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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화려한 일족> ‘기무타쿠-장준혁’의 카리스마를 보라

화려한 일족 華麗なる一族 XTM 우리말 녹음 방송 목요일 밤 11시, 자막 방송 일요일 오전 10시 모든 건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욕망과 권력이 문제. <하얀거탑>이 병원을 둘러싼 권력의 다툼이었다면 <화려한 일족>은 부자 관계에 얽힌 권력과 질투의 응어리다. 100만부가 넘게 팔린 야마사키 도요코(<하얀거탑> <여계가족>)의 베스트셀러 <화려한 일족>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만표 집안에 숨겨진 비밀과 음모를 바탕으로 부자 관계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만표 가문의 아버지 만표 다이스케에서 그의 아들인 만표 텟페이로 주인공을 수정한 드라마는 몇몇 인물설정과 관계에서 원작과 차이를 갖는다. 텟페이(기무라 다쿠야)가 사랑했던 아키코란 여성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으며, 후사코(이나모리 이즈미)가 텟페이와 과거에 교제했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이외에도 드라마는 텟페이가 아버지와 재판을 하는 부분, 고로 건설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원작과 차이를 갖는다. 하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비롯해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같다. 모든 게 빠르고 복잡하게 움직였던 혼란의 196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부자의 어긋난 운명이 지독할 만큼 실감나게 그려진다.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준비가 한창인 고베시에는 은행간 합병 바람에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외국 자본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대장성은 국내 자본을 보호하기 위한 합병안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12개의 도시 은행이 곧 4∼5개로 통합될 참이다. 예금보유 9위의 한신은행 역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궁리 중. 만표 다이스케(기타오지 긴야)는 ‘소(小)가 대(大)를 먹는 합병’을 하겠다며 계획을 하나씩 맞춰가고 있고, 거기엔 아들인 텟페이가 전무로 있는 한신특수제강의 발목을 잡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다.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버릴 것인가,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접을 것인가. 텟페이가 자신의 아버지인 만표 케이스케의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만표 다이스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택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빚어낸 불화, 만표 다이스케는 항상 텟페이를 보고 ‘아버지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기무라 다쿠야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드라마는 20%가 넘는 시청률로 첫회를 시작해, 드라마의 무대가 된 관서 지방에서는 39%가 넘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개국 55주년 기념 드라마로 방송돼 ‘국민드라마’란 평을 들었고, 기무라 다쿠야는 이 드라마로 <더 텔레비전>에서 선정한 52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방영이 끝난 뒤에도 <스마스테이션> <치친푸이푸이>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드라마 특별 방송을 내보내며 <화려한 일족>의 의미를 정리했다. 드라마가 일본에서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야마사키 도요코의 촘촘하고 긴박한 사건 전개와 이를 뒷받침해준 드라마의 구현력이 있다. 1960년대 실제 있었던 은행간 합병 사건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는 60년대 거리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감행한 중국 상하이 촬영 등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호수를 끼고 있는 만표가의 저택은 시즈오카현에서, 한신특수제강의 공장장면은 지바현 기미쓰시에서 촬영됐다. 눈이 오는 장면을 위해서는 홋카이도 후라노시의 로케도 감행했다. 한마디로 <화려한 일족>은 일본을 위아래로, 양옆으로 훑은 셈이다.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도 좋다. <화려한 일족>은 하나의 사건에 얽힌 많은 사람들의 권력관계를 어디로 튈지 모를 불똥처럼 그려낸다.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건조한 느낌을 주고, 다큐드라마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부자 사이의 비밀을 매개로 엎어졌다 또 뒤집히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적인 긴장감을 준다. 만표 다이스케 역의 기타오지 긴야나, 다이스케의 첩인 아이코 역의 스즈키 교가를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텟페이를 연기한 기무라 다쿠야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진정한 리더가 갖춰야 할 모습을 갖고 있어’서 캐스팅했다는 제작진의 말처럼 기무라는 한신특수제강의 리더, 아버지에게 미움을 갖고 있는 아들, 성공과 꿈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기품있게 그려낸다. 기무라 다쿠야는 마지막 비극의 결말까지 이 드라마를 만표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텟페이의 모놀로그로 완성해낸다. <하얀거탑>이 장준혁의 드라마였다면, <화려한 일족>은 텟페이, 아니 기무라 다쿠야의 작품이다.

골때리는 가족이 돌아왔다

심슨 가족이 왔다. 지난 20여년간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온 미국 TV코미디 프로의 대명사다. 국내에도 여러 차례 방영된 바 있어 친숙한 그들이다. 20세기의 아이콘으로 시작하여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있는 그들이 브라운관을 떠나 영화 스크린에서는 또 어떤 웃음을 선사할 것인가. TV코미디 프로 <심슨>이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과 완성된 영화의 이모저모를 전한다. 한손에는 맥주를 그리고 나머지 손에는 도넛 또는 핫도그를 들고 비록 그게 상했거나 땅바닥에 떨어진 거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고 먹으면서 쇼파에 앉아 멍청하게 텔레비전 시청을 즐기는, 그리고 술에 취해 스프링필드의 주정꾼들이 즐겨 찾는 모의 술집에 널브러져 거창한 트림이나 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 게으른 사내 호머 심슨. 그는 위대한 위를 가졌으니 위장의 슈퍼맨이다. 또는 독실하고 성실하며 다정다감한 옆집의 기독교 신자 플랜더스를 사정없이 조롱하거나, 자식 바트를 가르칠 때는 있는 힘껏 목을 조르는 매우 몰지각하지만 일관된(?) 이웃 사교와 자식 교육법을 가졌다. 그는 좋은 이웃과 좋은 아버지의 반대말이다. 지능은 젖먹이 막내딸 매기보다 확실히 떨어지는 것 같고 때때로 사고를 칠 때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 아들 바트보다 한수 위다(하지만 그렇다고 바트의 말썽 실력이 부족한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런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착한 현모양처(이지만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마지를 아내로 만났다는 것과 그에게 리사라는 똑똑하고 교양 넘치며 게다가 정치적 진보주의자이기까지 한 딸 리사가 있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텔레비전 코미디 시리즈 <심슨>의 이 가족은 아주 이상한 구성원들이다. 그뿐인가. 원작자 매트 그로닝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 가장 흔한 도시의 이름이어서 지었다는 스프링필드라는 이 마을에는 심슨의 가족을 포함하여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많다. 어른들은 패잔병 같고 아이들은 못됐고 그중에서 드물게 착하거나 성실한 어른과 아이는 너무 지나쳐 바보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 이 평범한 마을의 이상한 부조화를 보는 것이 그렇게나 신날 수가 없다. 심슨 가족을 포함한 스프링필드 사람들은 세속과 순수가 뒤섞인 조크와 유머를 부리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그 때문에 미국의 <타임>은 “20세기 최고의 텔레비전 시리즈”라고 <심슨>을 칭했을 것이며, 우리 역시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 보아왔기 때문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미국인의 표상 호머 심슨과 그들의 가족은 지난 18년간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애니매이션 캐릭터가 되었으며, 아마도 가장 멍청한 미국인의 표상쯤으로 말해도 괜찮을 만한 호머의 삶은 미국인들 스스로에게뿐만 아니라 미국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사랑을 받는다. 1960년대 <플린스톤> 시리즈가 주말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이후 30여년 동안 그런 애니메이션 시트콤이 없었지만, <심슨>이 그 자리를 차지한 뒤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1989년 정식으로 시작한 뒤 매주 주말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면서 올해 5월 400회를 넘었고, 이번 가을 19시즌이 시작될 예정이다.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호머가 지르는 탄성 “D’oh”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으며 <심슨> 시리즈를 주제로 한 각종 연구들이 쏟아져 나온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미국 텔레비전 코미디 시리즈로는 가장 장수 프로그램인 <심슨>의 떨어지지 않는 인기를 두고 해석이야 많겠지만, <심슨>을 부러워하는 후배들의 증언처럼 더 뜨거운 말도 없다. <심슨>을 더 강력한 성인풍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가공하여 제작한 것이 분명한 <패밀리 가이>의 창작자 중 한명인 세스 맥팔렌이 <심슨>에 관해 “그건 마치 <스타트랙>에 관해 SF팬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심슨> 시리즈라는 장르’의 관객을 창조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말처럼 들리며, <사우스 파크>의 작가 매트 스톤이 “심슨은 우리 존재의 맹독이다. 그들은 너무 많은 패러디를 했고,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건 <심슨>에서 한 거잖아!’, 이 말은 회의 때마다 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라고 한탄할 때, 후대의 그 악동 캐릭터들조차 심슨가의 또 다른 자식들이 된다. 게으르고 뻔뻔한 인물 호머 심슨은 모든 악동들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니 호머 심슨을 위시한 <심슨>의 이 캐릭터들의 매력을 한데 모아 장편영화로 만들어볼 계획이 없었을 리 없다. 팬들의 요구도 적지 않았다. 미국의 SF 장수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트랙>이 이미 오래전 영화 버전을 내놓았다는 걸 감안한다면 텔레비전 코미디 시트콤의 마스터피스인 <심슨>이 지금에서야 영화로 나온 건 거의 미스터리일 정도다. 원작자 매트 그로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화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뜻처럼 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즌4의 에피소드 <캠프 크러스티>나 혹은 미키 마우스가 주인공이었던 <판타지아>를 패러디하여 <심스타지아>로 만들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영화화되지는 못했다. 원작자 매트 그로닝이 각본과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동시에 <심슨>의 연출 경험이 있고 <몬스터 주식회사>의 연출도 해봤던 데이비드 실버먼이 감독을 맡고, 그동안 이름을 떨쳐온 제임스 브룩스, 알 진 등 <심슨> 시리즈의 제작 주요진들이 총동원되며 드디어 영화화 계획은 윤곽이 잡혔다. 무엇보다 중요했을 성우들 역시 TV시리즈의 익숙한 목소리들이 고스란히 투입됐다. 2001년 성우들의 출연을 확정 지은 뒤 각본 작업을 시작했고,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100번 이상 각본을 거친 끝에 지금 우리가 만난 <심슨가족, 더 무비>가 탄생한 것이다. 스프링필드를 벗어난 심슨 가족?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대통령이 된 미국. 그러나 여전히 그러거나 말거나 스프링필드에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호머 심슨. 그는 지붕을 고치러 올라가 아들과 장난을 치거나 혹은 벌거벗은 채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고 아들을 꾀고 있다. 왜 아닐까, 아버지에게 질세라 바트는 또 기어이 그렇게 한다. 마을의 환경문제가 심각해지자 리사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펼치지만 수월하지 않다. 한편 호머가 얻어온 돼지 한 마리가 문제의 발단이 된다. 호머가 공짜 도넛에 눈이 팔려 돼지똥이 담긴 통을 호수에 버리고 가자 스프링필드의 호수는 완전히 썩어버리고 미국 정부의 환경보호국은 환경오염에 빠진 스프링필드를 돔으로 가둬버린다.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호머 가족을 습격하고 그들은 매기가 발견한 통로로 빠져나가 알래스카로 향한다. 그러나 정부가 스프링필드를 지구상에서 없앤 뒤 새로운 그랜드캐니언으로 위장하려는 속셈을 선전하는 TV광고를 본 마지와 자식들은 스프링필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고 마지못해 호머도 가족을 뒤따라 나선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심슨 가족이 스프링필드를 벗어나는 희귀한 경험을 보게 된다. “호머 심슨식의 <트루먼 쇼>”라거나 “호머 오디세이”라는 말은 그런 뜻에서 붙여졌다. 미국의 대중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내게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세 가지 웃음은 폭스 네트워크를 위한 광고, <오스틴 파워>에서 영감을 얻은 스케이트 보딩 시퀀스, 그리고 물고기를 잡는 독특한 방법이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도중 화면 밑으로 폭스사를 선전하는 문구를 내보내는 장면과 바트가 나체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그의 x추를 교묘히 가려내는 연출의 재치와 물고기를 잡기 위해 호머가 호수를 전기로 지지는 장면이다. 중요한 건 여기에 <심슨> 시리즈의 전통 중 하나인 패러디 장면이 꼽혔다는 것인데, 영화에는 환경보호를 강조한 엘 고어의 영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의 제목을 패러디하여 리사가 ‘짜증나는 진실’(An irritating Truth)에 대해 강연하는 장면이나, 환경운동을 부르짖던 록밴드 그린데이가 썩은 호수로 침몰하면서 전자 악기를 버리고 바이올린을 켜며 <타이타닉>을 패러디하는 장면 등이 들어 있다. 스파이더 피~그, 스파이더 피~그라며 <스파이더 맨>의 주제가를 고쳐 부르는 심슨의 모습을 역시 빼놓을 수 없으며, 톰 행크스가 정부의 정책을 광고하는 모델로 나오는(물론 자신의 목소리로) 장면 역시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이어받은 흥겨운 전통이다. 과욕부리지 않는 깜찍한 코미디 <심슨가족, 더 무비>에 대한 최상의 찬사는 <타임>의 필자 리처드 콜리스가 한 “이 영화의 작은 기적은 당신에게 일말의 두통도 주지 않은 채 (시리즈의) 네배의 시간을 풀어낸다는 것이다. 영화는 스스로의 보폭을 알고 있고 그 개성을 유지한다. 더 무례해지거나 비꼬려고도 하지 않고 더 크거나 나아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시리즈 초반에 제임스 브룩스가 세워놓은 그 룰을 따른다”라는 말일 것이다. 일리가 있다. 물론 <심슨> 시리즈만의 치고 빠지는 식의 조크와 유머가 굵직한 서사 안에서 다소 밋밋해진 면이 있어,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호머가 마치 정장을 갖추고 입 밖으로 음식을 튀기지 않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텔레비전 시리즈의 여러 재미를 안고 있다는 건 공감할 만하다. <심슨가족, 더 무비>를 볼 때 우리를 사로잡는 건 결코 이야기의 매끈함과 인간사의 매너가 아니다. 또한 심슨가와 스프링필드를 통해 미국을 본다는 건 짜릿한 말이며 또 가끔은 그게 사실이지만 그건 너무 호사스런 수긍이다. 그보다 우리는 호머처럼 일상을 유치하고도 나태한 자태로 즐기는 그 캐릭터들의 과장됨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당신은 마지와 리사, 매기의 세계관, 그러니까 착하고 현명한 땅에 결국 도착하겠지만, 당신이 즐거워 웃는 순간은 호머와 바트의 난장판 진창 안에서 놀 때다. 애초에 호머와 스프링필드의 괴팍한 사람들이 대다수 블루컬러라는 건 사실 중요하다. <심슨>은 계층의 조건을 과장되게 유희한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대되는 건 이 영화가 속편에 대한 암시를 남긴 것인데, 그때 늙지 않은 호머의 주접을 보기 위해 다시 기다릴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을 것이다. 호머의 유머가 좀더 괴팍한 블루컬러의 맹렬함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도 이 노란 인간들의 주접이 귀엽다. 누가누가 나왔나 <심슨가족, 더 무비>에 캐스팅된 스프링필드 주민은? 늘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보니 텔레비전 시리즈 <심슨>에는 번갈아가며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에 나오는 조연들도 모두 그 낯익은 얼굴들이다. 그러나 수많은 조연을 모두 주요하게 등장시키기는 건 무리였기에 이번 영화에서는 다소 주변으로 밀려난 캐릭터와 좀더 부각된 캐릭터들로 나뉜다. 짓궂기로 치면 호머와 만만치 않은 마지의 심술궂은 두 쌍둥이 언니 패티와 셀마, 스프링필드의 블루컬러들과는 딴 세상에 살고 있는 원자력 공장의 사장 번즈와 그의 비서 스미더스가 주조연 자리에서 다소 밀린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스프링필드의 일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여전히 한몫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바바바~밤, 바바바~밤, 하며 이십세기 폭스의 로고송이 울릴 때 따라 부르고 있는 소년은 상상력 많고 코 파기 좋아하는 랄프다. 뒤를 이어 갑자기 달나라가 등장하면 거기 이치(쥐)와 스크래치(고양이)가 있다. <톰과 제리>에 대한 심슨판 패러디의 진수이며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애니메이션이지만, 바트와 리사가 공유하는 매우 드문 프로그램이다. 바트가 호머 대신 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되는 옆집 아저씨 플랜더스는 두 아들을 보살피며 살고 있는 착한 홀아비고, 마을에 재앙이 생길 것을 계시하는 할아버지는 심슨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다. 한편, 본의 아니게 재앙의 돼지를 호머에게 건네는 역할을 하게 되는 마을의 변태 엔터테이너 크러스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시건방지게 뉴스를 전하는 앵커, 언제나 사건을 안주 삼고 주정꾼들을 친구 삼는 술집의 주인 모, 사건이 일어나건 말건 수수방관하고 일처리의 무능함과 도넛을 좋아하는 걸로 치면 호머의 거의 유일한 적수인 경찰서장 클랜시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심슨가족, 더 무비>의 성우들이 역시 시리즈의 전통을 따라 여러 역할의 목소리를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호머 역의 댄 카스텔라내타는 20여개의 캐릭터를, 바트 역의 낸시 카트라이트는 7~8개를, 플랜더스 역의 해리 시어러와 경찰서장 역의 행크 아자리아는 각각 10개가 넘는 배역을 목소리 연기한다. 그들이 누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알아맞혀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고보니, 18년을 넘게 해온 이 성우들 역시 스프링필드 지역민으로 쳐줘야 하는 건 아닐까?

호머의 오디세이 <심슨가족, 더 무비>

‘극장용 장편’이라는 개념을 이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경우가 또 있을까?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와 원작 TV시리즈의 결정적 차이라곤 약 4배로 늘어난 에피소드의 길이와 와이드스크린 비율로 넓어진 화면 너비가 전부다. <심슨가족, 더 무비>는 캐릭터와 사건의 성격, 표현 수위, 농담 색깔은 물론, 오락성과 완성도마저 TV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의 평균치다. 요람 격인 폭스사를 놀려먹는 버릇까지 그대로다. 스크린 하단에 방송 예고가 흐르면 “그래요, 폭스는 영화 상영 중에도 채널 광고를 하죠”라는 자막이 뜬다. 뒤집어 말해, 매트 그뢰닝과 제임스 L. 브룩스를 비롯한 <심슨네 가족들>의 창조자들은 텔레비전 우주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마음껏 해보지 못한 작업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극장용 영화로서 <심슨가족, 더 무비>가 구가하는 자유는 주로 공간적 여유다. 관객은 브라운관에서 익힌 스프링필드 시가지를 파노라마, 360도 등의 참신한 앵글로 둘러볼 기회를 얻는다. 횃불을 든 이웃들이 심슨네로 몰려오는 군중신이나 배경 그림에는 3D 표현도 눈에 띈다. 알래스카라는 제2의 배경 역시 다분히 화면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400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온갖 이슈를 건드리고 무수한 문화상품을 패러디해온 <심슨가족, 더 무비>는 환경문제를 장편 소재로 골랐다. 미국에서 가장 심하게 오염된 호수로 뽑힌 스프링필드 호수에서 밴드 그린데이가 경각심을 일깨우는 콘서트를 벌이다 익사한다. 그들의 장례식이 열린 교회에서 호머(댄 카스텔라네타)의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멸망을 암시하는 신의 계시를 전한다. 곧이어 돼지 분뇨와 관련된 호머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스프링필드의 환경 오염을 극히 위험한 수준으로 악화시키고, 예언은 실현된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대통령이 아무 생각없이 이끄는 연방 정부는 스프링필드에 거대한 돔을 씌워 격리한다. 이웃의 분노를 피해 탈출한 심슨 가족은 알래스카로 이주하지만, 정든 고향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안 마지(줄리 캐브너)는 삼남매를 데리고 반성 모르는 남편을 떠난다. 호머에게도 불가피한 각성의 시간이 다가온다. 영화의 흐름은 발단과 전개 대목이 두툼하고 결말이 단출하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용두사미’식 구조는 <심슨네 가족들> 시리즈에서 전통에 가깝다. <심슨네 가족들>의 매혹은 무정부적이고 전복적인 감수성과 밝고 따뜻한 성정이 어우러진 웃음이다. 흔히 평자들은 이러한 양 갈래 미덕의 수원지를 매트 그뢰닝의 진보적 풍자정신과 제임스 L. 브룩스의 휴머니즘에서 찾는다. <심슨가족, 더 무비>에서 “돈 많은 백인 남자가 권력을 잡는 시대가 겨우 왔군”이라는 반즈 회장의 대사가 전자의 예라면, 마지에게 매달리며 “난 그저 다시 당신 옆자리로 돌아와 누울 때까지 다치지 않은 채 하루를 견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뿐이야”라는 호머의 대사는 후자의 예다. 이 가족과 안면이 있는 관객이건 아니건 <심슨가족, 더 무비>는 99%의 확실성으로 웃음을 주는 코미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려낼 수도 없는 촘촘한 패러디와 비주얼 조크, 고도로 함축된 한 줄짜리 농담들은 18년간 그래왔듯 객석으로부터 “나는 이 농담을 이해했다”는 미량의 우월감이 섞인 폭소를 끌어낸다. <심슨가족, 더 무비>에서 호머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깨닫고 리사는 마음에 드는 소년을 만나며, 바트는 성실한 가장인 옆집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하고 은밀히 소망해본다. 장편답게 각각의 인물은 나름대로 성장의 여정을 거친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심슨 가족의 세계를 지탱하는 불문율은, 인물들이 결코 나이 들지 않으며 결코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반복 재생산되는 결점과 과오들을 그리기 위해 이 시리즈는 존재한다. 발전도 없는 이야기를 왜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하냐고? 심슨네 막내 매기가 내뱉는 첫마디 말이 궁금하지 않은지? 그걸로 부족하다면 노출장면도 꽤 포함돼 있음을 첨언한다. 딱히 원하는 인물의 누드는 아니겠지만. 하나 더! <심슨가족, 더 무비>의 엔딩 크레딧은 참을성있는 당신에게 보상할 것이다.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 슈퍼히어로 시트콤의 탄생

keyword | 시트콤 블록버스터 블록버스터가 시트콤이 될 수도 있다고? 저 멀리 1961년 탄생한 <판타스틱4>는 같은 마블 코믹스 영화들인 <엑스 맨> <스파이더 맨> <헐크> <데어데블>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역사로 보건대 사실 그들의 ‘원조’라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다. ‘변이’를 겪은 캐릭터라는 점에서 <엑스맨>이나 <스파이더 맨>과 유사하지만 그들은 매스컴 앞에 전혀 두려움이 없다. ‘일상의 슈퍼히어로’라는 측면에서 <판타스틱4>는 <스파이더 맨>보다 몇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속편인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은 심각함과 상징의 부재 혹은 매스컴 앞에 선 스타로서의 슈퍼히어로라는 점에서 좀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처럼 <판타스틱4> 시리즈는 아기자기한 시트콤이 된 블록버스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스파이더 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고전적인 미국 슈퍼 영웅 만화책들이나 그 만화책들을 기반으로 한 각색물들에 익숙해져 있다가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을 접하면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전편에 언급되는 이들의 태생은 특별할 게 없다. 전에는 평범했던 다섯명이 임무 수행 중 우주선에 노출돼 네명은 슈퍼 영웅이 되고 한명은 슈퍼 악당이 된다. 뻔한 이야기.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얘들은 신분을 위장하지도 않고 가짜 아이덴티티도 만들지 않는가? 왜 뻔뻔스럽게 본명과 맨 얼굴로 공공장소에 나오고 심지어 결혼식에 연예기자들이 총출동하는가? 이들 중 한명은 유니폼에 기업 광고까지 달고 다닌다. 셀레브리티 슈퍼 영웅들 답은 이렇다. 걔들은 원래부터 그랬다. <판타스틱4>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그리고 <배트맨>과 같은 DC 코믹스 캐릭터들이 쌓아올린 미국식 슈퍼 영웅 이야기에 대한 마블 코믹스와 편집자 스탠 리의 대안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스탠 리는 전통적인 미국 슈퍼 영웅 이야기의 과장된 신화를 조금 깎아내고 그 빈자리에 사실주의와 일상묘사를 끼워넣어 슈퍼 영웅이 등장하는 연속극 같은 스타일의 만화책들을 만들었는데 <엑스맨> <스파이더 맨> <판타스틱4>는 모두 그런 시도의 일부다. <스파이더 맨>과 <판타스틱4>의 사실주의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신분을 위장한 고전적인 영웅인 스파이더 맨이 추구하는 사실주의는 평범한 미국 청년인 피터 파커의 일상을 초능력과 슈퍼 악당이라는 돋보기를 빌려 확대하고 과장해 묘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터 파커/스파이더 맨의 모험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들고 연애와 직업 사이에서 고민도 하는 평범한 미국 청년의 일상을 신화화한 것이다. 하지만 <판타스틱4>의 사실주의는 좀더 직설적이다. 시리즈는 일단 말도 안 되는 만화 설정을 통해 그들이 슈퍼 영웅이 됐다고 우긴다. 일단 그렇게 해놓고 그들과 사회가 이 새로운 설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아주 사실적이지는 않다. 사방에서 초능력을 가진 악당들이 쳐들어오고 그들은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역시 설정이라고 받아들이면 <판타스틱4>의 세계는 충분히 사실적이다. 적어도 <스파이더 맨>보다는 사실적이다. 그 결과물은?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들과 비슷한 존재가 된다. 당연한 게 아닐까? 대중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갈망하고 영웅시한다. 몸을 자유자재로 늘리고 투명해지는 것과 같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요안 그리피스나 제시카 알바처럼 생겼다면 파파라치와 연예 프로그램 기자들이 달라붙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오히려 슈퍼 영웅의 초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일상생활에선 늘 구박만 당하고 돌아다니는 피터 파커가 비정상이다. 원래 슈퍼 영웅 공식은 좀 괴상한 구석이 있다. 스파이더 맨은 그래도 가면이라도 쓰고 다니지만, 얼굴 그대로 드러내놓고 다니는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이중생활이 들통 나지 않는 게 말이 되는가? 하긴 원더우먼은 중간에 포기하고 자기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고…. 그러나 <판타스틱4>는 <스파이더 맨>과 같은 깊은 진실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스파이더 맨은 가면을 쓰고 신분을 위장함으로써 자신의 사생활을 정상적인 프라이버시의 영역 안에 감추어둘 수 있다. 하지만 <판타스틱4>의 모든 행동들은 미디어의 관찰대상이 된다. 그 과정 중 진지함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나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이혼 전후에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부부들처럼 진지한 갈등을 겪었고 그 뒤에도 심각한 고통과 마주쳤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과연 타블로이드 신문과 파파라치가 배달한 사진들을 통해 그들의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본 우리에게 과연 그 드라마가 심각하게 느껴지는가? TV 카메라 앞 셀레브리티의 시트콤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그건 개인의 갈등을 진지하게 끌어가려면 일단 프라이버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예로 들 수 있는 멋진 예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더 퀸>(2006)이다. 프리어스와 각본가 피터 모건은 훨씬 자료가 풍부한 공식 일정 속에서 여왕의 드라마를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게 다이애나와 윈저가를 다룬 수많은 TV영화들이 했던 일들이다. 하지만 프리어스와 모건은 기자들이나 매스컴의 방해가 없는 발모랄 궁 안에서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그 안에서 갈등하는 여왕의 모습을 그린다. 이유는 당연하다. 기자들과 TV 카메라는 드라마를 깨먹기 때문이다. 이 공식은 <판타스틱4>와 <스파이더 맨>에도 정확히 일치한다. 액션은 다른 사람들이 봐도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개인의 영역이다. 그 결과 <판타스틱4>는 시트콤이 된다. 그것도 가족 시트콤. 아들들 노릇을 하기엔 휴먼 토치(크리스 에반스)와 씽(마이클 치클리스)이 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인비져블 걸(제시카 알바)과 미스터 판타스틱(이안 그루퍼드)이 모범적인 시트콤 커플로 나와 리드하는 이들 4인조는 분명 시트콤 가족이다. 하긴 원작도 어느 정도 그랬다. 그래도 매스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긴 호흡으로 멜로드라마를 끌어갈 수 있는 만화책과 달리 영화는 거의 순수한 시트콤의 범주에 남는다. 진지한 드라마를 다루기엔 매스컴의 존재감과 농담의 비중이 너무 큰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갈등하는 인물은 주인공들이 아니라 그들이 대항하는 모호한 악역인 실버서퍼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속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고 심각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으며, 그걸 적절한 순간에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금발 미녀에게만 몰래 살짝 털어놓을 수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미디어가 가공하지 않은 진짜 드라마다. 그의 소중한 그런 프라이버시가 나중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실버서퍼>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할리우드 사람들이 공감하는 블록버스터 이 작품을 만든 할리우드 사람들에게는 <판타스틱4>의 모험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스파이더 맨>보다는 <판타스틱4>에 훨씬 더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파이더 맨>이 관객의 삶을 대표한다면 <판타스틱4>는 할리우드 영화쟁이들을 대변한다. 그들이 자기 이야기인 후자에 기우는 건 당연한 일. 매스컴 서커스에 치여 갈등하는 인비져블 걸과 미스터 판타스틱의 갈등 스토리는 할리우드 사람들의 자기 고백이고 선언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우린 우리 사생활을 침입하는 파파라치와 타블로이드가 지겨워! 우리도 남들 방해받지 않고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부르는 한 우리는 계속 당신네들이 보는 앞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겠어! 그게 우리 일이니까!” 이런 고백이 더 좋은 각본과 액션 속에서 나왔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설리반의 여행>(1941)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감동적이지 않은가?

[냉정과 열정 사이] 극장에서 보니, 반갑다 친구야!

나는 <심슨네 가족들>의 팬이다. “그래서 뭐?”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국에서 <심슨네 가족들>을 방영하기 전 90년대 중반부터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에서 를 매주 즐겨보는 팬이었다, 라고 하면 뻥이고, 어쨌든 <심슨네 가족들>을 한국에서 정식 방영하기 전부터 좋아했던 건 사실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 어쨌든 잘난 척하는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잘난 척 맞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 앞에서는 잘난 척을 해서라도 뭔가 내 순정의 오리지널리티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 내게는 <심슨네 가족들>이 그렇다. 언제 이 시리즈를 처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발견이었다. 지금이야 자기반영적 유머의 한 경지를 개척한 <무한도전>도 있고, 막 나가는 찌질이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도 넘쳐나지만 십여년 전만 해도 <심슨네 가족들>의 비꼬는 유머와 거침없는 찌질성은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신선하게 보였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너무나 잘 활용한 귀여움까지 완벽한 삼위일체였다. 한때는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심슨네 가족들>의 대본작가가 됐을 텐데’라는 애석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나의 조크를 수백번 반복해 보고 124번째 되니 지겹다 싶으면 과감히 버린다’는 작가들의 회의 풍경을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하여 <심슨가족, 더 무비>는 당연히 올해 최고 기대작이었다. 반즈 사장과 스미더스 이하 십여명의 캐릭터 목소리를 연기하는 해리 시어러의 증언대로 폭스 간부진이 자체 검열을 할 기회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성공해서 자리잡았다는 이 시리즈가 기민하고 영악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세계에서 10년 이상 영화화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좋았지만 그래서 17년 만에 영화화되는 게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본래 좋으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거다). 개봉 첫날, 뭉게구름이 퍼져나가며 <더 심슨~스> 노래가 나오는 인트로를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에서 볼 때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조차 했다. 이런 10분이나 벌써 지나갔잖아, 70분 밖에 안 남았군, 과자를 먹으면서 그 과자가 없어지는 걸 아까워하는 아이처럼 아까운 80여분을 극장 안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체적인 총평을 하자면 <심슨가족, 더 무비>는 시리즈의 딱 평균적인 수준의 작품이었다. ‘다다다다’라는 허밍을 프롬프터를 보면서 노래하는 그린데이나 정부의 정책 홍보자로 등장해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톰 행크스, 서류 뭉치를 보고서 나는 리드(lead)하려고 대통령질을 하는 거지, 리드(read)하려고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니다라고 발칵하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카메오들의 등장은 즐거웠지만 자기 반영적 유머의 강도가 셌던 것도 아니고, 주요 대박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반즈 사장이 그 못된 소가지와 처참하게 허약한 체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 건 가장 큰 유감이었다.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도넛만 처먹으며 시간을 죽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모우 술집에 처박혀 시간을 죽이는 호머의 그 한심한 일상을 더 디테일하게 보여주지 못한 것도 아쉽고, 알뜰한 주부이자 자상한 엄마인 마지의 그 수많은 빈틈- 파티에 가서 술에 전다든가, 옛날 동창을 만나 바람기에 흔들린다든가- 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아쉽고, 골초에 수염과 다리털 많은 바트의 쌍둥이 이모가 등장하지 않은 건 특히나 아쉬웠다. 그래서 실망스러웠냐면 전혀 아니다. 사실 바트의 친구가 이십세기 폭스사 로고가 나오는 장면에 등장해 그 로고 음악을 열심히 따라 부를 때부터 완전히 녹았다. 반즈 사장은 칫솔에 묻은 치약의 무게로 쓰러질 때 이미 할 만큼 했고, 마지는 알래스카에서의 그 분홍색 속옷만으로 숨겨진 ‘야성’을 보여주지 않았나. 10년 가깝게 <심슨네 가족들>을 좋아해온 지지자들에게 이번 영화는 ‘반갑다, 친구야’ 같은 느낌의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 “왜 텔레비전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걸 극장에서 돈 주고 보냐, 이 바보들아”라고 나를 손가락질하는 호머를 향해 팝콘을 던지며 “우우~” 킥킥거리고 야유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툭툭 치고 설탕 묻은 끈적한 손을 문대며(D’oh!) 반갑게 악수를 한 기분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한계를 깨다

다큐멘터리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기획된 ‘다큐플러스 인 나다’ 두 번째 프러포즈가 준비되었다. 두달 간격으로 진행되는 다큐플러스 인 나다의 프로그램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8시20분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상영된다. 9, 10월 프로그램의 컨셉은 ‘경계에 선 다큐멘터리’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드는 영화들이 마련되었다. 이 영화들을 보면 극영화는 ‘허구’이고 다큐멘터리는 ‘사실’이라는 이분법의 한계효용이 점점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큐의 형식을 차용한 극영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형식인 다큐와 애니메이션의 결합, 다큐와 픽션의 혼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다큐는 재창조되고 있다. ‘페이크다큐’ 형식을 차용한 <목두기 비디오>는 인터넷으로 상영되었을 때, 네티즌이 실화인 줄 착각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몰카 화면에서 귀신의 형상과 목소리가 발견되자 그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은 이 영화는 촬영이나 편집 등에서 텔레비전 추적 프로그램 유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출연진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단골 성우의 해설까지 덧붙여지니 사실 같은 느낌은 한층 강화된다. <고추말리기>는 장희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큐 형식으로 풀어놓은 영화이다. 늘 가사에 시달리는 칠순을 넘긴 할머니와 바깥일에 바쁜 활달한 성격의 엄마, 영화를 한다면서 집에서 뒹구는 딸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항상 불만을 토로한다. 이들 세 여자가 9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할머니의 연중행사 ‘고추말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쌓인 벽을 조금씩 허문다. <택시 블루스>에서 한평 택시 안은 천태만상 서울을 비추는 만화경이 된다. 승객들은 택시에 오르기 전 거쳤던 장소의 온갖 냄새를 안고 와서는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강변하고, 은밀한 사생활을 털어놓는가 하면, 막무가내 주사를 부리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을 조각이불처럼 누벼놓은 이 영화에서 우리는 요지경 속 서울을 발견할 수 있다. 다큐와 픽션이 결합된 중국영화 <당신의 물고기는 안녕하십니까?>는 시나리오작가가 구상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만드는 시나리오작가의 일상이 뒤섞인 몽환적이며, 자기 반영적 영화이다. ‘나’는 20년 전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중국의 최북단 ‘모헤’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이 꽁꽁 언 모헤는 버스도 도서관도 레스토랑도 없는, 20시간 동안 해가 떠 있기도 하는 신비로운 곳이다. <록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 가지> <외딴 섬, 모켄> <자정 1분 전>은 중단편 모음으로 묶여 하루에 상영된다. 전설적인 일본 록큰롤 밴드 <기타 울프>의 내한 공연 과정을 찍은 <록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 가지>는 독특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밴드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와 언행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낸다. 로큰롤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는 ‘가오’, ‘근성’, ‘액션’이라고 주장하는 이 밴드는 그들의 모토에 딱 맞는 삶을 살고 있다. 단지 “건방지다”는 이유만으로 멤버를 뽑는 밴드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할 것이다. 안다만 해의 작은 섬 모켄으로 여행을 떠난 게이 청년 보르의 이야기를 담은 <외딴 섬, 모켄>은 시종일관 경쾌한 분위기로 진행되지만 문명, 자본에 침식당하는 자연과 원주민들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상영시간이 13분인 <자정 1분 전>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이다. 약 1분 정도씩, 호주 노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하였다. 각각의 내용에 맞는 독창적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이질적인 두 형식을 매끄럽게 조화시켰다. <시테 솔레이의 유령>은 마이애미비치에서 두 시간 정도 비행거리에 위치한 아이티 공화국에 살고 있는 갱단의 리더이자 래퍼인 형제 투팍과 빌리를 화면에 담고 있다.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 않는 아이티는 유엔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목되었다. 투팍과 빌리는 아이티의 슬럼가 시티 솔레이에서 “신만이 알고 있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얼굴없는 것들>의 김경묵 감독은 웬만한 포르노그래피보다 충격적인 이 다큐에서 맥락을 읽어달라고 주문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성정체성이나 변태적 성행위가 아니다. 영화는 ‘얼굴없는 것들’로 타자화 된 사람들의 관계를 성이라는 프리즘으로 조명한다. 단 세컷으로 구성된 영화의 1부는 사실에 근거한 재연이고, 2부는 실제 상황을 찍은 필름이다.

[2008 기대작]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

“아직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 뭐가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짧은 시놉시스만을 슬그머니 훔쳐본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는 한강 무인도에 상륙한 남자의 생존기다. 남자 ‘김씨’가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 교각에서 뛰어내린다. 하지만 자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김씨는 한강에 떠 있는 무인도 모래사장에서 눈을 뜬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수영으로 섬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신세. 김씨는 유람선을 향해 살려달라 손을 흔들어보지만 승객은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할 뿐이고, 휴대폰은 텔레마케터와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배터리가 나가버린다. 체념한 김씨는 한강 무인도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보기로 결심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철새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자급자족을 영위하던 김씨에게 어느 날 와인병에 담긴 쪽지가 도착한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망원경으로 남자의 삶을 지켜보던 한강변 고층 아파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여인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한강 교각에 붙은 이상한 존재의 기억으로부터 <괴물>을 떠올렸듯, 이해준 감독은 서강대교 근처에 홀로 떠 있는 밤섬으로부터 <김씨 표류기>의 영감을 얻었다. “다리 아래의 밤섬을 바라보며 한강의 섬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낯설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혹시 저 섬에 남자가 살고 있다면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뒤로는 한강 무인도의 남자라는 존재가 마음속에서 도통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한강 무인도에 상륙한 남자의 표류기라니. 초현실적인 부조리극이 아니라면 지독한 코미디영화의 거친 초안처럼 들릴 지경이다. 물론 <김씨 표류기>의 표류일지는 전자에 닿아 있다. 이해준 감독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나 <캐스트 어웨이>처럼 의식주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육체적인 투쟁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혼자 고립된 사람이 의식주를 모두 해결한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의식주 외에 결핍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결핍이 오히려 고립된 섬에서 채워질 수도 있을까.” 물론 긍정주의자인 이해준 감독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의 소통 가능성을 굳건하게 믿는 듯하다. 히키코모리 여인은 김씨에게 서신을 띄워보내기 위해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벽의 외출을 감행하기 시작하고, 김씨의 삶도 여인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할 것이다. 이해준 감독이 이 부조리한(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내겠다 결심한 이유의 뒤편에는 오랫동안 작가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갑갑함이 도사리고 있다.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온 터라 분명한 이야기적 목적이 없이는 작업을 못했었다. 결국 이야기의 논리 속에서 운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갑자기 갑갑해지더라. 이제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없을까. 이야기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게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김씨 표류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 “섬처럼 떠 있는 인간들의 소통 의지에 대한 우화”로 도달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전히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Key Point: 섬 <김씨 표류기>에서 인간 캐릭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타포이기도 한 ‘섬’이다. 이해준 감독이 최초로 영감을 얻었던 밤섬은 철새 도래지라는 특이성으로 지난 1999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기에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굳이 밤섬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재하는 공간인지 아닌지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 감독의 말이다. “섬 자체보다는 배경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재 밤섬 주변에 있는 63빌딩이나 국회의사당, 공장, 강변 아파트 같은 요소들만 있으면 된다. 섬과 주변 풍경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충돌은 영화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밤섬에서 촬영을 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원하는 이미지의 충돌을 만들어낼 것인가. 대답은 CG밖에 없다. 이해준 감독의 계획은 한강에 있는 섬에서 촬영한 다음 CG로 배경을 만들어서 합성한다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섬을 조망하는 서울의 배경은 진짜가 아니어도 느낌이 괜찮을 것 같다. 오히려 합성한 가짜 티가 나는 것이 영화가 표현하려는 섬의 고립감이라는 부분에 더 근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해준 감독은 한강의 다른 섬에서 타이트하게 촬영을 마친 뒤 후반작업에 최대한의 공을 들일 예정이다. 제작 영화사 반짝반짝 촬영예정 2008년 봄 개봉예정 2008년 가을 예상 제작비 27억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부모 심층인터뷰

대화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는 거 안다. 하지만 죽도록 안 한다. 열살 먹은 우리 아들은 하루 종일 유희왕 카드만 쳐다본다. 용돈이 생기면 문방구로 달려가 카드부터 고른다. 전화통을 몇 시간씩 붙들고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90%는 유희왕 카드에 관한 거다. 아빠 얼굴 한번 쳐다볼 때 유희왕 카드는 100번도 넘게 들여다본다. 조근조근 말을 붙일라치면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해진다. “바쁘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 달라질까? 중딩, 고딩 자녀를 둔 선배들에 따르면 “네버”다. 어쩌면 “포에버”일지도 모른다. 성장할수록 아이들은 따로 놀고 싶어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오른 뒤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없다. 몇 마디 ‘서바이벌 영어’로 나 홀로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지나치게 간단한 한국어 회화로만 부모와의 시공간을 유영했던 건 아닐까. “밥 줘, 학교 갑니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같은…. 어머니는 늘 딸 같은 살풋한 말 상대를 원했지만, 무뚝뚝한 아들은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으며 수다를 떤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버지와는 더욱 그랬다. 소가 닭을 볼 때 그럴 것이다. 마지막 병상에서조차, 진심을 담아 살가운 애정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한달 전 고향집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14년 전 돌아가셨지만, 당신의 손때가 묻은 서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서가엔 아버지가 생전에 구입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닌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단정했다. 9시뉴스가 흐르는 텔레비전 앞에서 의견일치를 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모르겠다. 서재의 책들을 차분히 들여다보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문학과 사회과학, 신학에 관계된 상당수의 책들은 평소 아버지의 지론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그것들을 다 읽었을까? 그저 단순한 책 수집 욕심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서가를 뒤지다 낡은 사진첩도 발견했다. 틈틈이 찍은 풍경사진을 모은 뒤 사진들 밑에 꽤 긴 감상을 끼적거린 일종의 수상록이었다. 표지엔 ‘1965’라고 연도가 표기돼 있었다. 그때 나이, 서른. 앨범의 글 속엔 유독 ‘고독’이라는 낱말이 자주 등장했다. 치기어린 감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고독에 몸서리치도록 만든 사건이 있었을까. 사회 전체가 압축성장으로 질주하던 그 시기에, 아버지는 무슨 희망을 안고 살았을까. 보람과 기쁨을 어디서 얻었을까.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한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국사나 세계사 시험 준비를 하듯 부모의 역사를 요약 정리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건 ‘대화’ 따위의 수준으로 가능하지 않다. ‘심층 인터뷰’가 필요하다. 얼마 전 일본 추리소설을 읽다가 가족을 상대로 ‘심층인터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레몬>에서 고등학생 딸이 ‘아버지의 자서전 쓰기’ 방학숙제를 위해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죽은 아버지의 옛 지인들을 만나 조사를 벌이는 내용이었다. 범인을 쫓는 소설의 맥락과 관계없이, 그 부분이 유독 참신하게 와닿았다. 아버지가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누구와 친했고, 누구와 사이가 나빴는지, 특기할 만한 사건은 무엇이었는지를 기자나 수사관처럼 캔다는 게 신선할 따름이었다. 그 소설처럼 해보면 어떨까. 이왕이면 옛 지인이 아닌 어머니나 아버지 본인을 직접 심층 인터뷰한다면 더 좋겠다. ‘인터뷰이’가 ‘인터뷰어’를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접하고, 민감한 질문에도 솔직히 답변해준다면 특종(!)이 터질 게다. 까마득히 몰랐던 가족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쏟아지고 각종 의혹이 풀릴 테니까. 부모가 전혀 다르게 보이면서 가족에 대한 이해가 상상을 초월하여 깊어질 거라 추측된다(아, 물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역사는 수많은 개인사의 퍼즐로 이뤄진다. 개인의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기억들은 역사의 피와 살과 뼈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역사학자들은 “개인적인 것은 역사적이다”라고 말한다. 그 어떤 무지렁이 할머니일지라도 그의 전 생애를 ‘구술’받으면 의미있는 역사의 한 자락이 더듬어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심층 인터뷰하다 보면 그때의 사회상과 트렌드, 정치적 배경이 자연스레 포착될 거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방학숙제나 리포트로 ‘부모 심층 인터뷰’를 시켰으면 좋겠다. 가족과 역사 두 마리 토끼 잡기다. 유년의 기억에서 연애나 직장생활, 해외여행 경험, 정치적 태도 등 두루두루 구체적으로 묻고 기록하도록 하자. ‘87년 6월’, ‘97년 외환위기’ 등 특정 시기로 주제를 좁혀도 좋다. 그 기록을 함께 공유한 뒤 가족 야사 자료로 남기면 훌륭한 가보가 되지 않을까. 추석이 코앞이다. 고스톱만 치지 말고 가족을 심문해보자.

[제12회 부산영화제 추천작] 서방견문 西方見問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and 2 Days 크리스티안 문주 | 2007년 | 113분 | 35mm | 루마니아 | 월드 시네마 낙태가 금지된 차우셰스쿠 독재하의 1987년 루마니아. 오틸리아는 기숙사 친구인 가비타가 불법 낙태를 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던 중 불법 낙태 시술자를 고용한다. 사실 모든 것은 간단하게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몰래 낙태를 시술하기 위한 호텔방도 잡았고 돈도 모았다. 하지만 가비타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인해 괴물 같은 낙태 시술자는 점점 더 위험한 대가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200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낙태의 윤리적인 대가 따위에 대한 쓸모없는 언변을 늘어놓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크리스티안 문주는 낙태한 아기를 싸들고 칠흑같은 거리를 내달리는 오틸리아의 뒤를 아무런 인공조명도 없이 핸드헬드 카메라로 뒤쫓고,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비타의 모험은 사회와 제도의 부조리에 걸려든 인간의 지옥을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투영해낸다. 미학적인 통제와 윤리적인 문제제기가 합일을 이룬, 대담하고 불편한 걸작이다. 남은자는 침묵한다 The Rest is Silence 나에 카란필 | 2007년 | 140분 | 35mm | 루마니아 | 월드 시네마 1911년의 루마니아. 연극 흥행사 아버지를 둔 그리고레는 터키와의 독립전쟁을 다룬 극영화를 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요즘도 그렇다시피) 블록버스터 제작에 뒤따르는 문제란 한두 가지가 아니며, 당시의 루마니아 문화층은 영화란 저급한 노동자들을 위한 싸구려 오락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자본을 구하거나 저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데 시련을 겪던 그리고레는 심지어 당대 무성영화 배급의 거성이었던 프랑스의 고몽영화사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또 다른 독립전쟁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역사적 실화에 바탕한 <남은자는 침묵한다>는 이십대의 몽상가 청년이 루마니아 역사상 첫 번째 극영화 <루마니아의 독립>을 완성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다. 할리우드의 문법을 빌려온 뒤 목에 힘주지 않고 자국의 역사적 텍스트를 오락거리로 풀어내는 이 작품은 21세기 동유럽 대중영화의 활달한 진화상처럼 보인다. 솔직한 말로, 기술적인 요소부터 극적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웰메이드에 근접한 한국 대중영화는 별로 없다. 악단의 방문 The Band’s Visit 에란 콜리린 | 2007년 | 85분 | 35mm | 이스라엘 | 오픈시네마 정치적 발언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중동의 평화를 부르짖을 수 있을까. <악단의 방문>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하는 영화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경찰관악단이 공연을 위해 이스라엘 공항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마땅히 나와야 할 안내인이 보이지 않자 근엄한 단장은 스스로 공연장으로 갈 수 있다면서 악단을 끌고 공항 밖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방문이 처음인 이들이 길을 제대로 찾을 리 없는 일. 결국 외딴 지역에 떨어진 이들은 조그만 식당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들 악단원들과 식당 식구들이 함께 보낸 하룻밤을 그리는 <악단의 방문>은 자잘한 에피소드를 통해 정치·문화·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도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로맨틱하게 말이다. 정교한 시나리오와 훌륭한 연기, 그리고 넉넉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악단의 방문>은 올해 칸영화제 마켓에서 ‘최고의 쏠쏠한 발견작’으로 손꼽혔을 정도로 대중성 또한 품고 있다. 아빠의 화장실 The Pope’s Toilet 엔리케 페르난데스, 세자르 샬론| 2007년 | 97분 | 35mm | 브라질, 우루과이, 프랑스 | 월드 시네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루과이의 가난한 마을 멜로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주민들은 교황을 보기 위해 몰려들 수만명의 순례객에게 음식을 팔아 한밑천 거둘 계획을 세운다. 밀수꾼 베토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중 앞뜰에 유료화장실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수만명의 사람들로부터 화장실 사용비를 받는다면 까짓 딸 대학입학료 정도는 거뜬히 벌 게 분명하다. 과연 그들의 가난은 구제될 것인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빠의 화장실>은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영화다. 8천명이 몰려들었으나 대부분은 멜로 주민들이었고, 브라질 순례객은 겨우 400명에 불과했다. 겨우 10여분을 머문 교황은 가난을 구제하는 신의 천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종교에 대한 희망을 버렸을지언정 삶에 대한 희망만은 버리지 않은 베토 부녀의 모습을 비추며 따스하게 막을 내린다. 공동감독인 세자르 샬론은 <시티 오브 갓>과 <콘스탄트 가드너>의 촬영감독 출신. 긴박한 첫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이 압권이다. 다이빙 벨 앤 더 버터플라이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줄리언 슈나벨 | 2007년 | 112분 | 35mm | 프랑스 | 월드 시네마 패션지 <엘르>의 편집장인 장 도미니크 보비(마티유 아말릭)는 어느 날 돌연 의식을 잃는다. 병상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육체가 마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식은 멀쩡한데 육체가 마비되는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에 걸린 그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왼쪽 눈뿐이다. 한동안 신세를 비관하던 그는 병원의 도움으로 왼쪽 눈을 깜박여 알파벳을 지적하면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이빙 벨 앤 더 버터플라이>는 보비가 1995년 감금 증후군에 걸려 15개월 뒤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책 <잠수복과 나비>에 기반한 영화다. 몸은 사지를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구식 잠수복 안에 갇혀 있지만 영혼만큼은 나비처럼 자유로웠던 한 사람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삶의 소소한 슬픔과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특히 보비의 시점만으로 보여지는 영화의 초반부는 압권이며, 기괴한 육체에 갇힌 아름다운 영혼을 온몸으로 보여준 마티유 아말릭의 연기 또한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 할람 포 Hallam Foe 데이비드 매킨지 | 2006년 | 95분 | 35mm | 영국 | 월드 시네마 제이미 벨의 팬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매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가치가 있는 기이한 성장영화. 시골의 거대한 저택에서 아빠와 살아가는 할람 포는 어딘가 비뚤어진 사춘기 소년이다. 젊은 새엄마 베리티가 엄마를 익사시켰다고 믿어온 그는 자신을 추궁하는 베리티와 우연히 섹스를 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며 몰래 에든버러로 도주한다. 나무에 엄마의 재단을 만들 만큼 병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할람은 엄마를 쏙 빼닮은 지배인이 근무하는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일하게 되고, 에든버러 시내의 높은 지붕들을 스파이더 맨처럼 타고 올라 그녀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기 시작한다. <영 아담>의 데이비드 매킨지가 감독한 이 기묘한 블랙코미디는 군데군데 <피핑 톰>식 스릴과 성적인 긴장감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지나치게 나아가는 법 없이 할람의 비틀린 청춘을 쓰다듬는다. 동물적인 청춘의 호르몬을 발산하는 제이미 벨의 연기는 대단히 훌륭하다. 우리시대 청춘배우의 매력이 보석처럼 빛난다. 컨트롤 Control 안톤 코빈 | 2007년 | 119분 | 35mm | 영국 | 월드 시네마 미국에 커트 코베인이 있다면 영국에는 이언 커티스가 있었다. 커티스의 밴드 ‘조이 디비전’은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 운동이 금세 사그라진 영국에서 뉴웨이브 록의 서막을 열어젖힌 선구자였다. 하지만 두 번째 앨범이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하루 전, 보컬이자 리더였던 스물세살의 이언 커티스는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을 맴으로써 록의 불운한 전설로 남고 만다. U2와 너바나 같은 록밴드들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했던 안톤 코빈은 요절한 록스타의 삶을 되살리기에 아주 적절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톤 코빈이라는 존재는 <컨트롤>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영상예술가 중 한명인 그는 지나치게 세련된 감각으로 미장센을 재단하는 데 바빠서 눅눅하고 절망적인 80년대 초 영국 청춘들의 공기를 잡아내는 데는 은근히 인색하다. 그러나 커티스를 똑 닮은 샘 라일리가 조이 디비전의 초기 공연들을 재현하는 순간, 그가 소름끼치는 명곡 를 주술처럼 읊는 순간, 커티스의 팬들이라면 솟아오르는 감정을 컨트롤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아버지 Our Father 크리스토퍼 잘라 | 2007년 | 110분 | 35mm | 미국 | 월드 시네마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아들은 둘이다.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잘라의 영화 <아버지>는 뉴욕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 아들의 여정을 담는다. 어릴 때 부모가 헤어져 단 한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페드로는 간직하고 있던 편지와 주소만을 갖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험난한 길을 지나 겨우 뉴욕에 도착하지만 이미 가방을 도둑맞은 상태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또래의 남자아이 주안이 그의 가방을 들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후 아들 행세를 하는 주안과 아버지의 관계를 약간의 유머와 눈물에 담아 보여준다. 비극의 이야기가 경쾌하거나 관조적인 리듬으로 진행되는 건 선댄스 출품 영화들의 전형성 그대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돌변한다. 가짜 아들은 진짜 아들의 자리를 지우고 아버지는 엄청난 희생을 오해 속에 짊어진다. 뉴욕의 멕시코 체류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육중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 순간이다. 부자관계로 시작했지만 거짓말과 아이러니가 판치는 현실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달링 Darling 요한 클링 | 2006년 | 90분 | 35mm | 스웨덴 | 월드 시네마 스톡홀름에 사는 유복하고 아름다운 처자 에바에게 삶의 무게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내 중심가의 구치 매장에서 일하는 건 신분의 표상이며 잘생긴 남자친구를 소유한 건 신분에 뒤따르는 포상이다. 하지만 그녀의 지위는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구치에서는 건성으로 일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단 한번의 바람 탓에 남자친구는 떠나고, 재정적인 물주였던 엄마마저 새살림을 차려 나가고 만 것이다. 이제부터는 홀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지만 마땅한 직장도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친구들마저 등을 돌리고 만다. 극도의 수치심을 무릅쓰고 맥도널드에서 감자를 튀기기 시작한 에바는 이제 50대 점원 베르나르드와 교류하며 세상의 잔혹한 섭리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급강하하고 친구들로부터 버림받는 철없는 부르주아 처녀의 암울한 처지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단 한번도 주접스러운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무심한듯 세련된 기운이 아주 ‘스웨덴적’이라고나 할까. 할리우드나 충무로에서 리메이크 판권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만한 영화. 문유랑가보 Munyurangabo 리 아이작 정 | 2007년 | 97분 | 35mm | 르완다, 미국, 홍콩 | 플래쉬 포워드 르완다 내전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극 중 하나였다. 후투족은 50만명의 투치족을 살해했고, 투치족은 100만명의 후투족을 살해했다. 이 무시무시한 살육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호텔 르완다>의 DVD를 빌리는 것이 편리하고도 감동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궁금한 관객이라면 재미동포 2세 감독 리 아이작 정의 아름다운 데뷔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고아소년 문유랑가보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친구 상그와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상그와는 오랫동안 헤어졌던 부모와 살기 위해 고향집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문유랑가보는 홀로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문유랑가보는 여정의 끝에서 복수라는 칼날을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문유랑가보>는 겨우 3만달러의 제작비로 완성한 초저예산영화다. 35mm로 블로업한 화면은 어둡고 거칠어서 가끔 눈이 쓰라리다. 하지만 컴컴한 화면에 오롯이 박혀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와 얼굴들은 영화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망막에서 쉬이 거두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것을 ‘이미지의 진정성’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노란 집 The Yellow House 아모르 하카르 | 2007년 | 83분 | 35mm | 알제리, 프랑스 | 월드 시네마 죽은 아들의 시신을 찾아 길을 떠나는 남자는 말한다. “신이 원하시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아모르 하카르 감독의 영화 <노란 집>은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가슴을 울리는 영화다. 결혼 행렬이 시끄러운 가운데 물루드는 아들 벨케즘이 이틀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는 시신을 찾아 바트남 지역으로 향한다. 군사지역을 통과하기 위한 허가를 받고, 경운기 위에는 경광등도 단다. 난황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정은 이외로 쉽게 끝나고 물루드는 두 번째 문제에 부닥친다. 부인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후 물루드는 부인을 위해 강아지를 사고, 텔레비전을 가져온다. 슬픔을 치유하는 색이 노란색이란 말에 집도 노랗게 칠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영화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태도에서 아름다운 마술을 발견한다. 노란색 집과 어울린 풍광의 여유와 고난과 행복을 관조하는 듯한 아프리카 음악은 이들의 슬픔이 정말로 치유되고 있다는 믿음을 안겨준다. 직접 물루드로 출연한 아모르 하카르 감독의 연기도 돋보인다. 나쁜 버릇 Bad Habits 시몬 브로스 | 2007년 | 98분 | 35mm | 스페인 | 월드 시네마 어쩌면 식탁이란 수많은 비밀이 오가는 자리가 아닐까. 함께 모여앉아 음식을 나누는 가족들조차 고기를 써는 나이프 아래 저마다의 욕망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 시몬 브로스 감독의 <나쁜 버릇>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의 문제를 침묵 속에 달그락거리는 접시와 포크 위로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40kg이 조금 넘는 깡마른 어머니는 도통 먹으려 들지 않고, 그녀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아버지는 육감적인 여대생에게 끌리며, 다이어트를 강요받는 통통한 딸아이는 먹을 것에 집착한다.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수작. 음식과 관련된 갖가지 ‘나쁜 버릇’들은 심리적 기제로 영리하게 치환되며, 다소 거칠고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들은 매번 의미심장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극에 비밀스러운 기운을 더하는 인물들의 내밀한 연기도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에서 광고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는 시몬 브로스 감독의 경력이 긴장감 넘치는 데뷔작을 내놓는 데 큰 밑천이 됐을 듯. 2007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기도 했다.

[LA] 현대적 해석으로 다시 살아나는 서부극

동명의 57년작을 리메이크한 서부극 <결단의 순간 3:10>가 비평과 흥행에 청신호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 <브레이브 원>에 박스오피스 1위를 내주긴 했지만 관객과 비평계의 반응이 좋아서 입소문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브래드 피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또 하나의 서부극 <제시 제임스의 암살> 역시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등, 한때 지나간 유행이라 치부하던 서부영화는 캐릭터의 현대적인 해석을 무기로 하나둘씩 또다시 극장에서 붐을 일으킬 조짐이다. 서부극은 이미 TV쪽에서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지 오래다. 절찬리에 방영된 의 <데드우드>를 비롯해 지난 9월16일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로버트 듀발) 및 조연상(토머스 헤이든 처치)을 휩쓴 <브로큰 트레일>에서도 TV계에서의 서부극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인들에게 ‘서부’의 시대정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한데, 그것을 바탕으로 좀더 복잡하고 현대적인 캐릭터의 관계를 흥미롭게 창조해낸 TV작가들의 매력적인 시나리오가 지금과 같은 인기의 바탕이 됐다. 서부극에 대한 열정은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7월 <블레이드 러너>의 파이널 컷을 홍보하기 위해 샌디에이고 코미콘을 찾아온 리들리 스콧 감독은 차기 프로젝트로 좋은 서부극의 시나리오를 찾는 중이라고 밝혔고, <프랙티스>와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TV 에피소드 감독인 로드 하디 역시 첫 장편영화인 <디셈버 보이>의 개봉시 참석한 인터뷰에서 차기작으로는 서부극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서부극을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감독으로는 이미 <늑대와 춤을> 등으로 장르에 익숙한 케빈 코스트너도 있다. 대체 왜 갑자기 서부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일까. <사이드웨이>로 커리어의 반환점을 밟았던 에미상 수상자 토머스 헤이든 처치는 지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서부극에 대한 러브콜은 “이 장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신들 세대의 바람”이라고 말한다. 산업의 중심이 코믹북 장르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로 옮겨가버린 지금 이 시점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가는 나이 든 세대가 자신들에게는 특별했던 장르인 서부극의 부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드 하디 감독은 “앞으로만 달려온 우리가 이제는 과거를 한번쯤 되짚어볼 때가 된 것이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는 <배틀스타 갤럭티카>로 현실적인 미래상을 다루었듯이,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재가공된 과거로서의 서부극을 꿈꾸고 있다. 서부극 장르의 매력은 끝없이 펼쳐진 서부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은 대자연, 그 위를 달리는 야생마들. 황량하게 펼쳐진 대지 위의 생존 법칙은 원초적이고 잔혹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분명해서 매력적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도시가 만들어지기 전, 도시의 원형 속에서 서부극의 카메라는 거대한 자연과 그 속의 인간들이라는 대비를 통해 시적인 화면을 잡아낸다. 금요일 밤 할리우드 아크라이트 극장에서 <결단의 순간 3:10>의 상영이 끝나자 박수를 치며 만족한 듯 극장을 나서던 사람들은 젊은 관객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가 전 세대의 희망사항을 받아줄지는 아직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