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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호그와 소년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황시>

감동 지수 ★★☆ 로맨스 지수 ★★☆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의 외국어 구사 능력 지수 ★★★★ 일본의 침략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으로 혼돈에 놓였던 1938년의 중국, 외국인 기자로 상하이에 머물던 영국인 조지 호그(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국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중국식으로 ‘허커’라고 불렸던 그의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중국 땅에 세워졌는데, 그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황시>다. 난징 대학살 뒤 일본은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고, 23살의 의욕 넘치던 호그는 적십자 약품 운송원으로 위장해 난징에 잠입한다. 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고 모두 빼앗는, 이른바 삼광정책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일본군에 발각돼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다가 공산당원 잭(주윤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잭은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호그를 황시라는 작은 마을로 데려가 전쟁 고아들을 돌보고 상처도 치료하도록 한다. 펜을 무기 삼아 일제와 싸우려던 청년은 졸지에 고아들의 보모가 되지만,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인간애는 그들을 한 가족으로 만든다. 국민당이 소년들을 징병하려고 하자 호그는 황시에서 1126km나 떨어진 샨단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우는데, 호그 일행은 초반 900km를 걸어서 이동했고 란저우에서부터는 트럭을 빌려 타고 갔다. 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호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1985년 술집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기사화한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베이징 통신원 제임스 맥마누스는 영화의 각본에도 참여했는데, 2007년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영화는 호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다. 호그의 삶이 조명받은 이유는 샨단으로 향했던 ‘작은 대장정’ 때문이지만, 영화는 설산을 지난 고단한 발걸음보다는 호그와 소년들이 야만에서 문명을 세우고 가족이 되어간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전쟁을 다룬 휴먼드라마가 그러하듯 총포와 군화가 남긴 상흔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년들을 끌어안는 메이어스의 연기는 진실되며, 아역배우들의 검은 눈동자는 그에 호응한다. <연인> <황후花>의 촬영감독 자오샤오딩이 담아낸 야간이동 장면은 그림자극처럼 아름답고, 학살장면에서 스크린이 멈출 때는 숨이 멎을 것 같다. 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벽안의 성자를 기억하는, 이제는 노인이 된 생존 고아들의 회상이 채우는 결말은 너무 착하다. 어떤 이가 기억되려면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과도한 배려가 실화가 지녔던 울림을 반감시켰다. Tip/ 영화가 생략한 이야기 중에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교육가인 르위 앨리의 삶이 있다. 앨리는 조지 호그와 함께 샨단에서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제임스 맥마누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주인공이다.

[듀나의 배우스케치] 봉태규

요새 봉태규를 보면 한대 치고 싶습니다. <워킹맘>나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작품들에서 찌질한 젊은 남자 역을 그럴싸하게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편하겠죠. 사실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봉태규가 늘 이런 역만 맡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의 탄생>의 경석이나 <두 얼굴의 여친>의 구창은 어떻습니까? 모두 그 정도면 준수한 청년들이죠. 경석의 경우는 조금 옹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지랖의 여신과도 같은 여자친구의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반응은 이해가 가요.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이 두 영화에서 봉태규가 여자친구들에게 학대당하는 걸 보면서 변태적인 쾌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 간담회나 발표회에서 자연인 봉태규를 봐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절로 손이 올라가요. 쓰윽. 여기서 재미있는 건, 봉태규에 대한 이런 감정이 캐릭터에 대한 혐오나 멸시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요. 단지 전 봉태규의 캐릭터들이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박해를 당하는 걸 보면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볼 때처럼 안도하게 됩니다. 자연의 법칙이 실현된 것 같아요. 봉태규 캐릭터는 수난을 당하는 게 정상이고 그가 실수로라도 그런 정상성에서 벗어나면 한대 쳐서라도 그 상태를 복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인 봉태규씨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 저는 그가 관객의 존중을 받아 마땅한 영리하고 재능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태규가 낮은 승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주연배우 자리를 유지해온 것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신기한 현상은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영화는 대부분 남자들이 만들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영화의 주인공에 투영합니다. 그리고 영화쟁이들 중 장동건이나 조인성처럼 생긴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단 말이죠. 그들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주인공 역을 봉태규에게 주려고 할 겁니다. 일단 연기가 되고 대한민국 남자들의 찌질함에 대한 묘사라면 이미 도가 튼 배우이니 가장 안정된 선택이지요. 봉태규가 한예슬, 차예련, 염정아, 정려원과 같은 후리후리하고 급수가 다른 미인들과 꾸준히 파트너가 되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 아무리 봉태규를 캐스팅한다고 해도 자신의 욕망까지 하향조절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그들이 봉태규에게 온갖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양심있는 예술가라면 욕망을 충족하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감독이나 작가가 여자라면? 역시 그들이 직접 현실세계에서 경험한 남자들을 그리기 위해 봉태규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장동건이나 조인성 같은 남자들을 현실세계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얼마 안 될 테니 말이죠. 근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건 좀 박한 것 같습니다. 봉태규는 사실 로맨스의 감이 꽤 좋은 배우입니다. 표현력도 좋고요. 우리나라 남자배우들은 (특히 잘생긴 부류일수록)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향이 강한데, 봉태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이미지를 망가뜨리더라도 속내를 감추지 않고 감정의 흐름을 정확하게 타지요. 저는 여전히 한예슬과의 로맨스가 무르익으려던 바로 그 순간, 정극배우가 되겠다고 <논스톱>을 떠난 그의 결정에 화가 납니다. 그 뒤에 대타로 등장한 현빈 캐릭터에 특별한 유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예슬/봉태규 콤비가 그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화학반응은 최고였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그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지금의 스티븐 카렐이 그런 것처럼)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로맨스영화에 잘 적응하는 중년의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정지우] 사랑은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물할 수 있다

<모던보이>가 재현해낸 1930년대의 경성은 과거의 죽은 시간이 아니라 눈앞에 타오르는 현실처럼 생생하다. 오랜 시간 CG와 색보정에 공을 들인 영화답게, 명동성당과 미쯔비시 백화점 옥상, 경성역, 숭례문, 경회루 등지를 가로지르는 도시의 밤과 낮은 눈이 부시게 매혹적이다. 당대를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모던보이>의 기술적 성취는 뛰어나다(자세한 내용은 <씨네21> 670호 참고). 하지만 시사회 다음날 진행된 인터뷰는 경성의 재현이나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불운한 시대 속,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여러 질문과 답들로 채워졌다. 정지우 감독에게서는 <사랑니>의 흥행실패 이후, 대중과의 교감 지점에 대해 오랜 시간 고심한 티가 역력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와 개인의 욕망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풀어가면서 겪은 내적 갈등과 부담 또한 느껴졌다. 하지만 민감하고 공격적인 질문들 앞에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조목조목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영화의 서사적 틈을 묻기 위해 원작 소설과의 차이를 종종 언급한 질문자에게 그는 수차례 매체의 차이를 강조하며 영화를 그 자체로 읽어줄 것을 당부했다. -개봉을 몇 차례 미루고 6개월간 편집에 매달렸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운가. =나는 정해진 동선으로 합을 맞추어 촬영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배우들을 전제로 찍기 때문에 조합의 경우의 수가 많다. 현장에서 영화를 완성하는 타입이 있다면, 나는 편집실에서 완성하는 타입이다. 게다가 핸드헬드로 촬영을 했는데 이 정도 분량의 합성이 있는 CG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 건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개인적으로는 충무로에서 상업영화들에 주어지는 편집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고치고 수정했기 때문에 만족스럽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영화가 나왔는가의 여부를 묻는다면, 글쎄…. 그건 구체적인 내러티브처럼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정서적인 차원에서 어떤 쪽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그걸 끝까지 유지해서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 말이다. 물론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단순히 이야기를 맞추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서 영화화를 결심했나. =원래 1930년대에 대한 매혹이 있었다. 당시의 음침한 이야기와 무드에 관심이 있었고 꼭 해보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에 비해 소설은 유쾌한 편이었지만, 작가가 당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통찰이 새로웠다. -각색, 촬영, 연기지도, 편집 등에서 기존에 고수했던 작업방식과 차이점이 있다면. =돈의 압박 수준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커서 늘 마음이 쪼들리고 뭔가 쫓아온다는 느낌으로 찍었다. 그런 점이 괴로웠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다른 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시대적 배경의 차이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나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방식에서 <사랑니>와의 거리가 큰 영화다. <사랑니> 때는 마치 우물물이 퍼져나가듯이 인물들의 미세한 마음의 떨림에서 시작해서 인물 밖 프레임까지 정서가 퍼져나간다면, 이 영화는 반대로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 자체는 일면 전형적인 구석이 있지만, 빛이나 공간의 공기와 같은 인물 외부의 뭔가가 인물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있다. =공간이 네 번째나 다섯 번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당대의 경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이전의 시대극에 비해 새로운 공간의 느낌이 묻어난다면 그건 과거에 비해 제작상의 현실적 어려움이 많이 해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서사가 일본의 공간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의 일본인 주류사회 안으로 캐릭터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예전 영화들이 보여주는 형태의 공간 안에서는 이 시대의 특수성을 정확히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공간에 매번 스며드는 뽀얗고 화사한 빛이 인상적이다. 이 시대를 반어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 같기도 하고 현실을 지운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사실 고증에 입각한 굉장히 현실적인 설정이다. 당대에도 전기 수급은 이루어졌지만, 도시 전체에 전기가 있던 시기가 아니었고 형광등이나 간접조명은 없었다. 광량이 부족했을 텐데, 그래서 오히려 직접적인 백열등의 느낌이 강했을 것 같다. 물론 조명이 주는 정서적인 상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촬영을 하며 그런 부분이 관계의 내면을 반영할 수 있겠다는 느낌도 받았을 테고. -영화가 그리는 경성은 일면 무국적적이고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당대에 대한 사료들도 많이 찾아보았을 텐데, 30년대 경성을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나. =현재 유행하는 근현대에 대한 각종 사료들을 보면, 아무리 과거지만, 참으로 동세대적 감성이구나, 이미 이 시대는 현대구나, 라고 느낀다. 실제 30년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놀란 건 근대 경성이 완전히 현대화된 근대도시라는 거다. 그런 다큐들은 대부분 관광홍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화려함에도 자극을 받았지만, 당대에 대한 여러 사례들이 파편적으로 나열됨에도 그 이면의 구조, 어떤 구조가 그런 사건들을 발생시켰는지에 대한 접근이 없다는 사실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경성의 현대성을 보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경성이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경성이 다양한 공간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이를테면 경성은 일본인의 공간이자 최상의 계층에는 향유의 공간이지만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농촌에서 유입된 엄청난 인구가 토막촌을 구성하고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있었던 공간이 경성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입체적인 경성을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사실 전체 이야기 속에 토막촌 같은 곳의 촬영분도 있었지만 결국 영화 전반의 균형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들어냈다. -원작 소설과 비교하자면 신스케의 캐릭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신스케의 캐릭터와 그와 해명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유키코라는 인물도 부재하고. 캐릭터들이 단순해졌다고 할까. =매체를 옮겨오면서 생기는 변화다. 영화의 결말 경우에 원작자가 시나리오 최종본을 보기 전에, ‘영화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한데, 소설처럼 끝맺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라는 농담을 했다. 말하자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결말과 소설의 결말은 달라야 하는 것 같다. 전체 분량으로 봤을 때, 신스케라는 캐릭터는 지금 정도의 정리가 맞는 것 같다. 유키코의 분량도 있었지만, 전체 균형상 지금과 같은 결과를 선택했다. <사랑니>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영화를 복잡하게 만들라치면 그럴 수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현재의 관객이 그런 복잡함을 이해해주는 수준은 문득문득 공포를 느끼게 한다. (웃음) 이 영화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너무 단순하게 정리한 게 아니냐고 물을 텐데, 여타의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익숙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서 생각을 요구하는 영화다. 지금의 결과물이 가장 적절하고 흥미롭게 정리된 수준이 아닌가 싶다. -편집에서 많은 부분을 잘라낸 것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벅찬 지점이 있었고 특히 해명과 난실의 러브라인이나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설득되지 않는 순간이 종종 있다. 이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묘사적인 이미지(화된 기억들)가 남는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해명과 난실의 난투극 신은 러브신과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찍었다. 다시 안 봐도 될 사람들이 다시 만나 러브신과 유사한 난투극을 벌이고 사랑을 이어가는 게 개인적으로는 별로 비약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미지가 남는다고 느꼈다면, 이 영화는 완전한 실패다. 인물들 내면의 변화과정이 어떤 흐름을 타고 가느냐의 문제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근거가 인물에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영화다. -원작에서 해명은 다른 선택을 한다. 지난 인터뷰를 보니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시선에 동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그런 마음의 반영일까. 후반으로 갈수록,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영화가 개인에게 역사적 운명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다. 끝까지 가볍게 가는 길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나. =이 영화를 만들면서 일반 국민의 평균적인 감성을 피부로 느꼈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얼마나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지. 어리면 어릴수록 유쾌한 톤으로 질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나이가 많을수록 이 시대를 다루는 태도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이 시대를 다룬 영화들이 특정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순히 대중과 절충하겠다는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결말에 나타나는 무드나 후반부 해명의 달라진 태도가 없었다면, 총독부 밖에서 이뤄지는 기념식이나 천황을 향해 절하는 장면들을 문제 삼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취향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 촬영, 편집 단계를 거치며 느낀 건 관객이 이 시대를 받아들이는 어떤 준비된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취한 걸음이 성큼 뛰어넘어서 완전히 다른 그림을 만들어낸다면 영화적으로는 멋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상처로 남는다. 그 누군가는 내가 만든 영화를 위해 티켓값을 소비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직도 위태로운 기분이 든다. 한쪽에서는 진부하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일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주인공을 문제 삼으니까. 내가 방어적이거나 보수적인 입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참 싫다. 나는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해서, 정말 많은 시간을, 가장 어려운 과정을 통해 내 태도를 결정했다. 단순히 어떤 선택이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당시 인물들이 갈 수 있는 끝이 무엇일지를 고민한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피드백을 했는데 모두들 시대에 대한 다양한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하나의 태도로 모아지더라. 어제 시사 끝나고 벌써 우려했던 대로 일본 군가 나오는 행사, 일본인 공간 안에 들어간 주인공들이 취한 태도들에 대한 반감도 접했다. 아까 이 영화에서 이미지가 남는다는 말에 공포감이 생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경성에 얼마나 쇠락한 공간들이 많았는데, 경성을 이렇게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냐고 누군가가 물었을 때, 만약 이미지가 전부라면 답할 게 없다. 주인공들의 마음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는 감상이 없다면, 이건 치명적이다. -핸드헬드로 촬영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들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배우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들에게 제한을 주지 않는 것은 내게도 절체절명의 매혹이었다. 그런 촬영을 즐길 수 있는 배우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각효과 면에서는 아주 힘든 작업과정이었지만, 멈춰서 찍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것 같다. -김혜수의 어떤 점에서 난실을 보았나? <해피엔드>에서 텔레비전 드라마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데 그 모니터 안에도 김혜수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웃음) 지금은 그녀의 불균질함, 알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섞였을 때 나오는 매혹이 있다. 그리고 그런 매력이 가면 갈수록 깊어진다. 그녀 특유의 몸의 기운이 어쨌든 휘발되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것이 주변을 맴도는데, 그게 아직 명료하지 않아서 점점 재미있어질 것 같은 배우다. -난실은 과거가 없는 여자다. 애초 설명을 거부하는 캐릭터이지만, 때로 그녀의 행동과 선택의 근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인물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 난실의 경우 경회루에서 하는 조선왕조에 대한 언급이나 운동그룹 내에서의 리더 역할로서 여자가 왜 대역을 내세워서 일의 진행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지 등의 간단하지 않은 고민과 상황은 던져져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는 것을 불친절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영화 내 캐릭터의 흐름에 있어서 일관성의 문제라든가, 맥락의 이해여부에 대한 문제라면 그다지 부족하다고 보지 않는다. -예전에 “경험으로 인간이 개선되면 얼마나 좋으랴만”이라는 말을 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해명과 난실은 결말에 이르러 달라진다. =맞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라질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계기는 사랑이다. 사랑이 새로운 세계를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반부의 기념식장 장면을 찍으면서 해명이 태극기를 꺼내드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힘으로 영화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도 슈퍼히어로들이 있다

서구에서 시작된 슈퍼히어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지만 아시아 각국의 공간에 등장시키기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아시아의 각국들은 고유의 전통, 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를 결합한 다양한 토종 슈퍼히어로들을 탄생시킨다. 가장 적극적으로 히어로를 탄생시킨 국가는 일본이었고, 이들은 기계문명과 결합한 다양한 슈퍼히어로들을 만화와 영화를 통해 생산해냈다. 그에 못지않게 필리핀에서도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만들어졌고, 이 중 한 캐릭터는 인도네시아의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인도에서도 슈퍼히어로가 탄생되었다. 반면, 중국, 대만, 홍콩처럼 슈퍼히어로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국가도 있다. 이들 국가는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유교권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슈퍼히어로의 등장 1950년대 후반, 일본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미국의 <슈퍼맨>시리즈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이듬해 신토호에서 <슈퍼 자이언트:외계에서 온 강철맨>가 제작되었다. 이는 슈퍼맨의 조악한 모방에 불과했지만, 큰 인기를 끌어 이후 시리즈로까지 제작됐다. <슈퍼 자이언트>의 성공은 일본 제작자들에게 슈퍼히어로 장르의 시장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로봇 히어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우주소년 아톰>, 외계인과 싸우는 거대한 <울트라맨>이 대표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의 주변국가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유교의 영향권에 놓여있었던 것에 비해, 세계대전을 거치고 원자폭탄의 피해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일본에게 기술 문명은 공포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기술 문명이 야기한 충격은 그들의 땅과 육체에 직접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면서 동시에 전후의 삶 속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슈퍼히어로 물은 일정한 마니아층의 관객을 형성하면서 장르영화의 자리를 탄탄하게 구축해나갔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의 슈퍼히어로들 유교의 영향력이 한국, 중국,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했던 필리핀에서는 자국의 사회,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토종 슈퍼히어로들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950년대의 필리핀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이미 <진흙맨>, <화산의 아들>등 토종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 1947년 잡지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다르나>는 1951년에 영화화되었다. 다르나는 할리우드 원더우먼의 아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원더우먼처럼 하늘을 날고,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며, 팔찌를 이용해서 총알을 막아낸다. 단, 그녀는 신체의 노출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하여 삼각형의 팬티는 착용하되 허리띠에서 배 부분을 가리는 천을 늘어뜨려서 복부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한편,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들이 방사능 노출에 의한 돌연변이로 탄생했다면 필리핀의 슈퍼히어로는 우연히 손에 넣게 된 물건으로 변신마법에 의해 탄생되는 식이다. 이것은 필리핀 어린이들의 리얼리티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는 범위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필리핀의 슈퍼히어로 속 주인공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인물로 영화의 주 관객층인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인도네시아 영화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최초의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 작품은 1974년의 <라마 슈퍼맨 인도네시아>이었다. 이것은 만화가 원작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창조된 캐릭터다. 6년 후, 필리핀의 <다르나>의 흥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적의 다르나> 가 제작되었고, 이듬해 <번개의 아들 군달라>가 개봉되었다. 절대 악과의 투쟁을 부르짖는 여타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가 싸우는 적은 친구의 가족을 괴롭히는 악령이거나 소년들을 유혹하는 마약상, 폭탄 제조 방법을 노리는 악의 무리다. 인도네시아의 슈퍼히어로는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악과 싸운다. 2006년 인도 영화사 흥행 1위를 차지한 <끄리쉬>는 끄리쉬를 주인공으로 삼은 본격 슈퍼히어로 영화다. 끄리쉬는 총명하고,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춤과 노래에도 능하다. 그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의 흔적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장르적 특징을 발리우드의 경계 안에서 그럴싸하게 조합해낸다. <끄리쉬>는 거대자본의 투자와 싱가포르 로케이션 촬영 등 실험적인 시도로 인도 영화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펼쳐보였다. 속편인 <끄리쉬2>가 내년 개봉을 목표로 현재 촬영 중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변종 슈퍼히어로 태국의 대표 슈퍼히어로 물 <머큐리맨>(2007)은 다소 엉뚱하다. 고대 티베트의 부적때문에 슈퍼히어로가 된 방콕의 소방관 출신 주인공 샤른은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알리를 상대한다. 오사마 빈 알리의 야심은 티베트의 부적을 이용해서 미국을 공격하는 것.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태국의 슈퍼히어로 머큐리맨은 슈퍼히어로가 민족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조차 가뿐히 뛰어넘어버리는 아시아의 변종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치착맨>은 다른 슈퍼히어로에 비해 우연적으로 탄생하였다. 게다가 사고로 치착맨이 된 하이리에게 슈퍼히어로는 재앙일 뿐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변화를 털어놓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약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교수의 음모가 드러나고 치착맨은 자신의 몸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슈퍼히어로의 잠재성을 깨닫게 된다. 아시아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은 촌스럽다. 이들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종횡무진하지도 않고, 현란한 카메라 테크닉이나 감각적인 편집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할리우드식 쾌감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시아 슈퍼히어로들은 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감춰진 욕망, 갈등, 고민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즉, 아시아 각국의 역사성과 문화에서 파생되는 섬세한 면면과 각 문화 사이의 작동을 관찰할 수 있는 점에서 아시아 슈퍼히어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바디 오브 라이즈> 인터뷰 - 리들리 스콧,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外

“모호한 도덕성에 둘러싸인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원작자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각본가 윌리엄 모나한, 프로듀서 도널드 드 라인 인터뷰 -어떻게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원래 리들리 스콧과는 ‘The Invisible World’라는 기존의 시나리오 각색건으로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을 취재 중인 여성 저널리스트가 현지의 이라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짐으로 둘 다 위험에 처해지는 내용인데 그 프로젝트 때문에 여기 도널드나 윌리엄 모두가 본격적으로 모이게 되었다. =윌리엄 모나한: ‘The Invisible World’로 이른바 데이비드가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셈이었으니까. (데이비드를 보고 씩 웃는다.) 그러다가 리들리가 데이비드의 <바디 오브 라이즈> 원고를 건네주더라. 정말 뛰어난 첩보물이었다. 이런 작품을 놓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설이 처음으로 영화화된 셈인데 영화를 보니 어떤가.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흥분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작가로서 전달하고 싶어했던 주제인 CIA의 세계, 그 세계가 실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들이 어떤 도덕적 경계에 서 있는지 등 이른바 중동에서의 미국인이라는 그림이 영화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만족한다. -기자였던 경험이 스파이물을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내가 이해한 그 세계 속 인간들의 역학 관계가 늘 흥미로웠던 이유는 그 관계들이 내가 속한 저널리즘의 세계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리포터의 과제는 소식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그가 남들과 공유해서는 안 되는 정보를 빼내는 것이다. 때로는 그 정보 때문에 정보를 흘린 사람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온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비밀스런 교환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유사점은 현장에서 일하는 기자와 편집장과의 관계이다. 내가 특파원으로 일했을 때 나와 편집장의 관계는 바로 페리스와 호프만의 관계 그대로였다. 당시 편집장과 전화할 때마다 말 그대로 돌아버리기 직전까지 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놈의 편집장은 도대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이라크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두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정치적인 영화이다. 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은 어떤가. =윌리엄 모나한: 정치적인 영화라고 말할 때 대개는 어떤 특별한 의제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사실상 CIA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좀더 현실에 가깝게 보여주는 데 있다는데…. =도널드 드 라인: (윌리엄의 말을 끊으며 프로듀서답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좋은 스파이영화다! =윌리엄 모나한: 호프만은 극중에서 레오가 지적하듯이 스스로를 ‘미국’으로 보고 있다. 그의 모든 대사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깔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아니다. 실상 그는 미국인의 어떤 타입의 결함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실책을 범하곤 하는 존재다. (말을 더 이으려고 하는데…) =도널드 드 라인: 호프만의 뻔뻔하고, 막무가내인 면은 요르단의 정보 수장인 하니와 좋은 대비를 이룬다. 그들의 오랜 역사만큼 그들은 좀더 기다리고, 좀더 큰 그림을 보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운영한다. 하니는 과일이 제대로 익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페리스는 그 둘 사이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고. 이 영화에는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따로 없다. 어느 누구도 선과 악의 구분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있다. =윌리엄 모나한: (여전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렇다. 정치성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약간 답답해하다가) 예술가로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그런 정치성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할 뿐이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이 영화는 스파이 스릴러물이다. 스파이 스릴러 영화의 매력은 그를 둘러싼 시대를 미묘하게 포착해낸다는 점에 있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이나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그려진 냉전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모든 것이 회색빛이고 모호해진 도덕적 경계라는 주제가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도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와 같이 여전히 모호한 도덕성에 둘러 싸인 지금 이 시대가 전해졌음 한다. “시간은 돈이며 느려지면 배우들이 지친다” 리들리 스콧 감독 인터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러셀 크로를 캐스팅한 이유는. =그야 그들이 현재 가장 뛰어난 할리우드 배우들이니까. 처음 책을 읽어내려가는데 ‘이건 레오군… 맞아, 이건 레오야…. 이건 러셀이 맡으면 되겠군’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캐스팅 리스트를 펼쳐두고 누굴 선택할까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캐스팅은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누가 적임자일지가 바로 보인다. -러셀 크로는 어떤 배우인가. =러셀은 언제나 왜 자기여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래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인공인 페리스가 아니면서도 그와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고, 그렇기에 좋은 캐릭터 연구가 되지 않을까라고 대답해줬다. 그러면서 슬슬 이제까지 그가 연기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인사이더>의 제프리 와이갠드라든가, 며칠 전에 만났던 사람이 CIA쪽에서 일했던 모양인데 몸무게가 꽤 나가더라, 꽤 뚱뚱하고 땀을 많이 흘리더라며 지나가듯 덧붙여준다. 그때부터 러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러셀 크로는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신과는 유난히 호흡이 맞는 것 같다. =러셀은 말을 돌려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무척 똑똑한 배우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나는 영국인이고 그는 호주인이라 건조하고, 다소 차가운 유머감각을 공유해서 둘이 잘 맞는 것 같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는 예산에 맞추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대개 벅찬 규모들이다 보니 예산 범위에서 계획했던 그림들을 잡아내기 위해 멀티 카메라 시스템을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는 11대의 카메라와 카메라팀을 돌렸다. 이렇게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면, 직감적으로 순간순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멈칫하는 순간, 모든 게 다 느려져버린다. 그러면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 시간은 곧 돈이지 않나. 또 하나, 배우들의 연기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서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한쪽만 카메라에 잡히면 상대배우가 스스로 리허설도 할 겸 프레임 밖에서 대사를 쳐주고 싶어하는데, 왜 그렇게 배우를 낭비하나. 같은 대사를 반복하면 배우란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느려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나는 같은 부류다” 러셀 크로 인터뷰 -50파운드를 어떻게 찌웠나. 맥도널드만 먹었나. =뻔하지 않나. 그냥 한다. 대단한 게 아니다. 캐릭터에 맞다고 생각했고, 그게 리들리가 보는 캐릭터의 모습이기에 했다. 캐릭터가 좀더 현실감있게 다가와야 하니까. -이런 정치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할 것 같은가. =이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공 여부는 영화의 완성도에 따를 뿐이다. 리들리가 어떤 정치적인 의제를 전달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전 세계를 현실에 가장 근접하게 묘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 세계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세계 속에서의 속고 속이고 유혹하며,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리들리 스콧 감독과 몇번이나 함께했는데 그와 작업하는 것은 어떤가. =그는 내게 딱 맞는 존재다. 하루의 일이 끝났을 때 무엇인가 이루어냈다, 제대로 일을 했다라는 그 기분이 좋다. 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로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스쳐지나가는 와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 번째 신에서 문이 아니라 창문이면 어때?”라고 하면, “아, 그게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각자 또 가던 길을 가는 식이다. 우리는 현장에서의 이런 직관적인 판단을 제대로 살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 나중에 영화에 그대로 그 느낌이 드러난다. 우리가 빠르게 일하는 방식이 그런 느낌을 살리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리들리는 오래전부터 2대의 카메라로 20주 동안 일하는 것보다 5대의 카메라로 10주 동안 일하는 것을 선택해왔다. 그게 나는 참 좋다. 왜냐하면, 내가 연기할 때, 나와 내 상대편을 향하는 카메라가 따로 있다는 소리니까. 클로즈업 숏이나 와이드 숏, 내가 하는 세세한 리액션 숏들이 그 한번의 테이크에 다 담기고 있다는 소리니까. 리들리의 연출 방식은 누구보다도 즉각적이다. 촬영장에서 그는 5팀의 5개의 카메라를 잡아내고 있는 5개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그 앞에서 그는 마치 자신의 캔버스 앞에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처럼 어느 공간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필요한 요소를 바로 집어넣어 완성시킬 수 있는 감독이다. 감독 의자에 기대 앉아서 모니터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이미 리들리의 머릿속에서는 영화가 편집되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그는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내게 맞다는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부류(Bloke)이다.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에 흥미를 느낀다”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 인터뷰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에 특별히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니까. <블러드 다이아몬드>도 그런 맥락에서 한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중요한 사안이고 흥미로운 주제라고해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나아가서 훌륭한,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면 그건 정말 철저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리들리 스콧과 러셀 크로의 관계는 이른바 당신과 마틴 스코시즈와의 관계와 유사할 것 같은데.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업을 같이 하다 보면 얼마나 서로를 편하게 느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말 서로에게 얼마나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느냐라고 할까. 첫 리딩 때였나, 그 둘과 시나리오를 읽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둘이 “그 세신은 그냥 한 장소로 묶어버리는 게 어때?” “어, 그게 좋겠다”라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두신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서로의 직감에 의존하는 두 사람이라 처음에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이 작품을 하면서 CIA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나. =당연히. 그들이 처한 상황의 위험도나 긴박성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 세계의 특성상 접근할 수 있는 자료에 한계가 있어서 기본적으로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소설이나 그의 경험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몇몇 시퀀스를 위해 전직 CIA 요원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얼마나 그 세계가 복잡한지, 우리가 다른 나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불경기 덕? 다양성의 힘!

믿거나 말거나, <텔레그래프>가 전하는 2008년 여름 영국 극장가 호황의 원인은 “경기 침체”다. 불황이어도 기분전환을 위한 재밋거리는 찾게 마련이고, 그중 저렴한 영화관람이 혜택을 봤다는 뜻이다. 영국영화배급자연합(FDA)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가 경제 난항을 겪은 지난 3개월 동안, 영국 박스오피스 수입은 1969년 이래로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2008년 6월부터 8월까지 영국 극장가는 5360만명의 입장객을 맞이했고, 총 5억9890만달러의 수입을 거뒀다. 이는 2007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입장객은 5%, 극장수입은 14% 상승한 수치다. FDA 대표인 마크 베이티는 영화는 경기변동과 반비례하는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라며, “저녁에 3시간 외출한다면 술집이나 경기장보다 극장에 가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날씨마저 우중충한 영국의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영화들이 <아이언맨>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맘마미아!> 등으로 추려지는 것 역시 같은 견지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팍팍한 현실의 편린을 돈내고 들어간 극장에서는 잠시 잊고 싶었을 거란 이야기다. 하지만, 40년 만에 날아든 낭보의 일등공신은 다양한 장르로 채워졌던 여름 극장가 그 자체다. 지난 3개월 동안 극장가는 가족관객에게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액션 팬들에게는 <아이언맨>과 <핸콕>, 여성관객에게는 <맘마미아!>와 <섹스 앤 더 시티> 등 폭넓은 입맛을 만족시키는 가지각색의 영화들을 선보였다. 특히 <맘마미아!>는 개봉 12주차가 되도록 주간 낙폭이 14%에 불과해 장기흥행에 대한 예상을 적중시켰고, 역대 영국 개봉작 중 흥행순위 4위에 오르기도 했다. 축배를 들기에 이르지 않냐고? 모르는 소리다. 영국의 극장 관계자들은 2008년 남은 3개월 역시 장밋빛으로 내다본다. 액션블록버스터 <007 퀀텀 오브 솔러스>부터 <다시 찾은 브라이스헤드> <고스트 타운> <햄릿2> 등 영국 출신 배우들의 출연작들이 줄줄이 개봉대기 중이기 때문. 여기에 <체인질링> <바디 오브 라이즈>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 시상식을 겨냥한 유명 감독들의 신작들도 세모까지 극장의 관객몰이에 한몫할 전망이라 하반기 극장가가 여름의 기세를 몰아갈지 관심이 주목된다.

[가가와 데루유키] 배우가 되기 전에 진짜 히키코모리였다

10년차 히키코모리(집안에만 틀어박힌 은둔자)의 일상은 평화롭다. 텔레비전은 보지 않고 잡지를 읽는다. 식사는 테이블에서 하지 않고 서서 먹는다. 집 안은 남자 혼자 산다고 말하면 안 믿을 정도로 깨끗하게 잘 정리정돈되어 있다. 필요한 물건은 전화 한통이면 다 배달된다. 게다가 토요일마다 시켜 먹는 피자는 삶의 또 다른 낙. 그런 그 앞에 여자 피자배달원(아오이 유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히키코모리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11년 만에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주인공 히키코모리를 연기한 배우는 가가와 데루유키. 그는 최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유레루> <키사라기> <20세기 소년>에서 개성 넘치는 역할을 맡아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평소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좋아했다는 그는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오늘의 사건사고>)의 소개로 봉준호 감독을 처음 만나게 됐고, 감독의 신작 <도쿄!>에 참여하게 된 것. 서민적인 이미지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가 한국의 봉준호 감독을 만나 어떤 연기를 선보일까. 이번이 세 번째 한국 방문이라는 가가와 데루유키를 만났다. -(몸으로 보여주며) 당신의 전작들을 보면 ‘종종걸음’을 하는 장면이 많더라. 습관인가. =(웃음) 전부 다 연기다. 처음 캐릭터를 맡을 때 그 인물에 대해 잘 몰라도 ‘이 사람은 이렇게 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행동을 한 건데 비슷하다니 신기하다. -<도쿄!> 시나리오를 받고 캐릭터 구축을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달리는 모습’을 고민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초반에는 정적이지만 후반에는 역동적으로 변한다. 그때, 달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는 영화 속 히키코모리가 1~2년차가 아닌 10년차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과 함께 ‘10년차 히키코모리는 방도 깨끗하고, 오히려 더 일상적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인물이 히키코모리로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현장에서 감독과 이견이 생길 경우 어떤 식으로 조율했나. 그리고 어떤 장면에서 가장 많이 부딪혔나. =일단 나는 레벨이 높은 감독과 일을 할 때는 감독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 봉준호 감독과 작업할 때는 그로부터 연기 레슨을 받는 기분이었다. 가장 의견이 달랐던 부분은 히키코모리가 11년 만에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인물의 행동이 순간마다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봉준호 감독은 그냥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원했다. -영화 속 당신의 연기는 감정의 폭이 작다. 대신 근육, 눈 등 신체의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표현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나는 배우가 되기 전에 히키코모리였다. 물론 지금도 히키코모리처럼 산다. 정말 내성적이다. 그나마 배우가 되면서 몸으로 감정들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익히게 된 것이다. 40년 동안 지금까지 히키코모리로 살아왔던 경험이 이번 영화의 캐릭터에 축약된 것 같다. -이번 영화를 비롯한 전작의 당신의 모습을 보면 상대배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일본의 국민성인데, 오히려 쳐다보지 않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감독이 “상대배우를 똑바로 쳐다봐! 시선이 맞지 않잖아”라고 하지 않나. 한국에서는 시선처리 때문에 NG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일본 감독들도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남자배우들과 작업을 하다가 청춘스타 아오이 유우와 호흡을 맞췄다. 그녀와 함께 일을 해보니 어떻던가. ‘인간 가가와 데루유키’의 답변을 듣고 싶다. =(웃음) 감사했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고>(2001), <오늘의 사건사고>(2003))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근 일본영화의 흐름상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가와 데루유키와 아오이 유우의 조합이 이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일본 감독들은 아직 ‘나와 아오이 유우’식의 조합을 해내지 못했다. 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이런 조합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개인적으로 전작을 통틀어 <유레루>의 초반부 방문을 사이에 두고 오다기리 조와 대화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때 카메라는 빨래를 개는 당신의 뒷모습만 바라보는데, 당신은 대사만으로 두 사람의 심리, 인물의 캐릭터 등 모든 정보를 한번에 보여주더라. =당시 감독이 뒷모습으로만 보여주자고 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순간을 잘 포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장면을 찍기 전에 오다기리 조와 단둘이서 배우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는 ‘배우라는 직업이 뭐가 대단한가. 그냥 어른이 애들 놀이를 하는 거잖아. 그런데도 배우들은 잘난 척하고 다닌다. 이게 다 거짓이다. 우리도 거짓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대화를 그와 공유하면서 서로 믿음을 쌓았던 것이 그 장면이 나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20세기 소년> 3부를 촬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난 작품이 있다. <쓰루기다케>라는 제목으로 101년 전 ‘칼’(쓰루기) 모양의 산에 최초로 올랐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나와 아사노 다다노부가 주연을 맡았고, 다카쿠라 겐 감독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기무라 다이사쿠가 68살의 뒤늦은 나이에 감독으로 입봉한다. 2009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노희경-표민수-송혜교-현빈 <그들이 사는 세상> 드림팀 출격!

지난 20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KBS-2TV 새 월화미니시리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노희경 극본, 표민수 연출, 송혜교, 현빈 주연. 그 이름만 들어도 입이 딱 벌어지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드림팀이 드디어 출격의 신호탄을 터뜨린 것. <그들이 사는 세상>은 한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녀 PD 주준영(송혜교 분)과 정지오(현빈 분)를 중심으로 제작 현장에서 땀 흘리는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담고있는 드라마이다. 더불어 화려함 속에 인간애를 갈망하는, 단조로운 인간관계보다 더욱 복잡한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제작진이 설명하는 기획의도.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노희경 작가는 "그동안 내가 썼던 드라마와는 다르게 젊은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가족 드라마나 진지한 멜로는 많이 해봤는데 이렇게 신나고 즐거운 드라마는 처음인 것 같다"며 유쾌한 작품 분위기를 전했고, 방송국 PD 주준영 역할의 송혜교는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PD의 작품이기에 안할 이유가 없었다. 시놉시스만 받고 이미 결정했다"며 제작진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드러냈다. 현빈 역시 "좋은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선후배 동료배우가 있어 든든하다"며 동조했다. 또, 연출자인 표민수PD는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젠 연출자로 데뷔해도 될 정도"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들이 사는 세상>은 지난 21일 스페셜 방송을 시작으로 오는 27일부터 매주 월, 화요일 KBS-2TV를 통해 안방극장을 사로잡을 계획이다.

대니얼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계보 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영화 007 시리즈 21~22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영국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40)는 자신이 "본드 변천사에 보탬이 됐다"고 자평했다. 내달 5일 007 22편 '007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 개봉을 앞두고 있는 크레이그는 최근 여성지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영원히 본드 역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본드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여주는 계보에 내가 무언가를 추가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숀 코너리(78), 조지 레전비(69), 로저 무어(81), 티모시 달튼(62), 피어스 브로스넌(55)의 뒤를 이은 6대 본드 크레이그는 최초의 금발머리 본드로도 화제를 모았다. 2006년 007 21편 '007 카지노 로열'에서 본드 역을 처음 맡아 배우 생활의 황금기를 맞은 그는 올해 6월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촬영을 하다가 얼굴을 크게 다쳐 성형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배우에게 실수로 걷어차여 얼굴 상처에 여덟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면서 "의료진이 훌륭한 성형수술을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에는 역시 촬영에 따른 어깨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공식행사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등장하기도 했다. 크레이그는 M 역을 맡은 영국 중견배우 주디 덴치를 "영국 영화계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하며 극찬했다. 그는 "덴치에게는 선천적인 힘이 있다"며 "본드는 '이봐, 007, 너는 바보야'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M과 같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크레이그는 또 본드와 M 캐릭터를 미국 대선 후보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퍼레이드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버락 오바마 후보가 그의 말대로라면 적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맞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본드와 비슷하며, 존 매케인 후보는 M 캐릭터에 더 가까운 것 같다"고 분석했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마크 포스터 감독이 전편 '007 카지노 로얄'의 마틴 캠벨 감독으로부터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이번 22편의 아이디어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서 뽑은 것이 아니라 제작자인 마이클 윌슨이 구상한 내용을 토대로 폴 해기스, 닐 퍼비스, 로버트 웨이드가 각본을 맡았다. 새 본드걸로는 우크라이나 여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캐스팅됐다. 줄거리는 본드가 거대한 천연자원을 장악하려는 무자비한 사업가와 그의 비밀 첩보원인 본드걸의 음모에 맞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남아메리카 등지를 오가며 활약하는 내용. 007의 고향인 영국을 비롯한 영미권에서는 이번 영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BBC 방송의 연예전문기자 리조 음짐바는 "더 좋아졌지만 규모가 더 커지지는 않았다"고 평가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마크 모나한은 "포스터 감독과 작가들이 007의 전통적인 구성과 동떨어진 작품을 내놨을까 우려했지만 영화는 갑작스러운 놀라움을 여러 차례 안긴다'고 평했다. 더 타임스의 제임스 크리스토퍼도 "포스터 감독은 페이스 조절을 잘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대화와 캐릭터 구현이 미흡해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했으며 블룸버그통신은 "전편보다 많은 국가에서 촬영했고 추격신 같은 적절한 재료도 갖췄지만 훌륭한 이야기라는 마법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cherora@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전영객잔]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2008년 하반기 한국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으로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를 꼽는 추세다. 호평은 이어지며 이론(異論)은 찾아보기 힘들다. 몇몇 평자는 이 영화의 결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단서를 단 뒤 다시 가치의 복권을 위해 애쓰는 편이다. <미쓰 홍당무>는 사실 기발한 인물의 출현 자체보다는 인물과 그 역을 맡은 배우의 조화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렇지 않고 시나리오상에서 성립된 캐릭터만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엽기적인 그녀>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양미숙 정도의 캐릭터 설정은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만 앉으면 볼 수 있는 시트콤 드라마에서도 있어왔다. 간단하게 김병욱의 시트콤에 출연한 배우 박영규의 역할을 상기하면 된다(그는 양미숙에 버금가는 자뻑과 진상과 콤플렉스의 캐릭터이며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변덕이 죽끓고 화를 자주 내서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미쓰 홍당무>에 공감할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공효진이라는 본능적으로 뛰어난 배우가 양미숙이라는 기발한 인물에 놀랄 만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경미는 그 대신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 얼마간 깃들어 있던 자기의 중요한 무엇을 잃고 새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기이한 영화였다. 거기에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영화의 형식을 빌려 시도하고 있었다. 칼을 품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툭 치고 지나가서 내가 다친 것이라면 그건 어설프게 칼을 품고 있던 나의 잘못인가 나를 쳐서 다치게 한 그 누구의 잘못인가. <잘돼가? 무엇이든>의 꿈장면에서 제기되었던 화두다. 이 영화에서 이경미는 두 여성의 아이러니한 경쟁심과 연대감을 끌어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고 애썼다. 어떤 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영화적인 간절함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즉각적인 인상으로 말하자면 이경미의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에는 그 간절함을 지키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으며 어떻게든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구조를 진전시키는 데 더 급급하다. 간절함의 부재가 뭔가 영화 전체를 의미심장한 코미디가 아니라 시끌벅적한 단순 소동극으로 그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쓰 홍당무>의 공감대는 대략 세 가지 점에서 형성된다. 장르영화 안에서 여성들의 심리와 담화를 잘 풀어냈다는 점과 돌발적이고 유별난 캐릭터 양미숙이 있다는 점과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인물이 연합하여 폭발적인 웃음을 끌어내는 코미디라는 점이다. 이때 여성성의 문제는 따로 떼어 말할 수 있지만, 캐릭터는 코미디라는 범주 안에 있는 핵심이기 때문에 둘은 함께 말해져야 할 것이다. 그녀는 과연 여성성을 대변하는가 먼저 이 영화가 여성성의 무엇인가를 획기적으로 대변한다고 인식되는 건 무척 모호한 구석이 있다. 다른 어떤 분석에 앞서 이 영화의 서사를 생각해보면 된다. 고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던 양미숙은 좌천되어 중학교 영어 교사로 내려간다. 그녀가 학생에게도 선생에게도 인기가 없는 왕따이기 때문이다. 외양이 그다지 호감을 주는 편이 아닌데다 자기의 콤플렉스를 공격적이고 비꼬인 방식으로 내지르는 성격이다. 또 그만큼 위축됐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서종철을 좋아한다. 서종철은 양미숙의 고3 당시 선생이었다. 수학여행 때 반 아이들 모두가 양미숙을 따돌릴 때 오직 서 선생만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뒤로 양미숙은 서 선생을 좋아하게 됐고, 같은 학교로 부임한 다음에는 계속 그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서 선생은 관심이 없고 양미숙만 그렇다. 양미숙은 같은 러시아어과 선생이었던 이유리가 서 선생과 내연의 관계라는 걸 알게 되자 중학교에 다니는 서 선생의 당돌한 딸 서종희와 한팀이 돼서 둘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이것이 <미쓰 홍당무>의 대강의 스토리 라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영화에는 없는 황당한 가설을 제안해보자. 만약 양미숙이 일하는 학교 옆에 남학생들만 다니는 중·고등학교가 있다고 치자.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 양미석이 있다고 치자. 그는 왕따다. 학생도 선생도 모두 그를 꺼린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수학여행 때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 미모의 여자선생님이 그를 챙겨주었다. 그 뒤로 양미석은 그 미모의 선생님을 사랑하게 됐고 같은 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한 뒤에도 계속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선생은 동료 젊은 남자 선생과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양미석은 그 둘을 떼놓고 싶어하고, 마침 이 학교에 다니는 그 여선생의 아들과 함께 방해공작을 펼치기로 한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예를 들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쓰 홍당무>의 여성성을 설명하는데 왜 이런 황당한 치환이 필요하겠는가. 여성주인공을 남성주인공으로 치환하는 이 설명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무엇보다 이 가설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감성의 디테일 문제에 있을 것이다.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이 남성적 감성의 디테일로 결코 변환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그건 구조로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미쓰 홍당무>에 여성성에 대한 화두나 담화가 충분히 있다는 가정하에서만 그러하다. 그런데 <미쓰 홍당무>에 그와 같은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에 대한 탐구가 정말 있는가. 이 영화의 수다나 담화를 여성 심리의 전유물로 볼 수 있지만, 양미숙과 서종희 사이에 오가는 몇몇 대화란 특별할 게 없으며 그걸 여성성의 화두에 걸맞게 더 깊이 파내려가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양미숙과 서종희가 여성 짝패로서 어떤 여성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걸 남성 짝패로 바꾸어도 이 영화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음을 말하는 중이다. <미쓰 홍당무>는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과 그걸 보장할 만한 요소를 그다지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끝없이 반전을 거듭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때 이 영화는 감성의 디테일이 아니라 대사가 꼬이고 인물이 폭발하고 신이 서로 부딪치는 코미디 구조에 더 천착한다. <미쓰 홍당무>가 그 구조를 빌려 제기하는 문제라면 성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우리’와 ‘쟤들’이라는 이분 범주의 문제다. 이 문제는 다시 말해져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강력한 코미디라고 할 때 캐릭터가 핵심이자 요체인 건 분명하다. 양미숙이 중심이다. 그리고 양미숙이 주로 하는 짓은 알려진 것처럼 삽질이며 양미숙의 삽질이 양미숙의 캐릭터다. 양미숙은 히키코모리가 아니다. 히키코모리에 대한 역설이다. 누군가가 양미숙처럼 수세적일 만한 상황에 놓일 경우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버리는 대신 그걸 공격적으로 드러낸다면 얼마나 재미있게 보일까라는 상상이 이 영화의 애초 전략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양미숙은 그 상상으로 태어난 인물이며 당연히 그에 따른 실천을 한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는 버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해”라거나, “종희야 너 착하게 살지 마라. 그럼 사람들이 너한테 못되게 군다. 못되게 굴면 착하게 군다”라고 일장 연설을 한다. 또는 양미숙의 휴대폰에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쓰여 있다. 무엇보다 그 제어되지 않는 비뚤어짐으로 무한 삽질을 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양미숙의 흥미로운 캐릭터다. 억지로 들어와서 노는 언어의 유희들 그런데 <미쓰 홍당무>가 캐릭터 영화로서 성공적이고, 그 캐릭터가 바로 양미숙이라고 할 때 잘 지적되지 않는 이 영화의 매우 중요한 전개 방식이 한 가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미쓰 홍당무>의 구조적 전개를 말할 때 거의 모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미숙만 삽질하는 게 아니고 등장인물 전부 삽질한다. 그러니까 그 삽질의 정체가 무엇인가 묻는 건 당연하다. 삽질은 착각하는 상황, 착란으로 생기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은어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영화의 모든 코미디의 동력을 끌어가는 것이 바로 이 착각과 착란이라는 점이다. 착각과 착란이 <미쓰 홍당무>의 코미디를 만드는 기술적인 모든 것이다. 무수히 많은 예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보자. 우선 청각적인 착각 기호. 첫 장면에서 우리는 양미숙이 분명 정신 상담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피부과 의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중이다. 또는 시각적 착각 기호. 우선 양미숙이 지금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는 실제로 양미숙이 땅을 파고 있는 장면으로 시각화한다. 혹은 영화에서 양미숙과 서종희가 힘을 합쳐 이유리를 놀려먹을 때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주로 메신저와 전화 문자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각적 도구를 통해 이들은 잘못된 정보와 기호를 이유리에게 전달하고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또는 음성적 착각 기호도 있다. 서종휘는 이유리를 협박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데 그때 이 아이의 목소리는 음성 변조되어 있다. 이런저런 것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하게 웃음의 코드로 유용하게 쓰이는 건 라이터의 러시아 말인 ‘좌지깔까’다. 양미숙과 서종희는 마치 서종철이 러시아어로 라이터(좌지깔까)라고 말해달라고 한 것처럼 이유리를 속인다. 극장에서 관객이 가장 많이 웃는 지점이다. 누가 봐도 “당신은 나의 라이터” 운운하는 이 부분은 좀 억지스럽다. 이 영화는 언어의 유희에 남다른 재능을 갖는데 이 순간만큼은 유치하게도 기어코 어울리지 않는 낱말을 가져온 것이 이상하다. 그건 라이터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무리한 흐름을 인정하면서라도 좌지깔까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뭔가 착각과 착란을 위해 억지로 들어와 있는 것들이 있다. 사실 착각과 착란은 양미숙의 모든 것이다. 양미숙은 실은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제제제작년 고깃집에서의 회식 뒤에 티코에서 있었던 일” 운운하며 혼자 서종철과의 관계를 착각하고 있다. 그때 서종철 선생은 술에 취했고 어쩌다 좁은 티코에서 잠깐 손이 양미숙의 귓불을 스친 것뿐이지만 양미숙은 그게 서로의 사랑의 밀어였던 것처럼 진심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건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심리적 착각 기호인 셈이다. 그리고 양미숙과 서종희는 공연장에서 아이들이 던지는 밀가루와 쓰레기 등을 애써 자기들을 위한 환호로 착각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모든 착각의 기호를 날려버리는 것은 어학실 장면이다. <미쓰 홍당무>는 이 장면에서만 거의 20분을 쏟으며, 그동안 이리저리 꼬아놓았던 착각과 착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으로 설정한다. 감독 이경미는 <미쓰 홍당무>에 관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찰리 채플린과 어떤 영향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녀가 어떤 의미에서 찰리 채플린을 거론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면 닿는 점이 없진 않다. 채플린이 바로 착각과 착란의 대가다. 예컨대 그의 어느 영화에서 찰리는 아내에게 버림받는다. 카메라는 그때 찰리의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가득 차 우는 것 같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뒤돌아섰을 때 진실이 밝혀진다. 찰리는 그냥 칵테일을 흔들고 있을 뿐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예다. 채플린은 이 문제를 더 중요한 쪽으로 끌고 간다. <시티 라이트>에서 장님 소녀가 갑부 찰리와 떠돌이 찰리를 소리의 착각 기호로 오인하고 또 구별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보다 <위대한 독재자>에서 유대인 이발사 찰리와 히틀러를 빗댄 독재자 찰리를 사람들은 그 콧수염 하나 때문에 착각했다. 들뢰즈는 “작은 유대인 이발사와 독재자의 차이는 두 개의 콧수염만큼이나 작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엄청난 거리를 지닌 두 가지 상황이 생겨나는데 그 둘은 희생자와 도살자의 차이만큼이나 서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 차이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경미가 찰리 채플린의 이런 면모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지는 않다.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이경미가 거론하지 않았지만 <미쓰 홍당무>의 구조와 유사한 건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박찬욱의 영화다. 한국영화에서 착각과 착란으로 영화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대가는 박찬욱이다. 어딘지 모르게 <미쓰 홍당무>를 보고 제작자 박찬욱의 영향력을 말하는 게 다들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걸 말하지 않는 게 더 상투적이다(박찬욱은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로도 크레딧에 올라 있다). 박찬욱은 고래와 진달래를 같다고 생각할 때 영화 속 세계가 재미있어진다고 본다. 그것만으로 테마를 꾸려 만든 것이 바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아니었나. 그 밖에도 유사성은 더 있다. <미쓰 홍당무>의 초반부 인물 소개방식과 특히 ‘대단원의 무대화’라는 개념이 그렇다. 둘 중에서도 대단원의 무대로서 쓰이는 어학실신이 특히 그렇다. 이 영화는 어느 모로 보나 박찬욱적인 요소들을 고스란히 가져왔으며, 이때 <미쓰 홍당무>는 박찬욱 영화에 대한 충실한 습작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착각과 착란을 따라가다 마주친 판단의 유보’라는 박찬욱의 엔딩방식을 이경미는 거스르지 않고 있다. 어학실에서 양미숙은“사모님 2번 새 출발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제 서종철에게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데, 그렇다면 이때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일까? “괜찮아 괜찮아 착각해도 괜찮아" <미쓰 홍당무>가 양미숙의 아픔을 치유한 사이코드라마로 이해되고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양미숙이 치유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미궁에 남겨지는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다. 이 문제는 만듦새와 상관없이 영화 스스로 짜낸 치유의 구조가 마침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녀 양미숙에 관해 알고 있는 사항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당신의 착각이고 착란이다. 우리는 정말 양미숙을 이해했는가? 이경미가 자기의 주인공 양미숙을 소홀히 다뤘다는 뜻이 아니다. 이경미가 양미숙이 처한 상황인 왕따 현상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 영화가 양미숙을 돌보지 않았다는 그런 윤리적 비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윤리적 비판을 지금 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이분의 선택을 강요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와 쟤들의 명확한 구분이 있다. 우리는 서종희를 따돌린 다음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리본을 목에 매고 바보 같은 춤을 추는 학생들처럼 쟤들 중 한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양미숙과 서종희가 우리의 모습 일부인가. 아니 그건 판타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해몽의 삽질이다. 양미숙과 서종희에 공감할 만한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결코 웃지 못한다. 그들이 못 웃기 때문에 우리가 웃는다. 우리가 이때 실컷 웃고 나서도 할 수 있는 비판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이경미 당신은 왕따를 윤리적으로 돌보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 소재로 우리를 웃겼기 때문이지, 당신은 양미숙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그건 너무 비윤리적이야, 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비판이 비평적 클리셰이며 뻔한 불평이라고 본다(물론 이 비평적 클리셰조차 지금으로서는 거의 아무도 제기하지 않지만…). 왜냐하면 양미숙을 접할 때의 웃음은 재난영화와 공포영화의 괴물을 볼 때의 심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저 괴물이 나의 안방을 넘어 나의 신체를 뚫고 들어오지는 못하리라. 저 찰거머리 같은 인간이 나의 동료, 나의 스토커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사악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뻔한 불평이다. 우리는 장르영화 속 괴물을 보고 나서 저 괴물을 저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며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의 핵심은 그러므로 이경미가 왕따를 우습게 그린 것이 아니다. 충분히 상상적인 지평 내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그걸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경미가 마침내 우리를 향해 너희들은 끝까지 이 왕따를 잘 모를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양미숙은 서종희를 데리고 피부과 의사 박찬욱을 찾아간다. 그를 찾아가 “난 네가 참 마음에 든다” 고 말한다. 서종희의 엄마 아빠, 그러니까 서종철과 성은교가 그 말 한마디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는 걸 양미숙은 들어 알고 있다. 양미숙은 지금 의사 박찬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중이다. 의사 박찬욱이 그걸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미숙은 그가 그걸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다. 자기의 심정을 당당하게 고백하면 된다. 물론 이제 양미숙은 자신있게 말한 다음 퇴짜를 맞을 수도 있다. 의사 박찬욱의 표정을 보명 백발백중 퇴짜를 놓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양미숙은 이제 그래 알았다며 뒤돌아 나올 것인가. 이 장면의 표면적인 의미는 양미숙이 이제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바라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양미숙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영화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내게는 양미숙이 박찬욱을 찾아낸 다음 거기서 자기의 할 말을 하고 그냥 멈추는 것으로 짜여진 이 영화적 설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 때 마지막 웃음을 바라는 이경미의 바람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삽질의 이유가 아니라 삽질 자체가 중요한 영화입니다, 라고 끝까지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름 아니라 양미숙의 마지막 삽질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건 삽질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 고백이라고? 아니 그렇지 않다. 양미숙은 몰라도 우리는 의사 박찬욱이 그녀를 피해 도망갔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에게는 사랑고백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녀의 삽질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 담긴 많은 행위를 대표하는 환유로 보인다. 서종희라는 친구가 생겼고 새 출발을 한다는 뜻은 표면적으로만 중요할 뿐이다. 이 영화의 욕망은 어쩌다 슬프게 삽질하게 된 양미숙이 아니라 끝까지 귀엽게 삽질하는 양미숙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은 삽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혼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서종철을 쫓아다닌 것에도, 혹은 그 밖의 모든 행위에도 정말 이유가 있기는 했던 걸까? 인물 양미숙에게 이유가 있었다면 감독 이경미에게도 이유가 있었을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설명한 양미숙에 관한 모든 것에 딱히 다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 양미숙은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 끝까지 미지의 인물로 남는다. 다만 이런 메아리는 남는다. 괜찮아 괜찮아 홍당무지만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삽질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착각해도 괜찮아. 오로지 이게 이 영화의 전갈이다. 나는 이 점이 허망하다. 양미숙이 고아였고, 왕따였고, 가난했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판단이 유보되고 무효화될 때 그동안의 삽질의 우스꽝스러움은 원인을 상실하고 그 치유성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그동안 놀림을 받은 건 양미숙이 아니라 삽질의 이유를 모르고, 삽질을 위한 삽질(농담을 위한 농담)을 하는 양미숙을 보며 시간을 허비한 우리가 아닌가. 양미숙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한 우리가 왕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게 이 영화의 허망함이다. 한편으로는 비하하면서(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을 감내하면서까지),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윤리적이려고 애쓰면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 이 영화를 따라왔지만, 만약 비하한 것도 아니고 이해한 것도 아닌 채로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판단을 잃고 말았다면, 우리의 그 웃음은 시트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채널을 돌리는 그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2시간짜리 시트콤을 극장에 앉아서 보고 환호를 보내야 하는가. 이상하게도 올해 한국영화가 발견한 귀중한 신예라고 하는 두 남녀 감독 <추격자>의 나홍진과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유사한 주인공에 대한 매혹을 갖고 있다. 둘 모두 주인공이 설명되지 않는 괴인이어야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나홍진과 이경미는 둘 다 콤플렉스 덩어리 인물을 내세운 다음 그 원인을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 행동만을 거듭 보여준 뒤, 그 인물로부터 우리를 차단하고 판단을 유폐한다. 즉, 장르적 규칙성 안에서 어떻게 그걸 두려움(<추격자>) 또는 웃음(<미쓰 홍당무>)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의 기술적 문제에만 오로지 집중한다. 그러므로 이 때 더 시급한 문제는 윤리의 공란이 아니라 그걸 동반하고 찾아오는 형식의 무기력이다. 이 무기력한 웃음의 상영시간을 즐긴 다음 환호하는 건 그래서 아무래도 억울하다. 이경미는 양미숙과 같은 편을 먹고 ‘우리’라고 정한 다음, 끝까지 영화를 보는 우리는 ‘쟤들’로 남겨둔다.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양미숙, 넌 누구냐.