze. Plus, because I believe in his rebirth through the transmigration of his soul, I perceived the ending as a happy one. - What is your religion? = My fundamental religion is buddhism, but lately I've been studying Hinduism as well.

TTL설문 - 관객 200명에게 물었습니다

“올 부산영화제, 대체로 만족해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관객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5% 정도가 이번 영화제에 60∼80점 정도의 점수를 주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설문조사는 티티엘 기자단이 11월21일 오후 1시경, 대영시네마 1층 로비에서 관객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 이 설문 결과 응답자의 76%(152명)가 ‘1∼5편 정도의 영화를 봤다’고 대답했으며, 출품작에 대한 만족도는 45%(90명)의 관객이‘만족한다’고 밝혔다. 그 외 ‘보통이다’는 대답이 33%(66명)에 이르러 대체로 이번 영화제 출품작들에 만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행사를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57%(114명)가 ‘관객과의 대화’를 꼽았다. 그러나 7%(14명)에 이르는 응답자가 출품작에 대해 ‘불만족’이라는 평가를 내려 영화제의 출품작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54%(108명)에 이르는 응답자가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문제점을 ‘교통편, 안내 표지판의 미흡’으로 꼽아 해운대와 남포동 등지로 분산된 상영관이 불편을 초래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21%(42명)에 이르는 응답자가 이번 영화제의 문제점을 ‘관객들의 관람태도’라고 대답하여 관객들의 의식수준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세계적인 영화제로 끌어올리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번 설문조사에 참여한 관객들은 20대(50%, 100명)가 가장 많았으며, 그 외 10대(38%, 76명), 30대(6%, 12명)와 40대(6%, 12명)순으로 나타나 부산영화제가 젊은 영화제라는 것을 입증했다. ● 이번 영화제를 점수로 평가한다면? ▽1∼20점 5%(10명) ▽20∼40점 5%(10명) ▽40∼60점 33%(66명) ▽60∼80점 45%(90명) ▽80∼100점 12%(24명) ● 이번 영화제에서 몇 편의 영화를 보셨습니까? ∇1∼5편 76%(152명) ∇6∼10편 9%(18명) ∇11∼15편 7%(14명) ∇16편 이상 8%(16명) ● 이번 영화제의 출품작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만족 14%(28명) ∇만족 45%(90명) ∇보통 33%(66명) ∇불만족 7%(14명) ∇매우 불만족 1%(2명) ●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행사는? ▽전야제 28%(56명) ▽개막식 3%(6명) ▽관객과의 대화 57%(114명) ▽야외무대 12%(24명) ●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관객들의 관람태도 21%(42명) ▽교통편, 안내 표지판의 미흡 54%(108명) ▽극장 관람시설의 미흡 16%(32명) ▽20∼30대에 국한된 축제 분위기 9%(18명) 정리/ 티티엘 문현진, 유진아 설문판 제작/ 티티엘 홍세정·송주희·한현미·박민아·이승희·송시원·김아영 설문 바람잡이/ 티티엘 최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