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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알고 봅시다] 일본을 울린 눈물의 힘은 원작소설

오다기리 조의 출연작 중 유일하게 일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던 영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2006년 일본을 휩쓴 도쿄타워 신드롬의 영화판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배우 오다기리 조가 어떻게 대중의 마음을 울렸는지 그 비결은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에 담겨 있다. 일본인들의 꿈과 향수, 평생의 고향 어머니에 대한 눈물이 유머와 함께 묻어나는 이야기. 2006년 한해 일본을 울린 도쿄타워의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도쿄 드림의 상징, 도쿄타워 ‘연인과 함께 도쿄타워에 갔을 때 불이 꺼지면 그 사랑은 영원하다’는 믿음이나, 에쿠니 가오리가 소설 <도쿄타워>에서 묘사한 금지된 사랑의 피난처처럼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도쿄타워를 단지 낭만적인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일본의 중년들에게 도쿄타워는 꿈의 상징이다.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당시 일본의 경제상황과 맞물려 수많은 젊은이들이 물밀듯이 상경했고, 고속철도인 신칸센 개통, 넘쳐나는 공장과 치솟는 땅값에 일본 정부는 도쿄 주변에 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도쿄라면 언제 어디서든 보이는 도쿄타워는 ‘도쿄 드림’의 상징. 1958년 철탑으로는 세계 최고인 333m로 지어져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호의 중계 스테이션으로 쓰였고, 이후 전망대, 수족관, 갤러리 등의 시설들이 들어서며 도쿄 시민들의 오락 공간이 되었다. 현재도 도쿄타워는 <후지TV> <아사히TV> 등 거의 모든 방송사의 전파를 송출하고 있다. 2006년 일본을 휩쓴 도쿄타워 바람 영화의 모태가 된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는 일본의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2006 서점대상’의 대상 수상작이다. 릴리 프랭키와 재일 한국계 소설가 유미리, 문예평론가 후쿠다 가즈야 등이 함께 창간한 동인문학지 에 연재되기 시작해 2005년 6월28일 단행본으로 발매됐고, 2006년 1월에는 판매고 100만부를 돌파했다. 2006년 10월31일에는 누적 2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작가인 릴리 프랭키가 자전적인 경험을 그대로 녹여서 쓴 소설은 70년대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해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의 소설가이자 TV프로듀서인 구제 데루히코는 “히라가나로 쓰여진 성서”라고 평했다. 일본인들 사이에선 “우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다면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 건 위험”이란 말이 돌았을 정도. 2006년 11월에 단막극 드라마를 시작으로 2007년 1월부턴 하야미 모코미치 주연의 연속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2007년 5월엔 오다기리 조의 영화가, 2007년 7월에는 무대에서 연극으로 선보였다. 릴리 프랭키는 누구? 작가의 이름만 들으면 이 소설이 일본 소설이 맞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를 쓴 작가 릴리 프랭키의 본명은 나카가와 마사야.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과 동일하다. 릴리 프랭키는 그의 펜네임으로 대학교 때 단짝친구와 어울려 다니던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장미와 백합’(로즈와 릴리) 같다고 말해 붙여진 이름이다. 뒤의 프랭키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일본인인지 외국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을 갖고 싶어서” 본인이 나중에 붙인 것. 한때는 영국 밴드 Frankie Goes To Hollywood나 일본 록밴드 BLANKEY JET CITY를 자신의 펜네임으로 쓰기도 했다. 소설가, 에세이스트, 그림책 작가, 아트디렉터, 디자이너, 뮤지션, 연출가, 포토그래퍼 등 셀 수 없이 많은 직업을 겸하고 있으며, 작사나 작곡을 할 때는 엘비스 우드스탁이란 이름을 쓴다. 탤런트 야스 메구미와 함께 리리메구라는 이름으로 CD를 내기도 했으며, 스마프 멤버 기무라 다쿠야의 솔로곡 <당신이 있어>의 가사를 썼다. 눈물 뒤에 숨겨진 괴짜 영화에선 많이 생략되어 있지만 소설과 릴리 프랭키가 직접 고백하는 자신의 진짜 이야기는 좀더 엽기적이다. 외할머니 댁을 떠나 엄마와 새로 찾은 집은 이미 폐허가 된 옛 병원 건물이었고, 도쿄에 올라와 돈이 떨어졌을 때 그는 예전에 헤어졌던 여자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어덜트 비디오 콘테스트인 ‘AV OPEN 당신이 결정한다, 세루어덜트비디오 일본 결정판’의 명예 총재, ‘일본미녀선발협회’의 전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괴짜인데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를 발매하면서는 이 책이 모든 이에게 소중하게 다루어졌으면 좋겠다며 “더럽혀지기 쉬운 하얀 표지”로 만들어달라 주문했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상습 지각범이지만 부탁받은 일은 거절하는 일이 없으며, 한창 많이 글을 쓸 때에는 동시에 30편의 작품을 연재하기도 했다.

<무한도전> 인기 비결에 대한 잘못된 재해석

무개념, 무형식, 무스타 등 3무(無)을 표방하며 MBC <무한도전>의 대항마로 지난 9월22일 출격한 SBS 토요버라이어티프로그램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은 언뜻 ‘눈에는 눈’의 맞불 전략을 구사 중인 것처럼 보이며 예능프로그램의 최신 경향을 따끈하게 대변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일본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움직이는 벽’까지 수입(?)해 준비된 아이디어와 잘 짜인 형식의 힘을 발휘하려 했지만 실패한 전례(<작렬! 정신통일>)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이 프로그램은 <무한도전>식 ‘리얼리티’와 ‘빈틈 많은’ 캐릭터들의 단체 플레이를 한층 강도높게 사냥하고 있다. 이번에도 일본 TBS <링컨> 등 옆나라 예능프로그램에서 재료를 차용한 흔적이 다분하다. 그러나 더블 MC인 이경규와 김용만을 비롯해 김구라, 신정환, 윤정수, 김경민 등 출연진이 매주 어디에서 어떻게 톡톡 튀는 아이템을 소화하느냐보다 얼마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막 노느냐가 더 중요한 터라 ‘못난 따라쟁이’라는 논점은 일단 제쳐도 무방할 듯싶다. <…라인업>은 이른바 ‘짠 개그’에 대한 거부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웃기려는 의도, 연출 등의 흔적이 나타나면 ‘너 때문에 <무한도전>의 시청률이 1% 더 올라하게 생겼다’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대신 B급을 자처한 이들이 ‘리얼리티’를 위해 택한 것은 다른 사람의 못난 곳, 아픈 곳을 들춰 망신을 주는 애드리브의 속공이고, 거침없는 수다의 카니발이다. MBC <황금어장>의 ‘라디오 스타’라는, 출연진 모두가 서로 말하느라 정신없는 또 하나의 ‘무’(無)투성이 토크쇼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김구라는 각본없는 ‘프리스타일’의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물 만난 고기마냥 ‘독설가’, ‘욕쟁이’ 등의 캐릭터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물론 강아지 그림을 덧붙인 ‘새끼야’라는 욕설까지 내뱉어 ‘가족들이 시청하는 시간대에 어디 무엄하게’라는 준엄한 꾸짖음도 된통 들었지만 말이다. 아예 막장 버라이어티라는 고약한 정체성도 내건 이 프로그램에서 반말은 기본이다.‘야’, ‘개미라도 퍼먹든지’, ‘별 나부랭이’, ‘난쟁이’ 등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언행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김구라의 욕설방송 이후 제작진은 사과문까지 홈페이지에 올렸지만, 실제로는 더 심한 욕도 입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 ‘리얼리티’ 한번 제대로 하겠다는데 너무 혼내시는 것 아니냐고 속으로 야속해했을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인들이 멋진 폼 잡지 않고, ‘우리도 똑같이 웃통 벗고 논다’를 외치며 사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엿보기와 공감의 쾌감을 적잖게 자극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전제한 ‘리얼리티’에는 친밀하다는 게 얼마든지 타인의 영역을 넘나들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예의없음과 일맥상통한다는 착각이 담겨 있다. 프리스타일의 개그와 유희가, 치밀하고 창의적인 ‘얘깃거리’의 제조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짠 개그’를 통달한 다음에야 가능한 고수의 영역이라는 점도 간과하고 있다. 또한 유명인에 대한 엿보기로 시청자를 몰입과 쾌감의 롤러코스터에 태우려면 해당 예능인의 재능과 노력에 대해 기본적인 존경심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이 연민과 애정과 웃음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호감있는 캐릭터로서 존재해야 한다. <…라인업>은 <무한도전>과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단지 뭔가 앞과 뒤, 위와 아래를 거꾸로 입은 듯한 놀림거리의 자학성만 강하게 풍기고 있다.

[내 인생의 영화] <브루스 브라더스> -박현욱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아쉬운 건 무단결석 한번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무단결석보다는 연애를 못해봤다는 것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에는 다른 친구들도 대개 그러했으니 크게 억울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십대에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정을 겪어보지 못하고 그 시기를 넘어간 건 아무래도 인생에서 뭔가 손해를 본 것 같다. 무단결석은 그 다음으로 아쉬운 일이다. 학교와 집 밖에 모르고 매일이 꽉 짜여 있던 시절, 텅 비어버린 하루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일까. 우리 이후의 세대들을 보면 이른바 범생이든 날라리든 무단결석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무단결석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83년이던가. 어느 일요일을 기억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혜은이가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 밑에 공습경보를 알리는 자막이 깔렸다. 국민 여러분, 이 방송은 실제방송입니다. 전국을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던 그 자막은 북한 공군 장교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남으로 넘어올 때 귀순인지 남침인지 파악이 되지 않던 시점에 나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 일이 한번 있으면 으레 뒤따르는 행사가 있었다. 이내 여의도에 수십만 군중이 모여 북한 괴뢰에 대한 규탄대회를 여는 거였다.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제 규탄대회에 수십만 군중이 동원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만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삐리들도 인원 동원에 빠질 리 없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학교 하루 안 가면 무조건 그게 더 좋은 거려니 하면서 여의도로 향했다. 한두명도 아니고 수십만명이 모이는데 거기서 어떻게 우리 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지점을 찾고, 담임을 찾아 출석 체크를 하겠는가. 게다가 그날은 비까지 내렸으니 그냥 하루 땡땡이를 치고 나중에 담임을 못 찾았다고 뻥을 쳐도 그럭저럭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의도 광장에서 수십만개의 우산을 헤집은 끝에 담임을 찾아내어 출석 체크를 했다는 사실. 그야말로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석하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재지변이 있던 날에도 우리는 학교에 갔다. 1983년의 초가을에 있었던 기록적인 수해. 뭔일만 있으면 규탄해댔던 북한 괴뢰가 본분을 망각하고 인도주의에 근거, 원조물자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어찌나 비가 많이 왔던지 산 중턱에 있는 학교에 올라 보니 운동장이 커다란 호수가 되어 있었다. 운동장에 고인 물은 허리 높이까지 차올랐다. 학교 주변 언덕길에 있는 담벼락들은 물줄기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내렸고 그 사이로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결국 휴교령이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학교에 갔다. 한 시간 늦은 놈도 있고, 두 시간 늦은 놈도 있고, 세 시간 늦은 놈들도 있었지만 모두들 어찌어찌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서 학교에 왔다. 합법적으로 눈치껏 결석할 수 있는 기회에도 그렇게들 기어이 학교에 왔으니, 무단결석의 개념이란 우리의 머릿속에 아예 탑재되지 않았던 거다. 그 무렵, 나는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무슨 고뇌였는지 간단히 말하자면, 도대체 사는 게 뭔지! 하는 거였는데, 어느 날엔가 고뇌가 너무 깊어져서 도저히 학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더라는 거지. 그리하여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야간자율학습을 쌩까고 교문을 나섰다. 이렇게 말하면 비웃을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도 조금은 쪽팔리지만, 고등학생 때 담배 한 모금, 술 한 방울 입에 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나름대로 커다란 일탈이었다. 막상 교문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고뇌를 안고 집에 갈 수야 없는 노릇. 버스에 올라타고 시내로 나갔다. 서대문, 광화문, 종로. 서울 변두리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곳이 서울의 중심이었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세상의 중심의 문턱, 서대문에 내려보니 갈 곳 없는 나 같은 청춘을 위해 아줌마들이 영화 할인 티켓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브루스 브라더스>, 푸른극장. 세상에는 스크린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화도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나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원없이 웃어댔다. 인생에 대한 고뇌? 사는 게 뭔지? 알게 뭐냐. 인생은 아름다워라.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 한편으로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는 건 거짓말이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세상, 스크린 속으로 빠져드는 건 행복하여라. 그때부터 극장에 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버스 토큰 두개와 극장비만 있으면 시내로 나갔다. 이후 <브루스 브라더스>보다 더 웃기고 더 재미있는 영화도 많이 보았다. 묵직한 감동을 준 영화도 많다. 슬픔에 잠기게 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 짓게 한 영화도 많다. 그 수많은 두 시간짜리 행복들을 뒤로하고 <브루스 브라더스>를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일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영화로 인해 극장에서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곧 내 인생의 첫 영화인 셈이다. 그런 영화를 어찌 잊겠는가. 어느 한순간 온통 넋을 앗아갔던 첫 키스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황홀했던 첫 키스라 해도 살다보면 아예 잊고 살 수도 있다.)

[겨울영화] <점퍼> <아메리칸 갱스터>

살인범을 찾아, 파리에서 도쿄로 순간이동! <점퍼> Jumper 감독 더그 라이먼 목소리 출연 헤이든 크리스텐슨, 제이미 벨, 레이첼 빌슨, 새뮤얼 잭슨 수입·배급 이십세기 폭스 개봉예정 12월 당신이 ‘점퍼’라면. 지구의 어디든 텔레포트(순간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대체 뭘 할 것인가. 조건이 하나 있다. 당신은 이성적인 사리사욕에 익숙한 성인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겪고 있는 십대다. 스티븐 굴드의 SF소설 <점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된 사춘기 소년 데이비 라이스의 이야기였다. 그는 학대하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나와 오랫동안 헤어진 엄마를 찾아나선다. 가히 소년 SF다운 모험담이다. 하지만 더그 라이먼 감독의 <점퍼>는 원작보다 훨씬 매끈한 성인 취향 할리우드 공산품에 가까운 인상이다. 더그 라이먼과 할리우드의 가장 잘 팔리는 두 작가(<엑스맨: 최후의 전쟁>의 사이먼 킨버그와 <배트맨 비긴즈>의 데이비드 S. 고이어)는 원작에서 ‘텔레포트’ 능력만을 똑 따와서 이야기를 재구성했고, 영화 <점퍼>는 부유한 청년 라이스(헤이든 크리스텐슨)가 엄마의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자친구 밀리(레이첼 빌슨)와 아슬아슬한 연애전선을 형성하던 라이스는 같은 능력을 지닌 영국 소년 그리핀(제이미 벨)을 만나게 되고, 정부요원 콕스(새뮤얼 잭슨)을 위시한 ‘점퍼 사냥꾼’들과 생존을 위한 격전을 벌여야만 한다. 감독 더그 라이먼은 “더그 라이먼 영화란 악당이 없는 영화”라는 말로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려 한다. “더그 라이먼 영화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회색지대를 남겨두는 것이 훨씬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자신을 3인칭으로 일컫는 야심만만한 감독의 말과 트레일러의 분위기로 미루어보건대 <점퍼>의 주인공들이 꼭 선한 영웅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점퍼들의 ‘아이덴티티’는 이집트, 중국, 파리, 도쿄, 로마를 제멋대로 오가는 점퍼들의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영화적 열쇠로 작용할 것이다. Tip. 원작 <점퍼>와 <리플렉스> 공개된 트레일러를 보면서 여피 같은 라이스의 모습에 한숨짓는 원작 팬들이 꽤 있을 것이다. 엄마 찾는 소년의 모험담을 원한다면 원작을 미리 읽어보자. 연작인 <리플렉스>(Reflex)는 정부요원으로 활동하게 된 유부남 데이비드 라이스의 모험을 다루며, 그리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핀오프 소설도 있다. 한국어 번역본은 없지만 아마존(www.amazon.com)에서 구입가능하다. 청소년 대상 소설이니 부담도 없다. 흑인 대부와 백인 경찰의 대결 <아메리칸 갱스터> American Gangster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덴젤 워싱턴, 러셀 크로, 쿠바 구딩 주니어, 조시 브롤린 수입·배급 UPI 개봉예정 12월27일 누구나 눈치채겠지만 <아메리칸 갱스터>에 등장하는 덴젤 워싱턴의 결혼식 장면은 직접적으로 <대부>(1972)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역시 ‘famil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아메리칸 갱스터>는 마리오 반 피블스의 <파시>(1993)가 서부시대의 흑인 건맨들을 등장시켰던 것처럼, 역시 흑인들의 시선으로 써나가는 미국 갱스터의 새로운 역사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갱스터 무비의 전체 계보 안에서 봐도 덴젤 워싱턴은 가장 이지적인 축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더불어 화려한 테크니션이기도 한 리들리 스콧의 갱스터 무비라는 점에서도 구미를 당기게 한다. 영화는 1970년대 베트남전 당시 뉴욕의 할렘에서 헤로인 왕으로 군림했던 마약상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그를 쫓는 마약 전담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실존인물인 프랭크 루카스는 어려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시골에서 자랐지만, 1970년대 베트남전이라는 사회적 혼란상황을 이용해 갖가지 방법으로 베트남에서 생산된 마약을 수입하면서 할렘 최고의 마약상으로 군림한 인물이다. 올해로 데뷔 30년째인 덴젤 워싱턴은 <아메리칸 갱스터>의 핵심이다. 가장 지적인 면모의 흑인배우라 해도 틀리지 않는 그는 ‘패밀리’를 이끌어가기 위해 잔인무도한 짓도 서슴지 않는 흔들림없는 보스로 등장한다. 최근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2004)와 <데자뷰>(2006)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는 사이좋게 토니 스콧의 형 리들리 스콧과 조우하게 됐다. 리들리 스콧으로서도 <어느 멋진 순간>(2006)으로 고전했던 기억을 말끔히 씻어버린 영화다. 1970년대라는 설정도 <더티 해리>(1971), <프렌치 커넥션>(1971) 등 옛 미국 하드보일드영화의 활력을 되살릴 수 있는 최적의 배경이다. 리들리 스콧의 단짝이기도 한 러셀 크로 역시 프랭크 루카스와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는 형사로 출연해 모처럼 터프한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가 <대부>와 같은 시대에 대한 풍경화이기도 하다면, <아메리칸 갱스터>는 베트남전 시기의 혼란을 묘사하는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영화가 될 것 같다. Tip. Jay-Z(제이지)가 O.S.T를? 이미 은퇴를 선언했다 번복한 ‘비욘세 남편’ 제이지는 <아메리칸 갱스터>를 먼저 보고는 ‘필’이 꽂혀 일찌감치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영감을 얻은 장면을 정지해놓고는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화답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총 9곡이 수록될 예정인데 단독 앨범으로 낼지, O.S.T 형식으로 갈지는 협의 중이라고.

[LA] 이야기의 원가는 얼마가 정당한가

11월1일로 내정된 할리우드 작가들의 파업전야인 할로윈 데이. 협상안을 두고 WGA(미작가협회: Writers Guild of America)와 AMPTP(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자연맹: Alliance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Producers)가 여전히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1930년대, 새로운 매체로 등장한 유성영화에 이른바 멋진 대사를 입히기 위해 긴급 수송해왔던 동부 출신의 작가들(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 작가들)과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불만을 감추지 않았던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제작자들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을지도 모른다. 1988년에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던 6개월에 걸친 작가파업은 그로 인한 산업의 피해 규모가 총 5억달러에 이르렀는데, 현재 텔레비전의 프라임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는 수많은 리얼리티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와 대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리얼리티쇼의 출발점이자 정의이지만,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잡은 현실 속 리얼리티쇼 뒤에는 작가의 대본이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번 WGA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리얼리티쇼의 경우에도 작가들에게 수익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파업이 일단 시작되면 아마도 더 많은 리얼리티쇼나 연예인 인터뷰, 재방송 등이 텔레비전의 빈곳을 메우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반적인 전망이다. 다큐멘터리나 외국영화,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에는 이번이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현재 할리우드는 하루하루 새로운 협상안에 대한 WGA와 AMPTP의 성명을 주시하며 초긴장 상태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단순히 두 세력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넘어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산업 표준의 변화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냐는 부분이다. 무형의 자산인 이야기는 사고팔기 위해서 이야기를 담는 그릇, 즉 포맷의 가격에 따라 가치가 교환된다. 1988년, WGA가 동의한 비디오테이프 하나의 생산원가를 기준으로 한 수익배분은 현재 시장의 표준이 된 DVD 한장의 생산원가를 생각해본다면 분명 이견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는 재생산 비용을 최소화시켜버림으로 인해 수익모델에 큰 혼란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DVD뿐만 아니라 뉴미디어 및 인터넷을 통해 공급되고 있는 수많은 콘텐츠에 이르면 더욱 복잡해진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할리우드를 시발로 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곧 전세계로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파업이 시작되든 극적으로 타결이 되든 간에 여전히 작가들이 책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차라리 무성영화가…

MBC 텔레비전의 미스터리 오락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재연 배우들 가운덴 한국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다. 에피소드의 배경이 한국이나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일 땐 한국인 배우들이 한국어로 연기를 하고, 그 밖의 지역일 땐 외국인 배우들이 영어로 연기를 한다. 외국인 배우들 가운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들도 있는 듯, 말투가 천태만상이다. 또 전문 연기자가 아니니만큼, 대사말고도 연기가 전반적으로 썩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비-아시아권 사회가 배경인 에피소드에 외국인 배우가 나와 영어로 연기를 하는 건 그 에피소드의 현실감을 높이는 데 얼마쯤 이바지한다. 유럽에서고 남아메리카에서고 죄다 영어만 쓰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에피소드에 따라 가장 알맞은 자연언어를 골라 이야기를 쓰는 것은 기술적 재정적으로 불가능할 게다), 이를테면 독일이나 브라질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에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 배우가 나왔을 때보다는 영어를 쓰는 외국인 배우가 나왔을 때 시청자들은 더 큰 실감을 느끼며 이야기에 빨려들게 된다. 거기서 영어는 한국 바깥세상의 기호, 또는 동아시아 바깥세상의 기호다. 비평가가 아닌 평범한 영화 관객에겐 이야기에 몰입하는 게 복이다. 그 복을 방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배경과 서로 엇걸린 자연언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배경이 오스트리아 빈이지만, 프랑스 배우들이 나와 프랑스어로 연기한다. 물론 등장인물들은 죄다 오스트리아 사람이므로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프랑스어는 독일어로 간주된다.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자막에 의존해서 이 영화를 볼 때는, 장면의 현실감에 그리 큰 문제가 없다. 그에게 이 영화의 프랑스어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영어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 언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볼 땐, 빈에서 빈 사람들이 쓰는 프랑스어 때문에, 그가 누리고자 하는 현실감이 훼손당한다. 멜 깁슨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출연한 배우들을 고생시키며 굳이 아람어와 라틴어를 쓰게 한 것은 ‘유식한’ 관객의 이런 현실감 해리를 막기 위해서였을 테다. 영화에서만은 아니지만 특히 영화에서, 영어는 진정한 보편어다. 할리우드영화가 미국이나 다른 영어권 사회만을 배경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 영화들은 공간적으로 지구 곳곳과 은하계 저편을 배경으로 삼는다. 어디서고 등장인물들은 영어를 쓴다. 영어는 단지 통-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간적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먼 미래의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영어를 쓴다. 사실 ‘유식한’ 관객의 회의가 공간적 합리성의 운산을 넘어 시간적 합리성의 운산에까지 미치면, 몰두해서 볼 영화가 없다. 영화 속에서 사자왕 리처드가 쓰는 현대 영어는 그의 현실감을 깨기에 충분하다. 실제의 사자왕 리처드가 썼던 영어는 현대 영어 사용자들에게 불가해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 시절 잉글랜드 왕실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고 프랑스어를 썼다. 이 모든 영화들에서 현대영어는 고대 이집트어로, 중세 노르망디의 프랑스어로, 은하계 저편 생물체의 미지 언어로 간주된다. 그렇게 간주해야만 이야기에 빨려들 수 있다. 그 영어를 그저 통역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겠거니 여기지 않으면, 몰입의 복을 누릴 수 없다. 영어권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도 상업적 타산에 따라 영어로 만들어지는 일이 많다.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고 그래서 일상적으로는 영어를 쓰지 않을 배우들도 그런 영화 속에선 영어를 쓴다. 그들 가운데 어떤 배우들의 영어는, 영어권에 살아보지 않아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내 귀에도, 방언적 허용 너머에 있다. 영어가 모국어인 관객은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훨씬 더 예민하게 느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배우들에게 편한 언어로 영화를 만들고 자막을 다는 게 낫지 않을까? 대사는 연기의 중요한 부분이다. 배우의 뛰어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대사 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것이다. 영어권 바깥 사회에서 어설픈 영어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실감을 훼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연기의 그 중요한 부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에피소드별로 배우의 인종과 언어를 바꾸듯, 적지 않은 할리우드영화가 현실감을 높이려 중간에 언어를 뒤섞기도 한다. 냉전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스파이영화에서 소련 스파이들(물론 미국인 배우다)은 이따금 러시아어를 쓴다. 영화 <대부>의 마피아들은 저희들끼리 더러 이탈리아어로 얘기한다. 그 등장인물에게 러시아어나 이탈리아어는 모국어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러시아 사람이나 이탈리아 사람 귀에 그 미국 배우들의 러시아어나 이탈리아어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릴까 하는 궁금증. 혹시 ‘깨는’ 것 아닐까? 이리 지레짐작하는 것은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끔 듣는 한국어가 도무지 한국어답지 않은, ‘깨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현실감에 관한 한 차라리 무성영화 때가 나았는지 모른다.

[What's Up] 영국영화의 박스오피스 습격사건

영국영화의 상업적 르네상스가 오려나. 오랫동안 영국영화가 시장에서 재기할 가능성이란 대처 총리가 노동운동에 뛰어들 가능성에 가까웠다. 그러나 2007년은 영국영화가 오랜 침잠기를 벗어나 수면으로 상승할 가능성을 보여준 해로 평가받을 듯하다. 현재까지 영국영화 자국점유율은 무려 27%에 달하고 있으며 이는 전년도의 19%에서 8%나 증가한 수치다. 특히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뜨거운 녀석들> <미스 포터>와 <속죄>의 성공이 자국영화 점유율 상승에 단단히 한몫을 했고, 올해 박스오피스 상위 20위권에 오른 영국(혹은 합작)영화들은 무려 16편에 달한다. 지난해의 3편에 비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 결과다. 전문가들은 기념비적인 자국영화 점유율 상승을 ‘전반적인 박스오피스 규모의 확장’과 ‘다양한 장르를 자랑하는 영국영화들의 등장’이 불러일으킨 동반효과로 풀이한다. 전체 박스오피스의 규모가 올해 유독 상승한 구체적인 이유는 3가지다. 주목받았던 텔레비전 시리즈들의 동반 실패, 거대한 축구 매치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록적으로 끔찍했던 여름 날씨. 특히나 날씨가 형편없었던 올해 7월은 1970년 이후로 영국 박스오피스 역사상 최고의 수익을 올린 달로 기록됐다. 거기에 강력한 할리우드 합작영화와 양질의 자국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니 자국영화 점유율도 동반 상승 효과를 거둔 셈이다. 영국영화진흥위원회는 “할리우드로부터의 장기적인 투자 획득과 강력한 자국영화의 생산을 지속적으로 짝지울 수 있다면, 영국 박스오피스는 지금처럼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합작으로 만들어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으로 이루어진 사상누각이라면? 물론 영국영화진흥위원회는 솜씨 좋은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올해 영국 영화계가 <히스토리 보이스> <노트 온 스캔들> <라스트 킹>처럼 다양한 장르의 수작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희순] “본의 아니게 겸손해지는 인생이다”

<남극일기> 개봉 직후 박희순은 영화에 쏟아진 온갖 혹평에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게 네티즌”이라며 혀를 내두른 바 있다. 그런 그가 요즘은 포털 사이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곤 한다. <귀여워> <가족> <남극일기> 등에서 악역 전문 배우로도 통했던 그는 현재 “정신없이 소중하신”, “청초한 외모의”, “박희순 오빠” 등 어마어마한 수식어에 휩싸여 있다. 시간 순서대로 보자면 독특한 구성과 전개로 소수의 열혈팬을 만들어낸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 이후 역시나 독특하고 빠른 전개로 관객을 흡입하는 스릴러 <세븐데이즈>가 있었다. 보물을 위해 여자를 이용하는 비열한 인간인 줄 알았으나 나름의 사정을 간직했음이 밝혀지는 조폭 민철로, 한 발짝 뒤에서 오랜 친구를 지켜주는 모자라지만 정감어린 비리형사 성열로, 불같은 네티즌의 호기심을 뒤늦게 달궈버린 이 남자. 드라마 촬영과 함께 수십 개의 온·오프라인 매체 인터뷰를 병행했고, 전날까지 <얼렁뚱땅 흥신소>의 마지막 촬영과 뒤풀이에 참석했다는 그의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앞으로 그는 그처럼 얼떨떨한 마음으로 급작스런 유명세를 더욱 체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헨젤과 그레텔> <바보> 등 그가 출연했으나 개봉 기회를 잡지 못했던 영화들을 통해 박희순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주시길. <얼렁뚱땅 흥신소>와 <세븐데이즈>가 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12년간 극단 목화에 몸담았고, 지난 5년간 10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의 내공은 좀더 느긋하고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얼렁뚱땅 흥신소>의 낮은 시청률과 열렬한 인기도 놀랍지만, 오랫동안 정극을 했던 배우가 그렇게 TV 드라마 출연을 했다는 것도 의외였다. =예지원이 <얼렁뚱땅 흥신소>의 함영훈 PD와 친한 사이였다. 또 건달 역할에, TV인 것도 걸려서 계속 도망다녔는데, 막판에 (예)지원이 (이)선균이며 (임)원희까지 동원해서 설득했다. 건달이라지만 러브라인도 있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다니, 인간적인 매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지원이한테 한턱 내야 할 텐데. -영화에 비하면 촬영 속도도 빠른 편인데. =<세븐데이즈>가 더 빨라서 괜찮았다. (웃음) 문제는 다른 캐릭터들은 만화처럼 통통 튀고 재미있는데, 나만 혼자 무게를 잡으려니까. 멋있으면서도 양면성을 보여줘야 하는 게 어려웠다. 드라마라는 게 참 미묘해서, 남자들이 들으면 닭살 돋는 멘트들이 많더라. -혹시 그거? “당신의 입술은 생각보다 달콤했어.” =그건 감독님도 빼자는 걸 내가 하자고 그랬다. 원래 대본에 있는 대사였는데, 그게 지원이가 연기한 희경에게 정을 떼도록 만들려는 야비한 말인 건 분명한데, 말 자체를 좀더 슬프게 하면 캐릭터의 매력이 더해질 것 같았다. 어차피 그전에 온갖 닭살 멘트 다 했는데 그것만 안 하면 그것도 이상하잖나. -<세븐데이즈>의 원신연 감독에 따르면 예전 제작진이 <목요일의 아이>라는 이름으로 찍었던 시나리오에는 성열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이고 전형적이었다더라. =일단 당시 시나리오에 비해 <세븐데이즈>에는 성열의 분량이 훨씬 많아졌다. 단선적인 캐릭터가 복합적이 되고, 보여줄 것도 많아지고. 그때는 성열이 유괴사실을 모르는 채 흐지부지 끝나는 거였는데. 예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자잘한 재미도 많아지고, 중요한 반전이 스포일러로 미리 알려져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됐다. -원래 본인의 성격과 성열은 많이 다를 것 같다. =다르다. 그렇게 멋있지 않지. (웃음) -성열처럼 능글맞고, 구시렁거리는 건 잘 안 할 것 같다는 얘기다. =나도 구시렁거린다. (웃음) 재밌는 얘기 있으면 좌중을 휘어잡고 막 떠드는 게 아니라 옆사람 붙잡고 작게 시도하기도 하고. -<세븐데이즈>의 시나리오에도 지연에게 성열이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고, 실제 찍기도 했다던데. =그게 은영에게 딸이 유괴됐다는 말을 듣고, 성열이 굉장히 쑥스럽게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널 짝사랑했다, 말하는 장면이다. 유독 최영환 촬영감독님이 그걸 닭살스럽다고 되게 싫어했다. (웃음) 그 때문이었는지 그 대사만 빠졌더라. 빼길 잘한 것 같다. 그 신 자체에서 성열의 사랑이 보여지니까 굳이 말을 안 해도. 그런 게 또 한국 남자인 것 같고. -그 정도까지 도와주는데 누가 좋아하는 걸 모르겠나. 편집실 취재 갔다가 그날 저녁 때 박희순씨가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편집실에 자기 분량 보면 떨리지 않나. =내 부분 작업하려고 하면, 나 나가면 하라고 그랬다. (웃음) 촬영 때는 너무 행복하고 재밌어서 감독님께 “제 분량 다 잘려도 좋다”고 말했지만 막상 편집할 때 되니까 굉장히 두근거리더라. (웃음) 그래도 결국 잘려나간 신이 거의 없었으니 너무 고맙다. 소문에 의하면 신민경 편집기사가 성열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서 자르려고 하면 다 막았다는 얘기가 있더라. (웃음) -여러 인터뷰를 보면 애드리브 이야기가 많다. =내 전작들은 대체로 무거워서 그럴 수 없었지만, 이번 영화는 내가 자유로워야 할 것 같아서 감독님께 미리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되게 개방적이어서, 맘대로 하라고, 글을 써와도 된다더라. 어떤 대사는 감독님이 현장에서 애드리브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연과 성열이 열쇠수리공 불러서 아파트 문을 열려다가 안 되니까, “직업의식이 없어”라며 수리공을 구박하는 장면. 그게 윤진씨와 내가 처음 함께하는 첫 촬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한 뒤에 뻘쭘하게 있다가 슛 들어가면 갑자기 친한 척해야 하는 상황. 근데 처음에 감독님은 성열을 계속해서 방방 뜨는 식으로 설정했다. 나는 그 부분을 좀 틱틱거리기도 하고, 꿍얼거리는 캐릭터로 생각했는데 서로 의견이 달랐던 거지. 감독님 버전, 내 버전으로 찍었고, 현장 편집본에는 감독님 버전이 있었는데, 완성된 걸 보니 내 버전이 있더라. -계속해서 달려나가는 심각한 영화 속에서 성열의 캐릭터는 유일하게 밝은 구석 아닌가. 부담이 있었겠다. =근데 감독님이랑 궁합이 잘 맞았다. 원신연 감독은 어떤 요구사항이 있으면 뜸들이지 않고 즉석에서 “성열이가 이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성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 거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성열이가 이렇다, 저렇다,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경우 편집에서 잘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여러 ‘기술’을 구사하다가 흐름을 깰 수도 있어서 수위 조절이 힘들다. =고민이 많았다. 너무 웃음 위주로 가서 해가 되도 안 되지만 김윤진씨의 무거운 분위기에 말리면 영화가 지루하지 않겠나. 줄타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감독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일단 저지를 수 있었다. -너무 과하다며 제지를 당할 때도 있지 않았나. =후반부에 성열이 용의자를 붙잡으려고 할 때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를 막 질렀는데, 테이크 끝나자마자 최영환 기사, 원신연 감독, 김윤진씨 셋이서 공격을 해대더라. “에이, 너무 튀려고 연기를 한다”, “열연을 하지마, 응?”, “대충해, 우리 다 대충하잖아”. (웃음) 그렇게 편하게 얘기해주니까 나 역시 “알았어, 그만 좀 해, 창피해 죽겠어”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만일 심각하게 감독이 옆에 와서 “감정 좀 죽여주시구요” 이랬다면 서로 불편했을 텐데. -원신연 감독과 심각하게 의견이 달랐던 적은 없었나. =별로 없었다. 트러블이라면 오히려 윤진씨와 있었지. 윤진씨는 표현하고 싶은 심정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걸 못하게 하니까. 난 중간에서 그랬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줘~. 감독님 삐치잖아, 어차피 편집할 때 감독님이 그거 쓴단 말이야. (웃음)” -무대인사 다니면서 박희순씨가 박수를 더 많이 받아서 김윤진씨가 삐칠 정도였다던데. =영화 상영 전에 하면, 윤진씨를 보고 소리를 지르는데, 상영 뒤에는 내 캐릭터를 알게 되니까 많이들 좋아해주시긴 하더라. -이런 걸 언제 찍었나 싶은 것도 있지 않았나. =현장편집을 전부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리 움직였으니까. 내가 영화에 나올 때 표정이 어떤 게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이런 표정도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일단 멋있게 나왔지. 최영환 기사 지론이 무조건 남자배우는 멋있게, 여자배우는 예쁘게라니까. (웃음) -부모님께서 아들이 멋지게 나와서 정말 좋아했겠다. =일단은 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정말 좋아하신다. 영화는 두번 보셨다. 어른들 보시기에 화면이 너무 빠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재밌어 하시더라. -게다가 전작처럼 악역도 아니고, 밝고 긍정적인 인물이니. =<러브토크> 보신 어머니께서, “악역이 차라리 낫다, 그게 뭐니” 그러시더라. (웃음) <세븐데이즈>를 처음 볼 땐 내가 다칠까봐 액션신마다 조마조마했는데 두 번째는 친구들이랑 즐겁게 보셨다고. 하여튼 어머니는 무조건 아들이 많이 나오면 좋아한다. (웃음) -<러브토크>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거기서는 굉장히 답답해 보였다. 어머니가 싫어하신 게 이해가 간다. =그저 내가 캐릭터 잡기를 내가 가진 몇 가지 성격 중 다운된 상태가 지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뿐이다. 무기력하고 답답한 시기의 나. 거기도 분량이 훨씬 많았는데, 40% 정도 잘렸다. 답답한 면모만 남아서 속상하긴 했다.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연기를 못한다고 보는 분들도 있었다. -그럴 땐 억울하겠다. =중요한 스트레이트는 누구나 거기에 힘을 줘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잽을 얼마나 잘 구사한 다음에 스트레이트가 나오느냐가 중요하다. 잽들이 편집에서 다 사라져버리면 배우의 캐릭터 구축에서 손해가 막심하다. <세븐데이즈>는 작은 잽들이 다 살아 있어서 스트레이트가 더 좋아 보였던 영화다. -<2001 이매진>에 나왔더라. =<남극일기>까지만 해도 <2001 이매진> 배우라는 얘기를 더 많이 들었다. 장준환 감독이랑 제대로 영화를 함께 다시 해봐야 할 텐데. 예전엔 내가 친구 덕을 보려고 했는데, 이젠 그 친구가 내 덕을 보려고 한다. (웃음) -그 영화의 현장은 정말 웃겼을 것 같다. =나야 뭐 정말 난생처음 영화연기였으니 신기했고. 촬영은 봉준호 감독이었는데, 두 거장을 첫 영화에서 만났으니. 열흘간 촬영하면서 내내 밤을 샜던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카메라 잡고 졸고, 감독은 레디 액션 부른 다음에 졸고. (웃음) 아, 거기 총 쏘는 장면이 있었는데, 장준환 감독이 겁이 되게 많아서는, 레디 부른 다음에 귀를 두손으로 막고 눈을 꼭 감은 채로 “액션!” 이러는데, 그게 어찌나 웃겼는지. (웃음) 그래도 그 영화처럼 진지하고 독특하고 웃긴 블랙코미디를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아직 못했다. -장준환 감독과는 <2001 이매진> 이후 한번도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나. =뮤직비디오. -앗, 장준환 감독과 문소리씨가 사귀게 되었다는 그 뮤직비디오! =(문)소리랑 셋이서 술도 많이 먹었다. 둘이 사귄다는 것도 나만 알고 있었다. 셋이서 술 먹다가 느낌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서너 시간 동안 계속 추궁했더니, 준환이는 거의 고백 직전까지 갔는데 소리는 끝까지 잡아떼면서 화를 내더라. 결국 그냥 알았다고, 난 사귀는 걸로 알 테니까 그냥 너희도 모른 척하라고 넘어갔다. (웃음) 신혼집에 놀러오라는 말은 들었는데, 올해 이래저래 바빠서 아직도 못가봤다. -어쨋거나 이젠 나쁜 남자 혹은 조폭 전문배우라는 말은 쑥 들어가겠다. =사실 개봉 남겨둔 영화 중에 한편 더 있다, 악역으로 나오는 거. (웃음) 하지만 박희순을 몰랐을 때의 악역과 알았을 때의 악역은 확연히 다르다. 저 사람이 연기변신을 했구나, 와 박희순 쟤는 원래 나쁠 거야, 는 천지차이니까. -그래도 <세븐데이즈>와 <얼렁뚱땅 흥신소>에서는 혼자만 멋있게 나온 셈 아닌가. 속된 말로 ‘따먹는 연기’랄까. 어떻게 보이면 본인의 캐릭터가 살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극단 목화의 시스템 자체가 처음 대본이 연습을 통해 계속 바뀐다. 배우가 연습 때 무얼 준비해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역할이 커지고 작아진다. 매 연습이 오디션이다. 오태석 선생님이 늘 하는 말씀이 “잘나갈 때 조심해라”였다. 공연을 하다보면 반응이 오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힘을 주면, 그러니까 ‘따먹는 데’ 익숙해지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래서 관객반응이 대박나는 부분은 오 선생님이 호흡이나 대사를 바꿔버린다. -12년이나 있으면서 오태석 선생님이 예뻐해 주셨던 모양이다. =나중엔 조연출 비슷한 역할까지 했다. 후배들과 연습도 맡아하고. 선생님이 이용할 여지가 많으니까 잡아두려고 했겠지. (웃음) 선배들이 하나씩 나가고, 내가 나갈 차례였는데, 임원희며 유해진이 나가다보니까 날더러 “애들 관리 못했으니까, 넌 몇년 더 있어” 이러시더라. (웃음) -그래도 용케 박차고 나왔다. =같은 작가, 같은 연출, 같은 공간, 같은 배우들과 하니까 아무리 변신을 해도 비슷한 연기가 나올 수밖에 없더라. 나와서 처음엔 <록키 호러 쇼> 같은 뮤지컬을 했는데 그때 이진아 연출을 만나서 전환점을 맞았다. 예술적인 연극을 하다가 대중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달까. 나는 항상 엘리베이터 하나없이 한 계단씩 밟아온 것 같다. 방심할 만하면 태클이 들어왔다. 출연작이 개봉을 안 한다든지. (웃음) 본의 아니게 겸손해지는 인생. 지금도 뭔가 하나를 고집하기보다는 많은 걸 경험하면서 커지고 싶다. -2002년부터 영화를 했는데, 목화를 그때 나온 건가. =다른 선배들은 왔다갔다 할 동안 난 12년간 한번도 외부작품을 안 했고, 그냥 선생님께 3년 정도 바람 쐬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근데 영화에서도 자리를 못 잡으니 다시 돌아가기도 창피하고 애매하더라. -이제는 돌아갈 수 있겠다. =아직 멀었다. (웃음) 좋은 작품,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이번에 특히 좋은 감독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오태석 선생님이 멍석을 깔아줬을 때 내가 신나게 놀듯이 영화에서도 그런 스승 같은 분을 만나고 싶으니까. 그중 하나가 원신연 감독님이고. 예전에 (송)강호 형이 “시나리오 소용없다, 감독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던 게 뭔지 알겠더라. (웃음)

[현지보고] 다람쥐 밴드의 크리스마스 습격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인 햇빛 쨍쨍한 로스앤젤레스. 한물간 작곡가 데이브(제이슨 리)는 예상치 못한 특별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된다. 가지런하던 데이브의 집안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손님들은 바로 천방지축 다람쥐 형제 앨빈, 사이먼, 테오도르. 데이비는 이 귀여운 존재들이 부엌을 엉망으로 만드는 재주 외에도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망이라곤 없어 보이던 데이브의 음악은 다람쥐 형제를 통해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신은 단지 ‘친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이브와 그의 ‘가족’이 되고 싶어하는 다람쥐 형제. <앨빈과 수퍼밴드>는 팝 스타로 우뚝 서게 된 장난꾸러기 다람쥐 형제와 작곡가 데이브가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가게 되는 크리스마스용 가족영화이다. 몇 십년 동안 이차원의 화면에 머물러 있던 이들 사고뭉치 다람쥐 형제는 <앨빈과 슈퍼밴드>에서는 보송보송한 털에 둘러싸인 삼차원 캐릭터로서 그 귀여움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앨빈, 사이먼, 테오도르 다람쥐 형제는 반세기 전, 로스 바그다사리온 시니어에 의해 탄생했다. 1958년 음반을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장난꾸러기 다람쥐들의 목소리는 느리게 녹음된 노래를 빠르게 돌림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다람쥐 형제 특유의 목소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한 수많은 히트 음반을 만들어냈고 이후 장난꾸러기 앨빈, 영리한 사이먼, 귀여운 테오도르라는 캐릭터를 바탕으로 텔레비전 만화 시리즈로까지 영역을 넓히게 된다. 반세기에 걸쳐 이른바 미국 대중문화의 고전이 된 다람쥐 형제들은 원작자의 아들이자 80년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시리즈의 PD 겸 성우를 맡았던 로스 바그다사리온 주니어와 그의 아내 재니스 카르먼의 공동제작을 통해 2007년 크리스마스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앨빈과 슈퍼밴드>다. 그러나 그저 예전의 다람쥐들을 옛 모습 그대로 되살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몇 세대에 걸쳐 고른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고전만화 캐릭터를 21세기에 맞게 업데이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능들이 필요했다. 제작진은 <심슨네 가족들>의 작가인 존 비티의 시나리오와, ‘리듬 앤드 휴즈’의 3D애니메이션 기술을 끌어들였고, 거기에 <다이하드4.0>으로 얼굴을 알린 저스틴 롱, <크리미널 마인드>의 매튜 그레이, 디즈니의 아이돌 스타 제시 매카트니 등 젊은 배우들의 목소리를 수혈했다. 팝 아이돌 스타의 산지인 LA를 배경으로 한 <앨빈과 슈퍼밴드>는 잠이 달아나는 건강식품이라며 휘핑크림을 듬뿍 담은 커피를 어린 다람쥐들에게 쥐어주는 탐욕스런 프로듀서 이안(데이비드 크로스), 2007년의 대형 스캔들 중 하나인 팝가수 애슐리 심슨의 립싱크 공연을 연상케 하는 립싱크 사건과 야유하는 관중 등, 오늘날 미국 팝 아이돌 세계를 가볍고 신나는 손길로 그려내고 있다. <앨빈과 슈퍼밴드> 정킷은 프로듀서 로스 바그다사리온 주니어가 소유한 샌타모니카 저택의 바닷바람이 부는 앞마당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소중한 자식의 생일파티를 여는 듯한 정킷이었는데, 프로듀서의 작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클래식을 업데이트 하는 기분이었다” 다람쥐 형제 목소리 연기한 저스틴 롱, 매튜 그레이, 제시 매카트니 인터뷰 사고뭉치 다람쥐 형제의 목소리를 맡은 저스틴 롱, 매튜 그레이, 제시 매카트니. 세명의 배우가 함께 인터뷰에 참가하자 분위기가 꽤 소란스러워졌다. 롱과 그레이는 비슷한 무늬의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나와서는 누가 먼저 입었느냐 가지고 입씨름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젊지만, 롱 말대로 너무나 ‘일하고’ 싶어하는 그런 배우들이었다. 무척 유쾌한 삼총사였다.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저스틴 롱: 폭스에서 전화가 왔다. <다이하드4.0>에서의 반응이 좋아서 폭스랑 관계가 좋다. (웃음) 전화를 받자마자 “언제, 어디로 가면 돼요?”라고 했다. =매튜 그레이: 그리고 “얼마?”가 붙었겠지. (웃음) =저스틴 롱: 제일 중요한 부분이지. 사실 엄청 떨렸다. 왜냐하면, 오디션이었기 때문에 기회가 날아갈 지도 모르니까. 원래 나는 사이먼 역으로 오디션을 받았다. (그러자 그레이가 “정말?”이냐며 동그랗게 눈을 뜬다.) =매튜 그레이: 결국 내가 붙고 네가 떨어진 것이구나. (웃음) - 힘든 점이 있었다면. =저스틴 롱: 더빙하는 내내 로스가 옆에 있었다. 엄청난 압박이다. 생각해보라. 앨빈 목소리를 몇 십년간 해온 로스가 내가 하는 연기를 보고, 하나하나 체크하고. =매튜 그레이: 로스는 이전 텔레비전 시리즈 클립을 보여주고는, “이런 목소리와 톤이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것과 달라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그러니까 <카사블랑카>의 유명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바로 이렇게 해야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라는 소리랑 같지 않나. =저스틴 롱: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냥 직접 하시지 그래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기 일보 직전일 때도 있었다. 아니, 빈정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정말 그들이 바로 진짜 목소리였으니까. 왜 나를 쓰려고 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시 매카트니: 업데이트를 원했으니까. 우리는 기존의 캐릭터에 뭐랄까 힙한 요소를 살짝만 가미하면 되었는데, 그게 되게 어려웠다. 클래식에다 뭔가 새로움을 얹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목소리 연기를 해보니 어떤가. =제시 매카트니: 10회 정도 녹음했는데, 편안 옷차림으로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임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저스틴 롱: 나는 연기할 때 손이나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늘 의식하는데 이번에는 정말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나처럼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에게 목소리 연기는 최고인 듯. (웃음) 다람쥐들에게 윽박지르는 연기에 아이들이 화낼까 걱정이다 데이브 역의 제이슨 리 인터뷰 베레모를 쓴 제이슨 리는 인터뷰 내내 껌을 씹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옆집 아저씨 느낌이 훨씬 강하다. 실제 그에게는 확실히 캐릭터 데이브의 수더분한 모습이 있다. -오리지널 <앨빈과 수퍼밴드>에 대해 알고 있었나. =크리스마스 캐럴로 유명해서 알고 있다. 이들의 80년대 펑크 음반도 기억난다. -어린 아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4살이다. 이번에야말로 아들에게 좋은 아빠 몫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 이전 작품들이나 <내이름은 얼> 같은 TV 시리즈를 같이 본 적이 있는데 무척 지겨워하더라. (웃음) 아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에 출연한 것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보너스라고 할까. -극에서 데이브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글쎄, 왜 데이브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 결국 나중에 그들을 잃고 나서, 그 부재 속에서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인물이 전달되었다면 그것으로 내 몫을 다한 것 같다. 연기를 하면서 내 주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앨빈!!!!” 하고 그 조그마한 다람쥐에게 윽박지르는 데이브를 관객이 싫어하지 않게 할까 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컷 사인이 떨어지면 감독에게 가서 이거 너무한 것 같지 않냐고, 아이에게 화내면 안 되지 않을까라고 걱정하곤 했다.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날이 있다면. =매일매일 5주일 동안 보이지 않는 다람쥐들을 상대로 혼자 연기를 해야 했으니까. 그것도 이 세 마리 다람쥐들은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세 마리가 각각 다른 장소에, 그것도 계속 움직이면서 말이다. 그 모든 움직임을 상상하고 반응해야 했으니까 이러다가 미쳐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데이브는 탐욕스러운 프로듀서 이안에게 말한다. “녀석들은 아이들이라고!” 당신에게 아이란 무엇인가. =놀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것. 가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성숙하고 영악하기까지 한 아역배우들과 마주치기도 하는데, 기분이 묘하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아무 걱정없이 재미있게 놀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아들은 아이다운가. =그렇다. 가끔 나랑 같이 디즈니 클래식애니메이션을 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녀석은 뒤뜰에서 뛰노는 스타일이다. 비디오 게임은 절대 못하게 하니까. -텔레비전 시리즈인 <내 이름은 얼>로 확실하게 지명도를 굳히고 있는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해보고 싶나. =<내 이름은 얼> 이전에는 언제나 일거리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조지 클루니가 아닌 이상 할리우드의 배우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겠나. 그래서 적어도 시리즈 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남들이 하듯 늘 출근할 곳,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 시리즈에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지 안 불러준다. 수염을 자를 수 없어서인가? (웃음) “이 다람쥐들은 진짜 자식과 같은 존재다” 공동 프로듀서 로스 바그다사리언 주이어와 재니스 카르먼 인터뷰 공동 프로듀서이자 부부이기도 한 로스 바그다사리언 주니어와 재니스 카르먼에게서는 캐릭터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사랑이 느껴진다. 그들은 30여년을 이 캐릭터들과 함께하면서 실제로 그들을 키운, 미국의 다소 극성스럽기도 한 전형적인 부모의 모습 그대로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거의 10년이 걸렸던 것 같은데. =로스 바그다사리언 주니어: 매일매일이 프로젝트가 엎어질지도 모르는 변수들로 가득한 10년이었다. 실사 합성이다보니 배우들의 연기, 애니메이션, 음악, 음향효과, 더빙 등의 모든 작업 과정에서 하나의 오차도 허용할 수가 없었다. -원작자가 당신의 아버지이고, 스스로가 30여년이 넘게 캐릭터와 함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애니메이션 하나하나, 연기 하나하나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로스 바그다사리언 주니어: 생각해보라. 당신 같으면 당신 자식을 낯선 사람에게 맡기고는, 몇년 뒤에 다시 찾아올 때까지 마음대로 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앨빈, 사이먼, 테오도르는 우리에게 진짜 자식과 같은 존재이다. -반세기 동안 몇 세대에 걸쳐 인기를 끌어온 캐릭터이다. 만화였던 원작을 실사와 3D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로 전환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로스 바그다사리언 주니어: 원작의 팬층이 세대마다 있기 때문에 3D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새롭게 재탄생하더라도 앨빈, 사이먼, 테오도르다워야 했다. 외모에 삼차원의 입체가 더해지지만, 그들의 말투나 말하는 태도, 행동 양식은 원작 그대로야 했으니까. 동시에 이번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그냥 말하고 노래하는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진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앨빈, 사이먼, 테오도르 였다. 이안이 데이브와 통화를 끊자 앨빈이 “데이브예요?”라고 하는 표정에는 데이브가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이브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