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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나보고 <무사>를 비평하라고?

● 정치적 혹은 윤리적 측면은 잠시 잊자. 단순히 시청률만을 놓고 따지자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블록버스터는 단연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민항기 자폭테러다. 평소 텔레비전을 고철덩어리로 보는 내가 밤새도록 똑같은 신들을 보고 또 보며 앉아 있었으니 말 다했다. 한마디로 오마이갓(!)이다. 그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치밀한 콘티 그리고 엄청난 제작비가 도무지 초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네티즌들 사이에 테러의 배후인물이 닥터 이블 아니면 팀 버튼일 것이라는 찬탄 섞인 농담들이 오고갔을까? 아 참, 요새 <무사>가 개봉중이지, 하는 현실감각(?)이 되돌아온 것은 이 전대미문의 블록버스터가 깜짝개봉을 감행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음이다. 제작사에 전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객석점유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단다. 21세기의 국제 테러리스트들이 14세기의 고려 무사들을 압도하고 있는 판국이다. 관람평, 시종일관 노코멘트! 몇주 전 기자 및 평론가 초청시사회가 열린 중앙시네마. 상영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자 면식이 있는 기자와 평론가들이 서로 협약이라도 한 듯 내게 다가와 다소 위악적인 눈빛을 장난스럽게 빛내며 그렇게 물었다. 어떻게 봤어요? 나는 피실피실 웃으며 미끈덩거렸다. 두 눈 뜨고 봤죠. 그들은 집요하다. 아이 그러지 말고, 솔직히, 영화 어땠어요? 내가 되돌려줄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는 노코멘트죠. <무사>의 스탭과 캐스트들은 몇년 동안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다. 특히 김성수와 조민환은 동료 이상은 물론 친구 이상이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날더러 <무사>에 대해서 평하라는 것은 피붙이가 낳은 자식에 대해서 평하라는 것과도 같다. 자랑하면 팔불출이요 욕하면 개새끼다. 내가 뭐라고 해도 가재는 게 편이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된다. 내가 <무사>라는 프로젝트의 외견상 아웃사이더인 동시에 심정적 인사이더인 까닭이다. 덕분에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걸려오는 전화에 나는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 얘긴 관두고 술이나 한잔 합시다. 괴로운 부재증명 괴롭고 난감한 질문은 술자리에서도 이어진다. 이번에는 왜 시나리오를 안 쓴 거야? 걔네들이랑 싸웠어? 김성수가 <무사>를 만들 동안 넌 도대체 뭐한 거야? 환장할 노릇이다. 평생토록 함께 작품을 하자며 무슨 혈서를 쓰고 도원결의를 맺은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의무를 방기한 중죄인이라도 되는 듯 다그치니 술도 안 취한다. 나도 핏대가 나서 알리바이를 주워섬긴다. 야, 나도 그동안 열심히 일했어. 시나리오를 세편 쓰고(그중 몇개나 스크린으로 옮겨질지는 미지수지만), 단행본 네권 분량의 원고를 각종 매체에 연재했고, 다섯 군데의 강단에서 시나리오작법을 가르쳤고…. 그래도 소용없다. 결국 술판은 멱살잡이 직전에서 끝난다. 염병할! 네티즌들의 의견은 언제나 그렇듯이 옳고 그르다.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었다고? 결과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감독이 직접 쓰지 않고 전문작가에게 맡겼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거라고?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무사>의 시나리오 크레디트를 김성수가 독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김성수가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고 혼자 독단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만 해도 <무사>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시나리오가 고쳐지는 모든 과정을 줄곧 옆에서 지켜봤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대안을 내놓았고 그것들 중 몇몇은 현재의 <무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인 아청도 <무사>에 관계했다. 그는 부용 공주를 위시한 중국인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집중적으로 손보는 작업에 성실히 동참했다. 그뿐이 아니다. 김성수는 현장의 스탭과 캐스트들이 내놓는 의견들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줄 아는 감독이다. <무사>의 시나리오에는 어떤 뜻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숨결이 녹아 있다. 전문작가가 썼더라면 훨씬 더 나아졌으리라는 의견에 그래서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영화 만들기는 본질적으로 협동작업일 수밖에 없으며, 시나리오 쓰기 역시 영화 만들기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빤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무사>의 시나리오 크레디트는 김성수 혼자 감당하는 것이 옳다. <무사>는 김성수가 충무로에 “입사하기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꿈꿔왔던 필생의 프로젝트였던 까닭이다. “디렉터스 컷은 없다” <비트>를 찍을 때의 일이니 벌써 5년 전이다. 야, 산아, 중국 대륙에 버려진 고려 무사들이 사막을 가로질러 조국으로 돌아온다, 어떠냐? 김성수가 그렇게 운을 떼었을 때 나는 대뜸 샘 페킨파의 <철십자훈장>을 떠올렸다. 그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와일드 번치>와 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멋진데? 하지만 돈 엄청 들겠는걸? 당시만 해도 그저 멋진 꿈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김성수는 불과 5년 만에 그 꿈을 현실화시켰다. 그가 수백명의 스탭과 캐스트들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누비며 악전고투를 계속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무사>의 제작과정에는 꿈과 힘을 동시에 갖춘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이 서려 있다. 그 감동은 스크린에도 그대로 묻어나온다. 그렇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긴 필생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무사>의 초고가 나왔을 때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것은 저마다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펄펄 살아 숨쉬는 한편의 장엄한 대서사시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중에야 재삼 확인하게 된 바이지만, 너무 길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무사>의 시나리오에서 패착점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나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시간계산상의 착오다. 본래 3시간 분량으로 쓰였으나 실제 촬영에 들어가자 그것이 넘친다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잘라내야만 했고, 러시 편집을 해보니 아무리 줄여도 4시간 이하로는 못 줄일 작품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을 폭력적(!)으로 줄여 2시간 반짜리로 만든 것이 현재 극장에 걸려 있는 <무사>다. <무사>에 대한 고언(苦言)들은 나름대로 모두 옳다. 플롯이 성기고 캐릭터가 너무 많다. 캐릭터의 내적 필연성이 희박하고 그 변화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무사>가 본래의 시나리오 그대로 극장에 걸렸더라면 듣지 않아도 될 지적들이다. 어쩔 수 없는 편집으로 생긴 가장 가슴 아픈 공백은 리듬과 페이스의 난조(亂調)다. 덕분에 감정곡선은 툭툭 끊어지고 서정에 젖어들기 전에 또다른 전투가 시작된다. <무사> 시나리오의 변천사와 그 제작과정 전체를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들이다. 제작진의 입장에서 ‘디렉터스컷’의 욕망을 품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노래는 무대에서 말하고 영화는 극장에서 말할 뿐이다. 어차피 2시간 반으로 개봉할 수밖에 없었다면 처음부터 그에 맞춰 영화를 만들었어야 옳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사실은 이랬는데 결과는 저랬다고 말하는 것은 프로의 자세가 아니다. <무사>의 제작진은 이 점에서 당당했다. 정우성은 말한다. “아쉬울 것 하나 없다. 극장에 걸린 <무사>가 전부다.” 김성수도 말한다. “디렉터스컷은 없다.” 분석하기 전에 즐겨라! 문맥의 흐름상 이제 <무사>의 장점과 그것이 영화산업 내에서 창출해낸 의의 따위를 늘어놓을 차례다. 하지만 관두겠다. 그래봤자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될 테니까. 대신,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무사>를 다시 보면서, 내가 ‘비로소’ 이 영화를 ‘즐겼다’는 사실만은 덧붙이고 싶다. 훌륭한 시설의 극장에서 일반관객들과 함께 봤기 때문일까? 심정적 인사이더로서 품고 있던 흥행과 비평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냉철하게 뜯어보리라던 결심은 영화가 시작되자 가뭇없이 잊혀졌고 나는 어느새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화면 죽이고 사운드 좋고 배우들은 멋졌다. 영화는 분석과 논쟁의 대상이기 이전에 즐김의 대상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다. <무사>는 너무 많은 소문과 비평의 그늘에 가려져 있고 너무 높은 기대수준에 버거워하는 영화다. 있는 그대로의 <무사>를 보자. 평론이고 시나리오고 제작후일담이고는 다 그림자에 불과하다. 분명한 실체는 지금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2시간 반짜리 <무사>라는 영화 그 자체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가 있다. 적어도 현재 미국이 획책하고 있다는 ‘더러운 전쟁’보다야 훨씬 더.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더티 하리, 웃긴다 이거죠

● 막 <러시아워2>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뭐, 1편이랑 크게 차이나는 영화는 아니더군요. 차이가 있다면 성룡의 영어 구사력이 그동안 조금 더 늘었고 크리스 터커의 농담은 종종 도가 지나칠 정도로 저질이 되었고 전체적으로 두 콤비는 전편보다 훨씬 호흡이 잘 맞아 보였고 액션과 코미디가 늘었고…. 또 뭐가 있나요? 네, 영어 대사가 단 두개밖에 없지만 여전히 시원스럽게 사람들을 두들겨패대는 장쯔이도 있었습니다. <무사>에서 눈물만 흘리는 연기에 조금 갑갑했던 터라 이 사람이 몸을 움직이는 걸 보자 속이 확 풀리더군요. 역시 몸을 움직여야 하는 배우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서는 안 됩니다. 글의 주제가 따로 정해져 있거든요. 전 <러시아워2>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러시아워2>를 통해 최근 할리우드 버디 액션물의 유행에 대해 써야 합니다. 끝내려면 간단한 끝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게 <리쎌웨폰>의 유행 때문이다!’라고 외치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의 수고로 원고료를 챙길 수는 없죠. 형사 버디의 시조는? 기초부터 따져봅시다. 현대 할리우드 형사물의 시조는 무엇일까요? 아마 한쪽 끝은 추리물에 닿아 있겠고 다른 한쪽 끝은 갱스터물에서 서부극에 이르는 수많은 액션 장르에 닿아 있을 겁니다. 이들 중 두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들이 얼마나 될까요? 정말 별로 없습니다. 서부극에서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작품이 떠오르고 형사물에서는 <스타스키와 허치> <마이애미 바이스>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가 떠오르지만 그뿐입니다. 더티 하리에게 파트너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대부분 형사물에서 파트너는 폭력 형사가 내미는 복수의 핑계입니다. 당연히 영화 초반에 죽죠.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액션 위주의 작품에서 주인공 수가 많으면 맥이 빠집니다. 서부극을 생각해보죠. 서부극의 결말은 악당과 주인공의 일대일의 대결이어야 합니다. 총 역시 악당에게 하나, 주인공에게 하나 주어져야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클라이맥스가 산만해집니다. 아무리 착한 쪽에 두명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 총을 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고요. 추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물은 액션보다도 더 폭이 좁습니다. 왓슨을 홈스처럼 똑똑하게 만들어놨다고 치죠. 셜록 홈스가 묵상하는 동안 왓슨 박사가 범인을 잡아 베이커 거리로 끌고 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진상이 하나면 탐정도 하나여야 합니다. 둘이면 중심없이 헛갈리기만 하죠. 독자들은 마지막에 완벽하게 일관된 설명을 요구하는데,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각자의 의견을 떠들어댄다고 생각해보세요. 둘의 생각이 같으면 어떠냐고요? 그렇다면 애당초부터 두명을 붙여야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둘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명탐정의 난제나 서부극의 위기나, 주인공 한명이 풀어야만 서스펜스가 자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으면 서스펜스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세 사람이 있으면 3분의 1로 줄고요. 그 결과 액션물에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생기게 됩니다. 맨 위에는 악당들에게 정의의 총알을 날려대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 밑에는 주인공한테서 액션장면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그의 모자란 점을 커버해줄 만한 보조 조연이 있고요. 그 밑에는 초반에 죽어 넘어지는 소모품 파트너들이 있습니다. 출신이 아닌 기능적인 이유로 배치되는 게 다를 뿐, 실제 사회의 계급사회와 특별히 다를 것도 없죠. 성룡과 크리스 터커, 알고보면 한 사람 그러다 어느 순간 이 계급구조가 타파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셋이나 넷보다 더 헛갈립니다. 사람이 많으면 앙상블 드라마가 될 수 있죠. 하지만 둘이라면 이건 전쟁입니다. <타워링>처럼 주인공들의 직업이 전혀 다른 영화에서도 두 주연배우들이 얼마나 요란한 신경전을 벌였는지 생각해보세요. 둘은 균형잡기가 결코 쉬운 숫자가 아닙니다. 이런 걸 무릅쓰고도 ‘둘’을 내세웠다면 뭔가 절실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러시아워> 시리즈에서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룡은 영어 구사력이 아주 뛰어난 배우는 아니죠. 홍콩영화에서와 달리 할리우드영화에서는 그의 떨어지는 영어 구사력을 커버할 무언가를 빈자리에 넣고 채워야 합니다. 이 경우 세븐 일레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말빨이 센 크리스 터커의 존재가 그 역할을 합니다. 성룡의 리 형사와 터커의 카터 형사는 악당을 걷어차는 팔다리와 수다떠는 입이 양쪽으로 몰려 쪼개진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두 개성의 충돌보다는 보완이 더 중요합니다. 그보다 살짝 위선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버디영화는 종종 할리우드에서 이퀄라이저의 역할을 합니다. <리쎌웨폰> 시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 주인공과 흑인 주인공을 나란히 내세워서 인종적 평등성을 슬쩍 과시하는 것이죠. <리쎌웨폰> 시리즈의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멜 깁슨이지만 그래도 요새 스크린 위를 뛰어다니는 흑인 액션 주인공들은 이런 식으로 주류의 자리에 오른 대니 글로버의 덕을 꽤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대니 글로버가 혼자 주연한 영화라면 보지 않았을 수많은 관객이 멜 깁슨과 함께 딸려온 그를 보고 익히기 시작했고 그러다 그 역시 상당한 거물로 굳어졌으니 글로버 역시 손해본 건 없죠. <러시아워>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성룡은 국제적인 스타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기반이 약하죠. 동양 배우를 그냥 내세우는 것보다는 홈그라운드의 장점이 있는 흑인 배우를 하나 붙여주는 게 흥행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액션에 코미디를 허하라 그렇다면 요새 <리쎌웨폰> 식 버디 액션물들이 유행하는 건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군요? 외국 배우들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고(갑자기 <아메리칸 드래곤>이 떠오릅니다! 왜 이 영화를 잊었나 몰라요) 적당히 인종 균형을 맞추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비판을 슬쩍 빠져나가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버디 액션물들이 이런 목적으로 시작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좀더 원초적인 이유가 있었겠죠. 예를 들어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버디물은 유리합니다. 영화보다 예산이 부족한 텔레비전 시리즈는 액션의 스케일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게 필요하죠. 두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충돌이 있다면 비슷비슷한 작은 액션들 사이에 생기는 빈자리를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스타스키와 허치> 같은 시리즈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죠. 남녀 커플이지만 <엑스파일>도 이 부류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조금 다른 이유일 겁니다. 여기서는 이전에 버디 액션물의 단점을 지적하기 위해 내밀었던 숫자 놀음을 다시 시작해보죠. 주인공 숫자가 둘로 늘면 서스펜스는 반이 됩니다. 당연히 스토리의 심각함도 반이 되지요. 더티 하리에게 하리만큼 큰 비중에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파트너가 붙어 있고 둘이 대충 쿵작쿵작 죽이 잘 맞는 사이라면 더티 하리의 무자비한 처벌들이 결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폭력에 대한 광적 집착은 어느 순간부터 희극적인 것으로 떨어지겠지요. 모든 과도한 것들에는 희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걸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는 건 극중 등장인물이 그걸 지적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티 하리는 스크린 위에서 왕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계급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관객도 당연히 그를 왕 취급했죠. 그리고 총 든 높은 양반들이 하는 일들은 늘 심각해 보이는 법 아닙니까? <내일을 향해 쏴라>가 성공적인 버디 액션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두 주인공은 살짝 경박하고 애교 넘치는 소악당들로 그렇게까지 진지한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결국 버디 액션물은 심각한 액션을 코미디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국내에서 히트한 <투캅스>도 예외는 아니죠. 다시 말해 이런 버디물은 <더티 하리> 식 진지한 액션에 숨통을 열어주는 방법으로 꽤 효율적입니다. 물론 브루스 윌리스처럼 액션과 코미디를 모두 해치우는 배우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이게 편하지요. 만드는 사람들에게나 보는 사람들에게나요. 거꾸로 보면 <더티 하리>식의 심각하기만 한 폭력꾼은 더이상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말이겠죠.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더티 하리를 코미디언으로 보고 있었던 겁니다. 관객의 세대가 바뀌었던 것이죠. <리쎌웨폰> 시리즈에서는 오히려 그런 특성을 이용해 폭력장면을 늘렸습니다. 멜 깁슨은 더티 하리처럼 위험한 폭력 형사지만 대니 글로버와 함께 다니니까 어딘지 모르게 정신나간 어릿광대처럼 변했습니다. 어릿광대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괜히 덜 위험하고 덜 잔인해 보이는 법이고요. 게다가 온화한 대니 글로버의 캐릭터가 뒤를 돌봐주므로 살짝 더 위험해져도 되었죠. 덕택에 <리쎌웨폰> 시리즈는 말도 안 되는 폭력으로 주변에 시체를 뿌리고도 키들거리며 시치미를 뚝 떼는 영화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시리즈의 후반 작품들은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주절거렸던 이야기가 맞긴 한 걸까요? 신나게 떠들다가 과연 요새 할리우드영화에 이런 종류의 버디 액션물이 몇개나 되나 살펴봤는데, 지금 떠오르는 건 <러시아워> <리쎌웨폰> <맨 인 블랙> 정도에 불과합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몇리개 더 추가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는 유행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만큼 대단한 숫자는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서운하군요. 그래도 예로 언급한 영화들에 대한 설명으로는 여전히 그럴싸하게 먹힐 수 있겠지요.듀나 djuna01@hanmail.net

시네마 이탈리아노(Cinema Italiano)

이탈리아사람들은 `다혈질`로 통한다. 정열적인 지중해의 햇빛 속에서 살아서 그런가. 그들의 음악 역시 그렇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엔리코 카루소 같은 불세출의 테너들이 지닌 목소리는 `빨간색`이다. 트럼펫과 비슷한 느낌. 이들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이탈리아의 음악은 뜨거운 온도를 지니고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 고독한 산책자 브람스가 음울한 독일 빵에 사는 동안, 이탈리아에는 화려한 무대에서 드라마틱한 표정으로 사랑과 죽음을 노래하는 가수들을 위해 불멸의 아리아를 작곡하는 로시니가 살았다.이탈리아사람들은 그 음악을 사랑한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위대한 19세기 오페라의 전통은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음악 속에 면면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옛날 오페라 부파 시절에서 현대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사람들은 드라마와 음악이 어떻게 맺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 훌륭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정열적이고도 서정적인 방식으로, 거의 직접적으로 관객의 영혼에 호소하는 음악들을 통해 영화음악의 가능성들을 넓혀온 엔니오 모리코네, 니노 로타 같은 현대 영화음악의 거장들은 위대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예들이다. 이번에 나온 <시네마 이타리아노>(Cinema Italiano)라는 모음 앨범은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대표곡들을 나름대로 재미나게 편집하여 모음 앨범, 이 앨범에서도 이탈리아 영화음악이 서정적인 선율과 드라마틱한 감수성을 주요 특색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앨범을 기획한 사람은 플루트 주자 안드레아 그리미넬리이다. 그는 루치오 달라,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의 이탈리아 음악가뿐 아니라 스팅, 데보라 해리 같은 무게있는 팝 뮤지션을 초빙하여 이탈리아 영화음악 명작선을 호화롭게 꾸미고 있다. 앨범의 첫곡은 스팅이 부른 <시실리 마피아>의 테마음악,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솜씨다. 얼핏 여성적인 노래일 수도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테마를 파바로티의 우렁찬 목소리로 듣는 것도 색다른 풍취가 있다. 뉴욕의 펑크밴드 출신인 밴드 '블론디'에서 말괄량이 목소리를 들려주던 데보라 해리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나는 기억한다>의 메인 테마를 부르고 있다.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데보라 해리는 재즈풍으로 편곡된 노래를 잘 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플루티스트 안드레아 그리미넬리가 직접 나선 <석양의 무법자>의 테마, 트윙, 트윙, 하는 기타 선율을 플루트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미넬리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지은 이 음산한 분위기의 테마곡을 제트로 툴의 이안 앤더슨의 분위기로 혀를 차며 휘파람 불듯 부는 플루트를 통해 소화해내고 있다. 그 밖에도 <지중해> <일 포스티노> <길> 등 대표적인 이탈리아영화의 테마들을 접할 수 있다. 물론 이것으로 그 음악이 가진 힘을 다 파악하긴 힘들 것이다. 그 힘을 느끼려면 영화를 보고, 직접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들어야 한다. 그리로 가는 안내자라 여기고 들으면 무난한 앨범이다.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법정 드라마를 권한다

할리우드에는 법정 드라마가 많다. 부터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 <허리케인 카터>까지 각종 편견에 몰려 누명쓴 사람들이 구원되는 곳으로 그려낸 영화들이 한켠에 있다. <데블스 에드버킷>처럼 정의는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라고 냉소하기도 하고, <데드맨 워킹>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 온당한 거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쪽도 있다. 그래도,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짐작하기에 정의에 자기들의 희망을 거는 영화들이 많아 보인다. 누명쓴 사나이를 구해내는 청년 링컨의 무용담이 그 먼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전파된 걸 보면, 영화가 희망을 창작해낸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 남자가 살인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달빛에 얼굴을 봤다. 이보쇼, 그날은 그믐밤이었소. 위인전 속에서 변호사 링컨의 활약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던가. 적잖은 법정 드라마들은 현실에서 소재를 따왔다. 도색잡지 발행인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의 영토를 넓힌 래리 플린트 재판, 그 담배에 유해성분이 들어 있다고 폭로한 양심적 내부자에 경청하던 <인사이더> 이야기, 사실이 왜곡됐네 아니네 말은 많았지만 환경을 오염시킨 기업과 싸워 이긴 소시민의 무용담 <에린 브로코비치> 등등. 할리우드는 그런 식으로 미국의 얼굴을, 긍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해왔다. 한국영화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이 법정극의 전통이다. 글쎄, <검사와 여선생>과 <인디안 썸머>가 있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마담 X>를 법정드라마라 부르지는 않으니까. 변호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으니 언젠가 제대로 된 법정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취향과 유행이 바뀌어도, 할리우드가 법정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뭘까. 법적 다툼 자체가 추리의 기쁨을 제공해주는 측면도 있고, 정의가 이기느냐 마느냐를 지켜보는 증인의 특권을 관객에게 제공해줄 수도 있다. 관객에게 스크린은 현대의 콜로세움이다. 그들이 누구를, 무엇을 응원하겠는가. 이야기가 처음부터 많이 빗나갔다. 스크린 밖에서 진행되는 복수와 증오의 발언들에 관해 발언하고 싶었건만. 세계무역센터 테러 직후부터 부시 미국 대통령은 복수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공언했다. 그에게 할리우드 법정 드라마를 권한다. 진실을 뿌리까지 밝힌 다음 선고를 내려라. 무고한 희생을 막아라.

<조폭 마누라> 뜻밖 흥행몰이 가벼움이 아쉽다

추석 연휴 동안 <조폭 마누라>가 예상 밖으로 관객을 끌면서 이 기간 흥행1위를 기록했다. <조폭 마누라>는 지난달 28일 개봉한 뒤 지난 3일까지 6일동안 서울관객 39만2천명, 전국관객 143만8천명을 동원했다. 4일간 연휴가 계속됐다는 특별한 변수가 있지만 개봉 6일만에 전국관객 140만명을 동원한 건 한국 영화 사상 기록이다. 이 영화와 함께 개봉한 <봄날은 간다>는 완성도에서 <조폭 마누라>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같은 기간동안 서울관객 20만명, 전국관객 42만명으로 <조폭 마누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영화계는 <조폭 마누라>의 흥행 성공을 두고 뜻밖의 한국영화가 선전한 데 대해 반기면서도, 관객들이 너무 가벼운 영화만 선호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보이고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조폭 마누라>는 `웃기면 다'라는 막가파 코미디고 장르적으로도 조폭영화의 아류작”이라며 “관객의 구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들이 깊은 정서의 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영화보다 크게 인기를 끄는 가벼움이 아쉽다”고 말했다. 명필름 심보경 이사는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가볍고 썰렁한 개그에 익숙해진 10대 후반~20대 초반 세대들은 가벼움이나 유치함에 대한 거부감이 없이 그걸 오락으로 잘 즐기는 것 같다”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영화를 해야 할지 착잡한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심 이사는 이어 “이전 같으면 이런 세대는 한국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한국영화를 보러 오니까 긍정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영화가 댄스음악 일변도의 가요계처럼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 위주로 변해 다양성이 깨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영화가 텔레비전을 포함한 대중문화의 위세를 역이용하려는, 다른 대중문화의 코드를 받아서 상업적으로 업그레이시키는 움직임이 최근에 두드러지는 것 같다”면서 “이런 영화가 대세가 될 때 우리 사회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위상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조폭 마누라>의 박미정 프러듀서는 “작품이 좋아서 터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품 내부적으로는 정말 재밌게, 코미디이지만 진지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한다”면서 “그냥 웃고 떠드는 영화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이 새롭게 사회에 뛰어드는 의미를 담고자 했고 실제로 여성관객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박 프러듀서는 “이런 복합장르를 만드는 건 거의 막바지가 아닌가 싶다, <친구>나 <신라의 달밤>과 달리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마지막 차를 탄 것 같다”면서 “당분간 조폭 영화를 자제하는 바람이 일지 않을까, 우리 제작사에도 지금 그런 기획안이 들어 오고 있지만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테러참사가 할리우드 변화시킬까

“텔레비전으로 무역센터 빌딩의 폭발을 보았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엘살바도르 출신 친구가 내뱉은 첫마디는 `저건 전쟁이다'였다.” 뉴욕 사건 직후 필자가 다니고 있는 USC 대학은 정상수업을 하기는 했지만 학생들이 받았을 충격을 고려해 결석을 용인해주었고, 수업 시작 전 이번 참사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으로 충격을 완화·흡수시키려고 했다. 영화학과의 경우, 토론의 주제는 할리우드와 폭력, 또 이번 참사가 폭력과 액션에 대한 할리우드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인가란 질문으로 압축되었다. 앞서 인용한 학생의 말처럼 대부분의 미국학생들은 무역센터의 폭발과 붕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뛰어 달아나는 장면을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영화같다”는 표현 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고, 그런 비극적인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액션영화의 장면이라는 사실에 당황해했다. 태어나서 영화 이외엔 그런 일을 가까이 겪어본 적이 없으므로 더더욱 뉴욕의 사태가 비현실적이고, 또 초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데이너 폴런 교수는 “미국사람들은 미국 땅에서 전쟁을 겪은 적이 없다는 점에선 행운아들이지만 반면 이런 일들을 깊이있는 분석이 결여된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해왔다는 점에선 불행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에겐 영화의 이미지가 참사의 체험을 대신해왔으며, 미국인들에게 유일한 참사는 영화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는 설명했다. “폭력이 영화 이미지로 부적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폭력으로 현실을 다루는 것도 현실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문제는 무엇이 그런 폭력을 불러오는가를 분석하기보다는 그것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치장하는 데 주력해왔다.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우리들이 왜 그런 마치즈모(machismo, 남자다움)를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폭력을 불러오는가를 분석한 것과는 달리 요즘의 매스미디어는 분석적, 교육적인 기능을 하지 못해왔다. 우리는 미디어로 인해 깊이있는 이해의 기회를 빼앗겨왔다. 특히 중동지역의 정치에 대해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변할 것인가에 대해선 그리 긍정적인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할리우드의 역사가 말해주듯, 영화산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할리우드는 참사와 폭력을 이윤과 연결시켜왔으며 빌딩폭발이나 테러를 다룬 액션영화의 개봉을 연기하긴 했지만 결국엔 또 다른 방식으로 참사를 다루는 영화들을 만들어낼 것이란 전망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한동안 람보 식의 남성적인 영웅들이 인기를 끌다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자 폭력이나 참사를 스펙터클하게 다루는 액션영화로 바뀌었듯이 폭력을 스펙터클하게 꾸며내는 방식은 자제하겠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슬로베니아 출신 학자 슬라보에 지젝도 인터넷에 참사에 대한 글을 올려 뉴욕참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이제야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일상처럼 일어나는 삶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 폭발의 교훈이 있다면, 미국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다.” 로스앤젤레스/이남, 영화 칼럼니스트

수색 남자, 강릉 여자

● <봄날은 간다>에서 세월은 서울의 수색과 강릉을 잇는 길을 따라 흐른다. 수색은 내게 다소 낯선 곳이다. 내 발걸음이 수색에 닿아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도 수색에 대한 이미지는 있다. 중학교 동창들 덕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홍은동에 있었는데, 그 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들 가운데 수색국민학교- 그 학교가 지금도 있다면, 요즘 말로는 수색초등학교겠지- 출신들이 몇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색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 이미지는 가난이었다. 그 친구들 가운데 즈런즈런한 분위기를 내뿜는 아이는 없었다. 수색은 아마 가난한 동네였던 모양이다. 그런 가난의 분위기가 나를 그 아이들과 가깝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가난했으므로. 하긴,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수색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가 가난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살던 마포를 돌이켜보면, 비좁은 방과 불결한 변소, 장터의 아귀다툼, 잦은 정전과 단수, 자리끼나 요강 속의 오줌까지 얼리는 겨울 윗목 같은 것이 대뜸 떠오른다. 그 시절의 부자 동네였던 종로쪽에서 온 친구들도,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가난했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고전적 부자들의 거처로 애용되는 가회동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가난을 품고 있었는지를 나는 그 시절 그 동네 살던 친구 집에 놀러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니, 수색과 가난을 잇는 내 연상은 그곳이 서울의 끝이라는 내 알량한 지리 지식의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니, 수색에는 아직도 그 가난이 얼마쯤 남아 있는 듯하다. 물론 1970년대 초의 가난과는 다르겠지만. 스크린 속의 수색은 지방 소읍 같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며 서울이 겪은 그 어지러운 변화가 이 물빛 동네에는 인색하게 배분된 모양이다. 그걸 다행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일이겠지만, 영화 속의 수색이 나를 10대의 서울로 이끌며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 뭉클함의 한 자락은 달콤함이었다. 강릉 여자로 내가 처음 알게 된 사람은- 타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신사임당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관념 속의 여자였다. 육신을 가진, 그래서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처음 알게 된 강릉 여자는, <씨네21> 독자들이 아직 그 이름을 잊지 않았을, 조선희씨다. 나는 그녀를 1988년 초 안국동의 한겨레신문사 창간사무국에서 처음 만났다. 어쩌면 창간사무국이 아니라 그 부근 한국병원의 신체검사장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가냘픔이었다. 물론 그녀의 외양이 내면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내가 정식 사원으로 <한겨레>에서 일한 기간은 6년이었는데, 조선희씨는 그 시절 가장 가까이 어울린 동료 가운데 하나였다. 자기주장이 강한- ‘자기주장이 강한’이라는 표현은 흔히 ‘이기적인’ 또는 ‘독선적인’이라는 말의 완곡어로 사용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적어도 나보다는 덜 이기적이었고, 적어도 나보다 더 독선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뜻이다- 여자여서, 나는 그 시절 그 친구에게 늘 얼마쯤 주눅이 든 채 살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일했던 시기를 회상하는 것은 즐겁다. <한겨레> 시절이 내게는 직업적 열정으로나 주위 사람들과의 우정으로나 가장 뜨거웠던 때였던 것 같다. 1991년의 첫 주말에 나는 조선희씨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문학평론가 홍정선형이 선동해서 문인들과 기자들 몇이 어울린 나들이였다. 눈이 많이 온 날이었고,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조선희씨의 차는 눈길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며 질금질금 전진했다. 눈오는 산사에서- 바로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그 눈오는 산사 풍경이었다- 밤도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의 조그마한 육체가 내장한 주름 많은 기억들과 낙관적 열정에 새삼 감탄했다. <봄날은 간다>는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를 백안시하고 유럽을 청안시하는 미적 귀족들에게 이 가을날 찾아든 축복이다. 그림도 소리도 섬세하고, 이영애씨와 유지태씨의 연기도 익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왜 노골적으로 <스포츠조선> 선전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작품이 섬세했던 만큼, 관객의 미감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스크린 속 광고판의 이물감은 외설스러울 만큼 도드라졌다(이 부분도 정말 같은 감독의 솜씨란 말인가?). 그것은 관객에게 무례한 일이라 할 만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모욕당한 느낌을 받았다. 왜 내가 관람료 7천원을 내고 한 회사의 광고용 영화를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 광고판이 공영방송에 나온 것도 아니니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그게 불쾌하면 영화를 안 보면 그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도 그걸 봤을 때의 불쾌감을 털어놓음으로써,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영화팬들의 판단을 도울 권리는 있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

쇼라고? 치열한 생존싸움! <시리즈7>

<시리즈7>은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을 수차례 만들어낸다. 또 폭력·액션물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수시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적 `액션'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 좀체 받기 힘든 R등급(17살 미만은 부모 동반의 경우에 한해 관람 가능)을 받았다. 그렇다고 폭력의 선정성을 상업적으로 착취하려는 B급 영화는 아니다. 총격으로 피가 튀고, 칼날이 사람 몸을 헤집는 따위의 섬뜩한 장면을 쏟아낼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피한 흔적이 역력하다. 약간 상하는 비위를 감수한다면, 희귀하고도 끔직한 풍자극을 만나게 해준다. <시리즈7>은 극단적인 서바이벌 게임을 쇼처럼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가장했다. 시청률 1위를 기록중인 `적수들'이란 프로그램의 7번째 에피소드로, 방송사가 무작위로 정한 참가자들은 프로그램 진행자들로부터 무기를 건네받는다. 그 때부터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일종의 살인 게임이다. 성공적으로 최후까지 살아남더라도 상금 따위는 없다. 다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뿐이다. 출연 거부는 불가능하며, 24시간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이 방송된다. 인터뷰, 상황 재현극 등 텔레비전의 제작 관습을 빌어 미디어의 속성을 비꼬면서 드러낸다는 점은 <트루먼쇼>나 <에드TV>와 비슷하다. 하지만 웃거나 감상에 빠질 틈이 없다. 미디어 비판을 넘어 사람 속에 숨어있는 동물적 본능을 공포스럽게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스타 도온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다. 영화는 도온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던 다른 참가자를 순식간에 쏴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내 아기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게 없다”는 그는 능숙하게 살인을 이어가며 우승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성스러운 것으로 추앙받던 모성애는 이렇게 `추락'한다. 넉넉한 중년여자의 표정을 한 코니는 응급실 간호사이자 독실한 신앙인이다. 하지만 게임에 초청된 그는 악마같은 나이팅게일로 변한다. 고통을 덜어주던 주사기를 흉기로 사용하고, `게임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 힘을 모으자'고 참가자들을 꼬득인 뒤 잔혹하게 살해한다. 더 끔찍스러운 건 이들을 지켜보는 시선이다. 시청률 1위가 증명하듯 사람들은 이 살인게임에 열광하고, 프로그램 진행자나 카메라맨들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져도 방송에 차질을 빚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와중에 로맨스가 등장한다. 고환암으로 죽어가는 전위적인 예술가 제프는 도온의 옛 애인이며, 이들은 아직 서로를 잊지 못한 상태다. 살기 위해 연인을 죽여야하는 이들에게서 어쩐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 커플의 운명이 떠오른다.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의 시나리오를 쓴 다니엘 미나핸이 각본을 쓰고 감독했다. 27일 개봉.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