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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민주주의를 상대로 묻는 휴머니즘의 질문,<비밀투표>

■ Story 오늘은 선거일. 사막으로 뒤덮인 섬의 가장자리에 낙하산에 매달려 내려온 투표함 하나가 착륙한다. 이제 막 근무를 교대한 군인은 이 섬에 온 여자(!)선거관리인을 안내해야만 한다. 그는 선거관리인이 여자인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투표할 것을 권고하고 다녀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선거관리인은 그런 무지하고 고지식한 군인한테 하나에서 열까지 설명을 하며 돌아다닌다. 어울리지 않는 이 둘은 이제부터 어쩔 수 없이 한팀이며 섬의 주민들을 ‘찾아내’ 투표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까지 돌아와야만 한다. ■ Review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 <민주주의의 실험>의 한 장면(투표함을 들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여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게 되었다는 이 영화는 1999년 <하루만 더>에 이은 버박 파여미의 두 번째 작품이다. 도시에서 온 선거관리인과 그 섬에서 보초를 서는 군인은 오늘 하루 섬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투표를 권유해야만 한다. 솔직히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은 선거관리인이고, 군인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나서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 군인에서부터 시작해 만나는 거의 모든 유권자들이 각자 하나씩의 이유와 근거와 사정과 논리로 오늘 하루의 선거 원칙을 복잡하게 한다. 열명의 후보 중 아무나 두명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밀수꾼도 할 권리가 있는 투표라면 하지 않겠노라고 군인은 언포하고, 결혼은 12살이어도 되고 왜 선거는 16살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선거관리인은 난감해한다. 혹은 남자의 허락없이는 못하겠다고 하고, 산모로서 다른 남자 사진을 볼 수 없어 못하겠다고 하고, 물건을 팔아줘야만 하겠다고 하고, 믿는 것은 신뿐이니 차라리 신에게 하겠다고 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지도 못할 문제이니 안 하겠다고 하고,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니 당신에게 하겠다고 한다. 선거관리인은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하고, 때로는 깨닫는다. 누구의 말이, 무엇에의 기준이 맞는 것일까 어디에 원칙을 묶어두어야만 하는 걸까 투표를 해야만 한다는 원칙이, 그러니까 객관화된 집단의 원칙이 개인의 상황들에 마주치면서 그 논리를 질문받는다. 법이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무효화되기도 하고, 아예 폐기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상대로 묻는 휴머니즘의 질문들이 이어진다. 따라서 그것이 비난조로 들리거나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시 대답보다는 질문들이 더 많이 남게 된다. 특이한 논리의 설득과 논쟁을 거치면서 선거관리인과 군인은 그 남은 질문들을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간다. 그녀는 투표함을 들고 떠나가고, 근무시간을 끝마친 군인은 하염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진실에 관한 민주주의적 모호함, 민주주의로 얼룩진 휴머니티, 둘 중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가늠하면서 봐야 할 여지를 남긴다. 무엇보다도 도시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선거관리인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들어오는 외부인이라는 점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인물과 겹쳐진다. 모흐센 마흐말바프에게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더불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제식화된 방식들에 많은 부분 선택적으로 기대고 있다. 영화 속의 어느 누구보다도 질문을 많이 받고 또 당혹한 논리들에 마주서야만 하는 선거관리인은 키아로스타미의 인물들처럼 미로 같은 낯선 골목길들을 헤매야 하는 대신(<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얼마 전 본 것처럼), 그만큼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미로를 겪어야 한다. ♣ 주로 카메라는 인물을 쫓아서 따라가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무심히 보기만 한다. 숏의 길이가 왕복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시간 할애되고 있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에게서 배운 교훈들은 순환과 왕복으로 나타난다. 섬으로 들어왔다 다시 섬을 빠져나갈 때까지, 또는 근무를 시작해 근무가 끝나는 시간까지, 라는 식의 시간상의 순환구조에는 공간 안에서의 왕복이 겹으로 놓여 있다. 화면 안에서 인물의 동선이 종종 눈에 띄게 반복적인 선을 그리고 있다. 특히 선거관리인에게서 눈을 떼지 말자. 이 사람은 유권자들에게 투표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의 이유로 거절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꼭 그 일을 해내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근데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급하다. 또한 그들과는 일종의 심리적 거리감이 형성되어 있다. 이것을 영화는 왔다 갔다 하는 인물의 반복적인 왕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그재그로 뛰거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뛰어다니는 대신 화면의 전경에서 후경으로, 또는 후경에서 전경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다. 반복의 개념을 차용하면서도 이 영화의 의미에 결부시켜 멀고 가까움의 심리적 거리감을 공간 안에서의 전후 움직임으로 표식화하려고 한다. 주로 카메라는 인물을 쫓아서 따라가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무심히 보기만 한다. 종종 숏의 지속시간이 길다고 느낄 때쯤 투표함을 든 그녀가 이쪽으로 오거나 그쪽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둘 모두. 숏의 길이가 왕복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시간 할애되고 있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은 남자의 허락이 없이는 선거를 못하겠다고 하고, 산모로서 다른 남자 사진을 볼 수 없어 못하겠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선거관리인은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때로는 깨닫는다. 숏이 길어지고 카메라가 멀리 있을 때, 또 다른 차용의 표식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여전히 카메라는 멀리 있다. 또 한 사람의 유권자를 만난 선거관리인은 분명 열변을 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을 수가 없다’. 듣고 들리지 않고. 키아로스타미가 오프 스크린을 활용하기를 즐긴다는 것은 이제 모두 아는 사실이다. 보이고 보이지 않고. 여기서 효과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비밀투표>가 어느 순간 지루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반복이 단 하나의 정점을 이루지 않고 그것들을 여러 번 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복은 말 그대로 계속되는데, 그때마다 꼭 의미가 단락지어져 있다. 이런 걸 그 무슨 거장과의 차이라고들 한다. 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1776@hotmail.com

빛나는 디테일이로소이다, <품행제로>

27일 개봉하는 영화 <품행제로>(제작ㆍ제공 케이엠컬쳐)는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가 하이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80년대 남자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그 시절 한 학교에 한 두 명씩은 있었던 적당히 카리스마도 있고 무식하며 싸움도 잘하는 1~2년쯤 ‘꿇은’ ‘XX형’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품행제로>의 가장 큰 장점은 ‘빛나는 디테일’에 있다. 영화 속의 80년대 모습은 당시의 학창시절을 뚝 떼서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 하다. 나무 책상 위에 새겨놓은 낙서나 요즘은 예비군 훈련에서도 보기 힘든 ‘쌈치기’, 책장 넘기며 만들어내는 ‘활동만화’ 등 그 시절 학생들이 했던 장난은 사실적이고 ‘한 놈, 두시기, 석 삼, 너구리~ 구봉서’식의 숫자세기나 ‘원 펀치 쓰리 강냉이’ 따위의 ‘유치 뽕짝’인 대사도 정겹다. 반달가방에 신발은 ‘나이스’ 운동화, ‘헤어 고정제’인 '웰라폼'을 머리에 바르고 허리띠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도 옛날 그대로다. 주먹과 ‘뻥’으로 문덕고등학교를 평정한 ‘짱’ 중필(류승범)은 학교의 똘마니들로부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는다. 중필을 ‘전설’로 만든 것은 주먹실력과 거침없는 말발 외에 ‘궁색한 변명을 수학공부보다 싫어한다’는 특유의 카리스마. 열라 물결치고 바람부는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사춘기 시기에 ‘로라장’과 뒷골목을 주무대로 삥 뜯기와 춘화(春畵)제작을 일삼던 중필에게 어느날 일생을 뒤바꿀 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정란여고의 모범생 민희(임은경)에게 ‘필’이 꽂힌 것. 이제 품행제로의 중필은 품행방정의 민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시작한다. 유명 상표 신발 빼앗아 신기, 클래식기타 배우기, 모범생과 친해지기 등 변신과 변신 끝에 결국 중필은 민희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주먹 짱’에 예쁜 여자친구까지 거칠 것이 없던 그에게 새로운 위기가 다가온다. 바로 전학생 상만(김광일)이 하나하나 강적들을 제압하며 중필의 전설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 한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는 법. 중필은 ‘지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만과의 대결에 나서는데… 영화는 주성치 영화식 황당함과 만화적 상상력으로 80년대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효과음은 과장되고 태권브이 음악에 맞춰 보여주는 중필의 모험담은 와이어 액션으로 표현된다. 간혹 눈에 띄는 무리한 설정이나 후반부가 다소 늘어지는 약점도 있지만 그다지 큰 단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치있는 대사나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감을 주는 편. “부담없이 연기했다”는 류승범은 제몸에 딱 맞는 배역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으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후 ‘현실 세계’에 돌아온 임은경의 연기도 무난한 편. 깔끔한 유머에 긴장감있는 드라마, 따뜻한 에필로그까지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유쾌하다. <발전소>, <워너비> 등 단편영화를 만들었던 조근식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준다. DJ DOC의 이하늘과 양동근 1집의 프로듀서 제이가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맡았으며 인천 숭의동과 부산 성모여고, 황학동 골목길 등에서 촬영됐다.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00분. (서울=연합뉴스)

느릿하게, 하지만 탄탄하게, 의 지진희

지진희는 깔끔한 사람이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깨끗하게 가린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지금보다 훨씬 많거나, 적어도 한편은 더 많을 것이다. 인터뷰 시작 전 커피를 권했을 때 지진희는 “아니요”라고 조용히 거절했다. 커피는 원래 마시지 않는다면서. “커피는 향과 맛이 달라서 이중인격 같아요. 향은 달콤하지만 맛은 쓰잖아요.” 그리고 그는 녹차를 마셨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주관이 뚜렷하고, 커피의 향과 맛을 분리해 느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지진희는 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연기자가 된 경력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보통 직장인의 생리를 알 대로 다 안 뒤,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회사원으로서 지진희가 한 일은 디자인과 광고사진 촬영이었다. 어느 날 건너건너 아는 (그러니까 거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연기자 데뷔를 권유받았고, 그는 마치 커피를 거절하듯 거절했다고 한다. 얼마 뒤 그가 회사로 찾아와 “한달 동안 매일 회사로 오겠다”며 ‘종용’을 시작했을 때, 그는 ‘1년 안에 성공할 수 있겠냐, 그러면 하겠다’는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IMF로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가족도 있고 제가 젊은 편이라서 제가 나와줘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날, 그분이 찾아오셨더라구요.” 지진희에게 연기자 데뷔는 일종의 ‘새로운 직업 찾기’였다. 디자인을 하다 사진으로 옮겨갔듯이.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그에게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재수의 난> 오디션에는 (매니저의 말만 믿고) ‘월차를 내고’ 그냥 박광수 감독과의 인사자리인 줄 알고 갔다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내려왔고, 그랬는데도 카메라 테스트 결과가 좋다며 합격되자 “왜 나를 뽑았냐.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다. 그러다가 처음 하게 된 것이 황인뢰 감독이 연출한 조성빈의 뮤직비디오 <삼류 영화처럼>. 이후 <여비서> <줄리엣의 남자> 등 드라마에 출연했고, 는 그의 첫 영화다. 원래 지진희는 <살인비가>에서 한 형사 역을 맡게 돼 있었다. 에서 한 형사는 시작하자마자 자살하는데, 반면 <살인비가>는 의 전사격인 이야기로, 한 형사가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며 신현과 대결하는 과정을 죽 그린다. <살인비가> 시나리오는 크랭크인 몇달 전 로 바뀌며 거의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전 열심히 <살인비가>의 한 형사 역을 준비하고 있었죠. 갑자기 시나리오를 받고는 ‘아, 내가 연기가 안 돼서 비중을 확 줄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사에 슬쩍 ‘일찍 죽더라구요’ 하자 그제야 ‘한 형사가 아니라 강 형사야’라는 말을 들었죠. ” 연쇄살인범 신현이 자수하고 이를 담당했던 한 형사가 자살한 1년 뒤 발생한 비슷한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강 형사. 지적이고 정적인 성격의 한 형사에 비해 강 형사는 감정적이고 다혈질이다. 갑자기 달라진 캐릭터임에도, 지진희는 충실히 제 역할을 해냈고, 전형적이면서도 그만의 질감이 살아 있는 연기를 해보였다. 빨리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무엇인가를 하려는 연예계에서, 지진희는 유달리 속도에 관심이 없는 배우인 것 같다. 급할 게 뭐가 있냐는 듯. 하지만 그도 “언제나 긴장하며 배우로서의 자신을 관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여유일 것이다. 지진희는 올해 안에 박광수 감독이 연출하는 단편 <인물값>(인권영화 프로젝트 중 한편)을 찍을 예정이고, 언제 시작될지 모르지만 역시 박광수 감독의 <방아쇠>에도 캐스팅돼 있다. “못하겠습니다”하고 그냥 내려와버렸던 <이재수의 난> 오디션 무대 위의 그와 지금의 그는 많이 다르면서도 비슷할 것이다. 박광수 감독이 그를 ‘쓰는’ 것은 좋아진 연기력보다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지진희의 진실한 그 무엇 때문이 아닐까. 배우가 되기 전 <천국보다 낯선>을 본 이후 짐 자무시 마니아가 되어 자무시 영화라면 쫓아다니며 다 봤다는 지진희.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일까. 언뜻 그가 자무시 영화 같은 작품에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인터뷰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대적 감성이라고?<마들렌>

사실 영화와 달리 일상 속의 사랑은 그다지 트랜디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물론 영화처럼 ‘폼나는’ 연애를 하는 커플도 있고 관능적인 사랑을 즐기는 연인들도 존재하며 죽음을 초월하는 지독함을 나누는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애틋함과 절실함의 중간 어디쯤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것 같다. 내년 1월 10일 개봉하는 영화 <마들렌>은 20대 중반의 남녀가 펼쳐내는 맑고 순수한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천천히 삶의 순간순간을 느끼며 살고싶다’는 소설가 지망생 지석과 ‘인생을 100m달리기처럼 빨리 달리고 싶다’는 헤어디자이너 희진의 사랑을 과장없이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퇴마록>으로 한국영화에 블록버스터 바람을 일으켰던 박광춘 감독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는 애초의 의도를 그런대로 지켜내고 있지만 ‘자극’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은 플롯의 높낮이 변화가 많지 않으며 스토리를 예측하기도 어렵지 않은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간혹 등장하는 무리한 설정이나 문어체적 대사가 눈에 거슬리고 갑자기 등장하는 컴퓨터 그래픽도 자연스럽지 않아 관객들의 감정잡기를 방해한다. 군에서 제대하고 ‘새벽을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준비하고 있는 지석(조인성)은 소설을 위해 새벽 신문배달을 시작한다. 100권의 책을 읽기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후 들른 미용실에서 중학교 동창 희진(신민아)을 만난다. 몇번의 만남 후 희진은 한 달 간의 계약연애를 지석에게 제안하고 당황하던 지석은 엉겁결에 이를 받아들인다. 계약 조건은 ‘100% 서로에게 솔직하기, 한 달 전에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기, 한 달이 지나면 멋지게 헤어지기’ ‘책읽기, 생각하기, 걷기‘와 ‘컴퓨터게임과 쇼핑, 그리고 헤어스타일 바꾸기’ 등 너무나 다른 취미의 두 사람. 둘은 신문배달도 같이 하고 ‘마들렌’빵도 맛보며 빗속에서 자전거도 함께 타는 등 뒷날 추억이 될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어느날 이런 둘의 사랑에 처음으로 위기가 닥치는데… 바로 또 다른 중학교 동창 성혜(박정아)가 둘 사이에 끼어든 것. 학창시절 성혜를 좋아했다는 지석의 말에 상처를 받은 희진은 설상가상으로 자신에게 닥친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지석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 TV시트콤 「논스톱」으로 스타덤에 오른 조인성과 <화산고>로 영화에 데뷔했던 신민아는 처음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젊고 순수한 이미지의 남녀 주인공역을 비교적 무난히 연기하고 있다. ‘단골 조연’ 김수로나 여성 그룹 ‘쥬얼리’ 출신 박정아의 어색한 대사처리에 비하면 안정된 편. 21억원의 순제작비를 들여 <정글 스토리>, <넘버3>를 만들었던 프리시마가 제작했다. ‘마들렌’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에게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줬다는 빵의 이름. 상영시간 118분. 15세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움직임, 목숨, 멈춤, 격렬, 주먹, 눈빛, 뜨거움, 피. 최영의 혹은 최배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최배달은 일제시대 비행사가 되고 싶어 일본에 건너가 소년항공학교에 다니다가 미군이 진주한 뒤 야쿠자 보스의 보디가드가 되기도 했고, 입산 수련 뒤 전일본공수도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했으며, 실전공수를 내세우며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순례하며 강자를 격파하기도 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파이터들과 자웅을 겨루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극진가라테라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었던 ‘남자’다. 남자를, 여자를 운운하는 것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20세기의 수식어처럼 보이지만, 최배달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단어는 바로 ‘남자’다. 그래서 그의 삶은 뜨겁고, 늘 목숨을 건 위기의 순간이며,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고, 움직임과 멈춤의 앙상블을 조율해야 한다. 남성들 사로잡은 영웅의 일대기 매력적인 텍스트인 최배달의 삶은 여러 번 만화로 각색되었는데, 기억할 만한 작품은 모두 70년대에 출판되었다. 1977년 <선데이서울>의 자매지였던 <주간스포츠>에 연재된 <투혼>은 선 굵은 작화 스타일에 하드보일드한 최배달의 삶을 효율적으로 담아냈고, 고우영의 <대야망>은 고우영 특유의 화려한 필치가 빛을 발한 작품이었다. 최배달의 삶은 1989년 방학기에 의해 다시 한번 화려하게 지면을 장식했다. <애사당 홍도>(1975), <바리데기>(1977), <다모 남순이>(1979)처럼 사극을 주로 그리던 방학기는 1985년 <스포츠서울> 창간과 함께 <감격시대>를 연재하며 근현대사의 협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하드보일드 르포르타주 극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협객, 무도인, 레슬러를 내세운 하드보일드 로포르타주 극화는 20세기 초반을 무대로 실재한 주인공들의 삶을 격정적으로 그려냈다. 70년대 <일간스포츠>가 고우영의 극화를 내세워 신문의 판매부수를 늘렸다면, 80년대 <스포츠서울>은 방학기의 극화를 내세워 판매부수를 늘렸다. 이 두 신문이 겨냥한 계층은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골치아픈 뉴스보다 스포츠와 연예 등을 선호하는 평범한 남성들이었다. 고우영의 극화가 초기 선 굵은 정통 사극으로 진행되다가(<임꺽정> <일지매> 등) <삼국지>를 정점으로 유머와 해학이라는 우리나라 특유의 서사적 전통과 만나 특유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켰다면, 방학기는 처음부터 실재하는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작품에는 공통된 ‘영웅’이 있었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는 친근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카리스마가 넘쳤고, <바람의 파이터>의 최배달은 처음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이 땅의 평범한 남성 독자들은 지면을 통해 영웅을 만나기를 원했다. 70년대, 8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숨죽여 하루를 살고, 가판에서 산 스포츠신문을 보며 팍팍한 삶의 스트레스를 달래는 남성들은 늘 영웅을 갈망했다. 70년대 고우영 극화의 영웅들이 해학의 얼굴에 숨겨진 복화술이었다면, 80년대 방학기 극화의 영웅은 주먹과 발차기에 숨겨진 복화술이었다. 거칠고 힘있는 터치, 효과 만점 르포르타주 만화답게 <바람의 파이터>의 중심에는 최배달이 있다. 최배달은 처음부터 영웅적 풍모를 타고 난 사람이다. 전후 혼란기에 일본사회에 등장해 최고 고수를 하나씩 쓰러트린다는 그의 바이오그라피는 너무나 허구적인 진실이다. 일본의 부녀자를 폭행하는 미군을 혼내주던 최배달은 몰래 자신을 지켜주던 일본인 형사에게서 요시카와 에이지가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책을 소개받는다. 마구잡이로 싸움을 하던 거리의 파이터 최배달은 일본 전설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를 보며 싸움의 요령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열 번째 방문 끝에 겨우 만난 요시카와 에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싸움은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최배달은 요시카와의 권유대로 산으로 들어간다. 방학기의 펜은 거칠다. 종이 위에 내지른 선은 운동을 재현하고, 힘을 실어나른다. 거친 선은 효과선이나 그림자를 표현하는 데 효율적인데, 최배달의 뒤편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의 악한들이나 최배달의 얼굴에 깔린 그림자는 거친 펜선과 함께했을 때 더욱 힘을 얻는다. 1단에 5칸이나 6칸으로 나뉘어진 작은 칸은 대화나 독백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고, 결정적인 순간의 동작은 커다란 칸에 연속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출판된 <바람의 파이터>는 총 10권 분량으로 전면 재수정되어 연재 당시의 원고와 가장 가까운 상태로 복원된다. 예전에 출판된 단행본들은 세로로 긴 원고를 흐름에 신경쓰지 않고 적당히 잘라내 출판했는 데 비해, 이번 단행본은 이야기의 흐름과 연출을 최대한 고려해 작가가 직접 페이지를 나누었다. 또한 1페이지에 4단이 실리는 밀도있는 판형으로 출판되어 원작의 재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연재 당시 실렸던 광고 자리를 채우기 위해 칸을 새롭게 그리는 경우도 있어 ‘복원’에 가까운 작업을 수행했다. 연재 당시 매일 신문을 기다리던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 1권이 나왔다. 때마침 영화제작도 함께 발표되어 영화의 원작으로 활용되는 만화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주연이 ‘비’라던데, 글쎄 방학기 만화에 등장한 최배달의 강한 눈매를 얼마나 잘 재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작과 전혀 다른 새로운 카리스마의 주인공이 등장할지, 아이돌 스타의 힘을 이용한 영화의 전략으로 끝날지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연말극장가 작은 영화에 뜨거운 반응

단관개봉한 작은 영화들에 대해 영화팬들의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 영화들이 단관개봉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대작 영화에 밀려 상영관을 잡지 못했기 때문. 지난 13일 서울 87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과 19일 서울 83개 스크린에 내걸리는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14-15일 주말 각각 42개와 50개의 스크린을 차지했던 한국영화 <색즉시공>과 <광복절특사> 등 대작싸움이 치열한 극장가에 단관개봉한 작은 영화들이 높은 객석점유율을 보이며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달 22일부터 3주간 신촌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단관개봉해 하루 두차례만 상영됐던 영화 <도니다코>는 개봉 첫주만 400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등 좋은 반응을 얻 자 27일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재개봉을 결정했다. 수입사인 미디어 필름 인터내셔널은 상영시간이 오전 11시와 새벽 2시로 관객들이 극장을 찾기 힘든 시간이었음에도 관객수가 꾸준하자 재개봉을 결정했다. <도니다코>는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한 고교생이 어느날 밤 토끼가면의 괴물로부터 세상의 종말이 닥쳐온다는 예언을 들은 후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을 그린 영화로 지난해 미 선댄스영화제와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시네큐브에서 하루 1회만 상영되던 영화사 백두대간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도 비슷한 경우. 지난달 22일 이후 매일 오후 8시 30분 한차례만 상영되던 이 영화가 첫째주와 둘째주 각각 98.7%와 92%의 높은 관객점유율을 보이자 백두대간은 지난 13일부터 전회상영하고 있다. <바람이…>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로 지난 9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 전통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이란의 한 시골마을을 찾은 촬영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난 13일부터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장뤽고다르 영화제도 주말 좌석점유율 70%대를 기록하며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현대 영화언어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남긴 프랑스 감독 장 뤽 고다르에 대한 한국 영화팬들의 높은 관심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 영화제를 기획한 동숭아트센터 측의 설명이다. 이들 영화의 한 관계자는 “상영관을 못잡아 단관에서만 개봉되지만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 것은 좋은 영화에 대해 영화팬들의 반응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그대의 손, 그 불타는 기억들을내 부드러운 손 위에 얹고생명의 온기로 충만한 그대 입술을내 갈망하는 입술에 맡기라.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마치 낙엽에게 그러하듯이.- 포루그 파로흐자드(1935∼1967) 길. 태초에 빛이 있었듯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는 길이 있었다. 그의 많은 영화의 시작이 길이었다. 차창 밖의 저편에 놓인 길이든, 신의 눈길같이 먼 거리에 잡힌 길이든, 이란의 비포장길에는 키아로스타미의 주인공을 실은 차가 달린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먹은 중년 남자가 자신의 시신을 묻어줄 사람을 찾으러 떠났던 <체리 향기>의 길, 영화 촬영을 위한 설렘을 안고 차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길. 그리고 신의 꿈보다 더 푸른 오솔길을 지나 검은 계곡에 위치한 하얀 마을에서 일어날 이국적인 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길. 그러기에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길이란 수미쌍관의 두운과 각운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영화를 한편의 시로 만드는 존재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벽돌공이었던 호세인이 부잣집 딸인 테헤레에게 청혼했을 때, 이윽고 현실에서 서서히 풀려나는 실타래처럼 모든 사회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과의 거리를 풀어버린 길은 아롱다롱한 혼인길이 되었다. ‘꿈같은 약속보다 지금이 좋다네’라는 시를 읊조리는 늙은 의사가 유유자적하게 오토바이를 타는 <바람이…>의 밀밭길은 그때까지 숨겨놓았던 이승의 천국이 무엇인지를 화면 한가득 펼쳐놓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이승의 삶의 비밀을 알아버린 길들은 더이상 이 세상의 길이 아니게 된다. 바로 그 길 위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유일한 인공수단인 차는 ‘합목적적인 어떤 것’을 위해 도시를 떠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차는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주인공 그 자체일 것이다(실제로 주인공 베흐저드는 마을의 꼬마 파흐저드에게 “차도 사람과 같지.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차려야 돼”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얼굴을 자해하며 슬퍼하는 여자들을 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베흐저드가 그렇게 합목목적인 존재인 것처럼. 그가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을 찾기 위해 길을 헤맨다는 사실, 그리고 마을 안에서도 우유를 찾기 위해, 휴대폰이 잘 터지는 높은 곳을 찾기 위해 빙빙 돈다는 것은 그가 사실은 이방인이며, 코에 건 안경이 말해주듯이 근시안이며 그 혼자 유일한 미로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준다. 그리하여 포도즙을 찾기까지, 풀어헤친 여인의 가슴 같은 대지의 길을 찾기까지, 키아로스타미의 관객은 다시 한번 많은 것들을 숨겨놓은 꼬불꼬불한 마을의 길들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소통, 반복되는 혼동 베흐저드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고 나무둥치 하나로도 다리가 되는 산골마을의 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산골에 와서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려 든다. 그가 전화국 직원으로 위장하고 죽음쪽으로 얼굴을 돌려 있을 때 혹은 장례식의 촬영에 골몰해 있을 때, 그의 시점숏으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죽어가는 여인과 마을의 아이를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내려진 신의 호출을 기록하려는 욕심을 가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라는 소모적인 인간의 호출에 더 집착하는 듯 보인다. 베흐저드는 끊임없이 지프를 몰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휴대전화가 터지는 유일한 장소인 무덤가 언덕들을 향해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아니 많은 이란영화의 특징인 이 반복의 도돌이표는 사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우리의 사랑스런 아마드가 네마자데의 숙제장을 돌려주기 위해 하는 반복과는 뉘앙스가 달라 보인다. 모든 헛된 헤매임이자 순환되는 자연의 법칙과는 거리가 먼 베흐저드의 반복은 이 마을에서 그의 고립과 의사소통의 부재를 가져올 뿐이다. 그는 절대 우유를 얻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 그가 전화국 직원이라고 했을 때 마을의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왜 전화국 직원이 필요한 거죠” 이 마을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 그것은 검은 계곡이란 뜻을 지닌 시어 다레(마을 이름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휴대전화라는 기계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 베흐저드와 달리 그곳에서 얼굴이란 곧 스스로를 드러내는 소통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폐허에 맞서서 이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소통의 근원을 파괴하여 자신을 유폐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베흐저드가 수염을 깎을 때, 관객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베흐저드를 불편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열심히 수염을 깎고 비누거품을 털어내며 우유를 부탁하는 베흐저드는 실상 부탁을 하는 대상인 마을의 여인과 전혀 시선 교환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주인공인 베흐저드에게 시선을 빼앗긴다면 관객 역시 이 사실을 깨닫기가 힘들다).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는 스스로 거울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완벽하게 베흐저드의 이기적인 시선을 포획한다. 베흐저드는 계속 혼동을 한다. 임신을 했던 여주인이 몸을 풀었는데도 그녀의 얼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의 동생이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소통과 혼동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네마자데의 집을 여긴가 저긴가 혼동할 때, 지진으로 25명의 친척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호세인이 죽은 친척을 자꾸 65명이라고 호명할 때, 그 순간은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영화라는 인공이, 허구가 자연을, 현실을 침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키아로스타미의 의도된 거리두기이자 관객을 향한 물음 혹은 냉정한 통고일 것이다. 허구가 실제를 대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주인공들은 또 다시 시시포스의 마을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베흐저드는 아직도 모른다. 휴대전화가 터지는 언덕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하늘보다 훨씬 낮은 곳이라는 사실을. 그 마을의 언덕에서 베흐저드는 가짜 전화국 직원이 아닌 진짜로 마을의 소통을 위해 3m 깊이의 구멍을 파는 남자를 만난다. 마을 처녀와 애인 사이인 남자는 오직 외화면의 목소리로 나타날 뿐이다. 마을 자체가 계곡 속에 숨겨져 있는 이 마을에서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숨겨져 있다. 우유를 짜는 염소조차도 지하에 숨겨져 있다. 풍화되어가는 느린 시간의 숨김 속에 그렇게 마을은 존재한다. 베흐저드는 더이상 일이 진척되기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야 비로소 죽어가는 여인이 아닌 마을의 배경, 혹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말똥을 굴리는 벌레, 쉼없이 자기 길을 가는 거북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는 거북이를 뒤집는 심술을 부려보지만, 서서히 깨닫게 된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시간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노파에게는 작별의 시간이 있는 것이고, 말똥구리에게는 말똥구리의 시간이, 거북이에게는 거북이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베흐저드의 눈에는 느리게만 보이는 그 시간이 그들 안에서는 살아 있는 시간이었고 자신의 시간이었고 최선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생의 비밀 그때서야 베흐저드와 꼬마 파흐저드는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소통하게 된다. 베흐저드는 파흐저드에게 자신이 나쁜 사람인가 물어보고 키아로스타미는 이 둘을 액션 리액션 숏으로, 처음으로 잡아낸다. 헐리우드의 관습적 환영주의를 조장하던 액션 리액션 숏은 비로소 똑같은 눈높이로 눈을 맞추게 된 베흐저드와 파흐저드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화형식을 취한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처음으로 진정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구덩이를 파던 청년을 구하게 된 뒤, 낮장면만이 가득하던 마을에 처음으로 밤장면이 깃들고, 차창 밖의 그의 시선에는 강아지가 뛰놀고 소가 거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보인다. 베흐저드의 뒤로 끊임없이 풀을 나르는 아낙네가. 양들을 모으는 목동 소년이. 교미를 하려고 달려드는 염소떼가. 이 무심코 끼어든 것 같은 배경은 마침내 어떤 진실에 수렴하게 되는데, 기실 이 마을에서 아무 일도 안 하는, 죽어 있던 유일한 사람은 베흐저드뿐이었던 것이다. 딥 포커스를 거부하면서 가장 평범한 숏들에서 결국은 세부에 대한 매혹과 진실을 일깨우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만들기는, 왜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바람이…>가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집대성이라고 평가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자기 반복의 복제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시적이고 간명한 영화는 그 자체가 한편의 시이고 노래이다. 이제 이 이란의 늙은 거장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일까 <바람이…>는 죽음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얻은 키아로스타미의 자각, 기호라는 필터를 통한 이미지의 재현을 지나 사물 그 자체의 현존에 도달하고자 하는 키아로스타미의 진심이 담겨져 있는 영화이다. 그리하여 베흐저드가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뼈를 강물에 버릴 때, 죽음의 기호나 오래된 골동품이 아닌 그냥 인간의 뼈가 강물에 흘러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볼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바람은 우리를 건네주리라는 것을. 시간의 풍화 속에 삶의 머릿결을 드리우고 그 빗질을 받아들여 늙어가리라는 것을.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2002서울독립영화제로 만나는 존 카사베츠 감독 <2>

<그림자들>은 별다른 내러티브가 없다. 젊은이들은 적당하게 삶의 과정에서 절망을 겪고 사랑을 나누며 또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는 1950년대 미국사회를 스케치하는 것이며 당대 젊음의 기운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연출작에 비해 <그림자들>은, 유독 카사베츠 감독이 형식적 자유를 만끽한 영화로 볼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규범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므로. 내러티브는 산만하고, 촬영과 편집 모두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그런데 역으로 이 산만함이 당시의 관객과 미국 영화인의 호응을 얻었다. <그림자들>엔 문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약동하는 힘 같은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정의하기 힘든 슬픔까지. 한쌍의 남녀가 희미한 조명 아래서 사랑을 나누고 이후 허탈감에 빠져 서로의 행로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아릿한 느낌이 배어난다. 공원을 질주하는 남녀, 요란한 파티의 모습, 대도시의 야경을 차례로 스크랩하면서 <그림자들>은 동시대 미국 인디영화의 대명사 같은 작품이 되었다. 존 카사베츠에겐 이론가 중에도 열광적인 지지자가 한명 있다. 레이 카니라는 학자다. 레이 카니는 보스톤대학 영화과 교수이며 카사베츠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카사베츠 인터뷰집과 촬영장 스케치, 그리고 영화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에 걸쳐 감독에 대한 집필작업을 벌였다. 최근 국내에도 <존 카사베테스의 영화들>이라는 저서가 한권 번역되었다. 이 절대적인 카사베츠 매니아 겸 학자가 “미국영화사에서 빼어난 천재성을 과시한 작품”이라고 상찬한 영화가 <얼굴들>이다. 존 카사베츠의 영화는 많은 설명을 달지 않기로 유명하다. 여느 할리우드영화가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면, 카사베츠 영화는 정반대다. 오랫동안 영화를 지켜보고 있어도 과연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얼굴들>은 어느 미국 중산층 가정의 붕괴를 고찰한다. 남편은 어느 매춘부와 연애를 하고 아내 역시 비슷한 이유로 바쁜 몸이다. <얼굴들>은 대체로 실내장면이 많다. 그런데도 영화의 호흡은 느리지 않다. 카사베츠는 좁은 실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핸드헬드 기법을 응용해 들고찍는 방식으로 많은 장면을 촬영했다. 당연하게도 영화 속 주택은 좁은 공간임에도 미로처럼 얽힌 모습이며 명암대비 역시 강렬하다. 시네마 베리테를 연상케 하는 이 영화는, 카사베츠가 영화 공간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갖춘 연출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미로를 헤맬 자신이 있다면, 보라! 존 카사베츠의 영화는 가족에 관한 것이 적지 않다. <얼굴들> <미니와 모스코위츠> <영향을 받은 여인>, 그리고 <남편들> 모두 가족과 결혼을 다룬다. 변형된 갱스터영화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 영화는 <어느 중국인 마권업자의 죽음>으로도 알려진다)과 지나 롤랜드를 전설적인 여배우의 경지로 끌어올린 <글로리아>를 제외하면 그의 필모그래피에선 가족드라마라고 칭할 만한 영화가 다수를 차지한다. 카사베츠의 영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드라마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 할리우드의 가족멜로드라마의 대가라면, 우리는 더글러스 서크를 떠올릴 수 있다. <바람 위에 쓴>(1957)와 <슬픔은 그대 가슴에>(1959) 같은 영화를 통해 서크 감독은 이 장르의 대가가 되었다. 더글러스 서크 감독은 할리우드 가족드라마의 허구성을 구축하고 이를 관객에게 노출하는 방식을 통해 허구성을 토로하는 방식을 택했다. 카사베츠는, 허구성 자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역으로 공격한다. 카사베츠가 말년에 만든 <사랑의 행로>는 이를 요약해 보여준다. 영화에서 어느 오빠와 여동생은 가족이면서 계속 엇갈린다. 지나 롤랜드가 연기한 여동생은 가족을 잃었고, 존 카사베츠가 연기한 오빠는 중년 바람둥이다. 이들은 영화 내내 제대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며 소통할 수 없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랑의 행로>에서 둘의 만남장면을 보자. 카사베츠 감독은 두 인물을 한 프레임에 놓는 대신, 카메라로 지나 롤랜드만을 포착한 상태에서 대화를 진행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마치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크 감독이 허구성에 집착했다면 카사베츠는 날것 그대로의 삶과 영화, 그 가장 깊숙한 지점에 도달했던 감독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영화학자 레이 카니는 “카사베츠의 영화는 혼란함에서 명확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라고 적었다. 같은 이유로 존 카사베츠는 영화를 보며 미로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을 각오를 한 사람에게 주류 문화에서 만날 수 없는, 무한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을 체험하게 한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 영화 후배들이 말하는 카사베츠 → “그의 초기영화였을 것이다. 한 아이가 강의실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건 미국영화잖아.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의 행동, 성인의 삶이 펼쳐지고 있어. 누가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지’라고. 아이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다른 미국영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럽영화만 자연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 아이가 나다.” - 존 세일즈(영화감독) → “난 TV에서 카사베츠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다. 그의 초기 시네마베리테 스타일은 날 사로잡았다. 황홀하게 경외심에 가득 찬 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게리 올드먼(영화배우) → “카사베츠가 훌륭한 형식의 창조자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만의 매체를 창조했고 스타일의 길을 선택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영화감독) → “난 카사베츠 영화 중 <오프닝 나이트>를 최고로 꼽는다. 여기서 지나 롤랜드의 캐릭터는 정말 대단하다. 그녀는 별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많은 것을 카사베츠 영화로부터 배웠다.” - 페드로 알모도바르(영화감독) → “영화 <중경삼림>의 몇 부분은 카사베츠의 <글로리아>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제작과정에서 내가 기준으로 삼은 영화이기도 했다. 우리는 따로 대본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제작 과정에서 참고로 할 영화가 필요했고 카사베츠의 영화는 적절한 원형이었다.” - 왕가위(영화감독)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송년기획 2002 영화인들,무엇을 이야기했나 <4>

● ● ● ● 판타지 아동문학 호그와트 학교만 잘 나가는 프랜차이즈를 배출하란 법이 있나 <해리 포터> 1편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2002년 내내 아동문학 서가를 먼지나게 뒤졌다. 이들의 특징은 대개 90분 남짓한 아담한 가족영화로 가공된 과거의 아동문학 각색물과 달리 최첨단 특수효과와 스타를 동원하고 프로덕션을 고급화한 대형 프로젝트라는 점에 있다. 이미 수차 영화화된 고전 <피터팬>과 <피노키오>는 ‘완역본’ 수준의 재현을 셀링 포인트로 내건 경우. 디즈니는 내털리 배빗의 베스트셀러 <턱 에버래스팅>을 제작했고 파라마운트는 <레모니 스니켓의 불운한 사건들> 메가폰을 배리 소넨필드에게 맡겼다. 유니버설은 닥터 수스의 <모자 속의 고양이> 영화화에 배우 마이크 마이어스와 디자이너 보 웰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반지의 제왕> 제작 참여로 짭짤한 수익을 본 미라맥스의 하비 와인스타인도 말썽꾸러기 마술사와 그를 섬기는 요정 이야기인 <바르티메우스> 3부작 판권을 사들여 미라맥스의 프랜차이즈로 키우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 ● ● ● 축구 <워터보이즈> <아이언 레이디> 등 단체 종목 스포츠가 유난히 득세했던 2002년. 그중에서도 MVP는 단연 월드컵 광풍을 등에 업고 질주한 축구였으니, 경천동지할 소림사의 무공을 발끝에 모아 그물을 흔든 주성치의 <소림축구>와 편견의 태클을 피해 씩씩한 프리킥을 날리는 영국 소녀들의 성장기 <슈팅 라이크 베컴>이 각각 고향에서의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업고 한국 원정에 나섰다. 미라맥스가 아시아를 제외한 세계 배급권을 산 <소림축구>는 프랑스에서 330만달러 수입을 올리는 등 좋은 반응을 얻어 오리엔탈리즘에 영합한 아시아영화만 서구에 팔린다는 통념을 흔드는 데 수훈을 세웠다. <슈팅 라이크 베컴>은 데이비드 베컴 내외를 비롯한 영국 관객의 지지 위에 로카르노, 토론토, 시드니영화제 등에서 관객상을 쓸어담았다. 부천영화제 개막작 감독으로 한국을 찾은 축구팬 거린다 차다 감독은 안정환이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할 경우 성공을 장담하기도. 한편 영국 프로축구 스타였던 배우 비니 존스를 스트라이커로 내세운 영국판 ‘교도소 월드컵’ <그들만의 월드컵>과 FIFA가 발주한 마스코애니메이션 <스페릭스>도 개봉됐다. 물론 이 모든 축구영화의 좌석점유율은 월드컵 극장 중계 행사의 점유율을 크게 밑돌았다. ● ● ● ● 가수들 영화 진출 90년대 말부터 ‘팝의 소녀시대’를 이끈 아이돌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맨디 무어, 그리고 요절한 R&B 스타 알리야. 2002년 이들의 경연장은 그래미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같은 음악시상식장이 아니라, 바로 연초(국내에서는 여름)의 극장가였다. 이들뿐 아니다. 뒤이어 R&B 트리오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1/3’ 비욘세 놀즈도, 힙합의 제왕인 ‘절대 래퍼’ 에미넴도 스크린이란 무대에서 승부를 겨뤘다. 결과는 에미넴이 패자. 국내에서는 내년 2월에나 개봉될 예정이지만, 디트로이트 밑바닥 인생의 분노를 랩으로 쏟아낸 은 지난 11월 미국에서 개봉한 지 1달 만에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수익으로만 따지면 자국 시장에서만 2억달러() 이상을 번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의 놀즈가 최고지만, 파워의 옆자리였음을 감안한 성적표랄까. <워크 투 리멤버>에서 촌스런 왕따 모범생 소녀로 과감히 변신, 날라리 문제아에게 지순한 사랑을 일깨운 무어도 선전했다. 1100만달러의 저예산영화로 미국에서 제작비의 4배 이상을 벌었으며, 한국에서도 전국 관객 수 12만명을 넘기면서 스피어스와 알리야를 제쳤다. 어릴 적 단짝친구들과 성장의 여행길에 오른 스피어스의 <크로스로드>는, 자국에서 3700만달러를 벌었으나 한국에서는 소리소문없이 간판을 내렸다. 아예 제작비 3500만달러도 회수하지 못한 알리야의 <퀸 오브 뱀파이어>보다 선방한 사실에서 위로를 구할 수 있을까. 밀리언셀러 목소리의 마력도 쉽게 관객을 스크린으로 유혹할 수 없음은 주지해온 교훈이지만, 음반 시장이 하향세를 그리는 환경에서, 뮤직비디오 덕분에 전보다 카메라에 익숙해진 가수들에게 영화는 여전히 매력적인 개척영역으로 남을 것이라는 게 현지의 분석. 국내에서는 가수 비가 <바람의 파이터>로 스크린 데뷔를 준비 중이다. ● ● ● ● 필립 K. 딕 생전에는 물심양면의 고통에 시달렸으나 사후에 그 고통에서 피어난 작품들이 억대를 호가하며 앞다투어 팔렸다더라.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니라 SF소설가 필립 K. 딕의 이야기다. 평생 36권의 장편과 5권의 단편집을 낸 딕은 분열증과 각성제에 시달리다 1982년 숨졌지만 20년이 지난 2002년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공개에 즈음해 상종가를 쳤다. <임포스터>와 <마이너리티 리포트> 개봉에 더해 오우삼 감독이 <페이첵> 영화화에 가담했고 조지 클루니, 스티브 소더버그의 섹션 에잇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손잡고 <스캐너 다클리>의 각색에 돌입했다. <엘프의 왕>에 기초한 아동영화 프로젝트도 출범한 상태. 직접 그의 작품을 각색한 과거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스크리머> 정도지만 <다크 시티> <매트릭스> <트루먼 쇼>가 내비치는 딕의 영향과 <메멘토>의 역행구조가 이미 쓰인 딕의 소설을 상기하면 올해의 필립 K. 딕 붐은 갑작스런 사건도 아니다. 하지만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비롯해 필립 K. 딕 소설의 흥미로운 설정은 빌려와도 제대로 ‘통독’하는 영화는 아직 찾기 힘들다. 죽기 전 필립 K. 딕은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말했다. “작가로서 내 아이디어의 특수한 효과뿐 아니라 아이디어 일부도 영화 속에서 보고 싶다”고. ● ● ● ● 영국영화 르네상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잊을 만하면 다시 잡지 표제로 등장하는 ‘영국영화 르네상스’. 그러나 2002년만큼은 그 내용이 달랐다. <트레인스포팅> <풀 몬티>처럼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인정받는 영화를 계기로 운위된 과거의 르네상스와 달리, 올해 영국영화 르네상스는 ‘<빌리 엘리어트>를 계승한다는 야심이 눈곱만큼도 없는 영화들’로 인해 거론됐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3대 영화제만 돌아봐도 영국영화는 하나같이 각 영화제의 우등생들이었다.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공동수상한 폴 그린그래스의 <블러디 선데이>, 칸영화제에 진출한 영국 국가대표 마이크 리의 <전부 아니면 전무>, 마이클 윈터보텀의 , 켄 로치의 <스위트 16>, 바티칸과 논전을 벌이며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안은 피터 멀랜의 <막달렌 시스터즈>가 그들이다. 미국으로 간 영국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세월>로 전미 영화평론협회상을 지난주 안았고 샘 멘데스도 <로드 투 퍼디션>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이 밖에 린 램지의 <모번 켈러의 여행>은 새로운 시적 서사극이라는 찬탄을 얻으며 영국영화가 예술로서 영화의 전방위로 나서는 데 일조했다. 지난 10월 <채널4>의 영화 프로덕션 필름 포가 문을 닫은 사건도 “할리우드를 벤치마킹하는 노선은 무용하다”는 여론을 영국 영화계 내에 북돋우고 있다. ● ● ● ● CG 캐릭터의 역습 자자 빙크스의 수모를 씻고 말리라! 가문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CG 캐릭터들이 올해 일제히 총궐기했다. 노익장을 과시한 것은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의 요다. 자자 빙크스의 산파들이 요다 모델을 내버리고 완전 컴퓨터그래픽으로 요다를 창조한다는 소문에 팬들은 잠깐 두려움에 떨었으나 카운트 두쿠와 요다의 광선검 결투는 <에피소드2>의 절정으로 호평받았다. 지금까지 가부좌 틀고 선문답만 하는 따분한 노인이라고 여겼던 팬들도 각성했다. 겨울 양강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과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의 화제인물도 CG 캐릭터인 도비와 골룸. 자기를 3인칭으로 일컫는 말버릇을 가진 집요정 도비는 해리 포터를 구하려다가 여러 번 사지로 몰아넣는 대책없는 말썽꾼이다. 짜증이 동할 만하면 알아서 심하게 자학하는 통에 그만 사랑스러워지는 캐릭터.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에서 갈망으로 굶주린 눈과 실루엣만 맛보였던 골룸은 <두개의 탑>에서 다른 어떤 CG 캐릭터도 따를 수 없는 스크린 시간을 차지하며 250가지의 풍부한 표정과 분열된 자아를 표현하는 메소드 연기를 과시했다. 그 밖에 스쿠비 두, 스튜어트 리틀이 이름에 값하는 활약을 보였고 국내 미개봉작 <산타 클로스2>에서는 초콜릿 중독에다 당분 기운 탓인지 자주 허세를 부리는 말하는 순록 코메트가 열연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송년기획 2002 영화인들,무엇을 이야기했나 <3>

● ● ● ● 소니 픽처스 “이 기록은 그냥 1억달러 플러스 잔돈의 수준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선이 무너진 것이다.” <스파이더 맨>의 현란한 첫주 박스오피스 곡예를 본 할리우드 흥행 관측사들의 평이다. 2002년 여름 시즌은 1번타자의 첫 타석 홈런으로 개막됐다. <미이라> 시리즈와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새로운 대박 주말로 자리매김한 5월 첫 금요일에 개봉한 소니의 <스파이더 맨>은 3일간 1억1480만달러를 벌어 불과 6개월 전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세운 9천만달러 기록을 가볍게 무너뜨렸다. <스파이더 맨>은 전 연령층에 어필하는 영화와 성공한 마케팅, 배급 파워가 결합했을 때 영화 한편이 하루에 4천만달러 이상 수입을 올릴 수 있음을 입증해 미국 영화산업 역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거미줄을 타고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른 소니는 점유율 하위권을 맴돌던 지난해의 기억을 말끔히 청산했다. 총수익 8억1500만달러의 <스파이더 맨>을 필두로 <맨 인 블랙2>(4억3900만달러), <트리플X>(2억4200만달러), <패닉 룸>(1억9500만달러)이 고루 선전한 소니는 12월2일 현재 총흥행수익 27억5천만 달러로, 1998년 <타이타닉>의 폭스가 세운 26억8천만달러 기록을 뛰어넘었다. ● ● ● ● 정훈탁 이제 그는 더이상 매니저가 아니다. 충무로에서 정훈탁의 존재는 정우성, 전지현, 설경구, 전도연, 김혜수, 차태현, 장혁, 신민아, 조인성 등 쟁쟁한 스타들을 거느리고 있는 매니지먼트사 대표 이상이다. 올해 싸이더스HQ라는 독자적인 회사를 설립한 그는 공동제작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성공적으로 펼쳤다. 영화에 배우를 제공하는 대신, 제작에 참여하는 이 방식이 들어먹힌 작품은 <몽정기>였다. “극심한 캐스팅난을 이용해 작품을 말아먹으려 한다”는 충무로의 비난을 보기좋게 맞받아친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현재도 여러 작품과 공동제작 협의를 벌이고 있다. 어쨌건 확실한 점은 날로 심각해지는 캐스팅 전쟁 속에서 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란 사실. 그럴수록 충무로 제작자들 사이에선 더욱 확실한 ‘공공의 적’이 되리라는 점 또한 안 봐도 짐작이 가지만 말이다. ● ● ●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아무래도 제목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센과 치히로의 행복비명’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힘은 갈수록 더 경이롭다. 그의 최근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1년 7월 도호를 통해 일본에서 개봉했고, 2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 2억4000만달러가량을 벌어들이며 일본 개봉영화 사상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2억1900만달러로 챔피언 타이틀을 지켜온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기록이며, 역시 미야자키의 작품이자 전 챔피언이었던 <원령공주>의 1억5400만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이 여세를 몰아 2002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블러디 선데이>와 나란히 금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처음 주요 국제영화제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국에서 지난 6월28일 개봉한 <…행방불명>은, 약 두달 만인 8월22일 전국 관객 수 200만명(서울 93만명)을 돌파하면서 국내 일본영화 개봉작 가운데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국내 개봉된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슈렉>(서울 112만명) 다음으로 높은 성적.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의 토토로> 등 국내 극장가에서 기대 이하의 대접을 받았던 미야자키 전작들의 설움을 말끔히 씻어냈음은 물론이다. 미야자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배급 계약을 체결한 월트 디즈니가 미국 내 모든 판권을 갖고, 지난 9월 26개관에 한정적으로 개봉한 뒤 지금껏 장기상영 중이다. ● ● ● ●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 2001년부터 활성화된 시네마테크 주최 회고전들은, 정확히 말해 우리에게 회고가 아니라 정식으로 상견례를 나누지 못한 거장들과의 유예된 첫 해후라 해야 옳다. 장 르누아르, 스즈키 세이준, 프랑수아 오종 등 많은 작가를 뒤늦게 초대한 올해 회고전 중 8월 말 서울 시네마테크가 주최한 ‘나루세 미키오 전’은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에드워드 양과 왕가위는 언젠가 최고의 영화로 나루세의 영화를 꼽은 적이 있다. 그리고 두 감독이 2000년에 만든 <하나 그리고 둘>과 <화양연화>는 나루세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구로사와, 미조구치, 오즈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지만 나루세의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없기에 이 회고전은 관객 동원과 무관하게 중요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회고전을 찾은 손님들의 반응에서 읽을 수 있었다. 두편의 영화에서 오즈와 허우샤오시엔의 메아리를 담은 허진호 감독은 실은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나루세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이재용 감독 역시 나루세에 깊은 감흥을 받은 걸로 보였고 박찬욱 감독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를 보고 흥분했다. 김지운, 류승완 감독도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감독들. 2002년 나루세 회고전에서 미래의 길로 가는 전환점을 발견한 감독도 있지 않을까 ● ● ● ● 참외 올해 한국영화에서 유난히 ‘사랑’받았던 과일은 참외였다. <몽정기>와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에서 이 노란빛 과일은 <아메리칸 파이>의 파이처럼, 헐벗고 외로운 남성들의 묵묵하면서도 촉촉한 벗이 돼줬다. 충무로에서 급부상한 것은 참외만이 아니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그리 각광받지 못했던 섹스코미디 또한 주요 장르로 떠올랐다는 얘기. 이들 영화 외에 <색즉시공>이 개봉했으며, <동정없는 세상> 등도 기획되고 있다. 노골적이지만 허물없이 섹스를 다루는 이들 영화는 <아메리칸 파이>가 그랬듯이 일종의 성장영화 모티프를 빌려와 ‘저질’이라는 거부감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과연 기존 작품들을 창조적으로 넘어섰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점 또한 사실이다. ● ● ● ● 스파이 2002년 할리우드 여름 영화계의 대부는 본드, 제임스 본드였다. ‘본드 골려먹기’로 독자적 프랜차이즈 가문을 일으킨 <오스틴 파워> 시리즈가 3편을 내면서 <미션 임파서블2>의 이단 헌트 요원(톰 크루즈)까지 들러리로 세운 일이야 그렇다치고 익스트림 스포츠광을 동원한 신세대 첩보물 <트리플X>, 형의 유업을 이어 게토에서 CIA 요원으로 발탁되는 크리스 록의 <배드 컴퍼니>, 오스틴 파워를 할렘으로 보낸 형국의 패러디 <언더커버 브러더> 등에 이르면 예사 유행이 아니다. 거기다 아끼는 후배를 위해 말년 공작을 벌이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스파이 게임>, 기억을 잃은 CIA 요원 맷 데이먼의 모험 <본 아이덴티티>, 네 번째 잭 라이언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 버디코미디 <아이 스파이>까지 합세해 첩보 장르의 복고적 유행을 굳혔다. 때아닌 스파이영화들이 받은 암호명은 하나. 여름영화 시장의 여전한 최대 고객인 10대 소년들에게는 멋진 여자친구, 최첨단 장비, 고독하고 비장한 남성미가 조합된 100% 판타지를, 불꽃놀이를 좋아하는 감독들에겐 특수효과와 소품, 자동차와 로켓, 폭약을! ● ● ● ● 할리 베리 & 리즈 위더스푼 257초의 환희와 오열. 2002년 오스카 쇼에서 74년 만에 흑인 여배우로서 첫 주연상을 안은 할리 베리의 오페라적 소감은, 아무리 만인이 탐낸다는 오스카지만 베리만큼 지독하게 갈망한 이는 없을 거라는 확신만으로도 청중을 설득했다. 마치 동화의 해피엔딩처럼 곧이어 덴젤 워싱턴이 사상 두 번째 흑인 남우주연상을 받고 워싱턴 이전의 유일한 주연상 수상자 시드니 포이티어가 공로상을 받던 그날 밤 할리 베리는 “이것이 영화산업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나 유색 인종 배우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어도 큰힘이다”라고 말했다. 이름 앞에 오스카 인증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게 “섹시해 보여라”는 우스꽝스러운 연기 지시를 받으며 에 출연한 그녀의 차기작은 <엑스맨2>와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고전 <폭시 브라운>의 리메이크다. 멕 라이언과 샌드라 불럭의 휴식, 줄리아 로버츠의 외도를 틈타 로맨틱코미디계에 안뜰을 확보한 스타는 리즈 위더스푼. 그녀의 <스위트 알라바마>는 첫 주말 3560만달러 성적을 올려 역대 로맨틱코미디 오프닝 여왕 <런어웨이 브라이드>를 밀어냈다. 위더스푼의 독사진 한장으로 밀어붙인 <스위트 알라바마>의 포스터는 스타 파워가 열쇠인 로맨틱코미디의 히로인 선택에 까다로운 할리우드가 얼마나 이 남부 출신 ‘너무한 금발’ 스타를 신뢰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스위트 알라바마>에서 500만달러를 받은 위더스푼은 스스로 제작하는 <금발이 너무해2>에서 1500만달러의 보수를 받는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