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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What's Up] 군부세력 해치우는 람보를 보고 싶다

버마(미얀마)의 국민들은 람보를 절실하게 원한다? <텔레그라프> 등 서구 외신들은 최근 버마인들이 <람보4: 라스트 블러드>의 불법복제 DVD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람보4…>는 버마의 반정부단체 카렌민족연합을 돕기 위해 파견된 미국인 종교봉사단원을 구출하는 람보의 활약상을 그리는 영화. 버마 국민들이 이 영화를 애타게 찾는 이유는 람보가 버마를 지배하고 있는 군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해치우기 때문이다. 버마 군부독재 정권은 지난해 9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민주화 조치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 2월15일에는 카렌족 반군의 지도자가 타이에서 암살당하는 등 혼란스런 정국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버마사회의 밑바닥에서 불고 있는 ‘람보 열풍’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람보를 통해 대신 해소하려는 국민들의 욕구가 반영된 듯 보인다. 물론 버마 군정이 이를 그대로 둘 리는 없다. 외신들은 “많은 고객이 <람보4…> DVD가 없냐고 계속 묻지만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경찰은 이 영화를 팔 경우 7년형을 살게 된다고 협박하고 있다”는 양곤의 한 불법 유통업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지 분위기를 소개했다. 다른 판매업자는 “매일 20명 이상이 이 DVD가 있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이 영화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보고 싶지만 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람보4…>의 주연이자 감독 실베스터 스탤론의 귀로도 흘러들어갔다. 그는 “이상한 방식이긴 하지만, 이들 대단히 용기있는 국민들은 미국영화에서 어떤 주장을 찾았다. 내가 영화를 한 이래 가장 뿌듯한 순간 중 하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물론 스탤론의 지능으로도 버마 국민들이 실제로 미국의 람보전사들이 버마를 휘젓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이해는 될 것이다.

[김수진] “시나리오 보고 모두가 반대한 영화였다.”

일일 관객 수가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추격자>의 흥행기세로, 제작자인 김수진 영화사 비단길 대표는 축하전화를 받기 바쁘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제작자로 걸고 만든 영화는 최근 <음란서생>(2006)과 <추격자> 두편이지만, 그에게 축하전화를 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김수진 대표가 지난 20년간 영화계에 몸담고 지내면서 알아온 지인들이거나 사업 파트너들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영화일을 시작한 김수진 대표는 당시 하명중영화제작소, 신도필름 등을 거쳐 20대 초반에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회사를 꾸릴 만큼 이미 당찬 사업가였다. 그는 <꽃잎> <나쁜 영화> 등 한국영화 기획에 참여했고 <레옹> <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은 영화를 수입해 흥행시켜서, 한국에 짧게 프랑스 예술영화 수입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올해로 영화일을 한 지 꼭 20년이 된 그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충무로 원로”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듣지만, 6년여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이제 본격적인 제작에 뛰어든 신인 제작자이기도 하다. 1966년생. 이제 한창 일할 때인 젊은 여성제작자로서 김수진 대표를 두고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뭘 해도 할 사람”이라는 것.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분명한 불같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호불호로 갈리가 한다는 김수진 대표를 만나기 전, 다소 두려운 맘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햇볕 좋은 홍대 부근의 작은 카페에 들어앉아 호랑이 한 마리를 기다리는 심정이었으나, 그곳에 나타난 건 경쾌한 초록색 스웨터에 트레이닝 점퍼 차림을 한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오늘은 머리도 감고 빗질도 하고 왔다”며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머릿결을 매만지던 김수진 대표는, <추격자> 제작과정을 비롯해 길고 곡절 많은 개인사를 세 시간 동안 빠르게 쏟아놓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뭘 쉽게 얻을 운은 아닌가봐요. 그런 행운은 나한테 없는 것 같아. 편안한 걸 할 팔자가 아닌 거지.” -오늘(2월27일) <추격자>가 200만명을 넘었다. 무엇보다도 평일 관객이 많은 분위기다. =어제도 하루 동안 12만명이 들었다고 그러더라. 지난주 화요일엔 10만명이었으니까 늘어난 셈이다. -어떤 기사에선 벌써 본전 다 뽑았다고 그러던데. =이제 시작이다. 아직 손익분기점도 못 넘었는데.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순제작비가 정확하게 37억5천만원 들었고, P&A비용이 20억원 정도 들 것 같다. 프린트 수가 계속 늘고 있어서. -현재 스크린 수가 몇개나 되나. =450개다. 개봉할 땐 400개로 했다. -처음부터 개봉 규모가 작진 않았다. =쇼박스에서, 우리가 이 영화는 책임지고 벌여주겠다고, 그렇게 믿고 기다려준 팀이 감사하고. 그동안 투자사들한테 얼마나 까였는지. 그거 다 얘기 하려면… 진짜 할 말 많다. (웃음) -어떻게 <추격자>를 만들게 됐는지 그 얘기부터 하자. =2005년 여름 <음란서생> 촬영 직전에 <완벽한 도미요리>를 봤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받은 그 영화. 그걸 보고 (갑자기 저돌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찌르며) “저 감독 무조건 잡아와! 무조건 잡아!” 그랬는데 마침 <음란서생> 제작실장이 그 영화 PD를 해준 거라. 그래서 운 좋게 얼른 잡아올 수 있었다. (웃음) 나홍진 감독에게 뭘 준비할 거냐 그랬더니 그전에도 다른 아이템들로 여러 제작사와 계약을 했는데 다 잘 안 됐다며 나 감독이 풀이 죽어 있더라. 김선일이나 유영철을 소재로 얘기하면서 자주 만나다가 <음란서생> 개봉 직전에 감독이 초고라며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자기가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골방에서 오랫동안 혼자 썼다고. 그걸 저녁을 시켜놓고 읽는데, 읽다가 토할 뻔했다. 숨이 막히고 너무 세고 잔인하고. 문자화된 걸 읽는데도 긴장감이 넘쳤고. 그래서 결국 그 밥을 못 먹고 전화했다. 이거 하자. -<추격자>와 같은 아이템을 하자고 감독에게 먼저 얘기 건넸던 건가. =감독이 그런 얘길 쓰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초고를 보고 같이 하자 얘기했던 거다. 어쨌든 시나리오는 많이 고쳐야겠다, 어렵겠지만 나를 믿고 같이 해보자 그랬다. 그날 우리 회사에서는 모두가 다 반대하는 거야. 영화가 너무 세고 잔혹하고, 유영철 얘기도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모두가 다 안 된다고 그러더라. 나는 유영철이 누군질 몰랐다. 그 시기에 미국에 있었으니까. 그게 뭐냐? 유영철을 왜 반대하는 거야? 인터넷 쳐봤더니 극악무도하더만. (웃음) 반감을 가질 것 같더라. 그래도 나는 (또 손가락을 찌르며) “고!” 했지. 그날부터 나 감독과 같이 신 바이 신, 지문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서 이게 과연 최선의 선택이냐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일년 내내 회의했다. 중간에 물론 각색자도 붙였다. -뭘 고쳐야 했나. =초고의 느낌이 지금 영화로 보여지는 것과 근간은 다르지 않은데, 중요한 네개의 포인트가 크게 바뀌었다. 나 감독의 초고는 규모가 작은 하드코어 잔혹스릴러였다. 사적인 느낌이 컸고. 거기에 사회적인 이슈들도 찾아넣고 심리적으로도 사이즈가 큰 영화로 보일 수 있게,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넓힌 거다. 그 과정에 일년이 걸린 거지. 나는 몰랐는데, 최근에 누가 나한테 그러기를, 진짜 옆에서 보기 질릴 정도로 물고 늘어졌더라고 하더라. 저러다 말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집요했다고. (웃음) 나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메시지는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출장안마사 얘기는 기본적으로 사회 밑바닥 얘기다. 남들이 별로 관심 안 갖는 그런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희생자들이 죽어간 이유는 결국 모두가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경찰도 안일했고 하다못해 개미슈퍼 아줌마도 안일했다. 그런 걸 사회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으면 영화는 작은 스릴러가 되고 만다. 유영철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화가 났던 게, 그 여자들이 죽어가던 당시 아무도 제대로 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건 그들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이 다른 계층에 속했으면 경찰도 사건을 더 파고들었을 거고 사회도 더 관심을 가졌을 것 같다. 고작 출장안마산데 뭐, 이러면서 무시하고 넘어간 게 아닌가 싶더라. -투자사들한테는 왜 그렇게 ‘까였다’고 생각하나. =연쇄살인마, 출장안마사, 영화 90%가 밤신, 60%가 비신. (웃음) 투자받으러 다니던 2006년 그해가 한국영화 수익률이 바닥을 쳤을 때여서 더 어려웠다. 그때, 알고 지내던 김선용 이사가 밴티지 홀딩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맘에 줬더니 얼른 하겠다더라. 갓 만들어진 투자사라 유연한 장점이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42억원 정도는 갖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선 30억원이면 찍겠다는 거야. 줄이고 줄여도 31억5천만원인데. 그래서 이건 무조건 오버다, 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캐스팅은 그 이후에 된 건가. =캐스팅이 먼저 됐다. 그게 2007년 1월인데, 당연히 캐스팅도 잘 안 됐지. (웃음) 만날 그 고민에 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그전에 심엔터테인먼트에서 자기네 배우들 사진이 있는 달력을 준 게 있었는데, 눈을 딱 뜨니까 눈앞에서 김윤석씨가 활짝 웃고 있는 거다. (웃음) 김윤석씨 생일이 1월이거든. 그 사람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저거다, 됐다, 싶더라. 미진 역은 초고 때부터 서영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고, 영민 역으로는 하정우를 하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너무 좋았고, 굉장히 큰 배우가 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근데 투자사에서 하정우는 죽어도 안 된다는 거라. 스타를 써야 한다는 거였다. 두달을 밀고 당기다가 투자사에서 자기네가 다른 스타 캐스팅을 해오겠다고 통보해왔다. 그날 나는 난리를 치면서 전화기 집어던지고 (집어던지는 시늉) 당장 투자 빼라 그랬다. 그랬더니 이젠 거기가 뒤집어진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고 황당해했지. 요새같이 어려울 때 투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도 다른 투자사들한테 다 퇴짜 맞고 왔으니 그쪽에서 투자 빼면 대안이 없거든. (웃음) 일주일 있다 연락이 왔다. 그냥 하정우 하세요. 투자사가 양보해줬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하정우도 이 배경을 알고 있나. =촬영 50%쯤 지났을 때, 김윤석씨랑 하정우씨랑 같이 술 마시는데 갑자기 하정우씨가, “저 이전에 영민을 누구 생각하셨어요?” 하고 갑자기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걸 왜 물어보냐 그랬더니 항상 궁금했는데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더라. 자기가 제일 늦게 합류했으니까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던 거다. 그래서 그 얘길 해줬다. 그랬더니 정우씨가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웃음) 내가 더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고집 부려서 정우씨를 캐스팅했는데 정우씨 연기 꽝이었으면 나 완전히 바보 되고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영민이 망원지구대에 끌려가서 진술서 쓰다가, 여자들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 할 때 그 장면 보고 모든 걱정을 놨지. -미진 역은 왜 처음부터 서영희였나. =예전부터 서영희씨 눈빛이 되게 슬프고 불행해 보인다고 느껴왔다. <마파도> 보고 그걸 느꼈다. 참 운이 없구나. 불행하고 억울한 느낌. 그런 사람이 미진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연민도 많이 느낄 것 같았다. 영희씨도 처음엔 걱정하긴 했는데 무조건 하겠다고 하더라. 사실 여자배우들은 되게 몸 사리잖아. 근데 영희씨는 몸 사리는 게 없더라고. 힘들어서 도망갈 줄 알았더니 안 도망가데. (웃음) -촬영기간 동안 나홍진 감독은 제작자에게 자기가 헛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중간 편집본을 가져갈 때도 최종편집본처럼 편집이니 색보정에 공을 들였다던데. =나는 이 영화 찍는 동안 매일 아침 텔레시네 보는 재미로 일찍 출근했다. 텔레시네는 편집은 고사하고 사운드고 뭐고 하나도 안 된 거잖아. 그것만 보는데도 내가 생각하는 그림 그대로 다 찍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텔레시네 본 지 사흘쯤 됐을 때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더라. -걱정했던 부분이 뭐였나. =밤신이 너무 많고, 감독이고 촬영감독이 모두 신인이라 너무 실험적이거나 스타일적으로 과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정말 클래식한 앵글에 공식 그대로 찍어왔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액션과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감독은 어떻게 숏을 찍고 붙여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낼 것인지 정말 잘 아는 사람이다. <완벽한 도미요리>를 보고 좋아한 것도 그 점이었다. 숏을 찍어서 붙이는 감각이 정말 뛰어나다. 미드 세대라 그런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70년대생 이후의 영상세대라고 할 만하다. 그 이전 세대엔 없었던 컷 감각인 것 같다. 김선민 편집기사가 잘해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 감독이 그렇게 되게끔 찍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됐나. =제목도 없는 시나리오를 나 감독이 가져와서, 제목은 지어주세요, 했다. (웃음) 제목 갖고도 진짜 말이 많았다. 고전적으로 힘있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중호의 마음을 담고 싶었고. 그래서 어느 날 ‘추격자’로 정했더니 또 모두가 반대하고…. (웃음) 나 감독도 추격과 추적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자기가 일주일만 고민해보겠다 그래서 내가 그냥 ‘추격자’로 가, 오늘부터 제목 갖고 얘기하지 마. (웃음) -프로덕션의 면면에 있어서 영화 그 자체로 승부하고 돌파하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정공법. =처음부터 그랬다. 스타 캐스팅 가지 말고 연기자로서 적역 캐스팅으로 가서 캐스팅 비용 들어갈 거 영화에 더 쓰고, 정통적으로 홍보하고 마케팅하고. 하다못해 우리는 연예프로에서도 다 까였다. 쇼프로 같은 거, 우린 나간다고 하는데도 그쪽에서 배우들이 너무 약하다고 안 내보내주더라. (웃음) 그래서 그쪽으로는 홍보도 하나도 못했다. 영화 제목도 장난 안 치고, 무식하지만 촌스럽게 가자. 모든 과정이 다 그랬던 것 같다. 편집할 때까지도 나 감독과 논쟁을 많이 했거든. -감독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대. (웃음)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이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충돌했을 때 그를 설득시킬 수 있으려면 내가 감독보다 시나리오 더 많이 보고 콘티 더 많이 보고 고민도 더 많이 해서 논리로 승부해야지. 그 사람은 감독인데 얼마나 고민했겠어. 이미 머릿속에 확고한 그림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감독은 편집실 뛰쳐나가고, 나는 달래서 데려오고, 중간에서 김선민 기사는 어쩔 줄 모르고. -그래도 한편쯤은 더 같이 해야 하지 않나. =애초에 세편 계약했는데 안 할지도 몰라. (웃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편집할 때까지 징그럽게 싸워서. 내 생각은 이렇다. 신인감독이 영화 잘 만들어서 500만명 들고 대성하면 메이저 투자사들이 돈 덥석 주고 데려간다. 크리에이티브 자유 다 줄게, 돈 다 줄게, 하면서. 그러면 두 번째 작품 가서 깨진다. 영화는 제약과 조절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돈 다 주고 자유 다 주고, 그렇게 해서는 영화가 될 수가 없다. 편집하는 2주 동안 그래서 진짜 괴로웠다. -편집을 2주 했나. =모든 후반작업을 한달 만에 했다. 처음에 개봉일 얘기할 땐 쇼박스에 내가 우리 영화는 개봉을 무조건 구정으로 가야 한다, 1월30일로 하자고 했는데 촬영이 지연됐잖아. 다시 찾아가서 2주만 늦춰달라 그랬는데도 후반작업할 시간이 한달밖에 안 남은 거다. 그러니 나 감독은 이가 갈리지. (웃음) 자기는 한달 내내 밤새고 나는 옆에서 안 떨어지고. -첫 제작영화인 <음란서생>도 성공작이었다. =평 좋았고, 관객도 267만명 들었고. 근데 아직도 수익금이 안 들어왔다. 그게 일본에 120만달러에 팔렸는데, 그 수익이 영화가 개봉해야 들어오는 거다. 근데 영화가 아직 개봉을 안 했다. 3년 내내 빚지고 산 거지. 그래서 <추격자> 잘돼서 빚이라도 갚았으면 좋겠다. (웃음) <음란서생>은 국내극장 수입으로는 제작비 똔똔했다. -<추격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들 것 같은가. =그건 잘 모르겠고, 순전히 개인적인 바람인데 500만명은 넘어줬으면 좋겠다. 500만명은 넘어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남들 다 안 된다고 했던 영화가 이렇게 나와서 500만명은 넘어줘야 지금의 한국영화 투자환경이 바뀌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400만명도 좋고 300만명도 좋지만, 이상하게 500만명이 안 넘으면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쉽게 잊혀지는 것 같더라. 오래 기억에 남고 투자 마인드도 바꾸려면 500만명은 넘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500만명이 넘어야 연말에 상도 탈 거 같아. (웃음) 윤석씨, 정우씨 다 상 받았으면 좋겠고 나 감독님도 받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나는 빚 갚으면 좋을 것 같고. 한쪽에선 부담도 된다. 주위의 기대가 너무 커져서 다음 작품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작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계는. =시나리오 고치는 중이다. 똑같다. 신인감독이고 스타 캐스팅 안 할 거다. 이번에도 매니지먼트사에서 달력 꼭 줘야 돼. (웃음) -어떤 내용인지. =주식 갖고 사기치는 사람들 얘기다. 무지하게 재미있다. 대한민국에서 요즘 펀드 안 갖고 있는 사람 없잖아. 나는 주식을 한번도 안 해봐서 아는 게 전혀 없지만 공부는 안 하고 있다. 나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밌어야 하니까. -일찍부터 영화계에서 일했다. 90년대 중반에 본인이 대표로 운영했던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곳은 채윤희 대표의 올댓시네마와 함께 홍보마케팅의 양대산맥이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웃음) 그러다 1999년 AFI(미국영화학회)로 유학을 떠났는데, 무엇을 배우러 간 것이었나. =인생이… 이런 얘길 다 해야 하나. (웃음) 철없을 때 결혼했던 남편이 부도를 내고 도망갔다. 당시 6억5천만원이었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수입해서 번 돈, <레옹> 수입해서 번 돈, <나쁜 영화> <꽃잎> 이런 영화들 기획, 제작해서 번 돈으로 그 빚을 다 갚고 나니까 인생이 너무 허망하더라. 공부라기보다, 이젠 남을 위해 살지 말고 나 자신에게 투자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무작정 갔다. -조엘 실버가 운영하는 실버프로덕션에서도 일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인턴을 잡으려고 팩스를 1천 군데 정도 넣었다. 전화가 한통도 안 왔다. 근데 실버네가 전화했다. 지금 바로 와줄 수 있냐 그러더라. 우리 너무 급하다고. 오케이, 바로 가겠다, 하고 갔는데 처음 두달은 복사만 했다. (웃음) 한국에서 영화 제작하고 기획하던 사람이 만날 매니지먼트사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있으니까 자존심이 되게 상하더라. 고생도 많았고. 그래서 어느 날은 막 울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높은 사람이 와서 너 왜 울고 있냐, 한국에서 제작도 하고 그랬는데 이런 일 하니까 화가 나서 울고 있지? 너 여기 일 그만 하고 자기랑 같이 제작일 하자 그러더라. 그래서 난 일을 좀더 배워야 될 것 같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워너의 월드와이드프로덕션 부서, 그러니까 제작·투자·판권구매 부서로 나를 소개시켜줬다. 거기에서 일년 반을 근무했는데 그때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시나리오들을 다 본 것 같다. 하루에 200권씩 받아서 처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감당이 안 되지. 열 장으로 해결해야 돼. 앞부분 열장, 뒷부분 열장, 그래도 미심쩍으면 중간 몇 페이지. 하루에 최대 12권까지 영어 시나리오를 읽어봤다. 나중엔 몇장만 봐도 감이 온다. 지문 몇줄, 대사 몇줄 보고 던져, 던져, 던져. 그렇게 1년 반을 일하면서 시나리오를 보고 나니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러다 2004년 여름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십년도 넘게 알고 지낸 김대우 감독이 같이 영화하자고 꼬셔서 그 말 한마디에 짐 싸들고 돌아온 거다. -비단길의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회사 이름을 한국말로 짓고 싶었고, 실크로드가 한국어로 뭐지? 하다가 비단길, 좋다 싶어서 무조건 등록하자 그랬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름대로 큰 뜻을 담아, 동양과 서양을 잇는 그런 제목이면 좋겠다 싶어 생각한 거다. (웃음) 그걸로도 놀림 많이 당했다. 비단길이 가시밭길 되는 거 아니냐 뭐 그런…. -모교인 이대에서 영화동아리 누에가 만들어졌을 때, 본인은 85학번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82, 83학번의 대선배들과 함께 앞장서서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학년이. (웃음) 기지촌 여성들을 담은 다큐도 만들었다. 직접 생활도 같이 했다고. =아니 그런 얘기까지. (웃음) 근데 생각해보니 그때도 내가 그랬던 거 같아. 선배들은 다 말렸는데 내 생각엔 그렇게 찍지 않으면 다큐가 안 나올 거 같더라고. 민들레회라고 수녀님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돌봐주는 곳이 있었는데 혼자 들어가기는 무서워서 친구를 꼬여서 들어갔다. 매일 밤 죽음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후배가 신경안정제를 사줬는데 그걸 먹고 이틀 밤을 울고 불고 했다. 그 다큐 만들어서 KBS 토크쇼도 나갔고 베를린영화제 영포럼상도 타고 상금도 당시 300만원 받고, 이대 총학에서 500만원 지원해줬고 여성학 교수님들이 돈도 주셨고, 그 당시 돈을 무지하게 벌었다. (웃음) 그땐 또 전국 대학에서 데모를 했기 때문에 데모를 하는 동안 틀어놓을 영화가 없어서 우리 영화를 다 가져갔다. 그래서 그 당시 몇천만원을 벌었다. 돈이 너무 많은 거야. 근데 영화는 너무 후진 거지. 난 감독에 재능이 없구나. 돈은 버는데. 그래서 나는 뭘 하면 좋겠냐고 선배한테 물으니까 기획이나 제작하라 그러더라. -1989년에 처음 영화일을 할 때, 시작은 어디였나. =선배가 하명중영화제작소를 소개시켜줬다. 2년 있다가 나와서 회사를 차렸다. 만 스물세살이었지. 그 해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기획해서 번돈 500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영화보러 갔다가 영어, 불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사와서 16억원 벌었다. 근데 지방 배급업자한테 사기당해서 다 날리고 다시 시작했다. -어떤 영화를 앞으로 하고 싶은지.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 좋게 패키지로 꾸려진 영화들,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재미가 없다. 남들이 잘 쳐다보지 않는 것, 새로운 것, 그런 것들에 도전해보고 싶다. -<작전> 외에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가. =방은진 감독과 한편 하게 될 것 같고, 그 다음엔 큰 액션영화를 한편 하고 싶다. -방은진 감독과 하는 영화 장르는 뭔지.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주인공은 여자인가. =아니, 남자다. 나도 여자주인공인 영화 해보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안 하게 된다. 시나리오 고치고 있다 보면 액션이 되고(웃음)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랑말랑한 게 나랑 안 어울리나.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인생이라서 그런가보다. -취향 문제일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 (웃음)

전주에서 만나는 두 유럽 거장의 실험 정신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가 굵직한 회고전 두개를 선보인다. 헝가리의 영화 거장으로 구스 반 산트와 짐 자무시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벨라 타르와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알렉산더 클루거의 회고전이다. 벨라 타르 회고전에서는 총 12편의 장·단편이 선보인다. 상영작은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인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비롯하여 <패밀리 네스트> <아웃사이더> <프리팹 피플> <맥베스> <가을> <파멸>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등의 장편과 단편 <호텔 마녜지트> <평원에서의 여행> <프롤로그> 등이다. 제1회 때 미드나잇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상영한 바 있던 435분짜리 대작 <사탄탱고>는 이번에도 역시 심야 상영작으로 소개된다. 벨라 타르는 영화제 기간 중 직접 내한하여 특별강연을 할 예정이다. ‘영화보다 낯선’ 섹션에서 상영될 알렉산더 클루거 회고전의 상영작은 장편 7편과 단편 5편, 텔레비전 방송물 3편 등이다. 클루거를 유명하게 만든 그의 데뷔작 <어제와의 이별>을 비롯하여 <서커스단의 예술가들> <어느 여자 노예의 부활> <독일의 가을> <애국자> <감정의 힘> <블라인드 디렉터> 등 이번에 상영될 장편영화들은 오버하우젠 선언으로 아버지 영화의 종언을 알리고 새롭게 출발한 뉴저먼 시네마의 숨겨진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영시네마 인터내셔널 포럼’ 부문의 전 집행위원장 울리히 그레고르가 내한하여 알렉산더 클루거의 영화 세계에 대해 강연한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벨라 타르 회고전에 관해 “우리 시대 가장 독창적인 영화감독이자 비타협적인 예술가 가운데 한명인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들을 마침내 한자리에 모아 상영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한편, “예술가이자 교육자, 행동하는 마르크시스트이자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는 모험가이기도 한 클루거 감독의 영화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알렉산더 클루거 회고전의 의의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파리] 구설에 휩싸인 오스카의 여왕

지난 2월24일 마리온 코티아르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은 프랑스 언론에 실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프랑스영화의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스카에서 프랑스 배우들의 활약은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1960년 <오트빌로 가는 길>(Chemins de Haute-ville)의 시몬느 시뇨레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의 젊은 여배우가 다시 한번 반세기 전의 영광을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회상시킨 것이다. 시상식 당일 코티아르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삶과 사랑…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도시에는 천사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라며 시적인 수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오스카의 수상과 더불어 그녀는 영국의 BAFTA(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어 프랑스 영화사에 곱절의 영광을 안겨다주었다. 하지만 오스카 시상직 직후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 마리온 코타아르가 9·11을 “미국 정부의 조작”이라 이야기했던 2007년 2월16일의 인터뷰를 재방영하면서, 그녀가 오스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얘기가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문제의 동영상은 “비행기가 충돌했다고 빌딩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내리나? 뉴욕에서는 몇분 만에 모든 것이 붕괴됐다. 우리는 거짓말에 속고 있다”는 그녀의 멘트를 담고 있다. 이 클립은 곧 유튜브와 데일리모션(Dailymotion) 사이트에 그대로 업로드됐고 1만1천명 이상의 네티즌이 본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커지자 마리온 코티아르의 변호사인 뱅상 톨레다노는 “그녀는 단 한번도 9·11 테러 발생에 대해 정치적 반론을 일으키려 한 적이 없다. 과거의 그녀가 일으킨 반향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그녀를 변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과 영국의 여러 언론들의 한 지면을 장식하며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이 취소될 것이라는 루머까지 양산해내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2007년 당시 방송 멘트에 대한 마리온 코티아르의 자세한 입장이 실린 기사를 저마다 싣고 있으며, 이 같은 논쟁이 코티아르의 예술적 재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다가 그녀가 지금 미디어의 ‘음모’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섰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끌린다.”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각본을 10번 이상 고쳐쓴 뒤 시대를 90년대 초로 바꿨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90년대 초라는 시대가 연출하기에 편리했던 것 같다. 휴대폰도 없고, 아직은 뭔가 부자유한 느낌이 남아 있는 시절. 그냥 이야기를 풀기에도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당시가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졌던 때라고 하는데 나는 학생이라 별로 실감을 못했고, 그냥 텔레비전에서 불경기가 될 거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일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대체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궁금했다. -멧돼지 전설의 고장 마츠가네란 마을이 인상적이다. 어디에나 눈이 있는데 거기서 기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로케이션 헌팅 때부터 눈만 있는 마을은 너무 그림 같을 거라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눈이 남아 있긴 하지만 설국의 이미지는 아닌 그런 곳을 원했다. 겨울의 나른한 느낌이 좋았고, 추운 곳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란성 쌍둥이로 등장하는 형제 히카리와 코타로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했나. =주인공 설정이 힘들었다. 처음엔 일란성 쌍둥이로 정했다가 나중에 이란성 쌍둥이로 바꿨다. 같은 학년이고, 항상 같은 걸 보고 자랐는데 한명은 경찰이고 다른 한명은 양계장에서 일하는 말썽쟁이다. 참 그로테스크한 관계구나 싶더라. 게다가 아직도 함께 살고 있고. 그런 불편함을 그리고 싶었다. -전작인 <린다 린다 린다>가 당신 작품 중에선 처음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이 사실이 이번 영화에 영향을 끼쳤나. =일단 <린다 린다 린다>가 관객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다시 나만의 정도(正道)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나의 20대를 마치는 느낌이 큰 영화다. 이전까지 나는 청춘영화만 찍어왔고, 그 안에서 폭을 넓히지 못했다는 느낌도 있었다. 30대에는 좀더 시야를 넓혀서 해보자는 결심을 한 거고. -당신에겐 청춘이 어떤 의미인가. =가진 건 없으면서 자신만 있는 거.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을 보면 다 그런 놈들만 나온다. <린다 린다 린다>도 겉보기엔 산뜻하지만 결국 비슷한 캐릭터들의 영화다. 그 무렵엔 나도 그렇게 자신감만 넘쳤다. 요즘엔 그때처럼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다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무척 의외로 느꼈다. =일단 소녀만화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고, 첫 경험이었다. 처음엔 진도를 나가지 못해서 몇번이나 좌절했다. 하지만 소녀만화 방식에 익숙해지니까 빠져들게 되더라. -각본을 <메종 드 히미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와타나베 아야가 썼다. 그녀와의 작업은 어땠나. =아야와 함께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프로젝트를 맡은 여러 이유 중 하나다. 계속 팬이었으니까. 무카이(고스케)의 각본은 매우 친절하지만 아야의 각본은 읽기엔 재밌어도 촬영해보면 상당히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손이 많이 간달까. -<크림레몬>을 시작으로 <린다 린다 린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등은 영화사에서 제안받은 프로젝트다.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과 차이가 많이 있나. =<크림레몬>이나 <린다 린다 린다>를 할 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별로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 해도 좋지 않겠어?’ 뭐 이런 느낌이랄까. 제안받은 프로젝트라고 해도 <크림레몬>도 나랑 예전부터 같이 하던 촬영감독이었고, 각본도 무카이가 써서 별 다른 점은 못 느꼈다. -당신 영화에는 대화와 대화 사이의 정적이 길고 롱테이크도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끌리는 연출자다. 한 장면이 이어지다 질리지 않을 순간을 찾아 끊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린다 린다 린다>의 라이브 장면도 4명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마지막 라이브 장면은 실제로 찍은 컷을 다 쓴 거다. 필요한 최저한의 컷만 간다. 그게 롱테이크든 짧게 끊어서 가든 중요하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길게 가게 되는 것 같다. 평범한 이야기라면 특수한 기술이나 재주는 부리지 않는 게 맞다고 본다. -<린다 린다 린다>를 비롯해서 대부분 청춘의 주인공들은 해피엔딩이라 하기엔 심심한 결말을 맞는다. =그대로 끝나버리는 느낌이 있는 것 같다. 내 영화에 성장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긴 하지만 성장하진 않는다. <린다 린다 린다>에서도 네 여학생은 모두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을 거다. 이건 비관적인 게 아니다. 서로 변해간다는 건 좋은 거니까. -<린다 린다 린다>를 합숙하면서 찍었다고 들었다. 촬영 분위기가 좋았겠다. =내가 시골에서 영화를 찍는 건 사실 합숙하며 촬영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도쿄에서 찍으면 배우, 스탭들과 같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바보의 하코선>을 할 때도 전원 합숙하면서 찍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실례지만 여자배우, 남자배우가 한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다. 남자, 여자 따로 나누지 않고 그냥 배우는 이 방! 이런 식으로. -일본의 짐 자무시, 아키 카우리스마키란 수식을 듣는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게 <우울한 생활>을 찍었을 때다. 카우리스마키의 <레닌그라운드 카우보이>랑 느낌이 비슷하다고. 짐 자무시 이야기는 <바보의 하코선> 때 나왔다. 한 <버라이어티> 기자가 젊은 짐 자무시가 찍었을 법한 영화라고 그랬었나. 그래서 그 다음엔 무카이랑 <리얼리즘 숙소>를 <천국보다 낯선>처럼 찍어보자고 했다. 대놓고 따라해보자고. (웃음) 그랬는데 그때는 또 아무 말이 없더라. 들킬 줄 알았는데 안심이었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 다운타운(일본의 유명 개그 콤비)의 마쓰모토 히토시(2007년 <대일본인>으로 영화 데뷔했다)가 하는 개그의 영향도 보인다. 폭소가 아닌 미지근한 웃음이 그렇달까. =아마 영향을 받았을 거다. 나의 소스라고 하면 TV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하니까. 또 내가 오사카예능대학을 나왔지 않나(마쓰모토 히토시가 오사카 출신이다). (웃음) 기타노 다케시의 영향도 받았을 거고. -영화를 통해 이루고 싶은 바가 있나. =<린다 린다 린다>를 본 사람이 있다면 <우울한 생활>을 찾아서 다시 봐줬으면 좋겠다. 기타노 감독에겐 매우 실례의 말이지만 내가 기타노 영화를 보면서 ‘에, 저 정도면 나도 찍을 수 있겠군’이라고 했던 것처럼, 내 영화를 보면서 똑같은 결심을 해줬으면 좋겠다.

평화롭고 쓸쓸한 하룻밤 <밴드 비지트: 어느 조용한 악단의 방문>

화면 정면에 멈춰 있던 버스가 지나가면 그 자리에 똑같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정지된 풍경처럼 일렬로 서 있다. 이스라엘 어느 지방 도시의 초청으로 방문했건만, 이들을 기다리는 건 황량하고 고요한 벌판뿐이다. 환대받지 못한 자들의 어색하고 불안해진 눈빛과 자세가 처량하다. 직접 목적지로 찾아가기로 결심한 남자들은 버스에 오른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경찰 관현악단의 이스라엘 방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래의 목적지는 ‘페타 티크바’지만, 영어 발음을 잘못 알아들은 탓에 ‘벳 하티크바’라는 사막 같은 마을에 내린다. 다시 돌아갈 버스는 끊기고 모텔도 없는 이곳에서 이들 눈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식당. 다행스럽게도 집시 분위기를 풍기는 여주인 디나와 조금은 멍해 보이는 두 남자의 배려 덕에 밴드 멤버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 낯선 이들과의 우연한 하룻밤에 펼쳐지는 잔잔한 추억거리들이 영화의 중심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만남. 정치적인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밴드 비지트: 어느 조용한 악단의 방문>은 인물들의 국가색을 최소화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낯선 타인들의 소통 이야기로 보편화시킨다. 그걸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휴머니즘적 승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 체결을 맺은 아랍권 최초의 국가지만, 여전히 두 나라는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2007년 카이로국제영화제 조직위는 이스라엘이 관여한 작품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영화들이 상영 금지된 상태다. 2007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 수상작이자 이스라엘영화제 주요 부문을 석권하고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밴드 비지트…> 역시 이집트에서는 상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스라엘 출신 감독 에란 콜리린에게 이스라엘 밴드의 이집트 방문기보다는 이집트 밴드의 이스라엘 방문기를 찍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 수밖에 없다.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들, 투픽(새슨 가바이), 할레드(살레흐 바크리), 디나(로니트 엘카베츠) 등은 이스라엘의 국민 배우들이며 밴드의 2인자 시몬(칼리파나투르)을 연기한 배우는 이스라엘에서 활동 중인 팔레스타인 배우다. 그러니까 안타깝게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소통을 그린 영화에서 실제 이집트와의 소통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집트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국가의 텔레비전에서 오마 샤리프가 출연한 이집트영화가 나오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밴드 비지트…>를 둘러싼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은 풍경, 먼 곳을 쳐다보는 듯 무표정한 인물들의 얼굴, 긴 침묵 사이의 짧고 엉뚱한 대화는 때때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떠오르게 한다. 언제나 한 박자씩 느린 인물들의 반응은 그 자체로 영화 고유의 리듬을 만든다. 같은 선율을 반복하는 음악과 최소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소통하는 인물들, 그리고 평면적인 배경은 영화를 미니멀리즘적인 분위기로 감싼다. 그 여백에 쓸쓸한 유머가 배어 있다. 이 영화는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가장 낭만적인 만남에 대한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고, 투픽으로 대변되는 깐깐한 구세대와 할레드로 대표되는 자유분방한 신세대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매개로 삶,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로도 보인다. 시몬이 오랫동안 완성하지 못한 협주곡의 마무리를 두고 고민하자, 그의 하룻밤을 책임져준 이스라엘 친구가 조용히 조언한다. “그냥 거기서 끝나도 돼.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 그곳. 작은 방, 램프의 불빛, 침대, 그리고 잠든 아기. 이 깊은 고독감 말이야….” 드라마틱한 결말을 원하거나 영화 곳곳에 스며든 고독감을 무료함이라고 느끼는 자들에게, 혹은 현실에 대한 날선 정치적 발언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속에 외로운 선율을 품고 만남, 기다림, 헤어짐을 스쳐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작은 선물이 될 것이다.

[베를린] 독일에서 파시즘은 정말 사라졌나?

독일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있는 청소년은 나치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신물이 나도록 듣는다. 황금시간대에 텔레비전을 틀면 나치의 만행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가 끊임없이 방영된다. 그렇다면 독일사회는 이런 계몽작업의 효과만 믿고 파시즘은 발디딜 틈이 없을 거라 안심해도 괜찮은 것일까? 모튼 류의 원작을 각색한 신성 데니스 겐젤의 신작 <디 벨레>(Die Welle)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는 68세대 이후 반권위주의적, 자유주의적 교육 세례를 받고 자란 독일의 청소년들도 파시즘적 집단 최면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은 독일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다. 주인공 벵어(위르겐 포겔)는 청년 시절 좌파대안운동권에서 빈집 점거를 한 경력이 있다. 그만큼 의식도 있고 학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반권위주의적 교사다. 그런 그가 ‘독재’를 주제로 심화학습을 하려하자 학생들은 “어휴, 지겨워. 차라리 미국 대통령 부시를 다루지요”라며 거부한다. 이에 자극받은 벵어는 학생들과 게임을 시작한다. 독재가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모두가 참여하는 실험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실험의 모토는 ‘규율을 통한 권력, 공동체를 위한 권력, 행동을 통한 권력’.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흰색 셔츠로 통일해 입은 뒤 프로젝트의 명칭을 물결이란 뜻의 ‘디 벨레’라고 붙인다. 실험이 계속되자 아이들은 정말로 집단 도취에 빠져들고 벵어마저 권력에 도취되며 실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디 벨레>는 심지어 아웃사이더, 외국인, 저소득층 자녀들마저 파시즘적 공동체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극우문제 전문가 베노 하페네거는 “청소년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우리는 사회적으로 비교적 불안정한 상황에서 산다. 그래서 이들도 전체주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하고 있다. 감독은 부모들의 자유주의적인 교육법에도 의문을 던진다. 영화에서 한 엄마가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고 하자 여학생은 “날 그렇게 키웠으면 차라리 나을 뻔했어. 키울 때 약간 엄격했어도 나쁘지 않았겠지”라고 대꾸한다. 73년생으로 68세대 부모 밑에서 자란 겐젤 감독은 이것이 실제 자신이 부모에게 했던 말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대사를 통해 그는 68세대 이후의 부모들이 권위적 어른이기보다 친구처럼 구는 것이 오히려 자식들을 전체주의 유혹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건 사실일까? 이상향을 추구하는 반권위적 교육이 오히려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지기 쉬운 나약한 영혼들을 키우는 걸까?

[2007-2008 추천 OST] <아임 낫 데어> <댄 인 러브> 外

여전히 밥 딜런적이지만 신선하게!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 소니BMG | V.A. 열말 제치고 우선 이름부터 나열해보자. 컨트리계의 전설 윌리 넬슨, 펄잼의 에디 베더 그리고 두말할 필요없는 소닉 유스, 윌코의 프론트맨 제프 트위디, 포스트펑크밴드 텔레비전의 보컬 톰 버레인, 페이브먼트의 보컬 스티븐 말크머스, 인디계의 매력적인 여신 캣 파워, 현재 인디신에서 제일 뜨거운 슈퍼스타 요 라 탱고, 천재 싱어송라이터 서프전 스티븐스, 예예예스의 보컬 카렌 오, <원스>의 글렌 한사드와 마르게타 이글로바 듀오, 잭 존슨 그리고 머큐리상 최우수 음반상에 빛나는 안토니 앤드 더 존슨스 등등. 인디·컨트리·블루스·얼터너티브·개러지계의 신·구스타들이 한데 모여 토드 헤인즈의 영화 <아임 낫 데어>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했다. 과거에도 음악신 스타들의 밥 딜런 트리뷰트는 있었다. 위의 뮤지션들이 커버한 33곡의 ≪아임 낫 데어≫ 사운드트랙이 매력적인 까닭은 같은 뻔한 트랙들을 가급적 피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밥 딜런의 초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뮤지션들은 각자 자기 재능과 밥 딜런 곡의 본질 사이에서 길을 헤매지 않고 다양한 해석의 지점들을 찾아냈고, 토드 헤인즈와 뮤직 수퍼바이저 랜달 포스터는 앨범 전체의 수록곡 면면을 섬세한 스펙트럼으로 조율해냈다. 같은 희귀 음원의 트랙들과 같은 타 뮤지션들의 커버곡으로 더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넘버들까지 모아 놓은 것. 그것은 토드 헤인즈가 여섯명의 배우에게 각각 다른 시기의 밥 딜런 이미지를 입혀 밥 딜런이라는 인물의 큰 그림을 맞춰보려 한 영화적 시도와도 당연히 부합한 것이다. 미국 최대 음악사이트 ‘올뮤직’의 앨범평은 이렇다. “밥 딜런의 음악 녹음이라는 파워를 견지하면서 이미 존재하는 그것에 대한 신선한 해석의 입장을 지켜낸 음반. 이렇게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다른 앨범들은 거의 하지 못했던 일이다.” 강추 트랙: 특별히 두개. 소닉 유스가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으로 커버한 그리고 2CD 마지막을 닫는 밥 딜런의 다. 첫사랑에 조응하는 사운드트랙 <이토록 뜨거운 순간> The Hottest State | 와이드미디어 | 제시 해리스 제시 해리스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노라 존스란 이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시 해리스는 재즈/포크계열 뮤지션 노라 존스를 하루아침에 슈퍼스타로 만든 데뷔앨범 ≪Come Away With Me≫와 2집 ≪Feels Like Home≫의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다.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1집의 타이틀곡 의 작곡자이기도 한 제시 해리스의 제법 스타일리시하면서도 담백한 포크송이 배우 겸 감독 겸 소설가 에단 호크의 섬세함과 코드의 일치를 봤다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다. 자신이 쓴 동명 소설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하면서 에단 호크는 “영화가 첫사랑에 관한 것이고, 첫사랑에는 사운드트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다. 스물한살 생일을 며칠 앞둔 청년 윌리엄의 뜨거운 첫사랑과 실연 그리고 성장. 감독 말에 따르면 “곁에 늘 라디오를 두고 살” 그 무렵에 누구나 듣고 또 들을 법한 곡들을 제시 해리스가 모두 썼다. 나른한 기타 소리, 노라 존스와 에미루 해리스를 비롯해 캣 파워, 파이스트, 맷 워드, 토니 셔 등 매력적인 인디포크 뮤지션들의 목소리가 오후 봄볕처럼 따사로운 조화를 이룬다. 강추 트랙: 제시 해리스가 직접 부른 심플한 기타 솔로곡 . 노라 존스 스타일로 알려진 제시 해리스의 감성의 정수를 들려주는 트랙이다. “우리가 함께 느낀 모든 것들은 늘 우리와 함께 할 거예요. 늘 함께, 늘 함께, 우리와 있을 거에요.” 인도 여행의 길잡이는 역시 인도 음악 <다즐링 주식회사> The Darjeeling Limited | 유니버설뮤직 | V.A. 웨스 앤더슨도 취향이 분명한 감독 중 하나다. 타란티노만큼 유별난 과시를 하지는 않지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얄 테넌바움> 같은 전작에서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이면 이를 수긍하고도 남을 것이다. 앤더슨이 특히 좋아하는 뮤지션들, 가령 롤링 스톤스나 킨크스, 캣 스티븐스, 니코, 존 레넌 등 록신의 거물들은 멜랑콜리함과 블랙코미디가 버무려진 그의 영화에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인물들이 인생을 깨우치고 조금 어른이 되는 순간을 대변해주곤 한다. 한심한 3형제가 인도 여행을 떠나는 영화 <다즐링 주식회사>의 음악적 선생님은 인도의 전통 음악. 웨스 앤더슨과 그의 절친한 뮤직 슈퍼바이저 랜달 포스터는 인도영화의 거장 샤티야지트 레이 영화에 쓰였던 음악들과 머천트-아이보리 필름이 제작한 영화들에 삽입된 인도 음악들을 무려 11곡이나 뽑아 <다즐링 주식회사> 사운드트랙 안에 넣었다. 킨크스( )와 롤링 스톤스()를 삽입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지만, 이 앨범은 인도 음악에 애착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히 어필할 게 분명하다. 덧붙이면 롤링 스톤스의 삽입곡이 앤더슨 영화의 O.S.T에 정식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강추 트랙: 3형제의 막내가 머물던 슈발리에 호텔의 방을 청승맞게 가득 채운 팝송, 인도 출신 피터 사르쉬테트가 1969년 발표한 곡 다. 심플하지만 중독적인 북구의 선율 <댄 인 러브> Dan in Real Life | EMI | 손드러 레케 예기치 못한 발견이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졸업>에 기여한 바”에 비견될 만큼 영화의 심장과 직결되는 음악을 원했던 피터 해지스 감독은 수백장의 CD를 첩첩이 쌓아놓고 듣던 중 유독 손이 가는 뮤지션을 발견했다. 대가를 기대했던 그가 맞닥뜨린 이름은 바로, 손드러 레케(Sondre Lerche)였다. 발음조차 난해하기 짝이 없는 낯선 이름의 주인공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스물세살의 파릇한 청년. 2002년 데뷔앨범 <>으로 <롤링스톤>이 꼽은 그해의 베스트50에 이름을 올린 뒤 북구의 신성으로 불리던 레케는 곧장 할리우드 초대장을 받았다. “설탕을 뒤집어씌운 듯한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코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그가 완성한 것은 심플한 어쿠스틱 기타 선율을 중심으로 한 포크풍의 음악. 폴 사이먼과 엘리엇 스미스의 중간 어딘가에 떨어질 법한 <댄 인 러브>의 O.S.T는 로드 아일랜드의 별장을 무대로 가족간의 화합을 노래하는 영화의 푸근한 감성과도 완벽한 등호를 그린다. 음반에 수록된 16곡 중 진정한 정수는 레케가 새롭게 작곡한 4개의 보컬곡 . 담백하지만 중독적인 기타 선율과 레케의 부드러운 가성이 일품이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원곡을 재즈풍으로 편곡한 , 열여섯살에 강아지를 위해 작곡했다는 사랑스러운 듀엣곡 (영화의 엔딩에 레케가 직접 출연해 연주하기도 한다) 등 그의 기존 앨범들에 실렸던 곡들 또한 이 새로운 뮤지션의 (어려운) 이름을 뇌리에 새기게 만든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에 비견되는 성취는 몰라도, 발견의 기쁨을 안겨주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강추 트랙: 오리지널 보컬곡 중 하나인 . 비눗방울처럼 맑고 경쾌한 기타 선율이 잰걸음으로 달려가며 심박수를 높이고, 나른하면서도 달콤한 후렴구가 귀에 착 감겨든다. 달콤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음악의 전형 <인챈티드> Enchanted | EMI | 앨런 멘켄 앨런 멘켄은 뭐니뭐니해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음악가’다.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 <포카혼타스>(1995), <노틀담의 꼽추>(1996) 등 할리우드 2D셀애니메이션의 명가 디즈니를 빛낸 자식들 중 적어도 절반은 멘켄의 품에서 나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커리어를 시작한 멘켄의 활동 본거지는 그런데 사실 브로드웨이다. 그의 음악이 디즈니 특유의 언더스코어(인물들의 움직임에 정확히 일치된 음악) 전통을 이으면서도 뮤지컬적인 화법을 끌어와 애니메이션 장르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포장하는 스타일을 갖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등 심금을 울리는 발라드를 써내는 능력도 뛰어나다. <인챈티드>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그러한 멘켄의 특징을 집약시킨 또 하나의 디즈니 음악. 차임벨과 플루트, 현악이 어우러진 꿈처럼 달콤한 스코어는 디즈니의 과거 애니메이션 테마들을 수수께끼처럼 숨겨놓아 찾아 듣게 하는 재미도 있고, 여주인공 에이미 애덤스와 그의 친구들이 부르는 신나는 뮤지컬 사운드는 기분을 절로 띄워준다. 강추 트랙: 신예 싱어송라이터 존 맥러플린이 부른 발라드 . 의 계보를 잇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발라드 트랙이다. 행복 에너지 100% 충전! <헤어 스프레이> Hairspray | 유니버설뮤직 | 마크 셰이먼 당신의 행복 지수를 절정으로 치솟게 할 앨범. 존 워터스의 1988년작 영화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스크린으로 이식된 <헤어 스프레이>의 2007년판 O.S.T는 듣는 내내 발끝을 붙들어매기 힘들 만큼 쾌속의 유쾌함으로 끓어오른다. 등 대표적인 넘버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니키 블론스키의 목소리는 탄산음료처럼 청량하고, <하이스쿨 뮤지컬>로 이미 한 차례 검증받은 잭 에프런,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로 코믹한 방점을 찍는 존 트래볼타가 한데 어울려 순도 100%의 낙천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등 영화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세개의 곡이 수록됐고, 역으로 뮤지컬에는 사용되었으나 영화에서 생략됐던 이 스페셜 트랙으로 추가됐다. 88년 원작 영화의 리키 레이크,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마리사 자렛 위노쿠어, 니키 블론스키까지 3명의 트레이시가 입을 맞추는 은 스크린과 무대를 고루 밟았던 <헤어 스프레이>에 딱 걸맞은 마침표다. 강추 트랙: 엔딩곡인 로 그 이름 그대로 말초신경 끝까지 짜릿하게 자극하는 희열의 난장이다. 니키 블론스키, 잭 에프런, 아만다 바인스, 존 트래볼타 등 메인 캐스트가 총출동한다.

[What's Up] 이젠 극장에서 오페라, 콘서트, 농구까지 본다!

넌 극장에서 영화만 보니? 난 오페라, 콘서트, TV시리즈, 발레, 농구도 본다! TV는 점점 강력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극장과 DVD 수익의 격차는 점차 줄어드는 가운데, VOD에 불법 다운로드까지 적수로 떠오르는 요즘. 관객의 발길을 붙들어매기 위한 극장의 새 단장 노력이 즐비하다. 지난 3월23일 미국 멀티플렉스 체인의 그러한 움직임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북미 최대 영화체인인 AMC와 리갈이 셀린 디온의 콘서트와 <스타트렉>의 연속 방영 등을 진행했고, 오는 4월24일에는 수백개의 극장에서 국제 군악챔피언십(drum corps international world championships)의 하이라이트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 스포츠 중계 역시 빠질 수 없다. 지난해 8월 뉴욕 메츠의 게임을 생중계하여 재미를 본 뉴욕 지그필드 극장은 올해 여름에는 이러한 기회를 더욱 늘릴 계획이며, <할리우드 리포터>는 댈러스 매버릭과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NBA 경기가 댈러스의 극장에서 3D 중계된다고 보도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극장을 통한 고급예술의 대중화가 시도되고 있다. <텔레그래프>의 보도에 의하면, 올해 말부터 로열 오페라와 로열 발레 공연이 전국 60여개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고 한다. 첫 번째 개봉작은 <피가로의 결혼>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멀티플렉스의 이 같은 곁눈질은 “더이상 관객 수의 증가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조치일 뿐 이를 통해 엄청난 수익 증대를 꾀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단이다. 랜드마크 시어터의 고위 간부 테드 문도르프는 “스포츠 경기 생중계 등이 개봉주의 <해리 포터>를 대신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5주차 <해리 포터>라면 또 모르겠다”는 말로 이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