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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전영객잔] 강철중이 회피하는 것은 무엇인가? [1]

강우석의 열여섯 번째 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1-1>(이하 <강철중>)을 보았다. 남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제목의 뒤에다가 ‘1-1’이라는 일련번호로 셈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아니, 꼭 처음은 아니다. 무성영화시대에 실험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인 적은 있다. 혹은 미술 인스톨레이션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마치 논문을 쓸 때처럼 1번에 관련된 보충 설명을 할 때 그 아래에 ‘1-1’이라는 번호를 붙이는 방식으로 제목을 정했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에 ‘빼기’로 읽었다). 영화를 본 다음에야 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우석에게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은 두개의 판본이 있는데, 혹은 ‘동명이인’ 강철중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세 번째 영화는 검사 강철중이 아니라 강동서 강력반 형사 강철중의 판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강동서 강철중의 다음 영화가 또 나오면 <공공의 적1-3>이 될까? 혹은 검사 강철중이 나온다면 <공공의 적2-1>이 될까? 그러면 강철중이 나오지 않는 <공공의 적>은 어떻게 셈을 해야 하나? 나는 쓸데없는 데 걱정이 너무 많다.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두 종류의 원형이판본의 형태로 진행되는 중이다. 그런데 강우석은 항상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방법으로 자기 영화를 밀고 나간다. 그러나 그의 반복은 지루하게 동일한 영화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안에서 차이를 만들고 그 안에서 다시 두개의 긴장을 변주한다.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은 단지 상투적인 매너리즘의 재생산이 아니라 강우석의 예술적 행동이자 정치적 입장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강우석을 설명하면서 예술과 정치를 말하는 것이 불편할지 모른다. 그 자신도 오로지 대중적인 성공만을 노리는 것처럼 대답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심(의 전부)일까? 잠시만 돌아보자. 강우석은 ‘자살하는 학교’에 관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를 만들어서 성공한 다음 두개의 다른 버전인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1991)와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1992)를 만들었다. 현실과의 대면. 그런 다음 대면의 해피엔드 버전 혹은 대면을 회피하는 방법. 그러니까 3부작을 선택하는 대신 그려낸 대한민국 ‘하이틴’에 관한 삼각형의 초상화. 그런 다음 대한민국 부부에 관한 보고서 3부작 <미스터 맘마>(1992)와 <마누라 죽이기>(1994),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은 서로 다른 수위에서 ‘하여튼’ 한국사회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부부간의 권리(와 의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아니, 차라리 남편의 위상학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3부작. 육아를 누가 할 것인가, 가부장제는 어디로, 이혼이라는 문제 혹은 아내의 성의 권리. 그리고 물론 세편의 <투캅스>(그런데 세 번째 ‘여자’ 파트너 버전은 제작만 했다). 그런 다음 세편의 <공공의 적>. 상투적인 표현. 그는 하나의 영화가 성공하면 재빨리 그것을 재생산한다. 끝.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나는 강우석이 그렇게 단순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단순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의 반복적인 ‘예술적’ 행위마저 그렇게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강우석의 영화를 내내 보면서 그가 대중영화의 자장 안에서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사회적인 토픽, 정치적인 테마, 다소 우스꽝스럽긴 해도 역사적인 문제들을 건드려왔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적은 없으며 항상 우회하였다(<실미도>). 때로 지나치게 우회하는 바람에 길을 잃기도 하였다(<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혹은 가혹하게 다듬은 이론적 무기를 들고 그를 비판하는 일은 너무 쉽다(<한반도>). 아니, 단지 강우석의 곁에 (거의 동시에 충무로에 데뷔한 동기들인) 장선우나 박광수의 영화를 들이대서 대차대조표를 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첫 번째 영화를 찍은 다음 지금 제도 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강우석과 이명세뿐이다(그런 다음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등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1990년대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를 찍었다). 강우석은 대중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 친화성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하여튼’ 활동하면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관심있는 것은 반복의 친화성이라는 질문이다. 물론 강우석을 끌어들여서 설명하려 들 때 자칫하면 모든 문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의 영화들은 종종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명확한 선을 그은 적이 없으며, 그 모든 실수를 만회할 만한 걸작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석은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우리가 즐기게 만들고 있다. 그건 한국 대중영화 안에서 그 누구와도 다른 방법으로 대중을 유인하는 전술이다. 대중을 유인하는 강우석만의 전술-반복 먼저 반복이라는 문제. 왜 사람들은 시리즈물을 보는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표현. 왜 사람들은 같은 아이디어, 같은 줄거리, 같은 주인공을 반복해서 보는 것일까? 약간의 우회. 롤랑 바르트는 영화 대신 소설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반복해서 다시 읽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상업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습관과 반대되는 행동이다(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새로운 것을 더 빨리 소비해야 하니까!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자본의 회전을 멈추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다소 단순하게 말하면 반복해서 보는 행위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학습된 우리의 습관은 일단 한번 ‘삼켜버리면’ 그 다음에는 내버린다. 그런 다음 재빨리 우리는 서점에 가서 새로운 책을 산다. 다만 ‘다시 읽는’ 행위는 어린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학교 안의 교수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행위는 지금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단지 시네필이나 컬트영화라 아니라도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은 오늘날 대중영화의 새로운 관람 습관이다. 꼭 그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 단지 그 영화의 몇 장면이 주었던 ‘짜릿한’ 흥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 극장에 다시 가는 ‘일반’ 관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시네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다시 보는’ 행위를 통해 거기서 새로운 의미나 재해석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첫 번째 관람행위의 즐거움을 ‘재현’하고 싶어서이다. 그 둘 중 누가 더 훌륭한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 둘 사이의 ‘다시 보기’는 서로의 목표가 다른 것이다. 마케팅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가 500만명을 넘기는 순간부터 이러한 관람행위가 ‘눈에 보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영화의 1천만 관객영화는 ‘재(再)관람’이라는 행위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숫자라는 뜻이다. 당신이 두번 보건 세번 보건 박스오피스는 항상 새로운 관객으로 셈한다. 행위의 수량화. 의미의 무효화. 두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행동양식을 자본의 쪽에서 재빨리 제도화화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관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는 이미 ‘경험’한 관객을 다시 끌어들이는 편이 한결 손쉽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며, 더군다나 그렇게 새로운 영화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종종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방법은 간단하다. 성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이야기, 성공적인 주인공, 성공적인 약속들. 물론 이것은 장르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매우 고전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모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서 단지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이 등장했을 때(이를테면 올 여름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그 어떤 것도 새로울 것 없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1930년대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크게 성공했지만 그 속편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은 그 박스오피스의 기록을 새롭게 쓴 <사운드 오브 뮤직>이 성공했지만 그 속편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2년 <대부>는 그 속편을 만들었다(약간 사태가 우스꽝스러워지긴 했지만 3편도 만들었다). <엑소시스트>는 속편을 만든 다음 전편을 만들고 번외편도 만들었다. 그런 다음 1978년 <스타워즈>는 아예 처음부터 연작을 내걸고 제작을 시작하였다(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첫 번째 영화인 에피소드 4편이 실패했다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슈퍼맨>은 연작 대신 시리즈물을 내걸고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에 속편과 연작, 리메이크는 영화들 사이의 (거의 인류학적) 친족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 공포영화들, <13일의 금요일>과 <나이트메어>는 B급 연작물의 ‘막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항상 나쁜 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이리언>은 감독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그런 다음 1990년대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시리즈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몇몇 시리즈는 살아남아서 21세기로 넘어왔다. 이를테면 <배트맨>. 물론 그 사이에 긴 세월을 버틴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영화가 아니라 소설) ‘제임스 본드’를 설명하면서 움베르토 에코는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라는 멋지고 간결한 정의를 제공한다(물론 좀더 학문적으로 블라디미르 프로프를 제안해볼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일반적인 도식과 계속해서 끼어드는 부차적인 에피소드가 배열되고 그 안에서 서로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대수학처럼 반복적으로 작성된다. 매번 다른 악당이 등장하긴 하지만 하여튼 그들이 나타나야만 이야기가 작동되기 시작하고, 매번 다른 본드걸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항상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 “흉측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본드는 이 악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여자를 만나 에로틱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녀를 과거로부터 해방시켜주지만 이러한 관계는 악당에게 생포되어 고문당하는 바람에 깨지게 된다. 하지만 본드가 악당을 물리쳐 이 악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 그러하여 이제 본드는 온갖 노고 끝에 여자의 품 안에 쉬게 되나 그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는 이 간결한 설명을 읽은 다음 <공공의 적>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강철중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하지만 <공공의 적>이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 안에서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강철중에게는 ‘강철중의 여자’가 없다(심지어 아내도 없다. ‘첫 번째’ 그 대신 늙은 노모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다). ‘두 번째’ 그 대신 그의 곁에는 강동서 강력반 형사들이 있다(그리고 <공공의 적2>에는 그나마 없다). 제임스 본드의 버전을 변형하면 이렇다. “(강철중은) 흉측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온갖 노고 끝에 악당을 물리쳐 이 악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그런데 악당이 결국 죽은 건지 죽도록 맞은 건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이 공식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자문자답. 먼저 질문. 에코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게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쓰면서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도대체 어떻게 한계가 이렇게 분명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풀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에코의 대답. 제임스 본드 시리즈물은 그것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보를 양산해내는 메커니즘에 가깝다고 부른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스파이들의 세계를 파헤치면서 세상에 대한 어떤 각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독자들의 게으른 상상력과 부주의한 독서에도 아무 지장을 받지 않고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그의 협력자들, 그리고 악당들에 관한 불변의 구조를 그저 되풀이해서 읽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좀더 멋진 비유. 말하자면 이건 이미 등에 붙은 번호판을 통해서 그 선수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럽 명문 축구팀이 동네 축구팀과 맞붙어 싸우는 경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 있고, 이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플레이가 예상치 않은 순간에 등장하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것뿐이다. 사실상 경기로서는 따분한 시합.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게으름이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인 반론이 함께 공존한다. 여기에는 (반복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는 이 기대의 지평을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을 퇴행의 메커니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완강한 저항의 심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우석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반복의 행위도 바로 여기로 복귀하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그런 다음 마치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궁리하는 조건화된 왕복달리기이다. 다시! 그런 다음 또다시! 강우석은 마치 명령을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다른 유머도 없이 건조하게 되풀이한다(이를테면 ‘놀이의 상황’을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원래의 시작을 거의 잊어버린 <여고괴담>과 비교해보라). 물론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형된 보수주의이며, 대중적으로 안전한 방어선 안에서 이미 실현된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환상에 대한 도식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유한 결론을 내세워서 새롭게 드러난 모순을 단지 낡은 문제틀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스크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구조로 바뀌는 어떤 난처한 교환 관계에 놓인다. 말하자면 <공공의 적>이 보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다음 그것을 이미 해결된 문제의 구조 안으로 집어던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말 그대로 이중의 문제. 여기서 말장난처럼 보이는 두개의 ‘문제’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좀더 간단한 설명.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폐쇄회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아무리 새롭게 문제를 제기해도 자꾸만 이전의 틀과 겹쳐져서 종종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며, 더 나아가 문제를 제기하기도 전에 이미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전도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반복해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은 플롯이 아닌 ‘강철중’ 물론 이러한 양식을 가장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텔레비전 시트콤이다. 매주 같은 등장인물, 같은 상황, 다른 친구, (전체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의) 새로운 말썽. 사실상 시리즈물을 찾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예전 이야기에 충실한가라는 역설적인 기대감이다. 그래서 시리즈물을 보는 관객이 가장 분개하는 것은 최신편이 정말(!) 새로워질 때이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들이 지금도 숀 코너리 흉내를 내는 것은 웃겨 보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차라리 숀 코너리보다 더 숀 코너리처럼 대사를 하고, 연애를 즐기고, 위기를 탈출하고, 미식을 음미하고, 다음 회를 준비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때 시리즈물을 보는 관객의 고정점이 플롯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공공의 적>은 결국 강철중에 관한 시리즈이다. 반문. 강철중은 반복해서 ‘다시’ 보고 싶은 만큼 매력적인 주인공인가?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건 취향의 문제이다(혹은 설경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강철중은 제임스 본드인가? 노! 강철중은 인디아나 존스인가? 노! 강철중은 배트맨인가? 노! 왜 대답은 아니요, 로 일관되는가? 강철중은 현실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서 동화적인 판타지를 떠맡을 수 있는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에서 시도하는 강우석의 반복의 프로그램이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는 것은 그가 아무리 장르의 유머에 가까이 다가가도 현실이라는 경계를 명확하게 한정해놓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뛰어넘어가면서까지 현실을 잊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철중>의 시나리오를 쓴 장진의 <킬러들의 수다>와 비교해보라. 말하자면 현실은 강우석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여기서 강우석이 반복을 통해서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기 이야기의 복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 이야기를 현실과 동등하게 다루려는 방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이때 강우석의 반복의 행위는 정치적인 입장이 된다. 물론 그것이 매우 비유적이고 때로 너무 단순해 보여서 종종 핑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공공의 적>을 비판할 때 내 동료들은 강우석에게 그냥 ‘척하지 말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나 노력을 기울이라고 점잖게 충고한다(이를테면 <강철중>에 관한 <씨네21> ‘개봉영화 20자평’에 실려 있는 촌철살인들을 보라. 물론 나는 여기서 그 별점의 개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충고 속에서 강우석을 위해 변명하고 싶어진다. 내 생각은 반대이다. 하지만 강우석이 정치적인 자신의 행위를 좀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대중적인 재미를 포기하라, 는 메시지로 읽는다면 그건 내 생각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공공의 적>이 더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더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좀 복잡한 논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강우석이 자기의 정치적 제스처를 더 밀고 나갈 때 우리는 그가 우파 보수주의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강우석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사회의 헤게모니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모서리까지 다가간 다음 재빨리 되돌아온다. 종종 그의 영화가 첫 장면을 보여준 다음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혹은 영화 시작 이전으로까지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때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영화 전체의 과정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근심한다. 정치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그 행위를 어떤 것으로부터 배제시켜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강우석에게서 보게 된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정치적이라고! 강우석은 반문한다. 아니, 나는 그 행동을 어떻게 하면 안 해도 되는가를 하는 것이 나의 정치적 입장이야! 그러니까 강우석은 봉준호의 반대말이다. 이를테면 정반대의 두 영화, <한반도>와 <괴물>(물론 내가 여기서 우파 보수주의라는 말을 쓸 때 2MB와 강부자, 고소영, 조·중·동, 뉴라이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는 강우석이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항상 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 안에 정치적인 태도가 잠복해 있으면서도 종종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주장들이 지나치게 파토스에 기대면서 이성적인 반론을 제기하거나 혹은 정면으로 비판하려는 태도를 모두 부적절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명백히 그는 매번 자기의 토픽을 정치적이거나 최소한 사회적인 영역 안으로 끌고들어간다. 그러나 정작 그가 문제를 제기할 때는 재미있으면 된 거잖아, 이봐 자네 충분히 즐겼잖아, 라는 식으로 핵심적인 질문을 피해간다. 여기서 구태여 강우석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재미들이 거의 예외없이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때 강우석의 파토스는 항상 주인공이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언제나 인물이며, 그중에서도 주인공이다.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강우석의 연출이 가끔씩 멈칫거리는 대목들은 예외없이 주인공의 일상생활의 습관과 터무니없는 유머, 종종 지루할 정도로 고전적인 성격묘사, 무언가 돋보일 만한 특이한 행동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만화 속의 인물들처럼 단지 캐리커처에 가깝게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오로지 강철중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세부적인 사실들까지 잘 알게 된다. 그가 늘 하는 반복적인 말투, 어떤 때 입술을 삐죽거리는지, 그 순간 강철중은 어떤 심리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 그런 다음 그가 어떤 액션을 보여줄지, 우리는 강철중의 행동 패턴과 사회적 반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안에서 강철중은 우리에게 숨겨진 사생활이 없는 사람이다. 이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강철중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사기를 당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이다. 잘 알려진 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강우석은 강철중을 다루면서 그가 마치 속이 투명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본다. 그게 투명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강철중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니, 차라리 항상 행동이 생각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강철중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것일까? 대답은 약간 희극적이다. 그는 생각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단지 행동만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 대신 강철중을 위해서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강철중의 생각의 자리에 있고, 강철중은 우리의 행동을 대신한다. 이때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였던 강철중은 사실상 우리의 거울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것이 그저 희미한 까닭은 생각과 행동의 분리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하게 강철중이 우리에게 떠넘긴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채무관계를 물어보는 것이 <공공의 적> 연작이 다루는 반복, 그리고 <강철중>의 차이에 대한 질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우메 발라구에로] “호러물의 플롯과 TV 리얼리티쇼의 영상언어를 결합시키고 싶었다”

하우메 발라구에로의 <네임리스>(1999)는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의 <야수의 날>(1995)과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떼시스>(1996)를 잇는 새로운 스페인 호러영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발라구에로는 안나 파킨, 레나 올린 같은 국제적 배우들과 <다크니스>(2002)를 만들었고, 칼리스타 플록하트 주연의 <프래절>(Fragiles)(2005)을 감독했다. 두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냥 그랬다. 발라구에로는 장르를 잘 이해하는 연출자지만 스페인의 친우들처럼 타고난 재능은 좀 부족한 듯했다. 2인자의 자리에서 고만고만한 영화만 만들다가 잊혀질 운명이었달까. 지금은 좀 다르다. 오는 7월1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호러영화 (2007)는 발라구에로의 대표작이자 재기작이다. 비평적, 흥행적 성공을 등에 업고 스페인에서 속편 작업에 한창인 하우메 발라구에로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했다. 동문서답도 간간이 있지만 그냥 실었다. -어떻게 페이크 다큐멘터리 호러영화 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가. =우리는 아주 전형적인 호러영화의 플롯과 실시간 리얼리티 TV 방송의 영상언어를 결합시킨 싸구려 호러영화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이런 아이디어가 나온 게 아닌가 싶다. -P.O.V 핸드헬드 스타일이라는 기술적, 예술적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건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었을 텐데. =우리는 이 영화를 오로지 P.O.V로 찍어낸 다큐멘터리처럼 작업했다. 촬영 전에는 리허설을 굉장히 많이 했고 카메라의 위치도 가장 자연스럽게 배치했다. TV 리얼리티 쇼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 것이다. 영화 속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캐릭터들의 리액션이 어떨까를 늘 염두에 두고서 가장 현실적으로 담는 것에 중점을 뒀다.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느낌을 잘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신은 이 영화를 <로마산타>(Romasanta, 2004)의 감독 파코 플라자와 공동으로 연출했다.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나눈 것인가. =둘이 사전에 합의를 봤다. 만약 둘 중 한명이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건 아예 영화에서 배제하기로 말이다. 이런 합의가 공동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그에 따라 모든 사항을 함께 결정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리얼하다. 그들에게 정해진 대본을 준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장면에서의 리액션을 뽑아내기 위해 다른 일들을 꾸몄나. =이것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버전으로 이야기를 해온 터라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시나리오와 매우 흡사하지만 가장 리얼하게 찍기 위해서 현장에서 많은 작업을 했다. 사실 다른 영화들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고 말하겠다. -<클로버필드> <다이어리 오브 데드> 등 지난해와 올해 와 똑같은 형식을 차용한 장르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예술가로서 이 부분에 어떤 공통적인 잠재의식 같은 것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정말 놀랍다(shocking). 하지만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크니스>와 , 그리고 전작들을 보면 당신의 장기는 어둠에 대한 관객의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걸 장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당신만의 전략은 뭔가. =어둠은 시각을 차단한다. 바로 앞에 존재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전혀 볼 수 없게 만드는 거다. 이 부분이 그런 상황을 도발적이면서도 위협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는 좀비영화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일종의 오컬트영화로까지 변환한다. 그리고 당신 영화에는 언제나 조금씩의 오컬트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 혹시 이건 당신이 가톨릭 사회에서 자라난 스페인 감독이라서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흥미롭게도 스페인 내에서는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데 스페인 바깥에서는 늘 이 질문을 듣는다. 글쎄.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닐 땐 매일매일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가 벽에 걸려 있는 걸 봐야만 했다. 그리고 스페인 문화는 지난 천년 동안 미술 등 수많은 부분에서 아주 엄격하게 종교적이었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스페인 호러 감독들이 전세계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당신들을 다른 유럽 호러 감독들과 구분하는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다. 나는 <버려진 아이들>(The Abandoned)의 나초 세르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의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타임크라임>(Timecrimes)의 나초 비갈론도 등과 잘 알고 지낸다. 우리의 공통점이라면 비디오 클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에릭 로메르를 조지 로메로만큼 좋아한다는 거다. -는 미국에서 리메이크 중이다. 얼마나 관여했나. =벌써 완성돼서 유튜브에도 예고편이 올라와 있더라. 그런데 미국에서 리메이크한다는 사실을 나도 인터넷으로 보고 알았다. 우리는 리메이크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오픈칼럼] 유감천지

1. 제45회 대종상 작품상은 <추격자>가 받았다.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역시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과 배우 김윤석이 받았다. <추격자>가 개인적으로 흠모하는 상의 영화는 아니지만 시사회 때 손에 땀을 쥐고 보았던 걸 생각하면(예전에는 요르그 뷰트게라이트의 영화를 보면서 야참도 먹었는데 요즘은 날이 갈수록 무서운 장면을 못 본다), 나홍진은 실력있는 감독이며 김윤석은 늦게나마 빛을 보게 된 뛰어난 배우다. 하지만 올해도 대종상은 역시나 어딘가 이상하며 허전하다. 홍상수의 <밤과 낮>을 ‘<씨네21> 창간 13주년 기념 특집 베스트 설문’에서 1995년 이래 지금까지 나온 전세계의 모든 영화를 통털어 베스트 1위로 꼽은 나로서는 허전할 수밖에 없다. 수상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 올해 대종상 작품상 후보는 <밀양> <세븐데이즈> <추격자> <행복> <즐거운 인생>(영화제 사이트에 올라 있는 순서)이었으며, 나는 <밀양> <행복> <추격자> <세븐데이즈> 순으로 좋아한다. 생각해보니 <즐거운 인생>은 아직 보지 못했다. <밤과 낮>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유감이다. 2. 배우 유인촌은 나의 유년 시절에 영화와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심어준 사람이다. 어느 프로그램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영화 한편을 소개해주었다. 어린애가 볼 만한 프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우연히 내가 본 모양이다. 그때 그가 소개해준 영화가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가 아니었던가 싶다(물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크 타티를 소개한 건 틀림없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이 영화가 참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그걸 소개해준 멋있는 배우가 기억에 오롯이 남았다. 그 뒤로 그 영화를 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고 나니 즐거웠다. 자크 타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듯 유인촌이라는 이름을 함께 떠올리는 것이 습관처럼 됐다. <전원일기>는 잘 보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 그의 연기를 보고 더욱 좋아하게 됐다. 가련하지만 광기로 가득 찬 연산을 그는 연극세상에서 다져진 품위 넘치는 연기로 보여주었다. 그가 이명박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됐다. ‘좌파적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더니, 얼마 전에는 촛불집회 참여자 중 일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에 오물을 투척한 것을 계기로 조선일보를 위문 방문하면서 이례적으로 장관이 한쪽 언론만 편드는 게 아니냐는 구설수에 또 오르내린다. 내가 사랑하던 배우가 내가 힘겨워하는 시대의 장관이다. 유감이다. 3. 휴가는 잘 보냈느냐고, 어딘가 다녀왔느냐고,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그런 거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오픈칼럼을 쓰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좋은 곳에 다녀왔다고 해도 애초에 나는 그곳의 추억에 대해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가 가장 성실하게 한 건 평소와 다르게 <9시 뉴스>를 챙겨보는 일이었고,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건 저녁 7시에 드는 햇볕이 하루 중 가장 노랗더라는 것 정도다(방금 편집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오픈칼럼을 쓰는 게 먼저라는 걸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전영객잔보다… 그걸 어찌 잊을까…).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휴가 뒤끝에 오픈칼럼을 쓰는 것이 어느새 <씨네21>의 전통 아닌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유감이다. (그 밖에도 유감이 많은 요즘이지만 되도록이면 영화(계)와 영상 담론,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잡문을 쓰는 것이 내가 오픈칼럼을 쓸 때 정해둔 나름의 규칙이라 세 가지만 적었다. 지금은, 유감천지다.)

[오마이이슈] 그들은 사익의 날개로 난다

공원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두돌배기 애 손에 들려 있는 과자를 빼앗아 먹으려고 덤볐다. 애는 울부짖고 다른 비둘기들은 그 와중에도 애 발밑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달려들었다. 21세기가 지나기 전 호러무비의 새 주인공은 분명 조류독감도 피해간다는 이 시커멓고 탐욕스러운 비둘기떼일 것이다. 대체 누가 비둘기를 평화의 새라고 했던가. YTN이 비밀 텍을 짜서 주총장을 바꿔가며 엠비맨 구본홍씨를 결국 사장으로 선임했다. 40초 만의 날치기 처리였다. 회사에서 동원한 덩치들이 반대하는 직원들을 밀어내고 단상을 겹겹으로 막은 장면을 보니 며칠 전 애 손의 과자에 달려들던 비둘기떼가 생각났다. 비둘기는 덥고 굶주려 잠깐 정신이 나간 듯했지만, 자신의 이권을 위해 체면도 염치도 벗어던진 이 시커멓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무리들은 뭐란 말인가. 인터넷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IPTV 사업자 중 한곳인 LG데이콤(myLGtv)은 최근 몇몇 시사 프로그램을 삭제하거나 제외한 채 내보냈다. 쇠고기, 촛불, 광고불매운동 등 현안을 다룬 방송분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해명도 석연치 않다. 소송 중인 프로그램이라서 그랬댔다가, 후발업체로서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민감한 정국을 다룬 콘텐츠는 서비스할 수 없댔다가, 정치적 편향이 있거나 품질이 낮은 프로그램은 뺄 수도 있다는 둥. 주문형 유료서비스 사업자가 가입자와 프로그램 제공자의 동의없이 제멋대로 콘텐츠를 편성·편집할 수는 없다. 특정 내용만 지속적으로 뺀 것이야말로 민감하고도 정치적인 행위이다. 누가 봐도 올 하반기 실시간 방송 서비스를 앞두고 사업자 선정권한이 있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눈치를 본 것이다. 이미 포화상태인 휴대폰과 인터넷만으로는 더이상 시장 확장을 하기 어려운 기업들이 눈을 돌린 새로운 노다지가 인터넷TV다. 기업 프랜들리한 정권 아래에서, 어쩜 이렇게 하는 짓이 눈물겹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21세기 리퍼블릭 어브 코리아는 사익의 날갯짓 소리만 요란하다. 자본과 정권이라는 두 날개로 뭉친 이들 사익동맹은 체면도 염치도 없다. 어느 네티즌은 MBC 드라마에 언뜻 비친 경찰청장 어청수의 벽걸이용 말씀 ‘선진 일류경찰로 도약-보다 신속하게 더욱 친절하게 가장 공정하게’를 보고 “나나나 울컥했다규~” 말했다. 역시 ‘감동’먹은 댓글들이 달렸다. “신속 친절 공정하게 때린다규~.” 보다 신속하게 낙하산 타고 접수하고, 더욱 친절하게 회장님의 경영권 불법승계는 무죄방면시켜드리고, 가장 공정하게 온갖 입에 재갈 물리는 세상, 나나나, 정말 울컥한다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촛불에 덴 보수언론

안티조선운동 몇년이 하지 못한 일을 촛불은 단 며칠 만에 이루어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섞여 들어온 뼈 조각 하나에도 호들갑을 떨던 조중동. 갑자기 논조를 180도로 바꾸어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떠들어대다가 본색을 들켜버렸다. 촛불집회의 배후에 선동세력이 있다는 보도에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애먼 사람도 졸지에 빨갱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촛불집회가 보수언론의 본색과 행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대중이 갑자기 등을 돌리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조중동의 지면은 온통 촛불에 대한 원한으로 넘쳐흐른다. 그중의 어떤 기사는 마치 한여름 텔레비전의 납량특집을 보는 듯하다. 특히 공영방송을 겨냥한 <조선일보>의 사설에서는 어떤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KBS, MBC가 전경 어머니들 마음을 매일 밤 인두로 지져댄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기껏 조선시대의 고문방법을 끄집어내는 이 몰취향한 수사학은 그들이 이 정국에서 얼마나 불안감을 느끼는지 보여줄 뿐이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진 연출까지 했다.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먹는 시민은 <중앙일보>의 기자들로 드러났다. 에는 검사 다섯명. 그럼 이 뻔뻔한 조작에는 검사가 몇명이나 붙어야 할까? 해명에 따르면, 식당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으나 촬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랬단다. 하지만 손님 중에 촬영에 응할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 말해주는 게 아닐까? 기사를 쓰는 대신 콘티를 짜는 이 해프닝에서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되도록 빨리 기정사실화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조급함을 본다. 압권은 어느 <조선일보> 꼬마 기자의 기사다. 어느 인터넷 카페에 ‘집안의 쥐XX를 잡고 싶다’는 농담 글이 올라오자, 그것을 ‘이명박 대통령 암살 기도’로 규정했다. 이 기사는 충분히 나의 흥미를 끌었다. 촛불집회를 테러리즘으로 낙인 찍으려는 데서 확인되는 거시정치적 의지. 그리고 이런 막장 크리를 통해서라도 사내에서 인정받으려는 젊은 기자의 푸르른 미시정치적 야망.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합쳐져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 꼬붕 기자의 과도한 해석학적 진지함을 낳은 것이리라. 네티즌은 즉각 ‘쥐XX=이명박’이라는 공식을 제공해준 <조선일보> 조백건 기자의 해석학적 친절함에 감사를 표했다. 이 해프닝은 이렇게 폭소로 끝났어야 한다. 황당한 것은 그 다음. 그 농담 글을 올린 네티즌에게 경찰에서 수사를 나왔다고 한다. 하니 청와대에서 수사를 지시했다나? 이렇게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청와대라면, 앞으로 쥐약 파는 동네 약국을 모두 압수수색할지도 모르겠다. ‘쥐를 잡자’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시민들은 암호로 암살지령을 내린 게 되나? 시청광장에 다시 수십만의 시민이 모였던 지난 7월5일. 광화문에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은 수십대의 경찰차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민과 독자로부터 버림받고 검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언론사의 몰골. 경찰 버스의 바리케이드 뒤로 숨은 보수언론의 사옥은 내게 깊은 시각적 인상을 주었다. 어느 여당 인사가 ‘보수언론이 사회에 기여한 것은 없느냐?’고 했던가? 세상의 미물도 다 존재이유가 있을 터, 보수언론이라고 사회에 기여한 게 왜 없겠는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촛불집회 중에 동아일보 사옥에 달린 화장실을 두 차례, 조선일보가 있는 코리아나 호텔의 화장실을 한 차례 사용한 바 있다. ‘사회의 공기’(公器)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최소한 이렇게 사회의 변기(便器)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지의 지퍼를 올리며, 나는 드디어 보수언론에 제 몫을 찾아주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존 셰인필드, 데이비드 리프] “오노 요코가 개인 소장품을 기꺼이 공개한 것에 감사한다”

비틀스 이후 솔로로 활동하던 시절 존 레넌에 관한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의 공동감독인 존 셰인필드, 데이비드 리프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비틀스에 관한 기록 필름이 이미 다량 공개된 마당에, 사후 30년이 다 되어가는 음악가를 이제 와 영화로 다루려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이런 궁금증이 풀린다. 세상에는 잘 아는 것 같은데 실상은 모르는 것들이 많다. 영원한 팝의 전설 비틀스 시절 이후 40살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존 레넌의 삶도 그런 종류인 것 같다. 더불어 그가 고민했고 겪었던 사회현상들이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된다. 존과 데이비드 감독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다큐 작업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매우 성실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존 레넌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존 셰인필드: 존 레넌만큼 유명한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비틀스와 존 레넌의 팬으로서만 흥미를 느낀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정부의 권력 남용, 숱한 장애를 이겨내는 용기, 혼자서도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데이비드 리프: 비틀스를 찬양하며 십대 시절을 보냈다. 닉슨이 대통령이던 시절, 열일곱살 때 워싱턴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곳은 당시 수백, 수천명의 시위대가 몰리는 중심지였다. <존 레논 컨피덴셜>의 주제를 관통하는 사건의 최전선에서 학생 시절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는 닉슨 정부 인사부터 좌파운동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이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데이비드 리프: 닉슨 수뇌부였던 G. 고든 리디와의 인터뷰가 가장 도발적인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는 닉슨 정부가 내렸던 모든 결정이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반드시 필요하고 적절한 조치들이었다고 했고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 결과 법적으로 처벌을 받고 수감생활을 했음에도 말이다. 인터뷰 도중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존 레넌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자료를 모으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존 셰인필드: 이전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었거나 사람들이 이미 본 영상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전세계를 다녔다. 존과 요코가 1969년 비엔나에서 벌인 자루 이벤트나 비틀스 화형식 장면, 존이 마침내 영주권을 받는 뉴스 필름 등은 그런 고생 끝에 얻은 것이다. 데이비드 리프: 전세계를 통틀어 도움을 준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노 요코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기록물을 기꺼이 공개해주었던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새삼스럽게 존 레넌을 조명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존 셰인필드: 이 영화의 주제는 한 사람이 변화를 이끌 수 있고 모두가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노력해서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리프: 미국 시민들의 책무는 바뀌지 않았다. 분노를 표현해야 하고 이 거대한 민주주의의 실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민주주의란 정부가 사람들의 의지를 꺾도록 그저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관객이 이 영화를 통해서 받아들였으면 한다. -과거 자료와 현재의 인터뷰 내용을 섞어 편집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편집 과정에서 아깝게 버린 내용이 있는지. 존 셰인필드: 일명 ‘존의 잃어버린 주말’라고도 불리는 여러 가지 장면을 편집해놓았는데, 전기영화였다면 너무나 꼭 맞는 장면이었겠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는 맞지 않아서 포기했다. 예술과 상업성 사이의 줄다리기는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늘 있는 일이다. 데이비드 리프: 탁월한 편집자 피터 린치가 있어 가능했다. DVD라는 매체가 생겨나면서 편집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편집에서 잘려나간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재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시간에 달하는 인터뷰 영상은 사료로 가치가 있으므로 적절한 아카이브에 보관하면 좋을 것 같다. -앞으로도 둘이 함께 작업할 계획이 있나. 존 셰인필드: 현재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프로듀서였던 노만 리어에 대한 회고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고 있는데 제목이 <모두 한 가족>(All in the Family)이다. 그외에도 각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 <천국>(Heaven)이라는 영화를 거의 끝마쳐가고 있는데 세계의 종교가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다루는 작품이다. 또한 야구를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작업 중이다. 두편 다 2009년 봄쯤이면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리프: 노만 리어에 관한 프로젝트를 마치면 각자의 관심사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요즘 다큐멘터리 구성안을 짜는 한편, 다큐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 멀더는 왜 믿고 싶은가, 스컬리는 왜 믿지 않는가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는 눈으로 덮인 미국의 한적한 도로와 그 위를 헤드라이트를 켠 채 지나가는 자동차를 따라가며 시작한다. 텔레비전 시리즈의 분위기 그대로 조용하고, 스산하고, 불길하다. 자동차에서 내린 여인은 곧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쫓기기 시작하고 다음날 환영을 통해 여인이 공격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신부를 따라 FBI 요원들이 그녀의 시체를 찾아 눈 위를 수색하는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그리고 신부가 가리키는 곳을 파서 발견하는 것은 잘린 누군가의 팔. 지난 2002년 시즌9를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막을 내린 <엑스파일>의 두 번째 극장판인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는 ‘그리고 그 이후, 멀더와 스컬리의 이야기’이다. 텔레비전 시리즈가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였다면 ‘나는 믿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번 작품에서는 이제 외부가 아닌 두 캐릭터의 복잡한 내면에 집중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의 두 사람. 스컬리는 가톨릭 교회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고, 멀더는 세상과 격리되어 자신의 조그마한 방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 같은 침대에 누워 있지만 더이상 같이 일하지 않기 때문일까, 둘 사이는 오히려 더 소원해 보인다. 외계인에 납치된 여동생에게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멀더만큼이나 스컬리 역시 아들 윌리엄이 남기고 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사라진 FBI 요원을 찾는 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스컬리를 통해 멀더에게 들어온다. 사라진 요원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환영을 본다는 조셉 신부 때문이다. 엑스파일이라는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스컬리와 여전히 그 어둠을 거부할 수 없는 멀더는 그렇게 한 발자국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엑스파일 특유의 외계 존재를 포함한 초자연적인 현상과 그를 둘러싼 음모론을 상당히 희석시킨 이번 극장판에서는 미스터리 그 자체보다는 그를 바라보는 해석의 문제,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언어의 다의성을 탄탄하게 드라마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믿음과 과학 사이의 서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오랜 논쟁에서 결국 공감하고 동의하게 되는 부분은 무엇이 진실이냐가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과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것이다. 나는 믿는다가 아닌 나는 믿고 싶다라는 말은 참 가장 보편적인 바람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멀더는 왜 믿고 싶은 것일까. 스컬리는 왜 믿지 않은 것일까. PS. 멀더와 스컬리 커플의 팬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

[크리스 카터, 프랭크 스파니츠] “우린 둘 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며 자란 세대다.”

지난 7월20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데이비드 듀코브니, 질리언 앤더슨과 시리즈 원작자이자, 감독 및 각본을 맡은 크리스 카터와 함께 각본을 맡은 프랭크 스파니츠와의 라운드테이블이 이루어졌다. 크리스 카터 감독, 프랭크 스파니츠 공동 각본가 인터뷰 -당신도 믿고 싶은가. 크리스 카터: 그렇다. 믿고 싶다. ‘나는 믿고 싶다’는 시리즈 처음부터의 슬로건이기도 했고 믿음의, 믿음을 둘러싼 인간의 고뇌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믿느냐라는 것, 믿고 있는가라는 것은 내게 무척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캐릭터에게도 마찬가지고. 프랭크가 회의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믿는 사람이다. 신이라든가, 영적인 무엇인가와 같은 더 큰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93년에 첫 방영되기 시작했던 텔레비전 시리즈에는 정부와 권위에 대한 불신이 아래에 흐르고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한데 두 사람 중 누구의 시각에 기반한 것인가. 크리스 카터: 우리 둘 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며 자란 세대이다. 파일럿을 썼던 90년대 초반에도 그 시각이 여전히 유효했다. 우리 두 사람의 공통된 시각이라고 보면 되겠다. -영화와 텔레비젼 시리즈의 방향이 다르다. 프랭크 스파니츠: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파생되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니아 팬뿐만이 아니라 <엑스파일>을 모르는 관객에게까지 소구력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스튜디오의 요구사항이기도 했고. 그래서 초과학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에 더 집중했다. 이번 작품이 잘되면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시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윌리엄에 대해 다루기 시작하면 외계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은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윌리엄이라는 존재는 이미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부재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크리스 카터: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에 윌리엄이 나온다. 스컬리의 환자인 크리스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윌리엄의 변형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윌리엄 없이 윌리엄 이야기를 하는 식이니까. 프랭크가 잠시 언급했듯이 스튜디오가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객도 고려한 작품을 원했기 때문에 윌리엄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시리즈를 보지 못한 관객이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스트>와 같은 이후 드라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텔레비전 시리즈가 가지는 위상을 의식하면 영화화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프랭크 스파니츠: 다 합하면 202시간 길이의 시리즈다. 언제나 지난 에피소드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다보니 이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대체 어떤 이야기를 골라서 어떻게 풀어나갈 지 정하는 데만 해도 고민스러웠다. 어느 이야기를 끄집어내더라도 다양한 기대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지 않나.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 들어가기 전에 둘이 앉아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싶은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은지라고 생각했으니까. -외계인을 배제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감한 결정이다. 프랭크 스파니츠: <엑스파일>의 팬이라면, 우리가 선택한 이야기가 사실은 <엑스파일>의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엑스파일>은 처음부터 멀더와 스컬리의 이야기였다. 멀더와 스컬리가 어떤 사람이냐라는 것을 시리즈를 통해 겪어오지 않았나. 팬들이 분명히 이번 이야기에 반응할 것이라고 믿는다. -시리즈가 종영한 지 6년이 지나서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낯설지 않았나. 크리스 카터: 시리즈가 끝나고 나니까 질리언이 자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모를 정도로 지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 우리 모두는 그때 몹시 지쳐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고 나니 이제야 그간의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제대로, 좀더 세련되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코미디 배우로 알려져 있는 영국 출신 빌리 커놀리를 어떻게 아동성학대 혐의를 받고 있는 신부 역으로 캐스팅하게 되었나. 크리스 카터: 그가 출연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데, 그냥 감이 왔다. 로스앤젤레스로 불러서 시나리오를 건네줬더니, 읽고 나서 단 한줄 적어놓았더라. “언제 촬영 들어가나요?”라고. -프로젝트 내용과 관련해 스포일러가 유출되지 않도록 모든 것이 극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크리스 카터: (프랭크를 보며 씨익 웃으며) 꽤나 애를 먹었지 아마? 프랭크 스파니츠: 웹에 스포일러가 떴다는 것이 확인되면 6시간 이내에 그를 상쇄할 만한 가짜 정보를 만들어내야 했다. 가짜 스크립트 페이지를 몇장 슬쩍 올려두기도 하고, 가짜 사진도 만들어 흘리고, 가짜 촬영 메모도 올리고, 스포일러도 흘리고. -가짜 스포일러가 뭐였나. 크리스 카터: 늑대인간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웃음) 프랭크 스파니츠: 늑대인간이라면 스포일러가 거짓으로 밝혀지더라도 팬들이 별로 아쉬워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초창기 SF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진다. 크리스 카터: 그렇다.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작품이다. 특히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은 대단하다. 단순히 충격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SF적 요소를 넘어서 일종의 시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멀더와 스컬리가 왜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크리스 카터: 그러게. 내게도 미스터리다. (웃음) 그 둘은 서로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이 둘 다 너무나 강한 캐릭터이다. 그래서 둘이 어울린다라기보다 서로 충돌하는 상반되는 두 에너지의 극렬한 대비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나 할까. 서로 대등하게 맞서는 분명한 색깔의 두 에너지, 그게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를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듀코브니] “6년 전의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피곤해 보인다. 홍보 일정이 빡빡한 모양이다. =이 작품 홍보와 별도로 <캘리포니케이션>도 찍고 있어서 한달 이상 하루도 쉬지 못하다보니 피로가 쌓이는 것 같다. (혼잣말로) 이러다가는 미쳐버릴지도…. -<엑스파일>에 다시 복귀하게 된 계기는. =시리즈에서 빠지게 된 이유는 <엑스파일>이 싫어서라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매년 10개월을 쏟아부어야 하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엑스파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쯤에서 잠시 휴식도 취하고 내 경력에도 변화를 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쳐 있었으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가진 바람 중 하나가 <엑스파일>을 프랜차이즈 영화로까지 이끌어나가고 싶다였다. <엑스파일>의 캐릭터들이나 <엑스파일>의 팬들을 생각하면 그냥 끝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초과학적인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나. =(단호하게) 전혀. -초과학적인 현상을 믿나. =(무심한 듯 간단하게) 그렇다. -멀더와 스컬리가 함께 산다는 설정이 연기하기 낯설지 않았나. =글쎄. 오히려 시리즈 때보다 실제적인 육체적 접촉은 덜한 편이라고 보는데. 시리즈에서는 멀더가 스컬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거나, 이마에 키스한다거나…. 그러고보니 진짜 키스를 몇번 하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라기보다 다 암시되어 있는 쪽이니까. -이번 작품은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 그 둘 사이의 감정에 집중하고 있다. 그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소감을 말했더니 크리스와 프랭크가 말하길, “이 영화는 멀더와 스컬리의 사랑 이야기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들 의도에 맞추도록 노력은 해보겠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질리언과는 자주 연락하나. =(무심히) 그다지 별로. 이메일로 가끔 연락하긴 한다. -6년 만에 다시 멀더와 스컬리로 돌아가기가 어렵지 않았나. =의외로 쉬웠다. 둘 다 그다지 접촉이 없다보니 예전이 그립기도 했고. 연기 궁합이라는 게 예전에 있었다면, 지금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냥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없는데 따로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노력한다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니까. 뭐, 시도를 해볼 수야 있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잡혀 있어야 하는 시즌형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캘리포니케이션>으로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는데, 다시 텔레비전으로 돌아간 소감이 어떤가. =6년 전의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다양한 역도 해보았고,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케이블 채널이 등장하면서 네트워크에서 다루지 못했던 다양한 소재들이 가능해지면서 텔레비전 드라마의 질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영화나 네트워크와는 달리 특정 취향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기획되는 드라마가 더 흥미로운 것은 당연하지 않나. 13살부터 80살까지, 남성 관객과 여성 관객의 구미에 다 맞추려면 뻔한 이야기밖에 만들어낼 수 없지 않나. <아이언맨>이나 <다크 나이트>는 그중 나은 버전일 뿐이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좀더 개인적인 이야기, 작은 이야기, 인간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줄어들고 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 기자의 말을 끊고는) 케이블 드라마는 독립영화 같다. 뭐, 요즘 독립영화라는 말은, 단지 자본의 규모만 지칭하지 실제 내용이나 스타일에서의 독립성을 표방하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 케이블 드라마가 더 독립적이라고 할까. 70년대 미국이나 유럽영화들,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영화를 12주를 한 시즌으로 제작되는 케이블 드라마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6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안 그래도 어제 질리언과 함께 인터뷰에 임했는데, 그 질문이 나왔다. 그때 질리언 왈, “데이비드는 이제는 <엑스파일>과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게 달라진 점이에요”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