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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신진 여성작가 3인] <달로>의 한유주

실재가 아니었던 실재와, 실재가 아닌 실재와, …그런, 되짚어 돌아가고만 싶은, 지난 세기와, 여자들이 종아리까지 긴 양말을 신었던 시대를, 손바닥에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눌러 끄고, 끝없이 그물처럼 펼쳐진 어느 길을 따라서, 긴긴 밤을 지새우며, 세월에도 빛바래지 않은 누군가의 최초의 기억들을 찾아…. _<달로> 중에서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언어가 미끄러진다. 허공을 맴도는 단어들, 의미에 정박되지 않는 문장들, 응집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문단들. 한유주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편하며, 종종 난독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문장은 읽어내림과 동시에 기억에서 휘발되기 일쑤고, 문단과 문장, 단어를 거슬러 올라가 반복해 읽는 과정을 거듭해야 한다.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달로>는 각각의 작품이 사실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잠언에 가까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로, 달로, 세계는 현재를 그대로 간수하려는 오랜 습관이 있다.”(<달로>) “지구는 하나의 푸른 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이면 신들은 지구를 굴리면서 공놀이를 했다.”(<죽음의 푸가>) 하나의 몸짓으로 수렴되지 않는 단어들의 윤무 속에서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들은 행간을 떠돌며 이미지의 맥박을 느껴야 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을 하나 정도 짚어보자면 바로 자기분석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생각하는지가 너무나 궁금했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쓰는 것이었다. 인과관계나 서사적인 요소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지금의 글쓰기로 이어진 것 같다.” 그래서 한유주의 글에는 우리가 흔히 소설에 기대하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매끈한 서사의 흐름에 독자를 흡입하는 대신, 역으로 몰입 자체를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이인성의 평을 빌리자면, “체질적으로 이야기에서 자유로운” 한유주의 작법은 넘쳐나는 “가짜 이야기들”에 대한 반작용의 지점에 있다. 전파를 타고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수신되는 메시지들, “세계를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하는 폭력적인 이야기들. 삶을 간결하게 재단해 틀에 집어넣는 것을 그는 거부한다. “적어도 내 삶은 기승전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거기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지 않나. TV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뻔하면 쉽긴 하지만, 너무 설명을 하려 드니까.”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채워 넣는 것은 온전히 읽는 자들의 몫이다. 예컨대 <달로>는 우주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기억과 역사, 신화를 경유한 상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각자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을 정서를 환기하고, 촉발한다. “달은 정말 흔해 빠진 상징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딱 하나의 달을 두고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이 있고, 각자 부여한 의미가 있지 않나.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것인데, 독자들의 편지를 보니 그들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느꼈더라. 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고.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가장 기쁜 반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말줄임표 역시 그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빈 공간을 채워 넣을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 일방향처럼 보이던 독백은, 백지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독자에게 수신받기보다는 끊임없이 발신할 것을 촉구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탐닉했다는 한유주이지만, 등단은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문예창작론 수업을 듣던 중 기말과제로 소설을 완성하게 됐고, 친구의 권유로 문예지에 응모한 것이 바로 등단으로 이어졌다. “당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얼떨떨했다. 지금은 그래도 덜하지만,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작가라는 자의식도 거의 없었다. (웃음)”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스스로는 “남들이 새롭다,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그렇지 않다”고 털털하게 이야기하는 그는 “내가 10년 뒤에도 글을 쓰고 있을까”를 곰곰이 자문하는 타입이다. 의미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자신의 작품처럼, ‘작가’라는 타이틀의 무게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주는 매혹에 더욱 관심이 많다. “글을 쓰다보면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다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저 아, 내가 정말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지나갈 때, 그게 너무나 좋다.” 대학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아마도 졸업 뒤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직장에 취직해 밥벌이와 글쓰기를 병행”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작정이고, 운이 좋다면 대륙의 공기 속에서 첫 장편이 탄생할 것이다. “대단한 걸 써야지, 하는 마음은 없다. 그냥 쓰는 것뿐이다. 10년쯤 뒤에 누군가가 한명이라도 내가 쓴 책을 읽어준다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외신기자클럽] 세계 최고 영화도서관의 몰락

영화도서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런던에 있는 영국 필름인스티튜트(BFI) 국립도서관은 역사적인 영화잡지와 신문자료, 스틸사진, 영화제 카탈로그와 시나리오에다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에 관한 5만여권이 넘는 책을 소장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도서관일 것이다. 1934년에 “국내외의 제작, 상영, 배급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일에 관한 정보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설립된 BFI 국립도서관은 과거 70년 동안 증가하는 수집목록을 적재하고 공적 접근성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다섯번은 자리를 옮겼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곳의 독서실에서 아시아영화를 연구하며 5년을 보냈다. 도서관은 소수정예의 지식을 갖춘 인간들로 가득했다. 매주 월요일에는 <버라이어티>에서 최신 영화평들을 읽으려는 경쟁이 대단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날에는 그저 입장하기 위해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할 정도였다. 월드와이드웹 시대 이전, BFI 국립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영화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1930년대부터 시작한 종이 인덱스 카드의 상호참조 시스템을 사용했고, 1980년대에는 도서관 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수작업으로 입력됐다. 일반인들은 도서관 독서실에 있는 단말기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관료주의와 두려움으로 인해 BFI는 1990년대에 더 많은 대중이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온라인으로 가져갈 수 있는 기회들을 놓쳤다. IMDb의 분산된 접근법과는 반대로, BFI는 품질을 유지해주는 식견이 넓고 꼼꼼한 관내 팀이 자료를 모은다. 2002년 정도까지도 BFI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영화 데이터베이스로 자리잡고 있었다. 1996년, 나는 서초구에서 4주를 보냈다. 한국영상자료원과 그곳의 열람실에 걸어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잠기지 않은 캐비닛에 있는 VHS 테이프들을 갖다가 누구나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비디오 모니터들이 있는 걸 보고서 충격받았다. 런던에서 관람은 엄격하게 규제되어 약속을 잡고 지하에 있는 방에서 시간당 돈을 지불하고 봐야 했다. BFI 도서관에서 특정 영화에 대해 읽어 내려가며 며칠을 보내면서, 결코 쉽게 그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술궂은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영화에 관해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과 그 의견에 대해 들을 만한 자격밖에 못 갖춘 사람들이 있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과도 같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최근 180억원을 들인 상암동 센터로 위치를 옮겼다. 그곳엔 일반인들이 무료로 DVD를 볼 수 있는 도서관 독서실에 26개의 단말기가 있다. 연말까지 자료원은 900편의 한국 장편영화를 비롯해 700편의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도서관 내에 디지털 스트리밍할 수 있도록 준비 완료할 계획이다. 이번 여름 BFI 도서관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었다. 5월과 6월은 학생들이 시험에 집중하는 때이기 때문에 한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수의 감소가 현저하다. 영화도서관과 자료원들은 대중이 구글, IMDb, 위키피디아 등으로 돌아서면서 영화사 기록에 대한 자신들의 독점권을 잃었다. 한국, 홍콩, 대만의 영화도서관들이 이런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반면, BFI 도서관은 2008년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료 회원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BFI 도서관은 현재 위치에서 개방을 유지할 만큼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새로운 사옥도 못 찾고 있다. 인터넷이 세계 최고의 영화도서관을 물러나게 한 게 아니라, 그 도서관이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시간이 소중하다

2005년 11월 어떤 인터뷰에서 이누도 잇신 감독은 60년대 청춘의 이야기, 모녀의 이야기, 고양이를 기르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앞의 두 작품은 올해 4월과 5월 각각 <황색눈물>과 <비잔>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뒤의 고양이 이야기는 현재 <쿨쿨 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동시에 세편을 구상하는 감독의 심보란 무엇일까.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이누도 감독은 2005년에도 <터치> <우리 개 이야기> <메종 드 히미코> 등 3편을 연출했고, 2004년과 2003년에는 각각 두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촘촘한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풍부한 상상력과 넘치는 창작력? 하지만 이누도 감독은 의외로 너무도 싱거운 답변을 남긴다. “그냥 상황에 따라 되는 대로 찍고 있어요.” 실제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촘촘함과 동시에 불균질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가 부드럽게 연결되는가 싶더니 <터치>의 풋풋함은 다소 모나 보이고, 똑같이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사후의 영광>과 <금발의 초원>도 이야기를 버무린 색채가 다르다.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묶어주는 주제나 정서, 태도는 있지만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한 작품들도 가끔 눈에 띈다. 특히 나가사와 마사미에 반해 연출한 <터치>. 그는 너무도 솔직하게 “나가사와 마사미가 출연한단 소리를 듣고 바로 연출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말 상황이 그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황색눈물>은 이누도 잇신 감독이 어릴 적 보았던 TV드라마가 원작이다. 만화 원작을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누도 감독은 만화보다 드라마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했다. 어릴 때 느꼈던 TV드라마의 감동이 너무 컸다며. 그래서 <황색눈물>은 이누도 감독의 ‘영화적 색채’보다 그가 어릴 적 가진 꿈의 향내가 더 강하다. 60년대 도쿄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삶 속에 그의 열정이 묻어난다. 하지만 꿈의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게 쉬었을까. 게다가 만화 <황색눈물>은 요즘 젊은이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40여년 전 작품이다. 아마 이 영화의 제작을 제이스톰이 하지 않았거나, 출연배우가 인기 아이돌 그룹 아라시가 아니었다면 이누도 감독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다시 찾아온 좋은 상황. 영화의 한국 개봉차 방한한 이누도 감독을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릴 때 <은하테레비소설>에서 <황색눈물>을 보고 영화화를 다짐했다고 했다. 당시 그 작품은 어떤 느낌이었나. =그때 나는 14살이었다. 20대 전반의 남자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그냥 좋아 보였다. 동경했달까. 특히 1960년대는 일본이 경제성장에 몰두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다. 잘못된 것에 눈을 감고,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건 희생해도 된다고 믿었다. 만화도 팔리는 만화만을 강요했고. 그런데 에이스케라는 주인공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만화를 계속해서 그린다. 그 자세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영화의 주인공 에이스케를 샘 페킨파 영화의 주인공처럼 봤다는 멘트가 있더라. =내가 중학생 무렵에 가장 많이 본 영화가 샘 페킨파의 영화다. 당시가 샘 페킨파가 가장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등을 좋아했다. 페킨파 영화에는 시대가 변해도 자신은 변하지 않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와일드 번치>도 근대화해가는 미국에서 혼자 변하지 않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인물이 나온다. 그런 주인공이 에이스케와 비슷하게 보였다. 에이스케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니까. -영화에는 60년대의 모습이 기록 화면으로 삽화처럼 들어가 있다. 일본의 60년대를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나. =일단 60년대라고 하면 매우 신기하다. 그리고 그립다. 당시에는 미래가 정해져 있었고, 확실히 보이는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그쪽을 향해 나아가면 좋아진다고 누구나 말했다. 그게 당시 일본인들의 마음가짐이고 행동방식이었다. 건강하고, 즐거운 시기였다. 그때 내가 10살 정도였는데 실제로도 경제가 좋아졌다. 돈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텔레비전도 생기고. 하지만 이는 60년대 전반까지의 일이다. 후반이 되어 사람들은 일본의 밝음 뒤에 감쳐진 문제를 알아차렸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1970년대가 되기 이전부터 경제성장 뒤편의 문제들이 겉으로 드러났다. 나는 영화에서 그 전후의 변화를 담고 싶었고, 그래서 올림픽 한해 전인 63년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60년대의 당신은 매우 어렸을 텐데, 그런 변화를 실제로 느꼈나. =내가 1960년생이라 도쿄올림픽 때에는 4살이었다. (웃음) 하지만 변화는 실감했다.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일본에는 공해문제가 많이 제기됐다. 이전에는 경제가 발전하면 모든 게 다 좋아진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생긴 거다. 공장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주변 사람들과 농민들은 피해를 봤다. 미나마타병 같은 이상한 질병도 생기고. 또 당시에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데 주변에 기지가 많았다. 베트남 반전운동도 한창이었고. 그런 게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또 내가 <황색눈물> 드라마를 본 게 1974년이었는데 그때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모두 실패해서 젊은이들이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느낌이랄까. 젊은이들이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는 그런 시대가 돼버린 거다. 많은 걸 시도해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결론. -영화 주인공들은 시대를 일부러 거스른다기보다 그냥 둔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둔감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멈췄다는 느낌이다. 모두 열심히 달리고, 좋은 목표를 보고 가는데 영화의 네 청년은 그걸 보지 않고 어딘가에서 내려버렸다. 자기들만 마음에 드는 게 있어서 다른 길을 가는 상황이다. 사실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웃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뭔가 큰 의미가 아니라는 느낌이 좋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멈춰 서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게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달리고 있으면 앞밖에 볼 수 없는데, 잠시 멈춰 서면 다른 게 보인다. 그건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거다. 그런 시간, 공기를 중요시하고 싶었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다시 원작 드라마를 보았을 때 14살 때와 똑같은 부분에서 감동받았다고 했다. 그게 어떤 부분인가. =영화에 들어 있는 장면은 다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웃음)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에이스케가 길을 가다가 쇼이치의 노래자랑 방송을 듣는 것. 땡 소리와 함께 떨어지지 않나. 드라마랑 똑같다. 또 마지막에 에이스케가 아이한데 편지를 주는 장면도 좋다. 드라마는 좀더 담백한 느낌인데 영화에선 좀더 감정을 고조시켰다. 그래도 거의 똑같다. -영화에는 만화의 원작자인 나가시마 신지의 ‘사소설 경향’이 묻어난다. 시대를 매우 개인적인 시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각본은 드라마의 각본을 썼던 이치가와 신이치가 썼는데, 정확히 원작은 만화인가, 드라마인가.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 그대로다. 고치지 않았다. 다섯 시간짜리 드라마를 단지 짧게 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웃음) 사실 내가 드라마를 봤을 때 다시 보고 싶다고 느낀 장면만을 영화에 넣은 거다. (웃음) 기본적으로는 그걸 해보고 싶었다. 만화보다 드라마를 우선했지만 드라마나 만화나 영화의 테마는 비슷하다. 단 만화는 1968년에 시작해서 70년대에 끝난다. 드라마는 1963년에 시작하지만. 만화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공동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혼자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메시지는 드라마에서도 같다. 드라마에서는 에이스케가 마지막에 방에서 혼자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건 개인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거다. 아파트 안에서 혼자. 함께 모두를 위해 싸운다는 정치성에 대한 불신감이 만화나 드라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모 인터뷰에서 <황색눈물>은 60년대 일본에 대한 안티지만, 공투(共鬪)하지 않고 공명(共鳴)한다고 말했다. 이는 감독의 전편에 흐르는 주제와 관련있어 보인다. =공명할 순 있지만 같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나의 전 세대들은 무언가에 대해 함께 싸웠지만 결국 그 전 세대와 똑같아져버렸다. 그들이 운동했던 방식에 대한 반감이다. 싸웠던 상대와 똑같아지는 것, 그건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번 기대했었는데, 실망했다. 저항했던 조직과 결국 똑같은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 너무 많은 힘을 빼앗기고, 거기에서 또 분열이 일어나고. 결국 분노의 싸움이 되고, 그 조직은 사라지고, 이전 조직에 흡수되고. 그런 과정을 너무 많이 봐왔다. 그런 실패는 이제 더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웃음) 그런데 이런 얘기가 영화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웃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케와키 지즈루, <터치>의 나가사와 마사미처럼 <황색눈물>에도 아라시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보인다. 처음 아라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의받았을 때 그들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고 했는데, 어떤 느낌이었나. =일단 뭐를 하는 애들인지 몰랐다. 그래서 콘서트에 가봤다. (웃음) 느낌은 너무 좋더라. 다섯명 멤버들 사이가 매우 좋아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 가서 이야기를 해봤는데,‘아, 이 녀석들이라면 뭐를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를 할까, 생각하다 예전부터 영화화하고 싶었던 <황색눈물>을 떠올렸고, 얘들이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영화화하자고 말한 거다. -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쇼와시대와 딱 맞는 느낌이지만, 마쓰모토 준을 쌀집 청년으로 캐스팅한 건 의외라고 생각했다. 원래 화려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인데. =니노미야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쇼와 느낌과 맞다고 생각했다. <황색눈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좋다며 데려갔다. 결국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 촬영했다. (웃음) 마쓰모토가 연기한 유지는 극에서 객관적인 인물이다. 4명의 청년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존재가 필요했고, 근로 청년을 넣자고 생각했다. 당시엔 집단취업으로 도쿄에 올라오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화려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라도 반대의 역할을 연기하면 오히려 더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쿨쿨 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를 포함해서 올해 벌써 세 작품이다. <비잔>에 대한 일본의 평을 보니 이누도 작품답지 않게 눈물이 뜨거워졌다고 하더라. 쿨하지 않고 제대로 울리는 영화라고. 그간 어떤 변화가 생긴 건가. 또 다음 작품을 결정할 때는 어떤 기준으로 하나. =변화? 그건 잘 모르겠다.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웃음) 기본적으로는 내가 하려고 생각했던 영화와, 의뢰받았지만 거절했던 영화 중에 다시 하자고 결심한 영화를 순서대로 찍는다. (웃음) 거절했던 영화도 다시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면 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그래도 영화를 찍는 게 반년 정도 시간이 소요되니까, 영화에 대한 나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이 최소 반년은 지속될 수 있는 작품만 한다. <비잔>과 <쿨쿨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도 의뢰받은 작품들이다. 그런 점에서 <황색눈물>은 좀 특이한 영화였다. 그건 단지 내가 예전에 봤던 드라마를 재연해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웃음) 어떤 이들은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들면 자신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넣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내가 14살 때 보았던 드라마 그대로다. 대사도 똑같고, 사건도 다 똑같다. 새로 만들어서 넣은 대사가 한줄도 없을 정도다. 그냥 내가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웃음)

스크린을 강타하는 오색 폭풍

“자니스는 일본 남자배우계의 보물창고다.” 일본의 영화감독 이누도 잇신의 표현처럼 일본의 대표적인 남자 아이돌 연예소속사 자니스사무소는 일본 남자배우계의 끊임없는 물줄기다. 팀 결성과 CD 데뷔 이전의 연습생이 활동하는 자니스주니어를 바탕으로 다양한 짝짓기로 여러 형태의 조합을 구성하는 스타 양성 과정은 자체가 하나의 탄탄한 시스템. 노래와 댄스가 주요 활동 분야지만 드라마와 영화, 연극까지 해내며 아이돌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는 아이돌도 꽤 많다. 1999년 결성돼 올해로 데뷔 9년째를 맞은 댄스그룹 아라시(嵐)도 아이돌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하고 있는 그룹. 2001년 11월부터는 자니스사무소에서 설립한 아라시의 개별 레이블 제이스톰 아래서 그들만의 노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황색눈물>은 <피칸☆치 LIFE IS HARD 하지만 HAPPY> <피칸☆☆치 LIFE IS HARD 그래서 HAPPY>에 이어 아라시의 멤버 다섯명이 모두 함께 출연한 세 번째 영화. 제작은 이전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제이스톰이다. 1963년의 도쿄를 살아가는 다섯 청춘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그래서 이누도 잇신의 영화라기보다 아라시의 영화에 더 가깝다. 이누도 감독은 나가사와 마사미의 풋풋함에 취해 연출을 다짐했던 <터치>에서처럼, 이번에는 아라시 다섯명의 젊음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 중학생 시절 보았던 TV드라마 <황색눈물>에 대한 이누도 감독의 꿈이 아라시의 다섯 색깔로 채색되어 표현된다. 실제로도 사이가 매우 좋아 멤버끼리 서로 기념일을 챙겨주는 ‘아라시의 분위기’는 영화에 그대로 묻어난다. 에이스케를 연기한 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아라시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한방에서 같이 지냈다면 컬쳐 쇼크를 받았을 거”라고. 그들의 우정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세계에 폭풍(嵐)을 일으키다’는 뜻을 갖고 태어난 그룹 아라시. 아이돌의 전형적인 이미지의 빈틈으로 내비치는 새롭고 신선한 모습이 반갑다. 일본의 최고 아이돌 그룹이자 이제는 어엿한 배우. 니노미야 가즈나리, 마쓰모토 준, 사쿠라이 쇼, 아이바 마사키, 오노 사토시. 그 다섯 청춘을 소개한다. 팔딱거리는 언더그라운드 에이스케 역의 니노미야 가즈나리 “현재 일본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배우다.” TV드라마 <한도쿠>에서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함께 작업한 영화감독 쓰쓰미 유키히코가 남긴 말이다. 아이돌 스타를 배우로서 가장 신뢰한다니. 조금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니노미야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임이 분명하다. 2006년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출연해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으며, 그 영화의 프랑스 개봉일에 맞춰 발행된 프랑스의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선 그의 얼굴이 담긴 영화 스틸이 표지를 장식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아이돌 스타라니. 니노미야의 현재 위치는 이 위화감만큼 예측 불가하고, 그 신선함만큼 긍정적이다. 1996년 중학교 2학년 때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아라시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TV드라마, 영화 등에 많이 출연하며 주목받았다.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한 몸매라 ‘쇼와시대의 냄새’가 느껴지는 그는 전통적인 일본 사람의 이미지다.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여 주로 고등학생, 그것도 17살의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지만(그래서 그는 ‘영원한 17살’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외모는 왠지 모를 애수를 전하기도 한다. 조금은 굽은 듯 보이는 어깨와 반달형 눈매는 서늘한 상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니노미야의 첫 영화 주연작인 <푸른 불꽃>을 연출한 니나가와 유키오는 그에게 “등에 애수가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푸른 불꽃>의 의부를 살해하는 역할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사이고.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 사이에서 니노미야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또 한번의 쇼와. <황색눈물>의 에이스케는 그래서 딱 니노미야였다. 아동만화가를 꿈꾸지만 팔리는 만화만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책상 앞에 정좌하고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펜을 움직이는 청년은 니노미야여야 했다. 뒤에서 보이는 겹친 그의 발바닥은 에이스케란 인물을 절묘하게 그려낸다. “감독님이 지시한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웃음) <삼가 아룁니다, 아버님>(TV드라마)에서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나는 정좌하는 장면이 많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가 연기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어떤 배우는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한 다음,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대본을 읽는다고 하더라. 에이스케가 책상 앞에 앉는 것도 만화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거다.” 다들 그를 쇼와시대와 연결하려 하지만 본인은 정작 에이스케를, <황색눈물>을 현실의 이야기라 받아들였다.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 그게 내겐 제1조건이었다. 지금은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그때는 매우 큰 행복으로 다가갔다. 무엇이 정말 즐거운지를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산다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아웃도어보다는 “인도어(Indoor)”, 오버그라운드보다는 “언더그라운드”. 니노미야는 자신의 취향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언더그라운드’라고 설명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순진한 병사 사이고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보다는 니노미야의 색채가 더 진하게 묻어난 인물이다. “사람들은 사이고 같은 병사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체질이 언더그라운드랄까. 그냥 그렇게 되더라. 감독님이 자세한 건 지시하지 않으셨으니까 (웃음) 하지만 어차피 전쟁은 정상이 아니지 않나.” 평소엔 게임기를 달고 다닐 정도로 아이답지만, 연기에 대해선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니노미야 가즈나리. 역시 언더에 앉아 있는 아이돌 스타의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화통, 유쾌한 형아 쇼이치 역의 아이바 마사키 ‘쇼와시대에 저런 스타일리스트라니!’ <황색눈물>에 아이바 마사키가 나온다고 했을 때 아라시의 팬들은 아이바의 몸매를 떠올렸다. 176cm에 60kg, 마쓰모토 준과 함께 멤버 중 가장 키가 큰 그는 패션 감각도 좋아 역시 마쓰모토와 함께 ‘모델 콤비’로 불린다. 선글라스와 페도라, 꽃무늬가 들어간 셔츠는 그가 쇼와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기본 옵션. 대책없어 보이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만은 어디에도 버리지 못하는 쇼이치는 아이바 마사키의 옷을 입고 나서야 쇼와시대의 도쿄로 상경할 수 있었다. 노란 염색 머리와 붉은 입술. 1996년 중학교 2학년 때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아이바 마사키는 멤버 중 이미지가 가장 컬러풀하다. 화려해서 거리감을 갖게 하는 요란한 스타와 달리 친밀감이 느껴지는 색채들. TV 오락 프로그램 <아이 러브 SMAP>를 보고 “SMAP와 농구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예계 데뷔를 결정한 만큼 농구 코트의 활기와 오락 프로그램의 유쾌함도 함께 묻어난다. 호랑이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동물과 친하고, 기쁠 때에는 “텐션이 무한대로 올라갈” 정도로 화통하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천재! 시무라동물원>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해 아이들에겐 ‘이웃집 형’의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그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기르고 있다. 1998년 아라시 결성 이전부터 <신주쿠 소년 탐정단>의 주연을 맡으며 영화를 시작한 아이바는 연극 <제비가 있는 역>, 드라마 <우리들의 용기 미만 도시>에 출연하며 연기를 닦았다. 웃기도 잘 웃지만, 울기도 잘해서 <24시간 텔레비전>의 마지막 방송과 <제비가 있는 역>의 첫 커튼콜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기쁨과 슬픔, 감정 표현도 솔직한 그에게 연기란 “다음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 그래서 아마도 그는 <황색눈물>의 쇼이치를, <피칸치…> 시리즈의 슌을 사랑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쇼이치는 원래 더 바보 같은 인물이었다. 감독님과 이야기하며 장면마다 조금씩 바꿨지만. 슌도 갑자기 대학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 동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다. (웃음) 시시한 인물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나름대로 열심히,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거다.” 아이바는 지금 하나의 사이클을 그리고 있다. 영화와 콘서트, 쇼 버라이어티를 돌며 자신의 꿈을 “킵(keep)하고” 있다. “긴 시간을 들여,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게 매력”인 영화를 하면서는 여유를 느꼈다고 했다. “내 꿈은 하나, 하나씩 일을 제대로 하는 것.” 패션 리더인 아이바가 쇼와시대에서 배운 교훈도 아마 여유가 아닐었을까. 한 바퀴를 돌아온 질문에 아이바 자신의 답변을 붙여본다. “(어떤 일에 대한) 자세와 노력은 모두 다 내게 다시 돌아온다.” 보기만 해도 즐거운 멜로디 유지 역의 마쓰모토 준 아이바 마사키 못지않게 쌀집 청년(<황색눈물>)으로 분하는 마쓰모토 준의 모습도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커다란 눈과 진한 눈썹, 순정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느낌의 캐릭터는 화려하고 눈부셨으니까. <고쿠센> <꽃보다 남자> <너는 펫> 등, 실제로 그가 출연한 작품도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경우가 많다. 반항하는 학생들의 리더이자 교사를 사랑하는 사와다, 학교의 4대 천왕처럼 군림하는 도묘지, 연상의 커리어우먼 품에 안겨 강아지가 된 다케시. 그는 그냥 스타였다. 아라시 멤버 중 유일하게 오디션을 보지 않고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사람 역시 그다(자니즈사무소쪽은 마쓰모토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바로 입소를 확정했다). 확실한 스타성이랄까. 그는 일본 남자로는 최초로 패션지 <마리클레르>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스타라는 표현은 많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 마쓰모토 준도, 그의 침묵은 종종 팡파르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평소 나는 조용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활동적이라고 하더라. (웃음) 나라는 인간의 다른 부분을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 이제는 항상 내 안의 모습이 겉으론 어떻게 보일지 생각한다.” 마쓰모토에게 <황색눈물>의 유지는 침묵으로 침묵을 깨는 도전이었다. 원작 TV드라마에는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 유지는 꿈만 쫓는 4명의 청춘들과 달리 열심히 노동하는 청년이다. “당시 대다수 젊은이들은 일본이란 나라가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지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다. 다른 네명의 청년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인물이랄까.” 그래서 그는 “리얼리티”를 고민했다. 배우의 편의를 위해 준비된 가벼운 쌀가마를 사양하고 10kg의 쌀부대를 직접 날랐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의 발동작이 거짓없어 보이기 위해. 콘서트 구성과 연출에도 관심이 많은 마쓰모토는 아라시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콘서트 구성에 참여했다. 1998년 자니스주니어의 콘서트가 첫 작품. 원래 멤버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콘서트를 구성하는 자니스의 시스템이지만, 마쓰모토는 의견을 내는 데 더 적극적이다. 일명 ‘자니스무빙스테이지’라 불리는 객석 위를 이동하는 투명한 무대는 2005년 여름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마쓰모토가 제시한 아이디어다. 화려한 미적 감각으로 재밌게 즐긴달까. ‘enjoy’란 말을 가장 좋아하는 그는 세심하고, 능숙하게 일에 임한다. “프로의식이 강하다”는 게 주변 스탭들의 평. 올해 마쓰모토는 ‘스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2 리턴스>와 영화 <나는 누이를 사랑한다>에 출연했고 동시에 노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드라마 <밤비노!>와 영화 <황색눈물>에 출연했다. ‘살림을 재건할 수 있을지’ 망설이는 네명의 동료들에게 외쳤던 “가능하다”는 말은 “좋아, 힘내볼까”라고 다짐하는 밤비의 모습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서투르지만 힘찬 동력. 2007년 한해에 벌써 네 작품이나 마친 열정은 밤비의 것일까, 스타의 것일까. 그는 지금을 “현재까지 느낀 것을 표현하는 시기”라고 표현한다. “전부 발산해서 빈 공간이 되는 것도 한번쯤 해보는 게 중요하다”며. 부드러운 것이 좋아 류조 역의 사쿠라이 쇼 ‘선생님으로 삼고 싶은 아이돌’, ‘인텔리처럼 보이는 아이돌’. 잡지 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사쿠라이 쇼는 항상 똑똑하고, 지적인 아이돌 스타로 뽑힌다. 게이오대학을 쉬는 기간 없이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최근 늘어나는 ‘대학생 아이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1999년 히로스에 료코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화제가 됐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대학생 신분이다. 메이지대학의 야마시타 도모히사, 와세다대학의 데고시 유야 등. 1995년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자니스사무소에 들어가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시험기간에는 하던 일을 잠시 쉬었다. “시험범위 중 못 본 부분이 있으면 불안해서 벼락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공부에 대한 사쿠라이의 생각. 2006년 10월부터는 보도 프로그램 <뉴스 제로> 캐스터를 맡아 환경문제, 북한문제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황색눈물>의 류조는 유쾌하다. 속이 텅 빈 듯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다 예술가”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쾌활하게 울린다. 소설의 표지만 그리면서도 소설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그래서 밉지 않다. “류조만 조금 다른 공기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꿈을 향한 절실함보다는 그냥 작가에 대한 동경.” 그래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연기 톤을 찾기에 힘썼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그냥 간사이 사투리’라고 말했던 단어를 그는 ‘교토 사투리’라 판단했고, 그걸 류조의 캐릭터로 사용했다. “교토에는 일본의 수도가 도쿄가 아니라 교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교토 사투리는 어린아이들에게도 경어를 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류조라는 인간이 떠올랐다.” <황색눈물>의 류조는 세상을 모르고 사랑에 빠졌던 <허니와 클로버>의 다케모토, <키사라즈 캐츠아이> 시리즈의 밤비와 일면 비슷해 보인다. 시대에 눈을 감고 잠시 정지해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이번엔 순정만화 속 어수룩함이나 펑크 느낌의 씩씩함이 없다. 부시시한 머리카락과 자르지 않은 수염이 쾌활함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배우, 어딘가에 또 다른 챕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단서처럼. 건강하고, 동안의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사쿠라이는 ‘아라시의 엄마’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잘 보살피는 상냥한 성격 탓에 그렇게 불린다. 멤버인 니노미야 가즈나리, 아이바 마사키, 또 다른 자니스사무소의 댄스그룹 간자니 에잇의 요코야마 유타카와 함께 간 낚시여행에서도 그는 항상 뒷정리하는 모습만이 사진에 담겼다. 동료 친구들을 초대한 대규모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기꺼이 성공시킨다. 공부, 연기와는 달리 사람을 좋아하고, 추억을 즐기는 모습.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무대에서도 줄곧 뮤지컬만 공연해왔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뷰티풀 게임> 등. 즐거운 음악 시간이랄까. 이런 선생님이라면, 청춘을 배워도 좋겠다. 빈틈을 그리는 재능 케이 역의 오노 사토시 빈틈. 그림을 그리다 여자에게 반하는 케이(<황색눈물>)의 얼굴엔 순간 백지로 변하는 표정이 있다. 친구의 엄마뻘 되는 여자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루(<피칸치…>)의 입술은 삐죽 나와 현실과 작은 마찰을 일으킨다. 음악 오락프로그램 <우타방>에 나와 선배인 SMAP의 나카이 마사히로에게 던지는 대담한 발언은 곧 돌아올 기습 공격에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된다(이는 모두 대본상 짜인 상황이다). 일명 ‘하극상 콩트’라고 불리는 드라마. 아라시의 <우타방>에서 오노 사토시는 항상 실소의 공격자가 된다. 그가 가진 빈틈은 일견 코미디가 되어 웃음을 만들지만, 그는 사실 노래로, 그림으로 그 공간을 채우길 더 즐긴다. 그룹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인 오노 사토시는 팀 내에서 노래가 가장 뛰어나다. 춤도 능숙해 자니스주니어 시절부터 선배들한테 “신입 주니어들은 오노 뒤에서 춤춰”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춤과 노래를 단지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정해진 안무와 멜로디 안에서 빈틈을 찾아 자유롭게 즐기는 게 더 좋다고. <황색눈물>을 찍으면서도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연기를 했다. “다른 멤버들은 간사이 사투리나, 기타를 맹연습해야 했지만 나는 딱히 그럴 건 없었다. 감독님도 기본적인 것만 말해주시고 나머지는 스스로 만들어가도 좋다고 하셨고.”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영화에서 화가 지망생 케이를 연기한 그는 실제로도 그림을 그리는 청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그린 <드래곤볼>의 그림을 보고 경쟁심에 시작한 그림이 지금은 꽤 능숙한 솜씨를 자랑한다. 영화에 보이는 그림도 절반은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엷게 그려진 그림을 받았다. 세트를 준비하는 시간에 기다리면서 할 게 없으니까 그 그림 위에 덧칠을 했다. 감독님은 리얼한 그림을 원치 않았는데, 점점 리얼하게 돼서 안 돼, 라고 했지만. (웃음)” 1994년 중학교 2학년 무렵, 엄마의 권유로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오노 사토시는 10년이 넘게 춤, 노래, 연기와 함께하며 말이 늘었고, 여유가 생겼고, 꿈이 커졌다. 데뷔 초기엔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수면 시간에 “연예계가 정말 이런 곳이라면 도망치고 싶다”고 말했지만, 2002년 10월엔 단독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아라시 디스커버리>를 시작했고, 2005년 8월엔 이란 솔로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는 <아오키씨 집의 부인>으로 연극을 시작해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시대극 <센고쿠푸> 등에 출연하며 무대 경력도 쌓아가고 있다. <황색눈물>에 대한 소감은, “5명이 모여 영화촬영을 하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 쉽게 잡히지 않는 그의 코믹한 미소가 사실 매우 진지한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빈틈 안에 녹여놓았다.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 여기는 스누피 3차원 미술의 세계!

오는 6월29일~9월16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스누피를 테마로 한 미술, 건축, 패션, 생활디자인 전시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이 열린다. 2005년 스누피 탄생 55주년을 맞아 일본 전시기획사 We’ve가 작가 찰스 M. 슐츠의 부인과 유나이티드 피처스 신디케이트의 동의를 얻어 기획한 이 디자인 전시는 유명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재창조한 스누피 작품을 선보인다. 대중문화와 강박증을 테마로 활동한 국제적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지난해 소개된 페이퍼테이너 미술관 설계로 우리나라서도 유명한 반 시게루 등이 이 작업에 동참했다. 일본 도쿄, 오사카에서 이미 40만명의 관람객을 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은 아티스트들의 작품부터 상품 브랜드와 결합한 패션, 생활소품 디자인까지 포괄하는 크로스오버 전시라는 점이 새롭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친숙한 캐릭터 스누피를 둘러싼 작가들의 다양한 해석. 이들이 본 스누피의 폐소공포증, 강박, 자아도취와 깨달음 등의 테마를 미리 살짝 공개한다. “<피너츠>의 시학은 아이들의 모습에 슬쩍 감추어둔 어른들의 근심과 걱정을 재발견한다.”(움베르토 에코) 1950년 10월 첫 신문연재를 시작한 이래 50여년간 75개 국어로 번역된 <피너츠> 시리즈의 인기야 새삼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다. 야구도 공부도 어설프기만 한 애처로운 주인공 찰리 브라운, 담요를 끌고 다녀야 마음이 안정되는 조숙한 철학자 라이너스, 만사를 제 손 안에 휘둘러야 속이 시원한 그의 누이 루시 그리고 두발로 걷는 지적인 강아지 스누피는 연재가 끝난 뒤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움베르토 에코는 저서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에서 시대를 초월한 시리즈의 인기 비결로 개그와 선문답에 은밀히 함축된 ‘어른들의 노이로제’를 꼽은 바 있다. 자신의 교양을 증명하기 위해 다이제스트판 문고와 자기계발서에서 그러모은 잡식을 떠벌리고, 상대의 인정을 받으려 헛된 투쟁을 벌이는 현대인의 수고로움이 <피너츠> 속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에서 언뜻언뜻 비쳐나온다는 것이다. 자기 고민을 털어놓으며 상대의 관심을 끌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찰리 브라운, 고민이 많아 구강기적 안정(담요와 손가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라이너스, 삶에 대한 어떠한 회의도 없는 이기주의자 루시 캐릭터가 만드는 피너츠의 소우주는 어른들에게 “돈주머니를 톡톡 털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축소판 ‘인간희극’”인 것이다. 스누피의 강박증은 ‘땡땡이’무늬로, 폐소공포증은 ‘쿠션’으로 그리고 <피너츠> 인기의 핵심엔 시리즈의 아이콘인 스누피가 있다. 사색하고, 소설을 쓰고, 수시로 변장을 즐기고, 나르시시스트인(물그릇에 비친 자기 모습을 더 보기 위해 물 마시기를 거부할 정도다) 이 강아지는 특유의 초연함과 엉뚱한 현실도피적 공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스누피의 변신은 창작자와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테마다. 85년 미국의 한 아트 갤러리에서 열린 <스누피 인 패션>이라는 전시는 펜디, 미야케 이세이 등이 스누피를 위해 디자인한 명품 옷을 선보였고, 98년 맥도널드가 각국 민속의상을 입은 스누피를 제공했을 때 홍콩선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 경찰이 질서유지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 이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의 재미도 이 친근한 캐릭터들이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의 시각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재해석됐는지 확인해보는 데 있다. 그러니 이번 전시를 제대로 즐기려면 <피너츠> 캐릭터들의 성격과 특성을 미리 복습해두는 게 좋겠다. ‘아트 스테이지’와 ‘리빙 스테이지’ 두 가지 섹션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선 미술과 디자인, 상품에 구현된 스누피와 친구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면면들도 예사롭진 않다. 대표적인 작가는 스누피를 강렬한 ‘땡땡이’무늬로 뒤덮어버린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지난 2월을 포함해 한국에서도 몇 차례 전시를 가진 구사마는 60년대 미국에서 반전 행위예술과 전위 패션쇼 등을 열며 활동한 현대미술가다. 오랫동안 앓은 정신분열증의 환영을 반복적인 물방울 무늬와 그물망 무늬로 표현했던 그가 이번엔 스누피에게서 강박증을 발견했다. 사랑스런 스누피에게 마구 덧칠된 점박이 무늬와 그물망, 금속 마카로니가 안쓰러울 정도지만 애정과 강박에 둘러싸인 스누피라는 구사마만의 해석이 담겨 있다. 지난해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페이퍼테이너 전시에서 종이로 미술관을 지었던 반 시게루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그가 출품한 세개의 개집은 1995년부터 유엔의 난민고등판무관 컨설턴트로 난민 보호와 구제에 종사해온 환경건축가 반 시게루의 건축 철학을 반영한 작품이다. 벽돌집이 가장 튼튼하다는 <아기돼지 삼형제>의 모티브를 뒤집어, 재해에 가장 취약하고 피해도 큰 벽돌집 대신 종이기둥으로 만든 스누피 집을 제안한다. 상업적인 수주를 거의 받지 않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번 전시에선 스누피를 통해 현재 자신이 진행 중인 스리랑카 구호 건축 활동을 홍보하고 있다. 그외에도 패션, 공예, 제품디자인 작품에서 스누피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만날 수 있다. 영국의 디자인 건축 사무소 클라인 다이섬 아키텍처가 스누피에서 주목한 건 폐소공포증이다.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지붕에서 일상을 보내는 스누피에게 집은 인테리어 소품과 같다는 해석으로 개집을 쿠션으로 재창조했다. 일본 무인양품(MUJI), 미국 IDEO의 디자이너를 거쳐 지금은 생활브랜드 ±0를 운영하는 세계적 제품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는 스누피의 특성을 3개의 입상과 주변 공간에 표현했다. 무기질의 대상에 따뜻한 니트옷을 입히는 패션디자인그룹 민트디자인은 <피너츠> 캐릭터 입상에 파스텔톤의 니트를 씌우는 작업을 했다. 일본 전시에게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네일아티스트 미우라 가나코의 패디큐어를 받은 스누피상과 핫핑크빛 네일칩으로 만든 스누피 모자이크도 감상할 수 있다. 일본 전통공예, 고급 브랜드와 접목되어 생활소품으로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스누피와 일본 전통공예의 접목이다. 일본에서 처음 기획된 이 전시에선 헬로키티에게 기모노를 입히는 일본인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다. 에도시대 서민들의 목면수건에 스누피의 성격을 묘사해 넣은 테누구이, 전통 방식으로 떠낸 닥종이로 만든 스누피 머리모양 전등은 실용상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말린 꽃잎을 하나하나 눌러 만든 오시바나 공예작품에선 수백개의 꽃잎에 새겨진 스누피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3D로 구현된 수묵애니메이션 <꽃은 붉구나(화홍)>는 이번 전시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 웹 솔루션, 광고영상 등을 만드는 테크놀로지 집단 팀랩이 만든 이 6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전통예술 ‘에마키모노가타리’(긴 두루마리에 그린 스토리가 있는 회화)를 영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4대의 PDP 스크린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든 작품이다. 정원에서 한가로이 꽃을 바라보던 스누피가 가마와 학을 타고 세상을 유람하는 백일몽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 단아한 수묵화로 그려진 스누피 이미지도 신선하지만 시점을 무한히 넘나들며 여행하는 듯한 동양산수화의 미학이 3D 그래픽으로 구현돼 흥미롭다. 작가들뿐 아니라 상업 브랜드가 대거 참여한 터라 전시 관람인지 윈도 쇼핑인지 혼돈을 일으키는 작품도 많다. 루이 14세 때부터 내려온 프랑스 고급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는 스누피 캐릭터가 정밀히 세공된 샹들리에를, 일본 자기회사 하쿠산 포슬린은 스누피 식기를 내놓았다. 홍차 블렌드 아티스트 구마자키 순타로가 내놓은 스누피 홍차 ‘SPOOTEA’의 발상도 재미있다. 소심한 찰리의 홍차엔 밀크티 베이스에 캐러멜과 너트의 풍미를 섞는 등, 캐릭터 성격에 맞춤한 홍차 제품을 세트로 출시한 것. 모든 전시를 둘러보면 한국의 창작그룹 노네임노샵이 마련한 포토존을 즐길 수 있다. 흑백의 피너츠 만화를 폼보드에 인쇄해 설치한 이곳에선 마치 신문 만화 안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라이프디자인전’이라는 이름에서 미리 명시한 대로, 캐릭터 상품과 긴밀한 이번 전시는 디자인의 숙명인 상업성을 부담없이 즐길 기회이기도 하다. 쇼핑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둘러보는 게 이번 전시를 즐기는 바른 방법이다. 최근 급성장한 명화전과 어린이 대상 전시와 달리, <스누피라이디자인展>은 가족과 어린이 관객뿐 아니라 스누피를 기억하는 20~30대 여성층의 소비 문화를 공략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캐릭터를 매개로 낯선 현대미술과 디자인을 부담없이 즐기는 컨셉이다.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이 교과서용 명화나 난해한 디자인전과는 다른 재미를 쏠쏠하게 선사한다는 건 분명하다. 캐릭터에서 무한히 변주되는 디자인의 즐거움, 올 여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글 스누피와 함께 누려보시길. 스누피에 대한 사소한 상식들 낑낑, 내가 사실은 58살이라고! 스누피의 등장 우리에겐 <피너츠>라는 원제보다 ‘스누피’가 더 익숙하지만, 스누피는 처음엔 연재가 시작된 지 이틀 뒤인 1950년 10월4일에야 등장한 조연이었다. 스누피가 처음 생각을 표현한 건 2년 뒤인 1952년 5월27일, 두발로 걷기 시작한 건 1956년 1월5일부터다. 스누피의 언어 스누피는 말이 없다. 대신 생각을 의미하는 말풍선으로만 의사를 표시한다. 다른 피너츠의 캐릭터들처럼 스누피도 비속어, 은어, 줄임말을 전혀 쓰지 않고 문법을 철저히 준수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들은 “하버드의 언어”를 쓴다고 할 정도. 스누피의 공상 몽상가 스누피는 언제나 지붕에 올라 꿈을 꾼다. 원작자 슐츠는 “그는 살아남기 위해 공상한다. 안 그러면 지루하고 비참한 개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라고 설명했다. 스누피의 집 겉보기와 달리 내부 면적은 상상을 초월한다. 침대, 당구대, 탁구대, 텔레비전, 샤워실, 자쿠지 욕조까지 있다. 스누피의 밥 그릇을 5280회 굴리면 1마일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미루어보아 직경은 10.25cm 정도로 추정된다. 밥그릇은 빨간색, 물그릇은 노란색이다. 가장 좋아하는 개밥 브랜드 이름은 ‘1차대전 비행 경험이 있고 불어를 좀 아는 강아지를 위하여’다. 스누피의 상징 조종사 변장 덕에 스누피는 미국 공군과 NASA의 마스코트로 자주 쓰인다. NASA 직원들은 아폴로 10호의 비행모듈을 스누피, 지상 명령 모듈을 찰리 브라운이라 불렀다. NASA 우주비행복에 쓰이는 흑백 헬멧도 “스누피 캡”으로 통칭된다. 슐츠가 평생 가입했던 생명보험사 메트라이프(MetLife)의 상징도 스누피다. MetLife는 이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의 공식후원사도 맡았다.

[2007 납량 공포 특선] 다리오 아르젠토 회고전 상영작 4편

가장 완벽한 아르젠토의 영화 <수정 깃털의 새> The Bird with Crystal Plumage, 1970년, 98분 올해 다리오 아르젠토 회고전에서 단 한편의 영화를 보아야 한다면, 그 영화는 당연히 <수정 깃털의 새>가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아르젠토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가장 완벽한 아르젠토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너무 잘 만들어서 오히려 덜 아르젠토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르젠토 영화는 적당히 어색하고 지루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수정 깃털의 새>는 날렵하고 잘 짜여졌으며 학살장면 사이의 이야기들도 꽤 재미있는 편이다. 게다가 그는 가장 훌륭한 서스펜스 장면 하나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멋지게 해치우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당시 평론가들이 아르젠토를 ‘이탈리아의 히치콕’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해가 된다. 물론 그는 그 뒤로 별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80년대만 해도 그 별명은 엉뚱한 병에 붙은 상표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줄거리는? 이미 위에서 다 설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탈리아인 여자친구랑 같이 사는 미국인 작가가 우연히 살인미수 현장을 목격하고 그 뒤로 젊은 여자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왜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했는데도 <딥 레드>의 추리물은 지겨운데, <수정 깃털의 새>는 그렇지 않은가? 답은 이탈리아 호러 영화계에서 진정한 스타일리스트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스토리텔링 따위는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 시절의 아르젠토는 스토리의 재미를 그처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아르젠토의 심리묘사는 어떤 맛? <스탕달 신드롬> The Stendhal Syndrome, 1996년, 120분 <스탕달 신드롬>의 원작은 그라지엘라 마게리니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안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만 보면 정신을 잃는 스탕달 신드롬을 앓는 강간 전문 형사인데, 우연히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갔다가 브뤼겔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보고 정신을 잃게 되고 그 무력해진 상태 속에서 연쇄강간범의 희생자가 된다. 그 뒤로 안나는 스탕달 신드롬과 강간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범인을 추적하는데, 전형적인 강간복수극인 것 같던 이야기는 중반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스탕달 신드롬>에는 아르젠토식 연쇄살인 묘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검은 장갑의 살인마도 없고 현란한 가짜 피도 거의 없다. 대신 아르젠토 특유의 현란한 스타일은 온갖 정신적 충격으로 황폐해진 주인공의 내면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집중한다. 만약 그가 이 복잡한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만한 좋은 배우와 연기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추었다면 이 영화는 90년대 나온 가장 훌륭한 아르젠토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냥 잠시 궤도를 이탈한 원로의 야심적인 실험작 정도로 남은 듯하다. 아르젠토 버전으로 뒤틀린 <오페라의 유령>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 1998년, 103분 <오페라의 유령>은 가스통 르루의 유명한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이를 위해 아르젠토는 로만 폴란스키의 파트너로 유명한 저명한 각본가 제라르 브라크를 공동각색가로 기용하기도 했다. 결과는 어땠냐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영화에서라도 어색한 대사와 연기를 끌어내는 아르젠토의 재능은 전문 작가 브라크의 재능을 능가한다. 영화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팬텀’은 마스크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그냥 줄리언 샌즈처럼 생긴 잘생긴 남자이다. 팬텀의 과거사도 원작의 팬텀보다는 오히려 <배트맨2>의 펭귄에 가깝다. 갓난아이가 파리의 하수도에 버려졌는데, 친절한 쥐떼가 그 아기를 키웠고, 그들 사이에서 자란 아기는 훌륭한 가수를 알아보는 예민한 귀와 시청의 쥐잡이들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 되었다는 거다. 19세기 파리를 재현한 세트와 촬영은 아름답고 오래간만에 한팀이 된 엔니오 모리코네 역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며 크리스틴 다에를 연기한 아시아 아르젠토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큼 아름답지만, <오페라의 유령>은 그냥 실패작이다. 영화를 구성하는 코미디, 로맨스, 섹스는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그냥 덜컹거릴 뿐이고 그나마 감독의 장기인 피투성이 살인장면도 낯선 설정 탓인지 영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 팬텀을 연기한 줄리언 샌즈는 아마 가장 따분한 아르젠토 괴물일 것이다. 히치콕의 패러디 혹은 아르젠토의 패러디 <히치콕을 좋아하나요?> Do You Like Hitchcock?, 2005년, 93분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논문을 쓰느라 바쁜 영화학도인 줄리오는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여자 이웃 사샤를 가끔 훔쳐본다. 사샤가 비디오 가게에서 만난 페데리카와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샤의 어머니가 살해당하자 줄리오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생각한다. 사샤와 페데리카는 히치콕의 <열차 안의 이방인>을 보고 교환살인을 계획했던 것이다! 지극히 히치콕적인 스토리에 산더미 같은 히치콕 오마주를 담은 아르젠토의 2005년작 <히치콕을 좋아하나요?>는 앨프리드 히치콕을 추모하기 위해 이탈리아 텔레비전이 계획한 텔레비전영화 연작의 첫 작품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리오 아르젠토는 한동안 ‘이탈리아의 히치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니, 이 계획의 첫삽을 뜨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히치콕의 패러디일 뿐만 아니라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의 패러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르젠토 영화를 특징짓는 피투성이 살인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흉기를 휘둘러대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살인자는 여전히 나온다. 단지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살인자가 검은 장갑 대신 흰 장갑을 끼고 있고 멀리서 주인공이 왜 살인범이 그 장면에서 장갑을 끼고 있는지 여자친구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아르젠토 영감이 이렇게 엉큼한 농담을 구사할지 어떻게 알았겠나. 여전히 어색하고 뻣뻣한 영어 대사가 군데군데 신경을 긁긴 하지만 <히치콕을 좋아하나요?>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대표작들보다 더 재미있다. 주인공 캐릭터는 생생하게 살아 있고 페이스는 적절하며 유머감각도 풍부하다. <수정 깃털의 새> 이후 거의 죽어 있던 스토리텔러 아르젠토가 은근슬쩍 부활하기라도 한 걸까? 아르젠토식 피투성이 자극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은 비교적 얌전한 사건 전개에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늘 아르젠토가 같은 종류의 지알로 영화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히치콕을 좋아하나요?>는 지난 몇년 동안 아르젠토가 시도해왔던 예술적 일탈 시도 중 가장 눈에 뜨이는 성공작이다.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 진중한 울림의 A급 감동

가슴에 쿵하고 무겁게 떨어지는 대사, 눈시울을 천천히 적셔오는 음악, 소리 내진 않아도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게 해주는 이야기. <철큰 근크리트> <신동>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은 보고나면 가슴이 훈훈해지는 영화들이다. 말초적인 재미보단 진중한 울림을 주는 영화 3편을 모았다. 철콘 근크리트 鐵コン筋クリ-ト 감독 마이클 앨리어스 | 목소리 출연 니노미야 가즈나리, 아오이 유우, 이세야 우스케, 구도 간쿠로, 다나카 민 | 2006년 | 110분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도시, 삶은 무엇이 지탱하는가. 노숙자와 야쿠자들이 모여 사는 거리 ‘다카라쵸’에는 쿠로(黑)와 시로(白)란 이름을 가진 두명의 고아소년이 있다. 고양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다카라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고 다니는 아이들. 하지만 다카라쵸에는 ‘어린이 성’ 프로젝트로 떼돈을 벌어보려는 외부인과 야쿠자의 음모가 다가온다. 다카라쵸를 자신의 근거지마냥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쿠로와 시로는 이들에게 눈엣가시. 이후 영화는 다카라쵸를 지키려는 쿠로, 시로와 그 거리를 자신의 마을로 만들려는 조직의 대결을 그린다. <우울한 청춘> <핑퐁> 등으로 유명한 마쓰모토 다이요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철콘 근크리트>는 콘크리트의 냄새를 전하기라도 하듯 도시 묘사에 충실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다르고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묘한 기운을 내뱉는다는 콘크리트의 향내는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을 통해 표현된다. 도시의 뒷골목과 피폐한 구석의 어둠은 쿠로의 내면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영화적인 연출도 눈에 띤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 디지털 이펙트 작업을 했던 마이클 앨리어스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을 통해 역동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이동이나 도시 전체를 빠르게 돌아보는 회전이 두드러진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도시의 드라마로 풀어가는 화법도 뛰어나다. “부모의 죄는 자식이 진다”는 대사나 트로이와 카산드라의 에피소드를 인용하는 부분은 쿠로와 시로가 왜 그렇게 다카라쵸에 연연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대목.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진실이 무겁게 가슴을 누룬다. 영화의 마지막, 시로가 지구별 일본국에서의 교신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는 함께 박수를 쳐주고 싶어질 정도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미국의 예술잡지 <아트포럼>이 선정하는 2006년 베스트필름에 뽑혔다. 초호화 보이스 액팅 목소리에 값을 매긴다면 <철콘 근크리트>의 캐스팅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쿠로와 시로를 각각 연기한 인기 댄스그룹 아라시의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훌라걸스> <허니와 클로버>의 아오이 유우는 물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허니와 클로버>의 이세야 유스케, <메종 드 히미코>의 히미코를 연기한 다나카 민도 참여했다. <이치 더 킬러> <돌스>의 오모리 나오와 개그 트리오 모리 산추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스타들의 색다른 목소리를 듣는 재미로 영화를 봐도 나쁘진 않을 듯. 참고로 아이오 유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남자아이다. 신동 神童 감독 하기우다 고지 | 출연 나루미 리코, 마쓰야마 겐이치 | 2007년 | 120분 13살 소녀 우타(나루미 리코)는 피아노 신동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제는 피아노를 싫어한다. 학교도, 피아노 레슨도 지루할 뿐이다. 반면 대학 입시를 앞둔 와오(마쓰야마 겐이치)에게 피아노는 애정의 대상이다.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며 계속 따라가야 할 과제다. 와오는 우타의 실력을 부러워하지만 우타는 와오의 재능에 호기심을 느낀다. 귀가 좋은 와오는 바다, 물, 바람처럼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리에 별다른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던 우타는 어느 순간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아챈다. 아버지의 죽음과 과거의 상처를 연상시키는 소리. 우타는 이제 병과 싸워야 한다. 사소우 아키라의 동명 만화가 원작인 이 영화는 음악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다른 성장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을 하는 두 인물 우타와 와우의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다. 하지만 하기우다 감독은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인물들의 아픔과 극복만큼은 아름답게 그려낸다. 음악이 끝난 뒤 전해지는 여운에서 사람의 슬픔이 느껴지는 영화.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 ALWAYS 三丁目の夕日 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 출연 호리키타 마키, 쓰쓰미 신이치, 고유키, 요시오카 히데토시 | 2005년 | 133분 2006년 일본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 12개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 무츠코는 집단 취업으로 도쿄에 올라온 십대 소녀다. 작은 정비소에 일터를 잡고 정비소 사장인 스즈키(쓰쓰미 신이치)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같은 마을에서 과자점을 운영하는 류노스케(요시오카 히데토시)는 삼류 소설가로, 고백도 못하고 혼자 좋아하는 여자 히로미(고유키)의 부탁으로 남자아이를 떠맡고 있다. 소설을 좋아하는 그 아이는 류노스케의 팬. 류노스케도 점점 그 아이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1950년대 도쿄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삶을 그린 만화 <3번가의 석양>을 영화화한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은 부유하진 않았지만 즐겁게 살았던 쇼와 시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다. 마을에 하나뿐인 텔레비전을 함께 모여 보고, 살림이 어려워 고향에도 가지 못하는 이웃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에피소드가 따뜻한 정취로 그려진다. 소박한 이야기지만 배우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라스트 사무라이>, 드라마 <닥터고토의 진료소 2006>의 요시오카 히데토시는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의 미지근한 열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히노키오>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호리키타 마키는 사투리를 구사하며 시골 소녀의 풋풋함을 잘 살려낸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고유키,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쓰쓰미 신이치도 출연했다.

[인디 뮤지션 3인] <상사몽>의 정민아

가야금의 음색이 사람의 울음소리를 닮아서인가. 지난해 11월 ‘모던 가야금 정민아’라는 카피 아래 발매된 정규앨범 <상사몽>을 듣고 있으면 뮤지션 본인이 우울하고 슬픔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둥글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그는 엉뚱하고 웃음이 많다. “곡을 쓸 당시에는 생각보다 별 감정이 없어요.” 7개 트랙이 실린 EP 형식 앨범 <애화>의 동명 타이틀곡 제목은 그의 어머니 존함을 따서 지어진 것인데 정작 작업하는 동안엔 곡 쓰는 일에만 몰입하다 나중에야 ‘아, 엄마 생각이 나네’ 하며 그제야 주위 사람들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는 애절한 정서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대상을 보는 처연한 정서가 좋다. 정민아는 국악고등학교와 한양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죽도록 노력해서 남들 가는 좋은 길을 가려고 할 땐 한번도 일이 풀린 적이 없었”다. 국립국악원에 8번 낙방하고 텔레마케터로 생계를 꾸려온 시절은 여러 기사에 실린 스토리. 그는 안양의 모 라이브 클럽에 손님으로 다니다 주말 연습실을 이용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됐고, 가게 사장님 권유로 무대에 서면서 연주곡의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보컬곡을 쓰게 됐다. 홍대로 라이브 터전을 옮긴 다음 EP <애화>를 자비로 제작해 장당 7천원씩 500장을 팔았다. “서른살 전에 자작곡 앨범을 내는 꿈은 이뤘다”는 그의 말이 소박하게 들린다. 초등학교 때 유재하음악제 2회 대상수상곡인 <거리 풍경>을 듣고 날마다 음반가게에 가서 “고찬용 1집 나왔어요?”를 묻곤 했던 그는 얼마 전 기적적으로 그와 인연이 닿아 “레슨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제 음악을 들어봤다고, 좋긴 좋은데 기본적인 화성을 쓰시네요, 하시더라고요.” 이건 물론 단편의 예일 뿐 정민아는 이 인연이 자신에게 더 큰 배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2집 앨범을 준비하기 전에 3개월간 인도 여행도 계획 중이라는 그는 “가야금이 하프처럼 조바꿈만 가능해지면 정말 세계적인 악기가 될 수 있다”며 “내가 하고 싶은 건 어떤 장르가 아니라 그냥 가야금으로 좋은 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집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할 말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더 많은 걸 알고 할 말만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다른 것 같아요. 이젠 알고 하고 싶고요.” <상사몽> 소니BMG 발매 민속음악의 퓨전과 월드뮤직이 음반시장에서 상업성을 증명해주고 있는 요즘, 정민아의 음악은 장르적으로 분명 그 카테고리에 속하겠지만 여전히 변두리의 음악이다. 현악과 드럼, 베이스를 최소한의 세션으로 활용한 검소한 사운드, 심플한 곡의 구성, 저음의 굵은 보컬 등의 요소가 가난하고 단순하고 고독하고 “처연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정민아의 ‘모던 가야금’ 음악은 민속음악적 색깔을 클럽용 리믹스 가능한 트렌디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게 아니라 본색 그대로 소박하게 다듬어 동시대 음악으로 들리게 한다. 음악적으로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 신뢰를 떨어뜨릴 요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값싼 멜랑콜리함을 진짜 감성인 것처럼 포장한 장식적인 음악들이 대중에게 ‘음악성’의 다른 말로 대체되어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생각했을 때 이만큼 진지함과 꾸밈없음과 겸손함을 갖춘 음반을 만난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지하철에서 악상을 떠올려 한번에 써내려간 <무엇이 되어>나 역시 2∼3시간 만에 완성했다는 <상사몽>은 필청 트랙.

한국영화의 성찬, 마음껏 즐기시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제작부터 상영까지 변방에 있는 한국독립영화들의 새로운 흐름은 오히려 영화제에서 먼저 빛을 발한다. 제1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또한 한국독립영화의 성찬을 마련했다. 단, 영화제 성격에 맞게 매우 판타스틱한 독립영화들이다. 올해 부천에 입점한 독립영화들의 특징은 장르의 쾌감과 변주에 주목한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이 인생의 허무를 깨닫거나 미래의 불안을 담아온 것에 비해 이들의 시도는 독립영화계 전체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금지구역 상영작 중 하나인 김진원 감독의 <도살자>는 말 그대로 ‘작정하고 만든’ 하드고어 영화다. 아마도 <도살자>를 본 관객은 배우들의 신변과 영화를 만든 ‘데빌그루브픽쳐스’가 도대체 어떤 일당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온 한 부부가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로부터 사지가 찢기는 봉변을 당하는 게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등장인물들의 머리에 카메라를 매달아 P.O.V(Point-Of-View)숏으로 찍은 이 영화는 거친 화면과 사운드로 아비규환의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톱에 갈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이 귀청을 때린 뒤에는 뼈를 부러뜨리고, 손가락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는 광경이 여과없이 눈앞에 펼쳐질 정도다. 이 모든 게 쇼였다는 반전을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도살자>는 그런 자비심 따위는 갖추지 않은 영화다. 장르영화의 활약이 두드러져 <도살자>가 저예산 독립영화의 제작환경을 드러내며 영화의 매력을 더한다면 <편지>와 <산책>을 연출한 이정국 감독과 영상원 4학년생인 김민숙 감독이 공동연출한 <그림자>는 저예산의 장점을 통해 영화의 군살을 뺀 경우다.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적장 기무라를 죽이지 못하고 혼자 죽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논개를 진심으로 사랑한 기무라는 논개의 죽음을 애도하고, 논개는 그런 기무라의 꿈과 현실에 나타나 조금씩 그의 숨을 죄어온다. 몇 백년 뒤의 현실로 넘어온 영화는 기무라와 논개, 그리고 논개의 연인 최경회의 삼각관계를 또 다른 구성으로 풀어간다. 패랭이꽃을 찾으러 산을 찾은 두 연인과 산을 안내해 주겠다는 한 남자 사이에 흐르는 갈등은 과거의 이야기와 맞물려 또 다른 반전을 만들어낸다. 1편과 2편으로 나뉜 <그림자>는 2억원이란 저예산을 미술과 내러티브에 알뜰히 사용한 흔적을 보여준다. <도살자>나 <그림자>와는 다르게 무협장르에 신선한 감각을 더한 영화도 있다. 여명준 감독의 <도시락>은 도심 속에 숨어 있는 무술고수들의 고민과 우정, 의리를 다룬 작품이다. 사적복수가 허용되는 영화 속의 한국에서는 만 20살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경관 1명과 공증인 1명이 있는 자리에서 원하는 사람과 결투를 벌일 수 있다. 주인공 영빈은 회사에서는 무능한 직원이지만, 결투의 세계에서는 백전백승의 숨은 고수. 어느 날 친구 운광의 무술도장을 찾은 그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닮은 본국을 만나고 이들 세 남자는 결투의 환란속에서 또 다른 운명의 만남을 맞이한다. <도시락>은 배우들의 액션연기와 은근한 유머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공들여 만든 액션과 무협영화에 대한 애정이 눈에 띈다. 특히 연출, 시나리오, 편집, 미술, 무술 등 1인 5역을 한 여명준 감독의 메이저 진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예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 보여줘 제11회 부천영화제가 발견한 한국독립영화의 또 다른 모습은 ‘변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시선이다. 2007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김삼력 감독의 <아스라이>는 대구 독립영화 출신인 감독이 직접 겪은 20대의 성장기를 다루는 이야기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영화의 세계에 매료된 주인공은 영화를 향한 갖가지 꿈을 꾸지만 점점 현실과의 괴리에 부딪히며 좌절을 겪는다. 문화의 변두리인 지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어려움과 좌절, 희망을 흑백의 영상으로 담은 <아스라이>는 단지 영화를 만드는 이들뿐만 아니라 20대를 살고 있거나, 그 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우열 감독의 <소년 감독>은 영화가 찍고 싶은 아이의 시점에서 영화 만들기의 순수성을 생각해보는 작품이다. 강원도 산골마을에 사는 소년 상구는 어느 날 아버지의 유품인 8mm 카메라를 갖게 된다. <소년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상구가 서울로 상경해 겪는 갖은 고충을 담지만 아이의 모험을 통해 감동을 끌어내려하지 않고, 대신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인 색채를 가미하며 쓰디쓴 엔딩을 맞이한다. 이야기만 놓고보자면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윤제문, 김상호 등 낯익은 조연배우들과 주연을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독립장편영화뿐만 아니라 단편영화들 또한 영화제에서 맛볼 수 있는 진미다. 독특한 상상력과 강렬한 영상이 단편영화의 고유한 장점이지만 부천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단편영화들은 특히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에 선정된 10개의 단편영화들 가운데 한국단편영화는 총 4편이다. 한병아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두가 외로운 별>은 이미 지난 6월25일 미국에서 열린 플랫폼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진출한 작품. 성격과 생활 모두에 하나 이상의 장애를 겪고 있는 인물들은 저마다 외롭지만 슬퍼하지 않는다. 인상적인 캐릭터 구성과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연대의식에서 벗어난 주제가 돋보인다. 그런가 하면 황보임 감독의 <루치아의 자동인형>은 영화 메커니즘의 흥망성쇠를 <노스페라투> 같은 공포영화와 멜로영화의 특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볼렉스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이안식 무반사 카메라로 불리며 폐품처리가 될 지경에 이른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는 어떻게든 남자를 살리려고 하지만 세상은 이미 HD카메라의 선명한 화질에 빠져 있다. 디지털 메커니즘이 창궐하는 현대에 아날로그 기계의 아날로그적 사랑을 그리는 영화로 무성영화적인 연출이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 기자였던 장훈 감독의 <불한당들>도 발칙한 상상력과 풍자가 눈에 띄는 영화다. 영화는 월드컵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집단의식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좀비영화로 풀어낸다. 부천 초이스에 선정된 단편영화중 마지막 작품인 <汗(한)>은 제목 그대로 땀이 솟고 흐르는 풍경을 유장한 리듬과 연출로 그려낸 영화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영상이 땀의 액체성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땀 흘리는 자와 안 흘리는 자, 그리고 노동으로 땀을 흘리는 자와 먹고 섹스하는 걸로 땀을 흘리는 자의 대비를 통해 계급의 격차를 논하기도 한다. 부천 초이스,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의 단편들도 뛰어나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의 상영 편수가 적다는 사실이 불만인 관객이라면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에 선정된 단편들의 홍수에 빠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천영화제의 상영부문 중에서 관객의 가장 높은 호응을 받아온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부문은 총 58편의 단편영화 중 28편의 한국단편영화를 소개한다. 특징으로 보면 호러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거나 비트는 영화들이 많다. 고등학교 3학년인 세 여고생의 추억회상담인 <버스를 타다>는 <여고괴담>과 같은 학원괴담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설프지 않은 피의 향연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아이들이 떠난 잠깐의 외출을 통해 거대 도시 서울의 이면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유령영화다. 또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체과학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미래사회를 그린 <뼈칼>은 묵시론적이면서도 좀비영화 같은 특징이 반영된 작품이다. 한편 평범한 일상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영화들도 도드라진다. 축농증으로 고생하는 천재소녀의 코에서 검은 생물체가 빠져나오고 그로 인해 그녀의 지적능력이 점점 저하되는 과정을 그린 나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하룻밤을 판타지로 풀어낸 <자야 한다>, 그리고 무허가 쪽방촌에 사는 한 소년과 신비한 소녀의 만남을 담은 <미유>가 그러한 작품들이다. 또한 유기견이 자신을 버린 가족에게 복수한다는 <가족 같은 개, 개 같은 가족> 같은 독특한 작품도 있다. 28편의 한국단편영화들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은 가족 안의 관계를 판타지적인 색채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17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러 다니는 소년의 여정을 담은 <들리나요?>와 전파상의 고장난 텔레비전으로 죽은 엄마와 교신하는 <보이지 않는 천국>,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아들 사이의 애증을 미스터리로 풀어낸 <프랑스 중위의 여자>,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형제가 사라진 사실을 깨닫게 된 아이를 그린 <늪 속의 괴물>이 있다. 이 밖에도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이야기인 <꿈의 해부>, 통일한국에서 만난 북한 소년과 소녀의 희망을 그린 <서울까지>, 우연히 얻은 권총으로 갱영화를 찍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굿바이 칠드런>, 그리고 ‘제6회 미쟝센단편영화제-장르의 상상력展’에서 대상과 촬영상을 받은 <10분간 휴식> 등이 단편영화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줄 것이다. 배부를 만큼 보고 토할 만큼 즐겨도 된다. 어차피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비처럼 가벼워지련다

<별빛 속으로>의 황규덕 감독에게 살짝 물어봤다. 배우로서 김민선은 어떤 사람인가? “영화 끝나고 최근 떠오른 생각인데 미국 배우로 치면 조디 포스터 같은 사람이다. 조디 포스터는 출신부터가 제대로 된 문화예술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미국 상업문화권 안에서 활동하며 적응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뭔가가 있는 사람이다. 내 추측인데 김민선은 연기자를 넘어 연출에 대한 역량까지 꿈꾸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걸 따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런 성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충무로 주연 여배우라는 틀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찾으면서도 항상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김민선에게도 물어봤다. 촬영하면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 “첫날이 좀 갑갑했다. (웃음) 대사도 많았고 동선도 복잡한 원신 원컷 촬영이었다. 물론 연기자로서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할 마음으로 뭔가 열어놓고 오긴 하지만, 감독님 스타일상 길게는 말씀 안 하시더라. 삐삐소녀가 누구인지 아직 감도 잘 안 잡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머리는 아파오고. 그래서 감독님에게 재차 물어보게 되더라.” 사실 같은 얘기다. 한 발짝만 움직이기 위해서도 본인이 납득이 되어야만 발을 떼는 타입의 배우들이 있는데 김민선이 그렇다. 그건 김민선의 오래된 완벽주의자 기질이다. “집안의 넷째다 보니 가족 사이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아이였고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완벽해지려고 했고, 어렸을 때는 혹시 내가 이런 말 하다 틀리면 상대방이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생각하며 토씨 하나까지 준비하는 타입이었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요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나와 허허실실 곧잘 재롱과 익살을 떨면서 보여주는 그 빈구석은 뭔가. 그런데 그게 바로 김민선에게 지금 중요한 변화다. “시키면 해야 하는데 생각은 안 나고, 게다가 어찌나들 애드리브가 좋고 데시벨들이 높은지 내가 얘기하면 다 묻힌다”며 다른 ‘여걸’들을 향해 부러움 섞인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그 일이 즐겁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쇼 프로를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완벽해지고 싶어서 그런 쪽에 이미지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시선들을 깨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너무 무거운 이미지고 그래서 그게 비호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웃음)”이다. 김민선은 지금 좀더 가볍고 자유롭고 싶어한다. 이제 완벽에 대한 갑옷을 벗고 자신 역시 친근하고 또 대하기 편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다만 갖고 있는 걸 버리면서 가장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직 못 보여준 한쪽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별빛 속으로>의 삐삐소녀를 맡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삐삐소녀가 참 밝더라. 이런 친구 역할을 한번 하면 나도 기운을 좀 받겠다 싶었다.” <별빛 속으로>의 삐삐소녀는 시대가 강제한 획일성을 뛰어넘는다. 죽음 같은 시대에 살다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펄럭거리면서 돌아다닌다. 김민선이 삐삐소녀에게서 받고 싶었다는 기운은 분명 그런 것일 거다. 영화에서 삐삐소녀는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보헤미안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나는 나비’ 같은 존재인데, 지금 김민선이 배우로서 꿈꾸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김민선이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해 보여 도리어 무거워 보인다고 느꼈다면 한 가지 우스개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하류인생> 때 일인데, 촬영 전에 테스트 촬영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이 이런저런 연기 지도를 하시기에 이분이 나에 대해 걱정을 참 많이 해주시는 구나 고마운 생각이 들어, 감독님 어깨를 탁 잡고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나서 옆을 보니까 주변이 싸하더라. 다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어 있고. 나중에 들으니 감독님 어깨에 손 올린 배우는 나밖에 없다고 그러더라. (웃음) 그런데 그때 감독님은 껄껄 웃으셨고 촬영 내내 예뻐해주셨다.” 감독 임권택의 어깨에 감히 덥석 손 얹고 나서 귀여움받은 사람이 과연 흔할까. 김민선에게는 우리가 몰랐던 그런 친근한 도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