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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전영객잔] 애장의 욕망이 일으킨 일대 사건

유년 시절의 영화관람 추억을 마침내 막강한 자본에 힘입어 한편의 작품으로 복원해내는 것이 근래 할리우드 재주꾼들의 추세 중 하나다. 그런 일련의 출현에 관해 개인적으로는 ‘애장(愛藏)의 영화’라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 부르고 있다. 내게는 <스피드 레이서>도 그중 하나의 결과물로 보이며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여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말하는 애장이란 우리가 애장품이라고 말할 때의 사전적 의미 ‘소중히 간직함’ 그대로이며, 애장의 영화란 유년의 시절을 사로잡은 대상을 평생 소중히 간직해오다 성인이 되어서 혹은 더 나아가 영화감독이 되어서 마침내 작품으로 실현하고 마는 소유와 보존과 복원의 프로젝트들을 말한다. <스피드 레이서>의 워쇼스키 형제를 비롯하여 재주와 기회를 겸비한 총아들 사이에서 이런 실현의 욕망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영화를 애장하는 몇가지 방법 애장의 영화 계열에서 동시대에 가장 전위적이며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그가 자신의 애장하는 것들만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것은 오래됐고 우리도 그의 영화의 특성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타란티노가 그의 성향에 버금가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뭉쳐 각각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를 만들어 ‘그라인드 하우스’(선정적이고 질 낮은 B급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심야 상영관)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옴니버스 프로젝트에는 한 가지 추가되는 특징이 있다. <데쓰 프루프>에서 타란티노가 애장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장르지만, 이 때 타란티노는 그 장르의 성격 자체를 넘어 그걸 즐기는 관람의 상태를 더 애장한다. 예컨대 그는 그 시절에 소년 타란티노가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영화를 보며 느꼈을 법한 흥분을 지금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여 선택된 전략은 필름의 상태를 조악하고 훼손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이건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장르가 원래적으로 주는 내용과 형식의 퇴폐적 자질과는 무관하다. 스크래치 가득한 질 나쁜 화면, 툭툭 끊기는 릴의 불안정한 상태 등을 연출하여 ‘지금 당신은 그라인드 하우스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유혹한다. 타란티노의 목적은 우리의 관람을 퇴행시키는 것이며 그 퇴행의 목적은 자신이 겪었던 관람 경험의 순결한 복원에 있다. 애장의 영화 계열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도 될 만한 피터 잭슨은 어린 날 본 <킹콩>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반지의 제왕> 삼부작이라는 거대 에픽이 끝나자 <킹콩>을 차기 프로젝트로 택했다. 원작과 차이가 있다면 혹은 그동안 수차례 시도된 다른 연출자들과 달랐던 건 거대한 물량과 에너지 그리고 묘사력으로 어떤 영화와도 비교되지 않을 완성도 면에서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태도였다. 피터 잭슨은 <킹콩>을 어느 영화관에서 어떤 팝콘을 먹으며 보았는지 애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킹콩>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애장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애장품인 <킹콩>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자신이 시도한 이후 누구도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하고 싶어한다. 타란티노가 자신의 관람의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그 소유의 순결성을 과시할 때 피터 잭슨은 텍스트의 높은 완성도에 공을 들여 소유권의 완성을 마무리하려 한다.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미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영원한 소유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 등의 몇몇 영화를‘오마주영화’라고 쉽게 부를 수 없는 이유 또는 스필버그-루카스 세대와의 차이는 스필버그-루카스가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영화에서 무언가를‘배웠다’고 생각하는 대신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은 그것들에서 무언가를‘가졌다’(소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타워즈>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 바치는 헌사라면, 오마주 영화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늘 어떤 존경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소유권의 주장이 더 강하게 느껴지며 그리고 그 소유권이 주장될 때 공통적으로 놀아보는 것, 유희의 확장 가능성도 항시 크게 부각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B급 장르에, 피터 잭슨이 판타지 장르에 좀더 심취해 있다면 애장의 영화 계열 작가로서 빼놓지 말아야 할 워쇼스키 형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에 놓고 홍콩 갱스터영화와 쿵후영화의 기호들을 자력처럼 모아 유희한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매트릭스>라는 영화이며 이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마치고 <킹콩>을 만든 것처럼 <매트릭스> 삼부작을 끝내자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었다. 1967년 일본에서 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방영됐을 때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큰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스피드 레이서>에 대한 기억을 워쇼스키 형제도 잊지 않고 되살려낸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에 모아지는 기대는 적지 않았고 과연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워쇼스키 형제가 거대한 애장품을 선사할 것이며 흥행에도 성공할 것인가, 모두들 기대했다. 촌스럽고 유아적인 것이 전부인가? <스피드 레이서>에 관한 본격적인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제기된다. 그리고 질문을 끌어낸 결정적인 계기는 예상치 못한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 부진이다. 영화광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문화권에서 애장의 영화나 오마주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는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스피드 레이서>의 경우는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의 오랜만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좀더 선전이 기대됐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예상보다 못한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전국 300개 이상의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아이언 맨>에 밀리며 선전한다고 말하기 힘든 정도다. 왜 그럴까?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을 막는 어떤 거부감 또는 어떤 저항선이 있는 걸까. 그건 무엇일까. 흥행의 성공 유무를 산업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이 흥행 전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스피드 레이서>의 진실에 대해 좀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영화를 본 관객은 제 각각의 이유를 말한다. 부정적인 반응은 대략 몇 가지로 추려진다. 이야기가 없다. 너무 현란하기만 하다. 혹은 너무 촌스럽고 유아적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의견들이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 부진을 설명하는 온전한 이유가 될 것인가. 과연 이 표현들은 맞는 것일까. 이야기가 없는데 큰 흥행을 한 영화를 알고 있다. <디 워>는 지난해 국내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였으며, <스피드 레이서>는 <디 워>의 전체 관람가와 유사한 수준의 12세 이상 관람가다. 서사가 단순하다는 건 그러니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스피드 레이서>의 CGI 기술은 <디 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실로 놀랍다. 만약 CGI의 놀라운 기술력이 관객을 유혹할 수 있는 무기라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많은 관객을 모아야 할 것이다. 현란하기만 해서 싫다는 반응도 의아하다. 부분적으로는 <스피드 레이서> 못지않게 현란했던 <트랜스포머>는 500만 관객을 넘었으며 이 영화를 본 호사가들 중 일부는 이제 우리가 영화를 보는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며 감격할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의아한 건 <스피드 레이서>를 보고 촌스럽다, 유아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스피드 레이서>는 촌스러우며 유아적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반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만 말하고 나면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남는다. 예컨대 <스피드 레이서>는 정말 촌스러운가 혹은 유아적인가. 그보다는 혹시 낯설고 불편하고 어렵고 모호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그 낯섦, 불편함, 어려움, 모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이들은 자기들의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게다가 <매트릭스>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워쇼스키 형제가 우리를 실망시켰다며 씁쓸해한다. 누군가는 의심할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워쇼스키 형제 그들은 아이도, 어른도, SF의 마니아들도 심지어는 철학자와 미학자들까지 매료시킨 대중문화의 네오가 아니던가, 라고.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 1편을 만들었을 때 대개 저돌적인 철학적 모험가이지만 때로는 철학계의 약장수인 슬라보예 지젝은“매트릭스는 일종의 로르샤흐 검사의 구실을 하는 영화이지 않은가”라고 감탄하며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의 관점에 부합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 영화의 함의에 철학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뛰어든 수많은 논평자들과 철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라캉주의자들과 푸랑크푸르트학파와 뉴에이지 운동그룹, 혹은 플라톤 주의자들이 제각각 자기의 철학적 명제에 기대어 이 영화를 로르샤흐 검사지 삼고 있음을 주장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매트릭스>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카피처럼 영화가 무엇을 보여줬던 그 이상의 철학적 개입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지젝도 2003년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개봉하기 전 이미 2002년에 출간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원제는 <매트릭스와 철학>)에 실린 바로 그 글 안에서 “<매트릭스>의 속편들에서 우리는 아마도 ‘진실의 사막’ 역시 매트릭스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그의 예지력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화 속에서 모피어스가 “자넨 꿈나라에서 살았었네. 이게 오늘날의 세계야. 진실의 사막에 온 걸 환영하네”라고 말할 때 그건 가상의 프로그램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진실의 사막이란 자신들의 육체가 살고 있는 매트릭스 바깥의 세계를 가리키는 비유다. 매트릭스의 세계와 그 바깥은 연결되어 있지만 지젝이 예고한 것처럼 그 바깥조차 매트릭스는 아니었다. 그럼 지젝의 실수를 지금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한 가지가 될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유희성이 대철학자조차 호들갑 떨게 할 만큼 충분히 상상의 여지를 주었다는 걸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워쇼스키 형제는 신나게 유희했을 뿐 철학은 그걸 본 철학자들이 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그러므로 여전히 유희의 연장에 있다. 유희는 말한 것처럼 애장의 영화감독들의 사명이며 그것만이 그들의 진실의 사막이다. <매트릭스>의 창작자들이 어떻게 <스피드 레이서>처럼 이런 유치찬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고 분노하는 목소리들이 높은데 개인적으로는 이상하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에서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 마침내 <매트릭스3 레볼루션>을 본 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먼은 “오랜 세월 인간의 실제 행위를 기록해온 카메라 촬영술과 새롭게 떠오른 컴퓨터그래픽 이미지, 실제 배우들과 그들의 스턴트 대역들, 그리고 실제 로케이션 장면들과 스튜디오 세트장면들을 결합해내기 위해 워쇼스키 형제가 감내해야 했을 복잡다단함을 생각해본다면, 영웅 해커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컴퓨터에 의해 구현된 가상의 현실을 상대로 펼치는 이 무용담은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건 지젝의 예상보다 훨씬 더 유효할 뿐 아니라 <스피드 레이서>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예고했던 문장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가장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길목에서 동선을 살짝 전환하여 유년 시절 그들을 사로잡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만든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버리지 않으면서. 애니메이션에 더 근접하기 위해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섞는 방법이 <스피드 레이서>에서 특징적이며 그 점이 <스피드 레이서>를 말할 때 어떤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건 이미 <매트릭스>의 연장일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에 더 직접적으로 근접해간 그들의 애장과 유희의 방식이다. 그들의 애장품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순결의식을 지키는 방식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유희의 연장으로 선택한 자동차와 팝 아트와 사이키델릭 소중히 간직해온 것을 대하는 그 순결 의식의 행태에 대해서는 이미 쿠엔틴 타란티노나 피터 잭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한 바 있으니 여기서 피터 잭슨이 <킹콩>에서 대상을 다루었던 방식과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관람의 경험을 다루었던 방식을 다시 상기해달라고 제안하고 싶다. 두 감독이 각자 집중했던 문제가 <스피드 레이서>에는 모두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드 레이서>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무엇’을 애장하는가와 ‘어떻게’ 애장하는가.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의 부진도 실은 워쇼스키 형제가 다루는 이 애장의 두 가지 방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스피드 레이서>가 애장하는 무엇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에서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 <마하 GoGoGo!>다. 그리고 <마하 GoGoGo!>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복 및 헤어스타일과 <007> 시리즈의 자동차에서 이식받아 태어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것이다. 미국에서 생겨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추종자들을 만든 60년대 문화 혼종성의 일례. 이때 주요한 대상이 되는 것이 자동차다. 자동차는 영화사에서 때때로 유의미한 기호이며 특히 미국 대중 영화 속에서 장르와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절대적인 문화 기호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양의 소년들이 성인으로서 등록받기 위해 유년기에 그토록 소유하고 싶어 하는 상징물(<트랜스포머>의 자동차)이자, 성인의 세계에서도 여성을 유혹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남성의 성적 유인물(<데쓰 프루프>의 자동차)이자, 때로는 한 시대의 연애감과 미스테리를 상징하는 공간(<조디악>의 노란 자동차)이다. 단적으로 자동차는 사회학자 존 오르의 주장처럼 모더니티의 “상품화된 악마들”이라는 자격을 얻을 만큼 중요했으니, <마하 GoGoGo!>라는 원작이 태동한 1960년대 후반이라는 시기를 감안할 때 이 영화의 자동차들이 동 서양의 모더니티를 우회적으로 상기시킨다고 말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단지 <스피드 레이서>의 작품 결정성 또는 흥행성의 가치를 두고 말할 때 이 중요한 기호가 의외로 핵심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자동차는 몇 가지 더 화려한 상상적 기술과 금속적인 느낌, 그리고 경주 장면에서 제작진 스스로 카-푸(자동차 쿵푸)라고 부를 만큼(하지만 사실은 카-레, 즉 자동차 레슬링의 태그 매치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시아 격투기 같은 상상력을 넣어 다시 혼종성이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자동차로 대변되는 모더니티는 그 이상으로 크게 격상되지 않고 있다. 자동차를 둘러싼 나머지가 더 부각된다. 두 번째 애장의 방식, 즉 어떻게 애장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때 자동차라는 대상 자체보다 중요해지며 이 영화의 핵심과 직결된다. 자동차가 달린 적 없는데 그 휘황찬란한 속도감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CGI의 수혜를 말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CGI로 재현된 이 속도감이 정작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람의 경험을 결정짓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 워쇼스키 형제가 추구한 건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노렸던 효과와 일맥 상통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에만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더 질문할 수 있다. 원작의 매체성과 가까워지려는 <스피드 레이서>가 <베오 울프>와는 공유하지 않되 <300>과는 공유하는 점이다. 하지만 원작의 세계에 순결함을 바침과 동시에 독창적일 수는 없는가. 워쇼스키 형제가 선택하는 방식은 단순히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그냥 섞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생전 처음 만난 것처럼 모조화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취하는‘어떻게’의 모든 방식은 모조화이며, 더 모조화이다. 모조화를 강화하는 두 가지 매우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하나는 팝하게 모조화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이키델릭하게 모조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드 레이서>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표현을 잊지 않고 한다. “영화가 아주 팝해”, “영화가 사이키델릭하더군”. 하지만 멋진 그 표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까지는 아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각종 매체의 기사까지 이 말들이 모두 사용되는 걸 보면 제작진 스스로가 제작 단계에서 이런 개념들을 공유해왔고 유포해온 것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영상이 팝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사이키델릭하다는 건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똑같이 대중적이며 현란한 영화인데 왜 <베오울프>와 <300>과 <트랜스포머>에 대해서 팝하다고 말하지 않는 대신, <스피드 레이서>에 관해서는 팝하고, 사이키델릭하다는 논평을 내는 걸까. <스피드 레이서>는 팝한 세계와 사이키델릭한 세계가 마치 매트릭스와 매트릭스 바깥으로 구획되듯 구체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대체로는 뭉뚱그려져 있지 않고 정확히 구획된다. 경주 트랙 바깥의 세계는 팝하지만, 경주 트랙 안의 세계는 사이키델릭하다. 먼저 트랙 바깥 팝한 세계. 여기는 종이 인형들을 오려 붙인 것처럼 인물과 풍경이 콜라주식으로 오려 붙여져 있고(흔히 말하듯 원근법적 파괴는 그다지 어울리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캐릭터는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봄직한 과장된 표정으로 일관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일명 캔디 랜드라고 불릴 만큼 알록달록하다. 그 모든 것이 형광도료를 통째로 뿌려 놓은 것 같은 상태다. 이 의도적으로 키취적인 세계를 접했을 때 우리가 팝 아트 미술과의 연관에 대해서 생각하진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트랙 바깥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거의 팝 아트의 예술가들이 모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인물과 동네로 유별나게 채색하고 콜라주 해놓았다. 짐 호버만은 “어쩌면”이라는 단서를 단 뒤 케니 샤프, 제프 쿤, 무라카미 다카시, 케네스 놀란드 등등 팝 아트 미술가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이 이 영화의 미장센에 관여했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추론하는데, 나는 실제 그들이 참여했는지 알 수 없고 그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말할 입장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참여 유무가 중요하다 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손길이 닿았건 그렇지 않았건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 바깥의 세계는 확실히 팝 아트의 전시장처럼 보인다. 트랙 바깥의 세계가 팝한 것인가. 그렇다면 주인공이 자동차에 타고 경주를 벌일 때 그 트랙 안의 세계는 사이키델릭하다. 특히 주인공 스피드가 형의 환영과 경주하는 영화의 초반부 경주 장면과 마지막 트랙 경주 장면에서 이 사이키델릭함은 두드러진다. 우리가 <스피드 레이서>를 보며 사이키델릭하다고 감탄할 때는 대체로 자동차의 경주가 벌어지는 이 때 트랙 안 세계의 속도감과 재현성을 상기해낼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이키델릭한가. 빛의 속도, 광속으로 달린다고 말하고 싶어질 만큼 아찔한 자동차의 움직임. 그 차의 속도감을 표현해내는 조작된 기술은 자동차가 아니라 그 주변으로 흐르는 빛의 채색이며 동시에 아찔한 빛의 플래쉬들이다. 속도감은 붓 칠해 놓은 곡선과 일직선의 형형색색의 선들로서 표현된다. 혹은 그 안은 꼭 빙빙 돌아가는 만화경처럼 어지럽다. 그 선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 겹겹이 흐르고 겹치는 도안이 될 때 우리는 멈춘 스튜디오 안의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느낀다. 만화경, 그것의 도안, 그것의 효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사이키델릭하다는 것이 환각의 상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인상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판단을 가르는 것은 약(drug)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LSD의 문화적 상징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그것의 유포된 비주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과 자동차의 경주, 즉 사이키델릭한 비주얼이란 실은 환각의 비주얼이다. 모조화된 모더니티의 낯설음과 그로 인한 역효과 팝 아트와 사이키델릭의 기원이 1950, 60년대로 소급된다는 사실에 더해 자동차의 모더니티라는 점까지 합일시켜보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무의식적 관람 경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른바 <스피드 레이서>는 ‘디지털 시대에 모조화된 모더니티의 재현을 당신은 과연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바뀐다. 그건 워쇼스키 형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질문일 것이다. 트랙 바깥의 콜라주 된 팝한 세계로, 또 하나는 트랙 안의 금속적이며 디지털적이며 사이키델릭한 세계로 비주얼이 처리될 때, <스피드 레이서>를 접한 관객은 혹은 그 예고편을 구경한 관객은 이 영화에서 오는 어떤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부담감이란 사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유처럼 촌스럽거나 현란하거나 서사가 없다는 표현에 걸맞는 것이 아니다. 팝과 사이키델릭이 가져온 모조화된 모더니티가 낯설다는 토로다. 예상외로 그 부담이 <스피드 레이서>를 보는 관객 사이에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워쇼스키 형제가 자신들의 유년 시절에 기원하는 모조화된 모더니티를 팝과 사이키델릭이라는 구체적인 비주얼의 양분을 통해 재현해내면서 이 얼마나 재미있겠느냐며 희희낙락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들도 이 점이 어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역효과? 맞다. 그 역효과가 사실은 이 영화의 흥행적 수치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전 세계적으로 <스피드 레이서>와 같은 시기에 개봉한 뒤 놀랍게도 <스피드 레이서>를 크게 물리치고 흥행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아이언맨>은 지금까지 출현한 각종 맨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후진적이며 직접적이다. 주인공이 무기 공학자라는 점을 근거 삼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아이언맨은 한눈에 ‘인간 미사일’과 ‘인간 화염 방사기’의 비유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언맨, 즉 철갑맨은 덜 미래지향적이고 덜 복잡하며 더 군사적이어서 액션영화의 관객을 손쉽게 자극한다. 지금 전 세계는 팝과 사이키델릭으로 칠해져 모조화된 모더니티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품을 구경할 것인가, 아니면 몸에 화염과 미사일을 장착한 군사주의적 로봇을 구경할 것인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있는 형국이다. <스피드 레이서>를 본 당신은 전시장에 가서 팝 아트를 쉽게 이해할 만큼 지적인가(내게 팝 아트는 언제나 어렵다). 아니면 당신은 사이키델릭 아트의 근본적인 환각성에 관해 자신 만만하게 과감한가(생각해 보니 나는 약을 해 본 적이 없다). 워쇼스키 형제의 유희적 선택은 방어선을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역효과를 낸다. 대중영화 선호의 관객이 예술로서의 영화를 찾지 않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는 것에 저항감을 갖게 된 셈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확실히 지지의 미아가 됐으며 애장과 순결과 유희라는 입장에서 원본보다 더 나아가는 독창성을 발휘하고자 했으나 의도치 않은 역효과에 붙들려 괴상한 예술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애장의 영화가 일으킨 거대한 오해의 사건이 된 셈이다. <매트릭스>에 환호를 보냈던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스피드 레이서>에 다시 찬사를 보낼지는 미지수이며 <매트릭스>의 S. F 지지자들이 보기에 <스피드 레이서>는 형광도료의 유치한 난장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건 타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워쇼스키 형제를 영화의 네오라고 생각했던 건 실은 언제나 그들 이외의 사람들이며 그들 스스로는 오로지 영화의 레이서라고 여겨 왔을 뿐이니까.“내가 만드는 영화가 뭘 추구하고 있는가는, 단순히 대단한 그림을 만들었다, 신난다! 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영화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지만, 그런 것이 워쇼스키 형제에겐 없다고나 할까.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을 비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오시이 마모루가 옳다.

[듀나의 배우스케치] 한고은

한동안 <천하일색 박정금>을 봤죠. 꾸준히 본 건 아니고 그냥 중간부터 몇주 동안 봤던 겁니다. 원래 전 주말연속극은 꾸준히 못 봐요. 인내심이 부족하고 적당히 에피소드를 건너뛰며 볼 만큼 느긋한 성격도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잡고 앉아 그 연속극을 봤던 건 연속극 고정 시청자에겐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으니…. 이런 거였습니다. 전 우연히 소녀시대 멤버 윤아가 연기한 캐릭터가 살인죄로 체포되는 걸 봤어요. 아무래도 진범은 아닌 것 같았고요. 근데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진범이 안 잡히는 겁니다. 제 성격에 이런 건 못 참죠. 범인이 잡힐 때까지 봐야 해요. 어떻게 되었냐고요? 잡히긴 잡히더군요. 제대로 된 클라이맥스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서 실망했지만. 교훈 얻었어요. 주말연속극에 섞여 들어간 살인 이야기에서 전문 수사극의 치밀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살인범을 기다리느라 참고 있는 동안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이 시리즈의 팜므파탈 사공유라(도대체 무슨 이름이 이래요?)를 연기한 한고은에게 놀랄 만큼 관대해졌다는 것이죠. 전엔 그 덜컹거리는 발성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을 보는 동안 전 그걸 당연한 개인적 스타일로, 그것도 꽤 매력적인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캐릭터 때문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캐릭터라면 <경성스캔들>의 차송주가 훨씬 매력적이에요. 사공유라는 딱하고 진부하고 한심합니다. 동정할 수는 있어도 견디긴 힘들죠. 순전히 드라마의 방해물로 태어난 캐릭터입니다. 전생에 작가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렇다면 그동안 제가 한고은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걸까요? 아뇨, 그 정도로 한고은의 경력을 치밀하게 따라간 적은 없어요. 특히 <사랑과 야망>은 거의 보지 못했지요. 강지환 열성팬과 같은 집에 살고 있어서 <경성스캔들>의 차송주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지만요. 그냥 감만 믿고 대충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전 <경성스캔들>과 <천하일색 박정금>을 비교해봤습니다. 다시 보니 <천하일색 박정금>의 테크닉, 특히 발성 테크닉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긴 해요. 여전히 연기 스타일은 양식화되어 있고 영어 억양이 지워지지 않은 대사 톤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조금 더 노련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쌓은 경험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대극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군요. <경성스캔들>과 같은 시대극에선 과장된 연기가 용납되기 때문에 자신의 스타일과 억양을 고수할 수 있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이나 <꽃보다 아름다워>와 같은 앙상블 위주의 현대 배경의 연속극에서는 자신을 주변 환경과 맞추어야 하죠.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고 있었던 건 드라마의 스토리와 별개로 진행되는 한 배우의 투쟁인 겁니다. 어떻게 텔레비전 세계에서 정착하고 호평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의 테크닉에 완전한 확신이 없는 한 배우가 쟁쟁한 전문 배우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깨보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완전히 성공한다면 배종옥의 노련한 연기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한고은은 여전히 두 세계 중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채 방황하고 있고 저에겐 그게 정말로 흥미진진해요. 심지어 캐릭터와 드라마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론 이건 보편적인 매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여전히 한고은의 발성에 신경이 쓰여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배우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니 좋은 연기라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배우의 연기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고, 배우를 보는 재미가 꼭 연기 테크닉과 비례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고딩, 헤딩

귀싸대기 한방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80년대 초반, 어느 지방 소도시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특수반 신설과 관련된 학교쪽의 방침에 반발하며 2학년 한반 학생 60여명이 들고일어난다. 반장의 주도 아래 그들은 각자의 의자를 들고 운동장의 조회대 앞에 집결해 앉는다. 수업을 거부하고 비장한 침묵시위에 돌입한 것이다. 잠시 뒤, 소식을 접한 교감이 교련 선생과 함께 달려온다. 주동자인 반장과의 말없는 눈싸움 5분여. 교감은 갑자기 육두문자와 함께 반장의 귀싸대기를 후려친다. 풀썩, 주저앉는 반장. 이어지는 교감의 발길질. 잔뜩 독을 품었던 학생 군중의 시위는 어이없이 썰렁하게 진압된다. 그리고 오리걸음… 매타작…. 1980년대 초반은 고등학생 운동의 암흑기로 기억된다. 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과 60년 4·19 학생의거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지만,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그들은 애 취급을 당하며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일차적으로는 패션 탄압이었다. 바리깡으로 박박 밀어버린 머리와 시커먼 교복, 바짝 조여야 하는 후크. 대학가는 시위로 시끄러웠지만, 고등학교 주변은 숨죽였다. 감히 개갰다가는 교사들로부터 거의 개처럼 맞았다. ‘귀싸대기’는 일제시대 일본 순사의 채찍을 계승했다. 그것은 꼰대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금기어는 ‘말대꾸’였다. 훈계하면 잠자코 들어야 했다. 말대꾸하면 귀싸대기가 날아왔다. 시대는 변했다. 고등학생, 아니 고딩들은 더이상 꼰대를 참아주지 않는다. 거지 같은 훈계엔 말대꾸를 넘어 아예 마이크를 잡는다. 귀싸대기를 맞는다면 손목을 물어뜯거나 인터넷 동영상으로 복수할 것이다.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리는 미국산 쇠고기 개방 반대 촛불 집회장에서 자신의 논리와 권리를 밝히는 그들을 보며 든 생각이다. 조·중·동은 꼰대를 닮았다. 80년대 초반 제자들의 소박한 침묵시위를 귀싸대기 폭력으로 잠재우던 교감을 연상시킨다. 첫째, 10대를 무작정 철없는 어린애로 치부한다. 그들이 똑똑한 어른들 밑에서 자랐고, 논술이라는 이름의 고급 논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둘째, 이해관계가 있다. 교감은 교장으로 승진해야 한다. 승진의 장애 요소를 미리 제거해야 한다. 조·중·동은 방송 겸업 따야 한다. 이명박 정권에 잘 보여야 한다. 그 결과는 수입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누가누가 더 멋지게 떠벌리면서 보도하느냐 하는 경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학생운동의 순수함은 현실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에서 나온다. 취직 걱정에 찌든 대학생이 점점 더 자유로움을 잃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유롭지 못하면 미래의 공기를 호흡하지 못한다. 현실과 타협한다. 이제 순수한 학생운동의 중심이 고딩에게로 이동한다고 하면 너무 섣부른 예측일까. 물론 섣부른 예측이다. 취직 걱정은 이르지만 입시 걱정이 압도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뭔가에 집중할 때 고딩이 대학생보다 열광적인 건 분명하다. 얼마 전 고딩들의 광고 효과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나눠주는 무가지 한장이 교실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높은 회독률을 보인다고 한다. 휴대폰이나 MP3 등 전자기기의 광고주들은 주요 광고 타깃을 아예 대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낮추기까지 했다는 거다. 심지어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같은 전자제품까지 예외가 아니란다. 가족 단위에서의 소비와 관련된 발언권과 결정권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 탓이다. 87년 6월 항쟁 때 대학생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군부독재 타도하여 부모님께 효도하자.” 이제 그 자녀들이 자라 고딩이 되어 이렇게 외친다. “미친 소 막아내어 부모님께 효도하자.” 고딩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세상,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제시카 알바] “관객이 비명을 지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각막 수술을 통해 시력을 되찾게 된 바이올리니스트 시드니(제시카 알바)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현실 세계와 자신의 눈에만 어렴풋이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미지들로 인해 수술 뒤에 오히려 주위와 고립되어 간다. 홍콩의 동명 공포영화를 리메이크한 <디 아이>의 주연을 맡은 제시카 알바는 임신한 티가 꽤 역력해 보였는데 <허니> <굿 럭 척> 등의 가벼운 코미디물이나 <판타스틱4> 같은 앙상블 액션영화와 달리 혼자서 1시간40분을 이끌어나가야 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에 특히 애착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제시카 알바와의 인터뷰는 지난 1월22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제작노트에 보면 감독이 당신이 작품에 이 정도까지 열의를 다할 줄 몰랐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당신에 대해 흔히들 가지고 있는 편견에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별로. 자주 마주치는 반응이다. 같이 작업했던 대부분의 감독들이 다 그런 말들을 하더라. (웃음) 프로젝트에 일단 합류하면 감독에게 매일 시간날 때마다 전화해서 시나리오랑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크 엔젤> 할 때, 제임스 카메론 감독한테 그렇게 배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작업한다는 것이 사실 어느 정도 희생을 요구하지 않나. 가족이라든가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니까. 그런 만큼 영화를 할 때에는 100%를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희생의 의미가 없다. 그래서 촬영 때만큼은 일이 곧 생활 그 자체라고 받아들이고 임한다. -이번 작품은 공포물인데, 개인적으로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집에 있어야 하지 않을 사람들이 와 있는 것. -그런 경험이 실제로 있었나. =아니다. 그냥 공포영화들을 너무 많이 봐서인 것 같다. 아래층에 누가 있어… 등등의 상상 말이다. 공포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공포영화가 있다면. =딱히 하나를 들기는 어려운데…. 맨 처음 나온 <13일의 금요일>이 내가 처음으로 본 공포영화였다. 그 영화 때문에 어렸을 때 한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싸이코>도 무서웠고, <새>도 그랬고, <악마의 씨>도 무서웠다. -예로 드는 영화들이 다 심리스릴러쪽인 것 같다. =그런가. 확실히 고어쪽은 아니다. <헬라이저>나 <쏘우>처럼 누군가가 육체적으로 끔찍하게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힘들다. -이번 영화 속의 캐릭터는 어떠한가. =시드니는 내면이 무척 복잡한 인물이다. 비명을 질러대며 누군가에게 쫓기는 인물이 아니라, 내면의 심리적인 공포를 천천히 경험하는 인물이다. 캐릭터 연구를 위해 시각 장애 경험을 해보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해보고 몇 개월간 바이올린 레슨을 혹독하게 받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요소가 주는 공포감이 분명히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방향감각을 잃고, 각기 다른 표면 위를 걸어간다는 것. 약간의 돌출부분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드니라는 인물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쉽게 두려움을 느끼는 실제의 나를 넘어서 그녀를 연기하기 위해서 한번 더 생각하고, 해석해야 했다. -영화에서처럼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문득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나. =글쎄. 없는 것 같다. 그 눈의 실제 주인 역을 맡았던 배우와 같이 촬영할 때 감독이 당시에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연기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내 동작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라하게 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왠지 오싹했다. 꿈에도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임신 중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가. 힘들지는 않나.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내 몸을 장악해버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내 몸의 모든 변화에 그냥 순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를테면, 별것도 아닌 일에 화가 순식간에 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배가 고프다든지. 뭐 이런 일들에 말이다. -앞으로 계획이 어떤가. 출산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활동은 접을 계획인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작가파업 때문에 시나리오를 접할 기회가 확실히 줄었는데다가, 임신한 캐릭터가 나오는 시나리오가 흔치 않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브로드웨이 쇼에 출연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랬다. (웃음) 그런데 쇼가 시작될 즈음이 만삭일 때라 힘들 것 같다. -브로드웨이 쇼는 여러모로 많이 힘들다고들 하는데, 그쪽에 관심이 있나. =그렇다. 브로드웨이 쇼도 만만치 않지만 1시간짜리 텔레비전 액션드라마는 정말 힘들었다. <다크 엔젤>할 때, 매일 찍고 토요일 새벽 6시에 촬영이 끝나서는 월요일 새벽 6시에 촬영장에 나가야 했다. 주말에는 인터뷰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모든 장면에 내가 나와 쉴 틈이 없었다. 액션 분량을 담당하는 추가 촬영도 해야 했으니까. -시나리오가 계속 들어올 텐데, 임신이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가. =특별히 임신 때문이라기보다 나이가 들면서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십대 때에는 들어오는 역을 하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무엇인가 내면이 복잡하고 색다른 캐릭터를 찾게 되는 것 같다. -평론가들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주관적이고, 정치적이기도 하고, 그외에도 복잡한 요소들이 많은 것 같다. 내게는 관객이 어떻게 봐주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관객이 와주고, 극장에서 무서워하고 비명을 지르면 그것으로 족하다.

억척스런 네여자의 곗돈 되찾기 소동극 <걸스카우트> 공개

일시 5월 26일(월) 오후 2시 장소 명동 롯데 애비뉴엘 이 영화 아이들 학원 봉고차를 몰면서 살아가는 미경(김선아), 동네마트에서 일하며 백수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만(나문희), 아들 둘 뒷바라지하느라 인형 눈 붙이기부터 돈 되는 일은 뭐든지 하는 봉순(이경실), 프로골퍼의 꿈을 접고 골프장 캐디로 일하고 있지만 제법 빚이 있는 은지(고준희)는 한 동네에 사는 네 여자들이다. 힘들지만 악착같이 살아가는 그들 앞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미용실 원장(임지은)이 피 같은 곗돈을 들고 달아난 것. 혼란에 빠져있던 그들은 미경의 제안으로 원장이 자주 들락거렸던 미사리 물안개 까페에 무작정 잠복하기로 한다. 모두가 적지 않은 그 곗돈이 다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다투고 화해하면서 잠복하던 그들은 몹쓸 용의자를 발견하고 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은 단순히 아줌마들 곗돈 정도가 아니었다. 22억 원 상당을 둘러싸고 보다 큰 배후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 것. 게다가 그들에게 잡힌 원장은 봉순에게 맡긴 돈의 5배를 주겠다며 솔깃한 제안을 한다. 단순히 맡긴 곗돈만 찾겠다고 결심했던 그들은 그렇게 더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말말말 “지금껏 호흡이 가장 좋았던 영화 같다. 여자들 사이의 디테일이 많은 것도 좋았다. 많이 맞고 쫓겨 촬영 때는 몰랐다가 점점 인대가 아파오더라.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나문희 선배와 세 번이나 호흡을 맞춘 것도 영광이다.” -김선아 “그런데 사실 김선아씨는 덩치가 좋아서 맞을 때 별로 불쌍해보이지 않더라. 그래서 감독님이 캐스팅한 것도 같기도 하고.(웃음) 나 역시 지금도 떼인 돈을 생각하면 갈증이 날 정도다.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먹고 살 정도는 되겠지 라며 돈을 빌려가선 안 갚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돈을 빌려가 종적을 감춘 경우가 다반사라 이젠 아예 안 빌려주고 있다.(웃음)" -이경실 “와이어 액션이란 걸 난생 처음 해봤다. 집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하고 준비운동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촬영 당일에는 괜찮더니 이틀 지나니 죽을 것같이 아프더라. 그러다가 얼마 전에 뉴욕에서 뮤지컬을 봤는데 남자 배우가 탭 댄스를 하면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와이어 액션을 소화하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 내가 좀더 젊었으면 저런 것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나문희 100자평 핸드볼이 아닌 떼인 곗돈으로 똘똘 뭉친 또 다른 <우생순>이라고 할까. 아니면 한국 아줌마들의 ‘무대뽀’ 정신이 할리우드 강탈영화 장르를 만났다고 할까. 각자 생활에 허덕이던 네 여자가 합심해 곗돈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그녀들에게 꽤 자유로운 일탈의 기회도 제공한다. 그래서 인상적인 대사는 원장을 잡으러 나서 올림픽대로로 미사리를 향해 질주하면서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좋다”는 말이다. 네 여배우들의 호흡도 좋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넉넉한 여운을 남긴다. 그동안 충무로에서 다양한 크레딧으로 활동하던 김상만에게 영화감독이라는 직함도 당당하게 만들어줄만하다. 주성철 <씨네21> 기자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도둑 소탕 작전엔 여러 가지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걸 스카우트>는 그 돈을 중심으로 여러 종류 사람들의 모여 엉킨 엉망진창 소동극이다. 곗돈 떼인 아줌마들, 건설회사 채권을 떼먹은 사원, 이 남자와 짜고 붙은 곗돈 도둑녀, 채권을 되찾아 와야 하는 용역업체 해결사, 해결사에게 사채 빚을 진 여자. 돈 가방과 채권가방은 이들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 강탈영화의 형식을 옅게 빌려온 <걸 스카우트>는 대사나 몸 개그보다도 상황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코미디영화다. 이 상황들이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심각했다면 최동훈 감독의 두 편의 영화와 비교되었을 법도 한데, <걸스카우트>는 (주인공들이 여성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훨씬 유한 느낌을 가졌다. 마지막까지 치밀하다고 할 순 없고 썰렁한 순간들이 없지 않지만 포스터 디자인, 음악, 미술 등 영화 분야에서 다재다능함을 발휘했던 김상만 감독의 데뷔작으로서는 흉잡을 구석이 별로 없다. 크고 작은 앞뒤 설정들 간의 개연성 덕에 영화는 아기자기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고, 들쭉날쭉한 배우 각각의 개성과 연기력도 캐릭터에 힘을 실은 연출력 덕분에 균형을 이룬 듯하다.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길도 많았을 텐데, <걸스카우트>는 우리가 포스터 이미지와 예고편만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존심이 있는 영화다. 박혜명 <씨네21> 기자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자력구제 소동극을 그린 <걸스카우트>는 꽤 재미있는 영화이다. 첫째, '일하는 여성'(중산층 이하의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 '일하는 여성'이다)들의 애환이 서려있고, 둘째, 코미디적 감각도 나쁘지 않으며, 셋째, 사건의 규모도 적당한 편이다. 하지만 좋지도 않다. 그 이유는 첫째, 감정이입이 될 짬을 두지 않아서 인물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으며, 둘째 사건의 흐름이 중간에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썩 매끄럽지가 못하고, 셋째, 상대편의 욕망을 무성의하게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어찌 해결사는-아무리 그의 목적이 거액의 채권회수였다 할지라도-‘현금을 보기를 돌같이’ 할 수 있는지? ‘도둑년’은-임기응변에만 강할 뿐-어떻게 채권을 현금화 할 계획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지?).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노련하지 못한 연출과 편집 탓에 결과는 좀 아쉽다. 특히 배우들의 고생이 눈에 훤히 보여 더욱 그러하다. 황진미/영화평론가

[김혜리가 만난 사람] 만화가 최규석

뿔도 없는 사슴이나 그리는 만화가. 어디선가 최규석이 스스로를 일컬은 표현이다.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그의 히트작 <습지생태보고서>(2005)에는 만화과 대학생들의 궁색한 자취방에 뻔뻔하게 얹혀사는 닳고 닳은 사슴 ‘녹용이’가 등장한다. 뿔 없는 사슴만 그린 게 아니다. 최규석의 상업지면 데뷔작인 <공룡 둘리>(2003년 <영점프> 게재.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수록)는 초록빛 아기공룡을 추레한 국방색 파충류로 만들어 파란을 일으켰다. 성년이 된 서울의 둘리는 벌써 팔자주름이 깊게 패고 프레스에 마법의 손가락까지 잘린 이주노동자다. 또치는 매춘부가 됐고 도우너는 끌려가 해부된다. 친구들은 더 가까운 이익과 다급한 필요 때문에 서로를 저버린다. 현실에서 판타지를 길어내는 능력이 상상력이라면 판타지를 현실의 자갈밭에 기어이 끌어다놓는 이 징한 능력은 뭐라 불러야 할까. 하지만 진저리의 끝에서 독자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는 이 도시에서 둘리와 친구들이 고길동 아저씨네 군식구로 나이 먹었다면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씨네21> 독자들의 감(感)을 위해 보태자면, 최규석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드러난 현실인식에 동의하며 이창동의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 데뷔 6년째인 최규석은 오세영, 박흥용, 이희재의 물줄기를 잇는 극화 작가로 꼽힌다. 동세대 만화가 중 발군이라는 평도 간혹 들린다. 2008년 4월 중고생을 위한 6월항쟁 교육만화 <100℃>를 완성한 그는, 오는 6월에 세 번째 단행본 <대한민국 원주민>(창비 펴냄)을 서점에 내놓는다. 2006년 4월부터 1년간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대한민국 원주민>은 1977년 경상남도 진양군 명석면 오미리에서 2남4녀의 막내로 태어난 작가가 부모형제를 인터뷰해 그린 비망록이다. 가족 인터뷰야말로 인터뷰의 궁극이라고 생각해온 기자로서는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규석 가족의 1980년대는 도시에서 자란 동년배들이 부모의 회고담에서나 들었을 법한 정경과 일화들로 빽빽하다. 진학을 포기하는 일이 당연히 여겨지는 딸, 숨이 간당간당한 사슴 목에 빨대를 꽂아 피를 마시는 어른, 창문 너머로 구경하는 이웃집 안방의 텔레비전이 거기 있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구석진 시간대에 가족사라는 창을 통해 빛을 던진다. 덤으로 이 만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온 젊은 예술가들의 성장배경과 경험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비해 편중돼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가난한 대학생들의 자취 생활을 그린 <습지생태보고서>, 군대를 다룬 단편 <자살방조>와 <창> 역시 30년 남짓한 인생에서 잘도 이야기를 채굴하는 최규석의 밝은 눈과 여문 손끝을 보여준다. “누가 고민을 토로하면 그 슬픔이 전해질까봐 무서웠어.” “나도 내 꿈만 바라보며 살기에 벅찬데 왜 다들 나에게만 나타나는 걸까?” <습지생태보고서>의 대사를 빌린 작가의 독백이다. 최규석은 약한 사람과 일탈한 사람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우리의 못된 버릇을 선선히 보아 넘기지 못한다. 동네 바보형의 수난을 그린 단편 <콜라맨>, 군대 비품을 의인화한 우화 <자살방조>가 그 안테나에 딱 걸린 케이스다.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단편집 <아미띠에>에 묶인 최규석의 작품 <가짜 비둘기>에서 서울역 앞 노숙자들의 얼굴은 비둘기의 머리다. 명백히 작가 본인의 캐릭터인 <가짜 비둘기>의 극중 만화가는 서울역 앞 노숙 1박을 결심하고 취재에 나서지만 냉기와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귀가한다. 그처럼 최규석 만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미안하다’로 수렴된다. <대한민국 원주민>의 한 갈피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한 셋째누나의 적금을 헐어 미술학원에 등록한 작가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박탈감보다 그 와중에 수혜를 받은 자의 죄책감이 그의 만화를 이끄는 힘이다. 최규석의 필살기 중 하나는 동물을 의인화하는 한편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연명하는 인간의 현실을 기회 닿는 대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데뷔 이래 우화적 비판의 만화를 생산해온 최규석은 최근, 죽 맞는 동지인 연상호 감독(애니메이션 <지옥> 연출)과 더불어 홈페이지에‘노골리즘’을 제창(?)했다. 미루어 이해하건대, 사회 모순이 빚어내는 슬픔과 무기력의 정서를 휘뚜루마뚜루 그린들 일생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하나의 문제적 현상이라도 찍어서 선명히 발가벗기는 작품을 내놓겠다는 결의다. 만국의 노골리스트여. 단결까지는 무리라면, 주목하라. -‘모과’라는 호(號)를 쓰고 있는데요. 뜻이 뭐죠?(최규석 작가의 홈페이지는 www.mokwa.net이다.) =속담에도 있잖아요. 모과나무처럼 배배 꼬인 놈.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에) 어 많이 쓰는 말인데? 모과나무는 꼬여서 목재로 못 쓴대요. 보통 한국사회에서는 사람을 보고 기둥이 되어라, 서까래가 되어라 이야기하고 아이들도 “어디 꼭 필요한 사람이 될 테야”라고 다짐하죠. 저는 어디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사는 건 참 짜증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도 날 쓸 수 없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좌중 웃음) 그런데 20대 초반 군대 휴가를 나와 보니 인터넷 세상으로 변해 모두들 닉네임을 갖고 있더라고요. 제대하면 홈페이지 만들어 그림을 올려야겠다 싶어서 닉네임으로 삼았어요.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작가인데도 작품을 보면 중장년 같습니다. 가족사를 그린 <대한민국 원주민> <습지생태보고서>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나 <100℃> 같은 회고적 소재를 자주 다뤄서일까요? =저는 젊은이였던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아요. 동시대에 젊은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내가 합치된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도시 출신 친구들은 공통으로 착착 밟아온 비슷한 단계가 있어요. 이를테면 누구나 어느 시점이 되면 본 책과 영화, 들은 음악이 있죠. 그런데 나한테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어요. 초등학교부터 애어른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선생님조차 수업시간에 은행 심부름 보냈으니까. (웃음) -새로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면 동시대의 도시화된 지역과 아주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걸 알 수 있겠더군요. 다른 시대를 산 같은 세대라고 해야 할지, 같은 시대를 산 다른 세대랄지. =대학에 가고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야 그런 거리감을 확실히 느꼈어요. 이른바 386세대와 교류하면서 우리 누나들과 비교가 되더군요. 그분들 데모할 그맘때 딱 누나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친구 아버님들과 얘기가 잘 통해요. 산에서 뜯어먹던 쑥범벅의 추억이라든가. (웃음) 한번은 여자친구가 보리밥 먹으러 가자 그랬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왜 쌀밥 두고 보리밥 먹어! 역사책을 보면 시대 구분이 마디마디 딱딱 나누어지잖아요? 중세 다음 근대, 그 다음 현대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가 비율만 오르내리면서 겹쳐져서 동시에 움직이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 원주민>을 하면서 세상의 상식이 모든 구성원에게 고루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으니 자꾸 21세기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안 돼요. 어렸을 때 미래를 상상한 과학책 보면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자동차 타고 다녔잖아요. 그걸 보고 지금 사람들은 웃지만 사실 요새 자가용 비행기 타는 사람에겐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누군가에겐 옛날 사람이 말한 21세기가 이뤄졌지만 어떤 사람에겐 아닌 거죠. -우리가 사는 시간대가 균질하지는 않다는 거군요. <대한민국 원주민>은 100% 자전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처음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죠. 정작 제 경험은 많지 않지만요. 가만, 그럼 자전이 아닌가? 가족들이 제게 거짓말을 했다면 몰라도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물어 검증된 이야기만 그렸어요. 집에 자주 놀러오던 엄마, 아버지 친구분 이야기도 들었죠. 아버지는 별로 퍼줄 것은 없지만 친구를 잘 만드는 성격이라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경비원을 하는 아파트가 가까워 하굣길에 들르곤 했는데, 주민들이 술 드시는 아버지에게 타박은커녕 안주하라고 찌개를 끓여다줬어요. 돌아보면 예삿일은 아니에요. (웃음) 뭔가 매력이 있으니 우리 엄마도 여태 같이 살았겠죠. -제목을 직접 지으셨죠? 굳이 ‘원주민’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낙원구 행복동 생각도 언뜻 스쳤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균질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과도 연관이 될 듯합니다. 오래 묵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랄까. =구상할 때 ‘원주민’이란 말만 또렷이 떠올랐어요. 보통 철거 지역에서 쓰는 단어죠. 원주민은 자신들의 과거나 생활방식이 자연스러운 형태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아버지만 해도 다니던 길은 모두 수몰됐고 젊은 날의 추억은 어디 가도 볼 수 없죠. 살아 있는 사람이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박물관에 간다는 건… 좀 신기한 일이에요. 촌놈과 원주민은 다른 말이에요. 미국을 예로 들면 아메리카 인디언이 원주민이고 텍사스 사람은 촌놈이고. 하하. 한국에는 촌놈이 없는 것 같아요. -본인이 취재한 가족사에 대한민국이란 제목을 붙여 역사의 한 조각을 재구성한 셈인데요. 이런 기획이 해볼 만하다는 판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할 때 아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80년대 중반에야 도시로 이주한 아버지 같은 사람은 70년대 농촌을 나와 도시 빈민을 형성한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항거한 적도 없기에 역사책에 민중으로도 기재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엄마는 전쟁 때도 정규군은 퇴각할 때 한번밖에 못 봐서 전쟁을 인식하지도 못했대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싶었어요. 생활사 박물관에 가보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식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아저씨들이 있어요. 아이들은 듣기 싫어하죠. 안쓰러워요. 다시 그와 같은 경험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 아저씨의 부인도 도시 사람이라면 가족 안에서 절대 소통할 수 없는 기억을 안고 사는 거잖아요. 만화로 생각을 하고 메시지를 전달해요 -최규석 작가의 만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세상이 언제나 바르게 돌아가지는 않으며 때로는 심하게 왜곡돼 있다는 관찰입니다. 언제부터 세상의 허점을 인식했나요? =저는 피부에 직접 와닿지 않으면 생각을 잘 못하는 부류예요. 초등학생 때 친구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고 그 폭력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어요. 1학년 때는 정의의 사도가 돼서 약한 애들 괴롭히는 친구를 불러다놓고 때리기도 했어요. 저는 도덕을 늘 가슴에 품고 쓰레기 보이면 줍는 이상한 애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제게 맞던 친구가 참다 못해 덤벼드는데 싸움이 길어지니 못 이기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맞고 나서야 폭력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안 건가요? (웃음) =아뇨. 맞는 게 아픈 거구나라는 걸 알았죠. 집에서는 맞은 적이 없었거든요. 한번은 존경하는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는데 엄마가 봉투를 마련하는 거예요. 우리 선생님을 뭘로 보냐고 난리를 쳐서 말렸죠. 그런데 합창대회에서 ‘듣보잡’인 애가 지휘자로 뽑혔어요. 학급위원 애들이 그 애 엄마가 한턱 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잘하는 편이니까 집단에서 강자 입장이었는데 중학교 가면서 공부를 하는 습관이 없으니 처지면서 위치가 달라졌어요. 상위계급에 있다가 갑자기 하층민이 되니까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최초로 본 만화가 이상무 선생 작품이고 아다치 미쓰루 작품에 감동받아 만화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화를 파고들어 찾아 읽은 편이었나요? =처음 접한 만화도 도시 아이들이 시골 애들 돕는다고 보내준 만화잡지였어요. 잡지란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두꺼운 책인데 그림이 다 다르구나 했죠. 연재라는 형식의 개념도 없었고요. 손에 들어오는 대로 봤죠. 그 점이 제가 처음으로 느낀 도시 출신 아이들과의 차이였어요. 그 애들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찾아다니고 욕망을 해요. 하지만 제겐 그런 욕망이 없었어요. 가난하게 사는 데는 욕구가 없는 것이 도움이 돼요. 저희 가족이 벌이가 없는데도 빚지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없으면 아예 안 쓰는 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만화를 하고 싶었나요? 아니면 반대로 만화가 좋아서 만화로 할 이야기를 찾은 경우인가요? =이야기라는 건 머릿속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형태로 떠오르잖아요. 제 경우는 그게 만화예요. 굉장히 짧은 연출의 서너칸이 연결된 형식으로, 이야기의 장면이 그려지죠. -콘티를 짜나가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때로는 콘티가 그대로 원고가 되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작업방식에 이유가 있었군요. 다시 말해 만화로 생각한다고 치면 되겠네요. =만화에 감동을 받은 거죠. 텔레비전이 집에 없었던 이유도 있을 거예요. 친구네 집 책들을 몽땅 읽었는데 더이상 갈 친구 집이 떨어진 다음부터는 아는 동생들 집으로 범위를 넓혔죠. 그래서 독서가 계통이 없어요. 아동문학전집을 본 다음 다섯살짜리를 위한 디즈니 그림책을 봤다거나 하는 식이죠. -초기 단편 중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솔잎> <콜라맨>을 보면 거짓에 의해 세상이 지탱되고 있다는사실을 독자에게 각성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노골적입니다. 표현이나 묘사보다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욕구가 두드러져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취향이라는 것이 늦게 형성돼서 그런가? 물론 제 취향에 몰두하고 싶을 때도 있고 전달력을 강화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습지생태보고서>가 제 취향에 제일 충실한 작품이죠. 개그도 치면서 일상을 뒤집어보는 만화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재미있는 이야기니까요. 앞으로는 취향보다 전달에 치중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말인가요? =예. 지금은 전달이 잘 안 된다고 생각해요. 6월항쟁을 그린 교육만화 <100℃>는 물론 전달이 목적인 작품이었는데 문제는 전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는 거죠. 그냥 뭔가 잘못됐다는 분위기만 전하는 거와 사회의 어떤 문제점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전하는 건 달라요. 예를 들어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사랑도 하고 액션도 하지만 보고나면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유통되는지 하나는 확실히 보여주잖아요. 제 단편 <사랑은 단백질>도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었는데 비유를 하니까, 독자들이 보고 나서 “채식을 해야지” 하고 이해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비유니 은유니 이런 거 다 황이구나 싶었어요. (웃음) -만화가 전달에 있어서 다른 매체보다 유능하다고 보나요? =제약이 덜하죠. 제작비도 적지만 만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란 인식이 있어서 웬만큼 그려도 상업적인 만화로 포장만 할 수 있다면 태클이 없어요. 드라마에서 검사나 의사를 이상하게 다루면 마구 항의가 들어오는데 말이죠. 일본 만화도 보면 기업운동, NGO운동을 다루는 만화들이 껍데기는 일본 장르 만화 형식을 쓰고 나와요. 리얼리즘이라고 입체적인 주인공이 고뇌하고 작가는 그를 비웃고 이러는 것보다 차라리 통속적 주인공을 내세워 그의 우정,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한 분야가 눈에 딱 보이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쩐의 전쟁>도 그런 예죠. 보통 사회의식 있는 작품은 사람들의 고통을 뭉뚱그려 보여주지만 인물만 입체적이고 그를 둘러싼 세상은 사실적이지 않을 때가 많아요. 주인공은 단순해도 세상은 잘 보이는 만화를 한번쯤 그리고 싶어요. -제가 접한 대다수 예술가들의 관점과는 반대네요. 대개는 개인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특기라고 믿잖아요? 효과를 기준으로 생각하시네요. (웃음) =이명박 정권의 실용정책에 부응하는 건가요? (웃음) <100℃>를 하면서도 긴 리뷰보다 짧은 리뷰를 많이 받고 중고생들이 변화를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긴 리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사실 그 작품 안 봐도 돼요. 원래 자기 안에 있던 얘기를 작품을 빌려 끄집어낼 뿐이죠. 반면 두세 글자로 쓰는 평은 아무리 촌스럽고 단순해도 내 만화를 안 봤으면 못 느껴봤을 감정일 테니까요. 인권영화제 가서 느끼는 갑갑함이 그런 거죠. 작품들은 너무 좋은데 그런 작품 안 봐도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어느 정도 상식이 잡혀 있는 세상이라면 작가가 이런 고민까지 안 해도 되겠죠. <식코>가 한국에서 나왔다면 그렇게까지 반응이 있었을까? 안 될 것 같아요. 노조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 <심슨가족>처럼 노조를 비꼬고 희화화하는 만화를 그리기 힘든 거죠. -최근 창작의 원칙으로 ‘노골리즘’을 홈페이지에서 주창하셨지요? 지금까지 우화적 사회비판은 할 만큼 했다는 인식에서 나온 아이디어인가요? =할 일이 훨씬 많은데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연상호 감독이 TV인터뷰에서 언급했다고 하더군요. 먹물이 한명 붙어서 선언문도 쓰고 해야 하는데. (웃음) 현실은 김기덕 영화 속 세계와 같다고 생각해요 -출판사 길찾기에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첫 책으로 내셨습니다. 다른 기획으로 접촉해온 출판사쪽에 먼저 단편집 내달라고 요구했다면서요. 당돌한 요구였을 텐데요. =설득한 건 아니고 “그냥 내봐요! 난 책 진짜 안 사는데 나 같으면 이런 책 사겠다!” 그랬죠. (웃음) 정말 대학 다닐 때부터 분명 이런 만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시장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행히 그 이후 <공룡 둘리>가 떴죠. -<공룡 둘리>도 그렇지만 작품에서 의인화 기법을 즐겨 쓰십니다. <사랑은 단백질>에는 닭이 치킨집 주인으로 나오고 <자상발조>에서는 의자가 목을 매죠. 저도 평소 치킨집 간판에 닭이 앞치마 두르고 있거나 참치 캔 광고에 다른 ‘먹거리’들이 나와 질투하는 모습에 질겁해온 터라 재미있게 봤습니다. 작가님은 무생물이나 동물을 즐겨 의인화하는 동시에 인간을 어쩔 수 없이 “남의 살 먹고 사는” 포식자, 즉 동물의 한종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단편 <사랑은 단백질>의 치킨가게는 이름도 ‘내다리 치킨’이에요. 길 가다 가끔 ‘장기 대출’이라는 플래카드 보고 놀라곤 해요. “뭐? 장기를 대출해?” (웃음) 현실은 기본적으로 김기덕 영화 속 세계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쉽게 <나쁜 남자>의 주인공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어요. 이른바 사회의 상식과 문화는 살짝 덮여 있는 한 꺼풀일 뿐이고 인간은 쉽게 그것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거꾸로 상식과 문화를 지킬 수 있죠. 김기덕 영화에 대한 비난을 보면 짜증도 나요. 아마도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자랐을 그 사람들은 단정하고 고운 심성을 인간의 당연한 상태로 여기기 때문에 김기덕의 주인공들을 사람이 아닌 타락한 존재처럼 보잖아요. -서울역 앞 노숙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둘기떼를 대하는 그것에 비유한 단편 <가짜 비둘기>가 생각나네요. 독자 입장에서는 무크지 <파마헤드>에 실린 단편 <자살방조>가 제일 어려웠어요. 군대 비품인 의자가 실연으로 목을 매고, 자살을 만류하던 말단 군인은 의자의 시신을 별 문제없이 잘 쓴다는 스토리인데요. =군대있을 때 받은 느낌이 모티브였어요. 군대에서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딱 그래요. 휴가 나갔다 온 군인들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오기도 하고 집의 걱정을 떠안고 돌아오기도 하는데 군에서는 점호해서 인원수만 맞으면 끝이거든요. 상담도 소용없어요. 바깥 문제를 안에 붙잡아놓고 상담하면 뭐해요. 군대에 있는 동안 사람이 몇번씩이나 죽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쟤는 이런 면이 이제 죽었구나, 그리고 몇달이 지나면 또 다른 면이 죽은 게 보이고요. 하지만 위에서 볼 땐 잘 돌아가니까 아무 문제없죠. 그 관찰을 한 단계 떨어뜨려 말단 병사와 비품인 의자의 이야기로 풀었어요. -군대도 배경으로 자주 쓰는데요. 예술가 지망생에게 군대가 끼치는 영향은 뭐라고 보세요? =만화가는 대부분 20대 중반부터 후반 사이가 재능을 폭발시키는 기간인데 그때 딱 갇혀 있는 거죠. 물론 작가로서 한국 남자 대부분의 공통 기억을 갖게 되는 건 좋은 점이겠죠. 문명화된 사회에서 보기 힘든 인간의 바닥을 볼 수 있다는 점도요. 저는 군대에서 내가 그렇게 내 윤리를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어요. 강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려면 근엄한 표정을 더이상 지을 수 없으니 <습지생태보고서>와 같은 유머감각이 생겼고요. 서글프기도 했어요. 내려다보는 포즈의 맛도 있는 법인데. (웃음) -<습지생태보고서>에서 인상 깊게 본 에피소드가 몇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성형수술한 여자가, 부모 돈으로 수술한 여자들한테 우월감을 느낀 일화가 하나였고요. 가난한 주인공이 연애할 때 멋진 모습을 한 자아와 초라한 자아가 분열돼서 후자가 전자에게 “오늘 얼마 썼냐”고 추궁하는 에피소드도 감명 깊었습니다. 본인의 분열하는 자아를 항상 관찰하는 편인가요? =예전만큼 예민하지는 않아요. 가령 물건을 사러갈 때나 연애하며 여자와 대화를 할 때 분열하죠. 나도 이 물건 살 만큼 번다고 말하는 나와, 정말 필요하냐고 되묻는 내가 갈라지죠. (파란 새 운동화를 보여주며) 이건 정말 갖고 싶어서 샀어요. 내가 가진 전부를 갖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가장 거기 가까운 상대가 <사랑은 단백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감독 연상호예요. 전 스펙터클을 두려워하나봐요 -<경향신문>에 연재 뒤 단행본으로 5쇄를 찍은 <습지생태보고서>는 스페인어판과 프랑스어판도 출간됐습니다. 유럽에서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나요? =보통 잡지에 연재된 형식의 만화는 그냥 ‘망가’로 나간다고 해요. 그쪽이 친숙하니까요. 일본 만화인지 한국 만화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의 장르로서 대량소비되는 거죠. 제 작품은 출판사의 레이블 자체가 ‘한국’이라는 로고 아래 묶여 있어서 ‘만화’로 소개됐어요. 그나저나 동양 만화는 칸의 소모가 너무 많아요.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도시로 전학 간 가난한 소년이 모눈 공책을 아끼느라 글을 다 붙여쓰고, 띄어쓰기는 체크로 표시했다가 혼난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웃음) =하하. 휙휙 넘어가면 독자 입장에서 아깝지 않을까요. 앞엣것 때문에 뒤엣것이 달라 보이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점점 두터워지는 느낌이 있어야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칸을 확 늘린다거나 한 페이지를 털어 그리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것도 지면을 꽉꽉 채우려는 마음 때문인가요? =꽉꽉 채우고 싶어서라기보다 변화가 무서운 거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그런 스타일이에요. 마쓰모토 다이요(<핑퐁>)도 칸을 절대 밖으로 안 빼고 오토모 가쓰히로도 그렇죠. 이희재 선생님도 대개 지면을 빽빽이 채워넣으시고요. 전 스펙터클을 두려워하나봐요. -데뷔작 <솔잎>에는 스크린톤을 사용했지만 작품들이 대체로 손으로 그은 연필선의 느낌을 선호하는 스타일입니다. =재료를 잘 못 쓰기도 했지만, 대학 시절에는 만화과 학생으로서 만화하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안하려는 의도가 컸어요. 동양에서 극화만화를 하면 스타일이 굉장히 한정되거든요. 한명이 그려도 열명이 협업하는 공장에서 나온 대량생산 스타일을 따라해야 하거든요.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드니 실험의 여지도 없죠. 그래서 시원시원하게 빨리 빠지는 동양 극화의 영화적 연출과 유럽 극화의 실험적 연출을 종합하는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결과가 <콜라맨>과 <공룡 둘리에…>죠. -또 효율성이네요. (웃음) 본인의 그림체가 정착했다고 보세요? 어찌보면 극히 모범적인 데생이라 기발한 표현을 하고 싶을 때 갑갑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머리로 그림을 배운 타입이죠. 이미 대학 때 자학을 했고 초등학교 교과서 삽화 같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어요. 색감도 구리다는 말 많이 들었고요. 대신 장점도 있어요. 스타일리시한 그림은 구린 걸 그려도 폼나는데 전 딱 구려요. 앞으로 점점 능숙한 그림을 그릴 순 있겟지만 스타일을 잡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이상도 없고 작품마다 많이 바뀌니까요. -상업적 약점이고 어떻게 보면 미학적으로도 약점일 수 있는데, 최규석 작가의 만화는 작품의 온도가 애매해요. 비극이라기엔 쓴맛이 강하지 않고 웃기에는 찜찜하거든요. =제가 감정기복이 별로 없어요. 감정이 먼저 터져나오는 게 아니라, 기뻐할 일이라고 판단하고 나서야 기뻐해요. 재수없다는 말도 들었어요. “야 너 상받았댄다”라고 친구가 희소식을 전해주면 “아, 그렇구나…. 얼마지?(상금이)”하거든요. 전체적으로 봐서 이것이 기뻐해야 할 일인지, 심사위원의 성향이며 응모작 수준 등등 변수가 다 눈에 들어와요. 강유원 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연애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사실 스무살까지는 연애도 안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는 즐거움 이상의 가치를 구할 근거가 없는 행위인데 내가 즐거움만을 위해 살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니까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죠. -에세이툰이 인기를 끌면서 극화 만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체감하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다시 사정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과거 만화잡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포탈에 극화 만화가 워낙 많아서요. 잡지로 데뷔했는데 잡지는 망하고 웹으로 이동이 지체된 세대가 제일 힘들어요. 저도 그 세대 끝자락이고요. 그러나 활동할 영역이 특별히 좁다는 생각은 안 해요. 한국에 태어났는데 주어진 것 안에서 해야죠. 그리고 뭐 만화 없다고 세상이 망하나요? -히트작 만화를 보면 성공의 원인을 이해하나요? =대충은 알지만 그 작품만큼 괜찮은 작품들도 있는데 왜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통속성이라는 공통점은 있죠. 원태연 시인의 시, <광수생각>, 발라드 가요, 강도영 형 만화를 보면, 모두 착한 사람, 착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내용이 있어요. 싸이월드 사진 밑에 붙어 있는 몇줄의 문구들을 봐도 공통분모가 있어요. 십년째 촉망만 받고 있어요 -한국 진보진영이 선거나 정당 활동에 있어 유머와 위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저는 혼자서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을 뿐 실제로 그런 정치활동을 누가 하는지는 몰랐어요. 학교 운동권 선배들은 촌스럽고 폭력에 대한 예민함이 없어 보였고요. 싫다는 술을 강권했죠. 좌파도 폭력적인 사람은 싫어요. 존경하는 논객 중에도 “한번 붙을까? 너 정도는 이길 수 있어” 하는 뉘앙스를 깔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과는 견해가 비슷해도 친해지긴 힘들겠죠. -본인한테는 그런 점이 없을까요? =저한테도 있겠죠. 굉장히 조심해야죠. 인권에 대해서 의식한다는 사람들도 정작 제 자신은 모를 때가 있어요. 무시하면 욕먹는다고 정해져 있는 대상이 있잖아요. 장애인, 여성, 또 어느 자리에서는 누구.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범위 바깥의 사람들한테도 조심하느냐 여부예요. 군대를 소재로 한 단편 <창>의 주제가 그것이었죠. -2005년 <한겨레>가 선정한 차세대 문화 주자의 한명으로 뽑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세대’라는 말을 싫어하신다고요. =십년째 촉망만 받고 있어요. (웃음) 차세대라는 말에 대한 불만은 신인 취급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 위치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데뷔했을 때 어느 기자가 한국 만화를 부흥시킬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서 강도영 형이 있지 않느냐고 답했더니 놀라는 거예요. 작가 선생님들도 강도영의 그림은 훅 불면 날아갈 듯하다고 비판했죠. 하지만 저는 왜 데생 잘하고 진중한 연출하는 작가한테서 희망을 보는지 모르겠어요. 만화의 흐름을 바꾸는 건 당연히 강도영 같은 작가죠. 한국 만화를 바꾼 사람은 ‘착한 만화’라는 장르를 만든 박광수, 네페이지 개그만화에 불을 지핀 양영순이에요. 저 같은 작가가 없었던 시대가 어디 있어요? -지난 몇년의 작업에 부끄러움이 있고 올해 초부터는 작가다운 작업을 할 거라고 확신한다고 홈페이지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일단 <100℃>를 단행본으로 내기 위해 6월항쟁에 참여한 인물들의 20년 뒤 다양한 모습을 그리려고 해요. 6월항쟁만 좋게 그리고 끝내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보잘것없어지는 것 같아요. 20년 전에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왜 지금도 우리는 힘들까, 민주주의가 되건 안 되건 상관없구나, 역시 경제를 살려야 겠구나 라고 느끼게 되잖아요. -<한겨레21> 연재 당시 담당한 구둘래 기자에 따르면 마감이 늦은 적이 거의 없다더군요.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시는 걸로 알아요. 만화가 하면 떠오르는 은둔형과는 거리가 먼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같은 자기 관리인가요? 아니면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는 게 즐겁기 때문인가요? =일을 위한 이유도 있죠. 몸에 근육이 있으면 오래 앉아 있어도 통증과 피로감을 덜 느끼니까요. 나머지 반은 자기 만족이죠. 헬스는 10년 했고 지지난해부터 권투로 바꿨어요. 헬스할 때는 달리기를 안 해서 불안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도망칠 수 있어야 하는데…. (웃음) -자신을 규율하는 일이 쉬운가요? =시간을 규율하기가 어렵지 고통 속에 나를 넣어두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追伸 인터뷰를 준비하며 최규석 작가가 쓴 글도 제법 읽었다. 훈련받은 기자나 작가도 아닌데, 두세 차례 퇴고한 것처럼 단정한 그의 문장을 읽으며 글 써서 밥벌이하는 주제가 면구스러웠다. 낭비를 싫어하는 습성과 자신의 사고를 검산하는 꼬장꼬장한 연산의 뼈대가 보이는 글이었다. <습지생태보고서>를 펴낸 만화전문 출판사 거북이북스 강인선 대표는 만화가 특강 의뢰가 들어오면 최규석을 1순위로 추천한다고 귀띔했다. 인권만화 단편집 <사이시옷>과 <대한민국 원주민>을 펴낸 창비의 박영신 편집자는 “오탈자와 틀린 띄어쓰기가 거의 없어 편집자 작업을 덜어주는 작가”라고 보탰다. 문장이 좋다는 분명 익숙할 법한 칭찬에 최규석 작가는 멋쩍어했다. 아무래도 만화가에게 글 잘 쓴다는 찬사는, 칼국숫집에서 깍두기 칭찬만 하는 격인가보다. 그나저나 슬쩍 당황해 눈을 치뜨는 품이 영락없는 강백호다. 덩크슛을 꽂기엔 역시 조금 수줍어 보였지만.

[전영객잔] 미국 시민권을 지닌 영화의 지극히 글로벌한 유통

<위 오운 더 나잇>은 5월29일에 개봉한다. 그러나 이제 극장 개봉의 의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목을 빼고 극장 개봉을 기다리던 관행은 이제 특별히 극장의 영화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이 영화 리뷰로 들어가기 전에 현재 우리가 영화를 향유하게 된 수상한 방식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려 한다. 영화를 보게 되는 경로가 P2P로 다운로드한 파일을 포함하게 되면서 영화의 언더그라운드 혹은 온라인 유통에 있어 다양한 버전의 글로벌한 비동시성과 동시성들이 한꺼번에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서의 영화, 필름 베이스의 극장 상영이나 VHS, DVD를 통한 관람 양태를 급격히 바꾸고 있다. 온라인 서점이었다가 이젠 책 이외에도 많은 것을 팔고 있는 아마존에서 2007년에 개봉된 <위 오운 더 나잇>을 온라인상의 클릭 한번으로 빌리거나 사서 바로 볼 수 있다. 대여는 3.99달러 그리고 구매는 14.99달러다. 미국 시민권 여부와는 관계없이 미 영토 밖에서는 다운로드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다운로드된 파일이 P2P사이트나 메신저들을 통해 글로벌하게 확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영토화된 판매지를 한번만 우회하면 탈영토화는 시간문제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옹. 프랑스 더빙으로 먼저 만난 <위 오운 더 나잇> 이 와중에 파일 리뷰를 읽어본 뒤 다운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세한 내용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할리우드영화 <위 오운 더 나잇>을 보게 되는 일도 생긴다. Quoi(What의 프랑스어에 해당?) 사실 나도 <위 오운 더 나잇> 프랑스 더빙 버전을 먼저 보았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영화는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 길들을 우회해 우리에게 온다. <위 오운 더 나잇>의 아마도 <대부>에 바치는 색감의 경배- 흐릿한 황금색과 갈색- 가 위와 같은 파일 유통의 경로 속에서 어떠한 색채를 띠게 되는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색채 변이의 예측 불가능은 디지털 시대, 매체 융합의 어떤 은유가 된다. 필름 베이스의 아날로그 시네마가 디지털 세계로 융합되면서 우리는 ‘영화의 죽음’이라는 경고를 10여년 전부터 들었고, 이제 그 경고는 현실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알려진 대로 디지털의 ‘digit’는 라틴어 ‘digitus’다. 손가락이란 뜻으로 숫자를 세는 손이다. 디지투스, 손가락 그중 둘째, 집게손가락은 영어로는 인덱스(index), 색인, 지표 손가락을 가리킨다. 현실 세계의 정보를 이진법으로 컨버전스하는 디지털 시스템은 영화와 비디오를 구성하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아날로그 세계를 이진법으로 변환한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투스, 디지털 시그널은 아날로그가 기반하고 있는 기호의 인덱스 기능을 지우면서, 미디어 문화, 그 기상도의 변화를 가리킨다. 필름 베이스의 영화가 가진 영화적 특이성은 이제 디지털적 가변성, 융합성, 복합성으로 바뀐다. 미디어 융합의 시대, 필름이나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물질적 베이스의 구분 대신 이제 포털들은 이미지와 동영상이라는 분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네마나 TV라는 매체 분류 대신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일반화된다.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가 구성해낸 것이 바로 필름과 디지털을 망라하는 이러한 동영상 문화다. 디지털카메라, 캠코더의 보급은 동영상 시청만이 아니라 제작을 일상화한다. 이러한 동영상이 뜨는 공간인 컴퓨터 스크린은 초음파 스크린 등과 더불어 텔레비주얼하며 레이더와 같은 군사 기술과 기원을 같이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컴퓨터 스크린 등은 점점 더 이미지화되고 그 이미지가 스크린상으로 나타나는 스크린 중심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 칸영화제 60주년을 맞이하여 구스 반 산트, 왕가위, 차이밍량 등 35명이 참가해 만든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영화, 영화관에 대한 향수어린 경배다. 80년대 후반의 미국 사회를 향한 진혼곡 상황은 이렇고 난 <위 오운 더 나잇> 극장 개봉에 맞춰 리뷰를 쓰고 있다. 이 영화를 어떤 맥락에 위치시키기는 매우 쉽고도 어렵다. 우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와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 <디파티드>, 그리고 최근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 등 노장, 명장들의 뉴욕 갱에 바친 연대기가 할리우드 영화창고에 적재된 중에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무슨 생각으로 ‘정통 범죄액션 드라마’인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감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뉴욕타임스>에 실린 경찰관의 장례식 사진의 비통한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는 부분은 그토록 많은 뉴욕의 갱들을 다룬 영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영화를 새삼스레 만들었는지를 추론하게 해준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영화의 절정은 비오는 날 추격신 뒤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의 죽음장면에서 온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본> 시리즈 이후 스트리트 액션의 연출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는데, 자동차의 와이퍼를 이용한 스위시팬 효과와 어떠한 CG 효과도 내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총격 장면- 숏건의 긴 총구가 추격 중인 차창 밖으로 나오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힌다― 에 따른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비통한 아들들과 동료들이 참석하는 장례식은 이 영화가 필름누아르, 갱 장르의 어법으로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는 내리고 아들을 지키려던 아버지는 그 빗속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다. 아들 바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빗속에서 거의 숭고하고 신성하게 클로즈업되고 멈춘다. 즉 이 영화는 애도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아버지, 예컨대 아들을 지키다가 희생하는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다. 아니,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라기보다는 그 죽음 앞에 애도할 수 있는 아들, 그 애도를 통한 아들들의 갱신, 각성한 형제들의 연맹에 관한 향수로 지극하다. 프로이트는 널리 알려진 에세이 <애도와 우울증>에서 사랑하는 대상이나 조국 상실에 대한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 두 양태로 분류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치러내지 못하면 그것이 일종의 병리적 상태, 우울증의 상태로 변이해가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2001년 9월11일 이전,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이나 가족, 즉 시민들의 애도 작업이 불가능하지 않았던 그리고 향락과 향유가 가능해 보였던 미국의 80년대 후반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복기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나쁜 놈들’이 러시아계 미국인 갱들로 구성된 것은 기존의 <대부>나 <디파티드>의 이탈리안계나 아일랜드계 미국인 갱들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 이민자들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듯도 하고, 기존의 갱영화들의 인종적 설정과 차이 만들기로도 보인다. 즉 80년대 후반만 해도 러시아 이민자와 그들의 친척들 몇명만 없애면 법질서의 회복은 가능해 보였다는 것이다. 영화는 1988년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디스코의 시대 ‘엘 카리브’라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인 바비(와킨 피닉스)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연인 아마다(에바 멘데스)와의 충분히 관능적일 수 있었던 정사신은 급작스런 방해를 받는다. 이런 엉거주춤한 중단은 영화 다이제시스 안에서 앞으로 바비가 겪을 고난을 전조한다. 이에 앞선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스틸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틸 사진들은 현재 NY PD 경찰들의 모습을 총이나 총탄을 페티시화하고 강조해 보여주지만 마치 1920년대 금주령 시대의 재연인 양 흑백이고 재즈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이 스틸 사진의 슬라이드 쇼에 이상하게도 감독 제임스 그레이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만들도록 추동시켰다는, 동료를 잃고 마음을 다친 경찰들을 담은 바로 그 사진은 부재한다. 파토스적이고 정감어린 사진 대신 도입부의 사진들은 한편으로는 총을 찬 경찰들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고, 시체 안치실에서 끝난다. 그 문제의 사진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 모여든 경찰관 동료들, 가족들의 애통어린 모습으로 사진이 아닌 하나의 시퀀스로 재연된다. 이 영화의 한편에는 애도할 만한 시민, 희생자로서의 경찰관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이 있고 그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이름 그루진스키 대신 앵글로 색슨계처럼 들리는 어머니의 성, 그린을 자신의 성으로 하면서 범죄 조직과 연결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아들이 경찰로, 적법한 시민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나이트클럽의 매니저로 일하던 당시 아버지 역할을 했던 러시아 이민자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뒤 감옥으로 보내진다. <위 오운 더 나잇>은 역설적이게도 밤의 지배를 선언하는 제목과 달리 사실 누가 미국의 낮을 지배하는가라는 ‘시민권’ 주장을 그 정치적 무의식으로 하고 있다. 카바레를 경영하는 러시아 이민자들 외에 아마다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바비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못마땅해한다. <호모 사케르>의 저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개인과 시민의 차이는 주권 그리고 국민국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낼 때 뉘른베르크 법령 이후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그들의 국적을 완전히 박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권의 행사는 주권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시민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밤의 지배자들인 나쁜 이민자들은 축출되고 죽은 시민이 된 아버지의 희생은 애도된다. 그리고 그의 희생은 형제들의 혈연 동맹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시작, 사랑은 아마다와 바비의 것이었으나 영화의 끝, 바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형 그루진스키다. 이 영화는 그래도 시민이 적을 색출할 수 있는 미국의 80년대를 향수하나,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의 유통은 글로벌해 프랑스, 스페인어판 <위 오운 더 나잇>이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닌다. 미국 시민권을 가졌던 영화의 이러한 유통, 변형이 흥미롭다.

[영화읽기] 1억5천만달러 영화를 혼자 보다니…

-Dear 래리 & 앤디 “사진은 사실에 가까운 매체이지 사실 자체는 아니다. 사실에 가깝다는 이유가 사실을 가장 완벽하게 왜곡할 수 있다.” -김아타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입니다. 아니 진짜보다 더 진짜 같죠. 각종 미디어와 영상매체, 인터넷의 사이버 세계는 이미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성형수술이 유행하고, 몸에 걸친 브랜드가 그 몸 자체보다 중요해지고, 광고를 보고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상품을 보고 광고를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세계의 게임 아이템을 사기 위해 진짜 돈을 쓰고, 심지어 살인까지 합니다. 하지만 진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일찍이 우리 한국의 선조들은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뱉어야 맛이라고 진짜 느낌의 중요성을 설파하셨습니다. 프랑스의 한 현대 철학자는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현상을 시뮬라시옹이라 이름지으며 경고했고, 우리나라의 한 가수는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라고 노래하며 이에 화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당신들은 <매트릭스>라는 영화로 이를 멋지게 영상 언어로 표현해냈죠. 와우!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디지털 신호로 이루어진 가짜이며 우린 그것을 진짜처럼 믿고 잠들어 있는 동안 시스템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는 배터리에 불과하다라는 영화 내용은 장자의 <호접몽>의 비극적 버전을 연상시키며, 시뮬라시옹의 허깨비 세상에서 버둥대고 있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들었습니다. 해체주의라는 어려운 철학을 몰라도 우리의 머릿속에 촘촘히 들어선 매트릭스는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물론 네오의 애크러배틱 총격 액션은 만화 같긴 했지만 어차피 매트릭스, 짝퉁 세계에선 뭘 뭣해하는 깨달음과 함께 오히려 통렬한 쾌감이 작렬하게 했죠.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음이 있다면 손가락 하나로 저 산을 옮길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역설적으로 바로 접수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죠. 현실이 진짜 현실이 아니라는 믿음, 그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힘듭니다.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죠. 그래서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물 위를 걷다가 발을 쳐다보고 두려움을 느낀 순간 바다에 풍덩 빠져버립니다. 개인적으로 <매트릭스>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면. 그것은 360도 스틸컷을 이어붙인 네오의 멋진 총격신이 아니었습니다. 네오의 동료가 네오를 배신한 뒤,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와 멋진 레스토랑에서 연어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입니다. 짝퉁 세상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 한 조각의 분홍빛 연어 살코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행복에 눈물겨워하죠. 비록 가짜이긴 해도 매트릭스 밖의 진짜 세상에서 먹던 꿀꿀이죽 같은 음식보단 100배 나았던 겁니다. 그만큼 매트릭스는 벗어나기 힘든 치명적 유혹입니다. 텔레비전, 인터넷을 끄고 살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평생 꿀꿀이죽을 먹을지언정 시스템의 배터리가 되어 노예처럼 사는 것을 과감히 거부하며 마침내 네오와 친구들이 멋지게 점프할 때 우리 심장은 터져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짝퉁의 매트릭스 세계를 과감히 거부하며 (해체하며) 진실을 세상에 알린 그들은 체 게바라였고, 데리다였고, 갈릴레오였고, 예수였습니다. 영웅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도요! 이렇게 심오한 얘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당신들에게 어린아이들부터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엄지를 치켜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당신 나라의 쌍둥이빌딩이 무너졌습니다.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더군요. 정말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이 혼미해졌습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서민적인 대통령을 뽑았더니 그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시스템을 강화하자고 부르짖더군요. 기타를 퉁기는 가짜 이미지를 진짜처럼 믿게 했던 매트릭스의 책략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죠.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보다 더 충격적인 대반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좌우간 당신들은 이제 모두가 기다리던 새로운 영화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었고 드디어 난 어제 그것을 보았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할 수 있기에 마음의 평정심을 잡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놀라움이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컬러로 질주하는 그 엄청난 속도감은 제 눈을 압도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영화인가?’ 하는 경이로움과 형언할 수 없는 기술력에 모골이 다 송연해지더군요. 그러나 더 깜짝 놀랐던 것이 뭔 줄 아십니까? 극장에 관객이 저 혼자뿐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엔 사실 한쌍의 남녀가 제 뒤에 앉아 있었는데 보다가 중간에 나가버리더군요. 결국 그 이후 러닝타임 절반을 저 혼자서 극장을 독차지한 채 1억5천만달러짜리 영화를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르더군요. 이게 꿈인가 생신가, 기뻐해야 할 일인지 황당해야 할 일인지 머릿속이 좀 복잡해졌습니다. 전깃값도 안 나올 짓을 하고 있는 극장쪽에 민망하고 죄송했습니다. 늘 한국영화를 멋대로 교차 상영하고 조기 종영하는 극장들을 미워했는데 처음으로 동정심도 들더군요. 물론, 마지막 타임의 영화였지만 압구정동이라는, 서울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거리에 있는 훌륭한 극장에서, 개봉 2주차밖에 안 된 당신들의 블록버스터영화를 왜 난 혼자서 봐야 했을까요? 듣자하니 미국에서도 흥행성적이 좋지 않더군요. 아니 1억달러 이상 쏟아부은 마케팅비와 당신들의 명성, 영화의 제작비에 비해 속된 말로 참패였습니다. 흥행이 안 되었을 때의 감독의 처참한 심정을 잘 알기에 어제 극장에서 팔자에 없는 단독 관람을 하면서 당신들 걱정에 영화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물론 <스피드 레이서>의 4분 분량에 해당되는 돈(1억5천만달러를 러닝타임 135분으로 나누니 1분당 11억원가량 되더군요.)을 평균제작비로 쓰는 나라의 영화감독으로서 주제 넘은 걱정인지도 모르겠지만, 극장에서 블록버스터영화를 혼자 보는 평생에 몇번 없을 기회를 베풀어준 당신들의 호의에 이런 식으로나마 답을 하지 않으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든 것입니다. <스피드 레이서>는 알다시피 40년 전에 만들어진 재패니메이션을 토대로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실패했고, 만화적 상상력을 현실적인 영화매체에 옮긴다는 것은 본전을 못 찾는 행위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슈퍼맨>이나 <스파이더 맨>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물들이 영화로 만들어져 성공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만화와는 다른 전략을 취했죠. 철저히 SF영화적인, 다시 말해 특수효과가 들어갔지만 매우 사실적인 리얼리티를 만드는 데 고심을 했단 말입니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배짱을 보여주더군요. 아예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 원작에 얼마나 철저히 충실했는지를 한번 보여주겠어라고 작심한 듯 화면들은 온통 물감을 발라놓은 듯한 총천연색의 컬러로 칠해졌고, 앞과 뒤에 있는 물체의 초점이 차이 나는 영화 렌즈의 특성(피사계 심도)을 무시하고 아예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캐릭터들을 2차원 세계 속 애니메이션 인물들처럼 만들려고 했더군요. 이 모든 게 컴퓨터그래픽으로 이루어졌을 텐데 남들은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 비싼 돈 들여 쓰는 컴퓨터그래픽을 당신들은 거꾸로 가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썼더군요. 심지어 차가 달릴 때의 배경화면과 도시의 모습은 아예 대놓고 만화영화의 화면으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 안 되어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명 컨셉을 그렇게 가져간 결과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원작 애니메이션 <마하 GOGOGO>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였고, 자신감이었으며,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통섭’을 시도한 혁신적 영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을 넘어 게임의 영역까지 들어가더군요. 레이싱 장면은 마치 카트라이더나 플레이스테이션의 카레이스 게임의 그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얼굴만이 오려붙여진 디지털 화면들이 만들어내는 무한 자유의 세계. 영화이자 애니메이션인 동시에 게임이기도 한 삼위일체의 통섭된 비주얼 스타일을 당신들이 구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그 천재성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했던 <씬 시티>나 <300> 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당신들 영화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그 영화들은 스타일의 일관성을 지키느라 무진 애를 썼지만 당신들은 일찌감치 그딴 건 이제 중요치 않다고 집어던진 뒤 광란의 질주를 뻔뻔하게 벌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영화라고 주장하기도 하더군요. 이 말이 맞든 안 맞든 <스피드 레이서>가 제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이것은 비주얼 콜라주임과 동시에 입체파 화가의 그림이며 오락실과 비디오 아트를 오가는 영상 혁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앞서간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을까요? 왜 많은 관객은 당신들 영화의 멋진 그래픽과 찬란한 영상적 실험을 외면한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스토리가 너무 유치하다고, 아이들 영화 같다고. 하지만 이 영화가 만화영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으며, 또 비록 스토리가 유치하더라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만 700만명을 동원한 <트랜스포머>야말로 그런 대표적인 예 아닐까요? 하지만 당신들의 영화 <스피드 레이서>와 <트랜스포머>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데 모든 총력을 기울여 정말 로봇이 진짜처럼 보였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이 쇳덩이들은 진짜다’라고 최면을 걸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가 지닌 숙명인 ‘환상성’을 깨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야말로 가짜를 진짜처럼 포장하는 대표적인 매체이자 그 자체가 시뮬라시옹이며 매트릭스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달콤한 꿈을 꾸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것이고, 많은 영화작가들은 그 기계장치가 만들어낸 환상을 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가짜 꿈을 꾸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고 주장한 것일까요? 매트릭스를 깨기 위해 떨쳐 일어섰던 원조답게 말입니까? 당신들은 나아가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실사+애니메이션+게임’이 짬뽕된 (고상한 말로 ‘통섭’된)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하며, 이제 더이상 진짜라고 뻥치는 가짜에 속지 말고 아예 오리지널 가짜를 즐기자, 그것이 더 솔직하고 순수한 영화 아닌가? 하고 놀라운 질문을 던지더군요. 그 철옹성 같은 시뮬라시옹을 타파하는 것은 아예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가짜를 만드는 것뿐!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이번에는 매트릭스를 깨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들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진짜 가짜들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에 우리를 과감히 초대했습니다. 빨간 약을 먹을래, 파란 약을 먹을래?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흥 종교의 교주처럼, 당신들은 새로운 100% 짝퉁 월드를 만들어 우리를 불러모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의 용기와 선견지명은 정말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관객이 그 새로운 경험을 신나게 즐겼고, 돈 아깝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더 많은 관객이 당신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가짜 이미지들 때문에 영화를 보며 하품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영화나 실험영화라면 몰라도 1억5천만달러짜리 블록버스터에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죠. 왜 그들은 가짜를 가짜로 그냥 즐기지 못했을까요? 왜 그것을 감정의 낭비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메리카는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파생실재(hyper-real)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미 성취된 것처럼 행세해온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파생실재이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지만 그것은 모두 꿈의 재료이기도 하다.” -보드리야르 당신들은 가능한 꿈의 재료들을 총동원해 디즈니랜드를 만들듯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아름답고, 컬러풀하고, 정의롭고, 스피디한 파생실재, 즉 존재하지 않는 실재이죠. 그러나 9·11 이후의 미국 사람들은 더이상 그들의 나라가 안전한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서브프라임 사태로 무너지기 시작한 경제는 그 실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도록 현실감있는 것인지 피부에 와닿게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지구 반대쪽의 한국은 인터넷의 힘으로 뽑은 대통령이 결국 미디어가 만들어낸 헛된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깨닫고, 오로지 믿을 건 내 주머니의 돈뿐이라 여기는 씁쓸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10년 전 당신들의 영화가 예견했듯,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죠.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공간이 어딘지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꿈이 깼고, 연어 스테이크 대신 눈앞에 꿀꿀이죽이 놓여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감이 들었고, 슬펐고,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매트릭스를 더 촘촘히 그리고 강력하게 짜나가고 있었고, 이제 그 누구도 그 안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집값이 폭락하면 한국의 주식이 떨어지고, 중국에 지진이 나면 전세계의 주식이 폭락하는 이 시스템은 모든 것이 연동되게 하였고, 더이상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것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나온 당신들의 역작 <스피드 레이서>는 갑자기 새로운 매트릭스의 환상 속으로 관객을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디서 날아온 외계인들이 만든 영화마냥, 오리지널 가짜들로 이루어진 인공 세계의 디즈니랜드로 초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꿀꿀이죽을 떠먹고 있던 사람들이 난감해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군요. 스토리라는 ‘엔진’과 캐릭터라는 ‘연료’는 40년 전 만화와 똑같고, 겉모습은 이게 영화인지 게임인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최첨단 카본 차체로 무장한 레이싱카를 만든 겁니다. 내용은 20세기, 스타일은 21세기라는 속과 겉의 불일치는 마치 후진 기어를 넣으면서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액셀을 밟아대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일으켰죠. 결과적으로 두 시간이 넘는 레이싱쇼를 즐기려고 세월이 좋지 않아 가뜩이나 얄팍해진 지갑을 열 관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국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지 않으려 해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화를 둘러싼 주변의 정세가 그 영화의 존망을 좌우하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재벌 2세도 아닌 내가 당신들의 영화를 극장에서 혼자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어야 할 이 땅의 고등학생들이 엉뚱하게도 청계천 광장에 모여 당신들 나라의 소를 수입하지 말라고 함성을 지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움에 대한 시도, 미래의 영화에 대한 실험은 모든 감독들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스피드 레이서>처럼 배우는 스튜디오의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만 하고, 나머지 배경은 모두 컴퓨터가 합성해주는 영화가 미래의 영화가 될까요? 어쩜 앞으론 배우마저 필요없을 수도 있겠죠. <파이널 환타지>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 등은 그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만달레이>, 피터 왓킨스의 <파리코뮌>처럼 배경을 무시하고 배우의 연기와 스토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실험을 한 영화들도 있습니다. 똑같이 스튜디오 내에서 간단한 세트를 짓고 촬영하지만 컴퓨터로 배경을 합성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에 훨씬 적은 예산으로 완성되죠. 그러나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다보면 배경이 더이상 신경 쓰이지 않더군요. ‘스토리’와 ‘캐릭터’가 영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환상이란 결국 머릿속에서 합성되는 것이지 결코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죠.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를 관리하는 영역에서 주로 확대된다.” -노르베르트 보비오 10년 전, 당신들은 ‘해체’라는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끌어와 <매트릭스>라는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스템의 가공할 실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스스로를 부정하듯이 <스피드 레이서>라는 가상현실을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현재의 화두가 무엇이든 불행히도 그것은 관객과 소통되지 못했습니다. 가짜임을 속이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내가 바로 진짜 짜가야! 라고 외친 그 용기는 대단하지만 왠지 속세를 떠나 은둔자의 길로 가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안 그런 척하는 짜가가 너무 많고 그 짜가는 스미스 요원들처럼 스스로를 복제하며 점점 교묘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철저히 숨기면서, 세계를 단일한 매트릭스로 묶기 위해 서로서로 뭉치고 있습니다. ‘통섭’ 이전에 ‘소통’이 먼저라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아무쪼록 당신들의 놀라운 능력으로 불가사리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 매트릭스와 시스템의 괴물들을 해체시키고, 그들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합쳐져 오히려 단절되어 있는 다른 문화와 다른 생각, 다른 진실, 다른 성이 서로 소통하는, 그래서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accept)하는 쾌감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레이스 결과는 모두 조작되었다! 라고 외치며 시스템에 저항하던 영화 속 주인공 스피드가 생각나는군요. 당신들이 조만간 힘찬 엔진 소리와 함께 귀환하길 진심으로 기다립니다. 그리고 흥행 실패는 넘 걱정 마세요. 투자한 스튜디오는 1억5천만달러를 날렸지만 그 결과 회사의 주식이 떨어져 싼값에 누군가가 주식을 왕창 살 것이고, 다음에 다른 영화가 대박을 내면서 그 주식이 올라 그 누군가는 떼돈을 벌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당신들이 만든 영화 속에서처럼 말입니다. 근데 그 누군가가 혹시 당신들 자신은 아니겠죠 래리 & 앤디? with LOVE+HOPE 2007. 5. 20 서울에서, 번개호를 떠올리며, 정윤철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60년대 동명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영화화한 <겟 스마트>는 5월 마지막 날 첫 기자 시사회를 할리우드의 차이니즈 만 극장에서 가졌다. 다음날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2부로 나뉘어서 진행되었다. 스티브 카렐은 영화에서의 모습이나 기자회견장에서 느껴지는 모습에 별반 차이가 없는 배우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너무나 진지해서 엉뚱하고, 그런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난감해한다. 아래는 스티브 카렐과 앤 헤서웨이, 피터 시겔 감독이 참석한 기자회견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스티브, 프로듀서 말이 회의를 하자고 불렀더니 (당신 같은 스타가) 다소곳이 프로필 사진이랑 이력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더라고 하더라. 사실인가. =(스티브 카렐) 그렇다. 워너브러더스에서 전화가 와서 미팅이 잡혔다. 그래서 내 딴에 나름대로 프로필 사진이랑 이력서를 준비해서 찾아갔다. 맥스웰 스마트 역을 따내려는 다른 배우들로 가득 찬 오디션을 예상하면서 잔뜩 긴장해서 도착했더니 넓은 회의실에 프로듀서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이미 캐스팅이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그냥 머리가 펑 하고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물론 행복해서다. 뭐랄까, 믿겨지지가 않았다. -원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 =(스티브 카렐) 엄청난 팬이었다. 아마 이 작품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았나 싶은데. 이 작품은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피터, 앤 헤서웨이를 캐스팅하게 된 계기는. =(피터 시걸) 알다시피 배우간의 호흡이 중요하지 않나. 사실 앤은 굳이 와서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지만, 원작의 팬으로서 본인이 와서 스티브와 리딩을 하겠다고 우겼다. 호기심이 생기더라. 두 사람을 함께 두고 보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티브가 대본에 없는 대사로 계속 이어나가는데 앤이 그 호흡을 계속 따라가면서 받아치더라. 그때 이 두 사람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대사가 실제 영화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앤,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녀야 했는데, 어땠나. =(앤 헤서웨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하이힐 훈련은 워낙에 지독하게 한지라(웃음)…. 사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육체적으로 더 힘들었다. 이 작품에서는 스턴트팀, 무술 전문가팀들이 언제나 곁에서 대기하면서 우리 동작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지, 진짜 첩보원처럼 보일지 세심하게 다듬어주었다. 덕분에 할리우드에서 액션하고는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두 배우가 영화에서는 제법 액션 태가 나온다. 물론 우리 둘은 찍다가도 서로 킥킥댔지만. -편집실에서 어떤 컷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피터 시걸) 고민스럽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촬영장에서도 꽤 괜찮은 장면을 잡아냈다 싶어도 혹시 모르니까 작가들에게 백업 조크들을 따로 만들어놓도록 요구하는 편이다. 계속 테스트 스크리닝을 하면서 나이트 비전 카메라로 끊임없이 관객의 표정 등의 세세한 반응을 확인하면서 더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본드걸과 에이전트 99와의 차이가 있다면. =(앤 헤서웨이) 내가 더 재미있다는 점? 아, 그리고 비키니를 입지 않는다는 점도. 내 캐릭터는 본드 걸의 최신 버전이라고 할까. 에이전트 99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그려진 그녀는 다소 독선적이고, 부드러운 내면은 밖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맥스와 티격태격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지켜오던 균형이 조금씩 깨지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 역시 그런 자신의 변화를 좋아하게 되고. 나 역시 어떤 계기를 통해 스스로 몰랐던 새로운 나 자신을 깨닫곤 한다는 점에서 이 캐릭터가 겪는 변화에 충분히 공감한다. -스티브, 명실공히 당신은 할리우드에서 성공신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스티브 카렐) (정색한 표정으로) 하나도 놀랍지 않다. 성공할 줄 알고 있었다. (주위에서 웃음이 터지자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이 성공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기회를 행복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너무 빠지지는 않으려고 한다. -앤, 코미디 연기하는 것이 어떤가. =(앤 헤서웨이) 전작에서도 그렇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도 천재들에 둘러싸여 많이 배우고 있다는 점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통해서는 코미디를 대놓고 드러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웃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배웠고, 이번 작품에서는 실패를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 배웠다.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는 점. 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스티브, 드웨인 존슨과 키스한 소감이 어떤가. =(스티브 카렐) 상상해보고 꿈꾸어왔던 모든 것의 결정체다. (좌중 폭소. 그러나 본인은 웃지 않는다.) 이 영화는 세 가지 면에서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먼저 매일매일 제공된 훌륭한 촬영장 음식. 다음으로 멋진 캐스팅. 그리고 드웨인과 키스할 수 있었던 것. 드웨인은 정말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옆에서 감독이 부드러운 피부라고 속삭이자 결국 피식거리며)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다. 금방 막 구워낸 과자같이 말이다. (웃음)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창가에 발돋움해 옆집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 미더덕을 만원 넘게 팔았다며 도둑질한 것처럼 가슴 떨려하는 어머니, 동생들의 끼니를 위해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큰누나. 이 일화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책 앞장으로 달려가 작가의 나이를 재차 확인하고 싶어진다. 1977년생의 만화가 최규석(<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이 자신의 가족들을 인터뷰해 그린 자전적 이야기 <대한민국 원주민>은 1980~90년대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렸을 적엔…”이라며 운을 떼는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나 존재할 법한 세계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말하는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갑자기, 그리고 너무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근대적인 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현대사의 페이지에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 최규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한푼의 과장없이 진솔하게 펼쳐나간다. 개발과 변화의 급물살이 제치고 지나간 자리에 가만히 남아 있는 삶이, 인간의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