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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들이 왜 그런 마치즈모(machismo, 남자다움)를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폭력을 불러오는가를 분석한 것과는 달리 요즘의 매스미디어는 분석적, 교육적인 기능을 하지 못해왔다. 우리는 미디어로 인해 깊이있는 이해의 기회를 빼앗겨왔다. 특히 중동지역의 정치에 대해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변할 것인가에 대해선 그리 긍정적인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할리우드의 역사가 말해주듯, 영화산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할리우드는 참사와 폭력을 이윤과 연결시켜왔으며 빌딩폭발이나 테러를 다룬 액션영화의 개봉을 연기하긴 했지만 결국엔 또 다른 방식으로 참사를 다루는 영화들을 만들어낼 것이란 전망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한동안 람보 식의 남성적인 영웅들이 인기를 끌다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자 폭력이나 참사를 스펙터클하게 다루는 액션영화로 바뀌었듯이 폭력을 스펙터클하게 꾸며내는 방식은 자제하겠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슬로베니아 출신 학자 슬라보에 지젝도 인터넷에 참사에 대한 글을 올려 뉴욕참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이제야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일상처럼 일어나는 삶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 폭발의 교훈이 있다면, 미국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다.” 로스앤젤레스/이남, 영화 칼럼니스트

수색 남자, 강릉 여자

● <봄날은 간다>에서 세월은 서울의 수색과 강릉을 잇는 길을 따라 흐른다. 수색은 내게 다소 낯선 곳이다. 내 발걸음이 수색에 닿아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도 수색에 대한 이미지는 있다. 중학교 동창들 덕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홍은동에 있었는데, 그 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들 가운데 수색국민학교- 그 학교가 지금도 있다면, 요즘 말로는 수색초등학교겠지- 출신들이 몇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색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 이미지는 가난이었다. 그 친구들 가운데 즈런즈런한 분위기를 내뿜는 아이는 없었다. 수색은 아마 가난한 동네였던 모양이다. 그런 가난의 분위기가 나를 그 아이들과 가깝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가난했으므로. 하긴,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수색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가 가난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살던 마포를 돌이켜보면, 비좁은 방과 불결한 변소, 장터의 아귀다툼, 잦은 정전과 단수, 자리끼나 요강 속의 오줌까지 얼리는 겨울 윗목 같은 것이 대뜸 떠오른다. 그 시절의 부자 동네였던 종로쪽에서 온 친구들도,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가난했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고전적 부자들의 거처로 애용되는 가회동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가난을 품고 있었는지를 나는 그 시절 그 동네 살던 친구 집에 놀러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니, 수색과 가난을 잇는 내 연상은 그곳이 서울의 끝이라는 내 알량한 지리 지식의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니, 수색에는 아직도 그 가난이 얼마쯤 남아 있는 듯하다. 물론 1970년대 초의 가난과는 다르겠지만. 스크린 속의 수색은 지방 소읍 같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며 서울이 겪은 그 어지러운 변화가 이 물빛 동네에는 인색하게 배분된 모양이다. 그걸 다행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일이겠지만, 영화 속의 수색이 나를 10대의 서울로 이끌며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 뭉클함의 한 자락은 달콤함이었다. 강릉 여자로 내가 처음 알게 된 사람은- 타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신사임당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관념 속의 여자였다. 육신을 가진, 그래서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처음 알게 된 강릉 여자는, <씨네21> 독자들이 아직 그 이름을 잊지 않았을, 조선희씨다. 나는 그녀를 1988년 초 안국동의 한겨레신문사 창간사무국에서 처음 만났다. 어쩌면 창간사무국이 아니라 그 부근 한국병원의 신체검사장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가냘픔이었다. 물론 그녀의 외양이 내면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내가 정식 사원으로 <한겨레>에서 일한 기간은 6년이었는데, 조선희씨는 그 시절 가장 가까이 어울린 동료 가운데 하나였다. 자기주장이 강한- ‘자기주장이 강한’이라는 표현은 흔히 ‘이기적인’ 또는 ‘독선적인’이라는 말의 완곡어로 사용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적어도 나보다는 덜 이기적이었고, 적어도 나보다 더 독선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뜻이다- 여자여서, 나는 그 시절 그 친구에게 늘 얼마쯤 주눅이 든 채 살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일했던 시기를 회상하는 것은 즐겁다. <한겨레> 시절이 내게는 직업적 열정으로나 주위 사람들과의 우정으로나 가장 뜨거웠던 때였던 것 같다. 1991년의 첫 주말에 나는 조선희씨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문학평론가 홍정선형이 선동해서 문인들과 기자들 몇이 어울린 나들이였다. 눈이 많이 온 날이었고,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조선희씨의 차는 눈길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며 질금질금 전진했다. 눈오는 산사에서- 바로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그 눈오는 산사 풍경이었다- 밤도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의 조그마한 육체가 내장한 주름 많은 기억들과 낙관적 열정에 새삼 감탄했다. <봄날은 간다>는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를 백안시하고 유럽을 청안시하는 미적 귀족들에게 이 가을날 찾아든 축복이다. 그림도 소리도 섬세하고, 이영애씨와 유지태씨의 연기도 익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왜 노골적으로 <스포츠조선> 선전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작품이 섬세했던 만큼, 관객의 미감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스크린 속 광고판의 이물감은 외설스러울 만큼 도드라졌다(이 부분도 정말 같은 감독의 솜씨란 말인가?). 그것은 관객에게 무례한 일이라 할 만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모욕당한 느낌을 받았다. 왜 내가 관람료 7천원을 내고 한 회사의 광고용 영화를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 광고판이 공영방송에 나온 것도 아니니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그게 불쾌하면 영화를 안 보면 그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도 그걸 봤을 때의 불쾌감을 털어놓음으로써,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영화팬들의 판단을 도울 권리는 있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

쇼라고? 치열한 생존싸움! <시리즈7>

<시리즈7>은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을 수차례 만들어낸다. 또 폭력·액션물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수시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적 `액션'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 좀체 받기 힘든 R등급(17살 미만은 부모 동반의 경우에 한해 관람 가능)을 받았다. 그렇다고 폭력의 선정성을 상업적으로 착취하려는 B급 영화는 아니다. 총격으로 피가 튀고, 칼날이 사람 몸을 헤집는 따위의 섬뜩한 장면을 쏟아낼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피한 흔적이 역력하다. 약간 상하는 비위를 감수한다면, 희귀하고도 끔직한 풍자극을 만나게 해준다. <시리즈7>은 극단적인 서바이벌 게임을 쇼처럼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가장했다. 시청률 1위를 기록중인 `적수들'이란 프로그램의 7번째 에피소드로, 방송사가 무작위로 정한 참가자들은 프로그램 진행자들로부터 무기를 건네받는다. 그 때부터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일종의 살인 게임이다. 성공적으로 최후까지 살아남더라도 상금 따위는 없다. 다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뿐이다. 출연 거부는 불가능하며, 24시간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이 방송된다. 인터뷰, 상황 재현극 등 텔레비전의 제작 관습을 빌어 미디어의 속성을 비꼬면서 드러낸다는 점은 <트루먼쇼>나 <에드TV>와 비슷하다. 하지만 웃거나 감상에 빠질 틈이 없다. 미디어 비판을 넘어 사람 속에 숨어있는 동물적 본능을 공포스럽게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스타 도온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다. 영화는 도온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던 다른 참가자를 순식간에 쏴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내 아기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게 없다”는 그는 능숙하게 살인을 이어가며 우승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성스러운 것으로 추앙받던 모성애는 이렇게 `추락'한다. 넉넉한 중년여자의 표정을 한 코니는 응급실 간호사이자 독실한 신앙인이다. 하지만 게임에 초청된 그는 악마같은 나이팅게일로 변한다. 고통을 덜어주던 주사기를 흉기로 사용하고, `게임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 힘을 모으자'고 참가자들을 꼬득인 뒤 잔혹하게 살해한다. 더 끔찍스러운 건 이들을 지켜보는 시선이다. 시청률 1위가 증명하듯 사람들은 이 살인게임에 열광하고, 프로그램 진행자나 카메라맨들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져도 방송에 차질을 빚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와중에 로맨스가 등장한다. 고환암으로 죽어가는 전위적인 예술가 제프는 도온의 옛 애인이며, 이들은 아직 서로를 잊지 못한 상태다. 살기 위해 연인을 죽여야하는 이들에게서 어쩐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 커플의 운명이 떠오른다.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의 시나리오를 쓴 다니엘 미나핸이 각본을 쓰고 감독했다. 27일 개봉.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흥행돌풍 <조폭마누라> 제작자를 만나다

<조폭 마누라>의 흥행 성공이 지금 영화계의 최대 화제다. 평단에서는 혹평이 많았음에도 지난 주말까지 2주반 동안 전국 관객 320만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독특한 건, 충무로에서도 이 영화의 흥행을 놓고 반기는 이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며 우려하는 이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 영화의 제작비 전액을 투자한 서세원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서세원(45)씨는 어떻게 생각할까. 영화평론가 심영섭(35)씨가 지난 15일 이 영화를 배급한 코리아픽처스 사무실에서 서씨를 만났다. 지난 85년 <납자루떼>를 만든 뒤 16년 만에 다시 영화에 뛰어든 서씨는 “지금 나는 승자이니까 욕을 들어도 행복하다”며 특유의 코믹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인터뷰에 응했다. 심영섭 <조폭마누라>(줄여서 <조폭>)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가. 서세원 좋은 영화는 아니다. 영화적으로 좋은 영화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십계> <사운드 오브 뮤직>, 근간에는 <택시 드라이버> 같은 로버트 드 니로 나오는 영화들. <조폭>은 약간 복고적인, 70~80년대 홍콩영화의 아류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잘 알지요(웃음). 심 그런데도 전 재산을 다 댈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한 건 왜인가. 서 서세원이 바라보는 좋은 영화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영화다. 나는 예술성은 없는 사람이다. 작품도 중요하지만 투자는 돈 놓고 돈 먹는 것이다. 이 영화가 한국영화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일 수도 있고, 욕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 흐르는 한국적인 느낌이 있다. 그래서 투자했다. 지난 3월 투자를 결정할 당시 <조폭>은 돈을 못 구해 7개월 동안 표류하고 있었다. 조진규 감독이나 신은경씨, 현진영화사 이순열 대표 모두가 막다른 길이었고, 나도 막다른 길이었다. 모두가 궁지에 몰렸으니 한방 터질 것 같았다. 그게 진짜 터졌다. 하느님이 서세원에게 한방 준 거다. 심 투자자로서 상업주의 논리에 부합해 성공하는 영화가 가장 좋은 영화라는 말로 들리는데, 그러면 이 영화가 우리 사회나 한국영화에 끼칠 영향은 생각했는지. 서 사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한다는 건 관객을 우롱하는 일이다. 박정희부터 노태우 정권 때 좋은 영화를 채로 걸러서 수입했다. 그건 분명히 잘못된 거다. 관객은 즐기고 문 나오면서 잊어버린다. <친구>가 최근 한 살인사건의 원인이 됐다고 시끄러운데 <친구> 때문에 살인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봄날은 간다> 보면 모든 국민이 녹음기 들고 연애하겠네. 심 <조폭>이 대박 터진 뒤로 어떤 제작자가 앞으로 무슨 영화할지 갑갑하다고 했다. 흥행기류가 변하면서 앞으로 아류작이 많이 나올 거다. 홍콩영화도 누아르의 아류작이 마구 나오면서 무너진 것 아닌가. 서 홍콩처럼 오갈 데 없는 데서는 아류작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르다. 다 따라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이런 것 하고, 저 사람은 저런 것 하면서 배분이 된다. 이주일씨, 신영균씨 국회의원 됐다고 서세원이 출마하느냐? 나는 영화한다. 갑갑하다는 사람은 영화 안하면 된다. <조폭>은 한 시즌에 1등한 한편의 영화일 뿐이다. 심 <조폭>의 흥행요인은 뭐라고 보는가. 나는 막가파 영화라고 본다. <투갑스>부터 시작한. 막가파 영화는 절대적인 확신과 서비스 정신으로 밀고 간다. 올봄에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 등 그런 영화가 다 잘 된다. 하지만 <교도소 월드컵>은 안 됐다. 다 같은 막가파인데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 서 우선 <투캅스>는 <마이 뉴 파트너>라는 프랑스 영화의 아류다. <조폭>은 조진규 감독이 5년간 연구한, 정성이 많이 들어간 막가파다. 같은 막가파라도 성능있는 막가파와 베낀 막가파는 다르다. 그리고 <신라의 달밤>은 한국적 정서가 있다. 누구나 경주에 수학여행 가서 패싸움하고, 학교 때 아무 것도 아니었던 애가 출세해서 큰소리 쳐서 속상한 일이 있을 거다. <엽기적인 그녀>처럼 요즘 젊은 애들 술 먹고 오바이트 하는 여자 등쳐준 경험이 있을 거다. 거기에 이어 <조폭>은 요즘의 모계사회적 분위기를 잘 그렸다. 우리 집도 마누라가 돈줄 쥐고, 내가 코너에 몰리면 유엔군처럼 나타난다. 영화 마지막에 박상면이 신은경에게 가위 건네주는 장면은 의미가 깊다. 아무리 남자가 복수해도 주도권을 여자에게 준다. 남자의 비애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조폭>은 참 좋은 영화다. 조진규 감독은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이다. 심 여성평론가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여성전사를 내세우면서, 그 여성전사가 성을 무기로 삼지 않는다. 신은경은 힘과 물리력으로만 승부한다. 착한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가 사용하는 가위는 거세의 이미지다. 하지만 여성성을 접대부에게서 배운다든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새가 뭐냐”는 아이의 질문에 “짭새”라고 말하는 무지를 드러내는 데서 유머를 추구한다. 여성을 세우는 척하지만 그 안에는 여성비하가 함께 들어있다. 서 그래서 신은경의 어린 시절을 많이 넣었고 신은경의 여성적 측면도 나오는데 시간적 제약 때문에 뺐다. 결손가정이고 고아원에 버려지고, 인성교육을 뭇 받고, 그래서 황폐해지고…. 그런데 스피드와 (관객들이)즐기는 것에 승산을 두니까 편집에서 다 드러냈다. 그래서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참 정확하게 찍네. 다른 평론가들과 달라(웃음). 심 재미와 안이한 발상은 구별돼야 할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면서 재밌게 보는 영화가 있다. 지나치게 상업주의로 가고, 상업주의라는 논리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건 납득이 잘 안된다. 서 면죄부가 아니다. 옛날에 <미드나잇 카우보이> 같은 좋은 영화를 국제극장에서 열명 남짓한 관객과 함께 보면서 영화는 많이 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25년간 텔레비전에 출연하면서 더 깊어졌다. 우선 시청률이 높아야 한다. 서세원쇼도 시청률이 높으니까 살아 남는다. 많이 보면 된다는 신념은 내 어머니도 아버지도 심영섭씨도 못 말린다. (심)그게 그말 아닌가. 성공하면 된다는. (서)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같다고 본다면 할 수 없다. 평행선이다. 심 대중들에게 어떤 문화적 아이콘이 되고 싶은가. <조폭>의 이미지와 중첩되길 원하는지, 아니면 스스로 인정하는 좋은 영화의 이미지와 중첩되고 싶은지. (서)나는 변신을 잘 한다. 다음 영화가 발표되면 그 뒤로는 그 영화가 내 이미지가 될 거다. (심)그렇다면 서 대표의 명예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서 이 영화로 지금까지 세금 빼고 한 40억원 벌었는데, 전부 영화에 투자할 거다. 영화로 돈 벌어서 절대 다른 데 쓰지 않는다. 3분의 1은 코믹, 3분의 1은 액션, 나머지 3분의 1은 이른바 좋은 영화에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 7월부터 극비리에 찍고 있는 영화가 있다. 조폭과 무관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코미디다. 또 내년에는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찍으려 한다. 내년까지 여섯 편 만들어서 모두 합해 1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게 목표다. 그러나 캐스팅에 수억원씩 쏟아붓지 않을 것이다. 지금 충무로는 배우들을 움켜쥐려고 캐런티를 올리면서 서로 제살 깎아먹고 있다. 나는 A급 배우는 안 쓰고, 배우를 개발해 나갈 것이다. 정리 임범 기자 isman@hani.co.kr

“TV는 영웅도, 악당도 갖고 싶어한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문제다. 방송사에 의해 무작위 추출된 시민들이 살인 리그전을 벌이는 영화 <시리즈7>의 세계는 주사선으로 그려낸 현대판 콜로세움이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스타 프로듀서 크리스틴 바천(<세이프>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 제작)과 손잡고 <시리즈7>을 만든 신인감독 대니얼 미나한은 따지고 보면 ‘텔레비전 키드’. 와 <채널4>를 거쳐 <폭스 TV>에서 시사 프로그램 PD로 일한 그는 메리 해론 감독의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에서 영화 만들기의 실제를 습득한 뒤 4년에 걸친 <시리즈7>의 구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기나긴 숙성기간이 무색하게도 코네티컷 주의 고향마을 댄베리에서 단 21일 만에 디지털카메라로 촬영을 마쳤다. TV 포맷과 장편영화 시나리오의 결합이라는 난제와 정면승부를 벌인 <시리즈7>은 지난봄 미국에서 개봉해 재기, 기동력, 문제의식, 형식실험 등 데뷔작에 거는 대부분의 기대를 채워주는 ‘똘똘한’ 블랙코미디로 호평받았다. 세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될 TV판 <시리즈8>을 준비하며, TV 수상기로 보면 더욱 신나는 한방이 될 거라고 악동의 미소를 짓고 있는 대니얼 미나한 감독에게 이메일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제작에 참여한 첫 번째 극장용 장편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는 아직 공식적으로 한국 관객에게 소개되지 않았다. 그 영화에서 당신이 얻은 소득이 있다면.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의 제작자와 감독은 시나리오 쓰기부터 프로덕션, 편집에 이르는 영화제작의 전 과정에 내가 참가할 수 있도록 불러주었다. 그건 내가 필름메이커로서 맛볼 수 있었던 가장 가치있는 경험이었다. <시리즈7>은 형식과 소재, 주제를 모두 TV라는 매체에서 찾았다. 당신 자신은 TV 시청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나. 지금 현재로서는 전혀 TV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요사이 나는 삶을 ‘구경’(watching)하기보다 삶을 ‘살고’(living) 있다. 방송사 경력이 <시리즈7> 제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나. TV 프로덕션 경험은 <시리즈7>의 스토리부터 촬영과 편집 스타일까지 모든 면에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나 결국 <시리즈7>은 한편의 독자적 내러티브영화로서 자립해야만 했다. <시리즈7>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렸나. 영감은 여러 곳에서 얻었다. 촬영팀이 실제 경찰관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그들의 낮과 밤을 기록해 보여주는 <캅스>(COPS)라는 TV쇼, <롤러 볼> <스탭포드 와이브스> <소이렌트 그린> 등 어린 시절 사랑했던 영화들도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모든 공상과학영화들도 영감의 원천이었고 TV쇼 제작에 참여한 나의 경험도 물론 도움을 줬다. 이따금 나는 <시리즈7>을 가리켜서 내가 TV쇼를 만들며 아둥바둥한 많은 시간에 대한 복수의 판타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리즈7>은 최근 미국의 TV 리얼리티쇼 유행을 다소 초현실적인 세팅을 빌려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다. TV 프로듀서들에게 사람들에게 살인을 강요할 수 있을 정도의 말도 안 되는 권력을 부여하는 가상사회를 상상한 것인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초법적 지위를 갖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나는 이 영화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정확히 똑같이 보이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불합리하고 공포스럽지만 이제 더이상 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스크린으로 TV를 보는 듯한 체험을 주는 <시리즈7>은 제작과정의 기술적 측면이 궁금한 영화다. 어떤 종류의 카메라를 몇대나 썼나? 조명과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은. 우리는 다큐멘터리식 스타일을 택했다. 미리 준비한 세트업을 차례차례 완성해 나가기보다 카메라맨으로 하여금 장면(scene)을 ‘발견’하게 하는 스타일을 택했다. 스탭의 숫자는 아주 적었다. 각각의 기술팀은 1명에서 3명에 불과했다. 조명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만 제외하면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조명만 사용했다. 그런가하면 역할을 맡은 배우들을 직접 인터뷰한 장면들을 제외하면 즉흥 연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편집은 아비드로 했고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뉴욕의 DUART 현상소에서 블로업했다. 배우의 연기 연출에 있어서 당신이 멋진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이 연기자들을 어떻게 골랐나. 칭찬 고맙다. 수잔 숍메이커라는 캐스팅 디렉터와 일했다. 그는 대형 극단, 영화배우, 비전문 배우 집단으로부터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데려왔다. 나는 그저 카메라 앞에 처음 섰을 때 ‘실제 존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적당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브룩 스미스는 내가 항상 돈 역으로 캐스팅하고 싶었던 배우다. 연기의 최고치를 끌어내기 위해 한 일이 있나. 음, 고문을 했다. (농담이다.) 나는 그저 가장 진실한 연기를 그들로부터 끌어내고자 노력했지만 늘 그들에게 카메라와 카메라맨이 방 안에 그들과 함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는 <시리즈7>에 걸맞은 자의식적 색채를 그들의 연기에 불어넣는 데 효과를 보았다. 그중에서도 돈 역의 브룩 스미스와의 작업을 묘사한다면? <양들의 침묵>에서 그녀가 맡았던 희생자 역할을 상기하면 <시리즈7>에서 만삭의 살인 게이머가 된 스미스의 모습은 특히 흥미롭다. <시리즈7>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1995년 <작은 괴물들>(Little Monsters)이라는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서 브룩을 본 나는 그 즉시 그녀를 염두에 두고 돈의 캐릭터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브룩은 시나리오를 쓴 1995년부터 마침내 촬영에 들어간 99년까지 4년간 나를 버티게 해준 존재였다. 우리는 선댄스의 감독 연구실(director’s lab)에서 워크숍을 했고 4년간 이 영화에 대해 끝없이 대화했다. 브룩은 뉴욕연극계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여배우이며 함께 일하는 것이 행복한 진정한 팀 플레이어다. 또한 나는 돈의 캐릭터가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빠져 있고 그 위기를 스스로의 생존 본능에만 온전히 의존해 타개해야 한다는 점에서 <양들의 침묵>에서 범인의 구덩이에 갇혀 있던 소녀 캐서린 마틴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브룩이 해낸 만큼 이 역할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매우 헌신적인 연기자다.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돈과 제프의 플래시백에 조이 디비전의 노래 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는 로맨틱하고 향수가 깃들어 있으며 일종의 송가(頌歌)같은 성격을 띤 노래이며 돈과 제프가 한 것 같은 불가능한 사랑에 관한 노래다. 또한 나의 성장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사적으로 소중한 영화다. 조이 디비전의 리드 싱어 이안 커티스는 제프 캐릭터가 늘 시도하는 대로 자살하기도 했다. 당신은 이 영화에서 말하자면 양날의 칼을 썼다. 돈과 제프 스토리의 후반부는 TV 미디어의 사악함을 노골적으로 공격한다. 반면 영화 속 인물들과 그들 각각에게 연결된 이야기들은 TV 브라운관에서 막 걸어나온 것 같다. 영화를 이런 식으로 설계한 의도는. 영화에는 내가 TV와 맺고 있는 ‘애증’의 관계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TV의 언어로 TV의 조건으로 TV를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TV를 비판하는 최고의 방법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돈과 제프가 카메라맨에게서 카메라를 빼앗아 쇼의 영웅에서 악당으로 탈바꿈하는 지점을 좋아한다. 내가 지금까지 터득한 진실에 다다르면 TV는 영웅도 갖고 싶어하고 악당도 갖고 싶어한다. <시리즈7>은 명백한 풍자극이지만, 종종 감독 자신이 TV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을 놓고 스스로도 즐기는 유희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영화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수고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를 통해 무엇보다 우선해서 표현하고 성취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무엇을 생각해보라고 나에게 지시하는 영화들을 미워한다. 나는 비누상자를 뒤집어놓고 올라서서 “TV는 나쁘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행위는 정직하지 못한 짓일 거다. 나는 진심으로 TV보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나는 매우 직관적으로 이 영화의 작업에 임했다. 가장 넓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TV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내 의도였다. 나는 TV문화의 야만스럽고 착취적인 속성을 지적하고 싶었다. 질문을 제기하고 대화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TV문화의 병폐에 대해 나는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징후들을 지적하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미디어의 선정성과 탐욕에 대한 비평이 되고자 작정한 영화들은 지금까지도 많았다. <시리즈7>에 영감을 준 특정 작품이 있나? 혹시 <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를 봤을 때는 <시리즈7>을 이미 끝낸 뒤였다. 그러나 나는 “와우, 이 영화는 내 영화랑 똑같은 테마를 많이 다루고 있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고마운 비교다. 하지만 <시리즈7>은 아무래도 시드니 루멧의 <네트워크>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의 직계후배라고 해야겠지. 당신 자신이 <시리즈7>의 ‘컨텐더’같은 살인게임 참가자로 뽑힌다면 당신의 반응은 영화 속 캐릭터 중 누구와 가장 비슷할 것 같나. 내 순서가 닥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내 자신의 여러 단면 중 하나를 대표한다. 돈은 공격적인 분노, 제프는 수동적인 자살 판타지, 코니는 모순된 신념, 토니는 비겁함, 린지는 단순함을 표상한다. 음, 뭐 좋다. 하나를 고르라면 돈(Dawn)이겠지. 어쨌거나 내 이름인 댄(Dan)은 ‘w’만 빼면 돈과 똑같이 쓰니까. 추진중인 다음 프로젝트에 대해 들려줄 수 있나? 만약 그 하나로 <시리즈8>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다. 현대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를 현재 쓰고 있다. 스릴러 장르에 대한 나의 한 시도가 될 거다. 그리고 당신 말마따나 <시리즈8>의 TV 버전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내 영화 속에서 죽어갈 미국인들이 아직도 많은 셈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즐기는 TV 프로그램이 있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국 TV쇼는 <앤틱 로드 쇼>(미국판 ‘TV 진품명품’)다. 사람들이 고물이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물건들을 갖고 와서 전문가들에게 값을 평가받는 프로그램이다.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물건의 값어치가 그래픽으로 뜨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테러, 밀라노에도 타격

국제영화 및 텔레비전 마켓인 MIFED가 10월28일부터 5일간 이탈리아 밀라노의 피에라 밀라노에서 열린다. 올해로 68회를 맞는 MIFED는 1960년부터 시작된 세계 최초의 영화마켓으로, 초반에는 4월의 텔레비전 마켓, 10월 영화마켓이 각각 열렸으나 1980년대 중반에 와서 두개의 마켓이 함께 열리고 있다. MIFED는 미국 영화마켓(AFMA), 프랑스의 칸 마켓과 함께 3대 영화마켓으로 영화배급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들어 이 마켓에서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작가주의 영화 정도만 소개되던 예전과 달리 장르영화로 폭이 넓어지는 추세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작품이 지난해 MIFED를 통해 유럽에 배급되는 등 한국영화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 행사에는 시네마서비스, 강제규필름, CJ엔터테인먼트 등이 참여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올해 MIFED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영화마켓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을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신임 조직위원장 주세페 졸라는 특히 바이어에게 보여지는 영화가 최고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시설을 강화했다고 발표했다. 또 진행의 원만함을 위해 많은 인원을 참여시켰고, 인터넷에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어 신속하고 편리하게 하루하루의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또 그는 2002년부터는 더욱 편한 거래를 위해 행사장의 규모를 넓힐 계획이며, 행사 마지막날에는 MIFED 시상식을 마련하여 그해 최고의 배급업자를 선출하는 등 많은 투자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세페 졸라는 “MIFED가 단지 영화를 사고 파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탈리아영화의 세계화에 도움을 주길 바란다”며 행사 기간 중 이탈리아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이탈리아 영화산업의 발전 전략도 발표했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계획에도 불구하고 MIFED 앞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놓여 있다. 우선 MIFED 영화마켓이 열리기 전 영국 런던 영화마켓이 열린다는 점이다. 배급자들과 바이어들은 같은 유럽에서,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두 마켓 중 한곳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상영 극장이 한데 몰려 있어 편리하고 규모가 크며, 경비가 적게 든다는 이유로 전체의 70%가 MIFED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이슬람 유럽 테러조직의 중심지가 이탈리아라는 의혹과 리나테 공항의 대형참사 등으로 지난해와 비교할 때 매우 저조한 참여율을 보이고 있다. 북미지역 배급사는 101사가 참여해 지난해 148개사에 비해 저조하며, 유럽지역 역시 지난해 114개에 비해 올해는 88개사만 참가할 계획이다. 전체적으로 봐도 올해 행사에는 총 222개사가 참여할 예정이어서 지난해 302개사에 비해 규모가 대폭 줄었다. MIFED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규모 축소로 인해 30%에서 50%의 손실을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마=이상도 통신원

그들이 마흔을 넘기 전에

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 유유히 살아남아 있는 문화적 코드는 ‘복고(회기)’와 ‘엽기’다. 그런 코드의 주기가 상당히 짧게 변화하는 문화시장 속에서도, 이 두 요소는 꽤 장시간 동안 그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요 근래 한국에서 성공한 문화상품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복고’라 불릴 수 있는 부분은 ‘엽기’적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하위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인기 웹영화나 CF 등에서 보이는 복고 이미지들은 다분히 과장적이고 작위적인 형태로 쓰이고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즐기는 것이 현대인의 취향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이렇듯 ‘엽기적 복고’가 자주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제대로 된 ‘복고’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료부족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이나 유럽의 대부분의 장수 미디어상품이 대중과의 꾸준한 접촉을 통해 그 생명력을 연장하고 파워를 다져온 데 비해 국내에서는 수없이 뿌려진 미디어 씨앗들이 점점 잊혀진 채 버려지고 있다. 수차례 복간과 재발행이 이뤄지는 해외 유명작가의 작품에 비해 국내 작품들은 원본은 물론이거니와 그 당시 발행된 책자조차도 찾기가 힘든 지경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복고’의 가치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태권V>의 ‘부활 프로젝트’가 지연된 가장 큰 이유도 ‘붐’ 조성에 필요한 재료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원천이 돼줘야 할 원작의 필름조차도 소재가 파악된 것은 몇개 안 되고, 대부분은 녹이 묻어 상영이 불가능한 상태이거나 상영 당시 편의에 따라 몇분씩 잘려나간 것들이었다. 80년대 출시되어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고 있는 <태권V>의 비디오 테이프는 중간중간 수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가 처음 본 사람이라면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모를 정도인데다가 화질과 음질이 굉장히 조악하고 손상돼 있다(그 당시 비디오 제작 야사를 들어보면 텔레시네 하는 비용과 시간을 아끼려고 필름을 하얀 벽면에다가 상영해놓고 그 장면을 찍어 비디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짤막짤막한 영상만 가지고 일반 대중에게 그 당시의 감동을 되살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질 못했다. 얼마전 <딴지일보>에서 제작한 <태권V> 복원 CD-ROM이 출시됐다. 최초에 얘기된 VCD포맷이 아닌지라 집에 있는 DVD 플레이어를 이용해 큰 화면에서 감상하겠다는 ‘계획’은 아쉽게도 무너졌다. ‘화질이 기대보다 안 좋다’든지 ‘극장에서 본 장면이 없다’든지 하는 불만의 목소리들도 없는 것이 아니지만, 앞서 말한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 심지어 해외에서 출시된 비디오 테이프까지 모아 원래 상영시간을 최대한 되살렸고 그 당시 제작진의 인터뷰나 스크립 등의 자료를 수록한 노력이 <태권V>라는 작품의 생명기간 연장에 큰 도움을 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디어상품에 대한 복고 주기는 20∼30년 사이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한 세대를 가르는 주기와 거의 일치한다. 즉 당시 작품을 접한 아이가 안정된 지위를 가지는 성인이 되는 데 드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1976년에 상영된 <태권V> 1탄을 보고 감동한 아이들은 이제 30대 중반의 직장인들이 되어 있다. 이 계층이 40대가 되기 전에 승부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태권V>는 몇몇 마니아를 위한 수집 아이템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인 <사이보그009>의 3번째 TV시리즈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야말로 그 나라 문화산업의 기반을 지탱하는 요소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사랑의 찬가 Eloge de l’Amour

월드시네마|스위스·프랑스|장 뤽 고다르|2001년|98분 거의 반세기가량을 ‘숨가쁘게’ 달려온 노장의 새 영화는 제목과 달리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고다르의 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가 구성해내는 기억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근심이다.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강력한 매체는 스스로의 표현수단을 지니지 못한 인민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진정한 전투는 바로 이 기억의 장에서 벌어진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미셸 푸코이다. 고다르와 더불어 미셸 푸코의 이러한 전언에 대한 충실한 영화적 주석가라 할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총체적 기억은 마취된 기억이며, 하나의 집단적 기억 뒤에는 천개의 개인적 기억들이 존재한다고(또한 성서는 영화와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의 총체적 기억이다, 라고). 크리스 마르케가 꿈꾸었던, 망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현재로 날아온 인물이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SF영화라는 프로젝트는 <사랑의 찬가>에서 실현되었다. 고다르는 흑백으로 촬영된 현재와 컬러로 촬영된 과거를 대비시키면서 유례없이 명료하게 영화를 전개시킨다.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에 관한 노트>에서부터 존 포드 영화의 대사에 이르기까지 예의 인용과 오마주 또한 어김없이 등장한다. 레지스탕스 활동 중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 노부부의 이야기에 대한 판권을 사서 그럴싸한 역사멜로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하다. “미국인들… 그들에겐 자신들만의 기억이 없지…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과거를 사는 거야. 특별히 저항했던 이들의 과거를. 혹은 그들은 말하는 이미지를 팔기도 해.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그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고.” 역사와 기억에 대한 근심으로 빚어낸 이 역설적인 <사랑의 찬가>는 우리로 하여금 한 진정한 예술가의 육체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원망하게 만든다.

픽션과 진실의 결혼을 꿈꾸다

이사온지 얼마 안되는 이 도시는 폭동에 휩싸여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시위가 진압 경찰과 병력을 만나 유혈극으로 변한 국가 폭력의 현장. 하스켈 웩슬러의 헨드헬드 카메라는 어머니 역을 맡은 여배우 베르나 블룸의 시선과 발길을 바짝 쫓아 헤맨다.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는 시카고. 그곳은 맥루헌이 ‘쿨 미디엄’이라고 불렀던 텔레비전의 속성과 현대정치에 관한 예리한 성찰을 보여준 극영화 <미디엄 쿨>의 촬영장이기도 했다. “웩슬러, 이건 실제상황이야!” 스탭 하나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고 난 직후, 경찰의 최루탄이 발사됐다. 극본, 감독, 촬영의 1인3역을 한 웩슬러가 “픽션과 시네마 베리테의 결혼”이라고 부르는 이 영화의 상영과 배급은 폭동의 복판으로 게릴라처럼 뛰어든 촬영과정 만큼이나 순탄치 않았다. 미국 정부가 한동안 상영을 금지했고, 할리우드는 냉담했다. 대신, “거대한 시각적 충격, 영화로 만든 <게르니카>”,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영화”라는 평단의 평가가 <미디엄 쿨>의 훈장으로 남았다. 이때, 웩슬러는 이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로 이미 오스카상을 수상한 할리우드의 ‘유명촬영감독’이었다. 동시에 틈만 나면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했다. 물론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은 아니었다. 1922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그는 버클리 수학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지만, 일년만에 낙제한다. 그뒤 2차 대전 중 상선의 선원으로 복무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데플렌의 무기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영화 제작의 꿈을 펼치려한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그에게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 이를 거울삼아 카메라조수로 다시 시작한 그는 교육과 산업에 관한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된다. <후드럼 프리스트>(1961), <엔젤 베이비>(1961) 같은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를 촬영하던 그는 63년 이민자의 실상을 그린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 아메리카>에 이르러 할리우드의 주류에 본격 합류한다. 강렬한 흑백화면이 인상적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66년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고, 67년 노만 주이슨의 <밤의 열기속으로>를 통해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두 번째 아카데미의 영광을 안겨준 할 애쉬비의 <바운드 포 글로리>(1976)는 차분한 색조의 아름다운 묘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할과는 <귀향>(1978)에서도 함께 작업한다. 조지 루카스 감독의 <아메리칸 그래피티>(1973)에서는 비쥬얼 컨설턴트로 독특한 영상을 그리는데 일조한다. 하스켈 웩슬러를 주목할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인터뷰 위드 마이 라이 베테란>, <인드로덕션 투 더 에너미>, <언더그라운드> 등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끊임없이 사회적 쟁점들을 이끌어냈다. 그의 렌즈는 때로는 핵확산을 반대하고, 때로는 억울한 자의 정당함을 입증하려하며, 때로는 도주하는 CIA요원을 비추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 단지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스켈 웩슬러의 이상은 여전히 ‘픽션과 진실의 결혼’이다. “다큐멘터리는 좋든 나쁘든 실제 삶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잘 만들어진 극영화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진실이 담겨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우리 목전에 닥친 거짓되게 그려진 사회에 대적할 유일한 길이다.” “극영화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며, 그 외의 일들은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뷰파인더를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것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물론 다큐멘터리나 광고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나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조명과 배치를 조절하는데 자유롭지 못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경험은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극영화의 공간과 프레임을 구성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치며,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은 극영화 속에 사실성 있는 화면을 그려내는 데 밑바탕이 되어 준 것이다. “프레임 하나하나가 미술작품”이라는 찬탄을 유발하는 그런 화면들. 최근 우디 앨런과의 작업이 취소돼, 어떤 작품으로 다시 그를 만나게 될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진실에 기반한 신념에 차있는 웩슬러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필모그래피 촬영 (61, 2001)(TV) 빌리 크리스털 감독 <더 맨 온 링컨스 노즈>(The Man on Lincoln’s Nose, 2000) 다니엘 라임 감독 <굿 커드 배드 커드>(Good Kurds, Bad Kurds, 2000) 케빈 맥키어넌 감독 <버스 노동조합>(Bus Rider’s Union, 1999) 하스켈 웩슬러 감독 <림보>(Limbo, 1999) 존 세일즈 감독 <머홀랜드 폴스>(Mulholland Falls, 1996) 리 타마호리 감독 <진실과 탐욕>(The Rich Man’s Wife, 1996) 에이미 홀든 존스 감독 <캐나다 베이컨>(Canadian Bacon, 1995) 마이클 무어 감독 <론 이니쉬의 비밀>(The Secret of Roan Inish, 1994) 존 세일즈 감독 <베이브>(The Babe, 1992) 아서 힐러 감독 <타인의 돈>(Other People’s Money, 1991) 노먼 주이슨 감독 <폴 뉴먼의 블레이즈>(Blaze, 1989) 론 셸톤 감독 (Three Fugitives, 1989) 프랜시스 베버 감독 <범죄와의 전쟁>(Colors, 1988) 데니스 호퍼 감독 <엉클 밋>(Uncle Meat, 1987) 프랭크 자파 감독 <메이트원>(Matewan, 1987) 존 세일즈 감독 <사랑도박>(The Man Who Loved Women, 1983)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 <라스베가스의 도박사들>(Lookin’ to Get Out, 1982) 할 애쉬비 감독 <귀향>(Coming Home, 1978) 할 애슈비 감독 <바운드 포 글로리>(Bound for Glory, 1976) 할 애슈비 감독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76) 하스켈 웩슬러 감독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밀로스 포먼 감독 <적과의 대면>(Introduction to the Enemy, 1974) 하스켈 웩슬러 감독 <트라이얼 오브 카톤스빌 나인>(Trial of the Catonsville Nine, 1972) 고든 데이빗슨 감독 <인터뷰 위드 마이 라이 베테랑>(Interviews with My Lai Veterans, 1970) 하스켈 웩슬러 감독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하스켈 웩슬러 감독 <화려한 패배자>(The Thomas Crown Affair, 1968) 노먼 주이슨 감독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1967) 노먼 주이슨 감독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1966) 마이크 니콜스 감독 <버스>(The Bus, 1965) 하스켈 웩슬러 감독 <러브드 원>(The Loved One, 1965) 토니 리처드슨 감독 <베스트 맨>(The Best Man, 1964) 프랭클린 스카프너 감독 <아메리카 아메리카>(America, America, 1963) 엘리아 카잔 감독 <페이스 인더 레인>(Face in the Rain, 1963) 어빙 커슈너 감독 <로니>(Lonnie, 1963) 윌리엄 할레 감독 <후들럼 프리스트>(Hoodlum Priest, 1961) 어빙 커슈너 감독 <엔젤 베이비>(Angel Baby, 1961) 폴 웬드코스 감독 <사베지 아이>(The Savage Eye, 1960) 벤 메도우 감독 <스터드 로니간>(Studs Lonigan, 1960) 어빙 레네 감독 <파이브 볼드 우먼>(Five Bold Women, 1959) 조제 로페즈 포르틸로 감독 <스테이크 아웃 온 도프 스트리트>(Stakeout on Dope Street, 1958) (uncredited) 어빙 커슈너 감독 제작 <버스 노동조합>(Bus Rider’s Union, 1999)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러브드 원>(The Loved One, 1965) 각본 <정글의 반란>(Latino, 1985)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버스>(The Bus, 1965) 감독 <버스 노동조합>(Bus Rider’s Union, 1999) <정글의 반란>(Latino, 1985) <버스II>(Bus II, 1983)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76) <적과의 대면>(Introduction to the Enemy, 1974) <브라질:고문에 관한 보고>(Brazil: A Report on Torture, 1971)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버스>(The Bus,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