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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의 제작 투자자가 말하는 2002년 8문8답 [3]

"갈수록 양분화, 극단화된다" 명필름 대표 심 재 명 양적성장은 확실히 이룬 것 같다. 제작편수, 개봉편수, 점유율도 올라갔다. 그러나 질적성장 부분은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현재 급변하는 시장상황 속에서 관객의 취향이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 김기덕, 홍상수, 임권택, 이창동 등 기대한 감독들이 좋은 작품을 내놓긴 하지만 여전히 상업적인 주목은 못 이루는 반면 상업적 목적으로 뛰어드는 영화들이 극단적인 흥행몰이를 한다. 갈수록 양분화되고 극단화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제작편수가 20여년 만에 최고를 이루었다는 것. 올해 제작된 한국영화들이 100편에 육박한다고 들었다. 점유율 역시 한국영화가 46%가 넘고, 미국영화가 48%가 넘었다. 특별히 이 사건에 주목하는 것은 자국영화와 미국영화가 영화 시장을 90% 이상 독식한다는 것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면 편식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미국영화든지 한국영화든지 상업영화만이 점유율을 차지하는 셈이다. 성숙하고 건강하게 발전하고 있는지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상업적 경쟁력은 일취월장하고 있는데, 영화 내적인 측면에서 보면 걱정이 많다. 질적 측면에서 보면 결국 하향평준화,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때 한국영화는 안 본다던 시절에서 이제 한국영화를 재미있어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신뢰성 부분에서 신뢰를 쌓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올해는 한마디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한해였다. 2002년까지 명필름이 한해 1.5편 정도 시장에 내놓았다면 올해는 <버스, 정류장> <후아유> 을 포함해 제작 투자한 영화가 5편 정도다. 그러나 많은 편수 속에서 경쟁력 있는 영화를 내놓지 못했던 것이 가장 문제였다. 회사 규모로 볼 때 일년에 1편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3편 정도가 적당하다고 봤는데 결과적으로 리스키한 결과를 낳았다. 2003년 역시 갑작스런 궤도수정은 아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상황에서 제작자로서 치밀하게 고민해야겠다는 자각은 든다. 제작사로서 만드는 모든 영화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했던 거고 2001년에 만들었던 자회사, 이픽처스, 라이트 림 등과의 관계정비라든지 업무보조를 맞춘다는 것 정도 외에는 없었다. 가장 큰 시행착오 흥행이 안 된 거다. <오아시스>다. 흥행과 작품적 평가에서 모두 성공했다는 점이 2002년 개봉작들 중 유별났던 점이었던 것 같다. <집으로…> 역시 그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 했고. 투자심리가 많이 위축되고 투자사들에 구조조정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2001년, 2002년에 투자 결정된 영화가 많기 때문에 내년에도 제작편수는 많을 것 같고 점유율도 떨어지진 않을 것 같다. 흥행은 잘 모르겠지만 <살인의 추억>을 꼽고 싶다. 근래 보기드문 잘 짜여진 시나리오였다. 기대되는 배우들이고,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발전된 연출력을 보여줄 것 같다. 귀추가 주목되는 영화다. "양적으로는 성장, 질적으로는 글쎄..."씨네2000 대표 이 춘 연 올해 등급심의 받은 영화가 지난해 65편에서 95편 안팎으로 늘 것 같다.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취화선> <오아시스> 등 영화제에서 평가받은 성장은 있지만 실질적으로 내수용이 성장했다고 보진 않는다. 코믹영화들, 청소년 대상 영화들에 아류작들이 많이 나오고, 관객은 들었을지 모르지만 질적 성장은 아닌 듯하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아 유 레디> <예스터데이> 같은 대작의 실패다.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 돈 200억∼300억원가량이 그냥 가버렸다. 이게 투자위축을 가져오고 옆의 사람들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형편이 됐다. 그런 시도를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기획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을까. 마치 관객에게 영화계 문제를 핑계대는 것 같지만, 너무 가볍고 시간 때우기 좋은 영화만 찾는 관객의 편식 현상이 우려스럽다. 영화의 다양성면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편식하는 관객의 문제냐, 그걸 자꾸 만드는 영화계쪽의 문제냐 하는 것도 있겠지만…. 내가 오히려 더 ‘서프라이즈’하고 스스로 ‘중독’돼서 1년을 살아온 것 같다. <중독>은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스타들을 가지고 크진 않아도 적당한 성공을 못했다는 건 반성해야 마땅하다. 그 얘기 안에서 인물의 감정을 속이지 않기 위해 너무 주의하다보니 스피드에 매료돼 있는 관객에게 지루하게 다가간 것 같다. 또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비밀>과 유사하다는 논란 같은 게 김을 빼버렸고. 언제나 되든 안 되든 남과 차별되는 작품이나 소재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시기가 늦다보니까 나중에 섞여버린다. <중독>도 마음먹고 1년 안에 해버렸으면 했는데 2년이 넘어버렸다. <오아시스>다. 별 이야기 아닌 것 가지고, 에너지가 느껴진다. 부러운 영화다. 돈의 흐름이 위축돼 있는데 그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내부적으로 제작비를 낮추고, 유통구조를 경제화하고, 또 입장료 부율을 극장 대 배급사 4 대 6, 또는 최소한 4.5 대 5.5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0만명이 봐도 본전이 안 되는 제작비 형편으로는 안 된다. <실미도>는 외국자본을 가지고 한국의 얘기를 한국의 감독이 만드는 경우여서 관심이 간다. <이중간첩>이 어떨지 모르겠고. 한석규가 오랜만에 나오는 것이라…. "질적인 발전이 관객 불렀다" 태흥영화 대표 이 태 원 양적인 측면은 몰라도 질적으로는 확실히 성장했다고 본다. 특히 영화의 퀄리티를 이야기한다면 그건 분명하다. 편집, 컴퓨터그래픽, 녹음, 현상 등 후반작업도 많이 좋아졌다. 한국영화에 꾸준히 관객이 몰리는 것도 이러한 질적인 발전에 따른 것이다. 투자자들이 발길을 돌리는 경향이다. 이것은 영화인들의 문제다. 그동안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낭비가 너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투자자들의 돈을 아껴주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 나는 제작비 명세서를 매일매일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생각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를 이야기한다면 모두 진정한 영화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딴 데 한눈팔지 말고 본업에 열중해야 한다고만 말하겠다. 아니, 그런데 잔치가 끝났다니 오히려 나는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 영화제작에 뛰어든 게 74년이고 84년부터 배급을 했는데, 한국영화가 끝난 것 아니냐는 이야기는 매년 나왔다. 그래도 잘돼왔지 않냐. 정일성 촬영감독은 그러더라. “60년대부터 만날 한국영화가 망한다고 했다”고. 영화도 경제처럼 어떤 흐름 또는 주기가 있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 정점이었고, 지금은 서서히 파고가 떨어지고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단연 <취화선>이 칸에서 상을 받은 것이 보람이자 성공이었다. <취화선> 한편 만들고 무슨 큰소리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야 하는 거지 시행착오는 아니었다. 인상깊은 영화는 <오아시스>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자극이 된 영화가 있다면 <색즉시공>이다. 내 아들(이지승 필름지 대표, 이효승 프로듀서)이 참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윤제균 감독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영화에 대한 감각이 있다. 지난해 영화긴 하지만 비디오로 본 <엽기적인 그녀>도 훌륭하더라. 아주 잘 만들어진 배우의 영화다. 전망이 밝다고 본다. 멀티플렉스는 늘어나고 있고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 들은 이야기인데, 한 설문조사에서 요즘 젊은 한국영화 관객이 외국영화를 잘 안 보는 이유가 자막을 읽기 싫어서라고 하더라. 이 이야기는 젊은 관객이 영화를 오락이란 의미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막조차 읽기 싫어하는 사람이 골치아픈 영화를 보고 싶어하겠나. 한국영화의 호황은 이런 맥락 속에서 나오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만들던 영화를 그대로 만들어야겠지만.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다. 강 감독의 성향에 너무 맞는 영화라고 본다. 태흥의 두 작품 얘기도 해야겠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과 송능한 감독이 신작을 준비 중이다. 왜 주목하냐고 우리 회사 작품이니까.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2002년 올해의 영화인

남자배우 >> 1. 설경구 <공공의 적>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오아시스> <광복절특사> 2. 조재현 <나쁜 남자> 3. 송강호 <복수는 나의 것> 여자배우 >> 1. 문소리 <오아시스> 2. 김정은 <재밌는 영화> <가문의 영광> 3. 김윤진 <예스터데이> <아이언 팜> <밀애> 감독 >> 1. 이창동 <오아시스> 2. 홍상수 <생활의 발견> 3. 임권택 <취화선> / 박찬욱 <복수는 나의 것> 프로듀서 >> 1. 이태원 태흥영화 대표·<취화선> 2. 명계남 이스트필름 대표·<오아시스> 3 황우현 튜브픽처스 대표·<집으로…> 촬영감독 >> 1. 정일성 <취화선> 2. 김병일 <복수는 나의 것> <중독> 3. 최영택 <생활의 발견> <오아시스> 시나리오 >> 1. <오아시스> 이창동 2. <결혼은, 미친 짓이다> 유하(원작 이만교) 3 <복수는 나의 것> 박리다매 / <공공의 적> 백승재·정윤섭·김현정·채윤 자기복제, 자기 진화 올해의 감독 ·각본 이 창 동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을 거치면서 이창동 감독은 ‘이창동적’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자기 스타일을 굳혀가는 것 같았다. 두 영화 모두 자의식 강한 인물의 파멸기였고, 그 이야기가 관객에게 작동하는 방식도 유사했다. 관객의 마음속에 날이 닳아 무뎌진 절망을 환기시켜 반성을 촉구하는 그의 방법은 확실히 유효했다. 그 스타일에 막 익숙해지려고 할 즈음에 이 감독은 예상을 뒤엎었다. 감정이입이 쉽지 않은 사회부적응자들을 내세우고 사랑 이야기로 치면 별반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그들 사이에 끌어들였다.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이라는 업적 이전에, <오아시스>는 이창동 감독의 소재나 어법의 선택범위가 훨씬 넓음을 확인하게 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이 감독은 “좀 두고 보려고 한다”고만 말했다. 이창동 감독 인터뷰˝ 관객 반응 뜻밖˝ 여러 가지 상을 많이 받았는데, 소감은. → 소감 같은 것 얘기 안 했으면 좋겠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관객이 더 쉽게 받아들인다 그럴까, 그게 예상 밖이었다. 관객이 지금 결과보다 훨씬 불편해하고 논란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감동받았다, 좋은 영화다, 그런 대체적인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덜 철저했나, 반성도 좀 되고…. 반성 중에 있다. 오스카 외국어영화상의 한국영화 후보로 선정돼 있다. → 그게 참 예측하기 어렵다.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비용도 비용이고 만만치가 않더라. 어제(현지시각 18일) 회원들 상대로 시사회를 했는데 반응은 못 들었다. 처음 해보니까 여러 가지로 막막하다. 우리가 홍보하고 알리는 채널이 막혀 있다고 할까. 회원들 공개도 안 돼 있고.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미국 시장에 들어가기 좋은 기회니까 다음에 다른 한국영화들 위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경험해보는 거다. <오아시스>에서 제일 큰 실험이었다면 전부 들고찍기를 한 것 같다. 앞으로도 들고찍기를 할 건지. → 영화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괜찮은 것 같았다. 아직 <오아시스>의 영향이 있어서인지 그뒤에 들고찍기를 하지 않고 고정된 카메라로 잘 잡은 화면의 영화들을 보면 약간 거북하더라. 그런 것 보면 감각적으로 좀더 그쪽을 파고 들어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강간장면 등을 두고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 거기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자세히 보지도 않았고. 하지만 무슨 얘긴지 말은 다 들린다. 일일이 대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올해 한국영화 중에 인상깊게 본 게 있는지. → <취화선>은 아주 괜찮은 영화다. 한국 사람들에겐 그 미덕이 눈에 잘 안 띄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미학적으로나 영화문법으로 굉장히 탁월한 점이 있고. 그 영화에서 성취한 것들이 한국 관객에겐 매우 익숙한 것으로 타성화돼서 무덤덤할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잣대로는 뛰어난 것들이 있다. 다음 영화는. → 아직 생각이 없다. 머리에 생각하고 있는 건 있는데 썩 끌리지가 않는다 그럴까. 좀 두고 보려고 한다. 내년 안에는 촬영 들어간다는 게 희망사항이다. 연기를 넘어, 수행을 향해올해의 여자배우 문 소 리 문소리는 “걱정이 앞선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냈다. <오아시스>에서 한공주 역을 맡아 신기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며 베니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비롯, MBC영화상, 춘사영화제, 영평상, 여성영화제, 디렉터스 컷 등 거의 모든 영화상을 휩쓴 그녀치곤 ‘약한 모습’이 아닌가. “아직 신인일 뿐인데 시작을 너무 거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해서 걱정이죠.” <박하사탕>에 이은 두 번째 영화로 평단과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 기쁘긴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말로 들린다. 그녀가 부담을 갖든 말든 <씨네21>의 평자들은 <오아시스>의 문소리를 최고의 수사로 찬사하고 있다. “<오아시스>에서 보여준 문소리의 연기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수행이자 보시”(황진미)라거나 “수수하고 소박하지만 진정성이 전해지는 드문 배우 중 하나”(심영섭)로 꼽기도 했고, “<오아시스>의 공주를 견뎌내는 것,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다”(변성찬)고 극찬하기도 했다. <오아시스>가 문소리에게 준 선물은 여러 개의 트로피와 다채로운 찬사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를 하면서 문소리가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었다. “운동을 하든 악기를 연주하든 욕심이 앞서고 힘이 들어가면 결과가 안 좋은데, 마음을 비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힘을 뺄 때 결과가 잘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때문에 문소리는 자신이 마음을 비우고 힘을 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창동 감독과 명계남 대표를 비롯한 스탭들에게 공을 돌린다. “다들 나를 너무 너그럽게 봐준 것 같아요. 얘는 공주니까, 이러면서 다 이해해주고. 다 그 덕이었던 같아요.” 지금 문소리는 세 번째 영화인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 출연 중이다. 바람난 남편 때문에 착잡해하면서 자신을 스토킹하는 10대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호정 역은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 그냥 영화 처음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려고요.” 길었던 소원, 칸 트로피올해의 프로듀서 이 태 원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이태원 사장은 마음속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귀국 뒤에도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임 감독보다 더 기뻐하는 듯 보였다. 임 감독이 칸에서 상을 받기 전까지 “솔직히 내가 영화 제작하면 몇편이나 더 제작하겠나. 딱 하나 소원이 있다면 그놈의 칸에서 트로피를 임 감독한테 쥐어주는 것”이라고 항상 말해왔던 그였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 흥행하는 것, 그러니까 돈 버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느긋하게 말하는 이태원 사장은 그동안 임권택 감독과 꾸준하게 작업해온 것이 예술영화만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임 감독을 꾸준히 밀어주며 해외영화제로 발길을 옮긴 데 대해 “하던 거니까 한 것이고, 될 것 같으니까 쫓아다닌 것”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한다. 임권택 감독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나니까 “포기하거나 도망칠 수 없고 약이 올라서” 계속 수상권을 향해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대신 그는 “임권택 감독이 늘 고생해왔고, 그 덕에 나도 이렇게 기쁨을 안게 됐다”고 공치사를 임 감독에게 돌린다. 하지만 이런 끈기있는 작업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감독- 프로듀서 파트너십의 모범적인 사례”(김소희)라는 이야기는 지극히 정당하며 최소한의 평가로 보인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올해의 촬영감독 정 일 성 1983년 이후 임권택 감독, 이태원 사장과 함께 오랜 세월 ‘젊은 삼총사’로 활약해온 정일성 촬영감독. 54년부터 조수생활을 시작해 57년 데뷔한 그에게 <취화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 영화상의 공로상 수상 연설에서 그는 “뤼미에르 극장에서 ‘감독상 임권택’이라고 불리워지는 순간, 나도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50년 가까이 한국영화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에게 그만큼 임 감독의 칸 수상이 감격스러웠다는 이야기. 하지만 칸 감독상은 임 감독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산수를 100호짜리 그림에 담아낸 듯한 화면”(황진미)을 “안정된 화면, 정갈한 색감”(이상수)으로 담아낸 그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펄펄 뛰는 생명을 얻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취화선>이 “한국의 풍경을 더이상 한국이 아닌 것처럼 잡아내는 카메라의 신비”(변성찬)를 보여줬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 조선의 화가 장승업을 그린 작품답게 <취화선>은 영상만을 놓고 볼 때 그 자체가 진경산수화라 할 만하다. 이 모두가 현역 최고령 스탭이지만 항상 새로움을 고민하는 그의 열정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한국영화는 지금까지 ‘한국적인 영상’을 가질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이지 “한국 산수를 그렇게 보여줄 사람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김소희)이 틀림없다. ▶ 올해의 배우 설경구,영화속 4명의 설경구간의 가상대화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2002 한국영화 베스트 5

한국영화 베스트 5 - 생활의 발견 “ 홍상수는 항상 정직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순간 홍상수는 메시지를 보낸다.” 정성일 “ 허허실실 윤리학 이부작.” 심영섭 “ 멈춰 있는 듯하면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홍성남 홍상수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은 이제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홍상수식’으로 ‘모방과 흉내’라는 모티브를 다시 한번 집요하게 파고든 영화이다. 전작 <오! 수정>에서부터 조짐을 보인 변화의 가능성은 이 영화를 통해 더욱 밀도 있고 유연해진 구성으로 발전했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이에 대해 “<생활의 발견>에서는 ‘난 과정을 믿고 거기에 건다’던 홍상수의 태도가, 한결 너그러워졌다. 이번에는 집요하게 인물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거나 복마전을 헤매게 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나 변신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마라톤 선수처럼 꾸준하게 달려간다. ‘정체성은 물질적’이란 말대로, 인간의 물질성을 침착하게 관찰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공명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풀어놓고, 본성을 찾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 나온 배우들이, ‘절정의 연기’를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홍상수는 뼈대 위에 찰흙을 계속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인물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한국영화 베스트 5 - 오아시스 “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다시 보게 만든 한국영화.” 김봉석 “ 거창한 도그마에 지배되는 시선 대신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감수성을 가동시켜서 관찰한 결과물.” 김소희 제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대중에게는 감동을, 평단에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오아시스>를 두고, “이기적인 휴머니즘”(정성일)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대다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일반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영화평론가 유운성씨는 “이창동이 영화와 대면하여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그의 첫 번째 ‘영화’”라며 그의 영화적 발전 양상에 주목했고, 심영섭씨는 “거시적 이야기의 구조를 지녔던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이 산산이 부서진 가족과 근대화의 문제를 성찰하는 대의명분에 충만했다면, <오아시스>에 이르러서 이창동은 이러한 대의 명분을 걷고 현재진행형의 미시적인 것들을 천착한다”라고 그 궤적을 밝히는 한편, “인간에게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도 남아 있는 판타지로서, 현실을 되새김질하는 판타지로서, <오아시스>의 판타지는 진흙창에서 피워올린 한 송이 연꽃이 되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한국영화 베스트 5 - 복수는 나의 것 “ 화려하고 치밀하면서도 힘을 잃지 않은 영상언어.” 변성찬 “폭력의 사회학이 아닌 폭력의 자연사 혹은 생물학에 관한 영화.” 황진미 <공동경비구역 JSA>로 장르영화의 대중화를 성공적으로 일궈냈던 박찬욱 감독이 만든, ‘하드 보일드’를 표방한 <복수는 나의 것>은 세밀한 장치와 과감한 생략으로 기존 영화들과의 차별화를 선언하며 영화의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리 마빈의 무표정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냉철함과 크리스토퍼 워컨의 조각 같은 외모가 전달하는 차가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박찬욱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듯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기존의 코믹한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날카로운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유운성씨는 “<복수는 나의 것>은 공감되거나 오해되거나 무시될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 영화다.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윤리학을 고다르의 유물론적 태도로 해체한다, 고 말하면 아마 감독은 웃을 것이다. 그럼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이건 정말이지 올해 여러분이 꼭 봐야 할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강경하게 추천하기도 했다. 한국영화 베스트 5 - 죽어도 좋아 한국영화에서 가장 낯설고 진귀한 체험 가운데 하나. 허문영 사랑이 삶을 살 만하게 만든다는 것에 대한, 그 어떤 픽션영화들보다도 훨씬 절절하고 감동적인 ‘기록’. 홍성남 눈길을 사로잡을 데뷔작이 드물었던 올해, 진정 발견의 기쁨을 준 영화는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였다. 방송사 PD로 일하면서 찍은 다큐멘터리 <사랑>에서 알게 된 70대 노인 박치규, 이순예 부부의 로맨스를 담은 이 영화는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70대 노인의 성과 사랑’을 다뤘다는 사실 자체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지만 선정성은 이 영화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일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몸을 섞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죽어도 좋아>는 사랑이라는 욕망과 감정의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그려낸다. 별다른 플롯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청춘가>의 가사로 챕터를 나누고 시종 다큐멘터리 시점을 유지하면서 감정의 절정을 만들어가는 이 영화의 매력은 일반적인 멜로드라마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이다. <꽃섬>의 감독 송일곤은 <죽어도 좋아>에 관해 이렇게 썼다. “67분,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주인공이 내뱉은 언어들과 그들의 육체의 움직임과 눈물을 흘리게 되는 과정과 노인의 주름진 손등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다. 영화에 보여지는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진실 때문이다.” 한국영화 베스트 5 - 취화선 “ 영웅적인 예술가의 알레고리.” 데이비드 제임스 “ 우리네 산수를 닮은 영화.” 김봉석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리며 예술가의 험난하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아름다운 화폭 안에 담아 보여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제5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문화적 도약을 증명했다. 영화 제작현장을 같이 경험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의 원칙은 “구석에 서 있는 엑스트라일지라도 그의 연기 동선은 그를 주인공으로 세상의 중심에 놓고 움직여라. 그들은 주인공을 보조하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함께 세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적 ‘세상’을 정의해냈으며, “유랑길을 떠나는 장승업이 그 풍경 안에서 걸어가는 장면은 순간적으로 내가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넣은 산수화 안으로 걸어들어간 것이 아닐까, 라는 착시현상이 일어날 정도였다”고 그 미학적 성취도를 술회했다. 외화 베스트10’피아노 치는 여자’에 한 표! 시사회가 있은 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아직 응답자들의 마음에 현의 울림이 남아 있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2002년 국내 개봉 외화 가운데 최고 평점을 얻었다. <피아니스트>는 정성일, 유운성, 심영섭, 이성욱(<한겨레21>) 등 평자에게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다. 2위는 2002년 극장가를 열고 닫은 한쌍의 반지가 차지했다. “영화가 ‘기계의 딸’로 불리는 이유를 알겠지”(박평식) “바그너적 장엄과 과잉의 스펙터클”(김소희)이라는 코멘트가 붙었다. 3위는 10대 영화 유행 끝에 돋보였던 “10대의 종말에 대한 슬픈 백서”(이상수) <판타스틱 소녀백서>가 차지했고 4위는 많은 응답자의 순위에서 고루 5위권 안에 포함된 코언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 돌아갔다. “맞다,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는 말은”이라고 박평식 평론가는 호응했다. 1. 피아니스트2. 반지의 제왕3. 판타스틱 소녀백서4.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5.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6. 로얄 테넌바움7.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헤드윅9. 아귀레, 신의 분노10. 소림축구 93점 85점 84점 76점 66점 53점 48점 38점 37점 미야자키 하야오의 동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5위에 올랐고 6위는 미국 인디의 새로운 재능 웨스 앤더슨의 국내 첫 개봉작 <로얄 테넌바움>이 차지해 극장에서의 설움을 달랬다. 공동 7위에 선정된 두 영화는 보색대비를 이룬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감동은 단 한번이다. 그런데 나머지 중 버릴 장면들은 더욱 없다.”(정한석), <헤드윅>은 “고전 멜로의 전통 안에 민족, 성, 하위문화 담론을 담고 그에 걸맞은 스타일의 구사가 돋보였던 영화”(변성찬)라는 찬사를 들었다. 9위는 “서방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가장 통렬한 자기 성찰”(이상수) <아귀레, 신의 분노>가 차지했고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2002년의 10번째 영화로 뽑혔다. <소림축구>를 순위 꼭대기에 올린 황진미(영화 칼럼니스트)는 “전 지구적 보편성을 지닌 축구, 무예, 코미디를 통해 전 우주적 보편성을 지닌 건강과 사랑, 선을 추구한 영화”라고 품평했다. 이 밖에 <바운스> <칸다하르> <디 아더스> <위대한 독재자> <공각기동대> 등이 아슬아슬하게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김혜리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씨네21>의 2002 외화 비망록 [2]

최고의 캐스팅 최악의 캐스팅 우리는 영화가 인간을 존중하길 요구한다. 특히 실재한 인물을 다루는 전기영화일 때 기대치는 한없이 치솟는다. 더블린 출신 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영문학자 존 베일리의 오래 지속된 연애를 그린 <아이리스>의 주디 덴치, 짐 브로드벤트 커플은 머독과 베일리라는 두 인물뿐 아니라 둘 사이의 공기까지 맑은 거울에 비춰냈다. 반면 원작의 캐릭터를 ‘연쇄살인’한 캐스팅은 <레드 드래곤>의 에드워드 노튼과 랭프 파인즈. 노튼은 악과 교감하는 자기 혈관 속의 어둠을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를 싸움터로 몰아세우는 FBI 요원 그레이엄의 신경증에 감염되는 데 실패했고, 랠프 파인즈는 학대당한 트라우마와 외모 콤플렉스의 노예가 된 돌로하이드가 되기에는 거북살스럽게 잘생긴 사내였다. 올해의 동물: 거미 2002년은 아라크노포비아(거미공포증) 환자에게는 길고 눅눅한 악몽이었다. 올해 영화계를 접수한 동물은 여름 이후 쉬지 않고 은막 위에서 스멀거린 타란튤라의 후예들. <스파이더 맨>은 슈퍼 거미에게 물린 고교생 토비 맥과이어의 새로운 능력을 통해 거미가 얼마나 멋진 동물인지 널리 알렸다. <프릭스>의 유독성 폐기물에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거미떼와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아라고그 무리는 왠지 닮아보여 워너브러더스의 재활용 전략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망막을 더듬는 로보틱 거미도 뺄 수 없다. 붕어빵 상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는 데이비드 베컴이 나오지 않는다. 베컴과 부인 빅토리아의 대역 뒷모습이 마지막 장면에 섭섭하게 공항을 지나갈 뿐. 세 예지자의 예언이 분열될 때 소수자 의견을 기록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는 필립 K. 딕의 원작과 달리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타이틀다운 비중을 갖지 못했다. 베스트 의상 브래드 피트가 ‘가을의 전설’ 의류 브랜드를 연다고 했었나 여성 관객에게 “내 남자친구에게 입히고 싶은 옷”으로 몰표를 얻는 올해의 의상은 <어바웃 어 보이>의 휴 그랜트 옷장에서 나왔다. 아무렇게나 만진 머리, 집히는 대로 걸친 옷처럼 보이지만 막대한 유산으로 유지한 스타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반면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원색 하와이안 셔츠는 꼬마의 ‘엄마 찾아 삼만리’ 보호자로서는 매우 눈치없는 코디네이션이었다. 올해의 의상상은 <로얄 테넌바움>의 천재지변에 가까운 천재 집안 뉴욕의 테넌바움 가족이 단체 수상했다. 기네스 팰트로의 팬더형 눈화장과 라코스테 원피스, 언제든 대피 5분 전인 벤 스틸러 삼부자의 빨강색 아디다스 추리닝에 이웃집 작가 일라이의 카우보이 룩까지 섞어놓고 보면 <섹스 & 시티>의 이른바 뉴욕 스타일은 몹시 지루하게 느껴진다. 최고의 허무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좋을지. <쓰리> 중 세 번째 에피소드 <고잉홈>의 한의사 여명은 3년간의 지극한 간호가 겨우 빛을 봐 죽은 아내가 되살아나는 날 연행된다. 독약 들이켜는 타이밍을 잘못 잡았던 셰익스피어의 두 연인이 이만큼 억울했을까.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주인공 베흐자드도 올해의 ‘황금삽’ 트로피감. 외진 마을에 출장온 탓에 베흐자드는 잘 안 터지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멀리 높은 언덕 꼭대기로 숨이 턱이 닿게 차를 몬다. 하지만 상사의 지시를 고대하는 그의 귓전에 울리는 건 “애비냐” 하는 어머니 목소리. <위대한 비상>의 철새들을 기다리는 허무는 거의 장엄하다. 팔이 짧아 뻔히 눈뜬 채 알을 도둑맞는 펭귄, 수만km를 고통스럽게 비행한 끝에 폐유에 발이 잠겨 레저 생활을 즐기는 사냥꾼 총에 맞아 추락하는 새들의 퍼덕임 속에 생은 고요히 계속된다. 베스트 에로티시즘 성(性)은 어둡고 습한 그 무엇이 아니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이 투 마마>의 대담한 섹스장면은 포르노적 상상력도 얼마나 유쾌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목욕타월만 두르고 샴푸를 빌리러 간 소년에게 여인이 말한다. “타월 벗어봐.” “가리지마.” “금방 커지네.” “한번 크게 해봐.” “도와줘” “내 가슴 볼래” “나도 좀 해줘.” 포르노가 무색한 대사지만 <이 투 마마>의 성적 판타지는 짜릿하면서도 다음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오프닝의 섹스장면에서 여자친구에게 “여행 가서 이탈리아놈들과 안 잘 거지”라고 묻는 순진함과 풋풋함이 시종 유지되는 탓이다. <이 투 마마>에 겨룰 만한 섹스장면은 <몬스터 볼> 정도. “내 몸이라도 즐겁게 해달라”는 대사는 할리 베리의 몸매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 만큼() 처연하다. 섹스신은 없지만 <워터 보이즈>의 소년 수중발레단은 여성 관객에게 <반지의 제왕> 못지않은 스펙터클을 서비스한다. 그야말로 ‘육체의 향연’이다. 최고의 팀워크 최악의 팀워크 스티븐 소더버그의 완전범죄 계획에 동참한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의 스타 군단은 <오션스 일레븐> 극중에서도 절도계의 드림팀이었다. 저마다 다른 장기와 단점을 지닌 남남끼리 프로젝트 팀으로 잠시 모여 들려주는 완벽한 잼 세션의 상쾌한 미학을 <오션스 일레븐>은 보여줬다. 방과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구를 구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파워 퍼프 걸>의 시끄러운 세 소녀도 스파이스 걸이 떠난 땅에서 걸 파워의 기치를 세웠다. 콩가루 팀워크의 대표는 한 감독이 “못 만든 옴니버스의 모범사례”라고 일컬은 <텐 미니츠 트럼펫>. 마치 각 감독의 영화에서 몇분씩 빌려와 이어붙인 듯하다는 험구를 들었다. 죽느냐 죽이느냐 게임에 갇힌, 그러나 끝내 패배하지 않았던 <배틀 로얄>의 불운한 클라스메이트들은 어느 쪽으로나 기억할 만하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투 윅스 노티스> 뉴욕 시사기 [4] - 휴 그랜트 인터뷰

눈웃음, 고른 치아, 금발 곱슬머리,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 세월의 두께로도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고 있는 휴 그랜트. 옥스퍼드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영국 배우다운 지적인 분위기 또한 잃지 않고 있었다. - 플레이보이 역을 즐기는 편인가. = 그런 것 같다. 관객이 나의 플레이보이 연기를 보고 즐거워한다. 또 하나, 그런 유형은 내가 스스로 택해서 하는 역할이다. 카우보이나 액션히어로 등과 비교했을 때, 나의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캐릭터이므로 주로 맡게 되는 것 같다. - <어바웃 어 보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투 위크 노티스>의 플레이보이들은 모두 유형이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당신도 바람둥이인가. = 아니, 전혀 아니다. 루머나 스캔들에 대해 별다른 의견은 없다. 나의 의무는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의 공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쁜 기사가 나오면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내가 그걸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없기 때문에 그냥 웃고 만다. - 제임스 본드 역할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액션영화를 찍을 계획은 없는가. = 고전적인 스타일로 하면 흥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칵테일과 시가를 물고 다니는 남녀차별주의자, 여자를 함부로 다루는 냉전시대의 인물이 원래의 제임스 본드이다. 하지만 현대의 제임스 본드는 액션에 과대 집중되어 있다. 만일 예전처럼 스턴트를 줄이고 로맨틱한 인물로 돌아간다면 해볼 의향도 있다. - 코미디 연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코미디에 대한 약간의 본능이라도 있어야 연기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시트콤의 배우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연기력이 향상되지 않는가. - 연기를 그만두고 시나리오 작업만 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다시 연기 세계로 돌아온 이유는. =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은퇴에 대한 생각은 있지만, 좋은 역할에 대한 제안 때문에 아직 망설이는 중이다. 그러나 정점에 있을 때 은퇴할 것이다. -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있는 장면은. = 마지막 신. 루시가 중국 요리를 시켜 먹는 장면인데, 원래 없었다가 나중에 생긴 것이다. 원래는 내가 일하러 나가지 않는 날이었는데, 코니 아일랜드로 가서 감독에게 제안해 즉석에서 만든 장면이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음에 든다.

<투 윅스 노티스> 뉴욕 시사기 [2]

<미스 에이전트>와 <포스 오브 네이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마크 로렌스는 이 작품으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브루클린에서 자랐으며 뉴욕대 법대 출신인 감독은 자신의 의식과 경험을 루시라는 인물을 통해 전달하고자 노력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루시는 명문대 출신이면서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고향에서 궁상스럽게 살고 있는가 하면, 조지라는 남자주인공의 이름을 가지고 부시를 비웃는다. 감독은 시민문화회관을 지키려는 루시의 1인 시위를 영화 첫 시퀀스에 배치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뉴욕의 하늘을 나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크라이슬러 빌딩의 역사를 찬찬히 읊도록 한다. 이 영화는 뉴욕이라는 독특한 배경 세트가 로맨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도록 조직된, 뉴욕에 보내는 러브레터이다. 조지의 회사인 웨이드 코포레이션과 조지가 이용하는 호텔 건물들이 위치한 화려한 맨해튼 중심가 빌딩라인과 루시가 기거하는 브루클린의 코니 아일랜드의 한적한 해변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정반대의 성격과 배경의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두 장소는 뉴욕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조화를 이루며 한데 어울린다. 마크 로렌스는 이전 두 작품 모두 샌드라 불럭과 함께 작업했다. 이번에도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샌드라 불럭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구성했다고 한다. 최근 몇년간 배우뿐만 아니라 제작자로도 활발히 활약하고 있는 샌드라 불럭은 이 영화가 제작자 필모그래피의 일곱번째에 해당한다. 자신과 휴 그랜트 사이의 로맨스에 대한 언급을 완강하게 회피하는 휴 그랜트와 달리, 샌드라 불럭은 이 영화를 둘이 염문을 뿌리던 당시에 기획했음을 당당히 밝혔다. 인터뷰장에서도 그 말괄량이 기질을, 시종 좌중을 압도하는 말솜씨와 유머로 그대로 드러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존재가 있었으니. 루시의 연적이자 스테레오 타입화된 금발의 악녀, 준 카터로 출연하는 알리시아 위트이다.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데이비드 린치의 <듄>, 쿠엔틴 타란티노의 <포룸>, 존 워터스의 <세실 B. 드멘티드>, 카메론 크로의 <바닐라 스카이> 등 할리우드 작가감독의 영화와 선댄스에서 호평을 받은 <펀> <플레잉 모나리자> 등이 눈에 띈다. IQ가 180이고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녀는 천재소녀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고 했다. 그런 배역이 주는 이미지에 걸맞게 마틴 스코시즈를 최고의 감독으로 꼽는가 하면, 주디 덴치를 함께 꼭 공연하고픈 영화인이라고 말했다. 또 최고의 배우로 줄리언 무어를 언급했다. “그저그런 금발 미인에서 몇십년에 걸쳐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노력형의 연기파 배우”라고 극찬하며 줄리언 무어의 필모그래피를 줄줄이 뀄다. 가만히 보니, 인상이나 맵시, 말투가 줄리언 무어와 많이 닮아 있었다. 비록 이 영화에서 그리 매력있는 조연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볼 가치가 있는 똑똑하고 자의식 강한 배우였다. “당신은 지구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일 거예요.” “당신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보기라도 했단 말이죠” 하는 식의 스크루볼코미디인 <투 윅스 노티스>는 지위나 재력이나 매너나 외모면에서 보면 매력적인 왕자와 미운 오리 새끼의 로맨스인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마법에 걸린 개구리 왕자와 아름다운 백조의 사랑 이야기라고 재명명해야 할 것이다. 외로움에 늘 중국 음식을 3인분 이상 시켜먹고 아스피린을 달고 사는 가련한 여인이지만 애타게 혼자서라도 아름다운 시민회관을 사수하려 하고 시민봉사센터에서 기꺼이 일하는 씩씩한 변호사와, 화려함만을 쫓아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데 인색했던 철없고 무책임한 바람둥이 재벌은 그렇게 위치를 뒤바꾼다.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로맨틱코미디 <투 윅스 노티스>는 미국에서 12월20일 개봉해 첫 주말 박스 오피스 2위에 오르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올란도 블룸

올란도 블룸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갈색눈과 머리카락, 어두운 피부를 가진 블룸이 거리를 걸어갈 때면 창백한 금발의 엘프 레골라스는 이 앳된 청년을 바람처럼 통과해 중간계의 아득한 시간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손목 위엔 지워지지 않는, “엘프의 생명처럼 영원한” 문신 하나가 엘프 언어로 새겨져 있다. 드라마스쿨을 졸업하기 이틀 전 <반지의 제왕> 캐스팅 소식을 들은 행운의 젊은이. 세상과 동떨어진 채,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젊음과 그동안 살아온 2천년 세월이 주는 초월을 동시에 담아야 했던 그는 마치 영원의 위험성과 무게를 알고 있는 것처럼 경고한다. “문신을 할 땐 많이 생각해야 해요. 영원히 지속되는 거니까요. 영·원·히.” 중간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은 오래된 존재 엘프로 열여덟달을 살았고, 유물과도 같은 배우 크리스토퍼 리를 비롯해 많은 선배들과 뉴질랜드를 여행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숱한 캐스팅 제의를 물리치고 3년 동안 드라마스쿨에 은둔했던 블룸은 천성처럼 타고난 인내를 태고의 용광로 속에서 한층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블룸은 <슈퍼맨> 속의 슈퍼맨이 사실은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전기영화 <와일드>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고전적인 골격과 호감을 주는 눈동자 덕분에 기대주로 떠오르는 듯했지만, “내게 필요한 건 에이전트가 아니라 훈련”이라면서 연기학교 교문 안으로 고집스럽게 걸어들어갔다. <갈매기> <트로이 여인들> <십이야> 등이 그 시절 블룸이 출연했던 연극들. 블룸은 꺾이지 않는 기상을 가진 청년답게 <반지의 제왕> 오디션에서 오만한 왕자 보로미르의 대사를 읽었지만, 돌아온 역은 섬세하고 예민하며 흔들리지 않는 심성을 소유한 엘프족의 전사였다. 어떤 면에서 레골라스는 블룸의 육체가 겪은 상처들과는 정반대편에 선 인물이다. 반지원정대와 나란히 고난을 헤쳐나오면서도 홀로 청결한 레골라스와 달리, 블룸은 3층에서 떨어져 불구가 될 뻔했고 갈비뼈와 팔, 두 다리, 손가락, 발가락까지 부러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등이 부러져 다시는 걷지 못하리라는 진단을 받았던 블룸은 엘프 여왕 갈라드리엘의 치료약이라도 받은 것처럼 12일 뒤 제발로 병원에서 걸어나왔다. 신의 보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 블룸이 따내려 했던 인물은 헬리콥터에서 추락해 척추를 다치는 레인저 대원.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더니 역할을 줬어요. 정말 행운이 따르나봐요.” 주문을 무시한 웨이터에게 싫은 소리도 못할 만큼 선량한 블룸은 투명한 보호막에 휘감긴 듯 행운 속에 성장해왔다. 비중있는 출연작이라곤 <반지의 제왕>뿐이었던 블룸은 2003년에만 세편의 영화에 주연급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그러나 1년을 더 기다리면 이 미소년의 가치를 확인할 영화를 한편 더 볼 수 있다.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로 대결할 <트로이>는 블룸에게 여신들이 전세계를 뒤져 찾아낸 아름다운 청년 파리스의 자리를 배정했다. 트로이전쟁을 불렀고 여인 치마폭에 싸인 나약한 남자로 경멸받지만 누구도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었던 파리스. 살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남자 파리스는 레골라스의 금발과 함께 블룸의 빛을 더해줄 것이다.

미소는 애수에 젖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간이란 참 묘하다. 시계 속의 초침은 늘 일정한 간격으로 원을 만들어가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시간의 속도감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어떤 선배가 얘기해준 ‘세월은 나이의 속도만큼 흐른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난 지금 시속 32km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거다. 이쯤에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 ‘난 무엇을 타고 질주하고 있는가’이다. 엔진 좋은 자동차는 아닌 것 같고, 무섭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더더욱 아니고… 아마도 ‘자전거’인 것 같다. 두 다리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고, 머리와 가슴은 앞을 향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중심을 잡아야 하는. 힘껏 밟아 동력을 내지 않으면 멈추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시속 32km로 질주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나이를 훨씬 넘는 속도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주어지기도 한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철부지 갱들. 그들에겐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막아줄 부모나 가족이 없었다. 악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밟아도 무섭게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누들스와 친구들은 기꺼이 오른다. 그러나 대장격이었던 ‘누들스’가 감옥에 수감된 뒤 친구들과 누들스의 삶엔 커다란 간격이 벌어진다. 출소한 그의 앞엔 리무진을 대기한 채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있는 맥스가 서 있다. 친구들과의 반가운 재회도 잠시, 누들스는 맥스의 제안으로 다이아몬드를 터는 데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맥스와 친구들은 예전에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를 턴 대가로 돈을 받은 뒤 기관총을 난사하는 친구들. 누들스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맥스와 짝눈, 팻시는 어느새 범죄와 폭력의 세계로 훌쩍 떠나 있다. 나이에 버거운 속도를 내기 위해 질주하면서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누들스는 당황한다. 그러나 악당이 되지 않으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세상, 비열한 거리. 누들스는 방황하기 시작하고 믿었던 맥스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더니 급기야는 친구들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친구들의 비극적인 죽음 뒤 35년 동안 도피했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백발의 누들스는, 그 옛날 데보라를 훔쳐보던 화장실 벽구멍 저 너머, 어린 시절의 아득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시계를 훔치면서 시작된 맥스와의 첫 만남, 아무도 없던 식당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데보라와 마주했던 그 설렘, 돌아가며 페기와 몹쓸 짓 하는 녀석들을 기다리며 옥상에서 느끼던 씁쓸함, 단돈 1달러 때문에 자릿세를 못낸 신문 가판대에 불을 지르던 무모함. 5센트하는 크림케이크조차 군침 흘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던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짝눈이 불어주는 경쾌한 팬플루트 소리만큼이나 그들에겐 희망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 자욱한 건물 아래 휘파람 불며 씩씩하게 거리를 활보할 때까지만 해도, 이 철부지 갱들은 몇분 뒤 다가올 비극을 알지 못했다. 버그가 나타났다며 도망가라고 소리지르는 꼬맹이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뛰어가던 등뒤로 울린 한발의 총성. 누들스는 꼬맹이를 죽인 악당 버그의 몸에 몇번이고 칼을 쑤시고야 만다…. 대공황과 금주법으로 대변되던 어둡고 습한 30년대의 미국은, 5명의 소년들에겐 그렇게 잔인했다. 플래시백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풍경을 오가며 슬픈 시대를 비장하게 그려낸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연출과 기억 저편에서 아련하게 울려퍼지듯 깊이있는 애수로 가슴을 뒤흔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이 최상의 하모니를 이루었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로버트 드 니로의 미소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미완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닿지 못한 인연의 슬픔과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비극의 그 처절함을 너무나 잘 표현해준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로버트 드 니로보다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력적인 알 파치노를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보여준 그 미소는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100만달러짜리 웃음이었다. 세상은 마치 시속 2002km로 달려가듯 빠르게 변한다. 영화 초반에 마치 로버트 드 니로의 긴장된 심리를 대변하듯 신경질적으로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내 귓가를 울린다. 그럴 땐 질주를 잠시 멈추고, 짝눈이 불어주던 팬플루트 소리에 맞춰 가볍게 행진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고 이제 시속 33km를 달려야 할 올 한해. 멈춤과 진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두팔을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향해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자전거를 잘 탔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면, 다이아몬드를 훔쳐라! <스턴트맨>

영화 <스턴트맨>은 사랑하는 연인(홍은희)을 지키려는 오토바이 스턴트맨 현태(김명민)와 다이아몬드를 찾으려는 형사(박용우), 이들을 이용해 다이아몬드를 훔치려는 히트(조재현)가 한판 승부를 벌이는 논스톱 코믹액션물이다. 조재현은 이번 역할을 통해 광기어린 눈빛과 차가운 미소, 고난도 오토바이 솜씨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영화에 첫 출연인 홍은희는 우연히 대형 범죄에 휘말린 미용실 보조 유진 역으로 톡톡 튀는 발랄함과 애교가 돋보이는 귀여운 말괄량이다. 오토바이 추격신 등 고난도 장면을 위해 김명민과 박용우는 촬영 전부터 서울액션스쿨에서 훈련을 받아왔다. 이날 촬영은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히트에게 인질로 잡힌 유진을 구하기 위해 현태가 다이아몬드가 든 가방과 유진을 맞교환하는 장면이다. 바람도 매서운 한겨울에 한여름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모든 배우와 단역들이 모두 반팔차림을 해야 했다. 더군다나 김명민은 얼마 전 극중 오토바이 액션촬영 중 오른쪽 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액션훈련 당시에도 오토바이가 전복돼 턱을 아홉 바늘 꿰매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트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촬영을 강행하다 다시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60억원의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 <스턴트맨>(감독 김성홍, 제작 스튜디오플러스)은 내년 초 개봉예정이다. 사진·글 이혜정

마블이 낳은 또 하나의 영웅,<데어데블>

<엑스맨>의 돌연변이 영웅들이 할리우드의 박스오피스를 호령한 뒤,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 패밀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이려는 할리우드 메이저들의 잇단 러브콜이 쏟아졌기 때문. 만화 시장에서야 이미 60년대부터 DC코믹스의 슈퍼맨, 배트맨과 자웅을 겨루는 스타였지만, 상대적으로 결함과 그늘이 많은 마블의 영웅들이 스크린의 환대를 받은 것은 근래의 일이다. 흥행대전에서 엑스맨을 능가하는 활약을 펼친 스파이더맨의 뒤를 잇는 마블의 차기 기대주는 데어데블. 데어데블은 마블의 패밀리 중에서도 유난히 어두운 영웅이다. 어릴 때 지나가는 트럭에서 튀어나온 방사능 폐기물에 노출되는 바람에 실명한 대신,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이 초인적으로 발달하게 된 ‘불완전한 재능’의 소유자. 범죄왕 킹핀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로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면서 낮에는 변호사 매트 머독으로, 밤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란 이름의 데어데블로 헬스 키친의 음습한 골목을 지키며 범죄와의 외로운 싸움을 벌인다. 우연히 만난 엘렉트라에게 사랑의 온기를 느끼기도 하지만, 킹핀 일당의 농간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오해를 사면서 한가닥 희망마저 위태로워진다. <데어데블>은 마블의 영웅들 다수와 마찬가지로 스탠 리의 이야기와 캐릭터에 바탕한 만화. 1964년부터 연재되며 <스파이더 맨>과 동시대를 향유했던 작품이다. 붉은 가죽 소재의 복장에 특수 곤봉을 들고 밤거리를 누비는 데어데블은, 만화적인 상상력이 뒷받침된 스펙터클과 더불어 장애와 결핍감을 딛고 일어선 만큼 인간적인 영웅담을 들려줄 듯. <사이먼 버치>를 연출했던 마크 스티븐 존슨이 연출을 맡았고, 벤 애플렉이 데어데블을, <그린 마일>의 선량한 흑인 마이클 클라크 던컨이 근육질의 악당 킹핀으로 출연한다. 황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