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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성인용 대통령

“너무 좋아, 굉장해.” “제가 입에 좀 넣어도 될까요?” … “조철봉은 어느새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적이며 자극적인 상황은 처음인 것이다.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서에 사인하는 분위기와 같다.”… “‘맛이 있어요.’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장선옥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눈웃음을 치는 얼굴을 보자 조철봉의 가슴이 미어지면서 목구멍이 찌르르 울렸다.” 조철봉은 살아 있다. 한때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조철봉이 너무 안 하는 것 같다”며 섭섭해했다지만, 조철봉은 요즘 활발히 하고 있다.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주인공인 그 조철봉 말이다. 인터넷판에는 칭찬인지 조롱인지 헷갈리는 독자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 쓰니 얼마나 좋아. 독자들도 많아지고….” 조철봉은 ‘대북사업’에도 한창이다. 베이징에 본사를 둔 평화무역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최근 취임한 그는 북한의 천리마무역 부대표인 장선옥과 ‘딜’을 하는 중이다. 빼돌린 비자금의 분배비율을 놓고 탐색전에 돌입했다. 이 글이 실린 <씨네21>이 나올 때쯤이면, 두 남남북녀는 벌써 침대가 놓인 링에서 한바탕 겨뤘으리라 예상된다. 조철봉은 뻔뻔스럽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달성한다. 그 무기는 주로 ‘철봉 휘두르기’다. 이 낯뜨거운 소설에 대해 신문윤리위원회가 수십 차례에 걸쳐 주의경고를 내렸고, 여러 여성단체가 연재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철봉은 오히려 ‘언론자유의 상징’으로 둔갑했을 뿐이다. 청와대가 <문화일보> 구독을 중단하고, 일부 여당 의원들이 그 선정성을 공격하면서다. <문화일보>는 시련에 처한 조철봉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한때 철봉으로 하여금 조금 덜 하도록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강안남자’는 중국 신서에 나오는 ‘강안여자’를 모방한 제목이라고 한다. 얼굴이 강한(强顔) 남자를 뜻한다. ‘강하다’는 ‘두껍다’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소설 <강안남자>를 읽으며 대통령 선거 전선에서 활약하는 또 다른 강안남자를 떠올렸다. 10일도 안 남은 대선에서 강안남자 이미지에 어울리는 자는 누구일까. 아마도 상당수 독자들이 “추진력이 ‘강’하다”는 한 후보를 동시에 찍었으리라. 그는 최근 멋진 텔레비전용 정치 광고를 선보였다. 욕쟁이 할머니의 꾸중을 들으며 꾸역꾸역 국밥을 먹는 모습은 일견 훈훈하게 비칠 만했다. 네거티브로 시작했던 한 여권 후보의 광고와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감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한데 그 광고를 되풀이해 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그는 밥만 먹을까? 아무리 “배고프다”고 해도 뭔가 대꾸가 있어야 예의 아닌가? 그동안 많은 이들이 그를 상대로 욕쟁이 할머니 노릇을 했다. 욕을 하는 아이템도 다양했다. 자녀의 위장전입, 위장채용, BBK 주가조작 사건 연루와 부동산 투기 의혹, 마사지걸 비하 발언,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서의 불법 성매매…. 그러나 그는 별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낯은 강했다. ‘강’해서인지 지지율은 끄떡하지 않았다. 소설 <강안남자>를 열심히 찾아 읽는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른 이들에게 꼭 읽어보라며 강추한다고 나무랄 이유도 없다. 그 소설에 관해 도덕적으로 심판하고 훈계를 늘어놓는 일은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어린 자녀들에게 “참 재밌는 소설”이라며 일독을 권유할 부모는 없다. 그건 성인용이다. 소설 <강안남자>처럼 대통령 후보인 그에게서도 ‘성인용’ 냄새가 난다.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미·적분 수학문제처럼 어려운 BBK야 검찰이 무죄라고 우기는 상황이니 일단 제쳐놓고, ‘2차’는 또 무엇인가. 그는 여성단체 토론회에 참석해서 “2차가 뭔지 잘 이해를 못한다”고 동문서답을 했다. “당신이 소유한 서울 서초동 건물 지하의 유흥업소에서는 여성 종업원들이 2차도 갔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게 스리슬쩍 넘겼다. 그 유흥업소의 간판들은 내가 사는 수도권 신도시에도 넘친다. 일곱살짜리 우리집 꼬마에게 ‘ㅇㅇㅇ섹시클럽’ 간판을 가리키며 “우리 새 대통령님 소유의 빌딩에서도 저런 집이 장사를 잘해 돈을 많이 벌었단다”고 설명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는데, 조금 멋쩍겠다. 18살 이하를 접근 금지시켜야 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성인용 대통령 후보’라는 말인가. 어? 진짜 ‘성인용’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뜬 그의 광고 동영상을 클릭했다. “명박 오빠, 못 믿어? 극비영상 대방출”이라는 큼지막한 헤드라인과 함께 “본 콘텐츠물은 19세 이상 관람을 권장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떠 있다. 18금에 준하는 표시까지 돼 있다. 깜짝 놀랐는데, 그 밑에 “사실은 전체 이용가~ ㅋ”라는 또 다른 문구가 흘렀다. 썰렁한 농담, 으로 위장한 진담처럼 느껴졌다. ‘밤의 대통령’ 조철봉은 눈앞의 비즈니스에 성공할 것인가. ‘낮의 대통령’ 후보인 이 아무개씨는 선거에서 승리할 것인가. ‘강안남자’들의 운명이 궁금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 개운치 않은 낙관주의

이것은 볼티모어 하늘에서 출발한 음악이 방송사 세트장에 종착되는 이야기다.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향해가는 이야기, 내일을 말하며 어제를 더 어제처럼 보여주는 이야기, ‘굿모닝 볼티모어’에서 시작해 ‘굿이브닝 볼티모어’로 끝나는 이야기….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도시의 이러저러한 소리와 박자를 거두어 <코니 콜린스 쇼> 안에 봉인한다. 조그만 러시아 인형이 더 큰 몸통 속으로 차곡차곡 들어가듯 인물들은 춤추면서 TV쇼 안으로 들어간다. 노래하며 차례차례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쿵’ 마지막 뚜껑을 덮는다. 영화가 끝날 즈음 나는 ‘트레이시’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첫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바탕 달게 자고 일어난, 미국이 꾼 낮꿈. 피로한 21세기의 백일몽. <헤어스프레이>는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낙관적인 영화다. 동시에 시종 긍정적이어서 이 낙관을 과연 낙관이라 할 수 있을까 묻게 만드는 영화다. 이 미국산 뮤지컬이 보여주는 희망은 박제된 연푸른부전나비 표본처럼 아름답고 평면적이다. <헤어스프레이>는 즐겁다. 트레이시를 위시한 10대의 꿈과 욕망은 ‘치이익-’ 시원한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분무된다. 사람들은 춤추고 화해하고 응징한다. 그 세계는 ‘재클린 캐네디’의 머리모양처럼 매끄럽고 둥글둥글하다. 트레이시는 노래한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아버지는 권고한다. 그럼 나가봐, 여긴 미국이야. 콜린스는 벨마에게 대든다. 이게 미래예요. 그러나 매력적인 대사는 따로 있다. “저 뚱땡이 빨갱이를 끌어내야 해”라든지 “(흑인과 백인을) 섞어? 이게 무슨 칵테일이야?”와 같은. 60년대의 긍지보다 그 시대의 편견을 드러내는 대화들. 인종차별을 다룬 부분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다. 그것은 개인의 입신양명을 자주 다루는 뮤지컬 장르에서 드문 소재이기도 하다. 아쉬운 건 그 시기, ‘편견’이라기보다 ‘상식’에 가까웠을 혐오나 공포의 정서를 보통 사람들이 아닌 악인 몇몇에게 뒤집어씌운 점이다. 트레이시는 카메라 앞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모든 날을 ‘니그로 데이’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주위 스탭들이나 10대들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가 비추는 건 속물적인 벨마와 스폰서의 경악한 얼굴뿐이다. ‘미스 헤어스프레이’를 뽑는 생방송 중 무대 위로 흑인이 뛰어들 때도 마찬가지다. <헤어스프레이>는 작은 선(善)이 큰 악(惡)을 향해 벌이는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큰 선(혹은 다수의 좋은 사람들)이 작은 악을 물리치는 얘기로 끝을 맺는다. 흥미로운 건 트레이시의 ‘먹는 몸’, ‘흔드는 몸’이 ‘시위하는 몸’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특별히 의식이 있는 것도 책을 보는 것도 아닌 트레이시가(“전 온종일 <코니 콜린스 쇼>만 생각해요!”) 흑인들 편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과 함께 춤을 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구호’나 ‘당위’가 아니라 그들을 ‘몸’으로 먼저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진보적 가치에는 동의하면서 신체적 접촉 앞에선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내가 상상하는 몸과 머리의 속도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다. 트레이시에게 흑인과 함께하는 게 ‘즐거움’인 반면, 내게는 ‘교양’이었던 셈이다. 비록 차별철폐란 피켓이 어정쩡하게 나오긴 하지만, 흑인과 ‘춤’으로 먼저 소통한다는 ‘헤어스프레이’의 설정은 뮤지컬이란 장르와 잘 맞아떨어진다. 다행히 미스 헤어스프레이의 우승자는 트레이시가 아니다. 물론 엠바도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의 수를 볼티모어 공동체로 불려나가길 원하는 듯하다. 이것은 물론 나쁜 결말이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본 것뿐인데, 이상하게 겸연쩍은 기분을 느낀다. ‘넌 큰 대가를 치를 거야’란 말과 달리 볼티모어 사람들도, 우리도, 너무 큰 것을 너무 쉽게 얻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옳은 구호’의 평편함에 비해 사람 속은 훨씬 깊고 구불거리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모닝’이 그닥 굿‘모닝’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볼티모어 사람들의 화려한 축제는 텔레비전 안에 그대로 갇혀버린 채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렇게 갇혀 있는 채 열린 주장을 하면서 막을 내린다. 순전히 ‘즐겁자’고 만든 영화를 정색하며 살피긴 멋쩍지만 이왕이면 그 즐거움이 개운한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은 어쩔 수 없다.

김기덕 감독, 오다기리 조와 한팀된다

김기덕 감독이 만들 새 영화의 밑그림이 나왔다. 제목은 <비몽>(가제), “슬픈 꿈”이라는 뜻이다. 김기덕 감독은 현재 각본을 최종 수정 중이며, 완성되는 대로 2008년 1월4일경 촬영에 들어가 대략 1월25일까지 서울 안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숨>과 마찬가지로 김기덕 필름과 여타 제작사와의 공동제작 형태로 완성할 계획이며, 이번에도 적은 예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경제적인 영화 만들기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이다. 꿈속에서 교통사고를 내게 된 남자 ‘조’. 꿈을 깬 뒤 그가 꿈에 보았던 장소로 가보니 정말 뺑소니 사고가 있었다. 경찰은 ‘란’이라는 여자를 용의자로 추적하던 중 집에서 ‘자고 있던’ 그녀를 체포한다. 하지만 ‘란’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낸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몽유병이 있음은 인정한다. ‘란’이 범행을 거부하는 동안 ‘조’는 그 사고를 낸 것이 사실은 자신이라고 말한다. 두 주인공의 꿈속 경험과 실재는 점점 흥미롭게 얽혀간다. <비몽>의 일부 내용이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화제가 될 만한 것은 남자배우의 캐스팅이다.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일본의 젊은 배우 오다기리 조가 남자주인공으로 전격 발탁됐다. <숨>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장첸에 이어 외국 배우로는 두 번째다. <비몽>의 송명철 프로듀서는 “11월 말쯤인가, 12월 초쯤인가 만나 합의했다. 그전부터 오다기리 조도 감독님도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다. 실은 내년 초에 오다기리 조는 중국영화의 촬영 일정이 계획돼 있었는데 그게 연기되면서 다행히 우리와 스케줄이 맞았다. 인기있고 역량있는 배우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오다기리 조가 출연한 <유레루> 등을 보며 김 감독님이 관심을 가져오신 것 같다”고 전했다. 여주인공도 현재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 중인 국내 주연급 여배우로 결정된 상태. 그러나 관계자는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말했다. <숨>에서 김기덕 감독은 외국인 배우인 장첸에게 대사없는 죄수 역을 맡겨 외국 배우와 한국 배우 사이의 언어문제를 해결했는데, 이번 영화 <비몽>에서는 “주인공들이 서로의 말을 잘 이해한다고 가정”한 뒤 “오다기리 조가 일본말을 하면 그걸 자막으로 넣어 보여주고, 한국 배우들은 그냥 한국말로 대사를 하는 식”으로 흥미롭게 처리한다. 적어도 내년 상반기 안에는 김기덕 감독의 15번째 영화 <비몽>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투표

대선 후보 합동토론회에 나온 권영길씨는 다섯 해 전과 다름없었다. 논리 전개는 허술했고, 음절 경계는 흐리터분했다. 그 알아듣기 힘든 언어는 게다가 구체성의 살을 발린 채 관념의 뼈대로 앙상했다. 동문서답도, 썰렁한 유머도 여전했다. 요컨대 권영길씨는 다섯 해 전처럼 공부 없이, 준비 없이 토론에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 배짱이 그를 설핏 신참자 이명박씨와 닮아 보이도록 했다. 아무런 사전정보나 선입견 없이 토론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권영길씨와 이명박씨를 우등생 넷 사이에 낀 열등생들로 판단했을 것이다. 끝끝내 텔레비전 토론을 거부한 채 대통령이 된 김영삼씨가 텔레비전 토론이라는 것을 했다면, 아마 권영길씨나 이명박씨 식으로 해치웠을 것이다. 메떨어진 억양과 빈약한 가용어휘로 말이다. 그러니 민주노동당에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권영길씨가 아니라 심상정씨나 노회찬씨가 앉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한다 해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아니, 권영길씨와 이명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네 후보 중 누구라도, 그가 권영길씨 자리에 놓였다면, 한결 더 효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유권자들에게 소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중도우파 세력의 지지 기반이 무너져 진보정치의 공간이 외려 넓어질 수도 있는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제 후보를 잘못 골랐다는 뜻이다. 주류 정치세력 후보들 모두를 선택지에서 제쳐놓은 유권자들도 권영길-민주노동당에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는 눈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뭔가 개운치 않은 것이 꼭 권영길씨 개인의 매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정작 개운치 않은 것은 권영길씨를 아슬아슬하게 민주노동당 후보로 만든 정파의 이념적 봉건성이고, 좀처럼 화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민족지상주의자들과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당내 혼거 상황이다. 이질적 정파의 이 혼거는 갈등을 조정할 당내 정치력의 부족으로 자주 파열음을 낳고, 그 파열음은, 보수정당에서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사소한 추문들과 맥놀이를 만들어내며, 기호 3번에 표를 주기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다면적이고 상대적이다. 권영길씨는 다른 후보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 다른 삶은, 진보 유권자들 처지에서는, 존경할 만한 삶이었다. 신문기자로 일할 때 그가 얼마나 노동계급 지향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는 지난 20년간 한국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또는 그 전위에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경선을 거쳐서 그 당의 후보로 뽑혔다. 그것은, 이번이 몇 번째 출마든, 그가 한국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서 정통성이 있다는 뜻이다. 기호 3번에 투표하는 것이 권영길씨 개인에게 투표하는 것이라기보다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자주와 통일 담론에 대한 완고한 집착이 이 당의 노동계급 정체성을 많이 흐려버리기는 했으나,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안에서 한국 노동계급을 대표해온 유일한 정당이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법적 출발로만 따져도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정당이지만, 민주노동당의 사회·정치적 역사가 2000년 1월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 정당에는 군사파쇼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졌던 노동운동의 흐름들이 합류했고, 해방기까지 올라가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흐름들이 합류했다. 그러니까 기호 3번에 투표하는 것은 한국 노동계급의 역사와 그 미래에 투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그 근본이 조직노동자들의 정당이긴 하나 적어도 다른 정당들에 견줘서는 우리 사회의 순정(純正) 아웃사이더들에게까지 눈길을 건네왔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80만 조합원이 각자 10명씩을 조직하여 800만 표를 노동자 후보에게 몰아주자”고 호소했다. 꼭 10명씩이 아니라, 조합원 모두가 제가끔 가족 친족 유권자들만 설득해도 민주노동당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미증유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조직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들 자신이 지역을 비롯한 이런저런 연고에 이끌려 표를 ‘반-노동자적으로’ 행사했기 때문일 테고, 민주노동당 안의 이른바 자주파마저 수구세력 집권 저지라는 대의와 민족주의 열정에 휘둘려 중도우파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실천했기 때문일 테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보수정치세력이 힘을 얻고 있는 데다 그 보수세력이 민생은 몰라도 민족주의 열정은 살려낼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지금은, 비판적 지지를 철회하고 계급투표를 하기에 딱 좋은 계제다. 물론 그런다고 권영길씨가 대통령에 당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표는 내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치를 시험의 모의고사 점수 노릇은 하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든 범여권이 재집권하든 한국 노동계급에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한국 노동계급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우승민] “감독님한테 내 안 쓰믄 후회할 거라 했거든요”

우승민은 바쁘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인 12월19일 오후 4시30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3개의 인터뷰를 해치운 뒤였다. 1인 록밴드 ‘올라이즈밴드’ 뮤지션 우승민은 2001년 첫 음반을 낸 뒤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다 올해 초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나오면서 2007년 버라이어티쇼계의 최고 ‘신인’으로 떠올랐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올 초 강호동을 통해 팬텀엔터테인먼트와 매니지먼트 계약도 맺었다(강호동 소속사). 우승민은 최근, 군대 간 남자친구들을 기다리는 네 커플의 이야기 <기다리다 미쳐>에서 부산 출신의 늦깎이 신참 ‘허욱’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실 이 영화가 그를 캐스팅할 무렵에 우승민은 지금과 같은 조명 세례 속에 있지 않았다. <기다리다 미쳐>쪽이 운이 좋은 건가? “쌉니다. 진짜 쌉니다.” 억센 부산 사투리로 우승민은 자신의 몸값이 겁나게 싸서 케이블채널 의 팝음악 프로그램 <블링블링팝> 진행을 맡게 된 거라고 말했다. “스티브 김씨인가, 그분이 음주운전하셨잖습니까. 그래 가지고 제가 하게 된 겁니다. 그분이 음주운전 안 걸렸으면 제가 몬했죠.” 당혹스러울 정도의 단답이 아니면 리듬감 넘치는 부산 사투리로 ‘팩트’를 꼬집는 그는 본인이 ‘떴다’라는 사실의 환기를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며 아무 기대없는 태도를 지키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화려한 문답이 오갈 거란 예상은 무너뜨렸으나, 인터뷰 자리에서 할 말은 다 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도 분명해 보였다. 우승민은 이 모든 걸 오로지 ‘일’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과 명예를 걸 이유가 전혀 없는. 촌철살인 화법의 뮤지션 우승민의 자의식은, 돈을 버는 일 앞에서 완벽하게 증발한다. -많이 바쁜 듯하던데, 일주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하나도 안 바쁩니다. 텔레비전 방송 몇개 하고, 그냥 집에서 자고…. (뚱) -영화 출연은 언제 결정한 건지. =올 초에 계약이 와서 하게 됐습니다. 회사에서 영화 왔다고, 시나리오 함 읽어보고 함 해봐라, 해서 읽어봤는데, 부산 역할이더라고요. 내가 뭐를 하기보다는 많이 배운다라는, 호기심 반, 이런 생각으로 하게 됐죠. -그외에도 시나리오 들어온 게 있었나요. =없습니다, 없습니다. (잠시) 몇개 들어온 게 있긴 있었다 그러더라고요. 그 카메오, 뭐 그런 거로는 안 한다 그랬습니다. -영화를 찍어보니 어떻든가요. =음. 좋데요. (웃음) 일단은 배우들이 계속 뭉쳐 있으니까 인간적인 매력이 좀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방송할 때는 스케줄이 바쁘니까 끝나고 끝나고 가고 가고 이런 게 있는데 이거는 거의 하루 날 잡아서 같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거는 한번 찍고 나면 자리를 또 바꾸더라고요. 대기 시간이 많으니까 이야기도 좀 많이 하고 이래 되니까, 가까워지는 거 같아서, 그런 게 좀 좋았습니다. -사실 영화 보면서 저 역할에 굳이 ‘올밴 우승민’을 캐스팅한 이유가 뭘까 궁금했어요. 영화 후반부에 욱이가 “아, 똥국~” 이러면서 내무반에서 나뒹구는 신 보고, 저것 때문이었구나 납득하게 됐죠. =참고로 애드리브였습니다. 카메라 감독님한테, 요고 진짜 재밌다고, 내 함 믿어보라 하고 뵈줬그든요. 웃더라고요, 재밌어가지고. 감독님께선 영화가 너무 코미디로 가버리면은 너무 날리게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오바를 좀 많이 하지 말란 얘길 하셨거든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슛 들어가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게 진짜 잘 살았는데 카메라 감독님이 웃는다고 카메라가 흔들려가지고 NG도 나고 해서 다시 했어요. 그게 갔으면 좋았는데, 같은 걸 계속 할래니까 첫 대사가 안 나오잖아여. 좀 아쉽긴 했습니다. -감독님 의도대로라면 우승민씨는 영화에서 튀면 안 되는 건데, 그러면 왜 우승민씨가 캐스팅됐을까요. =음, 일단, 싸지 않았나 그래 생각을 해봅니다. 감독님 만나가 브리핑도 하고 대본 가지고 리허설도 하지 않습니까. 사실 감독님이 나를 컨택하신 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얘가 되겠나, 연기도 안 해봤고, 긴가민가. 까일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뭐라 했느냐면 영화는 망해도 내 신만큼은 확실하게 재밌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으니까 무조건 내를 쓰라고 했습니다. 내 안 쓰면 후회할 거라고. 퇴학하고 자퇴하고 똑같은 건데, 퇴학이라 그라믄 쪽팔리거든요. 또 감독님도 생각 안 해보셨겠습니까? 가격 대비 성능 비교하고, 이래 하셨을 거고요.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로고송 만들어주고 나서 출연 제의받은 거라고요. 추리닝 입고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일부러 잘리려고 비방송용 말도 편하게 막 한 거라고 그랬는데. =자기 자리가 아닌 데 가면 불편한 게 있잖아요. 다 유명하고 다 (사람들이) 아는 연예인이고, 나는 (사람들이) 잘 모르잖아요. 말 그대로 병풍이잖아요 병풍. 그동안에 돈은 없어도 내 자신감 하나로 살아왔는데, 내가 믿고 있던 신념과 그런 거는 다 쓰레기였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있잖아요. 이게 진정한, 코미디인 거 같습니다. (피식) -방송을 보면, 가만히 있다가 가끔씩 한마디로 허를 찌르는 식인데, 나중에는 그런 말버릇 때문에 잘릴 우려는 안 들었는지. =제가 뭔가 했을 때 남의 리액션을 바라고 그라는 걸 저는 별로 생각을 안 합니다. 저는 (피식) 그냥 바로바로 나오는 대로 말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해서는 안 될 말을 많이 하거든요 사실. 그러니까 방송 같은 데서는 가급적이면 말을 안 할라고 많이 생각을 하죠. 하면 주워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해라, 라고 제작진이 요구하지 않습니까. =합니다.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말 하라고 스케치북에 써서 나 보여주거든요. 그러면 그냥 모른 척하고…. 준비된 액션은 못하겠더라고요. 나도 뭔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이 얘기를 어느 타이밍에 하면 좋지 이런 걸 생각하는 것보다 그냥 무리에 어울려가지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이거를 웃겨줘야 되는데…, 이런 거는 저하고 안 맞는 거 같더라고요. 그런 게 있으면 이 일을 몬할 거 같더라고요. -그런 압박을 느꼈나봐요. =<작렬! 정신통일> 할 때 많이 느꼈죠. 그 PD가 내를 <무릎팍도사> 보고, 임마는 데꼬 오면 무조건 된다, 했거든요. 너는 다른 거 없이 무조건 말만 많이 하면 된다, 이 형이 내 캐릭터를 잘 몰랐던 겁니다. 그런 거에 있어서, 외세의 압박, 이런 거를 많이 느꼈죠. 그러나 저는 철통같은 수비로…. -새 앨범은 언제 내나요. =내년에. 곡은 많이 써놨고, 로고송 같은 거 많이 만들어주고 있으니까. 음악은 계속 하고 있거든요. 그동안 만들어놨던 노래들로 내는 겁니다. -음악 스타일은 기존의 것이 유지되나요. =이게, 내가 진짜 사람들 말을 안 들어도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게, 1집 내놨을 때는 욕 많이 한다고 지랄하드만 2집 내놓으니까 이젠 욕을 안 한다고 지랄을 하더라고요. 변했다고. 그니까 이게, 그들이 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나한테 만족하면 괜찮더라고요. 항상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거 같더라고요. 뭐든지. -그럼 남들이 말하는 그 변화, 욕을 많이 하던 1집에서 욕이 없는 2집으로 가게 된 그 변화는 왜 온 거라고 본인은 생각하세요. =내가 1집을 만든 게 욕을 할려고 만든 거는 아니거든요. <무릎팍도사>도 보면 거기서 내가 제일 웃겼다고 생각하는 거는 싸이 나왔을 때 ‘손바닥은 하나만 가지고 소리 못 낸다’고 그래서 내가 이걸로 (오른손의 엄지, 검지를 맞붙이고 그 손을 막 흔들어서 딱딱 소리내는 액션) 이걸로 웃겨줬잖아요. 근데 사람들은 이런 걸로는 별로 안 웃고 ‘롯데는 왜 이리 몬합니까’ 이런 걸로는 막 웃기다 그라고요. 이게 코드가 안 맞는 거 같애요. 방송에서는 내를 좀 싸가지없고 이런 이미지로 많이 만들어갈라고 하거든요. 그라니까 내는 거기 따라가면은 안 되고, 최종 수비는 할 건 또 해주고 해야 되겠다…. -최후방어선이 음악인 건가요. =방송에서도 음악하는 형들은 내보고 그라거든요. 니는 음악을 계속 해야 된다. 자기들도 뭐, 이제 음악하면은 사람들이 웃는다. 근데 나는 내가 예전에 방송 나가기 전에도 내가 음악하면 사람들이 다 웃었거든요. 근데 그때보다는 많이 순화되는 건 있더라고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웃으면은, 아하, 쉬발놈들, 지금 웃나, 이랬는데 이제는 웃으면은 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거 있잖아요. 사람들이 웃는 구나, 이래 많이 유들유들해지는 거 같더라고요. -이영자씨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본인에게 ‘가수면 노래를 해야지 왜 개그를 하고 있냐’고 했죠. =그래 말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근데 나는 노래도 하고 있고, 공연도 하고 있는데, 그니까 이거를 무슨 종족처럼 생각해가지고 ‘니는 가순데’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차피 다 광대 아닙니까. 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이 직업인데, 어느 순간부터 문화생활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걸 예술이라 칭하면서 이 ‘후까시’에 사로잡혀서 지가 존나 대단한 줄 알고 나는 아티스트, 이런 게 나는, 같이 하는 입장에서 좀 안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본인도 음악을 할 땐 뭔가 진정성을 갖고 하려고 할 거 아닌가요. 그러면 그것도 그 순간에 예술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올라이즈밴드 1집 자체가 조롱이거든요. 기존에 있던 음악이나 가수들이 하는 거를 많이 비웃고 풍자, 이런 게 좀 많았기 때문에. 나는 시작 자체가 그런 거였거든요. 학교(부산예술대학)에서 음악을 배울 때부터. 근데 일반적으로 편견이 그렇잖아요. 쇼프로는 좀 우습게 보고, 코미디언은 낮게 보고. -팬텀과의 계약은 언제 만료인가요. =에, 그거는 보안입니다, 보안. 탑 시크리트. 근데 다들 영화 얘기는 별로 안 물어보고 <무릎팍도사>만 물어보고…. -그게 제일 이슈이다 보니. 지금 <무한도전>과 함께 버라이어티계의 쌍두마차이지 않습니까. =내년에는 <동안클럽>이 치고 올라올 겁니다. -<동안클럽>도 출연하세요. =포맷이 바뀌어가지고 제가 투입이 되면서, 기타를 치고 전세계를 돌면서, 뭘 먹으러 댕깁니다. -신년에 투입되는 프로그램들이 더 있습니까. =코미디 프로 몇개 한다든데, 아직 포맷이 안 나와가지고요. -훨씬 더 바빠지겠네요. =아입니다.

초자연 멜로드라마 <더 시크릿>

어느 모로 봐도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다. 남편 벤자민(데이비드 듀코브니)과 아내 한나(릴리 테일러)는 사이가 더없이 좋고, 고등학생인 딸 사만다(올리비아 설비)는 그 시절의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이유없는 약간의 반항심을 드러내며 살고 있다. 갑자기 차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랬다. 한나와 사만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사만다의 영혼은 세상을 뜨고 딸의 몸속으로 한나의 영혼이 들어간다. 사고의 충격에 빠져 있던 벤자민은 불가사의한 빙의 현상에 당황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딸의 육체 안에 들어가 있는 아내, 그 아내와 같이 사는 남편에게는 이런저런 갈등과 헤프닝이 벌어진다. <더 시크릿>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일본영화 <비밀>의 리메이크작이다. 뤽 베송이 제작을 맡았고 <크로우2> <여왕 마고> 등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감독을 겸하고 있는 뱅상 페레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이 영화에서 일단 반가운 건, 우리에게 미국 텔레비전드라마 <엑스파일>의 주인공 멀더 역으로 친숙한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벤자민으로 출연한다는 점이다. 제작진은 ‘빙의’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어울릴 만한 서양 남자의 역할에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렸을 만하다. 어쩌면 딸의 몸속으로 들어간 아내의 영혼이라는 소재는 원작영화에서처럼 소소한 코미디적 소재로도 반길 만 했을 것이다. 혹은 방향을 틀어 스릴러로 풀어내고 싶은 욕심도 생길 만하다. 그 중간 어디쯤일까. <더 시크릿>은 사랑에 관한 정통 드라마의 성격을 여전히 유지하되, 이미 벌어진 일을 담담하게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에 치중한다. 그러면서 헐리우드식 엔딩을 추구한다.

[진중권의 이매진] 시뮬라시옹으로서의 대통령

“거대한 군부 조직과 비대한 군수산업의 결탁은 미국의 체험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이들의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영적 영향력의 총체를 모든 도시, 모든 주정부의 청사, 연방정부의 모든 사무실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정부의 위원회에서 이 군산복합체가 부당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된 권력이 발흥할 재난의 위험은 현존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절대로 이 결탁 세력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영화는 퇴임을 3일 앞둔 아이젠하워의 연설로 시작한다. 이어서 흑백 뉴스릴의 몽타주로 당시의 미국 상황을 숨가쁘게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1960년 11월 케네디의 당선은 곧바로 취임식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틴 루터 킹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외치고, 말콤 엑스가 격정적인 제스처로 분노를 토하고, 하얀 두건을 뒤집어쓴 KKK 단원들이 십자가를 불태운다. 베를린에서는 케네디가 “나는 베를린 시민”이라 선언하고, 쿠바에서는 군복을 차려 입은 카스트로가 선동적인 제스처로 열정적인 연설을 한다. 망명 쿠바인들을 동원한 CIA의 피그만 상륙 작전은 케네디 정부의 지원 거부로 실패로 돌아간다. JFK는 이른바 ‘자유 쿠바인들’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비난받는다. 베트남전쟁에 대해 케네디는 “미국이 참전 안 하면 월남이 질 것이라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전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물론 전쟁을 바라는 군산복합체의 이해에 어긋나는 발언이다. 19662년 케네디는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던 소련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나 그 대가로 쿠바의 공산화를 묵인했다고 비난받는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케네디는 자유의 상징이었고, 변화와 개혁을 상징했다”. 민권운동, 히피운동, 반전운동 등 60년대에 미국인은 그야말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열망을 인격으로 대변한 것이 케네디.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새로운 ‘비전’을 보았고, 그 비전에는 ‘평화’도 들어 있었다. “무기에 의한 평화가 아닙니다. 냉전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 함께 삽니다. 우리는 똑같은 공기를 숨쉬며, 똑같이 아이들의 미래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습니다.”(We are all mortal) 포맷과 색채로 직조한 서사 영화는 출처와 포맷이 다른 다양한 영상 자료들을 사용한다. 그중에서 가장 섬뜩했던 것은 역시 ‘재프루더 필름’. 여성의류업을 하는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라는 시민이 우연히 촬영한 이 동영상은 총탄이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피가 터지면서 머리의 일부가 날아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는 순간 객석에 앉은 관객이 비명에 가까운 짧은 탄식을 토해내던 것이 기억난다. 이 장면은 이 사건에 대한 공식기록인 ‘워런 보고서’의 내용이 옳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사용된다. 텔레비전 뉴스, 영화관의 주간뉴스, 8mm 홈무비. 이것들은 각자 포맷도 다르고, 색채도 다르다. 의 생명은 역시 이 다양한 영상 자료들을 결합시키는 방식에 있다. 가령 케네디의 암살을 경고하는 여인이 들판에 버려지는 장면은 극영화에 속하나, 감독은 이 장면을 흑백의 8mm 홈무비 포맷으로 제시한다. 그런가 하면 오스왈드가 이른바 ‘애국시민’에게 저격당하는 장면은 텔레비전의 화질을 갖고 있으나, 극장 스크린의 포맷으로 처리된다. 마치 칸딘스키처럼 포맷과 색채로 작곡을 하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는 순수한 형식 실험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 포맷과 색채의 변화는 서사의 전략으로 활용된다. 그리스인들은 서사의 모드를 ‘디에게시스’(diegesis)와 ‘미메시스’(mimesis)로 구별했다. 판소리로 말하면, 가수가 화자로서 아니리를 하는 대목은 ‘디에게시스’, 가수가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창을 하는 대목은 ‘미메시스’에 해당한다. 내레이션과 더불어 디에게시스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미메시스로 돌입했다가, 증인들의 증언과 함께 디에게시스 모드로 들어간다. 이렇게 서사의 모드가 바뀔 때마다 화면의 포맷과 색채가 달라진다. 사실과 픽션의 결합 하지만 거기에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영화는 외려 평범해졌을 것이다. 출발하는 디에게시스 모드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 흑백 화면은 대개 도큐먼트로서 실재(reality)에 속하고, 컬러 화면은 대개 허구(fiction)로서 가상에 속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재프루더 필름은 도큐먼트이나 컬러로 되어 있다. 극 속의 미메시스 모드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제 컬러는 극중에서 현실이 되며, 흑백은 외려 기억이나 증언과 같은 가상의 모드로 사용된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어서 몇몇 사람의 증언은 컬러로 제시된다. 극 속에서 증인들이 증언하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가상 속의 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가상의 가상이 ‘일종의’ 실재가 된다. 말하자면 ‘워런 보고서’가 밝혀내지 못한 암살의 진리 혹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사실에 가장 근접한 개연적 가설이 되는 셈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렇게 다양한 포맷과 색채로 모드의 변화를 연출하다가 그것으로 마침내 가상과 현실의 관계를 뒤집어버리는 데 있다. 장자와 나비처럼 꿈속에서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가상에서 다시 가상으로 들어가면 현실이 나온다. 실제로 증언이나 회상장면에도 종종 연출된 화면과 기록영화가 더불어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영화는 여러 겹의 모드를 드나드는 복잡한 서사의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는 가운데 극영화와 기록영화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관객은 어디까지 실재이고 어디까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에서 감독이 제시하는 가설을 거의 실재로 받아들이게 한다. 영화의 인기로 결국 1992년 의회에서 케네디 암살사건의 재조사를 명령한 이른바 ‘JFK 법’이 통과되고, 같은 해 가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거기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역사와 음모론 영화가 나오자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음모론을 부추긴다고 비판했고, 감독은 이 영화가 “가까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 응수했다. “그것은 흑백에서 컬러로, 거기서 다시 흑백으로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독특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당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게 현실인 척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배우들을 윌리엄 해리슨 등으로 분장시켜놓고 스크립트를 읽게 한 다음 카메라로 찍어,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reality)이라는 바로 그 생각 자체를 의문에 붙이려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관념 자체를 의심한다는 감독의 말은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이 프랑스 철학자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시뮬라시옹’, 즉 이미 권력과 매체가 연출로 구성되는 거대한 허구라고 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드리야르 철학의 민주당 버전을 읽을 수 있다. 자유와 개혁, 민주당 정체성의 인격적 화신이 군산복합체의 정치적 음모에 희생당했고, 그들이 아직도 ‘그 속에서는 케네디의 암살이 오스왈드 개인의 단독 범행인’, 그런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음모론(?)은 이보다 규모가 더 큰 것이다. 설령 대통령을 뽑을 수는 있어도 권력을 선출할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권력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민주주의는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환상이다. 이 환상을 위해 대통령은 중요한 존재로 여겨져야 하며, 그 존재의 광휘를 마련하기 위해 케네디는 암살당해야 했다는 것. 이렇게 “권력은 존재와 정당성의 미광을 발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살해를 연출할 수도 있다”. <그때 그사람>이라고 했던가?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티브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 그 사건에서 무엇을 주제화해야 할지 감독 스스로 분명하지 않다보니 그냥 사건을 희화화해 블랙코미디를 만드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텔레비전을 보니, 오늘(12월19일) ‘대통령 선거’라는 행사가 있었나보다. 외신을 보니 “개를 데려다놔도 선출될 것”이라고 하더니, 세상에, 그 예측이 맞았다.

[한국영화 후면비사] 천년 후엔 사랑도 죽음도 스크린으로

“달 보러 남산 가세.” 1969년 7월21일. ‘가슴을 죄는 TV 시청’을 위해 남산 야외음악당에는 무려 10만명의 서울시민이 운집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두눈으로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낙도와 산골 사람들도 “TV를 보겠다”고 도시로 향했고, 심지어 “텔레비전 구경을 위해 관광객을 싣고 가던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인간이 달을 걷고 돌아오는’ 그 역사의 순간을 두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열망 때문에 거리와 극장은 텅텅 비었다. 경찰과 신문사는 달 착륙 문의전화로 마비상태였다. 닐 암스트롱이 세기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양복점, 주점, 다과점, 음식점 등은 ‘아폴로’로 상호를 바꿨다. 심지어 “보행을 뜻하는” ‘11호 자가용’이라는 유행어까지 나돌았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후의 영화란? 전쟁도 영화로 하고, 연애도 영화로 한다. 그뿐인가. 정사까지 영화를 이용해서 수정하는 천년 후의 남과 여를 픽션으로 구경해보자.” 1970년 3월 <영화잡지>에 실린 ‘스크린의 혁명’이라는 기사의 경천동지할 미래선언 또한 달나라 구경의 영향 탓이다. 인공태양이 떠 있는 수중도시 한강구에서 살고 있는 100살 먹은 조선달의 하루를 뒤쫓은 이 픽션의 상상력은 끝간 데 없다. 조씨에 따르면 30세기의 영화 촬영스탭들은 김포공항에서 원자력 비행기를 타고 달나라 로케이션을 간다. 옛 지구의 모습을 찍기 위해서다. 그곳 월세계(月世界)에는 지구에서 쫓겨난 원시인들이 있다. 조씨는 NG를 허용하지 않는 로봇 감독과 로봇 배우들을 구경하면서 비타민 한알로 하루 식사를 마친다. 이뿐이랴. 그가 전하는 3000년대의 러브스토리도 파격적이다. 서로 모르는 남녀가 이상형을 필름으로 찍어서 보내면 연애상담소의 컴퓨터가 궁합을 통보해준다. 두 연인이 있다 치자. 먼저 발가벗고 스크린 앞에 앉는다. 영화 속 섹스장면이 정점에 오르면, 연인의 가슴에 꽂힌 심파기가 작동하고, 서로의 국부에 달린 ‘정수기’가 정액을 실어나른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이동 유리병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 수정한다. 출산의 고통은 있을 수도 없다. 심지어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스크린 안락사까지 제시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좋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화로 해결한다. 1천년 뒤의 일이라는 유예조건을 전제로 했지만, 어쨌든 그런 꿈같은 세상이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믿기는가. 허무맹랑한 거짓부렁이라고만 할 순 없다. 봉이 조선달이 상상을 쏘아올린 지 이제 30년. 테크놀로지는 그의 방통한 통찰력을 이미 실현했거나 근접하고 있다. 1971년 7월 <영화잡지>에 게재된 ‘10년 후에는 이렇게 된다’는 기사를 살펴보자. 인스턴트 시대 개막과 함께 집집마다 영화관이 설치된다는 기사의 추정은 VTR로 이미 실현됐다. 발가락으로 단추만 누르면 안방에서 자기가 원하는 장르의 영화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가상은 IPTV로 발전 중이다. “장난감처럼 사용할 수 있는” 무비TV는 테이크 아웃이 가능한 내 손 안의 ‘DMB’를 예언하고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상관으로부터 매를 맞거나” “알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을 기록할 수 있다”며 휴대폰 동영상까지 내다본다. 신기술에 인간이 넋을 빼고 있는 사이 친구를 잃은 애완견들을 위한 특수 영상도 개발될 것이라는 추측은 아직 황당하다. 미래에도 만년필이나 전자계산기를 여전히 쓰고 있을 것이라는 모순도 이따금씩 드러낸다. 달에서 가져온 암석으로 1년에 300편 이상 출연이 가능한 스타 로봇을 만든다는 것도 지나치다. 하지만 “손오공이 머리털을 뽑아 후 하고 불면 많은 손오공의 분신이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스타 로봇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애니메트로닉스 기술을 활용한 컴퓨터그래픽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유비쿼터스 컨버전스 시대를 일찌감치 예감한 지적들 또한 가파른 속도의 테크놀로지 추동이 인간 욕망의 연장(延長)과 무관하지 않음을 일러준다. 하지만 이런 투의 기사들이 일부러 간과하는 게 있다. 새로운 창세기의 주인이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상상으로 써내려간 영화의 창세기는 바람일 뿐, 실은 영화의 묵시록이다. 대신 그 자리엔 “번영과 문명화를 상징하는” TV 제국이 들어섰다. 1970년 이후 영화잡지들의 지면 또한 TV라는 새로운 영역에 지분을 몽땅 내주다시피 한다. 방송사들이 드라마 제작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던 무렵 공채 탤런트 모집 공고에 5천명 이상이나 되는 지원자가 몰리고, 충무로 밥 먹던 이들 또한 먹이 찾아 이동하는 철새떼처럼 안테나를 찾아 떠나던 1970년대 초. 미디어와 스펙터클의 교합으로 시작된 TV의 위세는 ‘그후로도 오랫동안’이었고, 영화는 빼앗긴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이었으나 매번 불발에 그쳤다. 참고; <영화잡지> <한국일보> <동아일보> <한국현대사산책> <스물한통의 역사진정서> <우리방송 100년>

[메신저토크] “인간이란 시시하지만 그런 채로도 괜찮다는 기분을 감염시키는 영화”

김혜리 “혁명 자체를 희화화한 것이 아니라 영웅과 열정적 사람들 말고도, 이런 평범하고 별볼일 없고 치졸한 사람들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기분. 인간이란 시시하지만 그런 채로도 괜찮다는 기분을 감염시키는 영화였습니다.” 이동진 “이야기의 틀만 이야기하자면,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런 설정들을 훌쩍 뛰어넘는 시선이 들어 있더라고요.” 불망기: 다음 영화는 세계 영화지도에서 급부상한 루마니아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입니다. 혹시 이제 ‘스키’자 돌림 감독님들의 시대가 가고 ‘우’자, ‘쿠’자 돌림의 시대가 오는 건가요? ^.~ 물망가: 욱, 쿡.^^ 불망기: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그때’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국민들의 봉기에 항복 선언을 한 1989년 12월22일 12시8분입니다. 소도시 바스루이의 지방방송 토크쇼에서 16주년 혁명 기념일에 즈음해 과연 우리 동네 사람들이 혁명 대열에 나섰던가, 사후에야 거리로 나왔나를 따집니다. 극중 시간으로 보면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는 새벽에 시작해서 다시 켜지는 해질녘에 끝나는 한나절의 이야기고요. 보는 동안은 황당하고 독특한 코미디고 보고 나니 따뜻하고 쓸쓸했어요. 물망가: 조금 온도가 낮은 듯, 여유로운 유머감각이 상당한 코미디영화였어요. 앞뒤에 붙인 관조적이고 서정적인 장면이 특히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더라고요. 불망기: 일단 많이 웃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고 16년- 10년도 아니고! 15년도 아니고!- 이나 흐른 뒤 뜬금없이 “가만, 그때 우리 시에서도 혁명이 과연 있었나?”를 따진다는 모티브부터가요. ^0^ 물망가: 이 영화도 이야기의 틀만 이야기하자면,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런 설정들을 훌쩍 뛰어넘는 비범한 시선이 들어 있더라고요. 불망기: 시청자 전화를 받는 토크쇼를 거의 40분쯤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본론이지만, 그것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소도시 바스루이 사람들의 일상이 영화를 전혀 다른 영역으로 밀어올렸습니다. 물망가: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시점은 우스운 문제 같지만 토크쇼에서는 사실 중요한 질문이에요. “우리 도시에 혁명이 있었는가”라는 토론 주제는 “항복 선언이 있었던 12시8분 이전에 시위가 있었는가”로 판가름나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거대담론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상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가를 영화가 말해주는 부분이 있어요. 불망기: 역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왜소함이 있죠. 종종 자문하게 되잖아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 일어난 한국사회 대사건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는데 그때 거기서 난 뭘 했을까? 물망가: 바로 그런 자문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5·18 그 시각에 친구들과 대구에서 화투를 쳤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심하게 자괴감을 느꼈다는 이창동 감독의 경우도 그렇고요. 불망기: 이 영화의 주요 인물은 세 남자인데요. 한명은 토크쇼 진행자이자 혁명 뒤 방송사 사장이 된 즈데레스쿠고요. 내정된 게스트의 거절로 얼떨결에 섭외된 주정뱅이 교사 마네스쿠와 혼자 사는 할아버지 피스코시가 나머지입니다. 즈데레스쿠는 역사의 거창한 의미를 규정하려는 욕심이 있고 마네스쿠는 적어도 그때 나도 한몫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싶어하죠. 피스코시 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고요.^0^ 꽤나 긴 도입부가 셋의 시시껄렁한 가정사와 일상부터 보여주는데, 뭔가 인생에서 대수로운 기대를 않는 사람들 특유의 코미디가 일품입니다. 한편 토크쇼는 혼란을 가장한 잘 조율된 소극이고요. 이리 멘첼 감독 영화를 봐도 그렇고, 동구권이야말로 코미디의 보고가 아닐까 싶어요. 연극 전통도 강고하잖아요? 물망가: 유머에는 뜬 유머와 가라앉은 유머가 있는데, 동구권의 유머는 후자쪽의 진수 같더라고요. 꾹꾹 눌러담은 유머 상자를 슬쩍슬쩍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서 보여주는 식이라고나 할까요. 불망기: 동유럽 친구를 사귀면 왠지 대화가 즐거울 듯!*.* 물망가: 기왕이면 <원스>의 마르케타 이르글로바 같은 사람으루다가…. ^^ 불망기:-_-# 그런데 토크쇼에 걸려오는 시청자 전화들이 하나같이 가관이잖아요. “그 시간에 당신 술 마시는 거 봤는데 무슨 시위를 했다는 거냐?”는 반박을 비롯해서 점입가경이죠. 이건 뭐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대로 된 전화를 기다리며> 버전입니다.T-T 물망가: 그런 전화는 끝내 오지 않는다는 거.^.~ 그동안 출연자 할아버지는 종이배를 접지 않나. ^^ 그걸 또 스탭이 뺏어가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든 잡다함으로부터 갑자기 도약해 전혀 다른 경지를 보여주는 결말로 넘어가죠. 불망기: ‘이 영화가 어디로 가는 걸까’ 싶을 즈음에 막상 의제와는 아무 관련없는 두 대사가 갑자기 머릿속을 확 개게 하더군요. 하나는 피스코시 할아버지가 맥락없이 장황히 풀어놓은 죽은 아내와의 추억이었어요. 혁명이 있던 날 아침 지금은 죽은 아내와 싸웠는데, 꽃을 선사하면 풀어질 것 같아서 목련 세 송이를 훔쳐다주었다고요. 그랬더니 그녀가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텔레비전에서 차우셰스쿠의 항복 선언이 나와 그녀에게 용감해 보이려고 거리로 나갔다는 추억이었죠. 물망가: ^^ 사실 그 할어버지는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이야기들을 불쑥불쑥 내뱉 듯 하고 있죠. 불망기: 그리고 혁명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아주머니의 마지막 전화가 걸려오죠. 서두만 듣고는 “한심한 놈들아!” 일갈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더이상 아들 이야기를 안 하고, 방금 내리기 시작한 눈 이야기를 합니다. 물망가: 그게 바로 ‘이 한심한 인간들아’라는 일갈임다. ^^ 불망기: 전혀 뜬금없고 예기치 못한 이 두 이야기가, 기적처럼 설득력있는 결말을 턱 안기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분하지만 졌다’는 기분이었습니다. -..- 물망가: 그리고 카메라는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거리로 돌아가죠. 불망기: 혁명 자체를 희화화한 것이 아니라 영웅과 열정적 사람들 말고도 이런 평범하고 별볼일 없고 치졸한 사람들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기분. 가로등이 꺼지고 다시 켜질 때까지 그렇게 하루 해가 뜨고 지면서 역사가 한땀 늘었다는 기분, 인간이란 시시하지만 그런 채로도 괜찮다는 기분을 감염시키는 영화였습니다. 물망가: 저도 그 점이 가장 맘에 들었어요. 어느 누구도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과도한 정치적 의미부여로 빡빡하게 굴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푸근한 서설로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어요. 혁명을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의 우연한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이문열씨의 소설 <칼레파타칼라>의 냉소적인 태도와 다른 면모였습니다. 이동진 “기본적으로 <헨젤과 그레텔>은 ‘슬퍼하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 숱한 난맥을 드러낸다는 거죠.” 김혜리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러 간다면 누구나 그 동화가 모티브라는 점은 염두에 둘 거예요. 그런데 이 영화는 모티브가 된 동화와 영화 전체 이야기, 그리고 극중 은수가 지어낸 동화가 밀도의 차이가 없어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은 방금 보고 오셨죠? 그림 동화가 원래 알고 보면 무서운 이야기가 많죠? 물망가: 그림동화뿐 아니라 서양 전래동화가 그런 예가 많은데 그건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아이들이 그저 ‘신체가 작은 어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와 살면서 부모가 잠자리에 드는 모습부터 어른들이 걸쭉한 욕설과 음탕한 말을 하는 모습, 그리고 마을 광장에서 참수하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보아온 결과라는 거죠. 술도 일찌감치 마셨잖아요. 불망기: 어린이는 보호해야 할 존재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최근 것이지요. 물망가: 존 카사베츠의 영화 <글로리아>에 보면, 갱이 아이를 쏘라고 명하면서 “그저 좀 작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돼”라고 하는데, 그게 딱 중세와 근세 유럽의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라는 거예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은 학대받은 어린이들이 중심에 있는 영화인데요. 청년 은수(천정명)가 낙태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다가 교통사고로 숲에서 길을 잃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실 도로변에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것부터 일찌감치 판타지 세계의 입구임을 암시하죠. ‘도달불능점’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나, 인물들이 멈출 수 없는 마법에 걸려 있다는 점, 마력적 공간의 비밀을 담은 ‘일기’가 등장한다는 점은 감독의 전작 <남극일기>와 통하는 요소예요. 물망가: 기본적으로 <헨젤과 그레텔>은 ‘슬퍼하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도 그런 영화들이죠. 의 마지막 장면은 대부분 사족이라고 비판했지만, 저는 아이의 눈물을 기어이 닦아주려는 스필버그의 따뜻한 마음의 산물이라 느껴져서 감동받았어요. <판의 미로…>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런 면이 있죠. 이 두 영화는, 바다 밑에서라도, 판타지 속의 지하세계에서라도, 기꺼이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죠. <헨젤과 그레텔>도 그런 지점에서 분명히 강한 전달력을 가진 영화예요. 문제는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 난맥을 드러낸다는 거죠. 우선 상상력에 아쉬움이 남아요. 판타지영화이고 잔혹동화를 표방한 영화라서 상당한 볼거리를 안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관습적이거나 다른 데서 차용한 묘사가 많더라고요. 불망기: 숲속의 집 공간 자체가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를 통해서만 ‘행복한 세계’의 상을 형성한 불우한 아이들의 단순한 상상력으로 창조된 상상세계이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변호할 수는 있을 거예요. -.- 물망가: 하지만 불우한 아이들의 상상력이 제한된 것과 그걸 소재로 그려내는 감독의 상상력이 제한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극중 악역인 변집사(박희순) 같은 경우는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의 로버트 미첨 캐릭터에서 그대로 빌려온 인물로 여겨집니다. 기독교 광신도 사이코면서 아이들을 공격해 자신의 잇속을 차리려는 인물이잖아요. 날개를 펼치고 포르르 날아오르는 장난감 요정에서 <판의 미로…>가 떠오른다든지, 스타일이 같다는 게 아니라 미술로 방점을 찍는 방식이 <장화, 홍련>을 떠올리게 한다든지, 괴저택에 담긴 아이들과 관련된 비극의 틀이 <더 헌팅>을 생각나게 한다든지, 기시감이 많은 반면 참신한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불망기: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명하려 한 영화인 만큼 더욱 어린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체를 묘사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의 주체가 상투적인 악당으로 묘사된다면 실제로 어린 배우들이 클리셰를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치르는 데 그칠 수 있으니까요. 물망가: 바로 그런 것들이 이 영화의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어린이 학대장면이 지닌 문제점이죠. 그리고 그것이 조금 전에 말한 <그르바비차>의 태도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불망기: 저는 자루를 동원한 매질장면과 “제가 더 예뻐요”라는 대사가 나오는 대목이 오랫동안 섬뜩했습니다. 그런 장면은 정말로 필요할 때만 써야 합니다. 물망가: “제가 더 예뻐요” 장면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아이들의 눈물을 다루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학대를 전시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런 장면들 때문에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영화라는 진심마저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대의 양상이 너무나 전형적이면서 자극적이잖아요. 이 영화를 일반 시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관객이 거의 다인 극장에서 봤거든요. 그런데 저 아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니 마음이 흐려지기도 하더라고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은 은수가 ‘즐거운 아이들의 집’에 온 날부터 날짜를 헤아려 영화를 단락지었는데요. 그 구성에 걸맞게 미스터리 속으로 점점 빠져든다거나 위기가 고조되는 리듬감은 부족했습니다. 물망가: 편집이 상당히 성긴 반면, 카메라는 매우 조급했어요. 카메라가 수시로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특정 신체 부위들을 비추는데, 그런 앵글이 너무 지시적으로 인물의 상태를 전달하려 한다는 거죠. 은수가 혼자 빵을 먹는 장면의 시작은 부감으로 찍혔고 이어지는 숏은 그 빵을 뜯어먹는 입의 클로즈업인데 그런 앵글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냥 다양한 앵글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인상이죠. 편집도 마찬가집니다. 원장이 방문자에게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고 말하자마자 이어지는 숏이 감금되어서 비참하게 굶주린 아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인데 너무 부박한 편집이라고 느꼈어요. -_- 불망기: 대사가 반복적이라는 점도 약점입니다. 성인 배우들은 대화한다기보다 준비된 대사를 순서가 오면 암송하는 인상도 주었고요. 물망가: 특히 천정명씨 경우가 그랬죠. 클라이맥스의 순간조차도 데면데면한 얼굴에 고저장단이 없는 대사였으니까요. 박희순씨처럼 재능있는 연기자조차 얇아 보이더군요. 불망기: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러 간다면 누구나 그 동화가 모티브라는 점은 염두에 둘 거예요. 그리고 그 모티브를 어떻게 전개시켰는지에 관심을 두겠죠. 그런데 이 영화는 모티브가 된 동화와 영화 전체 이야기, 그리고 극중 은수가 지어낸 동화가 밀도의 차이가 없어요. 무엇이 모티브고 무엇이 그 모티브를 빌려 재구성된 현실인지 차원의 분별이 좀더 명백했다면 재미있었을 거예요. 물망가: 이 영화의 시도는 무척 용감하고 좋았다고 생각해요. 한국영화 상당수가 다 고만고만하고 어슷비슷한데, 이런 영화를 누가 또 만들겠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용감한 시도가 모든 것에 선행하는 지표가 될 순 없다는 거죠. 불망기: 임필성 감독의 단편 <소년기>를 본 관객은 <헨젤과 그레텔>을 보고 그 작품을 많이 떠올릴 듯합니다. 물망가: 저도 그랬어요. 불망기: 어른을 겁내고 미워했던 소년이, 시간이 흘러 어쩔 수 없이 성인이 된 뒤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승인을 받고 ‘어른됨’을 용서받으면서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의식을 영화에서 느꼈어요. 어쭙잖은 심리 분석을 하려는 건 아닌데 <소년기>와 이번 영화를 연결해보고 떠오른 감상입니다. 물망가: 뒷부분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불망기: 오늘 이야기한 영화들 면면을 보니 기억도 통조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음미하기도 어려운 것이 기억이니, 통조림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감당이 안 되면 그냥 유통기한 지날 때까지 찬장구석에 박아놓다 버리면 되고, 대면할 준비가 됐다 싶으면 그때 깡통을 열어서 먹으면 되잖아요? 물망가: 개인의 성격에 따라선 그 유통기한 때문에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고생하는 <중경삼림>의 금성무 같은 사람도 있답니다. ^^

[영화읽기] 제목의 감옥에 갇히다

장르 감독이 그림 형제 동화의 모티브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생각을 품는 것은 밤에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여러분이 이른바 ‘문명화’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그림 형제의 동화는 대부분 태어나서 가장 처음 접하는 호러다. 토막살인, 카니발리즘, 어린이 학대, 사지 절단, 근친상간, 존속 살인, 성폭행…. 테마도 무궁무진하다. 여러분이 아무리 끔찍한 현대 호러영화의 스토리를 골라도 그림 형제의 동화는 언제나 그보다 한 걸음씩 앞서간다. 그렇다면 카피 제목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 영화계에서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제목의 호러영화가 나오는 것은 이상하지도 않다(사실은 이상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지금 이야기할 주제가 아니다). 단지 여기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오리지널 <헨젤과 그레텔>의 무대는 중세 후기의 독일이고 영화 <헨젤과 그레텔>의 무대는 현대 한국이다. 이 두 세계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문화적·지리적 차이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숲’이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평지’의 개념은 유럽에서는 당연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니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깊은 숲 속에서’라고 운을 뗀다면 우리는 ‘깊은 산속에’라고 말한다. 영화 <헨젤과 그레텔>은 어느 쪽을 택할까? 타협의 여지는 없다. 그냥 숲이다. 이게 잘못인가? 아니다. 우리나라에 서구적 의미의 숲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영화 <헨젤과 그레텔>의 무대가 되는 공간은 실제 세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상상에 나오는 인공적인 환상 세계다(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말하자면 이 영화는 <헨젤과 그레텔>만큼이나 제롬 빅스비의 와 유사하다. 이 단편은 <트왈라이트 존>의 한 에피소드로 각색되었고 나중에 영화판에서 조 단테가 리메이크했다). 그렇다면 영화의 액션이 가짜 유럽적인 배경에서 펼쳐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으며 오히려 이것은 두 세계의 충돌을 그리면서 새로운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한번 따져보자. 앞에서도 말했듯이 <헨젤과 그레텔>이 그리는 무대는 의사 유럽풍이지만 정말로 그림 형제의 동화의 시대까지 반영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입은 옷이나 인테리어 디자인을 고려하면 20세기 초중반 정도가 맞다. 그림 형제 동화의 테마에 맞추기 위해 빨간 망토와 같은 소도구들이 더하는데, 이 역시 불평할 필요 없는 선택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장화, 홍련> 이후 유행한 ‘청담동 호러’의 감수성에 통제받는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따진다면 큰 문제가 없는 비주얼 요소들이 일단 <장화, 홍련>에 포섭된 순간 한없이 진부해져버린다. 여기서부터는 논리도 깨진다. 이 세계를 만든 아이들이 구체 관절 인형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상상은 했을까? 쫀쫀하다고? 그게 그렇지가 않다. <헨젤과 그레텔>을 유지하는 힘은 아이들의 상상력이고 결코 그것은 기성품화한 스타일에 종속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은 규칙없이 정신없이 터져 나오거나 아니면 철저한 논리를 바탕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영화 <헨젤과 그레텔>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행복한 아이들의 집은 그냥 유원지 놀이동산이며 인테리어만 깔아놓은 모델 하우스다. 이 안에서 아이들은 위축되고 어색해 보인다. 구체 관절 인형을 받아, 어느 쪽으로든 가보자. 과연 자기 세계에서 거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이 가게에서 살 수 있는 장난감만으로 만족했을까? 백배 양보한다 해도 평생 자기 장난감 하나 가지지 않은 아이들이 상상하는 장난감들이 과연 그런 모습일까? 비주얼 소스라고는 흑백 동화책밖에 없는 아이들이 과연 그렇게 온전한 모습의 의사 유럽 스타일을 재구축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를 성서처럼 모신다고 해도, 과연 13살 남자아이가 그림 형제 동화의 환상만으로 만족했을까?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만화책도, 텔레비전도 보지 못했나? 당연히 그림 형제 동화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늘 먹는 음식들은 어떤가? 그건 그들의 상상력에 충실한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어른들의 습관적인 관념을 그냥 따른 것일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유감스럽게도 <헨젤과 그레텔>은 그 수많은 가능성들 중 가장 안전하고 뻔한 길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그냥 상식적인 선택이고 제목을 따른다면 옳은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왜 제목이 가능성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야 하는가? 이럴 경우 염치나 예의를 접고 마구 달리는 편이 더 옳지 않았을까? 어차피 그들이 고른 스타일은 그림 형제 동화를 충실하게 복제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