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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에로틱한 자치 주권 운동?

자치 주권 확립을 위해서는 포르노 영화제작 지원이 제격이다? 스페인의 카탈로냐 지방 당국이 카탈로냐어를 장려한다는 이유로 한 포르노 영화제작자에게 공적 자금을 댄 것이 반발을 사고 있다고 영국의 <선데이 텔레그래프>가 전했다. 콘래드 손이라는 포르노 제작자에게 지원한 돈은 모두 1만파운드. 그 중 약 7천파운드의 돈은 새 포르노영화를 제작하는 데 쓰일 것이고, 3천파운드는 그가 기존에 만든 나머지 두편의 영화와 이번 작품을 카탈로냐 지방 수도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여성에로틱영화제에 선보이기 위한 경비로 지출된다. 스페인의 일부 언론들은 카탈로냐의 분리를 주장하는 강경 민족주의자들이 국가의 자금을 낭비하고 있는 일례라고 지적했다. 스페인 일간지 는 “다른 지방처럼 카탈로냐에도 끔찍한 생활 조건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있는 이때, 포르노영화에 공적 자금을 댄다는 건 국가 재원의 남용에 가까운 실수”라며 강도높게 비난했다. 반면 당사자인 제작자 콘래드 손은 <선데이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이 합법적일 뿐 아니라 자신의 다른 포르노영화처럼 플롯과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다고 항변했다. 카탈로냐어는 과거 프랑코 정권하에서 36년간 금지되었다가 지금은 스페인어와 함께 카탈로냐 지방의 공식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카탈로냐 지방 당국은 지난 20년간 자치 캠페인의 일환으로 강력하게 카탈로냐어를 장려해왔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약자의 테러, 강자의 전쟁

사랑이나 전쟁은 상대방의 존재가 자기 인식과 깊이 연결해 있어서 본래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모순된 행위다. 우리-속국-동맹-적은 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지 배타적 범주가 아니다. 나-연인-연적도 마찬가지다. 자타 경계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저런 인간에게 목을 맸단 말인가”라며 사랑이 끝난 뒤 자기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겨우 계집애랑 붙으란 말이냐”, “세계 최강을 상대로…” 식으로 모든 싸움에서 상대의 ‘체급’을 확인한다. 군수산업체나 안보 국가처럼 전쟁이 존재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정체(政體??)들은 언제나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파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모순어법이 등장한다. 대개 전쟁사는 “몹쓸 놈들(적)이 우리를 침략했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맞서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화’시에는 적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만, ‘전시’에는 전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일부 보수층이 북한에 대해 절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최소 3배 이상 전력의 우위가 있어야 하는데도) 남침 가능성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나,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으스대면서도 파괴할 건물조차 남아 있지 않은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전쟁은 히스테리일 수밖에 없다. 동양의 선현들은 ‘지혜’가 있었는지, 아예 처음부터 이러한 모순을 간파하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침략 행위에 등급을 매겼다. 수직적 불평등 문화인 유교권에서 전쟁은 정(征), 토(討), 취(取), 침(侵), 습(襲), 벌(伐), 전(戰) 등으로 나뉜다. ‘전’(戰),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집단간의 무력 충돌에만 사용하며, ‘찌질한 오랑캐들’에 대한 무력 행위는 나머지 용어로 지칭했다. 강자의 폭력은 침략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벌(罰)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남의 것을 훔치기 위해 폭력을 쓰면서, 약자를 치는 자기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다” 표현하지 않고 “너를 혼내고 취(取)했다”는 언설의 정치학은, 강자의 전쟁론에 저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가정폭력 가해 남편이 아내 구타 행위를 “때려서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모두, 강자가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사망한 고 윤장호 하사를 추모하는 거의 모든 언론 보도와 여론에서, 텔레반의 자살 폭탄 “테러”와 이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폭력 자체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미국 정부의 공격은 ‘정의의 전쟁’이고, 텔레반의 공격은 ‘악당들의 테러’란 말인가? 텔레반도 그들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 중이다. ‘테러’와 ‘전쟁’은 이미 위계적이다. 전쟁은 정당하고 떳떳하며 심지어 영웅적 혹은 자기희생적인 어감마저 풍기지만, 게릴라전이나 테러라는 표현은 뭔가 도발적이고 비겁하며 뒤통수친다는 느낌을 준다. 약자는 전면전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약자는 상대방을 히트 앤드 런(치고 ‘도망가는’)할 수밖에 없지만, 강자는 어디서나 치고 점령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도망갈 필요가 없다(미국은 현재 전세계 144국에 46만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강자의 폭력과 탐욕을 정상화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도 문제지만, 윤장호 하사를 추모한다는 일부 여론이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면서 미국의 시선에서 아프간 ‘테러 세력과의 전쟁’을 독려하는 것은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미국의 치어걸”, “부시의 애완견”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판에 국제사회에서 한·미 동맹을 평등한 ‘동맹’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게다가 군수자본이 주물럭거리는 현대전에서 동맹(同盟), ‘하나의 맹세’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난센스다. 연인 사이에서든 국제정치에서든 이해관계가 다른데, 어떻게 사랑의, 동맹의 맹세가 성립하겠는가. 한국이 스스로를 제국의 일부로 착각하는 이러한 부풀린 자아는, ‘국익’도 ‘평화수호’도 ‘안보’도 아닌 보기 민망한 식민성일 뿐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식민주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적으로 상상된 누군가를 살상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윤 하사는 이러한 우리를 대신한 희생자였다.

[핫이슈] 한국영상자료원 상암시대를 열어라

한국영상자료원이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다. 지난 2004년 공사를 시작한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DMC)로 향하는 영상자료원의 이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지난 1990년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 미술관 건물 내 지하 1층과 지상 2층에 둥지를 튼 지 17년 만의 일이다. 지상 2개층과 지상 4개층 2998평 규모의 영상자료원 신청사는 총 3개의 상영관과 영화박물관, 영상열람실, 그리고 총 463평에 달하는 복원 및 보관 공간을 갖추고 있다. 기존 자료원과 비교할 때 절대 면적의 증가보다 중요한 변화는 영화박물관이 신설된다는 점이다. 이로써 한국영상자료원은 수집한 자료를 복원하고 보관하는 아카이브, 소장 자료를 대중에 소개하는 박물관, 영상자료를 상영하는 시네마테크, 각종 비필름 자료를 정리하는 라이브러리라는 일반적인 영상자료원의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현재 상암 DMC의 영상자료원 신청사는 완공을 마치고 새 주인의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자료의 이전은 오는 4월25일부터 진행되고, 사무국은 5월11일 이사한다. 제일 먼저 새로운 모습을 이용객에게 선보이는 것은 영상열람실과 상영관으로, 6월1일에 개관할 예정이다. 그러나 현 자료원에 비해 질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선보이는 것은 좀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현재보다 두배가량 넓어진 공간에 자리하게 될 영상열람실은 올해 11월부터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고, 본격적인 시네마테크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상영관과 신설되는 영화박물관은 내년 봄에야 대대적인 개관행사를 가질 것이다. 이처럼 주요 서비스 시설의 본격 개관이 이전과 동시에 이뤄지지 못한 것은 이를 위한 예산이 포함된 영화발전기금이 예상보다 늦어진 올해 하반기에야 집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급 상영시스템 구축, 영화박물관 신설 아직 1년 정도 시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달라진 모습을 선보이기 위한 준비는 이미 활발히 진행 중이다. 연구교육팀 정혜연씨에 따르면 275평 규모의 영화박물관은 기본적으로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 그리고 체험교육시설로 나뉘게 된다. 상설전시관은 한국 영화사를 연대기별로 정리하는 가운데 특정 주제에 대한 전시가 이뤄질 것이며, 반년에 한번 정도의 주기로 전시를 바꿀 기획전시관에서는 임권택 감독 특별전 등을 개최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연구교육팀의 박물관 관계자들은 현재 여러 가지 전시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다. 박물관을 관람한 이용객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한국영화 포켓북 시리즈 중 첫 9권은 이미 기획이 끝난 상태다. 고전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인 자료원의 상영관 역시 설비나 규모 면에서 획기적으로 발전된다. 서초동 시절 35mm영화만 상영할 수 있는 110석 규모의 시사실 A와 16mm 및 디지털 상영이 가능한 70석 규모의 시사실 B는 상암동에서 각각 312석과 150석 규모의 대형관과 중형관, 그리고 다목적룸으로 거듭난다. 일반 멀티플렉스 상영관급의 시스템을 갖추게 됨에 따라 앞 좌석에 누군가가 앉기만 해도 정상적인 관람이 불가능했던 현재 상영관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전망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세개의 상영관이 모든 포맷의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점이다. 연구교육팀 김한상씨는 이에 대해 “2년 전 ‘욕망예찬’이라는 이름으로 김기영, 스즈키 세이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진행할 때, 16mm 일본영화는 모두 작은 규모의 시사실 B에서 상영해야 했다. 관객이 많이 들 만한 중요한 영화임에도 포맷 때문에 상영관을 변경하는 일이 이제는 사라질 것이다. 시네마테크로서 본격적인 프로그래밍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영상자료원의 새로운 상영관은 내년 봄부터 분기별로 하나씩 1년에 걸쳐 네 가지 정도의 개관행사를 준비 중이다. 1900년대 초 아시아에서 찍은 영화를 묶는 기획전을 비롯하여 내년에 사망 10주기를 맞이하는 고 김기영 감독 전작전, 해외 자료원과의 네트워크를 통한 해외초청전 등이 그것이다. 현재 클래식 한국영화 릴레이, 외국인과 함께 보는 고전영화, 해피 투게더 독립영화 등 요일별로 순환하는 상설프로그램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우선 신청사 상영관의 정식 개관까지 1년 정도는 한주 단위로 특정주제를 커버하는 프로그래밍으로 “그간 서초동에 형성된 고정관객층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현재의 고전영화관은 4월부터 두달간 모든 상영프로그램을 중단한 뒤, 자료원이 이전을 마치는 오는 6월 신청사 상영관과 함께 재개관해 당분간 기존 고전영화관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맞이할 예정이다. 전용수장고 등 최적의 자료보관 환경 갖춰 자료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추게 된 것 역시 중요한 변화다. 영상자원관리팀 장광헌 팀장은 “무엇보다도 전용수장고가 생긴다는 게 뿌듯하다. 서초동 수장고는 사무용 건물에 변칙으로 만든 곳이지만, 상암동은 설계부터 목적에 맞춰서 이뤄졌기 때문에 필름의 영구보존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라는 영상 5도를 구현할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해외 아카이브와 견줄 만한 자료보관 환경을 갖췄다”며 기뻐한다. 현재 영상자료원이 보유한 비필름 자료는 전량, 필름 자료는 32% 정도가 신청사로 이전해야 한다. 오는 4월25일부터 5월11일까지 “12t 트럭 80대 분량”의 자료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대이동이 이뤄질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1974년 한국필름보관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래 최대 규모의 이사인 셈이다. 장광헌 팀장에 따르면 1990년 서초동으로 옮겨올 때와 비교했을 때 2007년 현재 필름자료는 6500벌에서 1만7천벌로, 비필름은 5배 이상 증가했다. 모든 자료의 1차 분류를 마치고 이전하기 위해, 추가로 고용된 계약직 직원들이 자료분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이후 패킹과 라벨링, 꼼꼼한 확인작업을 거쳐 대장정에 오르게 될 텐데, 이를 위해 자원관리팀은 자료별 이전 시나리오를 매일같이 새로 쓰고 있다고 장광헌 팀장은 귀띔한다. 강점기 영화 등 자료원의 1급 희귀자료들이 특별관리 대상이며 운송보험은 필수다. 서초동에서 상암동까지 자동차로는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 그러나 그 이동은 가히 ‘미션 임파서블’급이라고나 할까. 상영관 대관, 비디오·DVD 대출 등 서비스 대혁신 오랜 더부살이를 끝내고 전용 건물 입주를 앞둔 자료원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는 이사 준비에도 불구하고 내심 들뜬 눈치다. 신청사로의 입성은 단지 공간의 이동 및 확장을 넘어 자료원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는 것과도 직결된 사건이다. 조선희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아카이브의 역할은 자료의 수집과 보존, 그리고 활용으로 나뉜다. 그간 자료원이 어쩔 수 없이 전자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면 앞으로는 보존과 활용의 균형을 맞춰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무리 귀중한 자료라도 대중이 이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일 뿐이건만, 그간 영상자료원은 인력과 시설 부족으로 본의 아니게 ‘폐쇄적’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상암동 시대를 앞둔 자료원은 지금 파격적인 문호개방을 준비 중이다. 우선 오는 6월부터 1년간 자료원은 각종 단체나 행사주체에 대해 상영관을 무료로 대관할 예정이다. 또한 연구 및 학술 목적의 시사는 80%까지 할인혜택이 주어져, 각 대학 영화과가 자료원 시설을 수업에 이용하기 한결 쉬워진다. 각종 영화와 영화 관련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자료실 역시 많은 변화를 앞두고 있다. 그간 500원씩 받았던 열람료가 사라지고, KOFA 변환자료 이용료 역시 5천원에서 2천원으로 인하된다. 그간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능했던 비디오, DVD 자료의 대출이 가능해지며, 인터넷으로 자료실 이용을 예약하는 서비스도 시작한다. 현재 규모보다 2배 가까이 규모가 커질 자료실 안에는 디지털미디어를 위한 섹션이 생기는데, 이곳에서는 자료실이 텔레시네본을 보유한 영상자료 1천편의 VOD 관람이 가능해진다. 2600편에 달하는 영화의 O.S.T를 무료로 청취할 수도 있다. 인터넷상의 VOD 서비스 역시 확대되는데, 현재 저작권이 완료된 것 중 일부를 볼 수 있었던 VOD 서비스가 자료원이 직접 저작권을 구입한 영화 200여편으로 확대되어 유료 서비스로 제공된다. 달라진 서비스를 맛보기 위해 오는 11월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서운할 뿐이다. 이사와 함께 자료원이 앞두고 있는 또 다른 큰 변화가 있다. 인화기와 스캐너를 구입함으로써 복제복원 시스템 구축이라는 숙원사업의 물꼬를 트게 된 것이다. 비로소 영상자료원이 이름에 어울리는 전문장비를 갖추게 된 셈인데, 조선희 원장은 이에 대해 영상아카이브의 “선진화가 아닌 정상화”라고 역설한다. 재단법인 한국필름보관소로 출범한 이래 30여년 만에 맞이한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러한 변화는 지난 10여년간 달라진 한국영화의 위상에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선진화든 정상화든, 한국영화의 팬, 그리고 현재의 문화를 즐기는 것 못지않게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모든 변화는 반가울 따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처럼 업그레이드된 각종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한국영화계와 그 관객의 몫이다. 조선희 한국영상자료원장 인터뷰 “올해는 독립영화의 아카이빙을 본격화한다” -오랜 전세살이를 마치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이제는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사업을 벌일 때가 된 것 같다. 여태까지는 의무납본 대상인 장편 극영화의 수집과 보존관리에만 주력했다면, “세상의 모든 영화가 자료원에 있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수집대상을 대폭 확대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인데, 올해는 독립영화의 아카이빙을 본격화한다. 2004년부터 한해 5천만, 6천만원 정도 예산 안에서 그해 독립영화제 수상작 20여편을 수집하고 있었지만, 그 이전의 독립영화는 거의 수집이 불가능했다. 2003년 이전의 독립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수집 대상이다. -올해는 이효인 전임 원장 때부터 논의되었던 디지털 아카이빙이 본격화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세 가지 정도의 사업이 진행 중이다. 디지털 파일로 생산되는 영화의 수집, 저작권을 구입한 고전영화의 인터넷 유료 VOD 서비스, 플래시 동영상이나 인터넷 영화 등 온라인 디지털 콘텐츠의 수집 등이다. 온라인 콘텐츠는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어서 일단은 분류와 선별, 이용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연구 단계다. -많은 변화를 구상 중인데, 전체적으로는 어떤 비전 아래 진행되는 것인가. =자료원이 보유한 콘텐츠의 활용도를 높이자는 것이다. 자료원 이전에 따른 가장 큰 변화가 상영관의 발전과 박물관 신설이라는 것이 영상자료원의 아카이빙 전략 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련한 인원 확충과 조직정비도 어느 정도 이뤄질 것이다. 박물관과 관련하여 내년쯤에는 영상자료원 산하의 한국영화연구소를 출범시키는 것도 생각 중이다. 그간 구술작업, 신문 자료 정리 등을 통해서 연구자를 위한 1차 자료를 제공하는 자료원 본연의 임무를 다해왔지만, 이를 더욱 확대하여 한국영화사연구 업적 자체를 대중화하는 것 역시 목표다.

경쾌하게 변주된 한 여인의 잔혹사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일시 3월27일 오후4시30분 장소 시네코아 이 영화 중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자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는 25년의 세월동안 왜, 어떻게 ‘혐오스럽다’는 수식어를 갖게됐을까. 마츠코의 죽음으로 이야기의 문을 여는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마츠코의 조카 쇼(에이타)가 고모의 유품을 챙기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한때는 밝고 명랑한 소녀였지만, 아픈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로 애정결핍에 시달렸던 마츠코. 그녀는 수학여행에서 벌어진 절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교사직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가출과 방황, 절도범 제자인 료(이세야 유스케)와의 재회와 동거. 마츠코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인생의 달고 쓴맛을 극단적으로 경험한다. 국내에선 <불량공주 모모코>로 알려진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2006년작. 굴곡을 요동치는 한 여자의 일생을 유머와 경쾌한 리듬으로 풀어내는 개성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에이타, 이세야 유스케는 물론 여주인공 나카타니 미키의 연기는 놓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100자평 MTV와 CF의 신세대가 일본 영화계에 본격적인 진입을 개시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닥 쓸만한 인재들은 없었다는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기리야 가즈아키(<캐산>)처럼 재능있는 친구들이 장난같은 만화경의 세계에 탐닉하느라 이야기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눈만 고달플 뿐이다. 나카시마 데쓰야는 다르다. 그는 만화경의 매력에 탐닉하면서도 다양한 관객과 소통가능한 이야기의 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인상적이었던 전작 <불량소녀 모모코>에 이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역시 마찬가지다. 이 괴이한 영화는 MTV적 감수성과 전통적인 ‘여인잔혹사’ 장르의 묘한 접붙이기라 할만한데, 반세기에 걸친 마츠코의 징그럽게 고난한 일생을 키취적인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경쾌하게 포장해놓은 덕에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지칠일이 없다. 게다가 지나치게 과시적인 연출이 살짝 헛점을 내보이는 순간, 귀신처럼 영특한 나카타니 미키가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화면을 장악한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논두렁 위의 로코코 양식, 추리닝과 드레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대상의 ‘갭(gap)’을 무기로 유쾌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던 <불량공주 모모코>의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감정의 갭을 이용한다. 웃음과 눈물, 고난과 행복은 서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빈번한 새옹지마를 증명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건을 품에 안은 마츠코의 일생은 인생의 가치를 고민한다. 젊은이들의 거리 시부야에서 출발해 헤세 원년의 풀밭을 오가는 카메라는 마츠코와 그녀의 조카 쇼의 관계를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거울로 사용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지는 역사적 사건과 이를 마츠코의 에피소드로 변주하는 감독의 재치도 흥미롭다. 한 여인의 잔혹사를 동화적 색채로 장식하며, 일본 젊은이들에 대한 반성을 놓치지 않는 감독의 ‘귀여운 교훈’. 마츠코의 때늦은 귀가는 시부야 거리를 향한 경쾌한 팬 레터다. 정재혁/ <씨네21> 기자

아름다운 영화 <숨> 첫 공개

일시 3월30일 2시 장소 씨네코아(스폰지하우스) 이 영화 여자(지아)에게는 바람피우는 남편(하정우)이 있다. 그녀는 괴롭다. 그러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사형집행일을 받아 놓고 자살을 시도하는 어떤 사형수 장진(장첸)에 관한 뉴스를 듣는다. 문득 여자는 그를 찾아가 면회를 신청한다. 원래는 안 될 일이었지만, 미지의 인물 보안과장(김기덕)이 선뜻 허락함으로써 여자는 사형수를 만나게 된다. 그 뒤로 몇 번에 걸쳐 그녀는 그를 찾아가 면회실을 계절별로 꾸미고 그에게 노래를 선사한다. 장진과 같은 감방에 있으며 그를 사랑하는 어린 죄수(강인형)는 여자와 장진의 관계를 질투 하지만, 이제 사형수는 여자의 면회만 기다린다. 그런데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여자의 뒤를 밟아 그 역시 교도소를 방문하게 된다. 말말말 내 영화는 항상 우발적으로 시작해서 우발적으로 끝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때도 스탭들과 투표를 했고 60퍼센트 지지를 얻어서 출연했습니다. 이번에도 몇몇 후보를 선정하긴 했는데, 스탭들이 다 나보고 하라고 해서 저도 한 마디 했죠. “그렇지? 그래야겠지?” (보안과장이라는 역할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누군가이니까 그 무대를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나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출연했습니다.(김기덕/왜 직접 출연했느냐는 질문에) 제가 노래를 참 못하는데 (영화에서처럼) 혼자 그러는 건 좋아해요. 그런데 중간에 감기에 걸려서 음이 안 올라갈때도 있었고.. 나중에 망쳤다고 생각해서 다시 하겠다고 조를 정도였어요. 혹시 불쾌하신 분 계셨으면 제가 앞으로 노래 더 잘 할 께요(지아) 그럼 제가 질문 할께요. 김기덕 영화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과 영화에 나온 뒤 자기 모습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듣고 싶습니다(김기덕/조연배우 강인형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없자 그럼 내가 질문하겠다며) 100자평 <숨>은, 아름다운 영화다. <빈집>이 여자의 '감옥'으로 찾아 온 낯선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숨>은 남자의 '감옥'으로 찾아 온 낯선 여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또는, 두 작품 모두 각자 자신의 감옥에 갇혀 있으되, 소통하기 위하여 감옥을 벗어나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시 한번 <숨>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야기는 좁은 감옥에서 펼쳐지지만, 그 밀실은 드넓은 풍광과 통한다. '연민'과 '동정'이 아니라, 선-인격적인 '숨' 또는 '감각'으로 소통하는 공간인 까닭이다. '숨'이 멎는 그 극한의 '임계 체험'의 경지를, 김기덕은 몇 번의 붓질로 형상화해낸다. 크로키로 포착해낸 '삶'과 '구도'와 '예술'의 어떤 경지... 변성찬/영화평론가 김기덕은 이렇게 썼다. “증오가 들이마시는 숨이라면...용서는 내쉬는 숨이다.” 들숨과 날숨이 함께 있을 때 “물과 기름도 하나가 될 것이다.” 김기덕은 들숨과 날숨, 삶과 죽음의 조화, 어떤 화해의 가능성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영화 속 인물들의 들숨은 들숨과 부딪히고 날숨은 날숨과 부딪힌다. 관계의 숨이 막힌다. 거기에 죽음이 있다. 그걸 조화와 소통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 그리고 우리의 환상이고 희망이다. 특이한 점은,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멸로 치닫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숨>은 <시간>처럼 끝까지 무시무시하게 밀고 나가기보다는 어떤 필연적인 순환 속에 있다. <숨>에서도 여전히 시간, 죽음, 반복은 주요한 모티프다. 시공간의 특이성이 지워진 감옥 안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총천연색 시간이 되고 남자는 여자에게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죽음이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형수가 아닌, 여자를 따라가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여자가 사형수를 통해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한 후, 다시 삶의 길로 돌아가는 과정에 맞추어 영화는 겨울에서 시작해서 겨울로 돌아온다. (현실 속에서는 같은 겨울이긴 하지만)두 번째 겨울은 처음보다 ‘덜 나쁜’ 겨울이다. 흰 눈이 상처를 덮고 여자는 노래로 ‘죽음’을 추억한다. <시간>의 여자가 새로운 시간을 꿈꾸며 반복할수록, 시간은 그녀의 의지를 벗어났다. 아무 것도 복원되지 못했고, 육체는 피를 흘렸다. 그러나 <숨>의 여자는 시간의 순환을 창조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시간>에서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무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싸움이 없다. 대신, 죽음 같지만 일시적인 일탈과 어떤 복귀의 움직임이 있다. 김기덕은 이제 치유를 말하고 있는가? 그는 더 나아갔는가? 그건 <시간>과 <숨>의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남다은/영화평론가 김기덕 감독은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일상을 사유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선(禪)적인 주제의식을 담지만, 성매매나 온갖 종류의 폭력등 매우 센세이널한 소재를 채택하는 바람에 엄청난 비난과 찬사의 세례를 동시에 받곤 했다. 그의 열네번째 영화 <숨>도 역시 죽음을 갈망하는 사형수와 정신적, 육체적 불륜에 빠진 가정주부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 안에서 인위적으로 그어진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한다. 단시간에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유명한 그는 이번 영화에서 10회차에 촬영을 마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사형수에게 남겨진 일주일 안에 일 년의 풍광을 담아낸 이 영화의 호흡은 그렇게 가쁘지 않게 느껴진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력과 가깝게 닿아있는 ‘숨’이라는 화두를 통해 인간의 모든 욕망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사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언어를 상실한 육체적 상태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장첸과 박지아를 비롯한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가 이 영화에 힘을 더해준다. 김지미/영화평론가

[히어로즈] 슈퍼히어로 장르의 최종 진화!

평범한 인간들의 슈퍼히어로가 당도했다. 전미 1400만명의 고정팬을 매주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당기며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가 지난 3월19일부터 케이블 채널 캐치온을 통해 방영을 개시했다(매주 월·화 오전 10시와 오후 10시 방영).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물의 차원을 전혀 다른 경지로 끌어올린 드라마 <히어로즈>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누구의 손에 의해 탄생했을까. 전세계를 들뜨게 만드는 브라운관 슈퍼히어로들의 면모. “최근 겉보기로는 관련이 없는 듯한 개개인들이 ‘비범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채 출현하고 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은 세계를 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의 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히어로즈>의 1화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자막은 <엑스맨>의 첫편에 그대로 따붙여도 이질감이 없을 듯하다. <히어로즈>가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물의 적자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슈퍼히어로가 되어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노라는 선언이다. 이건 한회당 30여억원의 제작비를 투여하는 값비싼 시리즈로서는 자살에 가까운 만용일 수도 있다. 미국 TV계의 오랜 속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특정한 장르에 기반한 시리즈의 인기는 특정한 장르의 팬들로만 한정된다. 하지만 <히어로즈>는 장르에 굶주린 팬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도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에서만 매회 1400만명의 고정 시청자를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캐치온을 통해 방영되기도 전에 이미 여러 경로로 소개된 <히어로즈>는 국내 미드팬들이 가장 열광하는 시리즈 중 하나였다. <히어로즈>는 가장 최근에 나타난 미드의 슈퍼히어로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구를 지켜라!"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숨겨진 능력을 깨닫기 시작한다. 뉴욕의 화가 아이작 멘데즈는 헤로인에 중독된 상태에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하고, 텍사스의 치어리더 클레어 베넷은 어떤 상처도 자생적으로 치유되며 심지어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LA 경찰 맷 파크먼의 귀에는 타인의 생각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하고, 피터 페트렐리는 자신과 형 네이선 페트렐리가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인터넷에 누드 동영상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니키 샌더스는 혹시 자신에게 또 다른 파괴적인 인격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도쿄의 회사원 히로 나카무라는 갑자기 발견한 재능으로 시공간을 넘어 뉴욕으로 텔레포트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발견한 채로 살해당한 인도인 유전학자의 아들 모힌더 세레쉬는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초능력자들을 찾아나선다. 문제는 새로운 능력을 깨달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비범한 능력을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정이 있고 친구가 있는 사회의 윤리적 일원들에게 슈퍼파워 따위야 거추장스러운 유전자적 영광일 뿐이다. 하지만 장르에 속한 캐릭터들은 어쨌거나 뭔가를 해야만 하며 <히어로즈>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화가 아이작은 거대한 폭발로 파괴되는 뉴욕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미래로 날아간 히로는 뉴욕에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지켜본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괴적인 미래를 막을 방도를 찾아나서고, 결국 각기 다른 슈퍼파워를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의 목표? 너무나 슈퍼히어로물다운, “지구를 지켜라!”다. 여기는 망토와 타이츠가 없는 슈퍼히어로의 세계. 미국 NBC가 제작한 <히어로즈>는 <스파이더 맨>과 <엑스맨>이 이룩한 ‘슈퍼히어로의 진화상’을 브라운관 속으로 진입시키려는 과감한 시도다. 장르의 문외한이 상상해낸 아이디어 <히어로즈>는 베테랑 프로듀서 팀 크링의 손에 의해 창조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남자가 여드름쟁이 시절에도 히어로 코믹스 한권 사본 적이 없는 장르의 문외한이라는 것이다. 별다른 히트작을 내본 경험이 없는 크링은 제대로 된 연재물을 만들어보겠다는 일념하에 머리를 열심히 굴렸는데, 딱 걸려든 이야기가 히어로물이었다. 미디어와 대중은 90년대 이후 진화를 거듭해온 슈퍼히어로영화들에 새로운 열광을 보내던 중이었다. 팀 크링은 텅 빈 노트에 삐뚤삐뚤 써내렸다. “만약, 대자연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종족을 진화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도 낡은 질문이다. 브라이언 싱어와 샘 레이미의 슈퍼히어로영화들을 모두 챙겨본 팬보이라면 결코 이처럼 고답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링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정말이지 잘 ‘팔릴 만한’ 이야기의 시작이라 확신했고, <로스트>의 창조자 중 한명인 데이먼 린덜로프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어보았다. 의외로 린덜로프는 머리가 다 아찔했노라 고백한다. “크링의 아이디어를 듣는 순간, 나는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썅. 내가 먼저 생각해냈더라면!” <서바이버>류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음모론적 판타지 세계로 도입한다는 꽤나 짬뽕스러운 아이디어로 <로스트>를 성공시킨 그에게 팀 크링의 아이디어는 대중적인 성공이 읽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거친 초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크링은 오랫동안 코믹스계에서 일해왔고 <스몰빌>과 <로스트>에 참여한 작가 제프 로엡을 찾아갔다. 로엡 역시 크링의 순진하고 대담한 발상에 깊이 매혹당했다. “팀은 내게 말했다. 좋아. 캐릭터 중 한명이 손짓만으로 자동차를 들어올려 길거리로 던지는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이것 봐 팀. 그건 이미 <엑스맨>의 마그네토가 했다고’.” 그러나 백짓장 같은 호기심이야말로 크링의 재능이었다. 그는 완벽한 외부인의 눈으로 코믹스 장르에 접근하는 덕에 할리우드의 익숙한 히어로물을 브라운관으로 끌어오겠다는 대범한 아이디어를 탄생시킬 수 있었고, 대중의 눈을 가졌기에 장르적 잔재미에 천착하지 않고 캐릭터 자체로 승부하는 이야기의 힘에 집중했다. 이것이 매주 1400만명의 거대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다. 역시 신드롬을 일으킨 <사이파이>의 SF시리즈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평균 200만에서 300만명 사이의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것과 비교한다면 <히어로즈>의 대중적인 소구성은 놀랄 정도다. 현실적 스토리, ’장르적’ 쇼가 되지 않도록 슈퍼히어로 장르의 투철한 팬들과 심심풀이로 채널을 돌리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히어로즈>의 가장 까다로운 서커스다. <히어로즈>는 결코 10대와 20대 남성으로 구성된 장르팬들의 환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크링은 밸런스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히어로즈>가 무너져버리고 말 거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스토리를 최대한 현실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지나치게 ‘장르적’인 쇼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제작진의 첫 번째 수칙이다. 이러니 전신 타이츠와 망토는 등장할 여지가 전혀 없다. 브라이언 싱어가 검은 가죽 커스튬을 엑스맨들에게 입히는 것으로 장르와의 원만한 합의에 도달했다면, <히어로즈>는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히로와 친구 안도의 대사 두줄로 모든 고민을 끝내버렸다. “내가 진짜 신분을 감추어야만 할까? 아마도 커스튬?” “니가 망토나 타이츠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다 그만둬버리겠어.” <히어로즈>의 커스튬은 작업복과 치어리더복과 경찰복과 평범한 슈트다. 그러므로 모든 캐릭터들이 주어진 능력 때문에 고통받는 ‘인간’으로 묘사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를테면, 불사신 소녀 클레어 베넷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감추고 싸우는 전형적인 십대 소녀다. 할리우드 고등학교 장르영화에서 십대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어리더 클레어는 자신의 능력이 남들과 다르기에 오해받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 괴물 아니면 기니피그로 취급받게 될 거야. 대부분의 경우 둘 다겠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스트리퍼 니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는 얼터에고 제시카 때문에 몸서리치는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의 얼터에고는 어떻게든 아이를 먹여살려야 하는 백인 하층계급 여인의 본심이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타인의 생각을 읽게 된 맷 파크만은 아내의 부정을 알고난 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소심한 남편이며, 아이작 멘데즈의 미래를 그리는 능력은 마치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마약쟁이 환쟁이의 환상처럼 보일 지경이다.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 맨>을 통해 묘사한 ‘슈퍼파워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과제를 <히어로즈>는 좀더 현실적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수많은 캐릭터들이 저마다 지닌 무게를 한올한올 섬세하게 풀어나간다. 로버트 알트먼이 슈퍼히어로물을 만들었더라면 <히어로즈>와 똑 닮은 시리즈가 탄생했을 것이다. “히어로 영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오락적” <히어로즈>는 한때 맹목적인 소수의 팬들만이 열광했던 코믹스(그리고 슈퍼히어로물) 문화가 마침내 주류의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다. 전신 타이츠도 없는 평범한 인간들의 영웅담은 브라이언 싱어와 샘 레이미가 거대 스튜디오와 싸워서 쟁취해낸 ‘새로운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한계마저 뛰어넘어 히어로 장르의 최종 진화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TV채널 의 대담한 장르적 실험과 대중적인 성공 앞에서 할리우드의 공룡 스튜디오들은 무엇을 더 내놓을 수 있을까. “수많은 팝콘 히어로 영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오락적”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탄성에 귀기울이라. “할리우드영화로부터 받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슈퍼히어로 스토리의 진정한 본성을 훨씬 제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조차도 따르지 못할 경지”라는 <버라이어티>의 호언장담은 괜한 농짓거리가 아니다. TV와 영화의 질적인 경계를 허물고 달려가는 미드의 진화 속도 앞에서 할리우드는 탄성 대신 탄식을 내놓을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고고하게 채널을 돌리지 마라. <히어로즈>는 어쩌면 올해 당신이 볼 수 있는 최상급의 할리우드‘영화’일지도 모른다. 아주아주 미약한 앞으로의 스포일러 무시무시한 악당과 새로운 히어로들을 만나게 될 것! 아직까지 국내 방영분에서는 <히어로즈>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채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스포일러를 완전히 까발리지 않는 수준에서 슬며시 앞으로의 전개를 들추어보자면, 주요 캐릭터들은 히로의 열정적인 행동에 힘입어 서로를 만나게 될 예정이며, 불사신 치어리더 클레어의 양아버지는 능력자들을 납치해서 실험하는 어느 단체의 비밀요원이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클레어의 양아버지가 선의를 알 수 없는 악당 노릇을 훌륭히 수행한다면, 전통적이고 무시무시한 악당은 사일러라 불리는 자다. 이 음험한 전직 시계수리공은 곳곳에 있는 능력자들을 찾아낸 다음 머리 두껑을 열고 뇌를 강탈해 능력을 흡수한다. 게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면 “앞으로 수많은 히어로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팀 크링의 호언장담처럼 <닥터 후>의 닥터 ‘리처드 에클레스턴’이 연기하는 투명인간 캐릭터 등 새로운 히어로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다음 시즌에 대한 수많은 억측들이 가지를 치고 또 치며 음모론을 양산하고 있다. 물론이다. 국내팬들의 표현대로 <히어로즈>는 ‘낚시드라마’가 맞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낚시’는 ‘클리프행어’(Cliff Hanger)라 불리는 미국 TV시리즈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능력과 과업을 짊어질 운명인지 약간의 증거만 흘리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히어로즈>의 낚시는 아주 부드럽고 우아하다.

[히어로즈] 주요 캐릭터 사전, 능력 혹은 집념의 영웅들과 악당들

히로 나카무라 만화광인 도쿄의 회사원. 시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텔레포트 능력을 이용해 가까운 미래에 뉴욕이 대폭발로 날아간다는 사실을 다른 능력자들에게 알리려 애쓴다. 심지어 시간을 멈추거나 느리게 만들 수도 있다. 미국의 팬사이트 설문조사에서는 57%의 시청자가 히로를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손꼽았다. 언제나 안도라는 직장 동료와 함께 행동하는데, 팬사이트들에서는 히로의 뒤를 봐주는 안도 역시 모종의 능력을 감추고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피터 페트렐리 다른 히어로들의 능력을 스펀지처럼 자기 것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전직 호스피스 간호사. 자신이 미래에 발생할 뉴욕 대폭발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병약한 틴에이저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스몰빌>의 클락을 연상하면 된다), 이야기를 둘러싼 모든 음모의 중심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크다. 네이선 페트렐리 하늘을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닐 수 있는 슈퍼맨. 하지만 엄청난 능력을 비밀리에 억누른 채 정치적 야망의 실현에만 몰두하는 능글맞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야망만큼 여색도 심한 관계로) 다른 캐릭터 한명과 숨겨진 핏줄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밝혀진다. 맷 파크먼 타인의 생각을 엿들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부부관계와 직장생활이 삐걱거리는 사람 좋은 경찰관. FBI와 잠시 일하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과 같은 히어로들을 납치해온 장본인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선다. 가장 고생이 심한 캐릭터 중 하나. 클레어 베넷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사신 치어리더’. 온몸이 찢기거나 불에 타도 재생이 가능하고 (아마도 몸이 산산조각나지 않는 한) 죽어도 되살아나는 귀신 같은 능력의 소유자. 양아버지 베넷이 능력자들을 납치하는 모종의 기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황한다. 현지 팬들 사이에서는 히로 나카무라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캐릭터. 다만 신체훼손 장면이 종종 등장해 심약한 팬들을 어지럽힌다. 아이작 멘데즈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화가. 시리즈의 진행을 모조리 예언한다. 처음에는 헤로인에 취해야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점점 자유자재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된다. 부잣집 딸인 시몬 드베로를 사이에 두고 피터 페트렐리와 삼각관계에 놓인다. 니키 샌더스 좀 골치아픈 능력을 소유한 전직 스트리퍼. 말하자면 여성판 헐크로, 평소에는 마음 여리고 눈물 많은 여인이지만 위기가 닥치는 순간 슈퍼파워를 소유한 살인녀 제시카로 완벽하게 돌변한다. 아들인 마이카와 남편 D. L. 역시 뭔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사일러 숨겨진 히어로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살해한 뒤 두뇌만 떼가는 연쇄살인마. 능력자들의 두뇌를 통해 능력을 빼앗는 것으로 추측되는 그의 정체는 중반 이후에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다. <히어로즈> 시즌1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악당. 모힌더 세레쉬 존경받는 유전학자였던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숨겨진 능력자들을 찾아다니는 인도인 학자. 집요한 탐구 정신 외에는 어떠한 능력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곳곳에 흩어진 능력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겠다는 집념은 초능력에 가까울 정도다. 미스터 베넷(H.R.G) 불사신 치어리더 클레어 베넷의 양아버지. 실은 능력자들의 거처를 파악해 납치해서 뭔가를 연구하는 모종의 집단을 위해 일한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관계로 미국 팬들은 그를 H.R.G(Horn-Rimmed Glasses: 뿔테안경)라 부른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인생으로 들여다본 한국 영화사

4월12일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개봉한다. 100개의 작품이라는 말 자체도 기적처럼 느껴지지만 유독 부침 많았던 한국 현대사와 한국 영화판에서 40년 이상 살아남았다는 것은 임권택의 작가적 성공보다 더 기적적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와 함께 살아남았고 성장했고 또 현재진행형으로 한국영화를 움직이고 있는 임권택의 영화적 역사를 당시의 충무로 풍경과 함께 들여다본다. 데뷔 전 - 먹고살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들다 18살, 한국전쟁 통에 집을 나온 임권택은 ‘꿈 없는’ 가출 소년이었다. 일본 유학 중에 좌익이 되어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집안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가문의 장손이자 칠남매의 맏이는 기찻값만 달랑 들고 부산으로 떠났다. 노가다판을 전전하다 만난 군화장사꾼들은 전쟁이 끝나자 남은 군화를 그에게 맡기고 서울로 떠났다. 얼마 뒤 서울서 군화 장사 대신 돈 된다는 영화판에 뛰어든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제작부의 허드렛일이 감독 임권택의 첫 발걸음이었다. 노가다를 할 때처럼 푼돈이 생기면 늘 술을 마셨다. 그에게 영화는 꿈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1960년대 - 26살 데뷔, 미친 듯이 영화를 찍어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위에서 영화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낙이었다. 순풍이 불기 시작한 영화판에서 임권택은 5년 남짓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로 알려진 정창화 감독의 연출부를 했다. 이때 그는 감독 데뷔도 하기 전에 영화판을 떠날 뻔했다. 정 감독의 <비련의 섬> 촬영 때 주연배우 김삼화가 감독과 시비가 붙어 막무가내로 촬영을 거부하자 연출부 셋째였던 그가 분통을 참지 못해 배우를 한대 때린 것. 결국 김삼화에게 뺨 석대를 맞는 것으로 영화 중단의 위기를 넘겼지만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주연배우가 돌아가는 차 앞에 드러누울 정도로 젊은 혈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영화판에서 “똘똘하다”고 소문난 그가 감독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찍은 1962년은 한국 최초의 영화법이 제정된 해이기도 했다. 71개에 달했던 영화사가 16개로 통폐합됐고 영화사 설립도 등록제로 바뀌었다. <오발탄>의 상영이 금지되는 등 군사정권의 검열은 강화됐지만 60년대는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김기영 등 실력있는 감독들이 활동하면서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일궈낸 시절이기도 했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 등이 흥행했고, 한국 영화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이때까지 임권택에게 영화적 야심은 사치였다. 첫 영화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도 ‘망하고 나면 조연출로도 안 써줄 텐데’ 하는 걱정 때문에 망설일 정도로 ‘생계형’ 감독이었던 그는 10년 동안 제작자로부터 주어진 작품만 ‘주문생산’하는 데 급급했다. 60년대 말에는 한해에 무려 8편에 이르는 영화를 ‘가케모치’(겹치기)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데뷔 뒤 11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임권택은 스스로 그 시대의 자신을 “저질흥행감독”으로 기억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만다라>로 임권택을 발견한 일본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그의 평전을 쓰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에 의뢰해 임 감독과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보러갔을 때 상영 시작 뒤 5분 만에 자리에서 나가버린 임 감독의 부끄러워하던 모습을 회고하기도 했다. 1970년대 - 새마을영화와 반공영화 사이에서 길을 찾다 70년대에 강화된 검열로 영화 만들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텔레비전의 대중적 보급도 한국영화를 죽이는 데 한몫 했다.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60년대 후반 만들어진 ‘우수영화 보상제’에 ‘올인’했다. 우수영화 추천제는 정부의 ‘우수영화’ 추천을 받은 영화사에 외화수입권을 줬던 제도. 이렇게 한해 스무편 정도 수입됐던 외화는 그야말로 로또복권이었던 탓에 한국영화는 외화수입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추천용’ 새마을영화와 반공영화가 범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저질흥행감독’ 임권택의 도약을 뒷받침하게 됐다. 제작자들은 어차피 한국영화 흥행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임권택은 늘 그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흥행압박에서 벗어나 감독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작가적 자의식이 녹아든 첫 영화로 꼽히는 <잡초>를 직접 제작했다가 망한 다음 <증언> 같은 대작 전쟁영화, <아내들의 행진> <왜 그랬던가> 같은 계몽영화를 만들었다. 10년 넘게 훈련된 연출력과 작가적인 비전을 자각하면서 그의 영화들은 서서히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격한 테두리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의 한계는 명백했다. 임권택 작품에서 최초로 고향 또는 한국 땅 이야기를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는 <아내들의 행진>의 마지막에는 영화의 맥과 무관하게 무장공비가 튀어나오는 장면이 들어가야 했고, <왜 그랬던가>는 원제 <알래스카의 늑대>에서 알래스카가 함경도를 연상시키며, 그러면 함경도로 넘어가자는 뜻인가라는 정부쪽의 말도 안 되는 추궁으로 <왜 그랬던가>로 바뀌게 된 것. 분단 소재의 영화 가운데 지금도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짝코>가 당시 우수반공영화로 꼽힌 건 평론가들에게도 농담거리가 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환경이었다. 70년 중반 극장가는 또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 <바보들의 행진>의 하길종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개화기였다. 그러나 흥행력도 떨어지고 청년문화에서도 소외된 임권택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가 개봉관에서 사라지다시피하면서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에게 “자네, 요즘도 영화하는가?”라는 인사를 받으며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초조하게 이번 영화가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나가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 관객과 만나다, 세계와 만나다 <족보> <깃발없는 기수> <짝코> 등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훗날 재평가되는 영화들을 만들면서 임권택은 80년대로 건너온다. 그 첫 결실이 <만다라>였다. 김성동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만다라>는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에 본선 진출했고, 이후 빨라지고 넓어진 한국영화의 세계 진출에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런데 작가적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 시기에도 임권택은 상투적인 장르영화를 간간이 만들었다. “(영화작가로) 자부심 같은 건 별로 없다”고 말한 그는 “영화가 직업인 사람이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프로 감독론’을 가지고 있었다. 70년대 말 호스티스영화에 이어 80년대 극장가는 본격적으로 ‘에로’영화가 활개를 쳤다. 80년대 최고 흥행작인 <애마부인> 시리즈는 당시 중학생들에게까지 동시상영관 필수관람영화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변강쇠> <뽕> 등 토속 에로물 시리즈도 승승장구했다. 이 가운데 등장한 <씨받이>인지라 어쩌면 당연하게 ‘에로’시리즈로 분류가 됐고, 해외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은 것과는 달리 이 역시 동시상영관을 전전하는 신세에 머물렀다. 당시도 살벌했던 검열로 인해 처음 찍었던 필름을 대부분 버려야 했던 <티켓>처럼 찍고 나서 “(작품 훼손으로 인해) 오만정이 다 떨어지는” 작업도 여러 번 했지만 조계종의 거센 반대로 작품 자체가 엎어졌던 <비구니>는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비구니를 벗겨서 장사한다”는 외설시비로 엎어진 이 영화는 “내가 찍었던 전투장면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는 대규모 군중신을 비롯해 1만2천자가량 찍어놓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필름조차 사라진 상태. <씨받이> <비구니> 모두 어떤 의미에서 당시 에로영화 바람에 제자리를 빼앗긴 영화였던 셈이다. 또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정부의 제안으로 임 감독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다큐멘터리- 본인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는!- 도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 -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하다 <비구니> 사태로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악연이 될 뻔한 제작자 이태원(태흥영화사 대표)과의 인연은 이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90년 최고 흥행작인 <장군의 아들>이 이태원과의 인연으로 태어났던 것.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백치 아다다> 등이 해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따내면서 기쁨 못지않게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한 그에게 이태원은 난데없이 깡패 김두환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를 제안했다. “영화제에서 뭔가 성과를 얻을 작품을 구상할 때라 몹시 언짢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무도 기억 못하는 60년대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자신의 변화가 스스로도 궁금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90년대는 바야흐로 표현의 자유가 스크린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파업전야> 상영으로 극단 아리랑 대표였던 김명곤이 불구속 입건되는 등 파동이 있었지만 <오! 꿈의 나라> <부활의 노래> <닫힌 교문을 열며> 등 이른바 ‘운동권’영화들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고 빨치산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다룬 <남부군>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소설가 조정래의 제안을 받아 임권택은 <태백산맥>의 영화화를 구상했다. 그런데 시나리오화 작업이 지체되면서 쉬어가는 작품으로 만든 게 <서편제>였다. <서편제>로 명실상부한 흥행감독뿐만 아니라 작가감독으로서도 인정받게 됐지만 <태백산맥>의 제작은 수난이었다. 그는 <태백산맥> 제작을 앞두고 한 일간지에 자신이 좌익 집안 출신임을 커밍아웃하며 출사표와 같은 글을 기고했다.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뽑힌 기사 탓에 빨갱이 자식에게 그런 영화를 만들게 해선 안 된다는 항의가 빗발쳤고, 촬영장에는 지역경찰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했으며 개봉을 하지 말라는 우익의 협박도 멈추지 않았다. 90년대 역시 모든 작품이 작가의 마스터피스는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다”는 임권택의 지론은 본인이 원하지 않던 <장군의 아들> 2, 3편을 결과적으로 졸속 개봉시켰고, <창> 역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추석개봉에 맞춰 감독 스스로 무리한 촬영강행을 하느라 “역시 아쉬운 게 더 많은 작품”으로 남게 됐다. 2000년대 - 그리고 거장의 고뇌는 계속된다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변화와 성장의 시기를 거쳤고, 임권택은 <춘향뎐>으로 밀레니엄의 첫문을 기분 좋게 열어젖혔다.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서 본선에 오르고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타며 명실상부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직업인’ 임권택은 여전히 피가 마르는 작업을 한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사전제작 단계에서 오랜 파트너인 이태원 대표가 발을 빼면서 임권택은 60년대 먹고살기 위해 영화를 만들 때처럼, 70~80년대 정권의 눈치를 볼 때처럼 90년대 흥행을 하면서도 안도하지 못했던 것처럼 고뇌와 불안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역설적으로 이 긴장과 불안은 그를 원로가 아닌 젊은 현역 감독으로 각인시킨다. 그래서 100번째라는 숫자는 괄호를 닫는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길게 이어질 목록- 한국영화의 그리고, 임권택 영화의- 의 중간쯤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숨> 영화평 ① 치유의 환상, 그 환상의 슬픔

한 여자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괴로워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시간,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한 사형수의 기구한 운명이 흘러나온다. 송곳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던 남자는 죽지 못하고 목소리를 잃었다. 여자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사형수를 찾아가고, 감옥의 면회실에서 그들은 이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김기덕은 이렇게 썼다. “증오가 들이마시는 숨이라면… 용서는 내쉬는 숨이다….” 아마도 <숨>에서 김기덕은 이 조화로운 세계를 꿈꿨을 것이다. 여자는 스스로 사계절이 되어 남자에게 총천연색의 삶을 선물한다. 남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죽음이 되어 여자에게 두렵고도 매혹적인 죽음의 형상 혹은 열망을 선사한다. 여자의 송장 같던 마음과 남자의 송장 같던 삶에 욕망의 열기가 들어선다. 여자는 말을 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남자는 육체의 언어로 화답한다. 현실의 언어가 부재하고 현실의 시간이 사라진 이 시공간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가 된다. 그렇게 볼 때 이 세계는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정녕 아름다울 뿐인가? ‘사형수와 유부녀의 불가능한 멜로’라는 표피를 거두고 본다면, <숨>은 절망에 빠진 한 여자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크게 보자면, 여자의 길은 감옥 밖의 현실에서 시작해서 감옥 안의 세계를 지나 다시 현실로 이어진다. 그것은 마치 현실-판타지-현실, 일상-여행-일상처럼 폐쇄된 순환의 구조를 취한다. 이 커다란 순환의 구조 속에는 또 하나의 순환이 잠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감옥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의 순환, 즉 겨울에서 시작해서 겨울에 끝나는 계절의 흐름이다. 그래서 <숨>은 전체적으로 원형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영화는 끝에 가서 다시 처음의 지점으로 돌아간다. 그 귀환의 행로는 필연적인 순리처럼 그려진다. <숨>과 <시간>의 가장 명백한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를테면 <시간>에서 시간의 반복은 파멸을 낳았다. 여자가 성형수술로 자연을 거스르고 새로운 시간을 꿈꿀수록, 시간은 그녀의 의지를 벗어났다. 반복은 아무것도 복원하지 못했다. 그런데 <숨>의 반복은 <시간>과는 다르다. 이때의 반복은 일면 시간의 순환을 창조한 여자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는 두번의 겨울이 반복된다. 그녀가 처음 사형수를 방문한 현실의 겨울과 그녀가 감옥에 봄, 여름, 가을의 시간을 불어넣은 뒤 다시 세상으로 나올 채비를 하는 겨울이 그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두 겨울은 같은 시간대에 놓여 있지만, 그 둘은 분명 다른 겨울이다. 두 번째 겨울, 여자가 사형수와의 마지막 순간을 섹스로 채울 때, 그녀는 마침내 어린 시절 겪었던, 기원과도 같은 죽음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그렇게 해서 사형수와의 관계를 마무리하고 감옥을 나서고 자기 내면의 분노를 떠난다. 감옥 밖에는 흰 눈이 내린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를 때, 과거의 상처와 어떤 죽음(들)은 이미 추억이 된다. 이 두 번째 겨울은 그녀에게 처음보다 ‘덜 나쁜’ 겨울이다. <숨>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어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 과거의 고통이 눈으로 덮이는 더 나은 순간이다. 그럴수록 사형수 장진과 감옥에서의 일들은 이 여정의 흔적 혹은 판타지처럼 기억된다. 그러니 <숨>에는 <시간>에서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무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운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하는 의지 같은 것이 없다. 대신 이 영화에는 치명적인 일탈과 결국은 복귀의 움직임이 있다. 그것의 미학을 떠나 그 행로의 윤리를 따지다 보면, 때때로 ‘중산층 여자의 일탈과 가정으로의 복귀’라고 거칠게 요약하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숨>은 <시간>과 <빈 집>의 그림자를 지니지만, <시간>의 처절한 물질성과 <빈 집>의 시적인 상상력이 주던 울림과 비교했을 때, 무언가로부터 한발 물러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후퇴의 몸짓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절박한 변명은 화해와 치유라는 말일 것이다. <숨>에서 김기덕은 남녀의 면회실 장면을 훔쳐보는 보안과장으로 출연해서 그의 전작들에 줄곧 등장했던 익명적인 시선의 자리에 자신의 시선을 위치시킨다. 그의 얼굴은 남녀의 행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모니터의 화면 위에 그들의 일부처럼 어렴풋이 비친다. 그때 사형수와 여자뿐만이 아니라 김기덕 또한 감옥이라는 영화 속 치유의 공간에 속하게 된다. 영화의 내용과 감독의 행로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숨>은 온갖 스캔들을 뚫고 한결 평온해진 김기덕의 내면을 반영하는 영화, 그 정도 선에서 멈추는 듯하다. 그럼에도 끝까지 묻고 싶은 질문. 그녀의 두 번째 겨울은 정말 처음보다 ‘덜 나쁜’ 겨울일까? 내게 <숨>은 오히려, 그러한 여정을 치유라고 믿고 싶어하는 여자와 감독 자신과 우리의 환상, 그 환상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 영화로 다가온다.

어느 쾌락주의자의 절제, 디자이너 정구호

어디에서 읽었더라. 상대에게 옷을 선물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치는 일이라고 했다. 디자이너 정구호의 옷은 그 소망을 단호하게 전한다. 품은 넉넉하고 실루엣은 유유하지만, 입는 이가 어떻게 느끼고 움직이길 바란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한다. 정구호의 영화미술도 비슷한 이유에서 압도적이다. <정사> <텔미썸딩>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위해 정구호가 지은 영화 의상은, 과장하자면, 인물의 성격을 거의 ‘폭로’한다. 새로 제작하지 않고 구호(KUHO)의 기성복을 협찬한 경우에도 정구호의 옷은, 여배우를 특정한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관객을 부추긴다. 낭창거리는 바지와 셔츠를 입은 <사랑니>의 조인영은, 천방지축으로만 보였던 배우 김정은 속에 숨은 호리호리하고 나긋한 여인을 노출시켰다. 블라우스를 비단뱀처럼 감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은숙은, 배우 문소리가 가진 줄 몰랐던 싸늘한 광택을 뿌렸다. 6월 개봉을 앞둔 <황진이>는 정구호가 4년 만에 참여한 영화다. 송도 기생 명월도 어김없이 옷과 장신구를 선언처럼 걸친 여인이 될 터다. 정구호가 만든 옷은 좀, 고독해 보인다. 길쭉한 타원형 체경 앞에 홀로 서 있는 여자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다. 왁자한 모임에도 입을 수 있으나, 자리에 어우러지기보다 외따로 떨어져 주목을 끄는 옷. 디자이너 자신도 다른 브랜드의 옷과 뒤섞어 입기 용이하지는 않다고 긍정한다. 심지어 구호 컬렉션 쇼에서조차 피날레에 여러 모델이 한꺼번에 행진하면, 이게 아닌데 싶다. 흔히 미니멀리즘이라고 요약되는 정구호 스타일의 아름다움은 주의를 기울이고 시간을 들여 보지 않으면 간과하기 쉬운 부류다. 그런데 정구호는 문제의 주의와 시간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97년 부티크 구호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 젠(Zen/禪) 유행에 시동을 걸었고 옷 외에도 인테리어, 문구, 식기, 공연 의상 등의 디자인, 설치미술 작업, 인사동 쌈짓길 프로젝트를 두루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정구호는 옷이 그의 활동의 정점임을 분명히 한다. 나머지는, 아이디어의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옷에 담긴 생각을 더 잘 이해시키는 작업이다. <정사> <순애보> <텔미썸딩> <하루> <쓰리>로 이어진 그의 영화 미술은, 디자이너가 눈치 보지 않고 뽐낼 수 있는 코스튬드라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물을 만났다. 미국판 <보그> 편집장을 지낸 다이애나 브뤼랜드는 “디자이너란 사람들이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재주를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지난 10년간 정구호는 거기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 이충걸 편집장에 따르면, 정구호는 세상의 아름답고 맛있는 것을 죄다 섭취하려고 애쓰는 탐식가다.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입고 싶은 건 다 입을 거야!”라고 아이처럼 외칠 수 있는. 문외한인 내가 잡지를 통해 엿보는 패션은, 오답은 있으나 정답은 없는- 그리고 가격은 미정인- 세계다. 그러나 디자이너 정구호는, 유사시에는 한 벌의 옷을 가리켜 “옳다”, “그르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법한 선명한 직관을 대화 갈피에 보여주었다. 그와 세편의 영화를 만든 이재용 감독은, 옷본의 선을 내리그을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과함이나 부족함이 없는 절묘한 지점을 감지하는 아주 예민한 촉각이 정구호에게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뭇사람들이 ‘재능’이라 칭하는 힘의 정체는 결국 그 촉각이 아닐까? 정구호가 확인해주었다. “항상 그것이 문제예요. 언제 멈추고, 언제 나아갈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그 지점을 생각해왔어요.” -옷, 그릇, 문구, 인테리어 디자인, 영화미술, 요리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오래된 친구이자 영화를 같이 만든 이재용 감독님 표현으로는 힘이 더 들지언정 일한 자리가 분명히 표나는 쪽을 좋아하신다고요. 요즘은 어떤 일로 바쁘세요? =구호뿐 아니라 제일모직 10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맡고 나서 10배로 바빠졌어요. 저는 둘러보고 지시만 하기보다 영화현장으로 치면 팔 걷고 사다리 올라가 망치질하는 부류예요. 제가 이것저것하니까 처음에는 “저 사람, 옷 하는 사람이야, 뭐야?” 하고 욕한 모 디자이너도 있었대요. 하지만 요새는 “저런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실은 다른 일들을 같이 해서 오히려 제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옷 한 가지를 하는 데 열 시간을 일한다고 해도 열 시간 전부 실질적인 작업 시간은 아니잖아요? 유학기간에 저는 아르바이트를 스무 가지 넘게 해서 살았어요. 수업 끝나면 일하고 일 마치면 집으로 프로젝트하고 다시 일하러 가는 식으로 시간을 쪼개고 조절하는 생활을 열여덟살 때부터 한 거죠. 그래서 일의 집중도가 높아요.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점도 잘 치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제 종교가 민속신앙이라서. (좌중 웃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아요. 30분만 말을 나눠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두번쯤 만나면 확실히 알겠고. -성함을 그대로 브랜드명으로 쓴 경우인데요. 구호라는 이름에 원래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브랜드 이름이 된 뒤 뉘앙스가 더 붙었다고 생각하세요? =구 자는 돌림자고요. 오랫동안 이름 안 짓고 아명으로 버티다가 세 살 반 때 할아버지가 절 불러 “앞으로 이게 네 이름이다”라고 붓글씨로 써서 보여주셨어요. 구할 구 자에 하늘 호 자. 어렵죠. 하늘을 구하라니, 뭘 어쩌라는 건지. (웃음) 철학하는 분들도 이름이 너무 세다고 해요. 브랜드 이름도 많이 고민했는데 외국인들에게 물으니 발음 느낌이 옷과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뉴욕에서 공부를 마친 뒤 출판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셨는데 곧 그만두셨습니다. 평면 디자인이 주는 답답함이 컸나요? =책상에 가만히 앉아 하는 일을 잘 못해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다보면 정해진 종이 규격, 화면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니 몹시 답답했어요. 졸업 뒤 2년쯤 그러다보니 뭔가 움직여서 만들고 지저분하게 일을 벌였다가 치우기도 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뉴욕에서 식당을 열었는데 관련된 일 중 디자인에 속하는 일은 전공이니 내가 하자 싶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을 제가 하게 됐죠. 구호의 브랜드 로고도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구호(KUHO)의 로고 글씨체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맨 인 블랙>의 자막 서체(파블로 페로)와 비슷해요. 구호 옷의 실루엣도 그러고 보니 세로로 기름하네요…. (웃음) =워낙 긴 실루엣을 좋아하고 컨덴스드 체(condensed: 옆으로 눌려서 세로가 긴 서체)를 좋아해요. 학창 시절 프로젝트에서도 그 서체만 고집했고 막판에는 아예 <컨덴스드>라는 책을 만들었더니 선생님들이 두손 들었죠. 초등학교 때 TV보고 박공예, 매듭공예 따라했죠 -어려서도 영화를 좋아하셨다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현실보다 서양영화를 보며 원체험을 한 경우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여섯살부터 <주말의 명화>의 단골손님이었죠. 가요보다 팝송, 외국영화를 더 친숙하게 섭취한 세대라서 그것이 더 깊이 흡수됐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는 고교 졸업 직후 유학을 떠나 80년대 대학가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죠. 이런 이야기, 친구들은 화내겠지만 방학 때 귀국해 신촌에 놀러가면 다들 막걸리집에서 인상 쓰고 담배를 피우며 슬퍼하고 있었어요. 내일 하늘이 무너질 표정으로. 저는 기쁘고 즐겁게 사는데 친구들에겐 삶이 역경이었죠. “너희는 왜 그렇게 슬프니?” 물었지만 이야기의 끝은 “넌 이해 못할 거야”였죠. “알았어. 난 이해 못한다. 그냥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할게.” 그랬어요. 저도 한국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보고 겪었다면 다르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체험을 못하고 물질주의적 세계에서(웃음) 지낸 거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런웨이>의 스타일리스트 나이젤(스탠리 투치)이 “친구들이 풋볼할 때 몰래 재봉을 독학했다”고 회고하죠. 선생님도 어려서 새 옷을 사면 스스로 수선해서 입고 동생의 인형 옷도 지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사실 저는 공예부터 했어요. 흙장난, 소꿉장난부터 종이접기까지 뭐든 손으로 하는 작업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부터 코바느질도 하고 TV에서 박공예니 매듭공예니 강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보자마자 재료를 사서 이튿날 똑같이 따라했죠. 다른 아이들은 사탕을 사먹는데 전 사탕을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 돈으로 재료를 샀고 하나를 완성해야 다른 작품에 착수했죠. 박공예를 해서 몇개 걸어놓고는 다음 프로그램 예고를 보며 “와, 이번엔 매듭이구나!”하고 또 매듭을 만들어서 걸어두고. 어머니는 그걸 떼내시기를 반복하는 그런 싸움을 고등학교 때까지 했어요. -록음악 하겠다는 아들 기타를 아버지가 부쉈다는 이야기의 박공예 버전이네요. (웃음) =아버지는 제가 만든 물건을 말없이 가져다 버리셨어요. 그러다가 홍익대 교수인 어머니 친구분이 소질이 있으니 가르치라고 아버지를 설득해 미대를 지망하게 됐죠. <캔디> <올훼스의 창> 같은 만화를, 트레이싱 페이퍼에 베끼지 않고 대번에 아크릴로 채색해 그리기도 했어요. 이웃 금란여고 학생들에게 인기 짱이었죠. (웃음) -어려서 어머니의 스커트에 매혹된 추억을 쓰신 글을 봤어요. 구호의 옷을 살펴보아도 여성의 치마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평소 어머니는 아주 짧은 커트머리에 ‘당꼬바지’라고 하는 시가렛 팬츠(통 좁은 바지)를 주로 입으셨어요. 제가 치마를 입으라고 늘 졸랐죠. 처음 부티크(디자이너가 직접 운영하는 작은 매장)로 구호를 시작할 무렵엔 스커트를 훨씬 많이 만들었어요. 스커트는 여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스커트와 다리의 밸런스와 컴비네이션을 굉장히 좋아해요 샤넬라인보다는 길고 예전 미디스커트보다는 짧은, 무릎과 발목 중간의 길이가 제가 사랑하는 스커트 기장인데, 매장에서 다리가 짧아 보이는 길이라고 불평이 들어와도 우겨서 만들었어요. 트임이 적은 스커트도 좋아하는데 어떤 손님이 제 치마 때문에 출근길에 버스 타려 뛰다가 넘어졌다며 “뛰지 말고 걸으라는 정구호 선생 뜻이구나” 싶었대요. -다리와 치마의 조형적인 조화 말고도 스커트를 입었을 때 따라오는 몸의 움직임을 좋아하시는 것 아닌가요? =스커트는 몸 전체를 길어보이게 해요. 바지를 입으면 서 있을 때 길어보일지 몰라도 걷기 시작하면 달라요. 스커트는 걸을 때도 면(面)으로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길어 보이죠. 또, 스커트에는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섹시함이 있어요. 여성들이 중요한 결정과 모임을 하는 날은 꼭 스커트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체형이 어떻든 스커트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없어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웃음) 제가 여성복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남자라 옷을 직접 못 입어보고 만드는 거예요. 입다보면 옷을 달리 느낄 수 있거든요. 음식은 대여섯살부터 익혀서 자신있었어요 -졸업 뒤 기성복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아서 옷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출판사에 입사하셨다고 읽었습니다. 출발부터 아예 독자적인 부티크로 시작하겠다는 건 대단한 자신감 아닌가요? 또 한 가지, 부티크를 차릴 자본을 모으기 위해 귀국 뒤에도 레스토랑을 계획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레스토랑을 해서 거꾸로 빚을 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돈이란 내가 기획해서 추진하면 벌 수 있다는 굉장한 낙관과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 신기합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제가 지닌 재주 중에 가장 현금화하기 좋은 것을 생각해보니 요리였죠. 음식은 대여섯살부터 익혀서 자신있었어요. 다들 제 음식이 맛있다고 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퓨전 음식점을 하려고 했는데 정통 프랑스 요리를 제대로 하는 집도 드문 상황이라 제대로 배우자 싶어 요리유학을 간 거고요. 그런데 결국 레스토랑을 차리지 않고 바로 구호 부티크를 열었어요. 젊고 부양가족도 없는데, 간절히 하고 싶은 일부터 하자, 언제든 망하면 난 음식을 하면 된다고 마음먹은 거죠. 처음 기성복 회사에 취직 안 한 것은 패션 전공자도 아니고 경험도 없으니 그 부담을 안고 저를 채용해줄 사람도 드물 것이고 저도 그런 리스크를 남의 회사에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구호는 매장도 없는 상태에서 이태원의 레스토랑을 빌려 쇼부터 하는 특이한 출발을 했는데요. =광고비도 없었고 숍을 여는 것보다 신뢰를 얻기 위해선 제가 어떤 디자이너고 뭘 할 수 있는지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선배 디자이너들께 일일이 찾아가 인사하고 행사를 알렸고 기자들에게도 편지를 보냈어요. 카탈로그와 포트폴리오도 보냈고요. 쇼도 모델라인에 찾아가 그냥 모델만 달라고 청해서 혼자 기획하고 음악 넣고, 이재용 감독을 포함한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죠.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죠. 다시 하라면…, 그래도 하고 싶네요. (웃음) 영화미술을 시작한 동기도 돈이었어요. (웃음) <정사>의 의상을 부탁받았는데 미술까지 담당하면 받는 돈도 커지니 목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고 여겼죠. -1990년대 말 청담동 레스토랑 실내장식을 담당하고 부티크 구호를 열면서, 젠 스타일 유행의 한복판에 계셨어요. 패션잡지 편집장들께 여쭤보니 트렌드와 정구호의 고유한 개성이 맞아떨어졌다는 의견도 있고 젠 스타일 바람을 형성한 주체라고 보는 의견도 있더군요. =젠을 굳이 염두에 뒀다기보다 원래 제 취향이 장식보다 기본 구조, 기본색에 충실하게 접근하는 쪽이니까요. 저는 자연은 자연대로 가만히 두되 그 위치만 바꿔놓자는 생각으로 모던한 실내에 돌절구와 잔디만 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보여드린 것뿐이죠.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이 저로 인해 동요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2003년 제일모직에 스카우트되기 전에도, 부티크 구호를 내셔널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FNF라는 기업과 제휴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기업과 결합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일찍 판단하셨나요? =외국 같으면 디자이너에게 아틀리에를 지키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유통구조가 그러기 어려워요. 매니지먼트, 재정, 작게는 천의 직조나 염색도 일정 규모 이상이 돼야 원하는 원단을 얻을 수 있어요. 후배들을 직접 지원 못해도 바람직한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07년 봄/여름 시즌 쇼에서 엘스워스 켈리, 프랭크 스텔라 등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미니멀리즘에 한결같이 끌리십니까? =다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 늘어놓은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자가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제가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무엇을 덜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더 해서 걸러낸 상태예요. 남들이 대여섯개 디테일을 쓴다면 저는 거기서 소거해가는 것이죠. 한편 완벽하게 장식적인 것은 미니멀한 것과 상통해요. 건축도 아주 고전적인 공간은 극히 모던한 공간과 어울릴 수 있고요. 라벨을 떼어내도 브랜드를 알 수 있어야 해요 -구호의 옷은 재단 방식에 큰 무게를 두기 때문에 건축하듯 옷 짓는 디자이너라는 평도 많이 들으셨죠. =구호의 기본 컨셉 중 하나가 뉴 커팅입니다. 일반적 양장 재단 패턴이 아니라, 그 옷이 보여주려는 실루엣에 따라, 표현하려는 체형에 따라 재단법을 바꾸는 거죠. 초기에는 어깨선이 없는 옷도 만들었는데 사이즈 분류를 위해 공장에 보냈더니 이런 옷은 처음 봤다고, 못하겠다고 도로 보내왔더라고요.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니까 어떤 사람이 입으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입으면 다른 식으로 옷이 떨어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러니 체형과 상관없이 입는 옷들이 있어서 부티크 시절에는 임신 사실을 공개하기 전인 연예인들이 많이 오기도 했어요. (웃음) 6개월까지 커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좌중 웃음) 저는 맞춤옷에는 재능이 없는 디자이너 같아요. 팔뚝이 굵으니 소매길이는 반드시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고정관념이 있는 분들을 안 좋아하거든요. 어쩌면 그것이 부티크를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죠. -매장을 구경해보니 지퍼를 쓴 옷이 드물어요. 여밈 방식도 고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퍼보다는 단추, 단추보다는 후크(걸고리), 후크보다는 스트링(끈)으로 여미는 옷을 좋아합니다. -여성의 몸에서 옷과 만났을 때 표현력이 가장 풍부한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목을 좋아해요. 목선이 쇄골을 딱 가리는 크루넥(crew neck)과 어깨선을 보여주는 스퀘어넥 라인을 특히 선호해요. 어깨는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목선만큼은 크루넥을 쓸 때도 있어요. 얼굴 주변을 단순하고 고전적으로 처리하면, 나머지 부분과 상관없이 제가 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반면 허리선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죠? 몸의 곡선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옷인데 이른바 ‘여성적’라고 말하는 조형적 요소는 뭘까요? =여성스러움의 실루엣은 억지로 만들어진 곡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드러나는 선이라고 봐요. 종이 봉지 속에 사과가 들었을 때, 둥근 형태감은 있지만 정확한 모양은 구분가지 않는 상태처럼. 난 허리가 23이다, 26이다 보여주기보다 상상하게 만드는 편이 좋아요.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움직일 때 옷이 주름지고 자락이 쏠리는 실루엣 변화가 좋아서 자꾸 그런 장난을 칩니다. -옷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을 강조해오셨죠. 못마땅한 옷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브랜드마다 고유 실루엣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블라우스, 원피스가 색상만 바뀌어 들어가 있는 것은, 옷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결과예요. 옷은 라벨을 떼내도 색깔과 소재에 상관없이 실루엣과 옷이 입혀지는 방법으로 어느 브랜드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출발할 때 목표도 라벨을 떼어내도 구호라고 알아볼 수 있는 옷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1년에 몇벌의 옷을 지으세요? =900개의 스타일을 만들어요. 스타일마다 색채와 소재를 변주하니까 옷의 가짓수는 더 많죠. 미국 경우 연간 400개 스타일이 최대치라고 해요. 미국보다 한국이 매장에 걸리는 옷의 회전 주기가 3배가량 빨라요. -그건 버려지는 옷이 많다는 뜻도 되나요? =맞아요. 아까운 옷이 많습니다. 극장에 걸렸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영화가 많듯이. -한국 여성들이 유행에 순응적이라는 말도 듣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비슷한 옷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해에 새 옷을 사면 원하건 원치 않건 유행을 타게 되는 면도 있어요. =저는 통이 넓은 바지를 좋아하는데 언젠가 새 옷을 사러갔더니 가게마다 시가렛 팬츠만 걸려 있어서 못 산 적이 있어요. 유행은 패션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지만 개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입을 수 있게 옷을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해요. 어렸을 때는 동네 가게에도 사과가 국광, 홍옥, 인도, 골덴, 스타킹 등 20, 30종이었는데 지금은 부사밖에 없어요. 잘되는 건 너도나도 하고 안 되는 건 무조건 없애버리는 문화는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옷도 마찬가지죠. 덜 팔리는 몇 가지 옷이 바로 그 브랜드를 유지하는 옷일 수 있어요. -구호는 고가 브랜드입니다. 매장 직원 말씀이 단골손님들이 이 옷은 구호의 몇년도 스타일이 돌아온 거라고 거꾸로 가르쳐주는 일도 있다고 하더군요. 친숙한 고객에게 패션 이외의 조언을 할 때도 있습니까? =소비자 의견을 듣는 작업은 계속하려고 해요. 반영 여부는 제 자유지만요. 반면 저도 소비자들의 견해를 납득할 수 없다면 설득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옷을 잘 입는 유일한 길은 많이 입어보는 거예요. -많이 입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양의 멋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영향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는 한 사람에게 큰 행복을 주거나 추구하는 가치를 충족시키는 물건이 있다면 다른 것을 포기해서 살 수 있다고 봐요. 진짜 자기가 원한다면 다른 소비를 포기하고 오페라 시즌 티켓을 사는 게 여유라고 생각해요. 학생 시절 저는 옷 10벌을 살 시간을 참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요지 야마모토의 와이셔츠 하나를 사 입었어요. 졸업 때까지 침대없이 살면서 입으로 불어 쓰는 에어 매트리스에서 잤어요. 진짜 원하는 침대는 살 처지가 아니었고, 그 침대를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어디서 자든 상관이 없었어요. 뱅앤올룹슨(덴마크 오디오 브랜드)를 마련하기까지 오랫동안 19달러짜리 스테레오로 버텼어요. 사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디자이너니까 다른 걸 포기하고 최상의 디자인을 가진 물건에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향에 민감한 사람은 다른 것을 포기하고 진공관에 돈을 쓰겠죠. 빨강을 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경우 촬영현장에서 손수 전골을 끓이고 구석구석 정성을 기울이셨죠.그러나 아무래도 편집에 들어가면 주로 음식이나 소품을 보여주는 숏부터 잘려나가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웃음) =분노가, 생기죠. 엉엉. <스캔들…>은 심해요. 다 잘렸어요! 하지만 영화의 주체는 감독이니까 할 수 있나요. 해서 딱 한편 영화를 감독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미술이 아주 잘 보이는 영화로 말이죠! --<스캔들…> 이후 방송, 영화계에서 사극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사를 다룬 작품은 고증보다 상상이 앞선 의상도 선보였고요. 관심 갖고 보셨나요? =변형 자체가 금기시됐던 과거와 달리 <스캔들…> 이후 전통의상을 응용하는 범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잘됐다고 봐요. 하지만 일정한 규칙은 있어야 해요.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룰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보여줄 의상의 한계, 범위와 뿌리에 관한 창작자 자신의 규칙이죠. 그 범위가 보이지 않으면 깊이가 사라져요. 디자이너가 어깨선을 올리겠다고 말하면 저는 꼭 이유를 요구해요. 그냥 예뻐 보여서라고 답하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유있게 어깨선을 올리는 것과 그냥 올리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가 흘러가는 중에 의상이 변한 이유가 분명히 보일 때 남과의 차별성이 생겨요. 단순히 이것 예쁘니 가져다 쓰자는 것과 작품에 맞게 해석하고 변형하는 건 달라요. -미술을 맡은 <텔미썸딩>에서 심은하씨의 캐릭터는 내내 싱글 버튼 H라인 의상을 입었는데요. 스릴러는 너무 정성을 기울이다 보면 옷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나요? =맞아요. 보통 미스터리영화는 관능미를 강조하고 화려한 색을 쓰는데 저는 스릴러라고 세련미가 떨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또한 심은하씨 캐릭터가 치밀한 성격이 아니고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여자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죠. -<순애보>를 보면, 우인(이정재)이 매형과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마른멸치를 접시에 둥글게 담고 깨, 참기름, 고추장을 찍어먹는 종지 세개를 놓더라구요. 내심 웃었어요. =그 멸치는 저보다 이재용 감독 취향이에요. (웃음) 우인이 감독을 많이 닮았어요. -<스캔들…>이 전작이다보니 <황진이>의 미술 의뢰를 수락하기까지 오래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스캔들…> 이후 사극을 여러 차례 의뢰받았지만 사양했어요. <황진이>를 하기로 결심한 건, <스캔들…> 이후 나온 사극들이 잘했지만 의상을 해석하는 범위나 틀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스캔들…>이 고증에 제 생각을 약간 더한 영화라면 이번에는 고증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한 변화를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어요. -고증 대 상상의 양극단으로 대비하셨는데 <황진이>는 어떤 범위에서 두 가지를 결합한 건가요? 홍석중 작가의 원작에는 옷차림과 살림살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꽤 많은데요. =원작의 묘사는 개의치 않았어요. 실제 황진이의 시대와 무관한 일제 강점 직전 조선 말기 기생들의 자료를 봤습니다. 신윤복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고리 위로 치마를 완전히 뒤로 끌어당겨 둘러서 일자형 셰이프가 나오더군요. 미술이 기존 <황진이> 이미지를 깨지 못하면, 차별화의 부담을 연출과 연기가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는 그 부분을 돕는다고 생각해 파격을 제안했어요. -물에 둘러싸인 명월(황진이)의 집과 명월의 옷을 사진으로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성공한다면 <황진이> 스타일의 응용이 유행할지도 모르지만, 영화가 만족스럽지 않은 관객의 눈에는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이예요. 우스꽝스러워지는 것과 혁신은 종이 한장 차이니까요. =영화를 보면 더 놀랄 거예요. 모험하지 않고 애매해지면 이 영화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기본 컨셉은 제가 잡고 진행은 김진철 미술감독이 하셨죠. 명월 집만 제가 신경을 많이 썼고요. 안채를 둘러싼 중원을 연못처럼 물로 채워서 징검다리로 직접 건너거나 누마루를 통해 갈 수 있도록 했어요. 기생의 집은 밤에 화려한 공간이고 그 화려함을 물의 반영이 증폭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죠. 그 추운 날씨에 땅을 파고 물을 채우느라 난리를 쳤는데 영화에 덜 보여 아쉽죠. 그리고 <황진이>는 붉은색이 없는 영화예요. 오방색(청, 황, 적, 백,흑)을 놓고 정리를 해보니 빨강을 빼지 않으면 색 조합이 달라지지 않더군요. 붉은 기가 빠지면서 영화가 차가워졌지요. -붉은색을 쓰지 않고 화려함을 구현한다는 목표네요. <스캔들…> 개봉 당시 마음에 드는 빨강을 얻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빨강의 까다로움은 무엇인가요? =까닥하면 천해 보이고 잘하면 고급스러운, 천의 얼굴을 가진 색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지는 위험한 색입니다. <스캔들…>은 그 위험에 대한 도전이었죠. 요즘 사극들이 붉은색을 남발하고 붉은색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이번에는 “아니다, 그렇게 센 빨강을 빼고도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개된 사진을 본 사람들이 빨강을 쓰지 않은 것보다 검정에 먼저 강하게 반응해요. =우리나라 실내색은 주로 나무와 창호지, 노란 장판인데 <황진이>는 까맣게 갔죠. 일본스러우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있었는데 안 그럴 거라고 설득했어요. 바닥은 검정 화문석으로, 거문고도 까맣게 칠했죠. 병풍은 빼고 장롱으로 채웠어요. 조선 후기 기생들은 남자들에게 선물받은 가구를 쌓아올려 세를 과시했대요. 북한에서 들어오는 골동품을 사서 장식을 뜯어내고 검게 칠해 리폼하고 백동 장식이 많이 붙은 개성장을 재현했어요. -색채도 색채지만 한복 소재가 인상적이었어요. 검은 크로셰(손뜨개) 레이스도 쓰인 것 같은데요, 엉뚱하게 고야의 여인 초상화가 떠올랐습니다. =한복 소재는 통상 자가드나 실크인데 그보다 로코코 소재를 응용해보고 싶었어요. 오간자(얇고 빳빳한 실크)에 레이스를 덧대고 은박도 썼어요. 기존 한복과 가장 다르게 느껴질 점을 간추리면, 소재, 색채의 조합 그리고 액세서리예요. 액세서리는 다 새로 제작했는데 존재하지 않는 머리꽂이를 만들고 바닥까지 끌리는 1m 넘는 노리개도 제작했어요. 디자이너란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구호의 옷은 미인이라고 무조건 어울리는 옷이 아닌 듯합니다. 예를 들어 2006년 1월에 바비인형에게 옷을 입히는 행사에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 저는 어색한 느낌이었어요. =홍보의 일환이지만 제 개인 취향은 아니죠. 사람을 좀 타는 옷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당장은 어색해도 그 어색함을 딛고 나아가면 인이 박힐 수 있는 옷이라고. 공간도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장소가 나중엔 더 오래 친숙해질 수 있는 곳일 때가 많아요. 사람도 까다로운 사람이 접근하긴 어렵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래 가는 이치와 마찬가지예요. -무작정 첫눈에 사람을 풀어지게 하는 편한 집보다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게 해 주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하죠. =몸에 밀착하는 옷의 재단이 제일 쉬워요. 옷은 사람 몸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만들기 힘들어요. 옷이란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몸과 옷 사이에는 일정한 공기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상의 입체공간, 적당한 공기층을 생각하면서 옷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숨쉬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옷을 직접 입었을 때 디자이너의 힘을 강렬하게 느낀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앤트워프 출신 마틴 마르지엘라 같은 전위적 디자이너 옷에 반해 옷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티셔츠 하나에도 다른 느낌이 있는데 그걸 알고 나면 그렇지 못한 ‘상업적인’ 옷을 입기 힘들죠. 저는 구치나 돌체 앤드 가바나 같은 브랜드도 상업적인 옷이라고 생각해요. 사람한테 반짝이 가루를 확 뿌려서 금세 반짝거리게 만들어주잖아요? 그런데 1년이 지나면 그 옷을 다시 못 입고 다른 반짝이를 뿌려야 해요. 예술이나 패션이나 구획화(zoning)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격대보다도 옷의 분위기와 속성, 연출에 따라 구획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뜻이죠. 영역 구분 없이 아무나 어디서나 통하는 건, 모두 똑같은 위치에 소파, 텔레비전을 놓고 사는 우리 아파트 문화와 같다고 생각해요. -한동안 구호는 청담동 ‘규수’들의 옷이라는 이미지가 셌습니다. 그동안 요가, 생활용품 등 라인을 확대하셨는데 상대적으로 중저가 라인을 만들어 구호 특유의 세심한 재단과 좋은 구조가 있는 옷의 맛을 더 많은 소비자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는 없으신가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호의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구호의 느낌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어요. -맛과 아름다움에 예민한 만큼 추한 사물과 현상에도 민감하시죠?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재능이 있어요. 민속신앙인데가 운명론적인 사람이라, 예쁘고 세련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정의하고 생활하세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해요. 누구나 태어나 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잖아요. 저는 능력이 많아 자선사업을 크게 할 것도 아니고, 학식이 높아 학생을 가르칠 수도 없으니 다만 가진 감성으로 노력해 새로운 발상을 시각적으로 보여드리고 사람들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할 뿐이죠. 더이상 영향을 줄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하거나 조그만 장소에서 만들고 싶은 물건만 만들면서 지내겠죠. 그 둘을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